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출생 | 1961년 3월 7일 (64세) |
나라현 나라시 | |
국적 | |
현직 | 제50대 중의원 의원 제29대 자유민주당 총재 자유민주당 나라현 제2선거구 지부 지부장 자유민주당 경제안전보장추진본부 고문 자유민주당 치안·테러·사이버 범죄 대책 조사회 회장 |
가족 | 배우자 야마모토 다쿠[1] 자녀 1남 2녀 |
학력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10 |
의원 대수 | 40대 외[2]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자유민주당 사상 최초의 여성 총재이다. 중의원 의원으로, 아베 신조 총리 하에서 여러 내각 직책을 수행했다.
고베 대학을 졸업한 후,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작가, 입법 보좌관,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무소속이었으나, 199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1996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 아베 전 총리의 측근으로서,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직책을 수행했으며, 특히 일본의 총무대신으로 활동했다.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선 투표 전에 탈락하여 3위를 차지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경제안보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2024년에 당 대표에 두 번째로 출마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에게 적은 차로 패했다. 2025년에 다시 출마하여 두 차례 투표에서 고이즈미 신지로를 꺾고 모두 1위를 차지해 총재로 당선되었다. 만약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된다면,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나라현 출신 총리가 될 것이다.
"확고한 보수주의자" 또는 "초보수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일본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역할은 "자위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외교 정책에서 군사력 사용을 포기하는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지지하며, 확고한 대중 강경파로 간주된다. 국내 정책에서는 아베노믹스의 지속을 지지하며, 동성결혼과 일본의 성 불평등 해결을 위한 법률에 반대했다.
고베 대학을 졸업한 후,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작가, 입법 보좌관,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무소속이었으나, 199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1996년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 아베 전 총리의 측근으로서,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직책을 수행했으며, 특히 일본의 총무대신으로 활동했다.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선 투표 전에 탈락하여 3위를 차지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경제안보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2024년에 당 대표에 두 번째로 출마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에게 적은 차로 패했다. 2025년에 다시 출마하여 두 차례 투표에서 고이즈미 신지로를 꺾고 모두 1위를 차지해 총재로 당선되었다. 만약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된다면,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나라현 출신 총리가 될 것이다.
"확고한 보수주의자" 또는 "초보수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일본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역할은 "자위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외교 정책에서 군사력 사용을 포기하는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지지하며, 확고한 대중 강경파로 간주된다. 국내 정책에서는 아베노믹스의 지속을 지지하며, 동성결혼과 일본의 성 불평등 해결을 위한 법률에 반대했다.
3. 정치인[편집]
1993년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10] 다음 해, 가키자와 고지가 이끄는 소수 정당인 자유당에 합류했으며, 이 정당은 곧 신진당으로 합병되었다.
1996년, 신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중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신진당은 전국적으로 패배했다. 11월 5일, 자유민주당 간사장 가토 고이치의 영입되어 자민당에 입당했다. 자민당에 반대하는 표로 선거에서 승리한 지 두 달 만에 당을 바꾸는 그녀의 행동은 신진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자민당에서 모리파 (공식적으로는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속했으며,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통상산업성의 국회 부대신을 역임했다.또한 교육과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명부 1위에 올라 쉽게 3선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일본 경제산업성의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2003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1구에서 민주당 의원 마부치 스미오에게 패배했다. 근처 도시인 이코마시로 이주하여 2005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2구 의석을 얻었다. 2004년, 의원직을 맡지 않던 동안 긴키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부부가 결혼 후에도 다른 성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부부별성)에 반대하는 자민당 당내 그룹을 이끌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훼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통신부 장관으로서 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판단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경우 방송사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제안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널리 받았다.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와 연관되어 있다.
