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알베르토 켄야 후지모리 이노모토 (Alberto Kenya Fujimori Inomoto) |
재임 기간 | |
출생 | |
사망 | |
페루 리마 | |
국적 | |
정당 | |
1. 개요2. 생애
2.1. 학문적 성취2.2. 학자로서의 삶2.3. 1990년 대선 대이변과 1차 집권기
3. 평가4. 후지모리파의 존속5. 여담2.3.1. 후지 쇼크2.3.2. 의회와의 갈등2.3.3. 자친쿠데타 시전2.3.4. 1993년 개헌2.3.5. 국가정보국(SIN)의 비대화2.3.6.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라 칸투타 사건2.3.7.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과의 전면전2.3.8. 아비마엘 구스만 체포2.3.9. 론다스 캄페시나스 재편2.3.10. 페루-에콰도르 세네파 전쟁
2.4. 1995년 재선 승리와 2차 집권기2.5. 언론 장악과 타블로이드 공작2.6. 2000년 대선 부정 선거 논란2.7. 정권의 붕괴2.8. 팩스 사임2.9. 일본 망명 생활2.10. 칠레에서의 전격 체포2.11. 페루 송환과 재판2.12. 사면과 취소의 반복2.13. 사망5.1. 몬테시노스와의 관계
6. 소속 정당7. 선거 이력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공식적으로 1938년 7월 28일, 페루의 수도 리마의 미라플로레스 구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필 태어난 날이 페루의 독립기념일(Fiestas Patrias)이었기에,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태생부터 페루를 이끌 운명이었다"는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요긴하게 써먹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적들은 집권기 내내 그의 '출생지 의혹'을 제기했다. 후지모리가 사실은 일본에서 태어난 뒤 페루로 건너와 출생 신고를 조작했다는 주장인데, 이는 페루 헌법상 대통령 피선거권이 '본토 태생(Born in Peru)'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언론 보도를 통해 그의 부모가 일본 구마모토에서 리마로 이주할 당시 작성된 승객 명부와 초기 서류들이 공개되기도 했으나, 후지모리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리마 교구의 세례 증명서를 증거로 제시했다.[4]
후지모리가 예민한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광풍 속에 있었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남미 국가들에게 일본계 주민들의 신변 확보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페루 내 일본계 이민자 집단인 '닛케이(Nikkei)'는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 이는 현지 메스티소 및 백인 상층부의 질투와 결합되어 거대한 인종 차별적 폭력으로 번졌다.
1940년 리마에서는 대규모 반일 폭동이 일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과 가옥 수백 채가 약탈당했다. 후지모리의 아버지 나오이치 역시 공들여 운영하던 세탁소 문을 닫아야 했고, 가족들은 신변의 위협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특히 당시 페루 정부는 약 1,800명의 일본계 페루인을 강제로 체포해 미국 내 수용소로 압송(Deportation)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현대 페루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인권 유린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5]
이러한 유년 시절의 환경은 후지모리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결코 믿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그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우등생이었으나, 사교적이기보다는 조용하고 계산적인 아이로 통했다.
그의 인종적 배경은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치노(Chino)'라는 별명으로 승화된다. 스페인어로 '중국인'을 뜻하는 이 단어는 남미에서 동양인을 비하하거나 혹은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후지모리는 백인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며 무시하자, 오히려 이를 역이용했다. "저 화려한 리마의 백인 나리들은 우리 서민들의 고통을 모른다. 하지만 나 '치노'는 여러분과 같은 소수자이자 일꾼이다"라는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그의 유년기는 단순한 성장사가 아니라, 훗날 페루의 기성 정치 체제(Establishment)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복수심과 실용주의적 통치 철학이 배양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철저히 혼자 힘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닛케이' 특유의 자립 정신을 극단적으로 내면화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의회를 해산하고 독단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심리적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적들은 집권기 내내 그의 '출생지 의혹'을 제기했다. 후지모리가 사실은 일본에서 태어난 뒤 페루로 건너와 출생 신고를 조작했다는 주장인데, 이는 페루 헌법상 대통령 피선거권이 '본토 태생(Born in Peru)'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언론 보도를 통해 그의 부모가 일본 구마모토에서 리마로 이주할 당시 작성된 승객 명부와 초기 서류들이 공개되기도 했으나, 후지모리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리마 교구의 세례 증명서를 증거로 제시했다.[4]
후지모리가 예민한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광풍 속에 있었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남미 국가들에게 일본계 주민들의 신변 확보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페루 내 일본계 이민자 집단인 '닛케이(Nikkei)'는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 이는 현지 메스티소 및 백인 상층부의 질투와 결합되어 거대한 인종 차별적 폭력으로 번졌다.
1940년 리마에서는 대규모 반일 폭동이 일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과 가옥 수백 채가 약탈당했다. 후지모리의 아버지 나오이치 역시 공들여 운영하던 세탁소 문을 닫아야 했고, 가족들은 신변의 위협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특히 당시 페루 정부는 약 1,800명의 일본계 페루인을 강제로 체포해 미국 내 수용소로 압송(Deportation)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현대 페루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인권 유린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5]
이러한 유년 시절의 환경은 후지모리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결코 믿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그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우등생이었으나, 사교적이기보다는 조용하고 계산적인 아이로 통했다.
그의 인종적 배경은 훗날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 '치노(Chino)'라는 별명으로 승화된다. 스페인어로 '중국인'을 뜻하는 이 단어는 남미에서 동양인을 비하하거나 혹은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후지모리는 백인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며 무시하자, 오히려 이를 역이용했다. "저 화려한 리마의 백인 나리들은 우리 서민들의 고통을 모른다. 하지만 나 '치노'는 여러분과 같은 소수자이자 일꾼이다"라는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그의 유년기는 단순한 성장사가 아니라, 훗날 페루의 기성 정치 체제(Establishment)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복수심과 실용주의적 통치 철학이 배양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철저히 혼자 힘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닛케이' 특유의 자립 정신을 극단적으로 내면화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의회를 해산하고 독단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심리적 밑바탕이 되었다.
2.1. 학문적 성취[편집]
유년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가문이 경제적 타격을 입고 사회적 차별을 경험한 것은 후지모리에게 강박적인 수준의 학구열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페루 내 일본계 이민자(닛케이) 사회에서 주류 백인 엘리트 계층(Criollo)과 경쟁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기술적 전문성'뿐이었다.
후지모리는 리마의 명문 공립학교인 '콜레히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과달루페(Colegio Nuestra Señora de Guadalupe)'에 입학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 학교는 페루의 수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을 배출한 곳이었으나, 후지모리는 정치적 네트워크를 쌓기보다는 수학과 과학 등 정답이 명확한 자연과학 분야에 몰두했다. 훗날 그가 정치인이 되어서도 토론이나 수사학보다는 숫자와 통계, 도표를 들이밀며 상대를 압박하던 스타일은 바로 이 시기 형성된 '기술적 완결성'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다.
1957년, 후지모리는 페루 최고의 농업 교육 기관인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Agraria La Molina, UNALM)에 입학한다. 농업은 당시 페루 경제의 근간이었으며, 일본계 이민자들이 가장 잘 정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분야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기계적인 우등생'이었다. 그는 1961년 졸업 당시 학과 수석은 물론 전체 수석(Valedictorian)을 차지하며 농학 엔지니어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동기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사교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며 오로지 도서관과 실험실을 오가는 전형적인 '너드(Nerd)'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통제와 성과 위주의 태도는 훗날 그가 스스로를 "말만 앞세우는 정치가가 아닌, 일하는 전문가(Tecnócrata)"라고 홍보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6]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지모리는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60년대 중반, 그는 포드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서 그는 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농학에서 수학으로 전공을 심화한 것은 데이터 분석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는데, 이때 익힌 통계학적 방법론은 훗날 그가 페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도입한 '후지 쇼크'의 이론적 배경을 이해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는 수학 석사 이후 프랑스에서도 유학하며 유럽의 농업 시스템과 기초 과학 체계를 연구했다.
이 시기 후지모리는 스페인어, 일본어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으며, 서구 선진국의 시스템을 직접 목격하며 페루의 낙후된 행정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학문을 즐기는 학자가 아니라, 학문을 '국가 개조의 도구'로 보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거듭났다.
귀국 후 후지모리는 모교인 라 몰리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본격적인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단순히 강의에만 머물지 않고 대학 내 행정직을 두루 거쳤다.
1984년, 그는 마침내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된다. 닛케이 출신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이었으며, 이는 그가 지닌 조직 관리 능력과 정치적 감각이 비범했음을 보여준다. 총장 재임 시절 그는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던 대학의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해외 원조를 이끌어내는 등 수완을 발휘했다.
1987년에는 페루 전체 국립대학교 총장 협의회(ANR)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국가 교육 정책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 시기 그는 페루 국영 방송(TV Peru)에서 'Concertando(협동하여)'라는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농업 문제와 경제 위기를 다루는 이 프로를 통해 그는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으며, 정장 대신 점퍼를 입고 농민들과 대화하는 '치노' 교수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후지모리의 이러한 압도적인 학술적 성취는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권(Partidocracia)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공부 잘하는 똑똑한 총장님"이라는 신선한 대안을 제시해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지적 오만함과 엘리트주의적 독단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학계에서 얻은 '전문가'라는 칭호를 무기로 삼아, 집권 후 자신에게 반대하는 의회와 사법부를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무식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논리를 펼쳤다. 결과적으로 4장의 학술 활동 시기는 훗날 그가 펼칠 '기술관료적 독재(Technocratic Dictatorship)'의 예행연습 기간이었던 셈이다.[7]
후지모리는 리마의 명문 공립학교인 '콜레히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과달루페(Colegio Nuestra Señora de Guadalupe)'에 입학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 학교는 페루의 수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을 배출한 곳이었으나, 후지모리는 정치적 네트워크를 쌓기보다는 수학과 과학 등 정답이 명확한 자연과학 분야에 몰두했다. 훗날 그가 정치인이 되어서도 토론이나 수사학보다는 숫자와 통계, 도표를 들이밀며 상대를 압박하던 스타일은 바로 이 시기 형성된 '기술적 완결성'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다.
1957년, 후지모리는 페루 최고의 농업 교육 기관인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Agraria La Molina, UNALM)에 입학한다. 농업은 당시 페루 경제의 근간이었으며, 일본계 이민자들이 가장 잘 정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분야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기계적인 우등생'이었다. 그는 1961년 졸업 당시 학과 수석은 물론 전체 수석(Valedictorian)을 차지하며 농학 엔지니어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동기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사교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며 오로지 도서관과 실험실을 오가는 전형적인 '너드(Nerd)'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통제와 성과 위주의 태도는 훗날 그가 스스로를 "말만 앞세우는 정치가가 아닌, 일하는 전문가(Tecnócrata)"라고 홍보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6]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지모리는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60년대 중반, 그는 포드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서 그는 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농학에서 수학으로 전공을 심화한 것은 데이터 분석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는데, 이때 익힌 통계학적 방법론은 훗날 그가 페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도입한 '후지 쇼크'의 이론적 배경을 이해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는 수학 석사 이후 프랑스에서도 유학하며 유럽의 농업 시스템과 기초 과학 체계를 연구했다.
이 시기 후지모리는 스페인어, 일본어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으며, 서구 선진국의 시스템을 직접 목격하며 페루의 낙후된 행정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학문을 즐기는 학자가 아니라, 학문을 '국가 개조의 도구'로 보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거듭났다.
귀국 후 후지모리는 모교인 라 몰리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본격적인 학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단순히 강의에만 머물지 않고 대학 내 행정직을 두루 거쳤다.
1984년, 그는 마침내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된다. 닛케이 출신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이었으며, 이는 그가 지닌 조직 관리 능력과 정치적 감각이 비범했음을 보여준다. 총장 재임 시절 그는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던 대학의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해외 원조를 이끌어내는 등 수완을 발휘했다.
1987년에는 페루 전체 국립대학교 총장 협의회(ANR)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국가 교육 정책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 시기 그는 페루 국영 방송(TV Peru)에서 'Concertando(협동하여)'라는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농업 문제와 경제 위기를 다루는 이 프로를 통해 그는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으며, 정장 대신 점퍼를 입고 농민들과 대화하는 '치노' 교수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후지모리의 이러한 압도적인 학술적 성취는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권(Partidocracia)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공부 잘하는 똑똑한 총장님"이라는 신선한 대안을 제시해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지적 오만함과 엘리트주의적 독단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학계에서 얻은 '전문가'라는 칭호를 무기로 삼아, 집권 후 자신에게 반대하는 의회와 사법부를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무식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논리를 펼쳤다. 결과적으로 4장의 학술 활동 시기는 훗날 그가 펼칠 '기술관료적 독재(Technocratic Dictatorship)'의 예행연습 기간이었던 셈이다.[7]
2.2. 학자로서의 삶[편집]
1960년대 중반,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페루 내 최고의 농업 엘리트 양성소인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Agraria La Molina, UNALM)의 교수로 임용된다. 당시 페루 사회에서 일본계 2세(Nisei)가 국립 대학교의 전임 교수가 된다는 것은 이례적인 성취였다. 그는 전공인 농학뿐만 아니라 수학적 모델링을 농업 경영에 접목하는 혁신적인 강의 스타일로 학생들 사이에서 '공포의 치노(Chino)' 혹은 '천재적인 치노'라는 별명을 얻으며 명성을 쌓았다.
후지모리는 단순한 강단 학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대학 행정 내에서 치밀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그는 마침내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선거 승리'였으며, 훗날 그가 국가 전체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 메커니즘을 학습한 시기이기도 했다. 총장 재임 시절 그는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던 대학을 살리기 위해 해외 원조를 적극적으로 끌어왔으며, 특히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DA)를 유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결과(Technocracy)"를 중시하는 자신의 통치 스타일을 정립했다.
후지모리가 정계에 입문하기 전, 그를 리마의 중산층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방송 활동이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페루 국영 방송(Channel 7)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인 'Concertando'의 진행을 맡았다. 당시 페루는 알란 가르시아 정부의 실정으로 경제가 파탄 나고 테러가 일상화된 암흑기였다.
후지모리는 이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복잡한 경제 수치를 도표를 써가며 설명하는 '지적인 전문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은 매일같이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던 차에, 감정을 배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 일본계 학자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8]
당시 페루의 대학가는 극좌 테러 조직인 빛나는 길의 침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총장으로서 후지모리는 학내 테러 세력과 직접 대치하며 공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학문의 자유도 질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대학에 군대를 투입해 테러범들을 소탕하는 강경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는 엘리트주의에 젖은 리마의 백인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농촌과 지방의 실상을 아는 본인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사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후지모리가 구축한 '전문가' 이미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정치적 타협이나 정당 정치를 "시간 낭비이자 부패의 온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가 선호한 방식은 효율적인 명령 체계와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그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권위주의적 전문가'로 변모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대학 행정을 이끌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측근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이너 서클' 문화는 훗날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와 같은 인물이 권력의 핵심으로 파고들 수 있는 폐쇄적인 통치 구조를 만들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깨끗하고 유능해 보였으나, 그 내면에는 기성 정당 정치를 혐오하는 아웃사이더의 냉소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9]
1980년대 후반, 페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연간 7,000%를 돌파하고 리마 시내에서 폭탄 테러가 터지는 상황에 이르자, 후지모리는 학계에만 머무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그는 주변의 학자들과 농업 전문가들을 모아 '캄비오 90(Cambio 90, 변화 90)'이라는 이름의 정치 단체를 결성한다.
이 단체는 정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호회'나 '전문가 집단'에 가까웠다. 자금도 조직도 없었지만, 후지모리는 자신이 가진 '총장'이라는 타이틀과 '농학자'라는 배경이 농민과 소외계층에게 먹힐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대학 교단에서 내려와 낡은 트랙터를 구입했다. 양복 대신 멜빵바지를 입고 흙먼지가 날리는 농촌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화려한 연설로 민중을 현혹하던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1980년대 페루는 국가라는 유기체가 도저히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85년 집권한 젊고 야심만만했던 중도좌파 성향의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은 포퓰리즘적 경제 정책을 남발하며 페루 경제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가르시아 정부는 외채 상환액을 수출액의 10%로 제한하겠다는 파격적인(그리고 무모한) 선언을 했고, 이는 국제 금융계로부터 페루가 고립되는 자살골이 되었다.
이 시기 페루의 경제 수치는 현대 경제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1980년대 후반 페루의 연간 물가 상승률은 무려 7,649%에 달했다. 아침에 빵 한 덩어리를 사던 돈이 저녁이면 종잇조각이 되는 수준이었으며, 화폐 단위인 '인티(Inti)'는 사실상 가치를 상실해 암시장에서 달러만이 유일한 신뢰의 척도가 되었다.
1988년부터 1990년 사이 페루의 GDP는 약 20% 이상 급감했다. 국민 소득은 196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절대 빈곤선 아래에서 신음했다.[10]
경제적 파탄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안보의 붕괴였다. 아비마엘 구스만이 이끄는 마오주의 극좌 테러 단체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은 안데스 산맥에서 내려와 수도 리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순한 게릴라전을 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탄 테러, 공직자 암살, 송전탑 파괴 등을 자행하며 국가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여기에 또 다른 극좌 무장 단체인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까지 가세하면서 페루 전역은 그야말로 '킬링필드'로 변했다. 테러범들은 마을의 촌장을 본보기로 처형하거나, 정부에 협조적인 농민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등 잔인한 수법을 동원해 공포를 확산시켰다. 정부군 역시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실종시키는 등 막장 행보를 보였고, 국민들은 '테러리스트의 칼'과 '정부군의 총'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지옥 같은 상황에 놓였다.[11]
당시 페루의 정당 정치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리마의 백인 상류층(Criollo)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들과 무능한 포퓰리즘에 빠진 중도좌파 정당들은 국민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국민들은 "투표를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깊은 무력감과 함께, 기존 정치인(Politicos)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의 공백' 상태는 훗날 후지모리와 같은 극단적인 아웃사이더가 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정치인들이 망친 나라를 '기술자(Technocrat)'나 '학자'가 구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리마의 세련된 엘리트가 아닌, 우리와 같이 고생해 본 투박한 인물을 갈망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적 절차보다는 당장 내 목숨을 노리는 테러를 막아줄 강력한 질서(Order)를 원하게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대학 총장으로서 쌓은 '지적인 이미지'와 일본계 이민자 자녀로서의 '성실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만약 1980년대의 페루가 평화롭고 번영했다면, 이름 없는 농학자가 대통령이 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1980년대의 파국은 알베르토 후지모리라는 괴물 혹은 영웅을 낳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였던 셈이다.[12]
경제와 안보가 무너지자 사회적 신뢰 자본도 바닥을 드러냈다. 치안이 마비된 거리에는 강도와 절도가 기승을 부렸고, 공무원들은 생계를 위해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전력 공급은 수시로 끊겨 밤마다 리마는 어둠에 잠겼으며, 깨끗한 물조차 공급되지 않아 콜레라가 창궐하는 등 중세 시대에 가까운 위생 상태를 보였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페루 국민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누구든 좋으니 제발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 대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세계적인 대문호 요사의 세련된 담론 대신, 낡은 트랙터를 몰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동양인 교수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페루 현대사의 거대한 변곡점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후지모리는 단순한 강단 학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대학 행정 내에서 치밀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4년, 그는 마침내 라 몰리나 국립 농업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된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선거 승리'였으며, 훗날 그가 국가 전체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 메커니즘을 학습한 시기이기도 했다. 총장 재임 시절 그는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던 대학을 살리기 위해 해외 원조를 적극적으로 끌어왔으며, 특히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DA)를 유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결과(Technocracy)"를 중시하는 자신의 통치 스타일을 정립했다.
후지모리가 정계에 입문하기 전, 그를 리마의 중산층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방송 활동이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페루 국영 방송(Channel 7)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인 'Concertando'의 진행을 맡았다. 당시 페루는 알란 가르시아 정부의 실정으로 경제가 파탄 나고 테러가 일상화된 암흑기였다.
후지모리는 이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복잡한 경제 수치를 도표를 써가며 설명하는 '지적인 전문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은 매일같이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던 차에, 감정을 배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 일본계 학자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8]
당시 페루의 대학가는 극좌 테러 조직인 빛나는 길의 침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총장으로서 후지모리는 학내 테러 세력과 직접 대치하며 공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학문의 자유도 질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대학에 군대를 투입해 테러범들을 소탕하는 강경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는 엘리트주의에 젖은 리마의 백인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농촌과 지방의 실상을 아는 본인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사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후지모리가 구축한 '전문가' 이미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정치적 타협이나 정당 정치를 "시간 낭비이자 부패의 온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가 선호한 방식은 효율적인 명령 체계와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그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권위주의적 전문가'로 변모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대학 행정을 이끌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측근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이너 서클' 문화는 훗날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와 같은 인물이 권력의 핵심으로 파고들 수 있는 폐쇄적인 통치 구조를 만들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깨끗하고 유능해 보였으나, 그 내면에는 기성 정당 정치를 혐오하는 아웃사이더의 냉소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9]
1980년대 후반, 페루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연간 7,000%를 돌파하고 리마 시내에서 폭탄 테러가 터지는 상황에 이르자, 후지모리는 학계에만 머무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그는 주변의 학자들과 농업 전문가들을 모아 '캄비오 90(Cambio 90, 변화 90)'이라는 이름의 정치 단체를 결성한다.
이 단체는 정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호회'나 '전문가 집단'에 가까웠다. 자금도 조직도 없었지만, 후지모리는 자신이 가진 '총장'이라는 타이틀과 '농학자'라는 배경이 농민과 소외계층에게 먹힐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대학 교단에서 내려와 낡은 트랙터를 구입했다. 양복 대신 멜빵바지를 입고 흙먼지가 날리는 농촌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화려한 연설로 민중을 현혹하던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1980년대 페루는 국가라는 유기체가 도저히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85년 집권한 젊고 야심만만했던 중도좌파 성향의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은 포퓰리즘적 경제 정책을 남발하며 페루 경제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가르시아 정부는 외채 상환액을 수출액의 10%로 제한하겠다는 파격적인(그리고 무모한) 선언을 했고, 이는 국제 금융계로부터 페루가 고립되는 자살골이 되었다.
이 시기 페루의 경제 수치는 현대 경제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1980년대 후반 페루의 연간 물가 상승률은 무려 7,649%에 달했다. 아침에 빵 한 덩어리를 사던 돈이 저녁이면 종잇조각이 되는 수준이었으며, 화폐 단위인 '인티(Inti)'는 사실상 가치를 상실해 암시장에서 달러만이 유일한 신뢰의 척도가 되었다.
1988년부터 1990년 사이 페루의 GDP는 약 20% 이상 급감했다. 국민 소득은 196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절대 빈곤선 아래에서 신음했다.[10]
경제적 파탄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안보의 붕괴였다. 아비마엘 구스만이 이끄는 마오주의 극좌 테러 단체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은 안데스 산맥에서 내려와 수도 리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순한 게릴라전을 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탄 테러, 공직자 암살, 송전탑 파괴 등을 자행하며 국가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여기에 또 다른 극좌 무장 단체인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까지 가세하면서 페루 전역은 그야말로 '킬링필드'로 변했다. 테러범들은 마을의 촌장을 본보기로 처형하거나, 정부에 협조적인 농민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등 잔인한 수법을 동원해 공포를 확산시켰다. 정부군 역시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실종시키는 등 막장 행보를 보였고, 국민들은 '테러리스트의 칼'과 '정부군의 총'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지옥 같은 상황에 놓였다.[11]
당시 페루의 정당 정치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리마의 백인 상류층(Criollo)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들과 무능한 포퓰리즘에 빠진 중도좌파 정당들은 국민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국민들은 "투표를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깊은 무력감과 함께, 기존 정치인(Politicos)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의 공백' 상태는 훗날 후지모리와 같은 극단적인 아웃사이더가 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정치인들이 망친 나라를 '기술자(Technocrat)'나 '학자'가 구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리마의 세련된 엘리트가 아닌, 우리와 같이 고생해 본 투박한 인물을 갈망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적 절차보다는 당장 내 목숨을 노리는 테러를 막아줄 강력한 질서(Order)를 원하게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대학 총장으로서 쌓은 '지적인 이미지'와 일본계 이민자 자녀로서의 '성실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만약 1980년대의 페루가 평화롭고 번영했다면, 이름 없는 농학자가 대통령이 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1980년대의 파국은 알베르토 후지모리라는 괴물 혹은 영웅을 낳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였던 셈이다.[12]
경제와 안보가 무너지자 사회적 신뢰 자본도 바닥을 드러냈다. 치안이 마비된 거리에는 강도와 절도가 기승을 부렸고, 공무원들은 생계를 위해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전력 공급은 수시로 끊겨 밤마다 리마는 어둠에 잠겼으며, 깨끗한 물조차 공급되지 않아 콜레라가 창궐하는 등 중세 시대에 가까운 위생 상태를 보였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페루 국민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누구든 좋으니 제발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 대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세계적인 대문호 요사의 세련된 담론 대신, 낡은 트랙터를 몰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동양인 교수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페루 현대사의 거대한 변곡점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2.3. 1990년 대선 대이변과 1차 집권기[편집]
1990년 페루 대선은 문자 그대로 '국가 부도 직전'의 아수라장에서 치러졌다. 당시 페루는 알란 가르시아 정부의 처참한 실정으로 인해 연간 물가 상승률이 7,000%를 상회하는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고, 리마 시내에서는 극좌 테러 단체 빛나는 길의 폭탄 테러가 일상이 된 상태였다. 국민들은 기존의 좌파 세력은 물론, 무능한 중도 우파 정당들 전체에 대해 극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먼저 치고 나간 인물은 세계적인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였다. 그는 자유주의 우파 연합인 '프레데모(FREDEMO)'를 결성하여 압도적인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요사는 서구 지성계의 총아였고, 세련된 매너와 구체적인 경제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고통스러운 긴축과 시장 개방"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담고 있었고, 당장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민층에게 요사는 '가진 자들(백인 엘리트)의 대변인'으로 비춰졌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 바로 알베르토 후지모리였다. 그는 당시 지지율 1% 미만의 무명 정치인이었으나, "말보다는 행동(Honradez, Tecnología y Trabajo)"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트랙터를 타고 농촌을 누비기 시작했다.
후지모리의 선거 전략은 철저하게 '반(反) 엘리트' 노선을 걸었다. 그는 요사의 화려한 정장과 대비되는 소박한 복장으로 대중 앞에 섰다. 특히 그가 스스로를 '치노(Chino, 동양인)'라고 지칭한 것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페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혼혈)와 원주민(인디오)들은 그동안 백인 상류층(Criollo) 주도의 정치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들에게 일본계 이민자의 아들인 후지모리는 자신들과 똑같이 차별받는 '아웃사이더'였고, 근면 성실하게 자수성가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원주민들은 후지모리에게서 자신들의 피부색과 닮은 동질감을 느꼈으며, 이는 "우리의 고통을 아는 유일한 후보"라는 강력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다.[13]
선거 초반, 어느 누구도 후지모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그의 이름을 '기타 후보'에 넣기도 바빴다. 그러나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했다. 그는 요사가 주장하는 '쇼크 요법(급진적 경제 개혁)'이 서민들을 다 죽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포 심리를 파고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지모리는 당시에 "나는 급격한 물가 인상이나 공공요금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요사와 차별화했다.
