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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02년 출생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열사이다.
2. 생애[편집]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차녀로 태어났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으로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된다. 이화학당의 교장인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참가를 말렸지만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학당 담장을 넘어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해당 사태로 인해 1919년 3월 10일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유관순과 그의 사촌 언니 유예도는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만세 시위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재판 중 재판장이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고 한다. 이에 재판장은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으로 판결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해당 판결은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였고, 유관순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1920년,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안타깝게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원래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1916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으로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된다. 이화학당의 교장인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참가를 말렸지만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학당 담장을 넘어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해당 사태로 인해 1919년 3월 10일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유관순과 그의 사촌 언니 유예도는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만세 시위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재판 중 재판장이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고 한다. 이에 재판장은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으로 판결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해당 판결은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였고, 유관순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1920년,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안타깝게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3. 여담[편집]
- 원래 5만원권에 들어갈 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붓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라 고문 받기 전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라는 이유로 결국 신사임당이 5만원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1] 도로명 주소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1[2] 자료에 따라 9월 28일 설과 10월 12일 설이 존재한다.[3] 27세손.[4] 그도 역시 딸과 같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유관순의 성격은 아버지에게 유전받았다.[5] 한때 유준석, 유관옥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6] 원래 모두 류씨가 맞으나, 유씨로 표기한 이유는 1921년(한글맞춤법의 역사 참고) 두음 법칙이 생기면서 편의상 류관순을 유관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가 고유명사화 되어서 그렇다. 교과서에도, 대중적으로도 ‘류관순’보단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퍼져 있어서 이런 부분에 있어 혼란을 막기 위해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바뀌었다.[7] 1930년대 경성제국 여학생 평균 신장이 150cm였다고 한다. 평균보다는 약간 큰 셈이다.[8] 그러나 수감기록증에 애매한 글씨체로 쓰는 바람에 5척 0촌이 5척 6촌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로인해 유관순이 당대로서는 굉장히 체격이 큰 169.7cm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9] 생전 최종학력은 이쪽이다.[10] 이화학당 개교 110주년을 맞아 심의를 거쳐 1996년 5월 30일에 명예졸업장을 추서받았다. 따라서 실질적 학력은 이쪽이며, 공식적으로 이화여고 동문임을 인증한 셈이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명예졸업이 졸업으로 인정되지 아니한다. (명예졸업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일종의 상훈으로 생각하면 된다.)[11] 어렸을 때는 천안 병천에 있는 매봉교회, 이화학당 시절에는 서울 정동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가족이 모두 개신교 집안이다.[12] 지금의 건국훈장 독립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