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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2.1. 이탈리아의 분열기[편집]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 왕국들의 지배[1]를 받던 이탈리아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전쟁 끝에 562년에 완전히 수복됨으로써 다시 로마 제국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이탈리아 재통일은 불과 6년만에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공으로 인해 북이탈리아를 상실하며 단기간에 종식되었고, 이후 랑고바르드가 동로마군을 이탈리아에서 왼전히 축출하는데 실패하고 대치 상태가 길어지면서 분열기가 시작되었다.
8세기에 랑고바르드 대신 북이탈리아 패권을 장악하게 된 프랑크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을 교황에게 기증함으로써 교황의 세속 영지인 교황령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북부 세력이나 남부 세력 중 한쪽이 우세해지더라도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 때문에 중부를 넘어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야기하여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이탈리아 재통일은 불과 6년만에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공으로 인해 북이탈리아를 상실하며 단기간에 종식되었고, 이후 랑고바르드가 동로마군을 이탈리아에서 왼전히 축출하는데 실패하고 대치 상태가 길어지면서 분열기가 시작되었다.
8세기에 랑고바르드 대신 북이탈리아 패권을 장악하게 된 프랑크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을 교황에게 기증함으로써 교황의 세속 영지인 교황령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북부 세력이나 남부 세력 중 한쪽이 우세해지더라도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 때문에 중부를 넘어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야기하여 분열이 고착화되었다.
2.2. 이탈리아 내셔널리즘의 발흥[편집]
3. 전개[편집]
3.1. 초기[편집]
3.1.1. 카르보나리와 마치니의 통일운동[편집]
1820년대 초부터 비밀결사 카르보나리가 동시다발적인 혁명을 일으켜 통일을 달성하려 했으나 대중적 기반이 미약하여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1831년에 카르보나리에서 탈당한 주세페 마치니가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당하여 대중운동을 통해 기반을 확보하고 혁명을 시도했는데, 훗날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통일 노선으로 갈라서게 되는 주세페 가리발디도 이 당시에는 마치니에게 동조했다.
그러자 1831년에 카르보나리에서 탈당한 주세페 마치니가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당하여 대중운동을 통해 기반을 확보하고 혁명을 시도했는데, 훗날 사르데냐 왕국 중심의 통일 노선으로 갈라서게 되는 주세페 가리발디도 이 당시에는 마치니에게 동조했다.
3.1.2. 온건당의 통일운동[편집]
3.2.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편집]
1848년 북이탈리아에서는 사르데냐 왕국 등이 자유주의 세력과 타협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이탈리아계 지역들을 독립시킨 후 통일을 달성하려 시도했고, 교황령에서는 주세페 마치니와 주세페 가리발디를 비롯한 혁명가들이 교황 비오 9세를 축출하고 로마 공화국[2]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는 오스트리아의 반격과 프랑스의 반혁명 세력 지원으로 인해 불과 1년만인 1849년에 진압되었고, 사르데냐에서는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패전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했으며, 로마에서 혁명을 일으킨 마치니와 가리발디 등 혁명가들은 해외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혁명가들에 의해 교황령에서 축출되었다가 귀환한 교황 비오 9세가 급격하게 보수화됨에 따라 빈첸초 조베르티가 내세운 교황 중심 통일론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러나 이는 오스트리아의 반격과 프랑스의 반혁명 세력 지원으로 인해 불과 1년만인 1849년에 진압되었고, 사르데냐에서는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패전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했으며, 로마에서 혁명을 일으킨 마치니와 가리발디 등 혁명가들은 해외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혁명가들에 의해 교황령에서 축출되었다가 귀환한 교황 비오 9세가 급격하게 보수화됨에 따라 빈첸초 조베르티가 내세운 교황 중심 통일론은 완전히 사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