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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제2대 국왕 영국 윈저 왕조 초대 국왕 조지 5세 George 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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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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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
영국 자치령 국왕 | |
서명 | |
1. 개요[편집]
백성은 곧 나를 일컬음이라.
in 1922, Imposing thirteen limits.
2. 고달팠던 개인사[편집]
살아생전 개인으로서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물론 다른 친척들이나 군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빌헬름 2세처럼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폐위되거나 총살까지 당한 니콜라이 2세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2]
- 형 앨버트 왕자와 동생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조지 5세는 형과 우애가 좋았으며 동생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형 앨버트와 남동생 알렉산더 존은 요절했으며, 여동생들인 루이즈(1867년 ~ 1931년), 빅토리아(1868년 ~ 1935년 12월 1일), 모드(1869년 ~ 1938년 11월 20일) 중 루이즈와 빅토리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조지 5세는 큰 실의에 빠졌고[3], 말썽 부리는 자식들, 두 여동생들의 죽음, 사촌들이 끔살, 폐위되는 상황 속에서 노르웨이로 시집갔던 막내 여동생 모드 왕비도 점차 위독해지자 '이제 짐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며 비통해하다가 세상을 떴다.[4]
3. 기타[편집]
- 즉위 이후인 1910년 에드워드 마일리우스라는 사람이 조지가 젊은 시절[11] 몰타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메리 왕비와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허위 사실을 출판했다. 같은 소문은 1893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나 조지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졌는데 에드워드가 조지 5세를 중혼으로 고소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 재판부는 이 재판을 기각해버렸는데 영국 법에서는 국왕에게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영국 국왕 문서 참고. 한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에드워드 마일리우스는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범죄적 비방 행위로 1년을 복역하였다.
- 그의 취미는 우표 수집으로, 조지 5세의 우표 수집 컬렉션은 역대 영국 국왕들에게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왕세자 시절에 보좌관이 아침에 출근해서 조지에게 농담 삼아 "전하, 제가 오늘 신문을 보니까 어떤 바보멍청이가 우표 한장에 수백 파운드나 되는 돈을 썼다는 기사가 다 실렸더군요."라고 말을 건네자, "내가 바로 그 바보멍청이일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 외에 새 사냥도 광적으로 좋아했다. 영국에서는 농담삼아 '새 학살자'라고 부를 정도.
- 위에 언급된 대로 사냥을 매우 잘했는데, 새 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들의 사냥에 전부 조예가 있었다. 대관식 후 인도를 순회할 때 네팔에서 벌어진 사냥에 참여해 호랑이 21마리, 코뿔소 8마리와 곰을 열흘에 걸쳐 사냥하였다. 한술 더 떠서 1913년에는 번햄 경의 자택에서 6시간 동안 꿩 1000마리를 잡았고, 이때는 본인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했다.
- 그러나 이런 몇몇 취미생활을 제외하면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에드워드 7세 스타일의 화려한 사생활과는 잘 맞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고, 군인으로서의 생활습관이 거의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적인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조지 5세의 점심식사는 수프 한 그릇이 전부였다고 한다. 심지어 후식으로 먹을 케이크를 만들 때에도 밀가루를 낭비하지 말라며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로 만들게 했을 정도.
- 또한 문신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대표적인 일화로 1881년 일본에 방문했을 때 팔에 용문신을 새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영국의 신문사들이 당시 말단 선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화살이 코를 관통하는 문신’을 새겼다며 일제히 오보를 쏟아내면서 영국 의회에서까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소동은 조지 5세가 본국으로 돌아와 사실무근임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 그의 이름을 딴 전함이 바로 킹 조지 5세급 전함으로, 2차례 건조되었다.[13] 첫 번째는 1911년에 건조된 킹 조지 5세로, 당시 조지 5세가 즉위하여 이름이 붙었다. 두 번째는 1939년에 건조된 전함으로, 2차 대전기 영국 해군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당시 즉위했던 에드워드 8세가 자신의 퇴위를 예감하고 조지 5세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즉위한 조지 6세 때는 함명을 바꾸자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왕은 아버지를 기념하고 싶다고 사양하였으며, 2번함에는 형을 기념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붙이고 3번함에는 자신을 지칭하는 듀크 오브 요크를 붙인다.
- 파리 지하철 1호선에는 조지 5세의 이름을 딴 조지 5세 역이 있다.
