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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발디에서 넘어옴
이탈리아 통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Giuseppe Garibaldi
본명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
(Giuseppe Maria Garibaldi)
출생
1807년 7월 4일
사망
1882년 6월 2일
국적
프랑스 제국(1807년 ~ 1814년)[A]
사르데냐 왕국(1814년 ~ 1861년)
이탈리아 왕국(1861년 ~ 1882년)
직업
군인, 정치인, 혁명가
활동 시기
19세기
주요 활동
소속 정당
청년 이탈리아당(1831년 ~ 1848년)
이탈리아 국민협회(1848년 ~ 1853년)
행동당(1853년 ~ 1867년)
역사적 좌파(1867년 ~ 1877년)
역사적 극좌파(1877년 ~ 1882년)[4]
주요 전투
시칠리아 원정, 나폴리 해방
사상
종교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남아메리카 망명과 혁명 전쟁2.3. 유럽 귀환과 1848년 혁명2.4. 로마 공화국 방위전2.5. 재망명2.6.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복귀2.7. 시칠리아 원정과 천인의 원정2.8.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의 만남과 통일의 완성2.9. 통일 이후의 정치 활동과 갈등2.10. 말년과 사망
3. 사상과 이념
3.1. 민족주의관과 공화주의
4. 군사적 전술5. 관계
5.1.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과의 관계5.2. 동시대 인물들과의 관계5.3. 정치조직·결사와의 관계
6. 이탈리아 통일 담론에서의 위치7. 대중적 이미지와 상징성8. 평가9. 여담

1. 개요[편집]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한 혁명가이자 군사 지도자로, 대중적 영웅이라는 이미지와 급진적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전쟁과 무장 봉기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민병대와 자원병을 조직·지휘하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가리발디는 귀족 중심의 전통 군대와는 다른, 민중 참여형 전쟁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이름은 곧바로 붉은 셔츠를 입은 자원병 집단과 결부되며, 이는 이후 이탈리아 내셔널리즘 운동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가리발디는 1807년 프랑스 제1제국 니스(Nice)에서 태어났다.
니스는 당시에도 프랑스령이었고 오늘날에도 프랑스 영토이긴 하지만, 사보이아 공국사르데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오래되어 이탈리아계 주민이 다수였고, 가리발디의 집안 역시 본래 사르데냐 왕국의 신민이었던 만큼 가리발디는 비록 프랑스 지배하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가리발디가 7살이 되던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며 니스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반환되어 다시 사르데냐의 도시 니차(Nizza)가 되었고, 따라서 가리발디 역시 자연스럽게 사르데냐 국적을 갖고 성장하게 되었다.

니스는 지중해에 접한 항구도시이기도 해서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가리발디의 부친 또한 소규모 상선을 운영하던 선주로서 해운업에 종사했고, 이에 따라 가리발디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항해술과 선원 생활에 익숙해졌다. 정규 교육은 제한적이었으나, 바다를 통해 접한 다양한 지역과 사람들은 그에게 강한 자유의식과 이동성을 심어주었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선원으로서 여러 항로를 경험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민족 자결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항해 중 접한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담론은 이후 그의 정치적 방향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 가리발디는 단순한 생계형 선원을 넘어, 자신을 억압하는 정치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기 시작했다.

1830년대 초반 그는 점차 비밀결사와 접촉하게 되었고, 주세페 마치니가 주도한 청년 이탈리아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는 단순한 사상적 동조를 넘어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그는 반체제 활동 혐의로 체포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리발디는 조국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공동의 자유와 책임을 공유하는 민중의 집합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사르데냐 왕국 당국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선택했고, 이는 그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향한 결정은 일시적인 도피가 아니라,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될 혁명적 삶의 출발선이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남아메리카에서의 무장 투쟁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발휘되는 유연한 전술 감각과 민병대 조직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6]

2.2. 남아메리카 망명과 혁명 전쟁[편집]

망명길에 오른 가리발디는 1836년경 남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사회적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막 독립했거나 독립 전쟁이 진행 중인 상태였으며, 중앙 권력은 취약했고 각 지역에서는 군벌과 혁명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기존 국가 체제에 얽매이지 않은 무장 행동가에게 활동의 여지를 제공했고, 가리발디 역시 이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할 무대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항해와 상선 근무를 병행했으나, 곧 무장 전투 직접 참여하며 혁명가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깊이 관여한 전쟁은 브라질 남부 지역에서 벌어진 파라포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중앙 정부에 반발한 지방 세력이 독립을 시도하며 벌어진 무력 충돌로, 정규군과 민병대, 용병이 뒤섞인 복합적인 전쟁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가리발디는 이 과정에서 소규모 해상 전투와 기습 작전에 참여하며 전술적 감각을 빠르게 연마했다. 특히 제한된 병력과 열악한 장비 속에서도 민병대를 조직하고 사기를 유지하는 능력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전통적인 군대식 규율보다는 개인의 자발성과 충성심에 기반한 지휘 방식을 선호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군사 활동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된다.

이후 그는 우루과이 내전에도 참여하면서 국제적 혁명가로서의 명성을 점차 쌓아갔다. 우루과이에서는 공화파 진영에 가담해 외국인 자원병을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훗날 상징이 되는 붉은 셔츠 복장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붉은 셔츠는 원래 노동자용 작업복에 불과했으나, 실용성과 식별성을 동시에 갖춘 복장으로 전투 현장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단순한 군복을 넘어, 억압에 맞서 싸우는 민중 무장 투쟁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가리발디는 이러한 상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며 병사들의 결속을 강화했고, 개인적 카리스마와 결합된 상징성은 그의 지도력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남아메리카에서의 수년간의 전쟁 경험은 그에게 단순한 군사 기술 이상의 것을 제공했다. 그는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인물들을 통솔하면서 언어, 문화,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대의 가능성을 체득했다. 동시에 무장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상실할 경우 쉽게 고립될 수 있다는 한계 역시 직접 경험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무력 행동과 정치적 타협을 병행하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망명 시기의 가리발디는 아직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에 축적된 경험과 명성은 그를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닌 실전형 혁명가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7]

2.3. 유럽 귀환과 1848년 혁명[편집]

