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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
재임기간 | 초대 내각총리대신 |
제5대 내각총리대신 | |
제7대 내각총리대신 | |
제10대 내각총리대신 | |
초대 한국통감 | |
1. 개요[편집]
[1] 읽는 법만 음독에서 훈독으로 달라졌다.[2] UCL 최초의 유학생이다.[3] 조슈 정벌 소식을 접하면서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함께 유학 중이던 이노우에 가오루과 긴급 귀국하였다.[4] Evolution of the Japanese, Social and Psychic. BiblioBazaar. p. 198.[5] 156cm는 추측한 키이고 일본에서는 그의 키가 154cm라고 알려져있다.[6] 암살 후 양자인 이토 히로쿠니가 습작하고 귀족원 공작 의원에 취임하였다.[7] 1868년에 태정관 제도의 부활과 함께 설립 되었으며,1885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에 의해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없어진 직책. 오늘날 국무대신에 해당되는 경(卿)보다 상위에 있는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을 대신하여 각료들을 지도하는 과두제식 정부수반이었다.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은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공경 출신이 독점 했지만, 참의는 삿초도비(사쓰마, 초슈, 도사, 히젠) 출신이 대부분 임명되었다. 여담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으로 인해 잘 알려진 메이지 6년 정변도 바로 참의들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