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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고대[편집]
고대 벵골에는 인도아리아인이 유입되어 드라비다인을 비롯한 원주민들과 혼혈되면서 벵골인의 조상이 되었다.
십육대국(마하자나파다스) 시대 벵골에는 방가 왕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는데, 벵골이라는 지명과 방글라데시라는 국호 둘다 여기서 유래했다.
방가 왕국은 이웃한 마가다국[1] 에서 일어난 난다 왕조에 의해 멸망했고, 난다 왕조 멸망 이후에는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다.
십육대국(마하자나파다스) 시대 벵골에는 방가 왕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는데, 벵골이라는 지명과 방글라데시라는 국호 둘다 여기서 유래했다.
방가 왕국은 이웃한 마가다국[1] 에서 일어난 난다 왕조에 의해 멸망했고, 난다 왕조 멸망 이후에는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다.
3. 중세[편집]
중세 초기 벵골 지방에서는 인도 최후의 불교 왕조인 팔라 왕조가 일어나 북인도 패권을 다투었고, 이후에는 북인도 최후의 힌두 왕조인 세나 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나 왕조는 북인도를 석권한 델리 술탄국의 할지 왕조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부터 벵골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 시대 초기의 벵골은 델리 술탄국의 영토였으나, 1352년에 델리로부터 독립하여 벵골 술탄국이 세워졌다.
벵골 술탄국은 200여년간 존속하며 현재 방글라데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 벵골인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세나 왕조는 북인도를 석권한 델리 술탄국의 할지 왕조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부터 벵골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 시대 초기의 벵골은 델리 술탄국의 영토였으나, 1352년에 델리로부터 독립하여 벵골 술탄국이 세워졌다.
벵골 술탄국은 200여년간 존속하며 현재 방글라데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 벵골인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4. 근세[편집]
1576년 벵골 술탄국은 무굴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무굴은 벵골 수바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통치했다.
무굴 시대 초기 벵골 수바는 일개 행정구역에 불과했으나, 무굴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아우랑제브 황제가 사망하고 무굴의 중앙집권이 약화되자 사실상 자립하여 거의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18세기 벵골 수바는 인도 아대륙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대영제국과 프랑스라는 두 식민제국의 각축전이 펼쳐지는 장소였는데,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벵골 수바를 완전히 장악하고 더 나아가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무굴 시대 초기 벵골 수바는 일개 행정구역에 불과했으나, 무굴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아우랑제브 황제가 사망하고 무굴의 중앙집권이 약화되자 사실상 자립하여 거의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18세기 벵골 수바는 인도 아대륙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대영제국과 프랑스라는 두 식민제국의 각축전이 펼쳐지는 장소였는데,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벵골 수바를 완전히 장악하고 더 나아가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5. 근대[편집]
19세기 벵골의 중심 도시인 캘커타[2]는 영국령 인도 전체의 수도 역할을 하는 인도 최대 도시였다.
1905년 영국은 벵골 지방의 분리독립 열기를 가라앉히고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무슬림 중심의 동벵골(지금의 방글라데시)와 힌두교도 중심의 서벵골을 분리하는 이른바 벵골 분할령을 선포했는데, 이는 벵골을 넘어 영국령 인도 전역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본래 친영단체로 시작했던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로 바뀌는 원인을 제공하는 역효과를 가져와서 결국 영국은 1911년에 벵골 분할령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리고 분할령 철회 이듬해인 1912년에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캘커타에서 뉴델리로 옮기면서 뒤끝(...)을 부렸다.
인도 무슬림들의 당(黨)인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은 인도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인도 국민회의와 협력하기도 했으나, 1935년 신인도통치법을 통해 제한적인 인도 자치가 허용된 후 치러진 첫번째 인도 제국의회 선거에 패배한 후 1940년 무슬림들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들을 독립주로 선언하였다.
