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수상자 로알 아문센 Roald Amundsen | |
본명 | 로알 엥엘브렉트 그라브닝 아문센 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 |
출생 | |
실종 혹은 사망 | 1928년 6월 18일 (당시 55세) 바렌츠해 |
국적 | |
수상 | 허바드 메달 (1907) 프란츠 요제프 훈장 (1907) 찰스 P. 데일리 메달 (1912) 베가 메달 (1913) 의회 명예 황금 훈장 (1928) |
직업 | 탐험가, 모험가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의학도에서 항해사로2.3. 벨지카 호 원정2.4. 북서항로 개척 준비2.5. 북서항로 항해2.6. 북극점 정복 계획과 난센의 프람 호2.7. 운명의 장난, 피어리와 쿡의 북극점 도달 소식2.8. 마데이라에서의 선언2.9. 남극 상륙2.10. 식량 저장소 설치2.11. 첫 번째 시도와 실패2.12. 결전의 날, 남극점을 향한 재출발2.13. 악마의 춤판2.14. 인류 최초의 도달2.15. 완벽한 귀환2.16. 승리와 비극2.17.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문센2.18. 북동항로 개척 (1918-1920)2.19. 경제적 파산2.20. 선박에서 비행기로2.21. N-24와 N-25 비행정2.22. 움베르토 노빌레와의 갈등2.23. 마지막 구출 작전과 최후
3. 탐험 철학3.1. 장비와 기술
4. 라이벌 로버트 스콧5. 평가6. 여담1. 개요[편집]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1]"나는 결코 모험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탐험을 했을 뿐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위대한 극지 탐험가이자 항해사.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으며,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를 최초로 완주하고, 북극점 상공 비행까지 성공하며 지구의 양 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어디를 먼저 갔다'는 선착순의 기록을 넘어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른바 '영웅적 극지 탐험 시대(Heroic Age of Antarctic Exploration)'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며, 당시 대영제국을 필두로 한 유럽 열강들이 '신사적인 아마추어리즘'과 '의지력'에 호소할 때, 아문센은 철저하게 과학적 데이터, 현지 적응, 그리고 실용성에 기반한 현대적 탐험 기법을 제시했다.
아문센 이전의 탐험, 특히 영국식 탐험은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 정신의 승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고난을 겪는 것 자체를 '준비 부족의 증거'로 보았다. 그는 이누이트(에스키모)로부터 개썰매 운용법과 가죽 옷 제작법을 배웠고, 비타민 C의 결핍이 괴혈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터득하여 식단을 구성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유럽 사교계나 탐험계에서 "비신사적이다", "개나 부리는 야만적인 방식이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고 남극점에서 돌아왔다. 반면 그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스콧은 구시대적인 운송 수단(포니, 모터 썰매)과 인력 거치(Man-hauling)[2]에 고집하다 대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아문센이 활약하던 시기는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1905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신생 국가였던 노르웨이에게 아문센의 업적은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그는 프리드요프 난센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를 극지 탐험의 종주국으로 격상시켰으며, 그가 사용했던 탐험선 프람 호는 현재 오슬로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국가적 보물로 취급받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갈리기도 한다. 남극점으로 기수를 돌릴 때 투자자들과 대원들에게 끝까지 비밀을 유지했던 '기만전술', 그리고 남극점 정복 과정에서 보여준 철저하리만치 냉정한 판단력(식량이 부족해지자 지친 썰매개를 잡아 다른 개와 대원들에게 먹인 것 등)은 후대에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대원들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체면보다 실질적인 효율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는 가장 현대적인 탐험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로알 아문센(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은 1872년 7월 16일, 노르웨이 남동부의 항구 도시 프레드릭스타드(Fredrikstad) 근처의 보르게(Borg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시 노르웨이에서 손꼽히는 선주(Shipowner) 및 해운업 가문이었다. 아버지 옌스 아문센(Jens Amundsen)은 12척의 배를 소유한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한나 사흘크비스트(Hanna Sahlqvist)는 엄격하고 교육열이 높은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이었다.
아문센은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위로 세 형들은 가문의 가업을 잇거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막내인 로알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려한 사교계 행사나 가문의 사업 회의보다는 프레드릭스타드의 거친 해안가에서 파도를 바라보는 것을 즐겼으며, 북해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체력을 단련하는 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소년 아문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책 한 권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의 탐험가 존 프랭클린 경의 북서항로 탐험 실패기였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수백 명의 대원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죽어갔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에 공포를 느꼈겠지만,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프랭클린의 실패에서 '공포'가 아닌 '도전'과 '교훈'을 읽어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말했다.
아문센은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위로 세 형들은 가문의 가업을 잇거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를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막내인 로알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려한 사교계 행사나 가문의 사업 회의보다는 프레드릭스타드의 거친 해안가에서 파도를 바라보는 것을 즐겼으며, 북해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체력을 단련하는 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했다.
소년 아문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책 한 권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의 탐험가 존 프랭클린 경의 북서항로 탐험 실패기였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수백 명의 대원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죽어갔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에 공포를 느꼈겠지만,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프랭클린의 실패에서 '공포'가 아닌 '도전'과 '교훈'을 읽어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랭클린 경이 겪은 고난의 서술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그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신발 가죽을 삶아 먹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장차 나도 저런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는 탐험가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3]
그는 프랭클린 원정대가 왜 실패했는지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왜 그들은 현지인의 방식을 무시했을까?", "왜 무거운 은식기와 서구식 의복을 고집했을까?" 등의 질문은 훗날 그가 이누이트의 생존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
탐험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뒤, 아문센은 자신의 몸을 '극지용 병기'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르웨이의 혹독한 겨울에도 침대에서 자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딱딱한 바닥에 얇은 담요 한 장만 덮고 자는 습관을 들였다. 어머니가 걱정하여 창문을 닫으려 하면, 그는 "이것은 미래의 탐험을 위한 훈련"이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또한 그는 축구와 같은 단체 운동보다는 장거리 스키와 행군에 매진했다. 당시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탐험가 프리드요프 난센이 그린란드 횡단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문센은 난센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혼자서 수십 킬로미터의 눈길을 헤치며 산맥을 넘나들었는데, 한 번은 심한 눈보라 속에 고립되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경험조차 "자연의 위력을 체험한 귀중한 수업"이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아문센의 앞길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한나 여사는 막내아들이 거친 바다나 위험한 극지방에서 목숨을 거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녀는 아문센이 점잖은 의사가 되어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효심이 깊었던(혹은 어머니의 권위가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아문센은 결국 자신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1890년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 대학교 의예과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아문센은 그야말로 '영혼 없는 모범생'이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의학 서적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항상 북서항로의 지도와 남극의 빙벽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교과서 사이에 탐험 지도를 끼워두고 외우기 일쑤였으며, 해부학 실습을 할 때조차 "이 근육이 장거리 행군에서 어떻게 작용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산으로 달려가 스키를 탔고, 군 복무 시절에는 남들이 기피하는 혹한기 훈련을 자원해서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아문센은 군대에서 실시한 스키 행군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차지해 상관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아문센이 의대 2학년이 되던 1893년, 그의 인생을 묶어두었던 가장 큰 구속력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이었으나, 동시에 그를 평생의 꿈으로 인도하는 해방의 종소리이기도 했다. 장례식을 마친 아문센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학교를 자퇴했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자서전에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나는 마침내 의학 서적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가문의 막대한 유산 중 자신의 몫을 챙겨 본격적인 탐험 준비에 돌입한다. 하지만 그는 무작정 탐험대를 조직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탐험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문센은 곧바로 선원이 되어 바닥부터 항해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범선의 선저 바닥을 닦고, 돛대 위를 기어오르며, 거친 선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바다의 법칙을 몸소 체험했다.
이 시기에 그는 "탐험가는 용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선원이자 지도 제작자, 그리고 뛰어난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훗날 아문센이 보여준 그 집요한 완벽주의는 바로 이 '준비기'에 형성된 것이었다.