- 키는 168cm 할아버지(180cm), 아버지(173cm), 형(185cm)보다 작고, 아내(168cm)와 장남(168cm)[14]이랑 키가 같다. 그래도 아내의 키가 큰 덕분에 조지 5세의 아들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크다. 에드워드 8세는 키가 작지만, 차남 조지 6세의 키는 175cm로 당시 영국인 남성 평균 키보다 컸으며, 삼남 헨리 윌리엄 프레더릭 앨버트의 키는 185cm, 사남 조지 에드워드 알렉산더 에드먼드의 키는 180cm로 장신이다.
- 슬하 5남 1녀를 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 중 아들 수로는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슬하 5남 2녀)[15]와 함께 공동 2등이다. 공동 1등은 6남 1녀를 낳은 빌헬름 2세와 6남을 낳은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16]다.
4. 대중매체[편집]
-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알버스 덤블도어로 유명한 배우인 마이클 갬본이 맡아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와 히틀러가 설쳐대는 와중에 왕이란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이 되었다면서 무슨 놈의 왕이 국민들에게 아부하는 광대꼴이냐고 전제군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에게 "너의 형이 저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귀족과 노동자들을 지켜내겠느냐"며 왕족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이 말을 한 때가 바로 조지 6세가 크리스마스 대국민 연설을 머뭇거릴 때였는데, 엄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임과 동시에 아들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렇게 자식들에게 마냥 엄하기만 한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네 명의 아들들 중에서 조지 6세가 으뜸이라며 내심 아끼는 면모도 보였다.[17][18]마지막에는 병환으로 거의 정신줄을 놓고[19] 자신이 서명한 법안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다가 숨을 거둔다.
-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선 킹스맨의 프리퀄로 가상의 역사이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등장한다. 배우는 톰 홀랜더가 맡는다. 이 외에도 니콜라이 2세, 빌헬름 2세까지 1인 3역을 맡는다.[20] 너무나도 나약했던 니콜라이 2세, 열등감에 찌들어 전쟁을 일으킨 빌헬름 2세와 달리 왕실을 수호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옥스포드 공작을 지원해 킹스맨 에이전시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초대 퍼시벌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 Paradox Interactive사의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1936년 시점에 영국 국왕으로 있는데 게임 내 다른 국왕들과 같이 국가의 안정도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시작 후 금방 사망해서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도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 다시 안정된다.
- 위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1차대전이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되고, 이어지는 독일과 영국의 건함경쟁 끝에 피폐해진 영국에서 생디칼리슴 혁명이 일어나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본인의 건강(주로 정신적인 쪽으로)도 나빠져 독일과 생디칼리스트들에 대한 분노로 미쳐버렸다는 평까지도 듣고 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1936년 초에 사망하며, 죽기 전 유언은 영국으로 돌아와 묻히는 것. 진행에 따라 캐나다가 영국 수복에 성공하면 이 유언을 이루게 된다.
[1]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2]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군주제 폐지 이후로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네덜란드로 망명해서 천수를 누리다 갔다.[3] 특히 빅토리아와 사이가 좋았다. 빅토리아가 사망한 1달 뒤, 조지 5세 본인도 사망했다.[4] 다만 모드 왕비는 둘째 오빠 조지 5세가 사망한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5]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2남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의 장녀이다.[6] 장남 에드워드 8세, 차남 조지 6세, 손녀 엘리자베스 2세, 증손자 찰스 3세[7]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승전국과 패전국, 그리고 양쪽의 식민국들 대부분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8] 다만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아버지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에게 사탄이라고 패드립을 친 바 있다.[9]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대독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아서, 알렉산드라 황후까지 망명시킬 경우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 밖에도 피의 일요일 사건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타국에서도 니콜라이 2세의 평가는 최악의 폭군 그 자체였다.[10] 참고로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와도 사촌 남매였다. 조지 5세의 둘째 고모 앨리스 모드 메리의 딸이 알렉산드라.[11] 조지가 몰타에 있었던 건 해군 장교 시절이다.[12] 실제로는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13] 첫 번째는 건조되기 전에 HMS Monarch로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제외하면 2차례.[14] 젊은 시절 키는 170cm이다.[15]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고명딸.[16]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자녀들.[17] 특히 큰아들과 넷째 아들 켄트 공작 조지가 속을 많이 썩였다. 이에 비해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지만 왕족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 했던 조지 6세가 조지 5세의 눈에 흡족했을 만하다.[18] 막내아들 존은 뇌전증으로 1919년 1월 18일, 13살의 나이에 사망했다.[19] 약간 치매 증상을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조지 6세와 달리 에드워드 8세는 "그 꼰대, 아직도 멀쩡하면서 나한테 양위하려고 쇼하는거임"이라는 막말도 서슴치 않는다.[20] 이러한 1인 다역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서술된 문단에서도 보다시피, 서로가 친척지간인 데다 특히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와 도플갱어로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아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