1990년 4월 8일, 1차 투표 결과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1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약 33%)
2위: 알베르토 후지모리 (약 29%)
압승을 예상했던 요사는 2위와의 격차가 불과 4%p 차이로 좁혀지자 당황했다. 반면 3, 4위를 기록한 좌파 진영의 표심은 "요사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하에 급격히 후지모리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결선 투표로 가는 과정에서 요사 진영은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요사를 지지하던 가톨릭 상층부와 기득권 세력이 후지모리의 '종교'와 '정체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페루는 가톨릭 국가였는데, 후지모리가 사실은 불교 신자라거나 개신교 세력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은 기득권층이 한 유능한 아시아계 전문가를 집단 따돌림(Bullying)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요사는 TV 토론에서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대중과 거리감을 둔 반면, 후지모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단어로 "나는 여러분을 위해 일할 기술자(Engineer)다"라고 강조했다.
1990년 6월 10일 실시된 결선 투표 결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62.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37.6%
후지모리는 리마의 빈민가와 안데스산맥의 농촌 지역에서 80%가 넘는 몰표를 받으며 압승을 거두었다. 정당 기반도, 정치 자금도 부족했던 한 명의 대학교수가 세계적인 대문호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 사건은, 현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업셋(Upset)'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대선의 승리는 후지모리에게 '국민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강력한 권위'라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의회 내 의석수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논리로 기존 정치권을 압박할 동력을 얻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후지모리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을 도왔던 정통 정치인들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인한 측근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였으며, 후지모리는 의회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절차'가 아닌 '효율적 독재'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또한 선거 때 공약했던 '반(反) 긴축' 약속을 취임 직후 파기하면서, 그는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강력한 통치 수단을 찾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먼저 치고 나간 인물은 세계적인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였다. 그는 자유주의 우파 연합인 '프레데모(FREDEMO)'를 결성하여 압도적인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요사는 서구 지성계의 총아였고, 세련된 매너와 구체적인 경제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고통스러운 긴축과 시장 개방"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담고 있었고, 당장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민층에게 요사는 '가진 자들(백인 엘리트)의 대변인'으로 비춰졌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 바로 알베르토 후지모리였다. 그는 당시 지지율 1% 미만의 무명 정치인이었으나, "말보다는 행동(Honradez, Tecnología y Trabajo)"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트랙터를 타고 농촌을 누비기 시작했다.
후지모리의 선거 전략은 철저하게 '반(反) 엘리트' 노선을 걸었다. 그는 요사의 화려한 정장과 대비되는 소박한 복장으로 대중 앞에 섰다. 특히 그가 스스로를 '치노(Chino, 동양인)'라고 지칭한 것은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다.
페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혼혈)와 원주민(인디오)들은 그동안 백인 상류층(Criollo) 주도의 정치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들에게 일본계 이민자의 아들인 후지모리는 자신들과 똑같이 차별받는 '아웃사이더'였고, 근면 성실하게 자수성가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원주민들은 후지모리에게서 자신들의 피부색과 닮은 동질감을 느꼈으며, 이는 "우리의 고통을 아는 유일한 후보"라는 강력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다.[13]
선거 초반, 어느 누구도 후지모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그의 이름을 '기타 후보'에 넣기도 바빴다. 그러나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했다. 그는 요사가 주장하는 '쇼크 요법(급진적 경제 개혁)'이 서민들을 다 죽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포 심리를 파고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지모리는 당시에 "나는 급격한 물가 인상이나 공공요금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요사와 차별화했다.
1990년 4월 8일, 1차 투표 결과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1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약 33%)
2위: 알베르토 후지모리 (약 29%)
압승을 예상했던 요사는 2위와의 격차가 불과 4%p 차이로 좁혀지자 당황했다. 반면 3, 4위를 기록한 좌파 진영의 표심은 "요사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하에 급격히 후지모리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결선 투표로 가는 과정에서 요사 진영은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요사를 지지하던 가톨릭 상층부와 기득권 세력이 후지모리의 '종교'와 '정체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페루는 가톨릭 국가였는데, 후지모리가 사실은 불교 신자라거나 개신교 세력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대중은 기득권층이 한 유능한 아시아계 전문가를 집단 따돌림(Bullying)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요사는 TV 토론에서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대중과 거리감을 둔 반면, 후지모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단어로 "나는 여러분을 위해 일할 기술자(Engineer)다"라고 강조했다.
1990년 6월 10일 실시된 결선 투표 결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62.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37.6%
후지모리는 리마의 빈민가와 안데스산맥의 농촌 지역에서 80%가 넘는 몰표를 받으며 압승을 거두었다. 정당 기반도, 정치 자금도 부족했던 한 명의 대학교수가 세계적인 대문호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 사건은, 현대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업셋(Upset)'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대선의 승리는 후지모리에게 '국민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강력한 권위'라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의회 내 의석수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논리로 기존 정치권을 압박할 동력을 얻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후지모리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을 도왔던 정통 정치인들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충성심을 확인한 측근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였으며, 후지모리는 의회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절차'가 아닌 '효율적 독재'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또한 선거 때 공약했던 '반(反) 긴축' 약속을 취임 직후 파기하면서, 그는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강력한 통치 수단을 찾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2.3.1. 후지 쇼크[편집]
1990년 8월 8일 저녁, 페루 전역의 TV와 라디오에서는 후안 카를로스 후르타도 밀러(Juan Carlos Hurtado Miller) 경제장관의 긴급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는 약 25분간 현재 페루가 처한 절망적인 경제 상황을 설명한 뒤, 마지막에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신의 가호가 페루와 함께하기를(Que Dios ayude al Perú)"이라는 문장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이것이 바로 페루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꾼 경제 개혁, '후지 쇼크'의 서막이었다.
당시 페루의 경제 상태는 화폐 가치는 휴지조각보다 못했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것이 리마 시민들의 일상이었다. 후지모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이 대선 기간 그토록 비판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충격 요법'을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하게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후지모리의 이 결정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배신이었다. 대선 당시 후지모리는 요사의 신자유주의 개혁안을 두고 "서민들을 굶겨 죽이는 살인적인 정책"이라며 맹비난했고, 자신은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하며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선 직후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뉴욕과 도쿄를 방문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관계자들을 만난 후지모리는 깨달았다. 국제 사회의 지원 없이는 페루의 회생이 불가능하며,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이 요구하는 가혹한 수준의 시장 개방과 긴축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취임 후 불과 11일 만에 단행된 이 조치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유가는 3,000% 인상되었고, 빵과 우유 등 기초 생필품 가격은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 치솟았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을 구해줄 줄 알았던 '치노(Chino)'가 자신들의 목을 죄는 정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후지모리에게는 '거짓말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나, 그는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몸 전체가 죽는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14] 후지 쇼크는 단순한 가격 인상이 아니라 체질 자체를 바꾸는 대수술이었다.
가격 통제 철폐는 정부가 억지로 누르고 있던 생필품 가격을 시장가로 완전히 해방시켰다. 환율 자유화는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겼다. 관세 인하 및 무역 자유화는 보호 무역주의를 폐기하고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여 수입품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보조금 삭감으로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요금에 투입되던 정부 보조금을 즉각 중단했다.
조치 직후 리마 시내에서는 대규모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다. 군경이 투입되어 치안을 유지해야 했고, 중산층 이하 서민들은 당장 다음 날 먹을 빵값이 없어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충격'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시장에 물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못 사던 시절이 가고, 비싸더라도 돈만 있으면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자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후지 쇼크는 단기적으로 페루 국민들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빈곤율은 급격히 상승했고,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상태에서 진행된 개혁은 수많은 아사자와 영양실조 아동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기적의 시작'이었다. 1990년 말부터 물가가 안정세로 돌아섰고, 페루는 다시 국제 금융 기구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정상 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후지모리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정치꾼들의 말장난보다 전문가의 독단적인 결단이 국가를 살린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졌으며, 이는 훗날 그가 의회를 무력화하고 독재로 나아가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15]
오늘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후지 쇼크는 '가장 잔인했지만 가장 효과적이었던 처방'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요사가 집권하여 이를 시행했다면 야당과 노조의 극심한 반발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오히려 '서민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당선된 후지모리가 뒤통수를 치듯 전격적으로 단행했기에 반대 세력이 손을 쓸 틈이 없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사회적 합의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후지모리는 의회와의 상의 없이 대통령령만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을 익히게 되었고, 이는 페루 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닌 '1인의 결단'에 의존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끼쳤다. 결국 후지 쇼크는 페루 경제를 구원했지만, 동시에 페루의 민주주의를 고사시키는 독초가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극명한 양면성을 지닌다.
당시 페루의 경제 상태는 화폐 가치는 휴지조각보다 못했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것이 리마 시민들의 일상이었다. 후지모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이 대선 기간 그토록 비판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충격 요법'을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하게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후지모리의 이 결정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배신이었다. 대선 당시 후지모리는 요사의 신자유주의 개혁안을 두고 "서민들을 굶겨 죽이는 살인적인 정책"이라며 맹비난했고, 자신은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하며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선 직후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뉴욕과 도쿄를 방문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관계자들을 만난 후지모리는 깨달았다. 국제 사회의 지원 없이는 페루의 회생이 불가능하며,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이 요구하는 가혹한 수준의 시장 개방과 긴축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취임 후 불과 11일 만에 단행된 이 조치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유가는 3,000% 인상되었고, 빵과 우유 등 기초 생필품 가격은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 치솟았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을 구해줄 줄 알았던 '치노(Chino)'가 자신들의 목을 죄는 정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후지모리에게는 '거짓말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나, 그는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몸 전체가 죽는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14] 후지 쇼크는 단순한 가격 인상이 아니라 체질 자체를 바꾸는 대수술이었다.
가격 통제 철폐는 정부가 억지로 누르고 있던 생필품 가격을 시장가로 완전히 해방시켰다. 환율 자유화는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겼다. 관세 인하 및 무역 자유화는 보호 무역주의를 폐기하고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여 수입품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보조금 삭감으로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요금에 투입되던 정부 보조금을 즉각 중단했다.
조치 직후 리마 시내에서는 대규모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다. 군경이 투입되어 치안을 유지해야 했고, 중산층 이하 서민들은 당장 다음 날 먹을 빵값이 없어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충격'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시장에 물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못 사던 시절이 가고, 비싸더라도 돈만 있으면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되자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후지 쇼크는 단기적으로 페루 국민들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빈곤율은 급격히 상승했고,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상태에서 진행된 개혁은 수많은 아사자와 영양실조 아동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기적의 시작'이었다. 1990년 말부터 물가가 안정세로 돌아섰고, 페루는 다시 국제 금융 기구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정상 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후지모리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정치꾼들의 말장난보다 전문가의 독단적인 결단이 국가를 살린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졌으며, 이는 훗날 그가 의회를 무력화하고 독재로 나아가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15]
오늘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후지 쇼크는 '가장 잔인했지만 가장 효과적이었던 처방'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요사가 집권하여 이를 시행했다면 야당과 노조의 극심한 반발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오히려 '서민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당선된 후지모리가 뒤통수를 치듯 전격적으로 단행했기에 반대 세력이 손을 쓸 틈이 없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사회적 합의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후지모리는 의회와의 상의 없이 대통령령만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을 익히게 되었고, 이는 페루 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닌 '1인의 결단'에 의존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끼쳤다. 결국 후지 쇼크는 페루 경제를 구원했지만, 동시에 페루의 민주주의를 고사시키는 독초가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극명한 양면성을 지닌다.
2.3.2. 의회와의 갈등[편집]
1990년 대선에서 후지모리가 당선되었을 때, 그는 기반이 전무한 신생 정당 '캄비오 90(Cambio 90)'의 후보였다. 행정부의 수반이 되는 데는 성공했으나, 입법부인 의회의 상황은 처참했다. 상원과 하원 모두 기성 거대 정당인 미주인민혁명동맹과 민주전선이 장악하고 있었고, 후지모리의 여당은 전체 의석의 20%도 채 되지 않는 초미니 여당에 불과했다.
당시 페루 정계의 거물들은 후지모리를 "어쩌다 운 좋게 당선된 정치 초짜" 정도로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특히 대선 경쟁자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지지했던 우파 연합과 알란 가르시아의 중도 좌파 세력은 후지모리가 제출하는 모든 법안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페루 현대사를 뒤흔든 '입법 전쟁'의 서막이었다.
후지모리는 집권 초기에 직면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강력한 경제 개혁안(후지 쇼크)을 밀어붙여야 했다. 또한, 전국을 피로 물들이던 테러 조직 빛나는 길에 대응하기 위해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테러범 처벌을 강화하는 긴급 조치권이 절실했다.
그러나 의회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야당은 후지모리의 경제 정책이 "서민을 죽이는 신자유주의적 폭거"라고 비난하며 예산안을 삭감했고, 대테러 법안에 대해서는 "군부의 독재를 부활시키려 한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경제 분야에서 민영화 법안과 세제 개편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해 외자 유치에 차질이 생겼다. 치안 분야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즉결 처형 권한이나 군법회의 회부권 등이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번번이 반려되었다.
후지모리 입장에서는 "국가가 망해가는데 정치인들이 자기 밥그릇 싸움만 하느라 협조를 안 해준다"는 분노가 쌓여갔다. 실제로 당시 페루 의회는 부패와 무능의 대명사로 불리며 국민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후지모리는 이를 놓치지 않고 여론전의 도구로 삼았다.[16]
의회와의 갈등이 격화되던 이 시기, 후지모리의 곁에는 '페루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는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있었다. 몬테시노스는 의회를 설득하는 민주적 절차 대신, 정보국(SIN)의 권력을 이용해 야당 의원들을 '처리'할 방법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야당 의원들에 대한 도청, 뒷조사, 그리고 뇌물을 통한 매수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몬테시노스의 공작으로도 거대 야당의 벽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었다. 후지모리는 서서히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1991년 말, 의회가 대통령의 입법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갈등은 입법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법부 역시 후지모리의 초법적인 행정 명령에 대해 잇따라 위헌 판결을 내렸다. 특히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에 대한 구금 연장이나 군부의 민간인 수사권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자, 후지모리는 사법부마저 "테러리스트의 조력자"라고 몰아붙였다.
이러한 전방위적 충돌 속에서 후지모리는 군부 수뇌부와 밀약을 맺고 '최후의 수단'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군부는 테러 진압 과정에서 자신들이 기소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후지모리는 그들에게 면죄부를 약속하는 대신 쿠데타 시 군의 충성을 보장받았다.
이 시기의 갈등은 단순히 정책의 차이를 넘어선 '체제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기성 정치권은 아웃사이더인 후지모리를 제거하려 했고, 후지모리는 기성 정치권을 '청산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다. 1990년부터 1992년 초까지의 극한 대립은, 결국 1992년 4월 5일 후지모리가 탱크를 앞세워 의회를 해산하는 '자친 쿠데타(Auto-golpe)'의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17]
당시 페루 정계의 거물들은 후지모리를 "어쩌다 운 좋게 당선된 정치 초짜" 정도로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특히 대선 경쟁자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지지했던 우파 연합과 알란 가르시아의 중도 좌파 세력은 후지모리가 제출하는 모든 법안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페루 현대사를 뒤흔든 '입법 전쟁'의 서막이었다.
후지모리는 집권 초기에 직면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강력한 경제 개혁안(후지 쇼크)을 밀어붙여야 했다. 또한, 전국을 피로 물들이던 테러 조직 빛나는 길에 대응하기 위해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테러범 처벌을 강화하는 긴급 조치권이 절실했다.
그러나 의회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야당은 후지모리의 경제 정책이 "서민을 죽이는 신자유주의적 폭거"라고 비난하며 예산안을 삭감했고, 대테러 법안에 대해서는 "군부의 독재를 부활시키려 한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경제 분야에서 민영화 법안과 세제 개편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해 외자 유치에 차질이 생겼다. 치안 분야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즉결 처형 권한이나 군법회의 회부권 등이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번번이 반려되었다.
후지모리 입장에서는 "국가가 망해가는데 정치인들이 자기 밥그릇 싸움만 하느라 협조를 안 해준다"는 분노가 쌓여갔다. 실제로 당시 페루 의회는 부패와 무능의 대명사로 불리며 국민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후지모리는 이를 놓치지 않고 여론전의 도구로 삼았다.[16]
의회와의 갈등이 격화되던 이 시기, 후지모리의 곁에는 '페루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는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있었다. 몬테시노스는 의회를 설득하는 민주적 절차 대신, 정보국(SIN)의 권력을 이용해 야당 의원들을 '처리'할 방법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야당 의원들에 대한 도청, 뒷조사, 그리고 뇌물을 통한 매수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몬테시노스의 공작으로도 거대 야당의 벽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었다. 후지모리는 서서히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1991년 말, 의회가 대통령의 입법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갈등은 입법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법부 역시 후지모리의 초법적인 행정 명령에 대해 잇따라 위헌 판결을 내렸다. 특히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에 대한 구금 연장이나 군부의 민간인 수사권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자, 후지모리는 사법부마저 "테러리스트의 조력자"라고 몰아붙였다.
이러한 전방위적 충돌 속에서 후지모리는 군부 수뇌부와 밀약을 맺고 '최후의 수단'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군부는 테러 진압 과정에서 자신들이 기소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후지모리는 그들에게 면죄부를 약속하는 대신 쿠데타 시 군의 충성을 보장받았다.
이 시기의 갈등은 단순히 정책의 차이를 넘어선 '체제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기성 정치권은 아웃사이더인 후지모리를 제거하려 했고, 후지모리는 기성 정치권을 '청산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다. 1990년부터 1992년 초까지의 극한 대립은, 결국 1992년 4월 5일 후지모리가 탱크를 앞세워 의회를 해산하는 '자친 쿠데타(Auto-golpe)'의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17]
2.3.3. 자친쿠데타 시전[편집]
1990년 취임 이후 후지모리는 이른바 '후지 쇼크'로 불리는 급진적 경제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의회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당시 의회는 제1당인 미국 인민 혁명 동맹과 제2당인 민주전선(FREDEMO)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신생 정당 '캄비오 90' 출신인 후지모리는 기반이 전무했다.
의회는 후지모리가 제출한 경제 자유화 법안과 대테러 비상조치법에 대해 "독재적 발상"이라며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고, 후지모리는 이를 "부패한 구태 정치인들의 국정 발목 잡기"라고 규정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테러 조직 빛나는 길이 리마 도심까지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국가 존립을 위협하던 상황에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에게 '극단적 선택'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1992년 4월 5일 밤, 페루 전역의 TV 채널이 갑자기 중단되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리마 시내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곧이어 화면에 나타난 후지모리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의회는 후지모리가 제출한 경제 자유화 법안과 대테러 비상조치법에 대해 "독재적 발상"이라며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고, 후지모리는 이를 "부패한 구태 정치인들의 국정 발목 잡기"라고 규정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테러 조직 빛나는 길이 리마 도심까지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국가 존립을 위협하던 상황에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에게 '극단적 선택'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1992년 4월 5일 밤, 페루 전역의 TV 채널이 갑자기 중단되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리마 시내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곧이어 화면에 나타난 후지모리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본인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여, 의회를 임시적으로 해산(Disolver)하고 사법부를 전면 개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른바 '자친쿠데타(Auto-golpe)'의 시작이었다. 일반적인 쿠데타가 군부가 대통령을 쫓아내는 방식이라면, 자친쿠데타는 현직 대통령이 군부를 등에 업고 자신을 견제하는 헌법 기관(의회, 법원)을 스스로 파괴하는 변칙적인 방식이었다. 후지모리는 "의회가 테러리스트와 마약 밀매업자들을 비호하며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가 재건을 위한 '비상 재건 정부(Gobierno de Emergencia y Reconstrucción Nacional)'의 출범을 선포했다.
담화 직후, 중무장한 군인들은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 대법원장과 주요 판사들 역시 해임되었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에는 검열관이 파견되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막시모 산 로만은 이 조치를 헌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자처하며 저항했으나, 이미 군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한 후지모리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국(SIN)의 몬테시노스는 반대파 의원들에 대한 도청 자료와 스캔들을 활용해 이들을 위협하거나 매수하는 등 막후에서 공작을 진두지휘했다. 페루의 민주주의가 하룻밤 사이에 일인 독재 체제로 회귀하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 명백한 반헌법적 폭거에 대해 페루 국민들이 보여준 반응이었다. 쿠데타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후지모리에 대한 지지율은 무려 80%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는 당시 페루인들이 느꼈던 절박함의 반증이기도 했다. 매일같이 터지는 테러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지친 서민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의회를 해산하고 "강한 손(Mano dura)"으로 질서를 잡겠다는 후지모리의 결단에 환호했다. 후지모리는 이를 "민중의 의지에 따른 혁명"이라고 포장하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정면으로 돌파했다.[18]
1992년의 자친쿠데타는 후지모리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사건이다. 이를 통해 그는 의회의 견제 없이 자신의 경제 모델인 '네오리버럴리즘'을 완성할 수 있었고, 군부에게 전권을 부여해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페루 정치 사법 시스템의 중립성을 완전히 파괴한 시점이기도 했다. 사법부는 대통령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군부는 정치적 중립을 잃고 부패의 늪에 빠졌다. 훗날 후지모리가 실각한 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수많은 인권 침해와 부패 공작의 씨앗이 바로 이 '4월 5일'에 뿌려진 셈이다. 오늘날에도 페루 정계에서 '4월 5일'은 민주주의의 치욕일인가, 아니면 국가 구제의 결단인가를 두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지점이다.
2.3.4. 1993년 개헌[편집]
1992년 4월 5일의 자친쿠데타를 통해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사법부를 장악한 후지모리 앞에는 거대한 숙제가 놓여 있었다. 탱크를 동원해 헌정 질서를 파괴한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경제 제재 위협을 잠재우면서도, 본인의 초법적 권한을 '합법화'할 새로운 틀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미주기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페루의 독재화를 경고하며 민주주의 복귀를 압박했다. 이에 후지모리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헌법 자체를 뜯어고쳐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새로 짜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1992년 말 소집된 '민주 제헌 의회(CCD)'와 그 결과물인 1993년 페루 헌법의 탄생 배경이다.
1993년 개헌의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입법부 구조의 전면 개편이었다. 기존 페루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존재하는 이원적 구조였으나, 새 헌법은 이를 120석 규모의 단원제(Unicameralism)로 통합했다.[19]
후지모리 측의 명분은 "비효율적인 정쟁을 일삼는 상원을 폐지하여 신속한 입법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었으나, 실질적인 의도는 명확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기 쉬운 양원제보다, 대통령의 친위 정당이 장악하기 쉬운 단원제를 통해 입법부를 사실상 통치권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시키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개헌 이후 페루 의회는 후지모리의 명령을 법안으로 통과시키는 '거수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대목은 역시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의 폐지였다. 1979년 구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엄격히 금지했으나, 1993년 신헌법은 '1회에 한하여 즉시 재선'이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이 조항은 후지모리가 1995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으며, 훗날 2000년 3선 도전 당시 "신헌법 하에서는 첫 번째 선거가 1995년이므로 한 번 더 나갈 수 있다"는 궤변적 논리인 '해석적 법률(Ley de Interpretación Auténtica)'을 탄생시킨 원죄가 되었다. 즉, 1993년 개헌은 후지모리라는 개인을 위해 맞춤 제작된 '정치적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독점 외에도 1993년 헌법은 경제적으로 매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지모리는 후지 쇼크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개혁을 되돌릴 수 없도록 아예 헌법에 명시했다.
그는 국가가 민간 기업과 경쟁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민간이 할 수 없는 공공 영역에만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외국인 투자자에게 내국인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며, 투자 계약의 안정성을 헌법이 보증했다. 정치권이 화폐 발행에 개입하여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중앙은행에 강력한 독립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조항들은 페루 경제의 고질적인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외자 유치를 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나, 한편으로는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와 사회 안전망 해체라는 부작용을 낳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20]
1993년 10월 31일, 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당시 아비마엘 구스만 체포 등으로 후지모리의 인기가 절정에 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찬성 52.3% 대 반대 47.7%로 생각보다 근소한 차이였다. 리마를 비롯한 도시 지역에서는 후지모리의 '효율성'에 손을 들어주었으나, 지방과 지식인 계층에서는 독재의 서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승리한 후지모리는 이를 "국민이 나에게 전권을 위임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본격적인 '후지모리식 통치(Fujimorato)'의 시대를 열게 된다. 이로써 페루는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였으나, 내용상으로는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틀어쥐는 '민주적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미주기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페루의 독재화를 경고하며 민주주의 복귀를 압박했다. 이에 후지모리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헌법 자체를 뜯어고쳐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새로 짜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1992년 말 소집된 '민주 제헌 의회(CCD)'와 그 결과물인 1993년 페루 헌법의 탄생 배경이다.
1993년 개헌의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입법부 구조의 전면 개편이었다. 기존 페루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존재하는 이원적 구조였으나, 새 헌법은 이를 120석 규모의 단원제(Unicameralism)로 통합했다.[19]
후지모리 측의 명분은 "비효율적인 정쟁을 일삼는 상원을 폐지하여 신속한 입법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었으나, 실질적인 의도는 명확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기 쉬운 양원제보다, 대통령의 친위 정당이 장악하기 쉬운 단원제를 통해 입법부를 사실상 통치권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시키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개헌 이후 페루 의회는 후지모리의 명령을 법안으로 통과시키는 '거수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대목은 역시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의 폐지였다. 1979년 구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엄격히 금지했으나, 1993년 신헌법은 '1회에 한하여 즉시 재선'이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이 조항은 후지모리가 1995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으며, 훗날 2000년 3선 도전 당시 "신헌법 하에서는 첫 번째 선거가 1995년이므로 한 번 더 나갈 수 있다"는 궤변적 논리인 '해석적 법률(Ley de Interpretación Auténtica)'을 탄생시킨 원죄가 되었다. 즉, 1993년 개헌은 후지모리라는 개인을 위해 맞춤 제작된 '정치적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독점 외에도 1993년 헌법은 경제적으로 매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후지모리는 후지 쇼크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개혁을 되돌릴 수 없도록 아예 헌법에 명시했다.