아문센이 청년기를 보낸 19세기 말은 노르웨이 민족주의가 들끓던 시기였다. 당시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연합 왕국 상태였으나 주권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드쇼프 난센과 같은 탐험가의 업적은 단순한 스포츠나 과학적 성취를 넘어 '노르웨이인의 강인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아문센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탐험에서 성공하는 것이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조국 노르웨이가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서 인정받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는 훗날 그가 남극점으로 목표를 수정했을 때, 왜 그렇게 '노르웨이 국기'를 꽂는 행위에 집착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2.2. 의학도에서 항해사로[편집]
아문센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포경선 '마그달레나(Magdalena) 호'를 비롯한 여러 척의 배를 타며 북극해의 거친 파도와 싸웠다. 그는 단순히 항해 기술만 배운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계급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선원들의 심리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이 시기 아문센이 보여준 성실함은 유별났다. 그는 남들이 쉬는 시간에 천체 관측 기구인 육분의 사용법을 익혔고, 기상 데이터를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1895년에는 이등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본격적인 '프로 탐험가'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의대를 자퇴하고 항해사가 된 아문센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은 당대 노르웨이 최고의 영웅 프리드쇼프 난센이었다. 1896년, 난센이 프람 호를 타고 북극해 횡단에 성공하고 돌아왔을 때, 아문센은 군중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결심했다. "나도 저 배(프람 호)를 타고 지구의 끝으로 가겠다."고
아문센은 난센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난센은 젊은 아문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 어린 집념을 보고 그를 높게 평가했다. 난센은 그에게 "탐험가는 과학자여야 하며, 동시에 숙련된 노동자여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고, 이는 평생 아문센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던 중, 벨기에의 탐험가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Adrien de Gerlache)가 남극 탐험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노르웨이 내부의 탐험 기회는 이미 유명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아문센은 시야를 넓혀 외국 원정대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의학적 배경과 숙련된 항해 기술, 그리고 스키 실력을 어필하는 편지를 보냈다. 제를라슈는 이 젊고 유능한 노르웨이 청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를 벨지카(Belgica) 호의 일등 항해사로 임명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남극 월동 기록을 세우게 될 원정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의 아문센은 단순한 '철없는 꿈을 쫓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인내했으며, 자유를 얻은 순간 자신의 목표를 위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의대 시절 배운 지식과 항해사 시절 익힌 현장 감각의 결합은, 훗날 그가 '준비의 화신'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의 아들인 의대생 로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지구상의 마지막 미지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단련된 '인간 병기'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 시기 아문센이 보여준 성실함은 유별났다. 그는 남들이 쉬는 시간에 천체 관측 기구인 육분의 사용법을 익혔고, 기상 데이터를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1895년에는 이등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본격적인 '프로 탐험가'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의대를 자퇴하고 항해사가 된 아문센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은 당대 노르웨이 최고의 영웅 프리드쇼프 난센이었다. 1896년, 난센이 프람 호를 타고 북극해 횡단에 성공하고 돌아왔을 때, 아문센은 군중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결심했다. "나도 저 배(프람 호)를 타고 지구의 끝으로 가겠다."고
아문센은 난센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난센은 젊은 아문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 어린 집념을 보고 그를 높게 평가했다. 난센은 그에게 "탐험가는 과학자여야 하며, 동시에 숙련된 노동자여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고, 이는 평생 아문센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던 중, 벨기에의 탐험가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Adrien de Gerlache)가 남극 탐험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노르웨이 내부의 탐험 기회는 이미 유명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아문센은 시야를 넓혀 외국 원정대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의학적 배경과 숙련된 항해 기술, 그리고 스키 실력을 어필하는 편지를 보냈다. 제를라슈는 이 젊고 유능한 노르웨이 청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를 벨지카(Belgica) 호의 일등 항해사로 임명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남극 월동 기록을 세우게 될 원정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의 아문센은 단순한 '철없는 꿈을 쫓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인내했으며, 자유를 얻은 순간 자신의 목표를 위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의대 시절 배운 지식과 항해사 시절 익힌 현장 감각의 결합은, 훗날 그가 '준비의 화신'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의 아들인 의대생 로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지구상의 마지막 미지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단련된 '인간 병기'로 거듭나고 있었다.
2.3. 벨지카 호 원정[편집]
아문센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꼽으라면 단연 벨지카(Belgica) 호 원정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원정은 아문센에게 단순한 경력을 넘어, 극지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실전 압축 강의와도 같았다. 당시 25세였던 아문센은 무보수 일등 항해사로 자원하여 이 위험천만한 여정에 몸을 실었다.
19세기 말, 남극은 인류에게 달 뒷면보다도 생소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벨기에의 해군 장교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Adrien de Gerlache)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남극 자석 남극점(Magnetic South Pole) 근처를 탐사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다.
이들이 사용한 배 '벨지카 호'는 원래 '파트리아(Patria)'라는 이름의 포경선이었다. 길이 30m, 폭 6.5m의 작은 목조선이었으나, 얼음의 압력을 견디도록 선체가 보강되었다. 하지만 이 배는 훗날 남극의 무자비한 유빙 속에 갇히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아문센은 이 배의 구조를 뜯어보며 극지용 선박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4]
벨지카 호 원정대는 묘하게도 다국적 군단이었다. 벨기에인 대장 제를라슈를 필두로, 루마니아인 생물학자 에밀 라코비차, 폴란드인 지질학자 헨리크 아르츠토프스키, 그리고 미국인 의사 프레데릭 쿡(Frederick Cook)이 탑승해 있었다.
여기서 아문센은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인 프레데릭 쿡을 만난다. 쿡은 이미 로버트 피어리와 함께 그린란드를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는 아문센에게 에스키모의 생존 방식, 즉 가죽 옷의 효율성과 개썰매의 잠재력을 설파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에스키모를 '미개인'이라 무시했지만, 쿡과 아문센은 그들의 방식이야말로 극지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정답임을 직감했다.
1898년 2월, 벨지카 호는 예상보다 늦게 남극권에 진입했다. 제를라슈 대장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고집했으나,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2월 28일, 벨지카 호는 벨링스하우젠해(Bellingshausen Sea)의 거대한 유빙 사이에 끼어버렸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고, 바다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배를 옥죄었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에서 겨울을 나는 원정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계획된 동면이 아닌 '조난'에 가까웠다. 대원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년이 넘는 극야(Polar Night)를 맞이하게 된다. 태양이 뜨지 않는 수개월 동안 대원들은 심각한 우울증과 폐쇄 공포증에 시달렸다.
가장 큰 적은 추위가 아니라 괴혈병이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부족해지자 대원들의 잇몸이 무너지고 피부에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를라슈 대장조차 몸져누웠고, 심지어 노르웨이인 선원 한 명은 심장 질환과 괴혈병이 겹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의사 프레데릭 쿡이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펭귄과 물개 고기를 날로 먹어야 합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펭귄 고기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혐오 식품이었으나, 쿡은 그 고기 안에 비타민 C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5]
아문센은 주저 없이 펭귄 고기를 씹어 삼켰다. 하지만 보수적인 제를라슈 대장은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고기를 입에 댔다. 아문센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권위와 체면보다 생존이 우선이다"라는 철저한 실용주의를 뼈에 새겼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쿡 의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그 얼음판 위에서 시체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1899년 1월, 여름이 왔음에도 유빙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배가 얼음에 눌려 파손될 위기에 처하자, 쿡과 아문센은 대원들을 독려해 거대한 얼음 톱으로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수 주 동안 수백 미터의 얼음을 잘라내는 사투 끝에, 3월 14일 벨지카 호는 마침내 탁 트인 바다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벨지카 호 원정 동안 아문센은 수많은 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에는 단순히 날씨뿐만 아니라, 식량 배분 방식, 대원들의 심리 변화 관리, 옷의 재질에 따른 보온성 차이, 유빙의 이동 속도 등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특히 그는 영국식 탐험의 허례허식을 목격하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무거운 모직 코트가 땀에 젖어 얼어붙으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개썰매 없이 인력으로 썰매를 끄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데이터로 확인한 것이다. 이 15개월간의 '지옥 훈련'은 훗날 그가 남극점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가장 강력한 지분이 되었다.[6][7]
19세기 말, 남극은 인류에게 달 뒷면보다도 생소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벨기에의 해군 장교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Adrien de Gerlache)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남극 자석 남극점(Magnetic South Pole) 근처를 탐사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다.