남아메리카에서 오랜 망명 생활과 전쟁 경험을 쌓은 가리발디는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적 격변 속에서 다시 고향 대륙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시기 유럽은 자유주의내셔널리즘이 급속히 확산되며 기존 왕정 체제에 대한 도전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북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나자, 가리발디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조국의 해방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의 귀환은 단순한 개인적 복귀가 아니라, 국제적 혁명가가 이탈리아 민족 운동의 전면에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사르데냐 왕국 정부에 협력을 제의했으나, 정규군 지휘부는 망명 경력이 있는 급진적 인물을 경계했다. 이에 가리발디는 기존 군 체계에 편입되기보다는 자원병을 중심으로 한 독립적인 무장 부대를 조직하는 길을 택했다. 이 부대는 정규군에 비해 규모와 장비 면에서 열세였으나, 기동성과 전투 의지 면에서는 강점을 보였다. 그는 알프스 산악 지대를 무대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한 소규모 교전과 기습을 반복하며, 정면 대결보다는 소모전을 통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방식은 남아메리카에서 체득한 전술 경험이 유럽 전장에 적용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1848년 혁명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다양한 정치적 목표를 가진 세력이 동시에 움직인 복합적 운동이었다. 공화정을 지향하는 급진주의 세력,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 세력, 그리고 지역적 자치를 추구하는 집단들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드러냈다. 가리발디는 개인적으로 공화주의 성향이 강했으나, 혁명 전체의 성공을 위해 특정 이념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실질적 군사 행동에 집중했다. 그는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연설과 행동을 통해 자원병을 모았고, 정치적 수사보다는 전장에서의 성과로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은 점차 신문과 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며, 민중적 영웅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은 내부 분열과 열강의 개입으로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사르데냐 왕국군의 패배와 혁명 정부의 붕괴가 이어지면서, 가리발디가 이끈 부대 역시 전략적 후퇴를 강요받게 된다. 그는 수적 열세와 보급 부족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을 시도했으나, 혁명 전체의 흐름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 시기의 투쟁은 이탈리아 통일을 즉각적으로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가리발디에게는 결정적인 정치적·군사적 자산을 남겼다. 그는 이 과정에서 민중 동원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체험했고, 향후 더 조직적이고 현실적인 통일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8]

2.4. 로마 공화국 방위전[편집]

1849년 초,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서 로마에서는 교황 권력에 맞선 공화정 수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고, 이는 곧 로마 공화국의 선포로 이어졌다. 교황의 세속 권력을 부정하고 민중 주권을 선언한 이 체제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가리발디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로마로 향했으며, 자신이 지휘하는 자원병 부대를 이끌고 공화국 방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 시기의 그는 단순한 야전 지휘관을 넘어, 공화국 존속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로마 공화국은 내부적으로는 정치 체제 정비와 민중 동원을 추진했으나, 외부적으로는 유럽 열강의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교황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스 군대가 로마로 진군하면서, 공화국은 압도적인 군사적 위협에 놓이게 된다. 가리발디는 정규군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시민과 자원병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고, 이는 그의 전술적 창의성과 지도력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도시 방어에 적합한 소규모 부대 운용과 신속한 기동을 중시했으며, 전통적인 성곽 방어보다는 적극적인 역습과 지연 전술을 병행했다.

전투 과정에서 가리발디는 병사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며 강한 신뢰를 얻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 후방에 머무르기보다는 최전선에 나서 전투를 독려했고, 이러한 행동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는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으며, 무분별한 보복이나 약탈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는 단기적 군사 효율성보다는 공화국이 지향하는 도덕적 정당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단순한 무장 혁명가가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인식하는 군사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지속적인 증원과 포격 앞에서 로마 공화국의 방어는 점차 한계에 도달했다. 수적·물적 열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졌고, 도시 내부의 보급과 의료 상황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가리발디는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으나,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해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그의 퇴각은 패배로 끝났지만, 무질서한 붕괴가 아니라 조직적인 후퇴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이후 재기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로마 공화국은 결국 붕괴되었지만, 이 방위전은 이탈리아 민족 운동사에서 강렬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로마에서의 패배 이후 가리발디는 다시 추적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혁명 세력 전반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은 그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자산을 남겼다. 그는 민중 저항의 상징으로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했으며, 실패 속에서도 도덕적 정당성과 개인적 희생을 통해 지지를 확대했다. 로마 공화국 방위전은 단기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기억과 서사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능하게 된다.[9]

2.5. 재망명[편집]

로마 공화국 방위전 이후 주세페는 다시금 추적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의 활동 공간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프랑스군과 교황 세력, 그리고 보수 왕정들이 협력하는 상황에서 공화주의 혁명가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가리발디는 잔존 병력을 이끌고 북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탈출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추격과 소규모 교전을 겪었다. 이러한 도주 과정은 단순한 패주가 아니라, 조직을 보존하고 인적 자산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망명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혁명 인생에서 두 번째 대규모 전환점이 되었다.

재망명 시기의 가리발디는 이전과 달리 단순한 군사 행동가가 아니라, 정치적 현실을 깊이 성찰하는 인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남아메리카와 로마에서의 실패를 통해 무장 투쟁만으로는 지속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민중의 열정과 국제 정세, 국가 권력의 구조가 맞물리지 않을 경우 혁명은 쉽게 고립될 수 있다는 점을 체감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망명 생활 동안 그는 다양한 국가를 오가며 노동과 항해, 저술 활동을 병행했다. 이러한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으나, 사상적으로는 성숙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며 혁명과 전쟁의 의미를 정리했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자신을 단순한 무장 지도자가 아닌 사상적 인물로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그의 이름은 신문과 출판물을 통해 널리 알려지며, 이탈리아 내외에서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는 직접적인 무장 행동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그의 영향력이 유지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군주제에 대한 인식의 수정이었다. 가리발디는 여전히 공화정을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르데냐 왕국과 그 군주가 통일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개인적 신념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면서, 통일이라는 대의를 우선시하는 실용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의 협력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재망명과 정치적 성숙의 시기는 외형적으로는 침체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가리발디의 혁명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 단계였다. 그는 이 시기에 무력 행동과 정치 협상의 균형을 모색했고, 개인적 영웅주의를 넘어 집단적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그가 보여주는 절제된 결단과 전략적 선택의 배경이 된다.[10]