그는 국가가 민간 기업과 경쟁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민간이 할 수 없는 공공 영역에만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외국인 투자자에게 내국인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며, 투자 계약의 안정성을 헌법이 보증했다. 정치권이 화폐 발행에 개입하여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중앙은행에 강력한 독립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조항들은 페루 경제의 고질적인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외자 유치를 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나, 한편으로는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와 사회 안전망 해체라는 부작용을 낳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20]
1993년 10월 31일, 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당시 아비마엘 구스만 체포 등으로 후지모리의 인기가 절정에 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찬성 52.3% 대 반대 47.7%로 생각보다 근소한 차이였다. 리마를 비롯한 도시 지역에서는 후지모리의 '효율성'에 손을 들어주었으나, 지방과 지식인 계층에서는 독재의 서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승리한 후지모리는 이를 "국민이 나에게 전권을 위임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본격적인 '후지모리식 통치(Fujimorato)'의 시대를 열게 된다. 이로써 페루는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였으나, 내용상으로는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틀어쥐는 '민주적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2.3.5. 국가정보국(SIN)의 비대화[편집]
1990년 후지모리가 집권할 당시, 페루 국가정보국(Servicio de Inteligencia Nacional, 이하 SIN)은 예산 부족과 비효율성에 시달리던 무기력한 조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자신의 '오른팔'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를 실질적 수장으로 앉히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SIN은 단순한 정보 수집 기관을 넘어, 입법·사법·행정 3권을 뒤에서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이자 후지모리 정권의 생존을 책임지는 중추 신경계로 변모했다.
후지모리는 전통적인 군부나 정당 조직보다 SIN을 더 신뢰했다. 이는 그가 기성 정치권에 기반이 없는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인데, 자신을 보호해 줄 세력이 없던 후지모리에게 SIN은 반대파를 감시하고 제거하며,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었다. 결과적으로 SIN은 대통령궁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으며, 리마의 초릴로스(Chorrillos)에 위치한 SIN 본부는 페루의 실질적인 권력 핵심부가 되었다.
SIN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첨단 장비를 동원한 전방위적 도청이었다. 몬테시노스는 이스라엘과 미국 등지에서 최신 도청 장비를 대거 들여와 정치인, 군 장성, 언론인, 심지어 후지모리의 각료들까지 감시 하에 두었다.
감시 대상은 야당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부 내 잠재적 배신자, 유력 기업인, 그리고 후지모리에게 비판적인 가톨릭 성직자들까지 포함되었다. SIN은 리마 시내 주요 전화국을 장악하여 실시간으로 통화를 녹음했으며, 주요 호텔과 식당에 정보원을 심어 유력 인사들의 사생활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단순히 국가 안보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을 협박하거나 매수하여 정권에 복종하게 만드는 이른바 'X-파일'로 축적되었다.[21]
후지모리는 SIN을 통해 군부를 철저히 손아귀에 넣었다. 본래 페루 군부는 정치적 독립성이 강한 집단이었으나, 몬테시노스는 SIN의 자금을 활용해 군 장성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상납하고 인사권을 휘둘렀다.
SIN은 실력 있는 군인보다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마약 밀매 조직과의 결탁이나 군수 물자 횡령 등을 묵인해주는 대신, 그들의 약점을 잡고 SIN의 통제 하에 두었다. 1992년 자친쿠데타 이후 군 내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던 장교들은 '테러리스트 내통' 등의 누명을 씌워 강제 예편시키거나 투옥했다.
이로 인해 페루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닌 '후지모리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SIN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언론을 조직적으로 오염시켰다. 이 시기 등장한 것이 이른바 '치차(Chicha) 언론'이다.[ '치차'는 페루의 전통 음료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저급하고 조잡한 노란 언론(Yellow Journalism)을 의미한다.]
SIN은 막대한 비자금을 투입해 수많은 타블로이드 판형의 저질 일간지들을 창간하거나 매수했다. 이 신문들의 임무는 명확했다. 1면 헤드라인에 야당 후보의 스캔들을 조작해 싣거나, 후지모리에게 반대하는 인사들을 '국가 반역자', '동성애자', '정신이상자'로 매도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동시에 지상파 방송사 사장들에게는 매달 거액의 현금 뭉치를 지급하며 뉴스 보도 지침을 하달했다. 방송에서 후지모리의 경제 성과는 찬양하되, SIN의 고문이나 인권 유린 의혹은 철저히 침묵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여론 조작은 정보 기관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 생태계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남았다.
SIN이 이토록 방대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통제받지 않는 비자금이었다. 후지모리는 국방비와 내무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SIN의 기밀비로 전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또한 국영 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한 리베이트, 마약 카르텔과의 결탁을 통한 보호세 수령, 무기 도입 과정에서의 커미션 등이 모두 SIN의 금고로 흘러 들어갔다. 이 돈은 다시 판사, 검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을 매수하는 데 사용되어 후지모리 정권의 '철밥통'을 유지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1500년대 잉카 제국 멸망 이후 페루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한 부패 네트워크가 정보 기관이라는 미명 하에 가동되었던 셈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기관 자체가 범죄 조직화된 '클레프토크라시(Kleptocracy, 도둑 정치)'의 정점이었다.
후지모리는 전통적인 군부나 정당 조직보다 SIN을 더 신뢰했다. 이는 그가 기성 정치권에 기반이 없는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인데, 자신을 보호해 줄 세력이 없던 후지모리에게 SIN은 반대파를 감시하고 제거하며,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었다. 결과적으로 SIN은 대통령궁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으며, 리마의 초릴로스(Chorrillos)에 위치한 SIN 본부는 페루의 실질적인 권력 핵심부가 되었다.
SIN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첨단 장비를 동원한 전방위적 도청이었다. 몬테시노스는 이스라엘과 미국 등지에서 최신 도청 장비를 대거 들여와 정치인, 군 장성, 언론인, 심지어 후지모리의 각료들까지 감시 하에 두었다.
감시 대상은 야당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부 내 잠재적 배신자, 유력 기업인, 그리고 후지모리에게 비판적인 가톨릭 성직자들까지 포함되었다. SIN은 리마 시내 주요 전화국을 장악하여 실시간으로 통화를 녹음했으며, 주요 호텔과 식당에 정보원을 심어 유력 인사들의 사생활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단순히 국가 안보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을 협박하거나 매수하여 정권에 복종하게 만드는 이른바 'X-파일'로 축적되었다.[21]
후지모리는 SIN을 통해 군부를 철저히 손아귀에 넣었다. 본래 페루 군부는 정치적 독립성이 강한 집단이었으나, 몬테시노스는 SIN의 자금을 활용해 군 장성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상납하고 인사권을 휘둘렀다.
SIN은 실력 있는 군인보다는 후지모리와 몬테시노스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마약 밀매 조직과의 결탁이나 군수 물자 횡령 등을 묵인해주는 대신, 그들의 약점을 잡고 SIN의 통제 하에 두었다. 1992년 자친쿠데타 이후 군 내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던 장교들은 '테러리스트 내통' 등의 누명을 씌워 강제 예편시키거나 투옥했다.
이로 인해 페루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닌 '후지모리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SIN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언론을 조직적으로 오염시켰다. 이 시기 등장한 것이 이른바 '치차(Chicha) 언론'이다.[ '치차'는 페루의 전통 음료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저급하고 조잡한 노란 언론(Yellow Journalism)을 의미한다.]
SIN은 막대한 비자금을 투입해 수많은 타블로이드 판형의 저질 일간지들을 창간하거나 매수했다. 이 신문들의 임무는 명확했다. 1면 헤드라인에 야당 후보의 스캔들을 조작해 싣거나, 후지모리에게 반대하는 인사들을 '국가 반역자', '동성애자', '정신이상자'로 매도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동시에 지상파 방송사 사장들에게는 매달 거액의 현금 뭉치를 지급하며 뉴스 보도 지침을 하달했다. 방송에서 후지모리의 경제 성과는 찬양하되, SIN의 고문이나 인권 유린 의혹은 철저히 침묵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여론 조작은 정보 기관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 생태계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남았다.
SIN이 이토록 방대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통제받지 않는 비자금이었다. 후지모리는 국방비와 내무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SIN의 기밀비로 전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또한 국영 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한 리베이트, 마약 카르텔과의 결탁을 통한 보호세 수령, 무기 도입 과정에서의 커미션 등이 모두 SIN의 금고로 흘러 들어갔다. 이 돈은 다시 판사, 검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을 매수하는 데 사용되어 후지모리 정권의 '철밥통'을 유지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1500년대 잉카 제국 멸망 이후 페루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한 부패 네트워크가 정보 기관이라는 미명 하에 가동되었던 셈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기관 자체가 범죄 조직화된 '클레프토크라시(Kleptocracy, 도둑 정치)'의 정점이었다.
2.3.6.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라 칸투타 사건[편집]
1991년 후반기, 페루 리마의 민심은 흉흉했다. 극좌 마오주의 테러 조직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의 도심 테러가 격화되던 시기였다. 사건이 발생한 리마의 '바리오스 알토스(Barrios Altos)' 구역은 역사적으로 서민층이 거주하던 밀집 지역으로, 정보국(SIN)은 이곳의 특정 건물을 '빛나는 길'의 비밀 거점이나 자금 조달처로 의심하고 있었다.
1991년 11월 3일 밤, 바리오스 알토스의 한 공동주택(Quinta) 마당에서는 아이스크림 판매업자들이 이웃들과 함께 파티를 열고 있었다.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던 평화로운 현장에 돌연 복면을 쓴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두 대의 지프차에서 내린 뒤, 파티 중이던 사람들을 벽으로 몰아넣고 아무런 예고 없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이 습격으로 8세 소년을 포함한 15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4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는 수백 발의 탄피가 흩어져 있었으며, 생존자들은 괴한들이 군용 무기와 소음기를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 권력의 무차별적 폭력을 상징하는 잔혹한 범죄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초기 정부 발표는 이 사건을 테러 조직 간의 내분이나 보복 살인으로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도한 세력은 단순한 괴한이 아닌 페루 육군 정보국(SIE) 산하의 비밀 암살 부대인 '콜리나 그룹'임이 밝혀졌다.
산티아고 마르틴 리바(Santiago Martín Rivas) 대위가 이끄는 이 부대는 "테러리스트를 뿌리 뽑기 위해 초법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명목하에 조직된 죽음의 부대였다. 이들은 정보국(SIN)의 실권자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직속 통제를 받았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의 묵인 혹은 승인 없이는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구조였다. [22]
사건 직후 페루 의회 내 야당 의원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1992년 후지모리의 자친쿠데타 이후 의회가 해산되면서 조사는 동력을 잃었다. 사법부 역시 후지모리의 측근들로 채워지면서 바리오스 알토스 사건에 대한 기소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 사건은 후지모리 통치기의 명과 암 중 가장 어두운 단면을 상징한다. 효율적인 테러 진압이라는 명분 아래 무고한 시민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페루 사회 내에서 후지모리즘(Fujimorismo)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
1992년은 페루 현대사에서 '피의 해'로 기억된다. 빛나는 길의 타라타 거리 폭탄 테러로 리마 전역이 공포에 휩싸인 지 불과 이틀 뒤인 7월 18일 새벽, 리마 외곽의 국립 교육 대학교(일명 '라 칸투타' 대학교) 기숙사에 무장한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후지모리 정부 내 비밀 암살 조직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 대원들이었다.
당시 군부는 이 대학교를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기숙사 문을 부수고 들어가 학생 9명과 교수 1명을 강제로 끌어냈다. 피해자들은 눈이 가려진 채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앞서 발생한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더불어 후지모리 정권의 도덕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기폭제가 된다.[23]
사건 직후 피해자 가족들은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정부의 대답은 차가웠다. 군부와 정보국(SIN)은 "그들이 스스로 잠적했거나 테러 조직에 가담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며 발뼘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정보력을 동원해 언론의 입을 막았고, 국회 차원의 조사 시도는 여당인 '캄비오 90'의 조직적인 방해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특히 후지모리 대통령 본인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했느냐가 훗날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콜리나 그룹은 단순한 자생적 조직이 아니라 대통령의 승인 하에 예산과 무기를 지원받는 '국가 공인 암살단'이었다. 후지모리는 테러 척결이라는 명분 하에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묵시적 승인을 내린 상태였으며, 이는 사실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필적 고의' 혹은 '직접 지시'나 다름없었다.
완전범죄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1993년 7월, 리마 인근의 시엔기야(Cieneguilla) 지역에서 불에 탄 유골과 유지품이 발견되면서 반전을 맞이한다. 한 주간지의 제보로 시작된 발굴 작업에서 피해자들의 옷가지와 열쇠 등이 발견되었고, 이는 라 칸투타 대학에서 실종된 이들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범인들은 시신을 매장했다가 수사가 좁혀오자 다시 파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불태우는 등 치밀한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하지만 타다 남은 뼈 조각과 피해자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가 결정적 증거가 되어 돌아왔다. 이 발견으로 페루 사회는 뒤집어졌고, 국제 사회 역시 후지모리 정권의 인권 감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후지모리 정부는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콜리나 그룹의 하급 대원 몇 명을 군사 법정에 세워 형식적인 형량을 선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만극이었다. 1995년, 후지모리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소위 '사면법(Ley de Amnistía)'을 통과시킨다. 1980년부터 1995년 사이 테러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군과 경찰의 모든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라 칸투타 사건의 가해자들은 전원 석방되었고, 피해자 유족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후지모리는 "국가의 평화를 위해 과거의 상처를 덮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명백히 자신의 측근들과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방패막이에 불과했다.[24]
라 칸투타 사건은 단순한 과거사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도주한 뒤, 페루 사법부는 이 사건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그를 끝까지 추적했다. 2007년 칠레에서 송환된 후지모리는 바로 이 라 칸투타 사건과 바리오스 알토스 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았다.
결국 라 칸투타 사건은 후지모리에게 '테러를 잡은 영웅'이라는 칭호 대신 '살인마의 수장'이라는 꼬리표를 영구히 남기게 되었다.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에는 현재 작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7월 18일이면 페루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991년 11월 3일 밤, 바리오스 알토스의 한 공동주택(Quinta) 마당에서는 아이스크림 판매업자들이 이웃들과 함께 파티를 열고 있었다.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던 평화로운 현장에 돌연 복면을 쓴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두 대의 지프차에서 내린 뒤, 파티 중이던 사람들을 벽으로 몰아넣고 아무런 예고 없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이 습격으로 8세 소년을 포함한 15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4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는 수백 발의 탄피가 흩어져 있었으며, 생존자들은 괴한들이 군용 무기와 소음기를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 권력의 무차별적 폭력을 상징하는 잔혹한 범죄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초기 정부 발표는 이 사건을 테러 조직 간의 내분이나 보복 살인으로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도한 세력은 단순한 괴한이 아닌 페루 육군 정보국(SIE) 산하의 비밀 암살 부대인 '콜리나 그룹'임이 밝혀졌다.
산티아고 마르틴 리바(Santiago Martín Rivas) 대위가 이끄는 이 부대는 "테러리스트를 뿌리 뽑기 위해 초법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명목하에 조직된 죽음의 부대였다. 이들은 정보국(SIN)의 실권자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직속 통제를 받았으며, 후지모리 대통령의 묵인 혹은 승인 없이는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구조였다. [22]
사건 직후 페루 의회 내 야당 의원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1992년 후지모리의 자친쿠데타 이후 의회가 해산되면서 조사는 동력을 잃었다. 사법부 역시 후지모리의 측근들로 채워지면서 바리오스 알토스 사건에 대한 기소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 사건은 후지모리 통치기의 명과 암 중 가장 어두운 단면을 상징한다. 효율적인 테러 진압이라는 명분 아래 무고한 시민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페루 사회 내에서 후지모리즘(Fujimorismo)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
1992년은 페루 현대사에서 '피의 해'로 기억된다. 빛나는 길의 타라타 거리 폭탄 테러로 리마 전역이 공포에 휩싸인 지 불과 이틀 뒤인 7월 18일 새벽, 리마 외곽의 국립 교육 대학교(일명 '라 칸투타' 대학교) 기숙사에 무장한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후지모리 정부 내 비밀 암살 조직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 대원들이었다.
당시 군부는 이 대학교를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기숙사 문을 부수고 들어가 학생 9명과 교수 1명을 강제로 끌어냈다. 피해자들은 눈이 가려진 채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사건은 앞서 발생한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더불어 후지모리 정권의 도덕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기폭제가 된다.[23]
사건 직후 피해자 가족들은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정부의 대답은 차가웠다. 군부와 정보국(SIN)은 "그들이 스스로 잠적했거나 테러 조직에 가담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며 발뼘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정보력을 동원해 언론의 입을 막았고, 국회 차원의 조사 시도는 여당인 '캄비오 90'의 조직적인 방해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특히 후지모리 대통령 본인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했느냐가 훗날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콜리나 그룹은 단순한 자생적 조직이 아니라 대통령의 승인 하에 예산과 무기를 지원받는 '국가 공인 암살단'이었다. 후지모리는 테러 척결이라는 명분 하에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묵시적 승인을 내린 상태였으며, 이는 사실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필적 고의' 혹은 '직접 지시'나 다름없었다.
완전범죄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1993년 7월, 리마 인근의 시엔기야(Cieneguilla) 지역에서 불에 탄 유골과 유지품이 발견되면서 반전을 맞이한다. 한 주간지의 제보로 시작된 발굴 작업에서 피해자들의 옷가지와 열쇠 등이 발견되었고, 이는 라 칸투타 대학에서 실종된 이들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범인들은 시신을 매장했다가 수사가 좁혀오자 다시 파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불태우는 등 치밀한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하지만 타다 남은 뼈 조각과 피해자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가 결정적 증거가 되어 돌아왔다. 이 발견으로 페루 사회는 뒤집어졌고, 국제 사회 역시 후지모리 정권의 인권 감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후지모리 정부는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콜리나 그룹의 하급 대원 몇 명을 군사 법정에 세워 형식적인 형량을 선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만극이었다. 1995년, 후지모리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소위 '사면법(Ley de Amnistía)'을 통과시킨다. 1980년부터 1995년 사이 테러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군과 경찰의 모든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라 칸투타 사건의 가해자들은 전원 석방되었고, 피해자 유족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후지모리는 "국가의 평화를 위해 과거의 상처를 덮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명백히 자신의 측근들과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방패막이에 불과했다.[24]
라 칸투타 사건은 단순한 과거사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도주한 뒤, 페루 사법부는 이 사건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그를 끝까지 추적했다. 2007년 칠레에서 송환된 후지모리는 바로 이 라 칸투타 사건과 바리오스 알토스 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았다.
결국 라 칸투타 사건은 후지모리에게 '테러를 잡은 영웅'이라는 칭호 대신 '살인마의 수장'이라는 꼬리표를 영구히 남기게 되었다.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에는 현재 작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7월 18일이면 페루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3.7.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과의 전면전[편집]
마오주의 무장 조직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이하 SL)은 안데스 산맥의 고립된 마을들을 넘어 수도 리마의 코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당시 SL의 전략은 이른바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형적인 모택동식 게릴라 전술이었으나, 그 실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잔혹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SL은 단순히 정부군과 교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 추장이나 농민들을 본보기로 처형하거나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징집했다. 리마 시내에서는 연일 송전탑 폭파로 인한 정전이 발생했고, 경찰서와 관공서를 겨냥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상이었다. 후지모리는 취임 직후 "경제 개혁(후지 쇼크)보다 시급한 것은 국가의 물리적 생존"임을 직감했다.[25]
이전의 알란 가르시아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인 소탕 작전을 벌이다 오히려 민심을 잃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명분을 주었던 것과 달리, 후지모리는 훨씬 입체적이고 냉혹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단순히 총을 쏘는 군인이 아니라, 테러 조직의 '뇌'를 도려내고 '뿌리'를 뽑는 방식을 선택했다.
후지모리는 국가정보국(SIN)의 권한을 극대화하여 테러 조직 내부에 첩자를 심고, 자금줄을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 이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였다.
후지모리는 테러범들에게는 변호인 접견조차 제한되는 '복면 판사(Jueces sin rostro)' 제도를 도입했다. 판사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얼굴을 가리고 변조된 목소리로 재판을 진행하게 한 것인데, 이는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으나 테러범들을 신속하게 감옥으로 보내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체포된 테러리스트들에게 전향을 권고하고, 협조할 경우 형량을 파격적으로 감면해 주는 '참회법(Ley de Arrepentimiento)'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조직 내부의 기밀 정보가 대거 유출되기 시작했다.
후지모리가 거둔 가장 결정적인 승부수 중 하나는 농민 자위대인 '론다스 캄페시나스(Rondas Campesinas)'를 공식적으로 무장시킨 것이었다. 이전 정부는 농민들이 총을 가지면 반정부 세력이 될까 봐 두려워했으나, 후지모리는 "테러리스트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들에게 직접 고통받는 농민들"이라며 이들에게 구식 소총과 실탄을 지급했다.
이 조치는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SL 게릴라들이 마을에 식량을 징발하러 내려왔을 때,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직접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군이 도달하기 힘든 산악 지대에서 농민들이 자체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자, SL의 보급망과 정보망은 급격히 붕괴되었다.[26]
1992년 7월 16일, 리마의 부유층 거주지인 미라플로레스의 타라타 거리에서 SL의 강력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25명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당한 이 사건은 리마 중산층들에게 "이제는 정말 끝장이다"라는 공포와 함께, 후지모리의 초법적 대응을 묵인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인권 따위는 사치"라는 기조를 더욱 노골화했다. 그는 군부 내의 비밀 암살 조직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며, 테러 혐의가 있는 인물들을 재판 없이 사살하거나 실종시키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본격화했다.[27]
1992년 중반에 이르러, SL의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은 승리를 자신하며 리마를 향한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구축한 촘촘한 정보망과 농촌 자위대의 저항은 이미 SL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테러 조직의 상징이자 뇌수(腦髓)인 구스만을 직접 낚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이 시기 후지모리는 매일 아침 군 장성들과 회의하며 "구스만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당신들의 계급장은 쓰레기"라고 압박했다고 전해진다. 국가의 명운을 건 이 도박은 결국 같은 해 9월,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기습 작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SL은 단순히 정부군과 교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 추장이나 농민들을 본보기로 처형하거나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징집했다. 리마 시내에서는 연일 송전탑 폭파로 인한 정전이 발생했고, 경찰서와 관공서를 겨냥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상이었다. 후지모리는 취임 직후 "경제 개혁(후지 쇼크)보다 시급한 것은 국가의 물리적 생존"임을 직감했다.[25]
이전의 알란 가르시아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적인 소탕 작전을 벌이다 오히려 민심을 잃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명분을 주었던 것과 달리, 후지모리는 훨씬 입체적이고 냉혹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단순히 총을 쏘는 군인이 아니라, 테러 조직의 '뇌'를 도려내고 '뿌리'를 뽑는 방식을 선택했다.
후지모리는 국가정보국(SIN)의 권한을 극대화하여 테러 조직 내부에 첩자를 심고, 자금줄을 추적하는 데 집중했다. 이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였다.
후지모리는 테러범들에게는 변호인 접견조차 제한되는 '복면 판사(Jueces sin rostro)' 제도를 도입했다. 판사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얼굴을 가리고 변조된 목소리로 재판을 진행하게 한 것인데, 이는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켰으나 테러범들을 신속하게 감옥으로 보내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체포된 테러리스트들에게 전향을 권고하고, 협조할 경우 형량을 파격적으로 감면해 주는 '참회법(Ley de Arrepentimiento)'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조직 내부의 기밀 정보가 대거 유출되기 시작했다.
후지모리가 거둔 가장 결정적인 승부수 중 하나는 농민 자위대인 '론다스 캄페시나스(Rondas Campesinas)'를 공식적으로 무장시킨 것이었다. 이전 정부는 농민들이 총을 가지면 반정부 세력이 될까 봐 두려워했으나, 후지모리는 "테러리스트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들에게 직접 고통받는 농민들"이라며 이들에게 구식 소총과 실탄을 지급했다.
이 조치는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SL 게릴라들이 마을에 식량을 징발하러 내려왔을 때,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직접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군이 도달하기 힘든 산악 지대에서 농민들이 자체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자, SL의 보급망과 정보망은 급격히 붕괴되었다.[26]
1992년 7월 16일, 리마의 부유층 거주지인 미라플로레스의 타라타 거리에서 SL의 강력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25명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당한 이 사건은 리마 중산층들에게 "이제는 정말 끝장이다"라는 공포와 함께, 후지모리의 초법적 대응을 묵인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인권 따위는 사치"라는 기조를 더욱 노골화했다. 그는 군부 내의 비밀 암살 조직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며, 테러 혐의가 있는 인물들을 재판 없이 사살하거나 실종시키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본격화했다.[27]
1992년 중반에 이르러, SL의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은 승리를 자신하며 리마를 향한 '최종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구축한 촘촘한 정보망과 농촌 자위대의 저항은 이미 SL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테러 조직의 상징이자 뇌수(腦髓)인 구스만을 직접 낚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이 시기 후지모리는 매일 아침 군 장성들과 회의하며 "구스만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당신들의 계급장은 쓰레기"라고 압박했다고 전해진다. 국가의 명운을 건 이 도박은 결국 같은 해 9월,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기습 작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2.3.8. 아비마엘 구스만 체포[편집]
1992년 초, 페루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마오주의 무장단체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의 수장 아비마엘 구스만은 이른바 '전략적 평형' 단계에 진입했다고 선언하며 리마 시내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당시 서방 정보기관들은 "조만간 페루 정부가 전복되고 남미에 사상 최악의 폴 포트식 공산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후지모리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과 정보국에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9월 12일의 '빅토리아 작전(Operación Victoria)'이었다.
흔히 후지모리의 업적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 구스만 체포의 일등 공신은 경찰청 산하 특별정보그룹인 GEIN(Grupo Especial de Inteligencia)이었다. 이들은 군 중심의 화력 소탕전이 실패하자, 철저하게 '정보 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GEIN 요원들은 구스만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리마 시내의 가옥들을 감시하며 쓰레기봉투를 뒤졌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었는데, 당시 페루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급 양주병과 건선(psoriasis) 치료 연고 튜브가 발견된 것이다. 구스만은 지독한 건선을 앓고 있었기에 이는 그가 그 집에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작전명 '자르'로 불린 구스만을 잡기 위해 요원들은 인근에서 청소부, 부부, 노점상으로 위장해 몇 달간 잠복했다. 특히 은신처에서 흘러나온 음악과 춤추는 그림자 등을 분석해 내부 인원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운명의 날 저녁 8시경, GEIN 요원들은 리마 서부 수르키요(Surquillo) 구역의 한 2층 가옥을 급습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발레 학원이었던 이곳의 2층에서, '제4의 검'[28]을 자처하던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되었다.
검거 당시 구스만은 예상과 달리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는 비대한 체구에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며,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요원들이 그를 제압하자 구스만은 "내 차례가 왔군(Me tocó)"이라며 체념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비디오로 녹화되어 전 세계에 타전되었고, 난공불락의 신화로 군림하던 '빛나는 길'의 위신은 단숨에 추락했다.
후지모리는 이 성과를 극적으로 활용했다. 체포 직후 그는 구스만에게 줄무늬 죄수복을 입히고 리마 앞바다의 해군 기지에 설치된 거대한 철창에 가두어 언론에 공개했다. 구스만은 철창 안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쳤으나, 그 모습은 위엄 있는 혁명가가 아닌 '갇힌 짐승'처럼 보일 뿐이었다.[29][30]
이 사건으로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90%에 육박하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한다. 불과 몇 달 전 단행했던 '자친쿠데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국내의 불안 여론은 "테러를 끝냈다"는 압도적 성과 앞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 좀 깨지면 어떠냐,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됐는데"라며 후지모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구스만의 체포는 '빛나는 길'의 조직력을 와해시켰고, 페루는 수십 년간 이어진 내전 상태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성취는 후지모리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극적 측면이 있다.