이들이 사용한 배 '벨지카 호'는 원래 '파트리아(Patria)'라는 이름의 포경선이었다. 길이 30m, 폭 6.5m의 작은 목조선이었으나, 얼음의 압력을 견디도록 선체가 보강되었다. 하지만 이 배는 훗날 남극의 무자비한 유빙 속에 갇히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아문센은 이 배의 구조를 뜯어보며 극지용 선박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4]
벨지카 호 원정대는 묘하게도 다국적 군단이었다. 벨기에인 대장 제를라슈를 필두로, 루마니아인 생물학자 에밀 라코비차, 폴란드인 지질학자 헨리크 아르츠토프스키, 그리고 미국인 의사 프레데릭 쿡(Frederick Cook)이 탑승해 있었다.
여기서 아문센은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인 프레데릭 쿡을 만난다. 쿡은 이미 로버트 피어리와 함께 그린란드를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는 아문센에게 에스키모의 생존 방식, 즉 가죽 옷의 효율성과 개썰매의 잠재력을 설파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에스키모를 '미개인'이라 무시했지만, 쿡과 아문센은 그들의 방식이야말로 극지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정답임을 직감했다.
1898년 2월, 벨지카 호는 예상보다 늦게 남극권에 진입했다. 제를라슈 대장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고집했으나,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2월 28일, 벨지카 호는 벨링스하우젠해(Bellingshausen Sea)의 거대한 유빙 사이에 끼어버렸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고, 바다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배를 옥죄었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에서 겨울을 나는 원정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계획된 동면이 아닌 '조난'에 가까웠다. 대원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년이 넘는 극야(Polar Night)를 맞이하게 된다. 태양이 뜨지 않는 수개월 동안 대원들은 심각한 우울증과 폐쇄 공포증에 시달렸다.
가장 큰 적은 추위가 아니라 괴혈병이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부족해지자 대원들의 잇몸이 무너지고 피부에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를라슈 대장조차 몸져누웠고, 심지어 노르웨이인 선원 한 명은 심장 질환과 괴혈병이 겹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의사 프레데릭 쿡이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펭귄과 물개 고기를 날로 먹어야 합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펭귄 고기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혐오 식품이었으나, 쿡은 그 고기 안에 비타민 C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5]
아문센은 주저 없이 펭귄 고기를 씹어 삼켰다. 하지만 보수적인 제를라슈 대장은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고기를 입에 댔다. 아문센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권위와 체면보다 생존이 우선이다"라는 철저한 실용주의를 뼈에 새겼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쿡 의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그 얼음판 위에서 시체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1899년 1월, 여름이 왔음에도 유빙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배가 얼음에 눌려 파손될 위기에 처하자, 쿡과 아문센은 대원들을 독려해 거대한 얼음 톱으로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수 주 동안 수백 미터의 얼음을 잘라내는 사투 끝에, 3월 14일 벨지카 호는 마침내 탁 트인 바다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벨지카 호 원정 동안 아문센은 수많은 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에는 단순히 날씨뿐만 아니라, 식량 배분 방식, 대원들의 심리 변화 관리, 옷의 재질에 따른 보온성 차이, 유빙의 이동 속도 등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특히 그는 영국식 탐험의 허례허식을 목격하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무거운 모직 코트가 땀에 젖어 얼어붙으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개썰매 없이 인력으로 썰매를 끄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데이터로 확인한 것이다. 이 15개월간의 '지옥 훈련'은 훗날 그가 남극점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가장 강력한 지분이 되었다.[6][7]
2.4. 북서항로 개척 준비[편집]
로알 아문센이 벨지카 호 원정에서 돌아온 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오직 하나, 인류의 미답지였던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의 완벽한 정복이었다. 당시 북서항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꿈의 항로로 불렸으나, 수많은 탐험가가 얼음 사이에 갇혀 목숨을 잃은 '탐험가의 무덤'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전의 영국식 대형 원정대와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과거 대영제국의 해군은 수백 톤급의 거대한 군함을 개조해 북서항로에 도전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크기와 막대한 보급품이 생존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지만, 아문센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북서항로의 핵심적인 장애물은 거대한 빙산뿐만 아니라, 수심이 극도로 낮고 복잡한 연안 지형이었다. 덩치가 큰 배들은 얕은 바다에서 좌초되기 일쑤였고, 한 번 얼음에 갇히면 그 무게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아문센은 "수심이 얕은 곳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고, 얼음의 압력을 견딜 만큼 견고하면서도, 소수의 정예 인원이 운용할 수 있는 작은 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당시 탐험계의 상식을 뒤엎는 발상이었는데, 대양 항해에 작은 고기잡이배를 쓰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문센은 벨지카 호에서의 경험을 통해 대규모 인원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비효율성과 질병(괴혈병)의 위험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01년, 아문센은 자신의 전 재산과 대출금을 쏟아부어 한 척의 배를 구입한다. 그것이 바로 탐험사에 길이 남을 요아(Gjøa) 호였다.
아문센은 이 배를 구입한 후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인 개조에 착수했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13마력짜리 단기통 석유 엔진을 장착한 것이었다. 무풍지대나 얼음 사이의 좁은 틈을 통과할 때 돛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아문센은 보조 동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선체 외부에 '아이스 스킨(Ice skin)'이라 불리는 강철판과 단단한 목재를 덧대어 얼음의 압착으로부터 배를 보호하도록 했다.
아문센의 준비 과정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똥꼬쇼'의 연속이었다. 노르웨이 정부의 지원은 미비했고, 대부분의 자금은 개인적인 빚으로 충당해야 했다. 아문센은 선박 개조비, 식량 구입비, 과학 장비 대여료 등으로 인해 엄청난 부채에 시달렸다.
원정 출발 직전인 1903년 6월,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채권자들이 요아 호를 압류하여 빚을 강제로 회수하겠다는 최후통보를 보낸 것이다. 만약 배를 압류당한다면 아문센의 꿈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판이었다. 여기서 아문센은 탐험가다운(?) 결단을 내린다.
1903년 6월 16일 밤, 폭우가 쏟아지는 오슬로 항구에서 아문센과 6명의 대원들은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닻을 올리고 도망치듯 출항했다. [8] 이 일화는 아문센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규범이나 절차조차 뛰어넘는 냉철한 실용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아문센은 요아 호의 좁은 공간에 맞추어 단 6명의 대원만을 선발했다. 이는 당시 수십 명씩 떼거리로 몰려다니던 영국식 원정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각자 항해, 요리, 기계 수리, 과학 관측 등 1인 다역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특히 아문센은 이번 탐험의 명분을 단순한 '항로 개척'에 두지 않았다. 당시 학계의 큰 관심사였던 '자기 북극(Magnetic North Pole)'의 이동을 측정하겠다는 과학적 목표를 내세웠다. 이는 후원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아문센은 독일의 지구자기장 전문가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습득했다. "나는 단순히 길을 찾는 모험가가 아니라,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과학 탐험가다"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원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아문센은 벨지카 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량 준비에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아문센은 당시 최신 이론에 따라 비타민이 보존된 특수 통조림을 주문 제작했으며 극지방의 추위 속에서 석유 엔진이 얼어붙지 않도록 특수 배합된 연료를 준비했다. 또한 출항 전 이미 에스키모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개썰매가 말(Pony)이나 인력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결국 이 47톤짜리 작은 배는 3년 뒤, 세계 최초로 북서항로를 완주하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다. 대형 선박들이 얼음에 짓눌려 침몰할 때, 요아 호는 마치 코르크 마개처럼 얼음 위로 떠오르거나 좁은 수로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아문센의 이 '작은 배 전략'은 훗날 남극점 정복 시 사용된 프람 호의 운용 전략으로 이어졌으며, 현대 극지 탐험에서 '최적화된 장비가 물량 공세보다 중요하다'는 금언을 남기게 되었다. 요아 호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의 프람 박물관 옆에 별도의 관을 마련하여 영구 보존되어 있으며, 오늘도 수많은 관람객에게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아문센의 철학을 웅변하고 있다.
과거 대영제국의 해군은 수백 톤급의 거대한 군함을 개조해 북서항로에 도전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크기와 막대한 보급품이 생존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지만, 아문센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북서항로의 핵심적인 장애물은 거대한 빙산뿐만 아니라, 수심이 극도로 낮고 복잡한 연안 지형이었다. 덩치가 큰 배들은 얕은 바다에서 좌초되기 일쑤였고, 한 번 얼음에 갇히면 그 무게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 채 파괴되었다.