1996년, 신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중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신진당은 전국적으로 패배했다. 11월 5일, 자유민주당 간사장 가토 고이치의 영입되어 자민당에 입당했다. 자민당에 반대하는 표로 선거에서 승리한 지 두 달 만에 당을 바꾸는 그녀의 행동은 신진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자민당에서 모리파 (공식적으로는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속했으며,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통상산업성의 국회 부대신을 역임했다.또한 교육과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명부 1위에 올라 쉽게 3선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일본 경제산업성의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2003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1구에서 민주당 의원 마부치 스미오에게 패배했다. 근처 도시인 이코마시로 이주하여 2005년 총선거에서 나라현 제2구 의석을 얻었다. 2004년, 의원직을 맡지 않던 동안 긴키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부부가 결혼 후에도 다른 성씨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부부별성)에 반대하는 자민당 당내 그룹을 이끌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훼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통신부 장관으로서 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판단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경우 방송사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제안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널리 받았다.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와 연관되어 있다.
3.1. 아베 내각[편집]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 내각에서 오키나와 및 북방 영토 담당 대신, 과학기술 정책 담당 대신, 혁신 담당 대신, 청소년 활동 및 남녀공동참여 담당 대신 및 식품 안전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기념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유일한 아베 내각 각료였다.
201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한 후, 당의 정무조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1월, 아베에게 일본 제국이 식민 통치를 통해 병합된 국가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대신할 '아베 담화'를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9월 3일 신도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각료로 임명된 후, 일본의 소규모 신나치주의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일본 노동자당의 대표 야마다 가즈나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다. 야마다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으며, 야마다의 배경을 알았더라면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1994년에 아돌프 히틀러의 선거 재능을 칭찬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을 홍보하는 모습도 보여졌다.
2014년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내각 각료 3명 중 한 명이었으며, 2016년에는 재직 중인 각료로서 신사의 가을 축제에 참석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2020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5주년에는 야스쿠니를 방문한 4명의 각료 중 한 명이었다.
2014년 12월 총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에서 96,000표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2위 후보를 58,00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2016년 2월, 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방영하는 방송사의 운영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발언했다. 미국 국무부는 나중에 이를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언론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고 밝혔다.
다카이치가 총무대신으로서 감독했던 2017년 선거구 개편은 나라현의 한 선거구를 폐지하여 다카이치가 다시 옛 라이벌인 마부치와 대결할 가능성이 생겼다.
2017년 8월 3일 노다 세이코로 교체되었으나, 2019년 9월 11일 이시다 마사토시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복귀했다. 다른 구상들 중에서 NHK에 시청료 인하와 거버넌스 개혁을 압박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현금 지급을 감독했다.
201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한 후, 당의 정무조사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1월, 아베에게 일본 제국이 식민 통치를 통해 병합된 국가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대신할 '아베 담화'를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9월 3일 신도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녀가 각료로 임명된 후, 일본의 소규모 신나치주의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일본 노동자당의 대표 야마다 가즈나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다. 야마다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으며, 야마다의 배경을 알았더라면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1994년에 아돌프 히틀러의 선거 재능을 칭찬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을 홍보하는 모습도 보여졌다.
2014년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내각 각료 3명 중 한 명이었으며, 2016년에는 재직 중인 각료로서 신사의 가을 축제에 참석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2020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5주년에는 야스쿠니를 방문한 4명의 각료 중 한 명이었다.
2014년 12월 총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에서 96,000표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2위 후보를 58,000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2016년 2월, 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방영하는 방송사의 운영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발언했다. 미국 국무부는 나중에 이를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언론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고 밝혔다.
다카이치가 총무대신으로서 감독했던 2017년 선거구 개편은 나라현의 한 선거구를 폐지하여 다카이치가 다시 옛 라이벌인 마부치와 대결할 가능성이 생겼다.
2017년 8월 3일 노다 세이코로 교체되었으나, 2019년 9월 11일 이시다 마사토시를 대신하여 총무대신으로 복귀했다. 다른 구상들 중에서 NHK에 시청료 인하와 거버넌스 개혁을 압박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현금 지급을 감독했다.