후지모리는 작전 성공의 공을 오로지 자신과 정보국(SIN)으로 돌렸으며, 정작 실무를 담당했던 GEIN의 핵심 인물들은 몬테시노스의 시기 질투로 인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조직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테러리즘 척결"이라는 명분은 이후 정적들을 '테러 동조자'로 몰아 탄압하는 데 상시 활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콜리나 그룹(Grupo Colina)'과 같은 암살단의 활동은 구스만 체포라는 거대한 영광의 그늘 아래 철저히 은폐되었다.
흔히 후지모리의 업적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 구스만 체포의 일등 공신은 경찰청 산하 특별정보그룹인 GEIN(Grupo Especial de Inteligencia)이었다. 이들은 군 중심의 화력 소탕전이 실패하자, 철저하게 '정보 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GEIN 요원들은 구스만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리마 시내의 가옥들을 감시하며 쓰레기봉투를 뒤졌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었는데, 당시 페루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급 양주병과 건선(psoriasis) 치료 연고 튜브가 발견된 것이다. 구스만은 지독한 건선을 앓고 있었기에 이는 그가 그 집에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작전명 '자르'로 불린 구스만을 잡기 위해 요원들은 인근에서 청소부, 부부, 노점상으로 위장해 몇 달간 잠복했다. 특히 은신처에서 흘러나온 음악과 춤추는 그림자 등을 분석해 내부 인원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운명의 날 저녁 8시경, GEIN 요원들은 리마 서부 수르키요(Surquillo) 구역의 한 2층 가옥을 급습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발레 학원이었던 이곳의 2층에서, '제4의 검'[28]을 자처하던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되었다.
검거 당시 구스만은 예상과 달리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는 비대한 체구에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며,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요원들이 그를 제압하자 구스만은 "내 차례가 왔군(Me tocó)"이라며 체념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비디오로 녹화되어 전 세계에 타전되었고, 난공불락의 신화로 군림하던 '빛나는 길'의 위신은 단숨에 추락했다.
후지모리는 이 성과를 극적으로 활용했다. 체포 직후 그는 구스만에게 줄무늬 죄수복을 입히고 리마 앞바다의 해군 기지에 설치된 거대한 철창에 가두어 언론에 공개했다. 구스만은 철창 안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쳤으나, 그 모습은 위엄 있는 혁명가가 아닌 '갇힌 짐승'처럼 보일 뿐이었다.[29][30]
이 사건으로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90%에 육박하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한다. 불과 몇 달 전 단행했던 '자친쿠데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국내의 불안 여론은 "테러를 끝냈다"는 압도적 성과 앞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 좀 깨지면 어떠냐,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됐는데"라며 후지모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구스만의 체포는 '빛나는 길'의 조직력을 와해시켰고, 페루는 수십 년간 이어진 내전 상태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성취는 후지모리 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극적 측면이 있다.
후지모리는 작전 성공의 공을 오로지 자신과 정보국(SIN)으로 돌렸으며, 정작 실무를 담당했던 GEIN의 핵심 인물들은 몬테시노스의 시기 질투로 인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조직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테러리즘 척결"이라는 명분은 이후 정적들을 '테러 동조자'로 몰아 탄압하는 데 상시 활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콜리나 그룹(Grupo Colina)'과 같은 암살단의 활동은 구스만 체포라는 거대한 영광의 그늘 아래 철저히 은폐되었다.
2.3.9. 론다스 캄페시나스 재편[편집]
'론다스 캄페시나스'는 직역하면 '농민 순찰대'라는 뜻으로, 원래 1970년대 페루 북부 카하마르카 지역에서 가축 절도를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자동조직이었다. 하지만 후지모리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조직의 성격은 완전히 변모한다. 이전 정부들이 빛나는 길의 테러에 맞서 정규군만을 투입해 실패를 거듭했다면, 후지모리는 "테러리스트를 잡으려면 그들이 숨어드는 물(농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이들 민병대를 국가 통제하의 준군사조직으로 재편했다.
후지모리 이전의 벨라운데, 가르시아 정부는 안데스 산간 지역의 농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 협력자로 간주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오히려 농민들이 '빛나는 길'에 포섭되거나 강제로 협조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농학자 출신답게 농촌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1991년 대통령령을 통해 론다스 캄페시나스를 공식 합법화하고, 이들에게 구식 산탄총과 소총을 대거 보급했다.[31] 이는 단순한 무기 지원을 넘어, 농민들에게 "국가가 당신들을 보호하고 신뢰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약탈하고 자녀들을 강제 징집하던 '빛나는 길'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후지모리의 손을 잡았다.
론다스 캄페시나스의 활약은 눈부셨다. 지형에 밝은 농민들은 정규군이 접근하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은신처를 제보했다. '빛나는 길'은 자신들의 기반이라고 믿었던 농촌에서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당황했고, 이는 조직의 급격한 와해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국가로부터 무력 사용권을 부여받은 론다스 캄페시나스 내에서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테러 혐의'로 뒤집어씌워 사적 제재를 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빛나는 길'에 협조했다는 의심만으로 마을 전체를 몰살하거나 고문하는 초법적 행위가 자행되었다. 후지모리 정부는 테러 진압이라는 명분 아래 이러한 인권 유린을 묵인하거나 오히려 독려하는 태도를 보였다.[32]
정치적으로 볼 때, 론다스 캄페시나스는 후지모리에게 '살아있는 정치적 방벽'이었다. 그는 헬기를 타고 안데스 깊숙한 마을을 직접 방문해 농민들에게 직접 총기를 하사하고 운동화나 식량을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즐겼다. 리마의 화이트칼라 엘리트들은 그를 독재자라 비난했지만,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난 농촌 지역에서 후지모리는 '살아있는 구세주' 대접을 받았다.
이때 형성된 농촌 지역의 광적인 지지세는 훗날 그가 3선에 도전하고, 실각 후에도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강력한 대권 주자로 군림할 수 있는 핵심 지지 기반(Hard-core)이 된다. 즉, 론다스는 군사적 조직을 넘어 후지모리즘(Fujimorismo)이라는 거대한 정치 종교의 사제단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론다스 캄페시나스는 페루를 테러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일등 공신이었으나, 동시에 법치주의를 포기하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외주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후지모리는 이들을 통해 '테러 근절'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과 사법 체계의 붕괴는 훗날 그가 법정에서 심판받게 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페루 산간 지역에는 여전히 이들의 후예가 남아 자치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은 후지모리를 "우리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총을 쥐여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반면 인권 단체들에게 이들은 "국가가 방조한 살인 기계"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페루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후지모리 이전의 벨라운데, 가르시아 정부는 안데스 산간 지역의 농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 협력자로 간주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오히려 농민들이 '빛나는 길'에 포섭되거나 강제로 협조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농학자 출신답게 농촌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1991년 대통령령을 통해 론다스 캄페시나스를 공식 합법화하고, 이들에게 구식 산탄총과 소총을 대거 보급했다.[31] 이는 단순한 무기 지원을 넘어, 농민들에게 "국가가 당신들을 보호하고 신뢰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약탈하고 자녀들을 강제 징집하던 '빛나는 길'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후지모리의 손을 잡았다.
론다스 캄페시나스의 활약은 눈부셨다. 지형에 밝은 농민들은 정규군이 접근하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은신처를 제보했다. '빛나는 길'은 자신들의 기반이라고 믿었던 농촌에서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당황했고, 이는 조직의 급격한 와해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국가로부터 무력 사용권을 부여받은 론다스 캄페시나스 내에서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테러 혐의'로 뒤집어씌워 사적 제재를 가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빛나는 길'에 협조했다는 의심만으로 마을 전체를 몰살하거나 고문하는 초법적 행위가 자행되었다. 후지모리 정부는 테러 진압이라는 명분 아래 이러한 인권 유린을 묵인하거나 오히려 독려하는 태도를 보였다.[32]
정치적으로 볼 때, 론다스 캄페시나스는 후지모리에게 '살아있는 정치적 방벽'이었다. 그는 헬기를 타고 안데스 깊숙한 마을을 직접 방문해 농민들에게 직접 총기를 하사하고 운동화나 식량을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즐겼다. 리마의 화이트칼라 엘리트들은 그를 독재자라 비난했지만,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난 농촌 지역에서 후지모리는 '살아있는 구세주' 대접을 받았다.
이때 형성된 농촌 지역의 광적인 지지세는 훗날 그가 3선에 도전하고, 실각 후에도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강력한 대권 주자로 군림할 수 있는 핵심 지지 기반(Hard-core)이 된다. 즉, 론다스는 군사적 조직을 넘어 후지모리즘(Fujimorismo)이라는 거대한 정치 종교의 사제단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론다스 캄페시나스는 페루를 테러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일등 공신이었으나, 동시에 법치주의를 포기하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외주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후지모리는 이들을 통해 '테러 근절'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희생과 사법 체계의 붕괴는 훗날 그가 법정에서 심판받게 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페루 산간 지역에는 여전히 이들의 후예가 남아 자치 치안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은 후지모리를 "우리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총을 쥐여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반면 인권 단체들에게 이들은 "국가가 방조한 살인 기계"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페루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2.3.10. 페루-에콰도르 세네파 전쟁[편집]
페루와 에콰도르는 건국 초기부터 아마존 분지 상류의 영유권을 두고 끊임없이 충돌해 온 숙적이었다. 특히 1941년 발생한 에콰도르-페루 전쟁에서 페루가 압승하며 '리오데자네이로 의정서'를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나, 에콰도르는 이를 "강압에 의한 불평등 조약"이라며 공식적으로 거부해 왔다.
1995년 초, 양국 국경의 미확정 구간인 '세네파 강(Cenepa River)' 유역에서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안데스 산맥의 정글 지대에서 에콰도르군이 페루 측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점에 초소를 건설하면서 소규모 교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집권 2년 차를 맞이하며 재선을 노리던 후지모리에게는 자신의 군사적 결단력을 시험받는 일생일대의 무대가 되었다.
세네파 전쟁은 비록 기간은 짧았으나(1995년 1월 ~ 2월), 남미 역사상 보기 드문 현대적인 군사 장비들이 동원된 고강도 분쟁이었다. 후지모리는 즉각 전면적인 대응을 지시했다. 하지만 초기에 페루군은 지형적 불리함과 에콰도르군의 철저한 준비로 인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공중전에서 페루 공군의 A-37 드래곤플라이와 수호이(Su-22) 전폭기들이 에콰도르 공군의 미라주(Mirage) F1에 의해 격추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페루 국내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33] 후지모리는 이 위기를 특유의 현장 경영으로 돌파하려 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직접 최전방 캠프를 방문해 병사들과 식사를 하며 "단 한 뼘의 영토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군사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후지모리는 뛰어난 정무 감각을 발휘했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어렵게 살려놓은 경제 성장이 멈출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 4개 보증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중재를 요청하는 동시에, 현장에서는 공세를 멈추지 않는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1995년 2월 '이타마라티 평화 선언'이 채택되며 총성은 멈췄다. 흥미로운 점은 군사적으로는 에콰도르가 선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최종적인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웃은 쪽은 후지모리였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리오데자네이로 의정서의 유효성을 다시 한번 확약받았고, 에콰도르가 주장하던 아마존강으로의 직접적인 접근권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은 1995년 대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종결되었다. 후지모리는 세네파 전쟁의 결과를 "페루의 주권을 수호한 위대한 승리"로 포장하여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1941년 이후 50년 넘게 이어져 온 국경 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다는 업적은, 그에게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주었다.
그러나 이 승리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다. 전쟁 기간 동안 군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졌고, 후지모리의 오른팔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군수물자 조달 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를 챙겼다는 의혹이 훗날 사실로 드러났다.[34] 결과적으로 세네파 전쟁은 후지모리에게 재선 가도의 고속도로를 깔아주었지만, 군부와의 결탁을 더욱 심화시켜 훗날 그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저버리는 독재의 길로 들어서는 가속 페달이 되었다.
세네파 전쟁의 불씨는 1998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꺼진다. 후지모리는 에콰도르의 자밀 마와드 대통령과 만나 '브라질리아 대통령 합의'를 체결했다. 이 합의를 통해 양국은 국경선을 확정 지었고, 페루는 에콰도르에게 분쟁 지역이었던 티윈자(Tiwinza) 구역의 소유권은 인정하되 주권은 페루가 갖는다는 창의적인(혹은 기만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로써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영토 분쟁 중 하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이는 후지모리 외교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95년 초, 양국 국경의 미확정 구간인 '세네파 강(Cenepa River)' 유역에서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안데스 산맥의 정글 지대에서 에콰도르군이 페루 측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점에 초소를 건설하면서 소규모 교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집권 2년 차를 맞이하며 재선을 노리던 후지모리에게는 자신의 군사적 결단력을 시험받는 일생일대의 무대가 되었다.
세네파 전쟁은 비록 기간은 짧았으나(1995년 1월 ~ 2월), 남미 역사상 보기 드문 현대적인 군사 장비들이 동원된 고강도 분쟁이었다. 후지모리는 즉각 전면적인 대응을 지시했다. 하지만 초기에 페루군은 지형적 불리함과 에콰도르군의 철저한 준비로 인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공중전에서 페루 공군의 A-37 드래곤플라이와 수호이(Su-22) 전폭기들이 에콰도르 공군의 미라주(Mirage) F1에 의해 격추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페루 국내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33] 후지모리는 이 위기를 특유의 현장 경영으로 돌파하려 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직접 최전방 캠프를 방문해 병사들과 식사를 하며 "단 한 뼘의 영토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군사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후지모리는 뛰어난 정무 감각을 발휘했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어렵게 살려놓은 경제 성장이 멈출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 4개 보증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중재를 요청하는 동시에, 현장에서는 공세를 멈추지 않는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1995년 2월 '이타마라티 평화 선언'이 채택되며 총성은 멈췄다. 흥미로운 점은 군사적으로는 에콰도르가 선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최종적인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웃은 쪽은 후지모리였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리오데자네이로 의정서의 유효성을 다시 한번 확약받았고, 에콰도르가 주장하던 아마존강으로의 직접적인 접근권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은 1995년 대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종결되었다. 후지모리는 세네파 전쟁의 결과를 "페루의 주권을 수호한 위대한 승리"로 포장하여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1941년 이후 50년 넘게 이어져 온 국경 분쟁을 사실상 종결지었다는 업적은, 그에게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주었다.
그러나 이 승리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다. 전쟁 기간 동안 군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졌고, 후지모리의 오른팔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군수물자 조달 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를 챙겼다는 의혹이 훗날 사실로 드러났다.[34] 결과적으로 세네파 전쟁은 후지모리에게 재선 가도의 고속도로를 깔아주었지만, 군부와의 결탁을 더욱 심화시켜 훗날 그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저버리는 독재의 길로 들어서는 가속 페달이 되었다.
세네파 전쟁의 불씨는 1998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꺼진다. 후지모리는 에콰도르의 자밀 마와드 대통령과 만나 '브라질리아 대통령 합의'를 체결했다. 이 합의를 통해 양국은 국경선을 확정 지었고, 페루는 에콰도르에게 분쟁 지역이었던 티윈자(Tiwinza) 구역의 소유권은 인정하되 주권은 페루가 갖는다는 창의적인(혹은 기만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로써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영토 분쟁 중 하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이는 후지모리 외교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된다.
2.4. 1995년 재선 승리와 2차 집권기[편집]
1995년 대선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있어 단순한 선거 그 이상이었다. 1992년 자친쿠데타를 통해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장악한 뒤, 1993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연임'이라는 법적 장치를 마련한 그가 자신의 통치 체제(Fujimorismo)를 국민으로부터 최종 승인받는 절차였기 때문이다.
당시 페루의 분위기는 후지모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1980년대의 지옥 같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후지 쇼크' 이후 급속도로 안정화되었으며,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빛나는 길의 수괴 아비마엘 구스만이 이미 검거되어 테러의 위협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 국민들에게 후지모리는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준 구세주'였고, 이는 곧 "민주주의 절차가 조금 무시되더라도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살게 해주는 지도자가 낫다"는 정서로 이어졌다.[35] 그리고 페루-에콰도르 세네파 전쟁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야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후지모리의 독주를 막기 위해 등판한 인물은 무려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전 UN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과 고결한 인격, 그리고 민주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후지모리의 '독재적 성향'을 비판하며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했다.
그러나 선거전은 극도로 불평등했다. 후지모리는 현직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 예산을 자신의 홍보비로 전용했으며, 군과 정보국(SIN)을 동원해 야권 후보들을 감시하고 압박했다. 특히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주도하는 정보국은 타블로이드 언론(Chicha Press)을 매수해 페레스 데 케야르를 '페루의 현실을 모르는 국외 거주자', '기득권 백인 엘리트의 꼭두각시'로 몰아세우는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1995년 4월 9일 실시된 대선 결과는 후지모리의 완승이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64.4%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21.8%
후지모리는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훌쩍 넘기며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 지었다. 심지어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도 후지모리의 정당인 '누에바 마요리아(Nueva Mayoría, 새로운 다수)'와 '캄비오 90' 연합이 의회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며, 행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후지모리는 견제 세력이 전무한 '민선 독재'의 길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재선에 성공한 후지모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사법부와 군부를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들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채웠으며, 군 내부에서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만을 요직에 앉혔다.
특히 이 시기부터 정보국장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영향력은 대통령을 능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몬테시노스는 정적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도청과 미행을 일삼았고, 야당 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해 여당으로 전향시키는 이른바 '의원 사냥'을 시작했다. 1995년의 승리는 표면적으로는 민심의 선택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이미 거대한 부패의 그물이 국가 전체를 덮고 있었던 셈이다.
재선 직후, 후지모리 진영에서는 벌써부터 차차기 대선(2000년)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3년 헌법은 '연임'까지만 허용하고 있었으나, 후지모리 측은 "1993년 헌법 제정 이전의 임기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기적의 논리(해석상의 합법화)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5년의 압도적 지지는 그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법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비참한 몰락을 야기하는 장기 집권 욕심의 씨앗이 되었다.[36]
재선 승리는 후지모리 개인에게는 생애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페루라는 국가 시스템에게는 민주주의의 골든타임이 종료되고 본격적인 '일인 지배'의 암흑기로 들어선 해라고 평가받는다.
당시 페루의 분위기는 후지모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1980년대의 지옥 같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후지 쇼크' 이후 급속도로 안정화되었으며,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빛나는 길의 수괴 아비마엘 구스만이 이미 검거되어 테러의 위협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 국민들에게 후지모리는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준 구세주'였고, 이는 곧 "민주주의 절차가 조금 무시되더라도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살게 해주는 지도자가 낫다"는 정서로 이어졌다.[35] 그리고 페루-에콰도르 세네파 전쟁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야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후지모리의 독주를 막기 위해 등판한 인물은 무려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전 UN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과 고결한 인격, 그리고 민주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후지모리의 '독재적 성향'을 비판하며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했다.
그러나 선거전은 극도로 불평등했다. 후지모리는 현직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 예산을 자신의 홍보비로 전용했으며, 군과 정보국(SIN)을 동원해 야권 후보들을 감시하고 압박했다. 특히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주도하는 정보국은 타블로이드 언론(Chicha Press)을 매수해 페레스 데 케야르를 '페루의 현실을 모르는 국외 거주자', '기득권 백인 엘리트의 꼭두각시'로 몰아세우는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1995년 4월 9일 실시된 대선 결과는 후지모리의 완승이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64.4%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21.8%
후지모리는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훌쩍 넘기며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을 확정 지었다. 심지어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도 후지모리의 정당인 '누에바 마요리아(Nueva Mayoría, 새로운 다수)'와 '캄비오 90' 연합이 의회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며, 행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후지모리는 견제 세력이 전무한 '민선 독재'의 길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재선에 성공한 후지모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사법부와 군부를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들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채웠으며, 군 내부에서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만을 요직에 앉혔다.
특히 이 시기부터 정보국장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영향력은 대통령을 능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몬테시노스는 정적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도청과 미행을 일삼았고, 야당 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해 여당으로 전향시키는 이른바 '의원 사냥'을 시작했다. 1995년의 승리는 표면적으로는 민심의 선택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이미 거대한 부패의 그물이 국가 전체를 덮고 있었던 셈이다.
재선 직후, 후지모리 진영에서는 벌써부터 차차기 대선(2000년)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3년 헌법은 '연임'까지만 허용하고 있었으나, 후지모리 측은 "1993년 헌법 제정 이전의 임기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기적의 논리(해석상의 합법화)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5년의 압도적 지지는 그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법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비참한 몰락을 야기하는 장기 집권 욕심의 씨앗이 되었다.[36]
재선 승리는 후지모리 개인에게는 생애 최고의 영광이었으나, 페루라는 국가 시스템에게는 민주주의의 골든타임이 종료되고 본격적인 '일인 지배'의 암흑기로 들어선 해라고 평가받는다.
2.4.1. 일본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편집]
1996년 12월 17일, 리마 소재 주페루 일본 대사관저에서 개최된 아키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소속 테러리스트 14명이 폭발물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채 난입하여, 페루 정·재계의 거물들과 외교관 등 약 700여 명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이는 후지모리 정부가 그토록 자랑하던 '치안의 안정'이라는 성과를 정면으로 비웃는 사건이었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수감 중인 자신들의 동료 수백 명을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후지모리는 초기에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척하며 시간을 벌었으나, 내심으로는 테러리스트와의 타협은 곧 정권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인질 중에는 자신의 친동생인 산티아고 후지모리뿐만 아니라 외무장관, 대법관 등 국가 핵심 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 압박은 상상을 초월했다.[37]
후지모리는 대외적으로는 가톨릭 주교 등을 통한 협상을 이어가면서, 물밑에서는 페루 군 특수부대를 소집해 전례 없는 정밀 타격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명인 '차빈 데 후안타르'는 페루의 고대 유적지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해당 유적지가 복잡한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작전의 핵심은 지하 터널이었다. 후지모리는 광부들을 동원해 대사관저 바닥까지 이어지는 정교한 지하 터널들을 뚫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대사관 주변에는 스피커를 설치해 요란한 군가와 소음을 24시간 내내 틀어놓았으며, 인질들에게 전달되는 도시락과 소지품 속에는 초소형 도청기와 카메라를 숨겨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직접 방탄복을 입고 현장을 지휘하며 군부와의 결속력을 과시했다. 그는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통치자가 아니라, 작전의 디테일까지 간여하는 '현장형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군심을 장악했다.
1997년 4월 22일 오후 3시 23분, 긴 대치의 마침표를 찍는 거대한 폭발음이 대사관저를 흔들었다. 지하 터널에 설치된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140여 명의 특수부대원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테러리스트들은 당시 관저 거실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기에 대응이 늦어졌고, 작전 시작 10여 분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과는 테러리스트 14명 전원 사살. 인질 중에서는 1명이 심장마비와 부상으로 사망했고, 군인 2명이 교전 중 전사했으나 71명의 인질이 극적으로 구조된 것은 세계 특수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완벽한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작전 종료 직후 후지모리는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대사관저 앞에 서서 페루 국가를 제창하며 승리를 선언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고, 그의 지지율은 다시 한번 수직 상승하여 70%를 상회하게 된다.
'차빈 데 후안타르' 작전은 후지모리 정권의 위기관리 능력을 입증한 최고의 업적으로 남았지만, 훗날 끔찍한 사법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작전 당시 생포된 테러리스트 일부가 현장에서 즉결 처형(Extrajudicial Execution)되었다는 증언과 증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당시 일부 인질들의 증언에 따르면, 항복 의사를 밝히며 손을 들고 나온 테러리스트들이 군인들에 의해 건물 뒤편으로 끌려가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후지모리가 실각한 뒤 그를 인권 침해 혐의로 기소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후지모리에게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지도자'라는 불멸의 아우라를 선사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민주주의 훼손 등)을 잠재웠으며, 일본 내에서도 "우리 외교관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긍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후지모리 통치기 중반의 가장 화려한 클라이맥스였으며, 동시에 법치주의를 무시한 초법적 대응이라는 비판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이 승리에 취해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믿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무리한 3선 도전과 몰락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과신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수감 중인 자신들의 동료 수백 명을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후지모리는 초기에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척하며 시간을 벌었으나, 내심으로는 테러리스트와의 타협은 곧 정권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인질 중에는 자신의 친동생인 산티아고 후지모리뿐만 아니라 외무장관, 대법관 등 국가 핵심 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 압박은 상상을 초월했다.[37]
후지모리는 대외적으로는 가톨릭 주교 등을 통한 협상을 이어가면서, 물밑에서는 페루 군 특수부대를 소집해 전례 없는 정밀 타격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명인 '차빈 데 후안타르'는 페루의 고대 유적지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해당 유적지가 복잡한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작전의 핵심은 지하 터널이었다. 후지모리는 광부들을 동원해 대사관저 바닥까지 이어지는 정교한 지하 터널들을 뚫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대사관 주변에는 스피커를 설치해 요란한 군가와 소음을 24시간 내내 틀어놓았으며, 인질들에게 전달되는 도시락과 소지품 속에는 초소형 도청기와 카메라를 숨겨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직접 방탄복을 입고 현장을 지휘하며 군부와의 결속력을 과시했다. 그는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통치자가 아니라, 작전의 디테일까지 간여하는 '현장형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군심을 장악했다.
1997년 4월 22일 오후 3시 23분, 긴 대치의 마침표를 찍는 거대한 폭발음이 대사관저를 흔들었다. 지하 터널에 설치된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140여 명의 특수부대원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테러리스트들은 당시 관저 거실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기에 대응이 늦어졌고, 작전 시작 10여 분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과는 테러리스트 14명 전원 사살. 인질 중에서는 1명이 심장마비와 부상으로 사망했고, 군인 2명이 교전 중 전사했으나 71명의 인질이 극적으로 구조된 것은 세계 특수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완벽한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작전 종료 직후 후지모리는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대사관저 앞에 서서 페루 국가를 제창하며 승리를 선언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고, 그의 지지율은 다시 한번 수직 상승하여 70%를 상회하게 된다.
'차빈 데 후안타르' 작전은 후지모리 정권의 위기관리 능력을 입증한 최고의 업적으로 남았지만, 훗날 끔찍한 사법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작전 당시 생포된 테러리스트 일부가 현장에서 즉결 처형(Extrajudicial Execution)되었다는 증언과 증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당시 일부 인질들의 증언에 따르면, 항복 의사를 밝히며 손을 들고 나온 테러리스트들이 군인들에 의해 건물 뒤편으로 끌려가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후지모리가 실각한 뒤 그를 인권 침해 혐의로 기소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후지모리에게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지도자'라는 불멸의 아우라를 선사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민주주의 훼손 등)을 잠재웠으며, 일본 내에서도 "우리 외교관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긍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후지모리 통치기 중반의 가장 화려한 클라이맥스였으며, 동시에 법치주의를 무시한 초법적 대응이라는 비판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양날의 검이었다. 그는 이 승리에 취해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믿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무리한 3선 도전과 몰락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과신의 계기가 되었다.