아문센은 "수심이 얕은 곳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고, 얼음의 압력을 견딜 만큼 견고하면서도, 소수의 정예 인원이 운용할 수 있는 작은 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당시 탐험계의 상식을 뒤엎는 발상이었는데, 대양 항해에 작은 고기잡이배를 쓰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문센은 벨지카 호에서의 경험을 통해 대규모 인원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비효율성과 질병(괴혈병)의 위험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01년, 아문센은 자신의 전 재산과 대출금을 쏟아부어 한 척의 배를 구입한다. 그것이 바로 탐험사에 길이 남을 요아(Gjøa) 호였다.
아문센은 이 배를 구입한 후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인 개조에 착수했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13마력짜리 단기통 석유 엔진을 장착한 것이었다. 무풍지대나 얼음 사이의 좁은 틈을 통과할 때 돛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아문센은 보조 동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선체 외부에 '아이스 스킨(Ice skin)'이라 불리는 강철판과 단단한 목재를 덧대어 얼음의 압착으로부터 배를 보호하도록 했다.
아문센의 준비 과정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똥꼬쇼'의 연속이었다. 노르웨이 정부의 지원은 미비했고, 대부분의 자금은 개인적인 빚으로 충당해야 했다. 아문센은 선박 개조비, 식량 구입비, 과학 장비 대여료 등으로 인해 엄청난 부채에 시달렸다.
원정 출발 직전인 1903년 6월,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채권자들이 요아 호를 압류하여 빚을 강제로 회수하겠다는 최후통보를 보낸 것이다. 만약 배를 압류당한다면 아문센의 꿈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판이었다. 여기서 아문센은 탐험가다운(?) 결단을 내린다.
1903년 6월 16일 밤, 폭우가 쏟아지는 오슬로 항구에서 아문센과 6명의 대원들은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닻을 올리고 도망치듯 출항했다. [8] 이 일화는 아문센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규범이나 절차조차 뛰어넘는 냉철한 실용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아문센은 요아 호의 좁은 공간에 맞추어 단 6명의 대원만을 선발했다. 이는 당시 수십 명씩 떼거리로 몰려다니던 영국식 원정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각자 항해, 요리, 기계 수리, 과학 관측 등 1인 다역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특히 아문센은 이번 탐험의 명분을 단순한 '항로 개척'에 두지 않았다. 당시 학계의 큰 관심사였던 '자기 북극(Magnetic North Pole)'의 이동을 측정하겠다는 과학적 목표를 내세웠다. 이는 후원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아문센은 독일의 지구자기장 전문가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습득했다. "나는 단순히 길을 찾는 모험가가 아니라,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과학 탐험가다"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원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아문센은 벨지카 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량 준비에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아문센은 당시 최신 이론에 따라 비타민이 보존된 특수 통조림을 주문 제작했으며 극지방의 추위 속에서 석유 엔진이 얼어붙지 않도록 특수 배합된 연료를 준비했다. 또한 출항 전 이미 에스키모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개썰매가 말(Pony)이나 인력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결국 이 47톤짜리 작은 배는 3년 뒤, 세계 최초로 북서항로를 완주하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다. 대형 선박들이 얼음에 짓눌려 침몰할 때, 요아 호는 마치 코르크 마개처럼 얼음 위로 떠오르거나 좁은 수로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아문센의 이 '작은 배 전략'은 훗날 남극점 정복 시 사용된 프람 호의 운용 전략으로 이어졌으며, 현대 극지 탐험에서 '최적화된 장비가 물량 공세보다 중요하다'는 금언을 남기게 되었다. 요아 호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의 프람 박물관 옆에 별도의 관을 마련하여 영구 보존되어 있으며, 오늘도 수많은 관람객에게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아문센의 철학을 웅변하고 있다.
2.5. 북서항로 항해[편집]
대서양에서 캐나다 북극 제도를 거쳐 태평양으로 넘어가는 북서항로는 15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유럽 선주들과 탐험가들에게는 '성배'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 길만 뚫린다면 남미의 마젤란 해협이나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갈 필요 없이 아시아로 가는 지름길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경로는 수천 개의 섬과 미로 같은 수로, 그리고 무엇보다 1년 내내 녹지 않는 거대한 해빙(Pack Ice)으로 가득 찬 죽음의 길이었다.
아문센 이전에도 수많은 거물급 탐험가들이 이곳에 도전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845년 영국의 존 프랭클린 경이 이끈 원정대였다. 당시 최신식 증기선 2척과 129명의 정예 대원을 거느렸던 프랭클린 원정대는 북서항로 어딘가에서 전멸했고, 이후 수십 년간 이들을 찾기 위한 구조 작업 자체가 북극 탐험의 역사가 되었을 정도였다. 소년 시절 이 비극을 읽으며 자란 아문센에게 북서항로 정복은 단순한 기록 경신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숙원을 해결하는 성스러운 과업이었다.
당시 대영제국 해군을 비롯한 주류 탐험계의 상식은 "얼음을 깨고 나갈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배"였다. 하지만 아문센은 벨지카 호 원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큰 배는 얼음에 갇히면 탈출할 수 없지만, 작고 가벼운 배는 얕은 연안을 타고 얼음을 피해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배는 겨우 47톤급의 청어잡이용 목선인 요아 호였다.[9] 당시 사람들은 "저런 조룻배를 타고 북서항로에 가는 것은 자살 행위"라며 비웃었으나, 아문센은 여기에 13마력짜리 보조 엔진을 장착하고 철저하게 개조했다. 또한, 그는 이 원정의 명분을 '지자기(Terrestrial Magnetism) 북극점 측정'이라는 과학적 목적으로 포장하여 노르웨이 정부와 민간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으는 수완을 발휘했다.
1903년 6월 16일 밤, 아문센과 6명의 정예 대원은 오슬로 항구를 몰래 빠져나갔다. 이는 낭만적인 연출이 아니라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10] "성공해서 돌아오면 빚은 다 갚을 수 있다"는 아문센 특유의 배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요아 호에는 아문센을 포함해 단 7명만이 탑승했다. 이는 스콧이나 프랭클린이 수십 명, 수백 명을 동원한 것과 대조적이다. 인원이 적으면 식량 소비가 적고, 의사결정이 빠르며, 위기 상황에서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아문센의 계산이었다.
요아 호는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 북극 제도의 복잡한 수로로 들어섰다. 1903년 8월, 이들은 과거 프랭클린 원정대가 실종되었던 인근 해역인 킹 윌리엄 섬(King William Island) 주변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아문센은 배를 정박시키고 '요아 하벤(Gjoa Haven)'이라 이름 붙인 천연 항구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단순히 추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22개월간 머물며 지자기 관측이라는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후일 남극 정복의 밑거름이 될 결정적인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지역의 원주민인 네칠릭 에스키모(Netsilik Inuit)들이었다.
1903년 9월, 요아(Gjøa) 호는 북서항로의 험난한 얼음길을 헤치고 킹 윌리엄 섬의 남동쪽 연안에 위치한 천혜의 항구, '요아 하벤(Gjøa Haven)'에 닻을 내린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자력(磁力) 관측을 위해 2년 넘게 체류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때 그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다. 바로 현지 원주민인 네칠릭 이누이트(Netsilik Inuit) 부족과의 만남이다.
당시 서구 탐험가들에게 원주민은 대개 '미개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 혹은 '구걸이나 하는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실용주의의 화신이었던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수천 년간 이 지옥 같은 동토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지혜가 현대 과학보다 훨씬 우월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아문센은 그들을 관찰하며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는 단순한 인류학적 호기심을 넘어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극지를 정복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아문센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의 의복이었다. 당시 영국 탐험가들은 두꺼운 모직(Wool) 코트와 면직물 겹쳐 입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모직은 땀에 젖으면 무거워지고, 그 땀이 얼어붙으면 그대로 체온을 뺏는 '얼음 갑옷'이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이 입는 순록 가죽 옷에 주목했다.
