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491년 12월 31일 브르타뉴 공국의 생말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자메 카르티에, 모친은 게슬린 장사르였다. 북프랑스의 어촌인 생말로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항해를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1519년 5월 카테린 드 그랑슈와 결혼하였다. 부인 카테린은 카르티에보다 상류층 출신이었기에 카르티에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다. 많은 역사가들은 카르티에가 1524년과 1528년 신세계로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항해에 동행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이를 증명할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브라질까지 다녀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519년 5월 카테린 드 그랑슈와 결혼하였다. 부인 카테린은 카르티에보다 상류층 출신이었기에 카르티에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다. 많은 역사가들은 카르티에가 1524년과 1528년 신세계로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항해에 동행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이를 증명할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브라질까지 다녀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2.2. 1차 항해 (1534년)[편집]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발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신대륙 탐험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아시아로 향하는 북서항로를 찾기를 원했다. 1532년 생말로 대교구의 장 르 베뇌르 대주교가 프랑수아 1세에게 카르티에를 소개하며 탐험 비용 후원을 건의했고, 이 모험적인 사업에 카르티에가 선택되었다.
1534년 4월 20일, 카르티에가 2척의 항선과 61명의 선원들과 함께 생말로를 떠나면서 항해가 시작되었다. 출항 후 겨우 20일 만에 원정대는 5월 초순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지역에 도달했다. 함대는 남부로 방향을 돌리기 전 잠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했다.
벨아일 해협을 통과한 후 카르티에와 그의 함대는 세인트로렌스만을 탐험했다. 6월에는 오늘날 프린스에드워드섬으로 알려진 지역에 도착하여 첫 주요 발견을 이루었다. 프린스에드워드섬에 상륙한 후, 원정대는 아시아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만 근처의 다양한 입구들을 탐험했다.
샬뢰르만을 탐험한 뒤 북쪽으로 향했다.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 카르티에가 상륙한 최종 지점은 오늘날의 가스페반도였다. 여기서 미크맥 인디언들을 만나 모피와 다른 물품들을 거래했다. 7월 24일 베이 데 가스페에서 세인트로렌스의 이로쿼이족과 조우하여 그들의 마을을 프랑스 땅이라 선언했으며, 거래를 위해 스타다코나의 이로쿼이족 추장 도나코나의 두 아들을 프랑스로 데려갔다. 원정대는 앙티코스티섬 주변을 항해한 후 세인트로렌스만을 벗어나 9월 5일 생말로로 귀환했다.
1534년 4월 20일, 카르티에가 2척의 항선과 61명의 선원들과 함께 생말로를 떠나면서 항해가 시작되었다. 출항 후 겨우 20일 만에 원정대는 5월 초순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지역에 도달했다. 함대는 남부로 방향을 돌리기 전 잠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했다.
벨아일 해협을 통과한 후 카르티에와 그의 함대는 세인트로렌스만을 탐험했다. 6월에는 오늘날 프린스에드워드섬으로 알려진 지역에 도착하여 첫 주요 발견을 이루었다. 프린스에드워드섬에 상륙한 후, 원정대는 아시아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만 근처의 다양한 입구들을 탐험했다.
샬뢰르만을 탐험한 뒤 북쪽으로 향했다.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 카르티에가 상륙한 최종 지점은 오늘날의 가스페반도였다. 여기서 미크맥 인디언들을 만나 모피와 다른 물품들을 거래했다. 7월 24일 베이 데 가스페에서 세인트로렌스의 이로쿼이족과 조우하여 그들의 마을을 프랑스 땅이라 선언했으며, 거래를 위해 스타다코나의 이로쿼이족 추장 도나코나의 두 아들을 프랑스로 데려갔다. 원정대는 앙티코스티섬 주변을 항해한 후 세인트로렌스만을 벗어나 9월 5일 생말로로 귀환했다.
2.3. 2차 항해 (1535~1536년)[편집]
카르티에가 프랑스로 돌아와 국왕과 만난 후, 북아메리카로의 두 번째 항해가 승인되었다. 국왕은 새롭게 발견된 장소들의 더 많은 본토를 탐험하라는 임무와 함께 더 많은 항선과 선원을 제공했다.
1535년 5월 19일,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카르티에는 3척의 함선 라 그랑드 에르민호, 라 프티트 에리민호, 레메리용호를 가졌다. 이번 항해에는 110명의 선원이 동행했다. 원정대는 뉴펀들랜드 해안에서 떨어진 펑크섬에 도달했다.