2.4.2. 장기 집권의 탐욕[편집]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의 가장 큰 화두는 '재출마(Re-elección)'였다. 이미 1993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을 한 차례 허용했던 후지모리는 1995년 재선에 성공하며 2000년까지의 임기를 보장받은 상태였다. 문제는 그 너머였다. 권력의 맛을 본 후지모리와 그의 오른팔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2000년 이후에도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치밀한 법적 공작에 착수한다.
이른바 '헌법의 정통적 해석에 관한 법률(Ley de Interpretación Auténtica)'이라 불리는 희대의 악법이 등장한 것이 이 시점이다. 후지모리 측의 논리는 기상천외했다. "1993년 개헌 이전에 당선된 1990년의 임기는 새로운 헌법하에서의 임기가 아니므로, 1995년 당선이 사실상 '첫 번째' 임기다"라는 주장이었다. 즉, 2000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3선'이 아니라 '새 헌법 기준 두 번째 연임'이라는 기적의 논리였다.[39]
당연히 이러한 억지 논리에 대해 사법적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1996년, 페루 헌법재판소(Tribunal Constitucional)의 재판관들은 해당 법률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후지모리 정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몬테시노스의 정보국(SIN)은 재판관들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뒷조사를 실시했고, 회유에 응하지 않는 재판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1997년, 3선 개헌 법률에 반대 의견을 냈던 3명의 재판관(리카르도 누베, 델리아 레보레도, 기예르모 팔코니)이 의회에 의해 강제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는 페루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였던 사법 독립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점부터 페루의 법치는 후지모리의 의지에 따라 구부러지는 고무줄 법치로 전락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국제 사회에서 독재자로 낙인찍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법적 장치가 마련되자, 후지모리 정권은 대대적인 여론 조작에 나섰다. 몬테시노스가 지휘하는 '치차 언론(Prensa Chicha)'이라 불리는 저질 타블로이드 판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3선 출마를 반대하는 야권 인사들을 '테러리스트의 동조자' 혹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매국노'로 몰아세우는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동시에 후지모리는 농촌 지역을 돌며 대중영합주의(Populism) 정책을 강화했다. "내가 없으면 다시 빛나는 길이 창궐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은 효과적이었다. 이미 10년 가까이 이어진 집권으로 인해 페루 국민들 사이에는 '후지모리 외에 대안이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이 퍼져 있었고, 정권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3선 도전이 가시화되자 리마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거센 시위가 일어났다. "No a la Re-elección(연임 반대)"이라는 구호가 거리마다 울려 퍼졌고, 지식인들은 후지모리가 헌법을 사유화하고 있다며 성토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탄압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후지모리를 지지했던 중산층 일부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8년에는 3선 도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서명 운동이 벌어져 수백만 명의 서명을 모았으나, 후지모리가 장악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를 '절차적 결함'을 이유로 기각해 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후지모리가 단순히 '강력한 지도자'를 넘어 '법 위에 군림하는 제왕'으로 변질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40]
미국을 비롯한 미주기구는 페루의 민주주의 후퇴를 경고하기 시작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헌법재판관을 해임하고 3선에 집착하는 후지모리의 행보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페루의 특수성'과 '경제적 안정'을 방패막이 삼아 국제 사회의 권고를 무시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정보망과 군부의 충성을 과신했으며,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모든 논란이 종식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훗날 그가 권좌에서 쫓겨나 타국을 떠돌게 되는 비극적 서막에 불과했다.
이른바 '헌법의 정통적 해석에 관한 법률(Ley de Interpretación Auténtica)'이라 불리는 희대의 악법이 등장한 것이 이 시점이다. 후지모리 측의 논리는 기상천외했다. "1993년 개헌 이전에 당선된 1990년의 임기는 새로운 헌법하에서의 임기가 아니므로, 1995년 당선이 사실상 '첫 번째' 임기다"라는 주장이었다. 즉, 2000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3선'이 아니라 '새 헌법 기준 두 번째 연임'이라는 기적의 논리였다.[39]
당연히 이러한 억지 논리에 대해 사법적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1996년, 페루 헌법재판소(Tribunal Constitucional)의 재판관들은 해당 법률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후지모리 정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몬테시노스의 정보국(SIN)은 재판관들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과 뒷조사를 실시했고, 회유에 응하지 않는 재판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1997년, 3선 개헌 법률에 반대 의견을 냈던 3명의 재판관(리카르도 누베, 델리아 레보레도, 기예르모 팔코니)이 의회에 의해 강제 해임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는 페루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였던 사법 독립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점부터 페루의 법치는 후지모리의 의지에 따라 구부러지는 고무줄 법치로 전락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국제 사회에서 독재자로 낙인찍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법적 장치가 마련되자, 후지모리 정권은 대대적인 여론 조작에 나섰다. 몬테시노스가 지휘하는 '치차 언론(Prensa Chicha)'이라 불리는 저질 타블로이드 판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3선 출마를 반대하는 야권 인사들을 '테러리스트의 동조자' 혹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매국노'로 몰아세우는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동시에 후지모리는 농촌 지역을 돌며 대중영합주의(Populism) 정책을 강화했다. "내가 없으면 다시 빛나는 길이 창궐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은 효과적이었다. 이미 10년 가까이 이어진 집권으로 인해 페루 국민들 사이에는 '후지모리 외에 대안이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이 퍼져 있었고, 정권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3선 도전이 가시화되자 리마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거센 시위가 일어났다. "No a la Re-elección(연임 반대)"이라는 구호가 거리마다 울려 퍼졌고, 지식인들은 후지모리가 헌법을 사유화하고 있다며 성토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탄압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후지모리를 지지했던 중산층 일부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8년에는 3선 도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서명 운동이 벌어져 수백만 명의 서명을 모았으나, 후지모리가 장악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를 '절차적 결함'을 이유로 기각해 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후지모리가 단순히 '강력한 지도자'를 넘어 '법 위에 군림하는 제왕'으로 변질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40]
미국을 비롯한 미주기구는 페루의 민주주의 후퇴를 경고하기 시작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헌법재판관을 해임하고 3선에 집착하는 후지모리의 행보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페루의 특수성'과 '경제적 안정'을 방패막이 삼아 국제 사회의 권고를 무시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정보망과 군부의 충성을 과신했으며,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모든 논란이 종식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훗날 그가 권좌에서 쫓겨나 타국을 떠돌게 되는 비극적 서막에 불과했다.
2.4.3. 엘니뇨 현상과 경제 침체[편집]
1990년대 중반, 후지모리는 '테러를 잡고 경제를 살린 영웅'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몰아친 역대급 규모의 엘니뇨 현상은 후지모리 정권의 탄탄했던 지지 기반에 치명적인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당시 발생한 엘니뇨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준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태평양 연안의 해수면 온도가 급상승하면서 페루 전역에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를 몰고 왔다.
특히 페루 경제의 젖줄이었던 어업과 농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따뜻해진 바닷물로 인해 어종이 급격히 감소하며 수산물 수출이 반토막 났고, 북부 해안 지대의 도로와 교량 등 인프라가 대거 유실되면서 물류망이 마비되었다. 후지모리는 특유의 '현장형 리더십'을 발휘하며 직접 장화를 신고 수해 현장을 누볐으나, 자연재해의 규모는 일개 정권의 행정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41]
엘니뇨가 불러온 물리적 파괴는 곧바로 경제적 파국으로 이어졌다. 집권 초기의 급진적 시장 개방 정책인 '후지 쇼크'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페루 경제를 지나치게 대외 의존적인 구조로 변모시켰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1998년 러시아 모스크바발 금융 위기가 연달아 터지자, 신흥국 시장에 대한 투자 심리가 얼어붙으며 페루로 유입되던 외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경제성장률은 곤두박질쳤고, 실업률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특히 후지모리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도시 빈민층과 농민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물가는 안정되었을지언정,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마르고 일자리가 사라지자 민심은 급격히 차갑게 식어갔다. 1990년대 초반의 경제적 성공이 '후지모리의 능력' 덕분이었다면, 1990년대 후반의 침체는 '후지모리의 실정'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해 복구 과정에서 후지모리 정권의 고질적인 부패 체제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엘니뇨로 파괴된 도로와 교량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몬테시노스가 관리하던 군부와 측근 기업들에게 특혜가 집중되었다.
심지어 급하게 지어진 복구 시설들이 다음번 작은 비에도 쉽게 무너지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재난을 이용해 자기 배만 채우고 있다"는 분노가 확산되었다. 이는 과거 '테러 진압'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묵인되었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경제적 고통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결국 1998년을 기점으로 후지모리에 대한 지지율은 사상 처음으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지르는 이른바 '데드크로스'를 형성하게 된다.
경제난은 곧 정치적 저항으로 번졌다. 그동안 후지모리의 독재적 행보에 침묵하던 노동조합과 대학생 단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빵을 달라"는 구호는 어느새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정치적 구호와 합쳐졌고, 이는 훗날 2000년 대선의 부정 선거 규탄 시위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빈민층 쌀 배급 등)을 남발했으나, 국가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자연재해(엘니뇨)와 대외 악재(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대내 부패가 융합된 199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후지모리 체제의 '하드웨어'를 밑바닥부터 갉아먹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42]
특히 페루 경제의 젖줄이었던 어업과 농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따뜻해진 바닷물로 인해 어종이 급격히 감소하며 수산물 수출이 반토막 났고, 북부 해안 지대의 도로와 교량 등 인프라가 대거 유실되면서 물류망이 마비되었다. 후지모리는 특유의 '현장형 리더십'을 발휘하며 직접 장화를 신고 수해 현장을 누볐으나, 자연재해의 규모는 일개 정권의 행정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41]
엘니뇨가 불러온 물리적 파괴는 곧바로 경제적 파국으로 이어졌다. 집권 초기의 급진적 시장 개방 정책인 '후지 쇼크'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페루 경제를 지나치게 대외 의존적인 구조로 변모시켰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1998년 러시아 모스크바발 금융 위기가 연달아 터지자, 신흥국 시장에 대한 투자 심리가 얼어붙으며 페루로 유입되던 외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경제성장률은 곤두박질쳤고, 실업률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특히 후지모리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도시 빈민층과 농민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물가는 안정되었을지언정,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마르고 일자리가 사라지자 민심은 급격히 차갑게 식어갔다. 1990년대 초반의 경제적 성공이 '후지모리의 능력' 덕분이었다면, 1990년대 후반의 침체는 '후지모리의 실정'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해 복구 과정에서 후지모리 정권의 고질적인 부패 체제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엘니뇨로 파괴된 도로와 교량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몬테시노스가 관리하던 군부와 측근 기업들에게 특혜가 집중되었다.
심지어 급하게 지어진 복구 시설들이 다음번 작은 비에도 쉽게 무너지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재난을 이용해 자기 배만 채우고 있다"는 분노가 확산되었다. 이는 과거 '테러 진압'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묵인되었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경제적 고통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결국 1998년을 기점으로 후지모리에 대한 지지율은 사상 처음으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지르는 이른바 '데드크로스'를 형성하게 된다.
경제난은 곧 정치적 저항으로 번졌다. 그동안 후지모리의 독재적 행보에 침묵하던 노동조합과 대학생 단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빵을 달라"는 구호는 어느새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정치적 구호와 합쳐졌고, 이는 훗날 2000년 대선의 부정 선거 규탄 시위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후지모리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빈민층 쌀 배급 등)을 남발했으나, 국가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자연재해(엘니뇨)와 대외 악재(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대내 부패가 융합된 199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후지모리 체제의 '하드웨어'를 밑바닥부터 갉아먹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42]
2.4.4. 농촌 불임 시술 사업[편집]
후지모리 정부는 1995년 재선 성공 이후, 페루의 만성적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인구 억제 정책을 내세웠다. 이른바 '국가 가족계획 및 보건 프로그램(PNRPF)'이다. 겉으로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출산의 선택권을 주고 보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케추아족 등)과 농촌 빈민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불임 시술이었다.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만 약 27만 명의 여성과 2만 명의 남성이 불임 시술(난관 결찰술 및 정관 수술)을 받은 것으로 집계된다.
이 사업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후지모리 정권 특유의 '수치 중심적 행정'이었다. 당시 보건부 장관들은 각 지역 보건소에 매달 달성해야 할 불임 시술 건수(쿼터)를 할당했다. 실적을 채우지 못한 의료진은 해고 위협에 시달렸고, 반대로 실적이 높은 이들에게는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료 윤리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보건 요원들은 안데스 오지의 마을을 돌며 다음과 같은 수법을 동원했다.
"이 주사는 영양제다", "암을 예방하는 시술이다"라고 속여 수술대에 올렸다. 시술을 거부하면 정부가 제공하는 식량 배급(PRONAA)을 끊거나 벌금을 물리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시술을 받는 대가로 쌀 한 포대나 밀가루를 주는 식으로 생존이 절박한 빈민들을 유혹했다. 심지어 출산 직후의 산모를 강제로 수술실로 끌고 가 마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관을 묶어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정책의 타겟이 철저하게 안데스 원주민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은 후지모리 정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후지모리는 대외적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원주민 인구의 증가를 페루 현대화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인종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었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케추아어 화자들은 수술 동의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장을 찍어야 했고, 이는 국가가 특정 인종의 번식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43]
수술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위생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마을 회관이나 창고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수술이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여성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해도 수십 명에 달한다. 대표적인 피해자인 마멜리타 메스탄자(Mamerita Mestanza)는 7명의 자녀를 둔 상태에서 보건 요원들의 끈질긴 협박 끝에 수술을 받았으나,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며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수술 후 피해 여성들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고립되었다. 가부장적인 원주민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노동력을 상실한 존재로 취급받아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겪어야 했다.
2000년 후지모리 정권이 붕괴된 후,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후지모리 측은 "일부 보건 요원들의 과잉 충성으로 벌어진 일일 뿐, 국가 차원의 강제성은 없었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훗날 공개된 정부 내부 문서에는 후지모리 본인이 직접 시술 현황 보고서를 꼼꼼히 챙겼으며, 실적이 낮은 지역을 질책했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2021년 페루 법원은 마침내 이 사건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후지모리와 전직 보건부 장관들을 기소했으나, 후지모리는 이미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인 상태였고 고령과 지병을 이유로 재판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44]
농촌 불임 시술 사업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인권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후지모리식 효율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다. 경제 지표를 개선하고 빈곤율을 낮추기 위해 인간의 신체 결정권을 국가가 강탈한 이 사건은, 후지모리를 지지하는 이들조차 쉽게 변호하지 못하는 그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다.
이 사업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후지모리 정권 특유의 '수치 중심적 행정'이었다. 당시 보건부 장관들은 각 지역 보건소에 매달 달성해야 할 불임 시술 건수(쿼터)를 할당했다. 실적을 채우지 못한 의료진은 해고 위협에 시달렸고, 반대로 실적이 높은 이들에게는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료 윤리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보건 요원들은 안데스 오지의 마을을 돌며 다음과 같은 수법을 동원했다.
"이 주사는 영양제다", "암을 예방하는 시술이다"라고 속여 수술대에 올렸다. 시술을 거부하면 정부가 제공하는 식량 배급(PRONAA)을 끊거나 벌금을 물리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시술을 받는 대가로 쌀 한 포대나 밀가루를 주는 식으로 생존이 절박한 빈민들을 유혹했다. 심지어 출산 직후의 산모를 강제로 수술실로 끌고 가 마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관을 묶어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정책의 타겟이 철저하게 안데스 원주민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은 후지모리 정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후지모리는 대외적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원주민 인구의 증가를 페루 현대화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인종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었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케추아어 화자들은 수술 동의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장을 찍어야 했고, 이는 국가가 특정 인종의 번식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43]
수술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위생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마을 회관이나 창고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수술이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여성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해도 수십 명에 달한다. 대표적인 피해자인 마멜리타 메스탄자(Mamerita Mestanza)는 7명의 자녀를 둔 상태에서 보건 요원들의 끈질긴 협박 끝에 수술을 받았으나,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며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수술 후 피해 여성들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고립되었다. 가부장적인 원주민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노동력을 상실한 존재로 취급받아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겪어야 했다.
2000년 후지모리 정권이 붕괴된 후,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후지모리 측은 "일부 보건 요원들의 과잉 충성으로 벌어진 일일 뿐, 국가 차원의 강제성은 없었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훗날 공개된 정부 내부 문서에는 후지모리 본인이 직접 시술 현황 보고서를 꼼꼼히 챙겼으며, 실적이 낮은 지역을 질책했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2021년 페루 법원은 마침내 이 사건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후지모리와 전직 보건부 장관들을 기소했으나, 후지모리는 이미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인 상태였고 고령과 지병을 이유로 재판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44]
농촌 불임 시술 사업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인권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후지모리식 효율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다. 경제 지표를 개선하고 빈곤율을 낮추기 위해 인간의 신체 결정권을 국가가 강탈한 이 사건은, 후지모리를 지지하는 이들조차 쉽게 변호하지 못하는 그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다.
2.5. 언론 장악과 타블로이드 공작[편집]
후지모리 정권이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독재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순히 군부의 총칼이나 국가 정보국(SIN)의 감시뿐만이 아니었다. 후지모리와 그의 책사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는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통치 수단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주류 언론을 매수하거나 탄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층민들이 즐겨 읽는 저질 타블로이드 신문을 직접 창간하거나 조종하여 정적(政敵)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치차(Chicha) 언론' 공작을 전개했다.
'치차(Chicha)'는 본래 안데스 지역의 전통 옥수수 술을 뜻하지만, 페루 현대사에서는 '저급하고 조잡한 하급 문화'를 일컫는 은어로도 쓰인다. 후지모리 정권은 1990년대 중반부터 SIN의 비자금을 활용해 수많은 영세 타블로이드 신문사들을 포섭했다.
매일 아침 몬테시노스는 SIN 본부에서 타블로이드 편집장들과 회의를 하거나 지침을 하달했다. 그날그날 공격해야 할 야당 정치인, 인권 운동가, 혹은 비판적인 언론인의 명단과 함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직접 정해준 것이다.
이 신문들의 1면은 항상 자극적인 색채와 거대한 글씨체로 도배되었다. 정적들을 향해 "국가 반역자", "동성애자", "정신병자"와 같은 인신공격성 허위 사실을 유포했으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선정적인 여성 사진이나 초자연적인 괴담(UFO, 귀신 목격담 등)을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이 신문들은 리마의 슬럼가와 지방 소도시의 가판대에 아주 저렴한 가격(약 0.5솔)에 뿌려졌다. 정보 접근성이 낮은 서민들에게 이 저질 신문들은 유일한 뉴스 소식통이었고, 결과적으로 후지모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대중에게 '악마'로 각인되었다.[45]
신문이 서민층을 공략했다면, 중산층 이상의 여론은 TV 방송국이 담당했다. 후지모리 정부는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방송국의 허가를 취소하거나, 사주를 압박해 경영권을 빼앗는 방식을 취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루크 이브셰르(Baruch Ivcher) 사건'이다. 채널 2(Frecuencia Latina)의 사주였던 이브셰르는 정권의 고문 의혹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페루 국적을 박탈당하고 방송국을 빼앗겼다.[ 이브셰르는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는데, 정권은 그가 귀화 과정에서 서류를 조작했다는 억지 주장을 펼쳐 국적을 무효화했다. 이는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자 사유 재산권 침해였다.]
또한, 대부분의 민영 방송사 사주들은 몬테시노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뉴스 보도 시간을 정권 홍보로 채웠다. 2000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였던 알레한드로 톨레도의 연설 장면은 단 1분도 방송되지 않은 반면, 후지모리의 시찰 장면은 온종일 반복 재생되는 식이었다.
후지모리 정권의 언론 공작은 현대적 의미의 '가짜 뉴스'와 '댓글 알바'의 시초 격인 행태를 보였다. 이들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원초적인 공포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지모리가 물러나면 빛나는 길이 다시 돌아와 당신의 가족을 죽일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을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했다. 정권의 부패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이른바 '처녀가 피눈물을 흘린다'는 식의 기적 사건이나 연예인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시선을 분산시켰다. 정적의 사생활을 조작해 보도함으로써 그들의 도덕적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는 훗날 '후지모리식 언론 통제'라는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정교하고 악랄했다.
이러한 광범위한 언론 조작은 후지모리가 10년 넘게 '철권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던 핵심 기둥이었다. 하지만 이는 페루 사회의 언론 윤리를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국민들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2000년 정권이 붕괴한 이후, 뇌물을 받은 방송사 사주들과 타블로이드 편집장들은 줄줄이 법정에 섰고, 페루 언론계는 '치차'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오랜 시간 뼈저린 반성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후지모리의 언론 장악은 "진실을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몬테시노스가 직접 촬영했던 '뇌물 수수 비디오'가 역설적으로 그 언론 장악의 현장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어 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치차(Chicha)'는 본래 안데스 지역의 전통 옥수수 술을 뜻하지만, 페루 현대사에서는 '저급하고 조잡한 하급 문화'를 일컫는 은어로도 쓰인다. 후지모리 정권은 1990년대 중반부터 SIN의 비자금을 활용해 수많은 영세 타블로이드 신문사들을 포섭했다.
매일 아침 몬테시노스는 SIN 본부에서 타블로이드 편집장들과 회의를 하거나 지침을 하달했다. 그날그날 공격해야 할 야당 정치인, 인권 운동가, 혹은 비판적인 언론인의 명단과 함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직접 정해준 것이다.
이 신문들의 1면은 항상 자극적인 색채와 거대한 글씨체로 도배되었다. 정적들을 향해 "국가 반역자", "동성애자", "정신병자"와 같은 인신공격성 허위 사실을 유포했으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선정적인 여성 사진이나 초자연적인 괴담(UFO, 귀신 목격담 등)을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이 신문들은 리마의 슬럼가와 지방 소도시의 가판대에 아주 저렴한 가격(약 0.5솔)에 뿌려졌다. 정보 접근성이 낮은 서민들에게 이 저질 신문들은 유일한 뉴스 소식통이었고, 결과적으로 후지모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대중에게 '악마'로 각인되었다.[45]
신문이 서민층을 공략했다면, 중산층 이상의 여론은 TV 방송국이 담당했다. 후지모리 정부는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방송국의 허가를 취소하거나, 사주를 압박해 경영권을 빼앗는 방식을 취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루크 이브셰르(Baruch Ivcher) 사건'이다. 채널 2(Frecuencia Latina)의 사주였던 이브셰르는 정권의 고문 의혹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페루 국적을 박탈당하고 방송국을 빼앗겼다.[ 이브셰르는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는데, 정권은 그가 귀화 과정에서 서류를 조작했다는 억지 주장을 펼쳐 국적을 무효화했다. 이는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자 사유 재산권 침해였다.]
또한, 대부분의 민영 방송사 사주들은 몬테시노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뉴스 보도 시간을 정권 홍보로 채웠다. 2000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였던 알레한드로 톨레도의 연설 장면은 단 1분도 방송되지 않은 반면, 후지모리의 시찰 장면은 온종일 반복 재생되는 식이었다.
후지모리 정권의 언론 공작은 현대적 의미의 '가짜 뉴스'와 '댓글 알바'의 시초 격인 행태를 보였다. 이들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원초적인 공포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지모리가 물러나면 빛나는 길이 다시 돌아와 당신의 가족을 죽일 것이라는 공포 마케팅을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했다. 정권의 부패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이른바 '처녀가 피눈물을 흘린다'는 식의 기적 사건이나 연예인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시선을 분산시켰다. 정적의 사생활을 조작해 보도함으로써 그들의 도덕적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는 훗날 '후지모리식 언론 통제'라는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정교하고 악랄했다.
이러한 광범위한 언론 조작은 후지모리가 10년 넘게 '철권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던 핵심 기둥이었다. 하지만 이는 페루 사회의 언론 윤리를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국민들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2000년 정권이 붕괴한 이후, 뇌물을 받은 방송사 사주들과 타블로이드 편집장들은 줄줄이 법정에 섰고, 페루 언론계는 '치차'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오랜 시간 뼈저린 반성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후지모리의 언론 장악은 "진실을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몬테시노스가 직접 촬영했던 '뇌물 수수 비디오'가 역설적으로 그 언론 장악의 현장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어 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2.6. 2000년 대선 부정 선거 논란[편집]
2000년 대선은 후지모리 정권이 민주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연성 독재'에서 '경성 독재'로 넘어가는 임계점이었다. 이미 1996년, 후지모리는 이른바 '헌법의 정통적 해석법'이라는 궤변을 앞세워 3선 도전의 길을 열었다. 1993년 개정 헌법상 대통령은 한 차례만 연임할 수 있었으나, 후지모리 측은 "1990년 당선은 구헌법 체제였으므로 카운트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반대한 헌법재판소 판사 3명을 의회 다수당의 힘으로 해임해버리는 막장 행보를 보였다.]
이 시기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예전 같지 않았다. 10년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경제 침체, 그리고 권력 핵심부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전횡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모리는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고, 국가 기구 전체를 동원한 조직적인 선거 부정 기획인 '플랜 발레리오(Plan Valerio)'를 가동한다.
기존의 정통 야당들이 후지모리의 정보 공작에 휘말려 지리멸렬할 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원주민 혈통의 경제학자 알레한드로 톨레도였다. 톨레도는 스스로를 '엘 초로(El Cholo, 원주민 혼혈)'라 자칭하며 후지모리의 '치노' 마케팅에 정면으로 맞섰다.
특히 2000년 초반, 리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라바 란데라(Lava Bandera, 국기 세탁)' 퍼포먼스가 유행했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페루 국기를 비눗물로 빠는 이 행위는 "후지모리 정권에 의해 더러워진 조국을 씻어내겠다"는 강력한 풍자였다. 후지모리는 이를 '테러리스트의 선동'으로 몰아붙였으나, 이미 민심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2000년 4월 9일 실시된 1차 투표는 페루 선거 역사상 가장 추악한 날로 기록된다.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는 톨레도가 앞서거나 후지모리와 박빙인 것으로 나타났으나, 선거관리위원회(ONPE)의 집계가 시작되자 기현상이 벌어졌다.
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의 투표함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이미 후지모리에게 기표된 투표용지가 뭉텅이로 발견되었다. 사망자나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선거인 명부에 올라와 후지모리에게 표를 던진 정황이 포착되었다.
집계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선관위 컴퓨터 서버가 다운되었고, 복구된 후에는 후지모리의 득표율이 마법처럼 상승해 있었다.[46]
결국 후지모리는 4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결선 투표로 가는 50% 선에 단 0.2% 모자란 수치였는데,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결선을 허용하는 척하며 시간을 벌려는 계산된 수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톨레도는 "공정한 선거 환경이 보장되지 않는 한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는 대선 연기를 주장했으나, 후지모리는 5월 28일 단독 후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결선 투표를 강행했다.