그들의 가죽 옷은 헐렁하게 만들어져 공기층을 형성했고, 하단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대신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위로 순환하게 설계되어 있었으며 털이 안쪽으로 향하는 속옷과 털이 바깥으로 향하는 겉옷을 겹쳐 입음으로써, 영하 50도의 혹한에서도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즉시 영국식 모직 코트를 내다 버리고 이누이트 여인들에게 부탁해 대원들의 가죽 옷을 제작했다. 훗날 남극점에서 스콧의 대원들이 땀에 젖어 뻣뻣하게 굳은 모직 옷 때문에 동사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때, 아문센의 대원들이 쾌적하게 스키를 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11]
아문센은 요아 하벤에서 네칠릭 부족으로부터 개썰매(Sled dogs) 운용의 정수를 전수받는다. 단순히 개가 썰매를 끄는 것뿐만 아니라, 개들의 서열 정리, 먹이 급여 방식, 그리고 채찍을 이용한 방향 지시 등을 체득했다.
특히 그는 이누이트들이 개를 대하는 태도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 개는 단순한 짐꾼이 아니라, 유사시에는 식량이 될 수도 있고(물론 아문센은 이를 매우 계획적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사람보다 훨씬 적은 식량으로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극지 최적화 생물체라는 점을 간파했다. 아문센은 네칠릭 부족에게서 개 수십 마리를 구입하고 그들과 함께 사냥하며 개썰매 조종술을 마스터했는데, 이는 훗날 스콧이 고집했던 '인력 거치(Man-hauling)'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동력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의 주거 형태인 이글루 건축법도 배웠다. 캔버스 텐트는 극지의 강풍에 취약하고 보온이 안 되지만, 눈 벽돌로 쌓은 이글루는 내부 온도를 영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남극 원정에서는 이동 속도를 위해 텐트를 주로 사용했지만, 이글루 건축 경험은 대원들에게 '눈'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법을 완벽히 이해시켰다.
식생활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이 생선과 물개 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것을 보고, 이것이 괴혈병 예방에 탁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12] 그는 원주민들과 함께 바다표범 사냥을 나가며 고기를 비축했고, 서구식 가공식품인 '페미컨(Pemmican)'에 의존하는 대신 현지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아문센은 네칠릭 부족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바늘, 칼, 성냥 같은 서구의 도구들을 이누이트의 가죽 제품이나 지식과 맞바꿨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이누이트 언어를 상당 부분 습득했으며, 그들의 사회 구조와 종교관까지 깊이 있게 관찰하여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겼다.
이 2년간의 기록은 훗날 인류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외부 세계와 접촉이 거의 없던 시절의 네칠릭 부족의 삶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자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훗날 "나의 진정한 극지 대학교는 킹 윌리엄 섬의 네칠릭 부족이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이 시기의 경험을 자신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으로 여겼다.
당시 유럽의 보수적인 탐험계는 아문센의 이런 행보를 곱지 않게 보았다. "대영제국의 장교라면 품위 있게 문명의 옷을 입고 고난을 이겨내야지, 어떻게 야만인처럼 개를 부리고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느냐"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문센에게 '체면'은 '생존과 성공'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이러한 실용적 사고방식은 훗날 스콧과의 남극점 경주에서 결정적인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된다. 스콧은 끝까지 '신사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말(Pony)과 모터 썰매를 가져갔다가 모두 실패하고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끌다 죽어갔지만, 아문센은 네칠릭에게 배운 대로 개썰매를 타고 스키를 지치며 마치 소풍을 가듯 남극점을 정복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13]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누이트들을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이라며 무시할 때, 아문센은 그들을 "수천 년간 북극에서 살아남은 최고의 전문가"로 대우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공동체에 들어가 핵심 기술들을 흡수했다.
그는 유럽식 모직 코트는 땀에 젖으면 얼어붙어 체온을 뺏지만, 순록 가죽으로 만든 이누이트식 의복은 통기성이 좋고 가벼우며 보온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문센은 이후 평생 동안 극지에서 가죽 옷만을 고집했다. 기계나 말이 아닌, 극지 환경에 최적화된 개들을 어떻게 다루고 먹이는지를 배웠다. 이는 훗날 남극점에서 스콧의 포니 부대를 압도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다. 텐트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전한 얼음집 짓는 법을 익혔다. 신선한 고기를 생으로 먹음으로써 비타민을 섭취하고 괴혈병을 예방하는 법을 생활화했다.
이 시기의 학습은 아문센을 단순한 '항해사'에서 '극지 전문가'로 진화시켰다. 그는 서구 문명의 자존심을 버리고 철저히 현지에 적응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이는 훗날 인류 최초의 남극점 도달이라는 결과로 증명된다.
1905년 8월, 다시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요아 호는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들이 지나간 수로는 수심이 너무 얕아 대형 선박이라면 진작에 좌초되었을 곳이었지만, 흘수가 깊지 않은 요아 호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긁으며 통과했다.
마침내 1905년 8월 26일, 요아 호는 서쪽에서 오던 미국 포경선 '찰스 핸슨(Charles Hansson) 호'와 마주쳤다. 이는 대서양에서 출발한 배가 태평양 쪽의 배와 만났음을 의미했고, 사실상 북서항로의 완성을 뜻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문센은 일기장에 "북서항로가 뚫렸다. 나의 꿈이 이루어졌다"라고 간결하지만 묵직한 감동을 기록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요아 호는 다시 얼음에 갇혀 1905년의 겨울을 알래스카 인근에서 한 번 더 보내야 했다. 성격 급한 아문센은 이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개썰매를 타고 800km를 달려 알래스카의 이글(Eagle) 시에 있는 전신국까지 가서 노르웨이 국왕에게 보고 전보를 쳤다.[14]
1906년, 마침내 요아 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성하며 북서항로 최초 완주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아문센은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를 쫓던 빚쟁이들은 이제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투자자로 변해 있었다.
이 원정의 성공은 단순히 항로 하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소규모 정예 인원의 효율성을 증명했으며 현지 원주민의 기술이 근대 과학 기술보다 극지에서 유용함을 입증했다. 지자기 북극점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여 과학계에도 공헌했다.
무엇보다 아문센 본인에게는 "나의 방식이 옳다"라는 확고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제 그의 시선은 지구의 가장 끝,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쪽의 정점인 남극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문센 이전에도 수많은 거물급 탐험가들이 이곳에 도전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845년 영국의 존 프랭클린 경이 이끈 원정대였다. 당시 최신식 증기선 2척과 129명의 정예 대원을 거느렸던 프랭클린 원정대는 북서항로 어딘가에서 전멸했고, 이후 수십 년간 이들을 찾기 위한 구조 작업 자체가 북극 탐험의 역사가 되었을 정도였다. 소년 시절 이 비극을 읽으며 자란 아문센에게 북서항로 정복은 단순한 기록 경신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숙원을 해결하는 성스러운 과업이었다.
당시 대영제국 해군을 비롯한 주류 탐험계의 상식은 "얼음을 깨고 나갈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배"였다. 하지만 아문센은 벨지카 호 원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큰 배는 얼음에 갇히면 탈출할 수 없지만, 작고 가벼운 배는 얕은 연안을 타고 얼음을 피해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배는 겨우 47톤급의 청어잡이용 목선인 요아 호였다.[9] 당시 사람들은 "저런 조룻배를 타고 북서항로에 가는 것은 자살 행위"라며 비웃었으나, 아문센은 여기에 13마력짜리 보조 엔진을 장착하고 철저하게 개조했다. 또한, 그는 이 원정의 명분을 '지자기(Terrestrial Magnetism) 북극점 측정'이라는 과학적 목적으로 포장하여 노르웨이 정부와 민간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으는 수완을 발휘했다.
1903년 6월 16일 밤, 아문센과 6명의 정예 대원은 오슬로 항구를 몰래 빠져나갔다. 이는 낭만적인 연출이 아니라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10] "성공해서 돌아오면 빚은 다 갚을 수 있다"는 아문센 특유의 배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요아 호에는 아문센을 포함해 단 7명만이 탑승했다. 이는 스콧이나 프랭클린이 수십 명, 수백 명을 동원한 것과 대조적이다. 인원이 적으면 식량 소비가 적고, 의사결정이 빠르며, 위기 상황에서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아문센의 계산이었다.
요아 호는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 북극 제도의 복잡한 수로로 들어섰다. 1903년 8월, 이들은 과거 프랭클린 원정대가 실종되었던 인근 해역인 킹 윌리엄 섬(King William Island) 주변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아문센은 배를 정박시키고 '요아 하벤(Gjoa Haven)'이라 이름 붙인 천연 항구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단순히 추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22개월간 머물며 지자기 관측이라는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후일 남극 정복의 밑거름이 될 결정적인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지역의 원주민인 네칠릭 에스키모(Netsilik Inuit)들이었다.