2.6.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복귀[편집]

1850년대 후반, 유럽의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본격화했고, 이는 곧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가리발디는 이 시기에 다시 이탈리아 땅으로 돌아와 공개적인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과거의 급진적 공화주의자로서가 아니라, 통일 전쟁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복귀였다. 그의 귀환은 민중에게 강한 상징성을 지녔으며, 통일 운동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집 효과를 가져왔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왕국 정부의 승인 아래 자원병 부대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는 과거와 달리 일정 부분 국가 권력과 협력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 부대는 정규군에 비해 규모와 장비 면에서 열세였으나, 민첩한 기동과 지형 활용 능력에서 강점을 보였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산악과 호수 지대를 중심으로 작전을 전개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교란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전술은 정면 승부보다는 압박과 소모를 통해 전선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었으며, 가리발디 특유의 비정규전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그는 민중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점령지에서는 약탈과 보복을 엄격히 금지하고, 지역 주민의 협조를 얻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자원병 중심 부대의 생존과 작전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판단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가리발디가 이끄는 부대가 단순한 무장 집단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대의를 실천하는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이는 그의 개인적 명성을 넘어, 자원병 체계 전체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전장 밖의 외교적 결정에 의해 급작스럽게 종결되었다. 사르데냐 왕국과 동맹국 간의 협상이 타결되면서, 군사적으로 아직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휴전이 선언되었다. 이는 가리발디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이상으로 삼았던 완전한 해방과는 거리가 있는 결과였다. 그는 이러한 외교적 타협을 비판했으나, 무장 행동을 통해 이를 뒤집기보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 이는 과거의 급진적 태도와 비교할 때 분명한 변화로, 그의 정치적 성숙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을 통해 가리발디는 다시금 이탈리아 민중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국가 권력과 협력하면서도 독자적인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는 드문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더욱 대담한 군사적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제2차 독립 전쟁은 통일을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가리발디에게는 결정적인 복귀의 무대였으며, 다음 단계인 남부 이탈리아로의 진격을 준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11]

2.7. 시칠리아 원정과 천인의 원정[편집]

1860년 초,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고, 가리발디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대담한 군사 행동을 감행하게 된다.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양시칠리아 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북부에서 진행되던 통일 움직임과는 별개의 세계처럼 남아 있었다. 가리발디는 남부를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통일이 완성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제한된 병력으로 시칠리아에 상륙하는 고위험 작전을 계획했다. 이 원정은 공식적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전쟁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상당 부분 개인적 결단과 자원병의 헌신에 의존한 모험적 시도였다.

그가 이끈 부대는 후대에 ‘천인의 원정’으로 불리게 된다. 실제 병력은 천 명 내외에 불과했으나, 이 상징적 명칭은 규모를 넘어선 정치적·심리적 효과를 낳았다. 가리발디는 상륙 직후부터 신속한 기동과 민중 선동을 병행하며 적의 대응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시칠리아 농민층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 불만과 반왕정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토지 문제와 자치 약속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부대는 단순한 외부 침입자가 아니라, 억압받던 민중의 해방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군사적으로 천인의 원정은 정면 승부보다는 심리전과 기동전에 가까웠다. 가리발디는 병력의 열세를 인정한 상태에서, 빠른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군이 자신의 규모를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다. 동시에 그는 점령지에서의 질서를 강조하며, 약탈과 폭력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는 단기적인 군사 성과뿐만 아니라, 남부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정치적 판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접근은 시칠리아 전역에서 자원병과 협력 세력이 급속히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칠리아를 장악한 이후, 가리발디는 본토로 진격해 나폴리에 입성했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군대는 내부 분열과 사기 저하로 인해 효과적인 저항을 조직하지 못했고, 가리발디는 비교적 적은 희생으로 남부의 주요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사실상 남부 이탈리아의 실질적 지배자로 부상했으며,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는 급진 세력과 군주제 통일을 추진하는 온건 세력 사이에서 중대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가리발디는 개인적 신념보다 통일의 완성을 우선시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하며, 남부 통일을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국가 체제로 편입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은 공화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이탈리아 통일의 현실적 완성을 가능하게 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천인의 원정은 소수의 결단과 민중의 지지가 결합될 경우 역사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사례로 남았으며, 가리발디를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적 영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12]

2.8.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의 만남과 통일의 완성[편집]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이후, 가리발디는 통일 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국면에 서게 된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민중적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급진 세력은 이를 계기로 공화정 수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 정세와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균형을 고려할 때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리발디는 자신의 인기가 통일을 촉진할 수도, 반대로 내전과 외세 개입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개인적 이상보다 국가 형성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1860년 가을,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 만남은 단순한 의전 행사가 아니라, 이탈리아 통일의 정통성을 확정짓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가리발디는 자신이 정복한 영토를 왕에게 넘기며, 남부 이탈리아를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통일 국가에 편입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왕을 이탈리아의 군주로 인정했고, 이는 통일 국가의 형성에 결정적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 이 장면은 이후 이탈리아 민족주의 서사에서 개인적 영웅주의가 국가 권력으로 귀결되는 순간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이 결정은 가리발디 개인에게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공화주의를 이상으로 삼아왔으며, 군주제에 대한 근본적 회의 역시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열된 이탈리아가 다시 외세의 개입을 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택했다. 이러한 태도는 일부 동지들로부터 배신으로 비판받았으나, 통일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중시한 현실적 판단으로 평가된다. 가리발디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며, 개인적 권력 추구와 거리를 두었다.