3.2. 2021년 자민당 선거[편집]
2021년 8월, 9월 29일에 예정된 선거에서 현 총리 스가 요시히데에게 도전하여 자민당 총재직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9월 3일, 스가는 재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발표했고, 다음 날 언론 매체들은 아베 전 총리가 다카이치에게 지지를 옮겼다고 보도했다. 스가 자신은 경쟁 후보인 고노 다로를 지지했다. "국방과 외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3.3. 2024년 자민당 선거[편집]
2024년 9월 기시다의 후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9명의 후보 중 이시바 시게루와 고이즈미 신지로와 함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결국,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에게 패했다.
이시바는 다카이치에게 핵심 당직 중 하나인 자민당 총무회장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11월에는 자민당의 새로 조직된 공공 안전 및 테러와 사이버 범죄 대책 연구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시바는 다카이치에게 핵심 당직 중 하나인 자민당 총무회장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11월에는 자민당의 새로 조직된 공공 안전 및 테러와 사이버 범죄 대책 연구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3.4. 2025년 자민당 선거[편집]
2025년 9월 18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사임에 따라 2025년 선거에 자민당 총재 후보로 출마한다고 발표했다. 초기 여론 조사에서 다카이치와 농림수산 대신 고이즈미 신지로는 선거의 초기 선두 주자로 간주되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여론 조사에서 거의 동률을 이루었다.
10월 4일 선거일, 1차 투표에서 183표 (31.07%)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고이즈미는 164표 (27.84%)로 2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당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결선 투표에서 54% 대 46%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자민당의 확정된 대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10월 중순에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10월 4일 선거일, 1차 투표에서 183표 (31.07%)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고이즈미는 164표 (27.84%)로 2위를 차지하여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모두 당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결선 투표에서 54% 대 46%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자민당의 확정된 대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10월 중순에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4. 정치적 견해[편집]
4.1. 국내[편집]
강경한 보수주의자이자 강경한 국수주의자이다. 또 다른 자민당 각료이자 중의원 의원인 고노 다로는 다카이치가 자민당 내에서 정치 스펙트럼의 극우에 속한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자신도 도이체 벨레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의해 극우로 묘사되었다. 2021년, 타임지는 그녀를 초보수주의자로 묘사했다.
동성결혼 반대와 부부 동성 의무화 유지 등 사회보수주의적인 견해들을 표출했다. 2020년 12월 정부의 성 평등 계획이 "가족 단위를 기반으로 한 사회 구조를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여성이 일본 천황이 될 수 있도록 법이 변경되는 것에 반대한다.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
마거릿 대처를 모델로 자주 언급했다. 다카이치 또한 대처처럼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경제와 관련하여 아베노믹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일본의 국기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투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4년에는 극우 극단주의자들의 사무실 방문을 주최했다. 또한 2014년에는 다카이치가 히틀러의 선거 전략이라는 1994년 책을 지지하는 광고에 실린 사진이 공개되었다.
신토 종교 의식과 도덕 교육의 복원을 옹호하는 신토 정치연맹 국회 간담회의 부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동성결혼 반대와 부부 동성 의무화 유지 등 사회보수주의적인 견해들을 표출했다. 2020년 12월 정부의 성 평등 계획이 "가족 단위를 기반으로 한 사회 구조를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여성이 일본 천황이 될 수 있도록 법이 변경되는 것에 반대한다. 국수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의 일원이다.
마거릿 대처를 모델로 자주 언급했다. 다카이치 또한 대처처럼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경제와 관련하여 아베노믹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일본의 국기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투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4년에는 극우 극단주의자들의 사무실 방문을 주최했다. 또한 2014년에는 다카이치가 히틀러의 선거 전략이라는 1994년 책을 지지하는 광고에 실린 사진이 공개되었다.