결과는 당연히 후지모리의 압승이었으나, 이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수백만 명의 페루인이 투표지에 '사기꾼(Fraude)'이라고 적어 무효표를 던졌고, 당선 직후 열린 취임식은 축제가 아닌 전쟁터였다. 7월 28일 취임식 당일, 리마 시내에서는 '네 방향의 행진(Marcha de los Cuatro Suyos)'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취임식 당일의 혼란 속에서 국영 '방코 데 라 나시온(Banco de la Nación)' 건물에 불이 나 경비원 6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후지모리 정부는 이를 "톨레도 지지자들의 폭력적인 방화"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야당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훗날 진상 조사 결과, 이 방화는 시위대의 소행이 아니라 국가정보국(SIN)의 사주를 받은 요원들이 저지른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제물로 삼은 이 사건은 후지모리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결국 부정 선거로 얻어낸 3기 집권은 시작부터 국제적인 고립과 내부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후지모리는 총칼과 조작된 투표지로 권력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 듯 보였으나, 불과 두 달 뒤 터질 '블라디비디오'라는 폭탄이 자신의 발밑에서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시기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예전 같지 않았다. 10년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경제 침체, 그리고 권력 핵심부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전횡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모리는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고, 국가 기구 전체를 동원한 조직적인 선거 부정 기획인 '플랜 발레리오(Plan Valerio)'를 가동한다.
기존의 정통 야당들이 후지모리의 정보 공작에 휘말려 지리멸렬할 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원주민 혈통의 경제학자 알레한드로 톨레도였다. 톨레도는 스스로를 '엘 초로(El Cholo, 원주민 혼혈)'라 자칭하며 후지모리의 '치노' 마케팅에 정면으로 맞섰다.
특히 2000년 초반, 리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라바 란데라(Lava Bandera, 국기 세탁)' 퍼포먼스가 유행했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페루 국기를 비눗물로 빠는 이 행위는 "후지모리 정권에 의해 더러워진 조국을 씻어내겠다"는 강력한 풍자였다. 후지모리는 이를 '테러리스트의 선동'으로 몰아붙였으나, 이미 민심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2000년 4월 9일 실시된 1차 투표는 페루 선거 역사상 가장 추악한 날로 기록된다.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는 톨레도가 앞서거나 후지모리와 박빙인 것으로 나타났으나, 선거관리위원회(ONPE)의 집계가 시작되자 기현상이 벌어졌다.
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의 투표함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이미 후지모리에게 기표된 투표용지가 뭉텅이로 발견되었다. 사망자나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선거인 명부에 올라와 후지모리에게 표를 던진 정황이 포착되었다.
집계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선관위 컴퓨터 서버가 다운되었고, 복구된 후에는 후지모리의 득표율이 마법처럼 상승해 있었다.[46]
결국 후지모리는 4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결선 투표로 가는 50% 선에 단 0.2% 모자란 수치였는데,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결선을 허용하는 척하며 시간을 벌려는 계산된 수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톨레도는 "공정한 선거 환경이 보장되지 않는 한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는 대선 연기를 주장했으나, 후지모리는 5월 28일 단독 후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결선 투표를 강행했다.
결과는 당연히 후지모리의 압승이었으나, 이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수백만 명의 페루인이 투표지에 '사기꾼(Fraude)'이라고 적어 무효표를 던졌고, 당선 직후 열린 취임식은 축제가 아닌 전쟁터였다. 7월 28일 취임식 당일, 리마 시내에서는 '네 방향의 행진(Marcha de los Cuatro Suyos)'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취임식 당일의 혼란 속에서 국영 '방코 데 라 나시온(Banco de la Nación)' 건물에 불이 나 경비원 6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후지모리 정부는 이를 "톨레도 지지자들의 폭력적인 방화"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야당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훗날 진상 조사 결과, 이 방화는 시위대의 소행이 아니라 국가정보국(SIN)의 사주를 받은 요원들이 저지른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제물로 삼은 이 사건은 후지모리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결국 부정 선거로 얻어낸 3기 집권은 시작부터 국제적인 고립과 내부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후지모리는 총칼과 조작된 투표지로 권력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 듯 보였으나, 불과 두 달 뒤 터질 '블라디비디오'라는 폭탄이 자신의 발밑에서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7. 정권의 붕괴[편집]
2000년 9월 14일, 야당 의원 루이스 이베리코가 공개한 'Kouri-Montesinos' 비디오[47]는 페루 사회를 문자 그대로 뒤집어 놓았다. 폭로 이틀 뒤인 9월 16일 저녁, 후지모리는 TV 앞에 서서 전격적인 발표를 단행한다.
그는 이 담화에서 국가정보국(SIN)의 해체와 더불어, 조기 대선 실시 및 본인의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시간을 벌어 몬테시노스를 축출하고 본인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임계점을 넘은 상태였고, 리마 시내에는 "독재자 퇴진"을 외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정권 붕괴의 핵심 동력은 후지모리와 그의 '오른팔' 몬테시노스 사이의 결별이었다. 10년간 공생해온 두 사람의 관계는 폭로 직후 급격히 냉각되었다. 몬테시노스는 군부 내 자신의 심복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암시를 주며 후지모리를 압박했고, 후지모리는 역으로 군부를 직접 시찰하며 몬테시노스의 영향력을 거세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2000년 10월, 몬테시노스가 파나마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거부당하고 페루로 몰래 귀국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후지모리는 직접 권총을 차고 경찰차에 올라타 리마 교외를 뒤지며 "내 손으로 직접 배신자를 잡겠다"는 이른바 '추격전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 통제력을 상실한 노정객의 단말마적인 쇼로 비춰졌다.[48]
정권의 기반이었던 군부와 관료 조직은 쥐 떼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빠르게 흩어졌다. 특히 '블라디비디오'가 매일같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비디오에 등장했던 군 장성들과 장관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거나 해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페루 경제는 이미 엘니뇨와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침체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자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었다. 기업인들은 후지모리 정권에 등을 돌렸고, 결정적으로 미주기구(OAS)와 미국 국무부가 후지모리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민주적 정권 교체를 압박했다. 후지모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야당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거리의 주도권은 알레한드로 톨레도를 필두로 한 야권 연합에 넘어가 있었다.
11월 중순, 후지모리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페루를 떠났다. 당시 각료들은 대통령이 곧 귀국할 것이라 믿었으나, 후지모리의 여정은 브루나이를 거쳐 파나마, 그리고 일본으로 향했다. 리마의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은 비어 있었고, 국무총리와 장관들은 대통령의 행방을 TV 뉴스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2000년 11월 19일, 도쿄의 한 호텔에 투숙하던 후지모리는 페루 대통령궁으로 한 통의 팩스를 보낸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직 사임서였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해외에서 팩스로 사퇴를 통보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페루 국민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페루 의회는 이 사임서를 수리하는 대신, 11월 21일 표결을 통해 그를 '도덕적 불능(Incapacidad Moral)' 상태로 규정하고 대통령직에서 파면(Impeachment)해 버린다.[49]
후지모리 정권의 붕괴는 표면적으로는 비디오 한 장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시스템의 부패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당시 국가 기관이 몬테시노스라는 개인의 정보망에 종속되면서, 정보망이 노출되자마자 국가 행정 전체가 마비되었다. 냉전 종식 후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던 클린턴 행정부에게 후지모리는 더 이상 유용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또한 '후지 쇼크' 초기의 영광은 사라지고, 서민 경제가 다시 파탄 나면서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하층민들이 등을 돌렸다.
후지모리 정권의 붕괴는 '효율성'을 명분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던 통치 방식이, 그 효율성을 담보하던 밀실 정치가 공개되는 순간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대 정치사의 극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담화에서 국가정보국(SIN)의 해체와 더불어, 조기 대선 실시 및 본인의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시간을 벌어 몬테시노스를 축출하고 본인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임계점을 넘은 상태였고, 리마 시내에는 "독재자 퇴진"을 외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정권 붕괴의 핵심 동력은 후지모리와 그의 '오른팔' 몬테시노스 사이의 결별이었다. 10년간 공생해온 두 사람의 관계는 폭로 직후 급격히 냉각되었다. 몬테시노스는 군부 내 자신의 심복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암시를 주며 후지모리를 압박했고, 후지모리는 역으로 군부를 직접 시찰하며 몬테시노스의 영향력을 거세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2000년 10월, 몬테시노스가 파나마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거부당하고 페루로 몰래 귀국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후지모리는 직접 권총을 차고 경찰차에 올라타 리마 교외를 뒤지며 "내 손으로 직접 배신자를 잡겠다"는 이른바 '추격전 퍼포먼스'를 벌였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 통제력을 상실한 노정객의 단말마적인 쇼로 비춰졌다.[48]
정권의 기반이었던 군부와 관료 조직은 쥐 떼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빠르게 흩어졌다. 특히 '블라디비디오'가 매일같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비디오에 등장했던 군 장성들과 장관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거나 해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페루 경제는 이미 엘니뇨와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침체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자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었다. 기업인들은 후지모리 정권에 등을 돌렸고, 결정적으로 미주기구(OAS)와 미국 국무부가 후지모리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민주적 정권 교체를 압박했다. 후지모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야당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거리의 주도권은 알레한드로 톨레도를 필두로 한 야권 연합에 넘어가 있었다.
11월 중순, 후지모리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페루를 떠났다. 당시 각료들은 대통령이 곧 귀국할 것이라 믿었으나, 후지모리의 여정은 브루나이를 거쳐 파나마, 그리고 일본으로 향했다. 리마의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은 비어 있었고, 국무총리와 장관들은 대통령의 행방을 TV 뉴스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2000년 11월 19일, 도쿄의 한 호텔에 투숙하던 후지모리는 페루 대통령궁으로 한 통의 팩스를 보낸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직 사임서였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해외에서 팩스로 사퇴를 통보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페루 국민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페루 의회는 이 사임서를 수리하는 대신, 11월 21일 표결을 통해 그를 '도덕적 불능(Incapacidad Moral)' 상태로 규정하고 대통령직에서 파면(Impeachment)해 버린다.[49]
후지모리 정권의 붕괴는 표면적으로는 비디오 한 장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과 시스템의 부패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당시 국가 기관이 몬테시노스라는 개인의 정보망에 종속되면서, 정보망이 노출되자마자 국가 행정 전체가 마비되었다. 냉전 종식 후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던 클린턴 행정부에게 후지모리는 더 이상 유용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또한 '후지 쇼크' 초기의 영광은 사라지고, 서민 경제가 다시 파탄 나면서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하층민들이 등을 돌렸다.
후지모리 정권의 붕괴는 '효율성'을 명분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던 통치 방식이, 그 효율성을 담보하던 밀실 정치가 공개되는 순간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대 정치사의 극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8. 팩스 사임[편집]
2000년 11월 13일, 후지모리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리마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데 피니요스 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당시 페루 내부 상황은 몬테시노스의 비리 비디오 폭로로 인해 정권의 도덕성이 바닥을 친 상태였으나, 후지모리는 "국가 원수로서의 외무 일정을 수행하고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겠다"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대통령으로서 페루 땅을 밟은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실제로 그는 브루나이 일정을 마친 뒤 귀국하지 않고 돌연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후지모리 측은 "일본과의 외교적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전격 방문"이라고 둘러댔으나, 이미 리마에서는 "대통령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는 도쿄의 뉴 오타니 호텔에 짐을 풀고 은신하며 페루 내각과의 연락을 끊기 시작했다.[50]
2000년 11월 19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후지모리는 페루 대통령궁과 의회에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놀랍게도 그 수단은 공식 외교 채널이나 인편이 아닌 '팩스'였다. 이 팩스에는 "페루의 안정을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짤막한 사임의 변이 담겨 있었다.
현대 정치사에서 한 국가의 수장이 타국으로 도피한 뒤 기계 장치를 통해 사직서를 전송한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이는 페루 국민들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안겨주었으며, '치노(Chino)'라고 부르며 그를 지지했던 서민들조차 "우리를 버리고 조상 신들의 나라인 일본으로 도망갔다"며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페루 의회는 이 사임서를 수리하는 대신, '도덕적 불능(Incapacidad Moral)'을 근거로 그를 탄핵(면직)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비겁하게 도망친 자의 자진 사퇴를 받아주느니, 의회의 이름으로 그를 쫓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지모리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페루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가 일본계 이민자의 자녀로서 일본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며, 그를 '일본 시민'으로 대우했다.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은 "자국민을 타국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워 후지모리의 신병 확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도쿄의 호화 저택에서 생활하며 일본 정계 인사들과 교류했고, 심지어 일본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51]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페루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비리는 측근인 몬테시노스가 저지른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후지모리의 팩스 사임으로 인해 페루는 극심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제1부통령과 제2부통령이 연이어 사임하거나 자격을 상실하면서, 헌법에 따라 의회 의장이었던 발렌틴 파니아구아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파니아구아 과도 정부는 후지모리가 남긴 부패의 잔재를 청산하고, 무너진 민주주의 절차를 복구하는 데 주력했다. 이 시기 후지모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각종 인권 유린과 부정 축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훗날 후지모리가 칠레를 거쳐 페루로 송환되었을 때 결정적인 유죄 증거가 되는 '진실 화해 위원회'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후지모리의 팩스 사임 사건을 "독재자의 가장 비겁한 말로"라고 평가한다. 경제를 살리고 테러를 잡았다는 그의 업적조차, 책임감 없이 타국으로 도주하여 팩스 한 장으로 통치를 포기한 행위 앞에서는 빛이 바랬기 때문이다. 이는 후지모리즘(Fujimorismo)이 페루 정치의 주류에서 밀려나 '부패하고 무책임한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품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나, 역설적으로 이 '팩스 사임'은 그를 향한 페루 대중의 일말의 동정심마저 앗아갔다. 훗날 그가 칠레를 거쳐 재입국을 시도하다 체포되었을 때, 대다수의 페루 국민이 그의 구속에 환호했던 것은 바로 이 2000년 11월의 배신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브루나이 일정을 마친 뒤 귀국하지 않고 돌연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후지모리 측은 "일본과의 외교적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전격 방문"이라고 둘러댔으나, 이미 리마에서는 "대통령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는 도쿄의 뉴 오타니 호텔에 짐을 풀고 은신하며 페루 내각과의 연락을 끊기 시작했다.[50]
2000년 11월 19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후지모리는 페루 대통령궁과 의회에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놀랍게도 그 수단은 공식 외교 채널이나 인편이 아닌 '팩스'였다. 이 팩스에는 "페루의 안정을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짤막한 사임의 변이 담겨 있었다.
현대 정치사에서 한 국가의 수장이 타국으로 도피한 뒤 기계 장치를 통해 사직서를 전송한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이는 페루 국민들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안겨주었으며, '치노(Chino)'라고 부르며 그를 지지했던 서민들조차 "우리를 버리고 조상 신들의 나라인 일본으로 도망갔다"며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페루 의회는 이 사임서를 수리하는 대신, '도덕적 불능(Incapacidad Moral)'을 근거로 그를 탄핵(면직)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비겁하게 도망친 자의 자진 사퇴를 받아주느니, 의회의 이름으로 그를 쫓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지모리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페루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가 일본계 이민자의 자녀로서 일본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며, 그를 '일본 시민'으로 대우했다.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은 "자국민을 타국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워 후지모리의 신병 확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도쿄의 호화 저택에서 생활하며 일본 정계 인사들과 교류했고, 심지어 일본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51]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페루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비리는 측근인 몬테시노스가 저지른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후지모리의 팩스 사임으로 인해 페루는 극심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제1부통령과 제2부통령이 연이어 사임하거나 자격을 상실하면서, 헌법에 따라 의회 의장이었던 발렌틴 파니아구아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파니아구아 과도 정부는 후지모리가 남긴 부패의 잔재를 청산하고, 무너진 민주주의 절차를 복구하는 데 주력했다. 이 시기 후지모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각종 인권 유린과 부정 축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훗날 후지모리가 칠레를 거쳐 페루로 송환되었을 때 결정적인 유죄 증거가 되는 '진실 화해 위원회'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후지모리의 팩스 사임 사건을 "독재자의 가장 비겁한 말로"라고 평가한다. 경제를 살리고 테러를 잡았다는 그의 업적조차, 책임감 없이 타국으로 도주하여 팩스 한 장으로 통치를 포기한 행위 앞에서는 빛이 바랬기 때문이다. 이는 후지모리즘(Fujimorismo)이 페루 정치의 주류에서 밀려나 '부패하고 무책임한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품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나, 역설적으로 이 '팩스 사임'은 그를 향한 페루 대중의 일말의 동정심마저 앗아갔다. 훗날 그가 칠레를 거쳐 재입국을 시도하다 체포되었을 때, 대다수의 페루 국민이 그의 구속에 환호했던 것은 바로 이 2000년 11월의 배신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2.9. 일본 망명 생활[편집]
2000년 11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를 마친 후 리마로 돌아가는 대신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후지모리의 행보는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리마의 대통령궁이 아닌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짐을 푼 그는, 호텔 방에서 팩스 한 장으로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며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보호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후지모리의 부모가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출생 신고했음을 근거로, 후지모리에게 일본 국적이 있음을 공식 확인해주었다.[52] 이로써 그는 페루의 전직 대통령이자 일본의 시민이라는 기괴한 이중 정체성을 가진 채 도쿄에서의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망명 초기, 후지모리는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일본 내 보수 우익 세력들에게 그는 '테러리즘을 물리친 영웅'이자 '일본의 혼을 간직한 자랑스러운 닛케이'로 대접받았다. 특히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와 소설가 소노 아야코 등 거물급 인사들이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는 도쿄 메구로구에 위치한 고급 주택에 머물며 일본 전역을 돌며 강연 정치를 펼쳤다. 강연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테러 조직을 궤멸시켰는가"와 "남미 경제를 어떻게 회생시켰는가"였다. 일본 미디어는 그를 '사무라이 대통령'이라 치켜세웠고, 후지모리 역시 유창하지는 않지만 격조 있는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대중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의 유명 호텔 체인 회장의 딸인 가타오카 사토미와 연인 관계를 맺으며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53]
페루 검찰은 후지모리를 살인, 부패, 공금 횡령 등 수십 가지 혐의로 기소하며 일본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는 완강했다. "자국민을 타국에 넘길 수 없다"는 원칙론을 고수하며 페루 측의 모든 요청을 기각했다.
후지모리는 이 기간을 적극적인 여론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도쿄에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진실을 말하겠다'며 페루 정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임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도 페루 정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리마에 남은 자신의 지지 세력(후지모리파)에게 지령을 내리는 등 '원격 통치'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망명 생활이 5년째에 접어들 무렵, 후지모리는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결정을 내린다. 바로 일본 정계 진출 시도였다.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그는 군소 정당인 '국민신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입후보했다.[54]
비록 낙선했으나, 이는 그가 단순히 조용히 살기를 거부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이라는 안전한 요새에 머물며 다시 권력의 정점으로 복귀할 날만을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자신감은 결과적으로 그를 오판하게 만들었다. 일본 내에서도 "남의 나라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왜 우리 선거에 나오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일본을 떠나 칠레로 향하게 되는 심리적 압박 중 하나로 작용했다.
도쿄에서의 삶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신변은 안전했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잊혀진 지도자'로 남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일본에서 누리는 안정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거세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2005년 11월, 전격적으로 일본을 떠나 칠레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는 페루로 복귀하여 다시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의 발로였다. 일본 정부는 그가 출국하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한일 관계 및 페루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일본 정부가 후지모리라는 '뜨거운 감자'를 자연스럽게 털어내기 위해 묵인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5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은 그에게 사법적 처벌을 유예시켜준 황금기였으나, 동시에 그를 현실 감각이 결여된 '과거의 망령'으로 고착화시킨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보호 아래 영원히 안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보호막을 걷어차고 형장의 이슬 혹은 감옥의 수인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보호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후지모리의 부모가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출생 신고했음을 근거로, 후지모리에게 일본 국적이 있음을 공식 확인해주었다.[52] 이로써 그는 페루의 전직 대통령이자 일본의 시민이라는 기괴한 이중 정체성을 가진 채 도쿄에서의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망명 초기, 후지모리는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일본 내 보수 우익 세력들에게 그는 '테러리즘을 물리친 영웅'이자 '일본의 혼을 간직한 자랑스러운 닛케이'로 대접받았다. 특히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지사와 소설가 소노 아야코 등 거물급 인사들이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는 도쿄 메구로구에 위치한 고급 주택에 머물며 일본 전역을 돌며 강연 정치를 펼쳤다. 강연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테러 조직을 궤멸시켰는가"와 "남미 경제를 어떻게 회생시켰는가"였다. 일본 미디어는 그를 '사무라이 대통령'이라 치켜세웠고, 후지모리 역시 유창하지는 않지만 격조 있는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대중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의 유명 호텔 체인 회장의 딸인 가타오카 사토미와 연인 관계를 맺으며 경제적,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53]
페루 검찰은 후지모리를 살인, 부패, 공금 횡령 등 수십 가지 혐의로 기소하며 일본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는 완강했다. "자국민을 타국에 넘길 수 없다"는 원칙론을 고수하며 페루 측의 모든 요청을 기각했다.
후지모리는 이 기간을 적극적인 여론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도쿄에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진실을 말하겠다'며 페루 정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임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도 페루 정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리마에 남은 자신의 지지 세력(후지모리파)에게 지령을 내리는 등 '원격 통치'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망명 생활이 5년째에 접어들 무렵, 후지모리는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결정을 내린다. 바로 일본 정계 진출 시도였다.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그는 군소 정당인 '국민신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입후보했다.[54]
비록 낙선했으나, 이는 그가 단순히 조용히 살기를 거부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이라는 안전한 요새에 머물며 다시 권력의 정점으로 복귀할 날만을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자신감은 결과적으로 그를 오판하게 만들었다. 일본 내에서도 "남의 나라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왜 우리 선거에 나오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일본을 떠나 칠레로 향하게 되는 심리적 압박 중 하나로 작용했다.
도쿄에서의 삶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신변은 안전했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잊혀진 지도자'로 남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일본에서 누리는 안정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거세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2005년 11월, 전격적으로 일본을 떠나 칠레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는 페루로 복귀하여 다시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의 발로였다. 일본 정부는 그가 출국하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한일 관계 및 페루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일본 정부가 후지모리라는 '뜨거운 감자'를 자연스럽게 털어내기 위해 묵인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5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은 그에게 사법적 처벌을 유예시켜준 황금기였으나, 동시에 그를 현실 감각이 결여된 '과거의 망령'으로 고착화시킨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보호 아래 영원히 안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보호막을 걷어차고 형장의 이슬 혹은 감옥의 수인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2.10. 칠레에서의 전격 체포[편집]
2005년 11월 6일, 전 세계 외신은 일제히 타전된 속보에 경악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전용기를 타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기습적으로 착륙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도박이었다. 당시 후지모리는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의 적색 수배 명단에 올라 있었고, 페루 정부는 일본 정부에 끈질기게 신병 인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자라는 신분적 방어막을 뒤로하고, 2006년 페루 대선을 앞두고 전격적인 복귀를 노렸다. 그는 일본 도쿄를 떠나 티후아나(멕시코)를 거쳐 리마가 아닌 산티아고를 기착지로 택했는데, 이는 페루와 인접한 칠레에서 지지자들을 결집시킨 뒤 금의환향하겠다는 이른바 '안데스 상륙 작전'이었다. 그는 산티아고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뒤 시내의 메리어트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칠레 당국은 그가 호텔에 체크인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전격적인 체포 작전을 감행했다. 페루 정부가 칠레 측에 긴급 구속 요청을 보낸 결과였다.
체포 직후 후지모리는 산티아고 외곽의 경찰 학교 내 특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에서의 안락한 망명 생활과는 180도 다른 환경이었다. 칠레 사법부는 후지모리의 신병 처리를 놓고 전례 없는 장기 검토에 착수했다. 페루 정부는 살인, 고문, 부패 등 총 12가지 혐의를 적시한 방대한 분량의 인도 요청서를 제출했고, 후지모리의 변호인단은 이것이 '정치적 박해'라며 맞섰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칠레 내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당시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정부는 인권 문제에 민감했으나, 이웃 국가인 페루와의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했다. 수감 중에도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활용해 일본 참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하는 기행을 보였으나 낙선했다. 2007년 7월, 칠레 대법원의 올랜도 알바레스 판사가 증거 불충분으로 인도 거부 판결을 내리며 후지모리가 승리하는 듯 보였으나, 페루 정부의 항소로 최종 판단은 대법원 전원 합의체로 넘어갔다.
2007년 9월 21일, 칠레 대법원 제2호실은 원심을 뒤집고 후지모리의 페루 송환을 최종 결정했다. 재판부는 페루 정부가 제시한 12개 혐의 중 '바리오스 알토스 및 라 칸투타 학살'을 포함한 5건의 인권 침해 혐의와 2건의 부패 혐의에 대해 인도 사유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55]
결정 직후 칠레 경찰은 후지모리를 산티아고 공항으로 압송했다. 후지모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칠레 경찰 헬기를 타고 공군 기지로 이동한 뒤, 대기 중이던 페루 경찰기 인계되었다.
2007년 9월 22일 오후, 후지모리를 태운 비행기가 리마 동부의 경찰 항공 기지에 착륙했다. 2000년 일본으로 떠난 지 7년 만의 귀환이었으나, 그가 꿈꿨던 '영웅의 귀환'이 아닌 '범죄자의 압송'이었다. 활주로에는 수많은 취재진과 더불어 그를 저주하는 피해자 유가족들의 고함, 그리고 여전히 그를 연호하는 지지자들의 함성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뤘다.
후지모리는 곧바로 리마 동부 아테(Ate) 지구에 위치한 경찰 특수작전본부(DIROES) 내 특별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그가 대통령 시절 테러범들을 수감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설의 일부였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스스로 갇히게 된 이 역설적인 장면은 후지모리 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기록으로 남았다.[56]
송환 직후부터 후지모리는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재판 지연 전술을 썼으나, 페루 사법부는 단호했다. 칠레 대법원이 인정한 7가지 혐의에 대해서만 재판을 진행한다는 '특정성의 원칙'에 따라, 페루 역사상 전례 없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재판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처벌을 넘어, 1990년대 페루를 지배했던 권위주의 체제 전체에 대한 사법적 해부의 시작이었다.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자라는 신분적 방어막을 뒤로하고, 2006년 페루 대선을 앞두고 전격적인 복귀를 노렸다. 그는 일본 도쿄를 떠나 티후아나(멕시코)를 거쳐 리마가 아닌 산티아고를 기착지로 택했는데, 이는 페루와 인접한 칠레에서 지지자들을 결집시킨 뒤 금의환향하겠다는 이른바 '안데스 상륙 작전'이었다. 그는 산티아고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뒤 시내의 메리어트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칠레 당국은 그가 호텔에 체크인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전격적인 체포 작전을 감행했다. 페루 정부가 칠레 측에 긴급 구속 요청을 보낸 결과였다.