왕과의 만남 이후, 이탈리아 통일은 급속히 제도화되었다. 남부 지역은 국민 투표를 거쳐 통일 왕국에 편입되었고, 이는 외교적으로도 통일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가리발디는 통일 과정에서 공식 직책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용히 전면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행동은 그를 권력 지향적 정치인과 구별되는 인물로 만들었고, 민중적 존경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통일의 완성은 가리발디의 삶에서 절정이자 전환점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하나의 국가로 묶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후 정치적 중심에서는 점차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선택은 이탈리아 통일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완수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으로 평가된다. 왕과의 만남은 개인의 혁명적 열정이 국가 건설로 수렴되는 상징적 순간으로 남았으며, 가리발디의 역사적 위치를 확정짓는 사건이 되었다.[13]

2.9. 통일 이후의 정치 활동과 갈등[편집]

이탈리아 통일이 제도적으로 확정된 이후, 가리발디는 새로운 국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규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는 통일의 상징적 영웅으로서 압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실제 정치 권력의 중심에는 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통일 국가가 이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적 시선을 유지했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의 사회적 불평등과 행정적 혼란은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통일이 곧바로 민중의 삶을 개선하지는 못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가리발디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의회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제도 정치의 관행과 타협 구조에는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는 연설과 행동을 통해 공화주의적 가치와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점점 보수화되는 정치 환경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행사했다. 특히 중앙 정부가 남부 지역에 강압적 통치를 시행하는 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통일 이후에도 지역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여전히 급진적 인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정부와의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로마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통일 이후에도 로마는 교황령으로 남아 있었고, 이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미완의 과제로 인식되었다. 가리발디는 로마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편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무장 행동까지 불사하려 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와 외교적 고려로 인해 정부는 보다 신중한 접근을 택했고, 가리발디의 행동은 여러 차례 제지되거나 실패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포와 감금을 겪으며, 통일 국가 내부에서조차 문제적 인물로 취급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발디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 불만과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통일 국가를 방어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그의 행동이 단순한 반체제 활동이 아니라, 이탈리아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는 그를 통일 이후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 중 하나로 만들었다.

통일 이후의 시기는 가리발디의 명성이 쇠퇴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간적·정치적 한계가 드러난 시기였다. 그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시에 현실 정치에서는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었으며, 이러한 대비는 그의 역사적 이미지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의 갈등과 실패는 통일 이탈리아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고, 가리발디는 그 한가운데에서 비판적 양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14]

2.10. 말년과 사망[편집]

통일 이후 반복되는 정치적 좌절과 갈등 속에서 가리발디는 점차 공적인 무대에서 물러나 말년의 삶을 보내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강력한 도덕적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말년의 가리발디는 통일 국가가 직면한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타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꿈꾸었던 이탈리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체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혁명과 통일이 지닌 복합적 성격을 성찰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그는 주로 카프레라 섬에서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비교적 소박한 일상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생활은 이전의 전쟁과 정치 투쟁으로 점철된 삶과는 대조적이었으며, 육체적 피로와 건강 악화가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둔 속에서도 그는 완전히 침묵하지는 않았다. 편지와 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경험을 정리했고, 후대가 통일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발언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그를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사유하는 혁명가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자료로 활용된다.

말년에도 그는 국제 정세와 민족주의 운동에 깊은 관심을 유지했다. 다른 나라의 자유 운동과 혁명 소식을 접하며 연대의 뜻을 표하기도 했고, 억압받는 민족의 투쟁에 공감하는 발언을 남겼다. 이는 그의 민족주의가 배타적 국수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유럽 전역에서 그가 존경받는 인물로 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882년, 오랜 투병 끝에 가리발디는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이탈리아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광범위한 애도가 이어졌다. 그는 공식 권력의 정점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장례는 국가적 행사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었고, 이는 그가 생전에 선택했던 검소한 삶과는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가리발디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는 혁명과 전쟁, 타협과 성찰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복합적 삶은 이탈리아 통일 자체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말년과 사망은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단계였지만, 동시에 그의 영향력이 역사 속으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사후에도 영웅으로, 비판적 인물로, 그리고 통일의 상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게 된다.[15]

3. 사상과 이념[편집]

가리발디의 사상은 단일한 이념 체계로 정리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다. 그는 일반적으로 공화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교조적 이념가라기보다는 실천적 행동가에 가까웠다. 그의 공화주의는 추상적 정치 이론보다는 압제에 대한 거부와 민중 주권이라는 직관적 신념에 기반해 있었으며, 이는 남아메리카와 유럽에서의 실전 경험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국가의 형태보다 자유와 존엄을 우선시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군주제와의 협력이라는 현실적 선택으로 이어지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유지되었다.

가리발디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당시 기준으로 비교적 세속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교황의 세속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개인의 신앙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로마 문제에서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는 로마를 통일 국가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종교적 자유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이는 반교권주의와 종교 탄압을 동일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과 하층민의 고통에 공감했으나, 체계적인 사회 개혁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토지 문제와 불평등에 대한 발언을 통해 기존 질서가 민중에게 가혹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시칠리아 원정 당시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은 그를 이론가라기보다는, 행동을 통해 문제를 드러내는 인물로 규정하게 만든다.[16]

3.1. 민족주의관과 공화주의[편집]

가리발디의 민족주의관은 19세기 유럽에서 흔히 나타났던 배타적·혈통 중심적 민족 개념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에게 민족이란 단순히 언어, 혈통, 관습의 공통성으로 정의되는 집단이 아니라,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의지적 결합체에 가까웠다. 이러한 인식은 이탈리아라는 지리적·역사적 공간을 통일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 통일의 정당성을 왕조나 전통이 아니라 민중 주권에서 찾으려는 태도로 이어졌다.

가리발디는 민족의 성립 조건으로 ‘자유로운 시민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외세로부터의 독립만으로는 진정한 민족 국가가 완성되지 않으며, 내부적으로 전제 정치와 특권 체제가 존속하는 한 민족은 실질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머문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의 민족주의는 항상 공화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났으며, 군주제를 민족 통합의 임시 수단으로 인정하는 입장과는 거리를 두었다[17].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이론적 설계보다는 도덕적 신념에 가까웠다. 그는 공화국을 특정 헌법 구조나 권력 분립 체계로 정의하지 않았으며, 대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고 정치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직접 정당성을 얻는 상태를 공화국의 핵심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그는 현실 정치에서 타협적으로 군주제와 협력하는 세력과 지속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긴장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났으며, 가리발디 본인은 이를 원칙의 문제로 받아들였다[18].