인도의 독립을 목전에 둔 1946년에 전인도 무슬림 연맹 주도하에 다이렉트 액션 데이(Direct Action Day)라 불리는 무슬림들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무슬림과 힌두교도 상호간의 대규모 학살이 캘커타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고, 이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자 독립하고 동벵골(방글라데시)가 서벵골과 영구적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자 독립하면서 동벵골은 서벵골의 분리가 확정되고, 동벵골은 파키스탄의 동부 영토인 동파키스탄이 되었다.
1905년 영국은 벵골 지방의 분리독립 열기를 가라앉히고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무슬림 중심의 동벵골(지금의 방글라데시)와 힌두교도 중심의 서벵골을 분리하는 이른바 벵골 분할령을 선포했는데, 이는 벵골을 넘어 영국령 인도 전역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본래 친영단체로 시작했던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 최대 독립운동 단체로 바뀌는 원인을 제공하는 역효과를 가져와서 결국 영국은 1911년에 벵골 분할령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리고 분할령 철회 이듬해인 1912년에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캘커타에서 뉴델리로 옮기면서 뒤끝(...)을 부렸다.
인도 무슬림들의 당(黨)인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은 인도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인도 국민회의와 협력하기도 했으나, 1935년 신인도통치법을 통해 제한적인 인도 자치가 허용된 후 치러진 첫번째 인도 제국의회 선거에 패배한 후 1940년 무슬림들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들을 독립주로 선언하였다.
인도의 독립을 목전에 둔 1946년에 전인도 무슬림 연맹 주도하에 다이렉트 액션 데이(Direct Action Day)라 불리는 무슬림들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무슬림과 힌두교도 상호간의 대규모 학살이 캘커타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고, 이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자 독립하고 동벵골(방글라데시)가 서벵골과 영구적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자 독립하면서 동벵골은 서벵골의 분리가 확정되고, 동벵골은 파키스탄의 동부 영토인 동파키스탄이 되었다.
6. 현대[편집]
6.1. 동파키스탄[편집]
파키스탄의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서파키스탄이 장악하자, 동파키스탄에서는 후세인 샤히드 수라와르디가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을 창당했다.
창당 초기에만 해도 아와미 연맹은 파키스탄 내에서의 자치권 확대를 추구했고,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수라와르디가 파키스탄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수라와르디 사후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가 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역시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권 확대를 추구하는것은 마찬가지였고, 1970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 의석을 싹쓸이하며 원내1당이 되어 다시 파키스탄 내각을 장악하는 것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파키스탄 군부는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아와미 연맹을 불법화하면서 무지부르를 체포하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이는 더이상 합법적인 선거로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 내에서 권리를 확보할 수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고, 1971년 3월 26일에 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아와미 연맹이 독립된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파키스탄군과 방글라데시 독립군(묵티바히니) 간의 전투가 가열되자 1,00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인도의 서벵갈, 아삼 등지로 피신하였는데, 이를 파키스탄군이 추격하면서 인도 국경지대를 침범하자 인도군이 참전하였고, 결국 인도의 지원에 힘입어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는 항복하고 ‘벵골 국가’라는 뜻의 방글라데시가 탄생하였다.
창당 초기에만 해도 아와미 연맹은 파키스탄 내에서의 자치권 확대를 추구했고,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수라와르디가 파키스탄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수라와르디 사후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가 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역시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권 확대를 추구하는것은 마찬가지였고, 1970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 의석을 싹쓸이하며 원내1당이 되어 다시 파키스탄 내각을 장악하는 것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파키스탄 군부는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아와미 연맹을 불법화하면서 무지부르를 체포하는 초강수를 두었는데, 이는 더이상 합법적인 선거로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 내에서 권리를 확보할 수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고, 1971년 3월 26일에 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아와미 연맹이 독립된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파키스탄군과 방글라데시 독립군(묵티바히니) 간의 전투가 가열되자 1,00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인도의 서벵갈, 아삼 등지로 피신하였는데, 이를 파키스탄군이 추격하면서 인도 국경지대를 침범하자 인도군이 참전하였고, 결국 인도의 지원에 힘입어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 군대는 항복하고 ‘벵골 국가’라는 뜻의 방글라데시가 탄생하였다.