9월 7일,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오늘날 퀘벡시의 현장에 도달했다. 그들은 휴런족의 추장 돈나콘나의 인사를 받으며 스타다코나 마을에 멈추었다. 몇몇 휴런족들이 안내원으로 카르티에와 함께 갔다. 그들은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항해했으며, 10월 2일 오늘날의 몬트리올인 호셰라가에 도달했다.
원주민들은 카르티에에게 부유함이 있는 사그네라는 장소에 관해 말했으나, 카르티에의 큰 항선들로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선원들은 이전에 건설한 생크루아 요새가 있는 생샤를강 입구로 돌아왔다. 11월까지 수로들이 얼어붙었고, 카르티에와 선원들은 1536년 4월까지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겨울 동안 많은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도나코나의 아들 도마가야가 아네다라는 나무 껍질 추출물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어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었으며, 살아남은 85명의 선원을 이끌고 프랑스로 출발했다.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에 카르티에는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사그네의 부유함에 관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돈나콘나와 그의 두 아들을 납치했다. 1536년 7월 15일 생말로에 도착했다.
1535년 5월 19일,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카르티에는 3척의 함선 라 그랑드 에르민호, 라 프티트 에리민호, 레메리용호를 가졌다. 이번 항해에는 110명의 선원이 동행했다. 원정대는 뉴펀들랜드 해안에서 떨어진 펑크섬에 도달했다.
9월 7일, 카르티에와 그의 선원들은 오늘날 퀘벡시의 현장에 도달했다. 그들은 휴런족의 추장 돈나콘나의 인사를 받으며 스타다코나 마을에 멈추었다. 몇몇 휴런족들이 안내원으로 카르티에와 함께 갔다. 그들은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항해했으며, 10월 2일 오늘날의 몬트리올인 호셰라가에 도달했다.
원주민들은 카르티에에게 부유함이 있는 사그네라는 장소에 관해 말했으나, 카르티에의 큰 항선들로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선원들은 이전에 건설한 생크루아 요새가 있는 생샤를강 입구로 돌아왔다. 11월까지 수로들이 얼어붙었고, 카르티에와 선원들은 1536년 4월까지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겨울 동안 많은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도나코나의 아들 도마가야가 아네다라는 나무 껍질 추출물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어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었으며, 살아남은 85명의 선원을 이끌고 프랑스로 출발했다.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에 카르티에는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사그네의 부유함에 관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돈나콘나와 그의 두 아들을 납치했다. 1536년 7월 15일 생말로에 도착했다.
2.4. 3차 항해 (1541~1542년)[편집]
카르티에는 사그네의 대지를 찾기 위한 3번째 항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원정이 떠나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1540년 10월 17일 프랑수아 1세의 명을 받아 이들 지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이번에는 장 프랑수아 데 라 로크 데 로베르발이라는 남성이 탐험대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카르티에는 수석 항해사로 참여했다.
1541년 5월 23일, 카르티에는 선원들과 5척의 항선을 이끌고 생말로를 떠났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북아메리카에 정착지를 설립하고 황금이 많다고 전해지는 '사그네 왕국'을 찾는 것이었다. 아시아로 향하는 통로를 찾는다는 생각은 이제 포기된 상태였다.
8월 23일 스타다코나에 도착했고, 오늘날 퀘벡시 근처에 '샤를부르루알'이라 불리는 정착지를 설립했다.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곧 카르티에와 선원들은 금과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돌들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9월에는 호셰라가까지 항해했으나 좋지 않은 날씨와 파도로 인해 샤를부르루알로 돌아왔다.
겨울이 지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거래를 하던 이로쿼이족이 거래를 거부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착지를 공격했다. 약 35명의 정착민이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티에는 정착지를 지키거나 사그네 왕국을 찾을 만한 충분한 인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1542년 6월 초, 카르티에는 프랑스를 향해 출발했고, 뉴펀들랜드 해안의 세인트존스 항구에서 로베르발과 그의 함선들을 만났다. 로베르발은 카르티에에게 정착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카르티에와 식민주의자들은 거절했다. 그들은 어느 날 밤 몰래 떠나 생말로로 돌아갔으며, 10월에 고향에 도달했다.