가리발디의 민족주의는 또한 강한 대중 동원적 성격을 띠었다. 그는 민족을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 억압받는 농민·노동자·병사들의 구체적 삶과 연결 지어 서술했다. 민족 해방은 소수 엘리트의 외교나 조약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무장하고 행동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연설과 선언문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며, 민족을 ‘행동하는 공동체’로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국제적 맥락에서 볼 때, 그의 민족주의는 고립적이지 않았다. 가리발디는 각 민족의 자유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 해방될수록 다른 민족의 자유 가능성도 확대된다고 인식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지역의 공화주의 운동과 연대하는 것을 민족주의에 반하는 행위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민족주의가 종종 제국주의적 방향으로 변질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19].

공화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그의 정치 언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왕의 이탈리아’가 아닌 ‘이탈리아인의 이탈리아’를 반복적으로 언급했으며, 이는 국가의 소유 주체가 왕조가 아니라 시민 전체임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민중에게 직관적으로 이해되었고, 가리발디 개인을 민족적 상징으로 부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이는 제도 정치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효과도 가져와, 이후 정치 현실과의 괴리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가리발디의 민족주의관과 공화주의는 분리된 사상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 구조를 이룬다. 민족은 자유로운 시민 없이는 성립할 수 없고, 공화국은 민족 공동체의 자기결정 없이는 공허하다는 인식이 그의 사고 전반을 관통한다. 이러한 사상적 결합은 이탈리아 통일 담론 내부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형성하게 했으며, 이후 여러 정치 세력이 가리발디를 각자의 관점에 맞게 재해석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4. 군사적 전술[편집]

가리발디의 군사적 전술은 정규군 지휘관과 명확히 구별된다. 그는 제한된 병력과 열악한 장비를 전제로 작전을 구상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는 남아메리카와 이탈리아 전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그의 전술은 기동성과 기습, 그리고 적의 심리를 교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규모 정면 충돌보다는 소규모 교전을 반복하며 적의 대응 능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이는 민병대 중심 부대에 적합한 전략이었다.

그는 지형 활용에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산악과 해안, 도시 환경을 가리지 않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구사했으며, 이는 정규군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가리발디는 병사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강한 신뢰 관계를 형성했고, 이는 지휘 체계의 단순함을 보완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규율에 있어서 그는 엄격함과 유연함을 병행했다. 전투 중 명령 불복종에는 단호했으나, 평상시에는 병사들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약탈과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으며, 이는 군사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특징은 그를 단순한 모험가가 아닌, 독자적 군사 스타일을 구축한 지휘관으로 평가하게 만든다.[20]

5. 관계[편집]

5.1.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과의 관계[편집]

가리발디의 정치적·군사적 인식 형성에 있어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은 단순한 경험의 무대가 아니라 사상적 토대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를 유럽 혁명 실패의 대안적 공간으로 인식했으며, 이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전쟁과 공화주의 운동을 통해 무장 민중 투쟁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체득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 담론과 혁명 실천 전반에 깊숙이 반영되었다.

가리발디가 접한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핵심은 스페인 제국포르투갈 제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한 해방 전쟁이었다. 그는 이를 단순한 식민지 독립이 아니라, 구체제에 대한 보편적 저항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시몬 볼리바르로 대표되는 해방 영웅 서사는 개인의 결단과 민중 동원의 결합이 역사 변혁을 이끈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가리발디는 볼리바르를 직접적으로 모방하지는 않았으나, 영웅적 지도자가 민족적 열망을 집약하는 방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21].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에서 그가 특히 주목한 요소는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 무장세력의 역할이었다. 해방 전쟁은 전문 군대보다 지역 민병대, 자원병, 해적 출신 전투원 등 다양한 집단의 연합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국가 형성 이전 단계의 전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가리발디는 이러한 방식을 민중 주체성의 표현으로 해석했고, 이후 이탈리아에서도 유사한 전투 방식을 이상화하였다. 이는 그가 중앙집권적 군사 체계보다는 자발성과 헌신을 중시하는 군사 문화를 선호했음을 의미한다[22].

또한 남아메리카의 공화주의는 가리발디에게 제도 이전의 자유 개념을 제공하였다. 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공화국들은 안정적인 헌정 질서보다는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고, 반복적인 내전과 권력 교체를 경험했다. 가리발디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단점으로 인식하면서도, 자유를 향한 지속적 긴장이 공화국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는 그가 유럽식 점진 개혁이나 절충 정치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23].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은 국제 연대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리발디는 국경을 초월한 혁명 참여가 정당하다는 관점을 이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당시 남아메리카 혁명 세력은 유럽 출신 망명자와 현지 민중이 혼합된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는 민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지 않는 혁명 문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가리발디로 하여금 이탈리아 문제를 국제 혁명의 일부로 바라보게 만들었다[24].

문화적 차원에서도 남아메리카는 상징적 자원을 제공했다. 붉은 셔츠로 대표되는 외형적 상징, 전설적 전투 서사, 카리스마적 지도자 이미지 등은 남아메리카 혁명 서사에서 차용된 요소로 해석된다. 이는 이후 가리발디가 대중적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투쟁이 정치적 사건을 넘어 서사화되는 기반이 되었다[25].

가리발디와 남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관계는 일방적 영향이 아니라 상호 작용의 성격을 지닌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혁명 모델을 학습했고, 동시에 유럽 혁명가로서 그 전통을 재해석하여 다른 맥락에 이식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아메리카 혁명은 단순한 지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가리발디 사상의 국제적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5.2. 동시대 인물들과의 관계[편집]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 및 유럽 혁명사의 중심 인물로서 수많은 동시대 정치가·사상가·군사 지도자들과 복합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을 넘어, 통일 담론과 혁명 전략, 사상적 노선의 충돌과 협력이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가리발디는 특정 인물이나 세력에 완전히 귀속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연대와 거리를 반복하며 독자적 위치를 유지하였다.