6.2. 독립 이후[편집]
1972년 헌법에 의해 방글라데시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아와미 연맹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일당독재를 시도하다가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이후 쿠데타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정치 혼란이 야기되었다.
무지부르 사후의 정치 혼란은 지아우르 라흐만이라는 군부 독재자가 방글라데시 국민당을 창당하고 새로운 일당독재 정권을 형성하면서 수습되는 듯 했으나, 그 역시 후세인 무함마드 에르샤드의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이후에는 에르샤드의 자티야당이 일당독재를 이어갔다.
80년대 방글라데시를 지배한 에르샤드 군사정권은 1990년에 실각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함께 에르샤드 정권의 여당인 자티야당은 몰락하고, 무지부르의 딸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과 지아우르 라흐만의 부인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국민당이 양당제를 형성했다.
그 후 아와미 연맹과 국민당 간에 2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있었으나, 2006년 아와미 연맹 지지자들의 시위를 칼레다 지아 내각이 무력진압 하려다 실패하면서 2년 동안 과도내각이 이어졌다.
2008년 12월 17일 0시 1분부터 국가 비상사태가 해제되었는대, 2년간의 비상사태가 해제된후 방글라데시에서 7년 만에 처음 치러진 87%의 선거율을 기록한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이끄는 연정이 의회 총 300석 중 245석을 확보한 반면, 제1야당으로 떨어진 국민당은 3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후 셰이크 하시나의 아와미 연맹은 총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2024년까지 장기집권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칼레다 지아 전 총리가 체포되자 국민당은 아예 총선 불참을 택하고, 로샨 에르샤드[3]의 자타야당이 제1야당으로 부활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셰이크 하시나의 장기집권이 이어지는 듯 했으나, 2024년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 하려다 대학살을 야기하면서 역풍을 초래하여 결국 하시나는 실각하여 인도로 망명했다.
이후 경제학자이자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가로서 명망이 높은 무함마드 유누스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출범하여 차기 총선 전까지 방글라데시를 이끌게 되었는데, 과도내각은 칼레다 지아를 비롯한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한편 학살의 주범인 아와미 연맹의 활동을 금지했다.
무지부르 사후의 정치 혼란은 지아우르 라흐만이라는 군부 독재자가 방글라데시 국민당을 창당하고 새로운 일당독재 정권을 형성하면서 수습되는 듯 했으나, 그 역시 후세인 무함마드 에르샤드의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이후에는 에르샤드의 자티야당이 일당독재를 이어갔다.
80년대 방글라데시를 지배한 에르샤드 군사정권은 1990년에 실각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함께 에르샤드 정권의 여당인 자티야당은 몰락하고, 무지부르의 딸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과 지아우르 라흐만의 부인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국민당이 양당제를 형성했다.
그 후 아와미 연맹과 국민당 간에 2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있었으나, 2006년 아와미 연맹 지지자들의 시위를 칼레다 지아 내각이 무력진압 하려다 실패하면서 2년 동안 과도내각이 이어졌다.
2008년 12월 17일 0시 1분부터 국가 비상사태가 해제되었는대, 2년간의 비상사태가 해제된후 방글라데시에서 7년 만에 처음 치러진 87%의 선거율을 기록한 총선에서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이끄는 연정이 의회 총 300석 중 245석을 확보한 반면, 제1야당으로 떨어진 국민당은 3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후 셰이크 하시나의 아와미 연맹은 총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2024년까지 장기집권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칼레다 지아 전 총리가 체포되자 국민당은 아예 총선 불참을 택하고, 로샨 에르샤드[3]의 자타야당이 제1야당으로 부활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셰이크 하시나의 장기집권이 이어지는 듯 했으나, 2024년 반정부 시위를 무력진압 하려다 대학살을 야기하면서 역풍을 초래하여 결국 하시나는 실각하여 인도로 망명했다.
이후 경제학자이자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가로서 명망이 높은 무함마드 유누스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출범하여 차기 총선 전까지 방글라데시를 이끌게 되었는데, 과도내각은 칼레다 지아를 비롯한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한편 학살의 주범인 아와미 연맹의 활동을 금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