1903년 9월, 요아(Gjøa) 호는 북서항로의 험난한 얼음길을 헤치고 킹 윌리엄 섬의 남동쪽 연안에 위치한 천혜의 항구, '요아 하벤(Gjøa Haven)'에 닻을 내린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자력(磁力) 관측을 위해 2년 넘게 체류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때 그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다. 바로 현지 원주민인 네칠릭 이누이트(Netsilik Inuit) 부족과의 만남이다.
당시 서구 탐험가들에게 원주민은 대개 '미개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 혹은 '구걸이나 하는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실용주의의 화신이었던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수천 년간 이 지옥 같은 동토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지혜가 현대 과학보다 훨씬 우월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아문센은 그들을 관찰하며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는 단순한 인류학적 호기심을 넘어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극지를 정복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아문센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의 의복이었다. 당시 영국 탐험가들은 두꺼운 모직(Wool) 코트와 면직물 겹쳐 입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모직은 땀에 젖으면 무거워지고, 그 땀이 얼어붙으면 그대로 체온을 뺏는 '얼음 갑옷'이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이 입는 순록 가죽 옷에 주목했다.
그들의 가죽 옷은 헐렁하게 만들어져 공기층을 형성했고, 하단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대신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가 위로 순환하게 설계되어 있었으며 털이 안쪽으로 향하는 속옷과 털이 바깥으로 향하는 겉옷을 겹쳐 입음으로써, 영하 50도의 혹한에서도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즉시 영국식 모직 코트를 내다 버리고 이누이트 여인들에게 부탁해 대원들의 가죽 옷을 제작했다. 훗날 남극점에서 스콧의 대원들이 땀에 젖어 뻣뻣하게 굳은 모직 옷 때문에 동사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때, 아문센의 대원들이 쾌적하게 스키를 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11]
아문센은 요아 하벤에서 네칠릭 부족으로부터 개썰매(Sled dogs) 운용의 정수를 전수받는다. 단순히 개가 썰매를 끄는 것뿐만 아니라, 개들의 서열 정리, 먹이 급여 방식, 그리고 채찍을 이용한 방향 지시 등을 체득했다.
특히 그는 이누이트들이 개를 대하는 태도에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 개는 단순한 짐꾼이 아니라, 유사시에는 식량이 될 수도 있고(물론 아문센은 이를 매우 계획적으로 활용했다), 무엇보다 사람보다 훨씬 적은 식량으로 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극지 최적화 생물체라는 점을 간파했다. 아문센은 네칠릭 부족에게서 개 수십 마리를 구입하고 그들과 함께 사냥하며 개썰매 조종술을 마스터했는데, 이는 훗날 스콧이 고집했던 '인력 거치(Man-hauling)'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동력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의 주거 형태인 이글루 건축법도 배웠다. 캔버스 텐트는 극지의 강풍에 취약하고 보온이 안 되지만, 눈 벽돌로 쌓은 이글루는 내부 온도를 영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남극 원정에서는 이동 속도를 위해 텐트를 주로 사용했지만, 이글루 건축 경험은 대원들에게 '눈'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법을 완벽히 이해시켰다.
식생활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이누이트들이 생선과 물개 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것을 보고, 이것이 괴혈병 예방에 탁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12] 그는 원주민들과 함께 바다표범 사냥을 나가며 고기를 비축했고, 서구식 가공식품인 '페미컨(Pemmican)'에 의존하는 대신 현지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아문센은 네칠릭 부족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바늘, 칼, 성냥 같은 서구의 도구들을 이누이트의 가죽 제품이나 지식과 맞바꿨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이누이트 언어를 상당 부분 습득했으며, 그들의 사회 구조와 종교관까지 깊이 있게 관찰하여 방대한 양의 일기를 남겼다.
이 2년간의 기록은 훗날 인류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외부 세계와 접촉이 거의 없던 시절의 네칠릭 부족의 삶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자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훗날 "나의 진정한 극지 대학교는 킹 윌리엄 섬의 네칠릭 부족이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이 시기의 경험을 자신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으로 여겼다.
당시 유럽의 보수적인 탐험계는 아문센의 이런 행보를 곱지 않게 보았다. "대영제국의 장교라면 품위 있게 문명의 옷을 입고 고난을 이겨내야지, 어떻게 야만인처럼 개를 부리고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느냐"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문센에게 '체면'은 '생존과 성공'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이러한 실용적 사고방식은 훗날 스콧과의 남극점 경주에서 결정적인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된다. 스콧은 끝까지 '신사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말(Pony)과 모터 썰매를 가져갔다가 모두 실패하고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끌다 죽어갔지만, 아문센은 네칠릭에게 배운 대로 개썰매를 타고 스키를 지치며 마치 소풍을 가듯 남극점을 정복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13]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누이트들을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이라며 무시할 때, 아문센은 그들을 "수천 년간 북극에서 살아남은 최고의 전문가"로 대우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공동체에 들어가 핵심 기술들을 흡수했다.
그는 유럽식 모직 코트는 땀에 젖으면 얼어붙어 체온을 뺏지만, 순록 가죽으로 만든 이누이트식 의복은 통기성이 좋고 가벼우며 보온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문센은 이후 평생 동안 극지에서 가죽 옷만을 고집했다. 기계나 말이 아닌, 극지 환경에 최적화된 개들을 어떻게 다루고 먹이는지를 배웠다. 이는 훗날 남극점에서 스콧의 포니 부대를 압도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다. 텐트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전한 얼음집 짓는 법을 익혔다. 신선한 고기를 생으로 먹음으로써 비타민을 섭취하고 괴혈병을 예방하는 법을 생활화했다.
이 시기의 학습은 아문센을 단순한 '항해사'에서 '극지 전문가'로 진화시켰다. 그는 서구 문명의 자존심을 버리고 철저히 현지에 적응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이는 훗날 인류 최초의 남극점 도달이라는 결과로 증명된다.
1905년 8월, 다시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요아 호는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그들이 지나간 수로는 수심이 너무 얕아 대형 선박이라면 진작에 좌초되었을 곳이었지만, 흘수가 깊지 않은 요아 호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긁으며 통과했다.
마침내 1905년 8월 26일, 요아 호는 서쪽에서 오던 미국 포경선 '찰스 핸슨(Charles Hansson) 호'와 마주쳤다. 이는 대서양에서 출발한 배가 태평양 쪽의 배와 만났음을 의미했고, 사실상 북서항로의 완성을 뜻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문센은 일기장에 "북서항로가 뚫렸다. 나의 꿈이 이루어졌다"라고 간결하지만 묵직한 감동을 기록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요아 호는 다시 얼음에 갇혀 1905년의 겨울을 알래스카 인근에서 한 번 더 보내야 했다. 성격 급한 아문센은 이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개썰매를 타고 800km를 달려 알래스카의 이글(Eagle) 시에 있는 전신국까지 가서 노르웨이 국왕에게 보고 전보를 쳤다.[14]
1906년, 마침내 요아 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성하며 북서항로 최초 완주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아문센은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를 쫓던 빚쟁이들은 이제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투자자로 변해 있었다.
이 원정의 성공은 단순히 항로 하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소규모 정예 인원의 효율성을 증명했으며 현지 원주민의 기술이 근대 과학 기술보다 극지에서 유용함을 입증했다. 지자기 북극점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여 과학계에도 공헌했다.
무엇보다 아문센 본인에게는 "나의 방식이 옳다"라는 확고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제 그의 시선은 지구의 가장 끝,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쪽의 정점인 남극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2.6. 북극점 정복 계획과 난센의 프람 호[편집]
1906년, 요아(Gjøa) 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북서항로를 완주하며 전 세계적인 영웅으로 떠오른 로알 아문센이었지만, 정작 본인의 내면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서항로 개척은 그에게 '탐험가로서의 자격 증명'이었을 뿐, 그의 인생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구의 북극점(The North Pole)이었다.
당시 20세기 초의 탐험가들에게 북극점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국가의 명예, 과학적 성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라는 영원불멸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성배(Holy Grail)와도 같았다. 아문센은 북서항로 항해를 마치고 노르웨이로 귀국한 직후부터 이미 다음 행선지를 북극해로 낙점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극점 탐험은 이전의 항해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자금과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강의 배'가 필요했다.