체포 직후 후지모리는 산티아고 외곽의 경찰 학교 내 특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에서의 안락한 망명 생활과는 180도 다른 환경이었다. 칠레 사법부는 후지모리의 신병 처리를 놓고 전례 없는 장기 검토에 착수했다. 페루 정부는 살인, 고문, 부패 등 총 12가지 혐의를 적시한 방대한 분량의 인도 요청서를 제출했고, 후지모리의 변호인단은 이것이 '정치적 박해'라며 맞섰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칠레 내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당시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정부는 인권 문제에 민감했으나, 이웃 국가인 페루와의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했다. 수감 중에도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활용해 일본 참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하는 기행을 보였으나 낙선했다. 2007년 7월, 칠레 대법원의 올랜도 알바레스 판사가 증거 불충분으로 인도 거부 판결을 내리며 후지모리가 승리하는 듯 보였으나, 페루 정부의 항소로 최종 판단은 대법원 전원 합의체로 넘어갔다.
2007년 9월 21일, 칠레 대법원 제2호실은 원심을 뒤집고 후지모리의 페루 송환을 최종 결정했다. 재판부는 페루 정부가 제시한 12개 혐의 중 '바리오스 알토스 및 라 칸투타 학살'을 포함한 5건의 인권 침해 혐의와 2건의 부패 혐의에 대해 인도 사유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55]
결정 직후 칠레 경찰은 후지모리를 산티아고 공항으로 압송했다. 후지모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칠레 경찰 헬기를 타고 공군 기지로 이동한 뒤, 대기 중이던 페루 경찰기 인계되었다.
2007년 9월 22일 오후, 후지모리를 태운 비행기가 리마 동부의 경찰 항공 기지에 착륙했다. 2000년 일본으로 떠난 지 7년 만의 귀환이었으나, 그가 꿈꿨던 '영웅의 귀환'이 아닌 '범죄자의 압송'이었다. 활주로에는 수많은 취재진과 더불어 그를 저주하는 피해자 유가족들의 고함, 그리고 여전히 그를 연호하는 지지자들의 함성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뤘다.
후지모리는 곧바로 리마 동부 아테(Ate) 지구에 위치한 경찰 특수작전본부(DIROES) 내 특별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그가 대통령 시절 테러범들을 수감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설의 일부였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스스로 갇히게 된 이 역설적인 장면은 후지모리 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기록으로 남았다.[56]
송환 직후부터 후지모리는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재판 지연 전술을 썼으나, 페루 사법부는 단호했다. 칠레 대법원이 인정한 7가지 혐의에 대해서만 재판을 진행한다는 '특정성의 원칙'에 따라, 페루 역사상 전례 없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재판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처벌을 넘어, 1990년대 페루를 지배했던 권위주의 체제 전체에 대한 사법적 해부의 시작이었다.
2.11. 페루 송환과 재판[편집]
당시 리마 시내는 후지모리의 처벌을 요구하는 인권 단체와 "나라를 구한 영웅을 박해하지 마라"고 외치는 지지자들로 인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페루 검찰은 후지모리를 기소하기 위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 자료를 준비했으며, 재판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 과정을 TV로 생중계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재판이 국제 법학계에서도 주목받았던 이유는 후지모리가 학살 현장에 직접 나타나 총을 쏘거나 명령을 내린 명시적인 '종이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지모리 측 변호인단은 "대통령은 국가 정책을 결정했을 뿐, 하급 부대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이 저지른 개별적인 학살 사건은 알지 못했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이에 맞서 페루 검찰과 재판부는 '간접 정범(Autoría Mediata)'이라는 고도의 법리적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는 조직 범죄나 독재 체제에서 수뇌부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더라도, 조직의 위계 구조를 완벽히 장악하고 이를 통해 범죄를 실행했다면 그 수뇌부에게 직접적인 살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검찰은 "후지모리는 국가 정보국(SIN)과 군부를 사조직화했으며, 몬테시노스를 통해 콜리나 그룹의 활동 보고를 실시간으로 받았다. 그가 몰랐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후지모리는 재판 내내 특유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때로는 고함을 치거나 혈압 문제로 쓰러지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페루를 구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며, 인권 침해는 전쟁 중에 발생한 불행한 일탈이었다"고 강변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과거 후지모리의 '오른팔'이었던 군 장성들과 정보국 요원들의 증언이었다. 특히 콜리나 그룹의 요원 중 일부가 "우리는 대통령의 묵인과 승인 아래 작전을 수행했다"는 취지의 증언을 내놓으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또한,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라 칸투타 사건 직후 후지모리가 해당 작전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거나 포상금을 지급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이는 학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계획된 '더러운 전쟁(Dirty War)'의 일환이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되었다.[57]
2009년 4월 7일, 세사르 산 마르틴(César San Martín) 판사가 이끄는 특별재판부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판결문을 낭독했다.
이 재판이 국제 법학계에서도 주목받았던 이유는 후지모리가 학살 현장에 직접 나타나 총을 쏘거나 명령을 내린 명시적인 '종이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지모리 측 변호인단은 "대통령은 국가 정책을 결정했을 뿐, 하급 부대인 '콜리나 그룹(Grupo Colina)'이 저지른 개별적인 학살 사건은 알지 못했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이에 맞서 페루 검찰과 재판부는 '간접 정범(Autoría Mediata)'이라는 고도의 법리적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는 조직 범죄나 독재 체제에서 수뇌부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더라도, 조직의 위계 구조를 완벽히 장악하고 이를 통해 범죄를 실행했다면 그 수뇌부에게 직접적인 살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검찰은 "후지모리는 국가 정보국(SIN)과 군부를 사조직화했으며, 몬테시노스를 통해 콜리나 그룹의 활동 보고를 실시간으로 받았다. 그가 몰랐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후지모리는 재판 내내 특유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며, 때로는 고함을 치거나 혈압 문제로 쓰러지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페루를 구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며, 인권 침해는 전쟁 중에 발생한 불행한 일탈이었다"고 강변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과거 후지모리의 '오른팔'이었던 군 장성들과 정보국 요원들의 증언이었다. 특히 콜리나 그룹의 요원 중 일부가 "우리는 대통령의 묵인과 승인 아래 작전을 수행했다"는 취지의 증언을 내놓으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또한, 바리오스 알토스 학살과 라 칸투타 사건 직후 후지모리가 해당 작전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거나 포상금을 지급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이는 학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계획된 '더러운 전쟁(Dirty War)'의 일환이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되었다.[57]
2009년 4월 7일, 세사르 산 마르틴(César San Martín) 판사가 이끄는 특별재판부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판결문을 낭독했다.
"본 법정은 피고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바리오스 알토스 및 라 칸투타 학살에 대한 살인, 상해, 납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며, 징역 25년형을 선고한다."
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전직 국가 원수가 자국 법정에서 인도주의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중형을 선고받은 드문 사례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후지모리가 단순히 무능해서 부하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서 범죄 조직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학살 재판 외에도 후지모리는 여러 건의 부패 혐의로 별도의 재판을 받았다.
- 실권자 몬테시노스를 달래기 위해 국가 예산 1,500만 달러를 불법으로 지급한 혐의 (징역 7년 6개월 추가)
- 야당 의원들과 언론인을 불법 도청하고 뇌물을 준 혐의 (징역 6년 추가)
- 집권 말기 국가의 자산을 일본 등으로 빼돌린 혐의 등
후지모리는 일부 부패 혐의에 대해서는 "절차상의 실수"였다며 유죄를 인정(Plea bargain)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는 인권 범죄 재판에서 형량을 줄이거나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고도의 수 싸움으로 해석되었다.
이 재판은 페루 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인권 단체와 유가족들에게는 20년 만에 정의가 실현된 순간이었으나, '후지모리파(Fujimoristas)'에게는 "경제 파탄과 테러의 공포에서 우리를 구해준 지도자를 감옥에서 죽이려 한다"는 분노의 원천이 되었다.
이때 형성된 강고한 대립 구도는 훗날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대선에 출마할 때마다 페루 정치를 마비시키는 '반(反)후지모리 vs 친(親)후지모리' 대결의 서막이 되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후지모리의 초췌한 모습과 병색이 완연한 표정은 지지층의 동정심을 자극했고, 이는 수감 이후 끊임없이 제기된 '인도적 사면'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2.12. 사면과 취소의 반복[편집]
2017년 12월 24일, 전 세계가 성탄 전야의 평화에 젖어 있을 때 페루 정국은 그야말로 핵폭탄급 투하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지지율 폭락과 부패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수감 중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에 대한 '인도적 사면'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공식적인 사유는 후지모리의 고령(당시 79세)과 저혈압, 부정맥 등 악화된 건강 상태였으나,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이는 거의 없었다.
이 사면은 사실상 쿠친스키가 자신의 탄핵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후지모리의 아들인 켄지 후지모리가 이끄는 후지모리파 의원들과 맺은 '정치적 야합'의 산물이었다. 실제로 사면 발표 며칠 전 진행된 탄핵 표결에서 켄지 측 의원들이 기권표를 던지며 쿠친스키는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그 대가로 아버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 사건은 페루 사회에 거대한 분열을 가져왔다. 리마 시내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쏟아져 나와 "살인마를 풀어주지 마라", "정의는 팔아넘길 수 없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국제인권단체들 역시 "반인륜적 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58]
후지모리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8년 10월, 페루 대법원은 쿠친스키의 사면 결정에 '절차적 결함'과 '인도적 사유의 불충분함'이 있다며 사면 취소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재수감을 명령했다. 법원은 후지모리가 저지른 죄목이 인권 유린과 관련된 반인륜 범죄이기에, 일반적인 사면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판결 직후 후지모리는 심장 질환을 호소하며 리마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다시 감옥으로 보내 죽이지 말아달라"는 영상을 SNS에 게시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냉담했다. 결국 2019년 1월, 그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다시 바르바디요(Barbadillo) 교도소로 복귀하게 된다. 이는 페루 사법부가 정치적 합의보다 법치주의적 원칙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나, 후지모리파 지지자들에게는 '좌파 판사들의 정치 보복'으로 비춰지며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
2022년 3월, 사건은 다시 한번 반전을 맞이한다. 페루 헌법재판소가 2017년의 사면을 유효하다고 판결하며 후지모리의 석방을 다시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제사회가 즉각 개입했다. 미주인권재판소(IACHR)는 페루 정부에 "희생자들의 정의를 보장하기 전까지 석방을 유예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렸고, 당시 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 정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석방을 중단했다.
그러나 2023년 말, 페루 정국이 카스티요의 실각과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의 집권으로 요동치는 틈을 타 헌법재판소는 다시 한번 석방 명령을 확정했다. 재판소는 국제기구의 권고보다 페루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국내에서 우선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12월 6일 마침내 후지모리를 교도소 밖으로 내보냈다.
후지모리의 사면과 취소, 재석방으로 이어지는 이 지루한 과정은 페루 사법 시스템의 취약성과 정치적 양극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지자들에게는 "병든 노인을 끝내 감옥에서 죽이려 했던 잔인한 사법 살인의 종결"이었으나, 반대파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으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러도 결국 풀려난다는 악질적인 선례"로 남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 가문의 내분도 격화되었다.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쿠친스키와 손을 잡았던 아들 켄지와, 법적 절차를 중시하며 동생의 행보를 '배신'으로 규정했던 딸 케이코 사이의 갈등은 후지모리주의자(Fujimoristas)들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이 '사면의 연대기'는 한 개인의 자유를 넘어, 21세기 페루가 과거의 독재 기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59]
이 사면은 사실상 쿠친스키가 자신의 탄핵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후지모리의 아들인 켄지 후지모리가 이끄는 후지모리파 의원들과 맺은 '정치적 야합'의 산물이었다. 실제로 사면 발표 며칠 전 진행된 탄핵 표결에서 켄지 측 의원들이 기권표를 던지며 쿠친스키는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그 대가로 아버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 사건은 페루 사회에 거대한 분열을 가져왔다. 리마 시내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쏟아져 나와 "살인마를 풀어주지 마라", "정의는 팔아넘길 수 없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국제인권단체들 역시 "반인륜적 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58]
후지모리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8년 10월, 페루 대법원은 쿠친스키의 사면 결정에 '절차적 결함'과 '인도적 사유의 불충분함'이 있다며 사면 취소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재수감을 명령했다. 법원은 후지모리가 저지른 죄목이 인권 유린과 관련된 반인륜 범죄이기에, 일반적인 사면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판결 직후 후지모리는 심장 질환을 호소하며 리마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다시 감옥으로 보내 죽이지 말아달라"는 영상을 SNS에 게시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냉담했다. 결국 2019년 1월, 그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다시 바르바디요(Barbadillo) 교도소로 복귀하게 된다. 이는 페루 사법부가 정치적 합의보다 법치주의적 원칙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나, 후지모리파 지지자들에게는 '좌파 판사들의 정치 보복'으로 비춰지며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
2022년 3월, 사건은 다시 한번 반전을 맞이한다. 페루 헌법재판소가 2017년의 사면을 유효하다고 판결하며 후지모리의 석방을 다시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제사회가 즉각 개입했다. 미주인권재판소(IACHR)는 페루 정부에 "희생자들의 정의를 보장하기 전까지 석방을 유예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렸고, 당시 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 정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석방을 중단했다.
그러나 2023년 말, 페루 정국이 카스티요의 실각과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의 집권으로 요동치는 틈을 타 헌법재판소는 다시 한번 석방 명령을 확정했다. 재판소는 국제기구의 권고보다 페루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국내에서 우선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12월 6일 마침내 후지모리를 교도소 밖으로 내보냈다.
후지모리의 사면과 취소, 재석방으로 이어지는 이 지루한 과정은 페루 사법 시스템의 취약성과 정치적 양극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지자들에게는 "병든 노인을 끝내 감옥에서 죽이려 했던 잔인한 사법 살인의 종결"이었으나, 반대파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으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러도 결국 풀려난다는 악질적인 선례"로 남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 가문의 내분도 격화되었다.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쿠친스키와 손을 잡았던 아들 켄지와, 법적 절차를 중시하며 동생의 행보를 '배신'으로 규정했던 딸 케이코 사이의 갈등은 후지모리주의자(Fujimoristas)들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이 '사면의 연대기'는 한 개인의 자유를 넘어, 21세기 페루가 과거의 독재 기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59]
2.13. 사망[편집]
2024년 9월 11일, 페루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후지모리가 리마의 자택에서 향년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말년은 그가 집권기에 가졌던 무소불위의 권력과는 대조적으로, 쇠약해진 육신과 끊임없는 사법적 공방, 그리고 병마와의 사투로 점철된 고독한 시간이었다.
후지모리는 수감 생활 중 구강암(설암) 판정을 받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징후가 있었던 이 질환은 감옥이라는 폐쇄된 환경 속에서 악화되었으며, 노환으로 인한 심장 질환과 고혈압이 겹치며 그의 건강 상태는 페루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60] 특히 2020년대 들어 그는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으며,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사망 불과 몇 달 전인 2024년 7월, 후지모리는 모두를 경악게 하는 행보를 보였다. 딸 케이코 후지모리를 통해 2026년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공식화한 것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에 암 투병 중이며, 법적으로 피선거권 박탈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 선언은 페루 사회를 뒤흔들었다.[61]
이는 단순한 노욕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한 최후의 '정치적 승부수'로 해석되었다. 그는 수감 중에도 SNS를 통해 자신의 집권기 업적을 홍보하며 "페루는 다시 강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는 민생고에 시달리던 일부 하층민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출마 선언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현실화되지 못한 채, '후지모리즘'의 마지막 불꽃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임종은 딸 케이코와 아들 켄지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마 동부의 자택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숨을 거둔 9월 11일은 그가 궤멸시켰던 테러 조직 빛나는 길의 수괴 아비마엘 구스만이 사망한 지 정확히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62]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리마의 거리에는 후지모리의 사진과 꽃을 든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치노(Chino)! 치노!"를 연호하며 통곡했다. 반면, 그의 치하에서 희생당한 유가족들과 인권 단체들은 "그는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났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디나 볼루아르테 정부는 공적을 기려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국가장(State Funeral)을 거행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를 두고도 페루 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리마의 국립박물관에 마련된 빈소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행렬을 이뤘다. 국가장으로 치러진 장례 미사에서 케이코 후지모리는 "아버지는 페루를 벼랑 끝에서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추도했다. 하지만 장례식장 밖에서는 그의 범죄 행각을 규탄하는 시위가 동시에 열리며, 사후에도 여전한 페루의 극심한 국론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유해는 리마 외곽의 '후이친(Huachipa)'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유죄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역사의 피해자'로 포장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산은 결국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으며, 그의 묘비는 페루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얼룩진 기록의 마침표가 되었다.
그의 사망으로 인해 '힘의 정치'를 추구하던 강경파들은 구심점을 잃었으나, 동시에 케이코 후지모리는 아버지의 후광을 온전히 물려받아 정치적 순교자 서사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후지모리는 떠났지만, 그가 구축한 경제 모델과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 그리고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후지모리스타'들은 여전히 페루 사회 저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후지모리는 수감 생활 중 구강암(설암) 판정을 받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징후가 있었던 이 질환은 감옥이라는 폐쇄된 환경 속에서 악화되었으며, 노환으로 인한 심장 질환과 고혈압이 겹치며 그의 건강 상태는 페루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60] 특히 2020년대 들어 그는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으며,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사망 불과 몇 달 전인 2024년 7월, 후지모리는 모두를 경악게 하는 행보를 보였다. 딸 케이코 후지모리를 통해 2026년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공식화한 것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에 암 투병 중이며, 법적으로 피선거권 박탈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 선언은 페루 사회를 뒤흔들었다.[61]
이는 단순한 노욕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한 최후의 '정치적 승부수'로 해석되었다. 그는 수감 중에도 SNS를 통해 자신의 집권기 업적을 홍보하며 "페루는 다시 강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는 민생고에 시달리던 일부 하층민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출마 선언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현실화되지 못한 채, '후지모리즘'의 마지막 불꽃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임종은 딸 케이코와 아들 켄지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마 동부의 자택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숨을 거둔 9월 11일은 그가 궤멸시켰던 테러 조직 빛나는 길의 수괴 아비마엘 구스만이 사망한 지 정확히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62]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리마의 거리에는 후지모리의 사진과 꽃을 든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치노(Chino)! 치노!"를 연호하며 통곡했다. 반면, 그의 치하에서 희생당한 유가족들과 인권 단체들은 "그는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났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디나 볼루아르테 정부는 공적을 기려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국가장(State Funeral)을 거행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를 두고도 페루 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리마의 국립박물관에 마련된 빈소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행렬을 이뤘다. 국가장으로 치러진 장례 미사에서 케이코 후지모리는 "아버지는 페루를 벼랑 끝에서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추도했다. 하지만 장례식장 밖에서는 그의 범죄 행각을 규탄하는 시위가 동시에 열리며, 사후에도 여전한 페루의 극심한 국론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유해는 리마 외곽의 '후이친(Huachipa)'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유죄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역사의 피해자'로 포장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산은 결국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으며, 그의 묘비는 페루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얼룩진 기록의 마침표가 되었다.
그의 사망으로 인해 '힘의 정치'를 추구하던 강경파들은 구심점을 잃었으나, 동시에 케이코 후지모리는 아버지의 후광을 온전히 물려받아 정치적 순교자 서사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후지모리는 떠났지만, 그가 구축한 경제 모델과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 그리고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후지모리스타'들은 여전히 페루 사회 저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3. 평가[편집]
후지모리에 대한 평가는 페루 현대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다. 그를 지지하는 후지모리스타에게는 '국가를 파멸에서 구해낸 영웅'이지만, 반대 측에게는 '민주주의를 살해한 부패한 독재자'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가지 평가가 선후 관계가 아니라, 10년의 재임 기간 내내 병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장 효율적인 통치자였으나, 동시에 가장 초법적인 권력자였다.
3.1. 긍정적 평가[편집]
후지모리가 집권하기 직전의 페루는 국가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실패한 국가(Failed State)' 직전이었다. 알란 가르시아의 실정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빛나는 길의 폭탄 테러는 페루인들의 일상을 파괴했다.
이른바 '후지 쇼크'로 명명된 급진적 시장 경제 도입은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으나, 결과적으로 페루를 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거시 경제 지표를 가진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외환 보유고를 확충하며 민영화를 단행한 것은 이후 페루 경제 성장의 엔진이 되었다.
당시 페루 국민들에게 가장 큰 공포였던 극좌 테러리즘을 사실상 궤멸시킨 공적은 그 어떤 비판론자도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차빈 데 후안타르' 작전에서 보여준 단호함은 그를 강력한 지도자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후지모리는 리마의 백인 엘리트들이 무시하던 안데스 산간 지역과 정글 지대의 빈민들을 직접 찾아가 학교를 짓고 전기를 보급했다. 그는 페루 역사상 처음으로 '잊힌 90%'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한 대통령이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기반이 되었다.
이른바 '후지 쇼크'로 명명된 급진적 시장 경제 도입은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으나, 결과적으로 페루를 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거시 경제 지표를 가진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외환 보유고를 확충하며 민영화를 단행한 것은 이후 페루 경제 성장의 엔진이 되었다.
당시 페루 국민들에게 가장 큰 공포였던 극좌 테러리즘을 사실상 궤멸시킨 공적은 그 어떤 비판론자도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차빈 데 후안타르' 작전에서 보여준 단호함은 그를 강력한 지도자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후지모리는 리마의 백인 엘리트들이 무시하던 안데스 산간 지역과 정글 지대의 빈민들을 직접 찾아가 학교를 짓고 전기를 보급했다. 그는 페루 역사상 처음으로 '잊힌 90%'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한 대통령이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기반이 되었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반면, 그가 이룩한 성취 뒤에는 현대 민주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대가가 따랐다.
후지모리는 단순한 독재를 넘어, 국가의 모든 정보 기관과 사법부를 자신의 측근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를 통해 사유화했다. '블라디비디오'에서 폭로된 것처럼, 그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의회와 언론을 돈으로 매수했다. 이는 페루의 공적 시스템을 수십 년 퇴보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테러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조직된 '콜리나 그룹' 등의 암살단은 민간인과 무고한 학생들을 학살했다. 국가가 직접 살인 면허를 부여한 셈이며, 이는 후지모리가 훗날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약 27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 여성 대상 강제 불임 시술은 후지모리 정권이 가진 인종 차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현대 페루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권 유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63]
후지모리는 단순한 독재를 넘어, 국가의 모든 정보 기관과 사법부를 자신의 측근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를 통해 사유화했다. '블라디비디오'에서 폭로된 것처럼, 그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의회와 언론을 돈으로 매수했다. 이는 페루의 공적 시스템을 수십 년 퇴보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테러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조직된 '콜리나 그룹' 등의 암살단은 민간인과 무고한 학생들을 학살했다. 국가가 직접 살인 면허를 부여한 셈이며, 이는 후지모리가 훗날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약 27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 여성 대상 강제 불임 시술은 후지모리 정권이 가진 인종 차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현대 페루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권 유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63]
3.3. 정치학적 관점[편집]
정치학에서는 그를 '위임적 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 혹은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의 전형으로 분류한다.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되었으나, 당선된 이후에는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위임되었다고 착각하며 법치를 무력화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정당 정치를 불신했으며, '직접 민주주의'라는 명목하에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의회와 정당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포퓰리즘적 독재 스타일은 이후 남미 정계에 등장한 여러 강권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가이드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4]
그는 전통적인 정당 정치를 불신했으며, '직접 민주주의'라는 명목하에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의회와 정당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포퓰리즘적 독재 스타일은 이후 남미 정계에 등장한 여러 강권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가이드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4]
3.4. 총평[편집]
후지모리는 페루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냈지만, 그 생명의 대가로 페루의 영혼(민주주의와 법치)을 요구한 통치자였다. 그가 사망한 2024년에도 페루 사회가 여전히 '후지모리파'와 '반후지모리파'로 갈려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상은, 그가 남긴 족적이 얼마나 깊고도 날카로운지를 증명한다.
결국 그에 대한 평가는 "국가의 존립이 우선인가, 민주적 가치가 우선인가"라는 인류 보편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궤를 같이한다. 그를 향한 찬사는 페루의 처절했던 과거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하며, 그를 향한 저주는 페루가 나아가야 할 정의로운 미래에 대한 갈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 대한 평가는 "국가의 존립이 우선인가, 민주적 가치가 우선인가"라는 인류 보편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궤를 같이한다. 그를 향한 찬사는 페루의 처절했던 과거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하며, 그를 향한 저주는 페루가 나아가야 할 정의로운 미래에 대한 갈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4. 후지모리파의 존속[편집]
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망명하고 사법 처리를 받는 와중에도, 페루 정치권에서 '후지모리주의(Fujimorismo)'는 단 한 번도 주류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이는 단순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을 넘어, 페루 사회의 고질적인 계급 갈등과 지역 격차를 파고든 독특한 정치 현상이기 때문이다. 후지모리즘의 핵심은 '권위주의적 효율성'에 있다. "민주주의 절차는 느리고 부패했으니, 강력한 지도자가 법을 조금 어기더라도 당장의 가난과 치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는 리마 외곽의 빈민촌과 안데스 산맥의 소농들에게 종교적인 신념에 가까운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들은 스스로를 '후지모리스타(Fujimorista)'라고 부르며, 후지모리 집권기 도입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과 강력한 대테러 정책을 국가 재생의 기틀로 찬양한다. 특히 1990년대 초반 후지모리가 직접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농촌에 학교와 도로를 깔아주던 '현장 행정'의 기억은, 이후 집권한 엘리트 정치인들이 보여준 무능과 대비되며 후지모리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65]
후지모리가 수감된 이후, 이 거대한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은 장녀 케이코 후지모리였다. 그녀는 19세의 나이에 이혼한 어머니를 대신해 페루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며 정무 감각을 익혔고, 아버지가 몰락한 이후 흩어진 지지층을 규합해 '푸에르사 뽀뿌라르(Fuerza Popular, 민중의 힘)'를 창당했다.
케이코는 아버지의 공적을 계승하되, 독재와 인권 유린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탈(脫) 후지모리'와 '친(親) 후지모리' 사이에서 정교한 줄타기를 시도했다. 그녀는 2011년, 2016년, 2021년 대선에서 모두 결선 투표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세 번 모두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며 '불운의 콩라인' 이미지가 굳어졌으나, 그녀가 이끄는 당은 의회에서 제1당 혹은 거대 야당의 지위를 유지하며 사실상 페루 국정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이는 후지모리라는 이름이 가진 파괴력이 단순한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권력의 핵심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후지모리파 내부에서도 분열의 씨앗은 존재했다. 후지모리의 막내아들인 켄지 후지모리와의 갈등이 그것이다. 켄지는 아버지의 사면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온건하고 타협적인 노선을 취한 반면, 케이코는 의회 권력을 바탕으로 현직 대통령을 압박하는 강경 투쟁 노선을 고수했다.
2017년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정부 당시, 켄지는 아버지의 사면을 대가로 쿠친스키 대통령의 탄핵안을 부결시키는 '정치적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언니인 케이코의 당론을 거스르며 남매간의 전쟁이 폭발했다. 케이코 측은 켄지가 뇌물로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영상을 폭로하며 동생을 의회에서 제명시키는 냉혹함을 보였다.[66]
후지모리파가 강력한 결집력을 보일수록, 그에 반비례하여 '안티 후지모리즘(Antifujimorismo)' 역시 페루 정치의 상수(常數)로 자리 잡았다. 페루 대선의 패턴은 항상 "후지모리파 후보 vs 누구든 좋으니 후지모리만 아니면 되는 후보"의 대결 구도로 흘러간다.
