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비잔티움(비잔티온)[편집]
3. 고대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편집]
4.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편집]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는데, 오스만 황제(파디샤)[1]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자국어로 번역한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를 그대로 쓰며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2]
이후 코스탄티니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3대륙에 걸친 제국의 수도로서 번영했으며, 이렇다할 외침도 없이 장기간 안정을 유지했다.
또한 코스탄티니예에 주변 지역들이 대거 편입되어 기존의 보스포로스 해협 서안의 유럽 지역에 한정된 도시가 아닌, 보스포로스 양안을 모두 확보하며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도시가 된 것도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덕분에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그리스, 불가리아 등 발칸 반도 각국이 독립한 19세기 이후의 코스탄티니예는 적대적인 신생국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안보 부담이 심화되었는데, 20세기 초 제1차 발칸 전쟁 시기에는 불가리아군이 코스탄티니예 인근의 차탈자 일대까지 남하해서 위협했다가, 불가리아를 후원하던 러시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1차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한 이후에는 협상국(연합국)의 일원인 영국군이 오스만 제국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감독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코스탄티니예에 무혈입성하여 황제 메흐메트 6세와 제국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제국의 국토 대부분이 협상국들과 신생 독립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등장하여 그리스군 등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일대에 주둔하던 점령군을 축출했고, 1922년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코스탄티니예를 되찾았다.
이후 코스탄티니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3대륙에 걸친 제국의 수도로서 번영했으며, 이렇다할 외침도 없이 장기간 안정을 유지했다.
또한 코스탄티니예에 주변 지역들이 대거 편입되어 기존의 보스포로스 해협 서안의 유럽 지역에 한정된 도시가 아닌, 보스포로스 양안을 모두 확보하며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도시가 된 것도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덕분에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그리스, 불가리아 등 발칸 반도 각국이 독립한 19세기 이후의 코스탄티니예는 적대적인 신생국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안보 부담이 심화되었는데, 20세기 초 제1차 발칸 전쟁 시기에는 불가리아군이 코스탄티니예 인근의 차탈자 일대까지 남하해서 위협했다가, 불가리아를 후원하던 러시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1차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한 이후에는 협상국(연합국)의 일원인 영국군이 오스만 제국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감독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코스탄티니예에 무혈입성하여 황제 메흐메트 6세와 제국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제국의 국토 대부분이 협상국들과 신생 독립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등장하여 그리스군 등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일대에 주둔하던 점령군을 축출했고, 1922년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코스탄티니예를 되찾았다.
5. 튀르키예 공화국: 이스탄불[편집]
1922년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국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923년 수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내륙의 앙카라로 천도하면서, 코스탄티니예는 로마 시대부터 1600여년에 걸쳐 지켜 온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공식 명칭 역시 1930년부터는 이스탄불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이스탄불은 지속적인 인구 증가를 겪으면서 튀르키예의 최대도시 지위를 굳건히 유지했고, 지금은 1600만의 인구를 보유한 거대도시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이스탄불은 지속적인 인구 증가를 겪으면서 튀르키예의 최대도시 지위를 굳건히 유지했고, 지금은 1600만의 인구를 보유한 거대도시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