아문센의 머릿속에 떠오른 배는 단 하나였다. 바로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 프리드요프 난센이 설계하고 사용했던 프람(Fram) 호였다.
'전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배는 당시 기준으로도, 그리고 현대의 관점에서도 극지 탐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설계물 중 하나였다. 난센은 북극해의 강력한 빙압(Ice pressure)에 배가 으스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바닥을 둥글게 설계하여 얼음이 배를 압박하면 배가 얼음 위로 '솟아오르도록' 만들었다.[15]
아문센에게 프람 호를 빌린다는 것은 단순히 배 한 척을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난센이라는 거물로부터 자신의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정치적 행위이자, 노르웨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난센 본인이었다. 난센은 비록 정계와 학계로 투신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북극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스스로 프람 호를 타고 다시 한번 극지로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문센은 신중했다. 그는 난센의 집인 '폴호그다(Polhøgda)'를 방문하기 전, 수개월간 자신의 북극점 도달 계획을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의 계획은 단순히 북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북극해의 해류를 타고 수년간 표류하며 북극권의 해양학적 데이터를 수집하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프로젝트였다.
1907년, 마침내 이루어진 두 탐험가의 만남에서 아문센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난센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 자신의 체력과 국가적 의무를 고려했을 때, 젊고 유능하며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성을 갖춘 아문센이야말로 프람 호의 진정한 주인임을 직감했다.[16]
결국 난센은 대승적 차원에서 프람 호를 아문센에게 양도할 것을 승인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노르웨이 의회는 즉각적으로 프람 호의 수리비와 원정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아문센은 드디어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 되었다.
프람 호를 인계받은 아문센은 즉시 배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증기 기관을 걷어내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디젤 엔진을 장착했다.[17]
또한 그는 북서항로에서 배운 이누이트의 지혜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당시 그린란드에서 가장 강인한 썰매개 100여 마리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영국인들이 모직 코트와 방수포를 고집할 때, 그는 순록 가죽과 물개 가죽으로 만든 이누이트식 방한복을 대량 제작했다. 이 옷들은 땀 배출이 용이하면서도 체온 유지가 압도적이었다. 괴혈병을 방지하기 위해 신선한 고기뿐만 아니라 북극곰의 간, 바다표범의 지방 등을 어떻게 섭취할지에 대한 매뉴얼을 작성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신생국이었다. 따라서 아문센의 북극점 탐험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노르웨이라는 국가의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국책 사업과도 같았다.
아문센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로부터 직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대중들은 그가 당연히 북극점을 정복하고 노르웨이 국기를 꽂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문센 역시 이러한 기대가 주는 압박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프람 호의 갑판에 올라섰을 때 느꼈던 것은 영광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아문센이 프람 호를 수리하고 자금을 모으는 동안,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와 프레더릭 쿡이 각각 북극점 도달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문센은 초조해졌다. 만약 미국인들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한다면, 자신이 준비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순식간에 '2등의 기록' 혹은 '단순한 과학 조사'로 전락할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나의 목표는 북극점 도달이 아니라 북극해의 과학적 탐색이다"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했다. 이는 훗날 그가 남극으로 기수를 돌릴 때 사용하게 될 거대한 연막작전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이 시기에 이미 개썰매 운용사들을 따로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훗날 남극점에서 큰 갈등을 빚게 되는 얄마르 요한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센은 난센과 함께 북극점을 목전에 두고 회군했던 베테랑이었기에, 아문센에게는 꼭 필요한 인재였다.
당시 20세기 초의 탐험가들에게 북극점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국가의 명예, 과학적 성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라는 영원불멸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성배(Holy Grail)와도 같았다. 아문센은 북서항로 항해를 마치고 노르웨이로 귀국한 직후부터 이미 다음 행선지를 북극해로 낙점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극점 탐험은 이전의 항해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자금과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강의 배'가 필요했다.
아문센의 머릿속에 떠오른 배는 단 하나였다. 바로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 프리드요프 난센이 설계하고 사용했던 프람(Fram) 호였다.
'전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배는 당시 기준으로도, 그리고 현대의 관점에서도 극지 탐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설계물 중 하나였다. 난센은 북극해의 강력한 빙압(Ice pressure)에 배가 으스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바닥을 둥글게 설계하여 얼음이 배를 압박하면 배가 얼음 위로 '솟아오르도록' 만들었다.[15]
아문센에게 프람 호를 빌린다는 것은 단순히 배 한 척을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난센이라는 거물로부터 자신의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정치적 행위이자, 노르웨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난센 본인이었다. 난센은 비록 정계와 학계로 투신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북극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스스로 프람 호를 타고 다시 한번 극지로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문센은 신중했다. 그는 난센의 집인 '폴호그다(Polhøgda)'를 방문하기 전, 수개월간 자신의 북극점 도달 계획을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의 계획은 단순히 북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북극해의 해류를 타고 수년간 표류하며 북극권의 해양학적 데이터를 수집하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프로젝트였다.
1907년, 마침내 이루어진 두 탐험가의 만남에서 아문센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난센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 자신의 체력과 국가적 의무를 고려했을 때, 젊고 유능하며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성을 갖춘 아문센이야말로 프람 호의 진정한 주인임을 직감했다.[16]
결국 난센은 대승적 차원에서 프람 호를 아문센에게 양도할 것을 승인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노르웨이 의회는 즉각적으로 프람 호의 수리비와 원정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아문센은 드디어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 되었다.
프람 호를 인계받은 아문센은 즉시 배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증기 기관을 걷어내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디젤 엔진을 장착했다.[17]
또한 그는 북서항로에서 배운 이누이트의 지혜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당시 그린란드에서 가장 강인한 썰매개 100여 마리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영국인들이 모직 코트와 방수포를 고집할 때, 그는 순록 가죽과 물개 가죽으로 만든 이누이트식 방한복을 대량 제작했다. 이 옷들은 땀 배출이 용이하면서도 체온 유지가 압도적이었다. 괴혈병을 방지하기 위해 신선한 고기뿐만 아니라 북극곰의 간, 바다표범의 지방 등을 어떻게 섭취할지에 대한 매뉴얼을 작성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신생국이었다. 따라서 아문센의 북극점 탐험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노르웨이라는 국가의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국책 사업과도 같았다.
아문센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로부터 직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대중들은 그가 당연히 북극점을 정복하고 노르웨이 국기를 꽂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문센 역시 이러한 기대가 주는 압박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프람 호의 갑판에 올라섰을 때 느꼈던 것은 영광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아문센이 프람 호를 수리하고 자금을 모으는 동안,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와 프레더릭 쿡이 각각 북극점 도달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문센은 초조해졌다. 만약 미국인들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한다면, 자신이 준비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순식간에 '2등의 기록' 혹은 '단순한 과학 조사'로 전락할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나의 목표는 북극점 도달이 아니라 북극해의 과학적 탐색이다"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했다. 이는 훗날 그가 남극으로 기수를 돌릴 때 사용하게 될 거대한 연막작전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이 시기에 이미 개썰매 운용사들을 따로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훗날 남극점에서 큰 갈등을 빚게 되는 얄마르 요한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센은 난센과 함께 북극점을 목전에 두고 회군했던 베테랑이었기에, 아문센에게는 꼭 필요한 인재였다.