그러나 카르티에가 가져온 금과 다이아몬드는 사실 황철광과 석영에 불과했다. 이는 프랑스어에서 '캐나다의 다이아몬드'라는 표현이 가짜를 의미하는 속담이 된 유래가 되었다.
1541년 5월 23일, 카르티에는 선원들과 5척의 항선을 이끌고 생말로를 떠났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북아메리카에 정착지를 설립하고 황금이 많다고 전해지는 '사그네 왕국'을 찾는 것이었다. 아시아로 향하는 통로를 찾는다는 생각은 이제 포기된 상태였다.
8월 23일 스타다코나에 도착했고, 오늘날 퀘벡시 근처에 '샤를부르루알'이라 불리는 정착지를 설립했다.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곧 카르티에와 선원들은 금과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돌들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9월에는 호셰라가까지 항해했으나 좋지 않은 날씨와 파도로 인해 샤를부르루알로 돌아왔다.
겨울이 지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거래를 하던 이로쿼이족이 거래를 거부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착지를 공격했다. 약 35명의 정착민이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티에는 정착지를 지키거나 사그네 왕국을 찾을 만한 충분한 인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1542년 6월 초, 카르티에는 프랑스를 향해 출발했고, 뉴펀들랜드 해안의 세인트존스 항구에서 로베르발과 그의 함선들을 만났다. 로베르발은 카르티에에게 정착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카르티에와 식민주의자들은 거절했다. 그들은 어느 날 밤 몰래 떠나 생말로로 돌아갔으며, 10월에 고향에 도달했다.
그러나 카르티에가 가져온 금과 다이아몬드는 사실 황철광과 석영에 불과했다. 이는 프랑스어에서 '캐나다의 다이아몬드'라는 표현이 가짜를 의미하는 속담이 된 유래가 되었다.
2.5. 말년[편집]
3. 평가[편집]
카르티에는 프랑스를 위해 영토를 주장하고 발견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3번의 항해를 통해 세인트로렌스만과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오늘날 퀘벡시 근처에 프랑스 식민지를 설립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견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더 많은 유럽인의 탐험으로 이어졌다.
그의 탐험은 훗날 1604년 앙리 4세의 명을 받은 사뮈엘 드 샹플랭이 캐나다에 프랑스 정착지인 퀘벡을 건설하여 프랑스가 캐나다를 식민통치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카르티에가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원주민 추장 돈나코나에게 지명을 물었을 때, 언어소통 문제로 추장은 이로쿼이어로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라고 답했다. 카르티에는 이를 지명으로 알아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캐나다라는 나라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몬트리올이라는 지명도 카르티에가 이름 붙인 '국왕의 산(몽 레알)'이 변형된 것이다.
다만 원주민들에 대한 그의 대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원주민 추장과 그의 아들들을 납치했으며, 프랑스로 데려간 원주민들 중 대부분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로쿼이족과의 관계도 초기의 우호적인 상태에서 점차 적대적으로 변했다.
오늘날 캐나다, 특히 퀘벡주에는 그를 기념하는 많은 장소가 있다. 몬트리올에서 퀘벡시로 세인트로렌스강을 가로지르는 자크 카르티에 교, 자크 카르티에 국립공원, 오타와 근처 가티노의 자크 카르티에 공원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고향 생말로에는 탐험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탐험은 훗날 1604년 앙리 4세의 명을 받은 사뮈엘 드 샹플랭이 캐나다에 프랑스 정착지인 퀘벡을 건설하여 프랑스가 캐나다를 식민통치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카르티에가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원주민 추장 돈나코나에게 지명을 물었을 때, 언어소통 문제로 추장은 이로쿼이어로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라고 답했다. 카르티에는 이를 지명으로 알아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캐나다라는 나라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몬트리올이라는 지명도 카르티에가 이름 붙인 '국왕의 산(몽 레알)'이 변형된 것이다.
다만 원주민들에 대한 그의 대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원주민 추장과 그의 아들들을 납치했으며, 프랑스로 데려간 원주민들 중 대부분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로쿼이족과의 관계도 초기의 우호적인 상태에서 점차 적대적으로 변했다.
오늘날 캐나다, 특히 퀘벡주에는 그를 기념하는 많은 장소가 있다. 몬트리올에서 퀘벡시로 세인트로렌스강을 가로지르는 자크 카르티에 교, 자크 카르티에 국립공원, 오타와 근처 가티노의 자크 카르티에 공원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고향 생말로에는 탐험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