반대파들은 후지모리즘을 '부패와 살인의 추억'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후지모리 가문의 집권이 곧 90년대 식의 언론 통제와 사법부 장악으로의 회귀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케이코 후지모리가 세 번의 대선 결선 투표에서 매번 패배한 이유는, 평소에는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있던 좌파, 자유주의자, 인권 단체들이 결선 투표 때만 되면 "독재자의 딸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기적적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는 후지모리의 유산이 페루를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양극화로 몰아넣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2024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사망하면서, 이제 후지모리파는 '살아있는 신화'가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수감 중에도 옥중 메시지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징적 존재가 사라짐에 따라, 케이코 후지모리의 리더십은 시험대에 올랐다.
전통적인 후지모리스타들은 여전히 그를 '페루의 구원자'로 추앙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으나, 젊은 세대에게 후지모리라는 이름은 교과서 속의 논란거리 혹은 케이코의 정치적 수단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루의 고질적인 치안 불안과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강한 지도력을 갈구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는 후지모리식 포퓰리즘은 그 이름을 바꿔가며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은 스스로를 '후지모리스타(Fujimorista)'라고 부르며, 후지모리 집권기 도입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과 강력한 대테러 정책을 국가 재생의 기틀로 찬양한다. 특히 1990년대 초반 후지모리가 직접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농촌에 학교와 도로를 깔아주던 '현장 행정'의 기억은, 이후 집권한 엘리트 정치인들이 보여준 무능과 대비되며 후지모리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65]
후지모리가 수감된 이후, 이 거대한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은 장녀 케이코 후지모리였다. 그녀는 19세의 나이에 이혼한 어머니를 대신해 페루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며 정무 감각을 익혔고, 아버지가 몰락한 이후 흩어진 지지층을 규합해 '푸에르사 뽀뿌라르(Fuerza Popular, 민중의 힘)'를 창당했다.
케이코는 아버지의 공적을 계승하되, 독재와 인권 유린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탈(脫) 후지모리'와 '친(親) 후지모리' 사이에서 정교한 줄타기를 시도했다. 그녀는 2011년, 2016년, 2021년 대선에서 모두 결선 투표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세 번 모두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며 '불운의 콩라인' 이미지가 굳어졌으나, 그녀가 이끄는 당은 의회에서 제1당 혹은 거대 야당의 지위를 유지하며 사실상 페루 국정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이는 후지모리라는 이름이 가진 파괴력이 단순한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권력의 핵심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후지모리파 내부에서도 분열의 씨앗은 존재했다. 후지모리의 막내아들인 켄지 후지모리와의 갈등이 그것이다. 켄지는 아버지의 사면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며 온건하고 타협적인 노선을 취한 반면, 케이코는 의회 권력을 바탕으로 현직 대통령을 압박하는 강경 투쟁 노선을 고수했다.
2017년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정부 당시, 켄지는 아버지의 사면을 대가로 쿠친스키 대통령의 탄핵안을 부결시키는 '정치적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언니인 케이코의 당론을 거스르며 남매간의 전쟁이 폭발했다. 케이코 측은 켄지가 뇌물로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영상을 폭로하며 동생을 의회에서 제명시키는 냉혹함을 보였다.[66]
후지모리파가 강력한 결집력을 보일수록, 그에 반비례하여 '안티 후지모리즘(Antifujimorismo)' 역시 페루 정치의 상수(常數)로 자리 잡았다. 페루 대선의 패턴은 항상 "후지모리파 후보 vs 누구든 좋으니 후지모리만 아니면 되는 후보"의 대결 구도로 흘러간다.
반대파들은 후지모리즘을 '부패와 살인의 추억'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후지모리 가문의 집권이 곧 90년대 식의 언론 통제와 사법부 장악으로의 회귀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케이코 후지모리가 세 번의 대선 결선 투표에서 매번 패배한 이유는, 평소에는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있던 좌파, 자유주의자, 인권 단체들이 결선 투표 때만 되면 "독재자의 딸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기적적으로 단일대오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는 후지모리의 유산이 페루를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양극화로 몰아넣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2024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사망하면서, 이제 후지모리파는 '살아있는 신화'가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수감 중에도 옥중 메시지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징적 존재가 사라짐에 따라, 케이코 후지모리의 리더십은 시험대에 올랐다.
전통적인 후지모리스타들은 여전히 그를 '페루의 구원자'로 추앙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으나, 젊은 세대에게 후지모리라는 이름은 교과서 속의 논란거리 혹은 케이코의 정치적 수단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루의 고질적인 치안 불안과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강한 지도력을 갈구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는 후지모리식 포퓰리즘은 그 이름을 바꿔가며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여담[편집]
- 일본계임에도 불구하고 페루 대중 사이에서는 '엘 치노(El Chino)'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스페인어로 '중국인'을 뜻하는 이 단어는 중남미에서 모든 아시아계 인종을 퉁쳐서 부르는 관습적인 표현인데, 본래는 약간의 비하 의도가 섞인 멸칭에 가까웠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이를 불쾌해하기는커녕 자신의 정치적 브랜드로 적극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백인 엘리트 정치인들이 자신을 '이방인'이나 '뿌리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때, 그는 오히려 "나 치노는 여러분과 같은 서민의 편이다"라고 선언하며 친근감을 확보했다. 실제로 그는 선거 운동 기간 중 중국 전통 의상이나 일본 기모노를 가리지 않고 입으며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거대한 마스코트로 만들었다.
- 현대사에서 드물게 '국가 원수 출신 망명객이 이중 국적을 이용해 처벌을 피한' 독특한 사례를 남겼다. 2000년 팩스 사임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당시, 페루 정부는 그를 인도하라고 일본에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의 부모가 이민 당시 일본 영사관에 출생 신고를 해두었기에 그가 일본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며 인도를 거부했다. 재미있는 점은 후지모리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일본어 실력이 생각보다 유창하지 않아 고생했다는 일화다. 그는 집안에서 부모와 일본어를 쓰며 자랐으나, 고급 정치 용어나 한자어 사용에는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일본 참의원 선거에 국민신당 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그는 서툰 일본어로 "일본은 나의 조국이고 페루는 나의 고국"이라는 기괴한 논리의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67]
- 후지모리와 그의 오른팔 몬테시노스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결벽증에 가까운 습관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습관이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몬테시노스는 야당 정치인, 군 장성, 언론사 사주들을 매수할 때마다 그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해 보관했는데(이른바 블라디비디오), 이는 나중에 자신들의 '보험'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후지모리 본인 역시 집권기 동안 모든 국정 운영 상황을 꼼꼼하게 메모하고 문서화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수감 생활 중에도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페루 정국에 대한 비평을 SNS(주로 X와 페이스북)를 통해 활발히 발신했다. 감옥 안에서 트위터를 하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생소한 모습은 2010년대 페루의 기괴한 정치 풍경 중 하나였다.
- 그의 가정사는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참혹했다. 전처 수사나 이구치(Susana Higuchi)는 1992년 후지모리의 친인척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고 폭로했다가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94년 이혼했는데, 후지모리는 이혼 직후 당시 19세에 불과했던 딸 케이코 후지모리를 '영부인(First Lady)' 자리에 앉히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수사나 이구치는 반(反)후지모리 선봉에 서서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나, 말년에는 딸 케이코의 대선 가도를 위해 전 남편인 후지모리와 표면적인 화해를 하는 등 복잡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들 켄지 후지모리 역시 정치에 입문했으나, 누나인 케이코와 당권 및 아버지의 사면 문제를 놓고 골육상쟁 수준의 계파 갈등을 벌여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 후지모리는 농학자 출신답게 식물과 농업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수감 중에도 교도소 내 작은 텃밭에서 꽃을 가꾸거나 채소를 재배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일본계답게 생선 요리와 스시를 즐겼는데, 대통령 재임 시절 공식 만찬에서도 페루 전통 음식인 '세비체(Ceviche)'와 일식을 결합한 퓨전 요리를 자주 선보였다. 이는 훗날 '닛케이 요리'가 페루의 세계적인 미식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본의 아니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 그는 가톨릭 국가인 페루의 대통령이었기에 형식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실제로는 일본 전통의 불교적 정서와 가톨릭이 혼재된 신앙관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4년 9월 그가 사망했을 때, 리마의 극빈층 거주구에서는 "성인(聖人)이 떠났다"며 통곡하는 인파와 "악마가 마땅한 곳으로 갔다"며 축배를 드는 인파가 동시에 나타났다.
5.1. 몬테시노스와의 관계[편집]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Vladimiro Montesinos)는 후지모리 정권의 '라스푸틴'이자, 페루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지략가로 꼽힌다. 그는 본래 육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1970년대 군사 정권 시절 국가 기밀을 미국 CIA에 넘겼다는 간첩 혐의로 불명예 제대하고 투옥된 전력이 있다.[68] 출소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주로 마약 카르텔의 변호를 맡아 '마약상들의 변호사'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이 과정에서 쌓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 네트워크는 훗날 후지모리를 만나는 결정적인 자산이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0년 대선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후지모리는 탈세 및 부동산 사기 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사법적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준 인물이 바로 몬테시노스였다. 후지모리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서도 이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몬테시노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집권 직후 그를 국가정보국(SIN)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임명한다. 공식 직함은 '대통령 안보 고문'이었으나, 실제로는 내각의 장관들조차 그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몬테시노스가 구축한 권력의 핵심은 도청과 매수였다. 그는 리마 시내 주요 호텔과 관공서, 심지어 정적들의 침실까지 도청 장치를 설치하여 페루 상류층의 모든 치부를 수집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입체적인 통치 기제를 가동했다.
반대파 의원이나 시민단체 인사의 스캔들을 확보한 뒤, 이를 터뜨리겠다고 협박하여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판사와 검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거나 승진을 약속하여, 후지모리 정부의 초법적인 행위(예: 3선 개헌, 인권 유린)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군 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하고, 진급 인사권을 사실상 독점함으로써 군대가 대통령이 아닌 '몬테시노스 개인'에게 충성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그는 과거 간첩 혐의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집권기 내내 미국 C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약 범죄 소탕'이었으나, 실제로는 CIA로부터 매년 수백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이를 정보국 운영비와 자신의 비자금으로 전용했다. 미국 정부 역시 남미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테러 척결'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후지모리-몬테시노스 콤비를 유용한 파트너로 여겨 그의 부패를 묵인하는 측면이 있었다.[69]
몬테시노스는 단순한 책사가 아니라 대중 선동의 천재였다. 그는 소위 '치차 언론'이라 불리는 타블로이드 판형의 저질 신문들을 창간하거나 매수하여, 후지모리를 찬양하고 정적들을 변태나 매국노로 몰아가는 '인격 살인' 캠페인을 주도했다. 후지모리가 대중 앞에서 '청렴하고 강단 있는 지도자'로 보일 때, 그 이면에서 모든 더러운 일(Dirty Work)을 처리하며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킨 설계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둘의 공조는 권력의 비대화와 함께 썩어 들어갔다.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 몰래 마약 카르텔과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심지어 무기 밀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후지모리에게 "내가 없으면 당신은 하루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되는 '블라디비디오' 사건으로 이어진다.[70][71]
두 사람의 인연은 1990년 대선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후지모리는 탈세 및 부동산 사기 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사법적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준 인물이 바로 몬테시노스였다. 후지모리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서도 이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몬테시노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집권 직후 그를 국가정보국(SIN)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임명한다. 공식 직함은 '대통령 안보 고문'이었으나, 실제로는 내각의 장관들조차 그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몬테시노스가 구축한 권력의 핵심은 도청과 매수였다. 그는 리마 시내 주요 호텔과 관공서, 심지어 정적들의 침실까지 도청 장치를 설치하여 페루 상류층의 모든 치부를 수집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입체적인 통치 기제를 가동했다.
반대파 의원이나 시민단체 인사의 스캔들을 확보한 뒤, 이를 터뜨리겠다고 협박하여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판사와 검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거나 승진을 약속하여, 후지모리 정부의 초법적인 행위(예: 3선 개헌, 인권 유린)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군 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하고, 진급 인사권을 사실상 독점함으로써 군대가 대통령이 아닌 '몬테시노스 개인'에게 충성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그는 과거 간첩 혐의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집권기 내내 미국 CIA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마약 범죄 소탕'이었으나, 실제로는 CIA로부터 매년 수백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이를 정보국 운영비와 자신의 비자금으로 전용했다. 미국 정부 역시 남미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테러 척결'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후지모리-몬테시노스 콤비를 유용한 파트너로 여겨 그의 부패를 묵인하는 측면이 있었다.[69]
몬테시노스는 단순한 책사가 아니라 대중 선동의 천재였다. 그는 소위 '치차 언론'이라 불리는 타블로이드 판형의 저질 신문들을 창간하거나 매수하여, 후지모리를 찬양하고 정적들을 변태나 매국노로 몰아가는 '인격 살인' 캠페인을 주도했다. 후지모리가 대중 앞에서 '청렴하고 강단 있는 지도자'로 보일 때, 그 이면에서 모든 더러운 일(Dirty Work)을 처리하며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킨 설계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둘의 공조는 권력의 비대화와 함께 썩어 들어갔다. 몬테시노스는 후지모리 몰래 마약 카르텔과 거래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심지어 무기 밀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후지모리에게 "내가 없으면 당신은 하루도 대통령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는 훗날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되는 '블라디비디오' 사건으로 이어진다.[70][71]
6. 소속 정당[편집]
7. 선거 이력[편집]
[1]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알베르토 푸히모리다.[2] 대통령 시절까진 혈통이 일본계일 뿐 페루 단수국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탄핵 이후 일본으로 도피하고 나서 일본 정부가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페루 정부의 범죄인 인도 요구를 거부하면서 실제로는 페루-일본 복수국적임이 들통 났고, 일본 정당인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했다.[3] 대통령 재임 초중반기(1990~1998)에는 변화 90(Cambio 90), 집권 후반기(1998~2000)에는 시 쿰플레(Si Cumple) 소속이었다.[4] 이 논란은 그가 2000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일본 정부가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상실한 적이 없다"며 보호하면서 역설적으로 재점화되었다. 일본은 속인주의 국가이므로 부모가 일본인이면 자녀도 일본인이지만, 당시 페루 야당은 그가 일본에서 태어난 '순수 일본인'이기에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성토했다.[5] 후지모리 일가는 다행히 압송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나, 주변 이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며 어린 후지모리는 국가 권력의 냉혹함과 소수 인종으로서의 무력감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6] 실제로 1990년 대선 당시 그는 학자 시절의 수석 졸업 증명서와 연구 실적을 홍보물에 전면 배치하며 유권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7] 실제로 후지모리는 대통령 당선 직후에도 자신을 '대통령'이라기보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의 운영 총책임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8] 이 시절의 방송 경험은 훗날 그가 대선 투표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법이나 대중에게 신뢰감을 주는 화법을 구사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사실상 후지모리는 페루 역사상 최초로 '미디어의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한 정치인이었다.[9] 후지모리는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고장 난 국가라는 기계를 수리하러 나온 엔지니어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10] 당시 리마의 중산층조차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며, 우유나 쌀 같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수백 미터의 줄을 서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죽하면 이 시기를 두고 페루인들은 '태평양 전쟁 이후 가장 참혹했던 시절'이라 회상한다.[11] 이 20년간의 내전으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는 약 7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페루 역사상 유례없는 인명 피해였다.[12] 훗날 후지모리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때마다 "나는 이미 죽어버린 국가를 시체실에서 끌어내 심폐소생술을 한 것뿐이다"라는 논리를 폈다.[13] 실제로 후지모리는 선거 유세 도중 원주민 복장을 입거나 그들의 전통 음식을 스스럼없이 먹는 등,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서민 행보를 보였다. 이는 훗날 '포퓰리즘의 정석'으로 불리게 된다.[14] 훗날 후지모리는 자서전적 기록에서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라가 이미 죽어가는 환자였기에 마취 없이 수술대를 올려야 했다"고 말했다.[15] 실제로 후지 쇼크의 성공 이후 페루의 GDP 성장률은 남미 최고 수준을 기록하게 되며, 이는 후지모리가 2000년대 몰락하기 전까지 '콘크리트 지지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16] 후지모리는 국정 연설 때마다 의회를 "부패한 돼지들의 소굴", "나라의 발목을 잡는 기생충들"이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훗날 쿠데타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고도의 계산된 발언이었다.[17] 훗날 역사가들은 이때 후지모리가 조금 더 인내하며 의회와 타협했다면 페루의 민주주의가 수십 년 퇴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하이퍼인플레이션과 테러에 시달리던 페루 대중들에게는 의회의 절차적 정당성보다 후지모리의 강력한 '한 방'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8] 당시 미주기구(OAS) 등 국제 사회는 페루를 강력히 비난하며 원조 중단을 시사했으나, 후지모리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을 내걸며 시간을 벌었다. 결국 1992년 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후지모리파가 압승하며 그의 독재는 '합법의 탈'을 쓰게 된다.[19] 이후 의석수는 130석으로 소폭 조정되기도 한다.[20] 현재까지도 페루의 좌파 진영이 '1993년 체제 타파'를 외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경제 조항들 때문이다.[21] 훗날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블라디비디오' 역시 이러한 감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괴물이었다.[22] 훗날 재판 과정에서 콜리나 그룹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작전 성공 후 포상금을 지급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는 학살이 단순한 돌발 행동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계획된 '더러운 전쟁(Dirty War)'의 일부였음을 시사한다.[23] 피해자 명단: 엔리케 오르티스 페레아(교수), 베르틸라 로사니 로사노, 도리스 케니아 로사노, 루이스 엔리케 오르티즈, 아르만도 리카르도 아마로 등 학생 9명.[24] 이 사면법은 훗날 미주인권재판소(IACHR)에 의해 무효 판결을 받게 되며, 후지모리 몰락 이후 그를 단죄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25] 실제로 1990년 한 해에만 테러로 인한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했으며, 리마 시민들은 밤마다 들려오는 폭음과 사이렌 소리에 만성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26] 이 과정에서 정부군이 론다스에 지급한 무기가 부족할 때는 죽창이나 사냥총으로 맞서기도 했으며, 후지모리는 직접 헬기를 타고 산간 오지를 돌며 이들에게 직접 무기를 하사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강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했다.[27] 이때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이 바리오스 알토스와 라 칸투타 대학 학살 사건이다. 비록 테러 조직 궤멸이라는 명분은 얻었으나, 훗날 후지모리가 감옥에 가게 되는 결정적인 법적 근거가 된다.[28]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잇는 공산주의의 다섯 번째 지도자라는 의미로 스스로 붙인 칭호.[29] 이 연출은 후지모리의 최측근이자 정보국장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심리적 거세를 목표로 한 고도의 선전전이었다.[30] 구스만은 체포 이후 2021년 사망할 때까지 종신형을 살며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체포 기념일인 9월 12일은 현재도 페루 보수우파 세력에게는 '민주주의 승리의 날'로 기념된다.[31] 당시 페루 정규군 내에서도 "민간인에게 총기를 쥐여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가 극심했으나, 후지모리는 이를 밀어붙였다.[32] 훗날 진실화해위원회(CVR)의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기간 중 발생한 희생자의 상당수가 정규군이나 테러 단체가 아닌, 이러한 민병대 간의 보복전 과정에서 발생했음이 드러났다.[33] 이때의 패배는 훗날 후지모리가 러시아제 MiG-29와 Su-25를 대량으로 도입하며 군비를 확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시는 하늘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그의 강박적인 집념이 투영된 결과였다.[34] 당시 아르헨티나로부터 무기를 밀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리는 훗날 후지모리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검은 돈'의 원천이 되었다.[35] 이 시기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60~70%를 상회했으며, 특히 농촌 지역과 빈민가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대접받았다.[36] 실제로 1996년, 후지모리는 자신의 3선 출마를 가능케 하는 '헌법 해석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데, 이를 반대하던 헌법재판소 판사 3명을 전격 해임하며 사법부의 독립성을 완전히 짓밟았다.[37] 당시 일본 정부(하시모토 류타로 내각)는 자국 외교관과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며 압박을 가했으나, 후지모리는 일본 측의 간섭을 매우 불쾌해하며 독자적인 강경 대응을 준비했다.[38] 특히 이 과정에서 '어둠의 실세' 몬테시노스가 지휘하는 정보국 요원들이 개입하여 증거를 인멸하고 부상당한 테러리스트를 확인 사살했다는 의혹은 후지모리즘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게 된다.[39] 이 논리는 당시 법조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후지모리가 장악한 의회는 이를 강행 처리했다. 사실상 헌법 조항을 문구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한 수준이었다.[40] 이 시기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여전히 40%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기반은 콘크리트 지지층인 빈곤층과 농민층에 국한되기 시작했다. 리마를 중심으로 한 도시 지식인층과의 결별은 훗날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된다.[41] 사실 이때 후지모리가 직접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연일 방영되었는데, 초기에는 "역시 우리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재난 복구가 지연되고 경제적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오히려 "쇼만 하고 실질적인 대책은 없다"는 비판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42] 실제로 많은 정치학자들은 후지모리의 몰락이 몬테시노스의 비디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민심을 떠나보낸 근본 원인은 엘니뇨 이후의 경제 실정이었다고 분석한다. 배고픈 국민에게 독재자의 카리스마는 더 이상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43] 실제로 이 사건은 훗날 국제 형사 재판소(ICC) 기준에 따른 반인도적 범죄로 다뤄지게 된다.[44] 2024년 후지모리가 사망함에 따라 그에 대한 형사적 단죄는 영원히 불가능해졌으나, 피해자들의 민사 소송과 명예 회복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45] 훗날 몬테시노스의 비밀 금고에서 발견된 '블라디비디오' 중에는 타블로이드 사주들에게 현금 뭉치를 건네며 1면 기사를 지시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공작에 동원된 국고만 해도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46] 당시 국제 감시단이었던 미주기구는 이 과정을 지켜본 뒤 "국제적인 민주주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47] 야당 의원 알베르토 쿠리가 몬테시노스에게 15,000달러를 받고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담긴 최초의 블라디비디오.[48]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추격전은 몬테시노스가 보관 중이던 자신에게 불리한 비디오들을 먼저 선수 쳐서 압수하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49] 이는 법적으로 사임을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명예스러운 퇴진 방식이었다. 이로써 10년 4개월에 걸친 후지모리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50]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후지모리는 출국 전 이미 자신의 개인 짐과 상당수의 기밀 서류를 일본 대사관 등을 통해 빼돌린 상태였다. 즉, 계획된 도주였다는 것이 중론이다.[51] 실제로 2007년 일본 국민신당의 공천을 받아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페루에서 학살과 부패 혐의를 받는 인물을 후보로 낸 일본 정당의 행태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52] 이는 페루 정부가 그를 범죄인으로 인도 요청했을 때 일본이 거부할 수 있는 완벽한 법적 방패가 되었다. 일본 헌법과 법률은 자국민을 외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극도로 엄격하게 제한하기 때문이다.[53] 가타오카 사토미와는 훗날 그가 칠레에서 구금 중일 때 옥중 결혼을 발표하며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54] 당시 그가 내건 슬로건은 "국가를 구한 최후의 사무라이"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칠레에 구금된 상태에서 대리 입후보한 것이었기에 실효성 논란이 컸다.[55] 이는 국제법상 '인도주의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나 망명객 보호 원칙보다 사법적 정의가 우선한다는 기념비적 판결이었다.[56] 훗날 이 DIROES 수용소는 그의 딸 케이코 후지모리가 아버지를 면회하며 정치를 논하는 '후지모리파의 성지'이자, 페루 정치의 갈등이 집약되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57] 후지모리는 이 증거가 제시될 때 "테러리스트를 소탕한 군인들을 격려하는 것은 통치권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반박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범죄 은닉 및 고무로 판단했다.[58] 특히 바리오스 알토스 및 라 칸투타 학살 유가족들은 이 결정이 자신들에 대한 2차 가해라며 통곡했다.[59] 석방 후 후지모리는 한동안 조용히 지내는 듯했으나, 다시 정치적 발언을 이어가며 2024년 대선 출마설까지 흘러나오는 등 죽기 직전까지 페루 정계의 태풍의 눈으로 군림했다.[60] 후지모리파 지지자들은 그가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다'며 인도적 석방을 끊임없이 요구했고, 반대파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으려는 꾀병'이라며 팽팽하게 맞섰다.[61] 그러나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케이코 후지모리가 출마한다는 소식이 본인이 출마한다는 것으로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62] 구스만은 2021년 9월 11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페루 국민들은 두 숙적의 기일이 겹친 것에 대해 '한 시대의 진정한 종언'이라며 묘한 감정을 드러냈다.[63] 후지모리 측은 자발적인 시술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영어를 모르는 께추아어 사용 원주민들에게 속임수나 강압을 사용하여 시술을 진행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64] 훗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나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가 보여준 행보에서 후지모리즘의 향기를 읽어내는 학자들이 많다. 이념은 달라도 '의회 무용론'과 '강력한 공권력 숭배'라는 지점에서 일맥상통한다.[65] 실제로 후지모리즘은 정당의 이름이 '캄비오 90', '누에바 마요리아', '시 쿰플레', '푸에르사 뽀뿌라르' 등으로 끊임없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지 기반만큼은 콘크리트처럼 유지되는 기현상을 보였다.[66] 이 사건은 후지모리주의자들이 '가족의 결속'보다 '정치적 생존'을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지층 사이에서도 케이코파와 켄지파로 나뉘어 내홍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67] 당연히 결과는 낙선이었으며, 일본 내에서도 "자기 나라에서 죄짓고 도망온 사람을 왜 공천하느냐"는 비판이 상당했다.[68] 이 경력 때문에 그는 정규 정치권에서는 매장된 인물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정보 기관을 다루는 음험한 기술만큼은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69] 훗날 2000년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몬테시노스는 CIA로부터 받은 자금을 이용해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등 민주주의 파괴 공작에 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70] 몬테시노스는 변호사 시절부터 고객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과 후지모리를 파멸시키는 결정적 증거인 '블라디비디오'로 남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71] 그는 리마 외곽의 해군 기지 내에 초호화 비밀 거처를 마련해 두고, 그곳에서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심야 회의'를 주재하곤 했다. 국방장관조차 그의 허락 없이는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다는 증언이 파다했다.[일본] 페루 정당이 아니라 일본의 정당이었다.[73] 2013년 국민신당 해산 이후부터 2024년 이전까지 페루 정당에도, 일본 정당에도 입당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지냈다.[74] 딸 게이코 후지모리가 창당한 인민의 힘에 입당하여 정계 복귀를 노렸으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75]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확보하여 결선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되었다.[76] 개인 득표율이 아니라 국민신당의 정당 비례 득표율이었다.[77]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결선투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