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제4대 장관회의 주석 |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 | Joseph Stalin | |
![]() | |
이름 |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
본명 |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
출생 | |
사망 | |
묘소 | |
재임기간 | 초대 서기장 |
제4대 인민위원장 | |
제4대 장관회의 주석 | |
서명 | |
![]() |
공식 초상화 |
1. 개요[편집]
2. 이름[편집]
본래 러시아인이 아니라 조지아인이라서 본명은 조지아식으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였는데, 이를 러시아식으로 변형한 이름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였다.
흔히 알려진 이오시프 스탈린, 약칭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의미하는 '스탈'에서 따온 별명으로, 스탈린과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공산주의 사상가, 혁명가들도 본명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별명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단 스탈린의 정치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스탈린의 라이벌인 레프 트로츠키부터가 본명은 각각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었으며, 북한의 김일성[9], 베트남의 호찌민[10] 등도 본명과는 전혀 다른 가명을 사용하여 유명해졌다.
흔히 알려진 이오시프 스탈린, 약칭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의미하는 '스탈'에서 따온 별명으로, 스탈린과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공산주의 사상가, 혁명가들도 본명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별명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단 스탈린의 정치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스탈린의 라이벌인 레프 트로츠키부터가 본명은 각각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었으며, 북한의 김일성[9], 베트남의 호찌민[10] 등도 본명과는 전혀 다른 가명을 사용하여 유명해졌다.
3. 생애[편집]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령 그루지야(조지아)의 고리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조지아 민족주의 성향의 시를 쓰기도 했으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하여 1898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시절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측근이 되어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레닌주의를 추구하는 파벌인 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고 본명 대신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 역시 레닌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은 소수민족인 조지아인 출신으로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행정부인 인민위원회에서 민족 문제를 담당하는 민족인민위원을 맡았고, 적백내전 시기에는 정치장교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22년 소련 건국 이후에는 초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소련 공산당은 법적인 당수 없이 중앙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고 레닌이 살아있었기에, 서기장은 당수가 아니라 여러 중앙위원 직위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이 해당 직위를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당수 직위가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은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던 레프 트로츠키를 견제하기 위해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동맹을 맺었고, 이들이 트로츠키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스탈린-카메네프-지노비예프 삼두정치(트로이카)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정적으로 돌아서자 그들마저 숙청함으로써 단독으로 당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소련 내에서 아무도 견제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확보했다.
스탈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조지아 민족주의 성향의 시를 쓰기도 했으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하여 1898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시절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측근이 되어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레닌주의를 추구하는 파벌인 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고 본명 대신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 역시 레닌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은 소수민족인 조지아인 출신으로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행정부인 인민위원회에서 민족 문제를 담당하는 민족인민위원을 맡았고, 적백내전 시기에는 정치장교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22년 소련 건국 이후에는 초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소련 공산당은 법적인 당수 없이 중앙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고 레닌이 살아있었기에, 서기장은 당수가 아니라 여러 중앙위원 직위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이 해당 직위를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소련 공산당의 당수 직위가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은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던 레프 트로츠키를 견제하기 위해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동맹을 맺었고, 이들이 트로츠키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스탈린-카메네프-지노비예프 삼두정치(트로이카)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정적으로 돌아서자 그들마저 숙청함으로써 단독으로 당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소련 내에서 아무도 견제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확보했다.
4. 사상[편집]
4.1. 마르크스-레닌주의[편집]
4.2. 스탈린주의[편집]
5. 소속 정당[편집]
[1] 1879년생 이라는 설도 존재한다.[2] 1960년 모스크바 연방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모스크바 연방시의 일부이다.[3] 1952년 19차 당 대회에서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서기국 서기'로 남았다.[4] 일명 케케 겔라제.[5] 둘 모두 스탈린이 태어나기 전 어릴때 사망했다.[6] 일명 카토 스바니제.[7] 볼셰비키 계열 정치인이었던 표도르 세르게예프(Фёдор Сергеев, 1883–1921)의 아들로 표도르 세르게에프의 사후 스탈린의 양자로 들어갔다. 스탈린의 장남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 같이 독소전쟁에 참전했고 수용소에 수감됐으나 사망한 야코프와 달리 본인은 탈출에 성공했다.[8]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탄압을 중지한 것과 엮어서 스탈린이 전쟁의 승리를 기도하며 정교회 성당을 몰래 다녔다는 식의 출처가 불분명한 낭설을 퍼뜨리기도 하나,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스탈린 실제로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다시 임명할 때 사도헌장을 고의로 무시한 채 세웠으며 정교회의 탄압을 완화한 뒤에도 즈나니예(Всесоюзное общество «Знание»)와 같은 무신론 단체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9] 본명: 김성주.[10] 본명: 응우옌신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