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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스웨덴
1. 개요2. 고대3. 중근세
3.1. 바이킹 시대와 스웨덴 왕국의 형성3.2. 초기 스웨덴 왕국3.3. 칼마르 연합3.4. 스웨덴 독립전쟁3.5. 바사 시대와 스웨덴 제국의 형성3.6.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치하의 스웨덴 제국3.7. 자유의 시대3.8. 구스타브 3세의 절대왕정 복고
4. 근대
4.1. 칼 13세와 베르나도트4.2.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과 베르나도테 왕조4.3. 노르웨이의 독립4.4.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집권과 2차 대전
5. 현대

1. 개요[편집]

스웨덴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고대[편집]

고대 스웨덴은 이웃나라 노르웨이와 함께 게르만족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지역 중 하나로, 오늘날 스웨덴의 주류 민족인 북게르만족 뿐만 아니라 서게르만족, 동게르만족 역시 상당수가 스웨덴 일대에서 기원하였다.

3. 중근세[편집]

3.1. 바이킹 시대와 스웨덴 왕국의 형성[편집]

3.2. 초기 스웨덴 왕국[편집]

스웨덴 왕국은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선포함으로써 북유럽 다신교와 결별하고 서구 가톨릭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3.3. 칼마르 연합[편집]

1397년 칼마르 조약으로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1세 스웨덴,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하면서 칼마르 연합이 형성되었다.

3.4. 스웨덴 독립전쟁[편집]

16세기 초 스웨덴 토착 귀족들은 구스타프 바사를 구심점으로 삼아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 반기를 들었고, 1523년 덴마크군을 축출하고 독립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3.5. 바사 시대와 스웨덴 제국의 형성[편집]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루터파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웨덴 교회를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시켜 국왕 아래에 두고, 이를 통해 뫙권을 강화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스웨덴은 발트해의 패권국으로 부상하여 이른바 '스웨덴 제국'을 형성했는데, 바사 왕조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30년 전쟁에 개신교 진영으로 참전하여 활약하며 '북방의 사자왕'이라 불렸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외동딸로서 즉위한 크리스티나 여왕 치세에도 스웨덴의 번영은 지속되었으나, 그녀는 가톨릭에 귀의하기 위해 스스로 왕위를 사촌인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넘기고 교황령 로마로 이주했고, 이로써 구스타브 1세 시대 이래 이어진 바사 시대는 막을 내렸다.

3.6.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치하의 스웨덴 제국[편집]

칼 10세 구스타브와 그 후손들인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치하에서도 스웨덴은 지속적으로 패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칼 12세가 러시아의 표트르 1세와 대북방전쟁을 벌이다 폴타바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스웨덴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결국 칼 12세가 1718년에 전사하고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러시아 등 주변국에 영토를 대거 할양하면서 스웨덴의 제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3.7. 자유의 시대[편집]

대북방전쟁 패배의 여파로 스웨덴의 왕권은 크게 약화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자유의 시대'라 불리는 입헌군주제 시대를 불러왔다.

3.8. 구스타브 3세의 절대왕정 복고[편집]

18세기 후반에 즉위한 구스타브 3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무력화시킴으로써 50여년간 지속된 '자유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 체제로 회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아버지만한 정치력이 없었던데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여 중세 시대부터 지배하던 핀란드를 할양하는 굴욕까지 겪었기에, 결국 입헌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당하고 말았다.

4. 근대[편집]

4.1. 칼 13세와 베르나도트[편집]

구스타브 4세 아돌프 축출 이후 구스타브 3세의 동생이자 구스타브 4세의 숙부인 칼 13세가 으로 옹립되었는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왕국을 유지하려면 양자를 들여야했다.

당시 유럽 최강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였고 스웨덴과 프랑스 양국 관계도 우호적이었기에,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자 프랑스군 원수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칼 13세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그는 노쇠한 왕을 대신하여 스웨덴을 통치하는 섭정까지 맡게 되었다.

베르나도트는 비록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스웨덴의 국익을 우선순위로 두고 판단하여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는 나폴레옹을 적대하는 대프랑스 동맹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기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에는 친프랑스 국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할양받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을 수립했다.

4.2.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과 베르나도테 왕조[편집]

칼 13세는 스웨덴노르웨이 양국의 왕위를 동시에 보유하고 노후를 보내다 사망했고[1],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국왕 칼 14세 요한, 노르웨이 국왕 칼 3세 요한으로 즉위하면서 베르나도테[2] 왕조가 시작되었다.

베르나도테 왕조 치하에서 스웨덴은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 정착이 이루어졌고, 경제적으로는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4.3. 노르웨이의 독립[편집]

1905년 노르웨이가 덴마크 왕자 출신 호콘 7세를 국왕으로 옹립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그는 스웨덴 국왕 칼 15세의 손자이기도 했기에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노르웨이의 독립과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4.4.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집권과 2차 대전[편집]

1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수권정당으로 부상했고, 1932년부터 페르 알빈 한손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2차 대전 시기 사민당은 우파 정당들까지 끌어들여 거국내각을 구성했고,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소련의 침공에 시달린 핀란드 등의 주변국들과 달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립을 유지하며 전쟁의 참화를 피해가는데 성공했다.

5. 현대[편집]

[1] 노르웨이 국왕으로서는 칼 2세였다.[2] 베르나도트의 스웨덴어 발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