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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덴마크
1. 개요2. 고대3. 중근세
3.1. 바이킹 시대와 덴마크 왕국의 형성3.2. 북해 제국3.3. 에스트리드 왕조3.4. 칼마르 연합3.5. 덴마크-노르웨이
4. 근대
4.1. 노르웨이 상실4.2. 덴마크 입헌군주제의 시작4.3. 슐레스비히 전쟁4.4.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4.5. 나치 독일 점령기: 덴마크 보호령
5. 현대

1. 개요[편집]

덴마크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고대[편집]

고대 덴마크는 북게르만계 데인족과 서게르만계 유트족(주트족)이 공존하는 땅이었는데, 전자는 덴마크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고, 후자는 유틀란트 반도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유트족은 5세기 이후 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앵글족, 색슨족과 융합하여 앵글로색슨족을 형성하게 되었고, 데인족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덴마크 땅에 잔류하여 덴마크인의 조상이 되었다.

3. 중근세[편집]

3.1. 바이킹 시대와 덴마크 왕국의 형성[편집]

중세 시대에 접어들어 북유럽 일대의 농지가 부족해지자 여러 북게르만인(노르드인)들이 북유럽 외부를 약탈하는 바이킹이 되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해외 진출을 시도한 민족이 바로 덴마크의 데인족이었다.

이들은 8세기 말부터 영국아일랜드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9세기 초에는 카롤루스 대제 치하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서유럽의 패권국 프랑크 왕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바르, 할프단 등의 데인족 군장들이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국가들을 상대로 '이교도 대군세'[1]라 불리는 대규모 침공을 단행한 후, 아예 현지에 눌러앉아 '데인로'라 불리는 통치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외부 국가에 대한 약탈 전쟁은 데인족의 군사 기술 및 전략, 전술의 발전을 야기하여, 덴마크 본토 부족들 간의 전쟁 역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 10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크누트 왕조 하의 통일 덴마크 왕국이 형성되었다.

덴마크 왕국은 기존의 북유럽 다신교 대신 가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서구 가톨릭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3.2. 북해 제국[편집]

덴마크의 크누트 왕조는 스벤 1세 치세부터 전성기를 맞이했고, 그의 아들 크누트 2세(크누트 대왕) 치세에는 잉글랜드 왕국노르웨이 왕국의 왕위까지 동시에 차지하여, 북해를 덴마크의 마레 노스트룸으로 삼다시피 한 북해 제국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북해 제국은 크누트 대왕 사후 분할 상속을 통해 해체되었으나, 이후에도 덴마크는 북해 및 발트해 일대의 국제정세에서 중요한 지역강국으로 남았다.

3.3. 에스트리드 왕조[편집]

크누트 왕조 단절 이후 덴마크는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과 그 혈통을 물려받은 에스트리드 왕조가 지배하게 되었다.

3.4. 칼마르 연합[편집]

1397년 칼마르 조약을 통해 덴마크 에스트리드 왕조의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노르웨이 왕위까지 동시에 차지하면서, 사실상 발트 3국을 제외한 북유럽 전역을 아우르는[2] 칼마르 연합이라는 동군연합 체제가 형성되었다.

3.5. 덴마크-노르웨이[편집]

1523년 스웨덴이 구스타프 1세 바사를 구심점으로 삼아 독립하는데 성공하면서, 칼마르 연합은 덴마크노르웨이만의 동군연합인 덴마크-노르웨이로 재편되었다.

이후 덴마크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 대신 루터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고, 가톨릭 국가들과 개신교 국가들이 독일 땅에서 대격돌한 30년 전쟁에도 개신교 진영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한편 덴마크는 대항해시대에 편승하여 해외 식민지 역시 확보했고, 이로써 덴마크 식민제국이 형성되었다.

18세기에는 바이킹 시대 이후 북유럽인들이 전멸한 상태였던 그린란드에 노르웨이인 선교사 한스 에게데가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의 그린란드 재식민화가 시작되었다.

4. 근대[편집]

4.1. 노르웨이 상실[편집]

19세기 초반에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패해 노르웨이를 내주어야 했고, 이로 인해 덴마크 국왕의 북유럽 영지는 다시 칼마르 조약 체결 이전으로 쪼그라들었다.

다만 법적으로 노르웨이의 일부이면서 실질적으로 덴마크가 지배하는 상태였던 아이슬란드페로 제도 등이 공식적으로 덴마크 영토로 확정되었기에, 비록 노르웨이 본토는 잃었으나 일부 영토만큼은 덴마크령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

4.2. 덴마크 입헌군주제의 시작[편집]

1848년 혁명이 유럽 대륙을 휩쓸자 덴마크 왕실은 혁명 세력과 타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에 상당한 권력을 양보하게 되었고, 이로써 덴마크는 입헌군주제로 가는 첫 발을 떼게 되었다.

4.3. 슐레스비히 전쟁[편집]

1860년대까지 덴마크 국왕은 독일 북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영지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프로이센 왕국과의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하여 해당 영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4.4.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편집]

19세기 말부터 덴마크는 본격적인 산업국가로 성장했고, 정당제 역시 확고히 자리잡았다.

1차 대전 이후의 전간기에는 사회민주당이 기성정당들을 제치고 수권정당으로 성장하여 장기집권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노르딕 모델'이라 불리는 북유럽 복지국가의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한편 아이슬란드는 19세기 말부터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강화하다가 1918년에 이르러 아이슬란드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는데,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아이슬란드 국왕을 겸했기에, 비록 직접지배는 아니더라도 아이슬란드에 덴마크가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4.5. 나치 독일 점령기: 덴마크 보호령[편집]

1940년 독일 국방군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덴마크 정부는 체급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덴마크군은 독일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나치는 다른 점령지에서와 달리 덴마크에서는 기존 정부와 의회를 남겨두고 군대만 주둔시키고 감시하는 방식으로 지배했는데, 독일 본토나 다른 나치 점령지에서는 금지된 좌파 정당의 활동 역시 보장되어 나치 치하에서 열린 1942년 덴마크 총선은 사회민주당이 원내1당을 차지했다.

나치의 덴마크 점령은 2차 대전 말기까지 이어져서 독일 본토가 연합국에게 점령된 이후에야, 덴마크 주둔 독일국의 항복과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5. 현대[편집]

[1] 기독교가 아닌 북유럽 신화를 믿는 이들이었기에 '이교도'라는 이름이 붙었다.[2] 당시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는 각각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