가리발디와 주세페 마치니의 관계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축을 이룬다. 두 사람은 공화주의와 민중 주권이라는 공통된 이상을 공유했으나, 실천 방식과 정치적 판단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마치니는 비타협적 공화 혁명을 강조하며 조직적 음모와 사상 선전에 무게를 두었던 반면, 가리발디는 무장 행동과 즉각적인 실천을 중시하였다. 이로 인해 두 인물은 상호 존중과 갈등을 동시에 경험했으며, 협력과 단절을 반복하는 관계로 전개되었다[26].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와의 관계는 더욱 복잡한 긴장을 내포한다. 카부르는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 통일 노선을 대표했으며, 외교와 제도 정치를 중시하였다. 가리발디는 이러한 노선을 이상적이라고 보지 않았으나, 통일이라는 대의 앞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두 인물은 공개적으로는 서로를 경계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상호 필요성을 인정하는 관계였다. 이는 가리발디가 군주제 통일에 기여하면서도 제도 정치로 흡수되지 않은 배경을 설명해 준다[2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의 관계는 상징성과 현실 정치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가리발디는 군주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는 통일이라는 결과를 중시했으며, 국왕을 통일의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대로 국왕 측은 가리발디의 민중적 영향력을 활용하면서도, 그가 공화주의적 상징으로 남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 관계는 협력과 불신이 병존하는 형태로 유지되었으며, 통일 이후에도 완전한 정치적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28].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내부 인물뿐 아니라 유럽 혁명 네트워크 속 인물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지식인과의 교류는 그의 이미지를 대중 서사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관계는 가리발디를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문화적 아이콘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식인들은 그를 자유의 화신으로 묘사했고, 이는 국제적 명성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29].

군사적 동료들과의 관계 역시 주목할 만하다. 가리발디는 정규군 장교보다 자원병 출신 지휘관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계급보다는 헌신과 용기를 중시하는 기준으로 인물을 평가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부대가 개인적 충성심에 기반한 공동체로 기능하게 했으나, 동시에 조직적 안정성 부족이라는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동료 지휘관들과의 갈등은 종종 전략적 판단 차이에서 비롯되었다[30].

가리발디와 보수 세력 및 교권 세력의 관계는 대립적이었다. 그는 교황청과 가톨릭 보수 귀족층을 통일의 장애물로 인식했으며, 이로 인해 지속적인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가치 체계의 충돌로 인식되었다. 보수 진영은 그를 무질서의 상징으로 묘사했고, 이는 오히려 그의 혁명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31].

종합적으로 볼 때, 가리발디의 동시대 인물들과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이 얽힌 복합적 네트워크였다. 그는 누구의 완전한 동맹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완전한 고립자도 아니었다. 이러한 관계 구조는 그를 이탈리아 통일사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동시에, 제도 정치의 주변부에 남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5.3. 정치조직·결사와의 관계[편집]

가리발디는 정당 정치가 제도화되기 이전의 19세기 정치 환경 속에서 다양한 정치조직과 비공식 결사, 혁명 네트워크와 느슨하면서도 지속적인 연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특정 조직의 규율이나 이념 노선에 장기간 종속되는 방식을 거부했으며, 정치조직을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행동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가리발디는 조직인인 동시에 조직 바깥의 인물로 기능하는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였다.

가리발디가 가장 이른 시기부터 접촉한 정치 결사 형태는 비밀 혁명 조직이었다.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검열과 탄압을 피해 비밀 결사가 확산되었고, 이러한 조직은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의 전파 경로로 기능했다. 가리발디는 이들 조직의 이념적 목표에는 공감했으나, 장기적인 음모와 은밀한 준비에 의존하는 방식에는 점차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혁명은 준비보다 행동에서 완성된다고 인식했으며, 이는 비밀 결사 중심의 전략과 일정한 긴장을 낳았다[32].

청년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공화주의 조직과의 관계는 상징성과 실질성이 교차하는 사례였다. 가리발디는 해당 조직이 제시한 민족 해방과 공화국 수립이라는 목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조직의 중앙집중적 지도 체계와 엄격한 이념 규율에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조직이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민중은 스스로 행동할 능력을 지닌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조직 내부에서 가리발디를 통제 불가능한 인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33].

가리발디와 자원병 중심의 정치·군사 조직의 연계는 보다 긴밀한 성격을 띠었다. 그는 특정 정치 강령보다 자유와 통일이라는 포괄적 목표에 공감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느슨한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조직 형태는 전통적인 당파 조직과 달리, 규약보다 개인적 헌신과 상호 신뢰에 기반했다. 이는 빠른 동원과 강한 결속력을 가능하게 했으나, 통일 이후 제도 정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는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34].

통일 과정에서 등장한 합법 정치 조직과의 관계는 더욱 복합적이었다. 가리발디는 의회와 정당이 통일 이후 필연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민중의 희생을 대변하지 못할 경우 정당성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조직이 타협과 계산에 매몰되는 현상을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공식 조직의 지도부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외곽에서 압박을 가하는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35].

가리발디는 국제적 정치 결사와의 연계에서도 선택적 태도를 유지했다. 유럽 각지의 자유주의·민족주의 단체와 연대 의사를 표명했으나, 국제 조직의 지휘 체계에 편입되는 것은 거부했다. 이는 그의 국제주의가 조직적 통합보다는 도덕적 연대에 기반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유를 위한 투쟁은 지역적 맥락에 따라 달라져야 하며, 획일적 노선은 현실을 왜곡한다고 보았다[36].

정치조직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은 개인 숭배에 대한 양가적 태도였다. 가리발디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결사나 파벌이 형성되는 현상을 경계했으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조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는 개인이 운동을 대체하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했으며, 자유의 이상이 특정 인물에 종속되는 것을 위험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상징성은 정치조직의 동원 자원으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37].

가리발디와 정치조직·결사의 관계는 일관된 소속이 아닌 지속적 거리 조절로 요약된다. 그는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조직이 자유의 목적을 잠식하는 순간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제도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게 했으나, 동시에 혁명적 도덕 권위를 유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6. 이탈리아 통일 담론에서의 위치[편집]

그는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동한 상징적 인물이었으나, 통일의 방식과 귀결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긴장을 남긴 존재였다. 가리발디의 이름은 민중적 통일의 아이콘으로 소비되었지만, 실제 통일 과정에서 제도화된 국가 질서와는 완전히 합치되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 이로 인해 그는 통일의 영웅이자 동시에 미완의 공화주의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통일 담론은 크게 입헌군주제 중심의 점진적 통합 노선과 공화주의적 혁명 노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리발디는 이 중 후자에 사상적으로 가까웠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전자의 통일 과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모순적 위치에 놓였다. 그는 통일 그 자체를 최우선 가치로 두었기 때문에, 군주제 하의 통합이라는 조건을 수용하는 선택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절충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원칙의 후퇴로 비판받기도 했다[38].