신토 종교 의식과 도덕 교육의 복원을 옹호하는 신토 정치연맹 국회 간담회의 부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4.2. 외교[편집]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일본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지지한다. 대중 강경파로 지적 재산권 침해와 같은 중국의 경제 관행에 비판적이었으며,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지지했다. 미국이 일본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센카쿠 열도 분쟁의 일환으로 중국이 배치한 해양 부표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5년 4월, 타이완을 방문하여 라이칭더 총통을 만났다. "타이완 비상사태는 일본 비상사태"라는 아베 신조의 발언을 반복했다. 그녀가 3위를 차지했던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그녀의 대중 정책은 4명의 후보 중 가장 강경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다고 말했다. 위안부를 포함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인정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2002년 8월 18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전쟁이 자위 전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안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2024년 4월과 8월에 제2차 세계 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는데, 두 번 모두 국무대신 자격으로 서명했다. 총리로 선출된다면 신사 방문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본의 전쟁 범죄가 과장되었다고 말했다. 위안부를 포함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인정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2002년 8월 18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전쟁이 자위 전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안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2024년 4월과 8월에 제2차 세계 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는데, 두 번 모두 국무대신 자격으로 서명했다. 총리로 선출된다면 신사 방문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5. 한국과의 관계[편집]
다케이치 사나에는 199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고 사죄의 뜻을 표명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담화를 "당시의 협약에 따른 반성과 사죄를 현재의 일본 정부가 하는 것은 오만한 발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위안부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라고 부정했다.
또한 "한국이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에 무장 경비대를 상주시키거나 헬리포트, 막사를 짓는 것은 '불법 점거'와 다름없다"라고 항의했다.
그는 2025년 9월 27일 총재 후보 토론회에서도 "한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라면서 시마네현이 개최하는 '다케시마의 날'에 참석하는 일본 정부 대표를 차관급인 정무관 대신 장관으로 격을 높여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카이치 총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총리가 되더라도 참배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총재 당선 직후인 지난 5일에는 "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 위령을 위한 시설"이라며 "어떻게 위령할지, 어떻게 평화를 기원할지는 적시에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다만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외교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다"라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국제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라면서 여지를 남겨뒀다.
일본 언론에서는 다카이치 총재가 총리 취임 후 내각 인사에서 정부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에 기하라 미노루 전 방위상을 내정했다고 보도했다. 기하라 전 방위상도 기시다 후미오 내각 때인 지난해 8월 15일 현직 방위상으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우익 정치인이다.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한미일 협력은 '아킬레스건'과 같다"라며 "3국 협력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위안부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라고 부정했다.
또한 "한국이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에 무장 경비대를 상주시키거나 헬리포트, 막사를 짓는 것은 '불법 점거'와 다름없다"라고 항의했다.
그는 2025년 9월 27일 총재 후보 토론회에서도 "한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라면서 시마네현이 개최하는 '다케시마의 날'에 참석하는 일본 정부 대표를 차관급인 정무관 대신 장관으로 격을 높여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카이치 총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하며 총리가 되더라도 참배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총재 당선 직후인 지난 5일에는 "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 위령을 위한 시설"이라며 "어떻게 위령할지, 어떻게 평화를 기원할지는 적시에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다만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외교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다"라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국제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라면서 여지를 남겨뒀다.
일본 언론에서는 다카이치 총재가 총리 취임 후 내각 인사에서 정부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에 기하라 미노루 전 방위상을 내정했다고 보도했다. 기하라 전 방위상도 기시다 후미오 내각 때인 지난해 8월 15일 현직 방위상으로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우익 정치인이다.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한미일 협력은 '아킬레스건'과 같다"라며 "3국 협력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6. 여담[편집]
- 2004년 동료 중의원 의원인 야마모토 다쿠와 결혼했다. 부부는 친자녀는 없었지만, 남편의 전 결혼에서 얻은 세 자녀를 입양했다. 그들은 2017년 7월에 이혼에 합의했으며, 이혼 사유로 정치적 견해와 열망의 차이를 들었다. 그러나 2021년 12월에 다시 결혼했다. 의붓자녀를 통해 네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또한 JRA 경마 팬이다.
- 일본 법률상 모든 부부가 같은 성씨를 사용해야 하므로, 사나에는 첫 결혼 동안 법적 성씨를 남편의 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재혼 후에는 야마모토가 아내의 성으로 바꾸었다.
7. 본 문서 정보[편집]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