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유교가 동아시아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공자의 후손들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유교적 정통성을 강조했는데, 여러 차례의 변화를 거쳐 북송 인종 시대인 1055년에 이르러 연성공이라는 이름의 명칭이 확정되어 청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멸망한 이후에는 금나라 땅이 된 공자 가문의 본관 곡부[1]에 잔류한 '북종'과 남송 땅으로 내려간 '남종'이라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 세습되었는데, 몽골 제국이 금과 남송을 모두 멸하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이후, 남종 가문이 곡부를 지킨 북종 가문을 정통으로 인정하는데 합의하면서 연성공의 계보는 북종을 적통으로 삼아 이어졌다.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초기에도 연성공은 계속 세습되었으나, '공'이라는 전근대적 귀족 작위를 공화국 체제에서 계속 존치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점이 지적되어, 연성공은 폐지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2]이라는 이름의 관직으로 대체되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 자체는 지금도 중화민국의 실질 영토인 대만 땅에서 세습지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지급하는 봉급이나 특권은 딱히 없는 명예직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멸망한 이후에는 금나라 땅이 된 공자 가문의 본관 곡부[1]에 잔류한 '북종'과 남송 땅으로 내려간 '남종'이라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 세습되었는데, 몽골 제국이 금과 남송을 모두 멸하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이후, 남종 가문이 곡부를 지킨 북종 가문을 정통으로 인정하는데 합의하면서 연성공의 계보는 북종을 적통으로 삼아 이어졌다.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초기에도 연성공은 계속 세습되었으나, '공'이라는 전근대적 귀족 작위를 공화국 체제에서 계속 존치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점이 지적되어, 연성공은 폐지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2]이라는 이름의 관직으로 대체되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 자체는 지금도 중화민국의 실질 영토인 대만 땅에서 세습지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지급하는 봉급이나 특권은 딱히 없는 명예직으로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