가리발디의 통일 담론에서 핵심은 민중 주체성이다. 그는 통일이 외교 협상이나 왕조 간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민중의 희생과 참여를 통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통일 과정에서 민중이 배제되는 정치 구조에 대해 반복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는 통일 이후 형성된 국가가 민중적 열망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으며, 가리발디가 제도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39].

또한 그는 통일을 단순한 영토 결합이 아닌 도덕적·정신적 재탄생으로 이해하였다. 가리발디에게 이탈리아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유와 시민 덕성이 구현되는 공동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통일 이후에도 사회적 불의, 지역 격차, 민중의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통일의 불완전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통일을 완결된 사건이 아닌 지속적 과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40].

가리발디는 통일 담론 속에서 남부 문제를 상징적으로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일 과정에서 남부 지역이 군사적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경향에 대해 그는 불편함을 드러냈으며, 남부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존엄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통일 이후 남부가 주변화되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그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가리발디의 통일 기여는 남부 문제 담론에서도 복합적으로 해석된다[41].

외교적 차원에서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이 열강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통일이 외세의 승인에 의해 완성되는 구조를 민족 자존의 훼손으로 인식했으며, 자주적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외교 현실과 충돌했지만, 통일 담론에 주권과 자율성이라는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역할을 했다[42].

결국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 담론에서 중심과 주변을 동시에 점유한 인물로 자리 잡는다. 그는 통일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행위자였으나, 통일 국가의 이념적 중심에는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위치는 단순한 국가 영웅이 아니라, 통일의 성격과 한계를 드러내는 거울로 기능하게 되었다.

7. 대중적 이미지와 상징성[편집]

가리발디는 생전부터 이미 대중적 상징으로 기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붉은 셔츠와 장발, 수염은 단순한 외형을 넘어 혁명과 자유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연출된 측면도 있었으나, 동시에 그의 삶 자체가 상징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조건과 맞물린 결과이기도 했다. 문맹률이 높던 사회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가리발디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언론과 소문은 그의 이미지를 빠르게 확산시켰다. 실제 전투 성과와 관계없이 그의 이름은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소비되었으며, 이는 자원병 모집과 민중 동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대중적 이미지는 때로는 과장되거나 신화화되었지만, 동시에 통일 운동을 하나의 서사로 묶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후에도 가리발디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기념비와 거리 이름, 교과서 서술을 통해 그는 통일 이탈리아의 대표적 얼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화 과정은 그의 갈등과 실패, 모순을 희석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발디의 상징성은 단순한 미화로 환원되기보다는, 통일이라는 역사적 경험 자체를 집약한 상징으로 이해될 때 의미를 가진다.[43]

8. 평가[편집]

주세페 가리발디에 대한 평가는 이탈리아 통일사 전반에 걸쳐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는 한편으로는 무장 혁명과 민중 동원을 통해 통일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킨 결정적 인물로 평가받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제도화 과정에서는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그의 삶 자체가 이상주의와 현실 정치, 개인적 신념과 국가적 필요 사이의 긴장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가리발디는 통일의 주역이었으나, 통일 국가의 권력 구조를 설계한 인물은 아니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독특한 역사적 위치가 형성된다.

그는 주세페 마치니로 대표되는 공화주의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왕정 중심의 통일 노선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다만 실제 역사 전개 과정에서는 사르데냐 왕국빅토르 에마뉘엘레 2세의 통일 전략에 협력하는 선택을 하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가리발디는 급진 혁명가이면서도 동시에 현실 정치의 제약을 인식한 실천가였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이후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원인이 되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리발디는 예외적인 인물로 취급된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의 망명 생활 동안 여러 지역 분쟁과 독립 운동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축적했는데, 이 시기의 활동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발휘된 전술적 유연성과 비정규전 이해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브라질과 우루과이에서의 전투 경험은 소규모 병력을 활용한 기동전과 해상 작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그는 단순한 민족주의 지도자를 넘어, 19세기 전반 세계 혁명 운동의 연속선상에 놓인 인물로 해석되기도 한다.[44]

군사적 측면에서 가리발디는 비정규전과 민병대 운용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정규군의 물적 우위에 맞서 기동성과 심리전, 민중의 지지를 결합하는 전략을 일관되게 사용했다. 이는 단순한 전술적 성공을 넘어, 정치적 정당성을 군사 행동과 결합시키는 방식이었다. 특히 천인의 원정은 소수의 병력이라도 명확한 목표와 상징성을 갖출 경우 역사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전술적 유산은 이후 여러 민족 해방 운동에서 반복적으로 참조되었다.

정치 사상 면에서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나, 교조적인 이념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가리발디는 공화정을 이상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위해 군주제와의 협력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일관성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분열된 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묶기 위한 실용적 판단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행보는 이념의 순수성과 정치적 성과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으며, 혁명가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통일 이후의 행보는 그의 평가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머무르지 않았고, 통일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승리자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통일 이탈리아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가리발디는 통일의 영웅이자, 통일의 한계를 가장 명확히 체현한 인물로 기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국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도덕적 상징으로 기억된다.

가리발디의 대중적 인기는 생존 당시부터 이미 확고했다. 그는 여러 차례 부상과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영웅으로 포장하기보다는 민중과 고난을 공유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이러한 이미지는 언론과 정치 선전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통일 이후에도 권력의 중심에 안착하지 않고 비교적 소외된 위치를 선택한 행보는, 그를 기회주의적 정치가가 아닌 원칙 중심의 혁명가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반면 이러한 태도는 실제 정치 운영 능력에 대한 의문을 낳기도 했으며,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상징적 존재로서의 가치가 실질적 통치 역량을 압도한 사례로 분석한다.[45]

후대에 가리발디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민족주의 서사에서는 통일의 영웅으로, 공화주의 전통에서는 미완의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리고 대중 문화에서는 모험과 헌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상반된 해석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이 단일한 이념이나 역할로 환원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리발디의 역사적 위치는 단순한 영웅이나 실패한 혁명가로 규정되기보다는, 19세기 유럽 민족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인물로 이해될 때 가장 설득력을 지닌다.[46]

종합적으로 볼 때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 과정에서 군사적·상징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존재는 통일 운동이 단순한 외교와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대중 동원과 정치적 신화 형성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가리발디는 한 국가의 건국 서사에서 개인의 카리스마와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9. 여담[편집]

  • 의도적으로 소박한 생활 방식을 유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과 영향력이 극대화된 이후에도 사치나 권위적 태도를 경계했으며, 검소한 복장과 생활 습관을 고수했다. 이러한 태도는 민중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정치 엘리트와의 거리감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그가 공식 행사에서도 군복이나 간소한 복장을 선호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 자주 언급된다[47].
  • 외모와 관련된 일화가 풍부하다. 붉은 셔츠는 실용적 선택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이 색상은 혁명, 희생, 열정을 연상시키며 대중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붉은 셔츠는 특정 정치 노선을 초월해 자유 투쟁의 보편적 상징으로 차용되었고, 가리발디 개인의 정체성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48].
  • 동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 또한 깊은 편이었다. 가리발디는 도시 생활보다 자연 속의 삶을 선호했으며, 농경과 목축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대 분위기와 대비되는 태도로, 그가 이상적으로 그린 공화국이 단순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 도덕적 공동체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자연 지향적 성향은 그의 연설과 글에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난다[49].
  • 그의 명성은 생전부터 과장과 왜곡을 동반했다. 실제 행적과 무관하게 전설적 서사가 덧붙여졌으며, 그 자신이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는 개인적 허영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현실적 판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가리발디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가 중첩된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50].
  • 가리발디의 이름은 유럽을 넘어 다양한 지역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언급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단체가 등장하는 현상도 관찰된다. 이는 그가 특정 국가의 영웅을 넘어 국제적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동시대 인물들 가운데서도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51].
  • 유머 감각이 있는 인물로도 알려져있다. 긴장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자조적 발언이나 풍자를 활용했으며, 이는 동료와 민중의 심리적 부담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단순히 엄숙한 혁명가가 아니라, 인간적 교감을 중시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요소로 작용한다[52].
[A] 1.1 1.2 출생 당시 고향 니스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당한 상태였다.[2] 사르데냐의 부속도서다.[4] 공산주의 같은 현대적 극좌 이념이 아니라 19세기 유럽에서 극좌로 분류되던 여러 이념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정치 세력의 집합으로, 그 중에는 현대에는 중도좌파 이념으로 분류되는 사회자유주의의 원류가 된 급진적 자유주의도 있었다.[5] 과격함을 의미하는 현대 정치 수사로서의 급진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분파이면서 사회자유주의의 원류가 된 급진적 자유주의를 의미한다.[6] 니차는 국경 변경이 잦았던 지역으로, 정체성 혼합이 강한 도시였다.[7] 남아메리카 혁명 전쟁은 가리발디의 군사적 명성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 1848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인적·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9] 로마 공화국은 불과 수개월 존속했으나, 이후 이탈리아 공화주의 담론의 핵심 상징으로 남았다.[10] 재망명 시기는 가리발디가 이상주의에서 현실 정치로 이동하는 과도기로 평가된다.[11] 이 시기 가리발디는 국가와 혁명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12] 천인의 원정은 군사 작전이자 정치적 선전의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13] 가리발디는 이 만남 이후에도 공식 권력보다는 도덕적 상징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14] 통일 이후 가리발디는 영웅과 반대자의 경계에 선 인물로 인식되었다.[15] 가리발디의 장례는 통일 이탈리아가 그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16] 가리발디의 사상은 일관된 이론보다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17] 가리발디는 군주제가 통일을 이끌 수는 있으나 자유를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18] 그는 정치적 효율보다 도덕적 정합성을 우선시했다는 평가가 많다.[19] 가리발디는 민족 해방과 타 민족 억압을 동시에 정당화하는 논리를 거부했다.[20] 가리발디의 전술은 민병대 전쟁의 전형으로 자주 언급된다.[21] 가리발디는 볼리바르를 자유의 상징으로 언급하며 유럽 혁명가들과 차별화된 사례로 제시했다.[22] 이러한 인식은 훗날 ‘자원병 혁명’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23] 그는 타협을 자유의 지연으로 간주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남겼다.[24] 그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는 출신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25] 이러한 상징성은 유럽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26] 마치니는 가리발디의 군사적 행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적 신중함 부족을 우려했다.[27] 카부르 측은 가리발디의 인기를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 인식했다.[28] 국왕과의 만남은 의례적 장면으로 자주 재현되었다.[29] 문학과 언론은 가리발디 신화 형성의 핵심 매개였다.[30] 그는 명령 체계보다 동의와 설득을 선호했다.[31] 적대적 비판조차도 그의 대중적 상징성을 확대했다.[32] 그는 지연되는 봉기를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한 바 있다.[33] 그는 이념 교육보다 행동 참여를 중시했다.[34] 자원병 조직은 혁명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평시에는 불안정했다.[35] 그는 의회 정치가 혁명 정신을 소진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36] 그는 각 민족의 투쟁 방식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개된 측면이 크다.[38] 가리발디가 통일 이후 공화국 수립을 즉각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39] 그는 통일 이후에도 정치 엘리트 중심의 국정 운영을 경계했다.[40] 통일 이후에도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인식은 그의 담론에서 반복된다.[41] 일부 담론에서는 그를 남부 통합의 도덕적 상징으로 본다.[42] 그는 외교적 타협이 통일의 도덕적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보았다.[43] 가리발디의 이미지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어 왔다.[44] 가리발디의 남아메리카 활동은 동시대 유럽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45] 통일 이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46] 가리발디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정치적 관점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47] 이는 그가 권력의 외형보다 도덕적 일관성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된다.[48] 상징의 확산은 의도된 연출이 아니라 반복적 재현의 결과로 해석된다.[49] 그는 자연 속의 자유를 인간 사회의 자유와 연결지어 표현했다.[50] 그는 자신의 명성이 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인식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51] 그의 이름이 고유명사를 넘어 보통명사처럼 사용된 사례도 보고된다.[52] 유머는 그가 권위적 인물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 장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