2.7. 운명의 장난, 피어리와 쿡의 북극점 도달 소식[편집]
1909년 9월,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에서 북극점 정복을 위한 치밀한 준비에 여념이 없던 아문센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와 프레데릭 쿡이 각각 자신들이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아문센은 프리드요프 난센으로부터 전설적인 탐험선 프람 호를 양도받고, 노르웨이 국회와 국왕, 그리고 수많은 민간 후원자로부터 '북극점 정복'이라는 명분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목표지점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소식은 아문센에게 단순한 실망을 넘어 탐험가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재미있게도 아문센은 프레데릭 쿡과 인연이 깊었다. 과거 '벨지카 호' 원정 당시 괴혈병으로 죽어가는 대원들을 구했던 동료 의사가 바로 쿡이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쿡의 인품을 신뢰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냉정한 데이터는 두 미국인의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했다.[18]
하지만 대중과 후원자들의 반응은 냉혹했다. "이미 임자가 정해진 북극점에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후원금은 순식간에 끊기기 시작했다. 아문센은 여기서 인생 최대의 도박을 결심한다. "북쪽이 막혔다면, 남쪽으로 간다." 하지만 이 결정을 곧바로 공표할 수는 없었다. 만약 "북극 대신 남극에 가겠다"고 선언한다면, 북극 탐험을 조건으로 배를 빌려준 난센과 자금을 대준 정부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겉으로는 여전히 북극 탐험을 준비하는 척했다. 심지어 그는 북극해의 해류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식량과 물자를 확보했는데, 이는 사실 남극의 빙원을 가로지르기 위한 철저한 계산이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누이트의 생존술을 재검토했다. 피어리가 북극점에서 성공(했다고 주장)한 비결이 개썰매였다는 점은 아문센에게 '남극에서도 개썰매가 정답'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반면, 당시 영국의 로버트 스콧은 대대적으로 남극점 원정을 홍보하며 '테라 노바 호'를 띄우고 있었다. 아문센은 스콧의 준비 과정을 면밀히 살핀 뒤, 영국인들이 말과 기계식 썰매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아문센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자신의 계획을 단 세 명에게만 공유했다. 그의 형 레온 아문센과 프람 호의 선장 닐센뿐이었다.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갓 독립한 노르웨이에게 '극지 정복'은 국격의 문제였다. 만약 아문센이 아무 성과 없이 원정을 포기한다면 신생 독립국 노르웨이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아문센은 철저하게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회상한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도 웃으며 북극 지도를 펼쳐 보이던 그의 모습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었다.[19]
아문센의 이 행보는 분명 후원자들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는 국가와 대중을 속였고, 심지어 자신의 대원들 대부분도 배가 대서양을 건너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남극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 '위대한 속임수'가 없었다면 노르웨이는 남극점 정복이라는 대업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문센은 도덕적 비난보다 실질적 성취를 택한 전형적인 결과주의적 리더였다. 그는 쿡과 피어리의 뉴스가 터진 직후, 서재에 틀어박혀 남극 지도를 연구하며 스콧의 예상 경로를 분석했다. "스콧은 로스 섬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 더 위험하지만 가까운 고래만으로 간다." 아문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남극 정복을 위한 시뮬레이션이 끝난 상태였다.
결국 피어리와 쿡의 '북극점 도달 소식'은 아문센에게 위기인 동시에 남극이라는 거대한 기회로 눈을 돌리게 만든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두 사람이 조금만 늦게 발표했거나, 아문센이 예정대로 북극으로 향했다면 세계사는 '남극점 정복자 로버트 팰컨 스콧'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아문센은 이 혼란을 틈타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고, 인류 탐험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략 수정'을 감행하게 된다.
당시 아문센은 프리드요프 난센으로부터 전설적인 탐험선 프람 호를 양도받고, 노르웨이 국회와 국왕, 그리고 수많은 민간 후원자로부터 '북극점 정복'이라는 명분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목표지점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소식은 아문센에게 단순한 실망을 넘어 탐험가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재미있게도 아문센은 프레데릭 쿡과 인연이 깊었다. 과거 '벨지카 호' 원정 당시 괴혈병으로 죽어가는 대원들을 구했던 동료 의사가 바로 쿡이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쿡의 인품을 신뢰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냉정한 데이터는 두 미국인의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했다.[18]
하지만 대중과 후원자들의 반응은 냉혹했다. "이미 임자가 정해진 북극점에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후원금은 순식간에 끊기기 시작했다. 아문센은 여기서 인생 최대의 도박을 결심한다. "북쪽이 막혔다면, 남쪽으로 간다." 하지만 이 결정을 곧바로 공표할 수는 없었다. 만약 "북극 대신 남극에 가겠다"고 선언한다면, 북극 탐험을 조건으로 배를 빌려준 난센과 자금을 대준 정부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겉으로는 여전히 북극 탐험을 준비하는 척했다. 심지어 그는 북극해의 해류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식량과 물자를 확보했는데, 이는 사실 남극의 빙원을 가로지르기 위한 철저한 계산이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누이트의 생존술을 재검토했다. 피어리가 북극점에서 성공(했다고 주장)한 비결이 개썰매였다는 점은 아문센에게 '남극에서도 개썰매가 정답'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반면, 당시 영국의 로버트 스콧은 대대적으로 남극점 원정을 홍보하며 '테라 노바 호'를 띄우고 있었다. 아문센은 스콧의 준비 과정을 면밀히 살핀 뒤, 영국인들이 말과 기계식 썰매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아문센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자신의 계획을 단 세 명에게만 공유했다. 그의 형 레온 아문센과 프람 호의 선장 닐센뿐이었다.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갓 독립한 노르웨이에게 '극지 정복'은 국격의 문제였다. 만약 아문센이 아무 성과 없이 원정을 포기한다면 신생 독립국 노르웨이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아문센은 철저하게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회상한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도 웃으며 북극 지도를 펼쳐 보이던 그의 모습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었다.[19]
아문센의 이 행보는 분명 후원자들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는 국가와 대중을 속였고, 심지어 자신의 대원들 대부분도 배가 대서양을 건너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남극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 '위대한 속임수'가 없었다면 노르웨이는 남극점 정복이라는 대업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문센은 도덕적 비난보다 실질적 성취를 택한 전형적인 결과주의적 리더였다. 그는 쿡과 피어리의 뉴스가 터진 직후, 서재에 틀어박혀 남극 지도를 연구하며 스콧의 예상 경로를 분석했다. "스콧은 로스 섬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 더 위험하지만 가까운 고래만으로 간다." 아문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남극 정복을 위한 시뮬레이션이 끝난 상태였다.
결국 피어리와 쿡의 '북극점 도달 소식'은 아문센에게 위기인 동시에 남극이라는 거대한 기회로 눈을 돌리게 만든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두 사람이 조금만 늦게 발표했거나, 아문센이 예정대로 북극으로 향했다면 세계사는 '남극점 정복자 로버트 팰컨 스콧'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아문센은 이 혼란을 틈타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고, 인류 탐험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략 수정'을 감행하게 된다.
2.8. 마데이라에서의 선언[편집]
1910년 9월, 노르웨이를 떠난 프람 호가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의 푼샬 항에 닻을 내렸을 때, 배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겉으로는 북극 탐험을 표방하며 노르웨이를 떠나왔으나, 이미 아문센의 마음속에는 남극의 얼음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기로 결심한다.
그가 마데이라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전략적인 이유였다. 마데이라는 대서양 항로의 요충지로, 전 세계로 전보를 보낼 수 있는 통신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한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될 것이었기에, 자신의 '방향 선회'를 공식화하고 라이벌인 로버트 팰컨 스콧에게 선전포고를 할 최후의 장소였던 셈이다.
아문센에게 가장 큰 숙제는 투자자나 대중이 아닌, 바로 배에 타고 있는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북극의 얼음 속에 갇혀 몇 년을 버틸 준비를 하고 배에 올랐지, 지구 반대편 남극으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문센은 전 대원을 갑판에 모아놓고 지도를 펼쳤다.
그가 마데이라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전략적인 이유였다. 마데이라는 대서양 항로의 요충지로, 전 세계로 전보를 보낼 수 있는 통신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한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될 것이었기에, 자신의 '방향 선회'를 공식화하고 라이벌인 로버트 팰컨 스콧에게 선전포고를 할 최후의 장소였던 셈이다.
아문센에게 가장 큰 숙제는 투자자나 대중이 아닌, 바로 배에 타고 있는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북극의 얼음 속에 갇혀 몇 년을 버틸 준비를 하고 배에 올랐지, 지구 반대편 남극으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문센은 전 대원을 갑판에 모아놓고 지도를 펼쳤다.
"여러분, 우리는 북극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극으로 향합니다. 스콧의 영국 탐험대가 이미 길을 떠났지만, 프람 호와 우리의 개들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내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문센의 카리스마와 철저한 준비성에 감화되었던 대원들은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환호하며 찬성했다.[20]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각자의 직무를 재배치하고, 남극의 기후에 맞춘 장비 개조를 지시하며 본격적인 '경주' 모드에 돌입했다.
아문센은 1910년 9월 9일, 스콧에게 보내는 전보를 작성했다. 이 전보는 탐험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내용은 지독하리만치 짧고 강렬했다.
"알립니다. 프람 호는 남극으로 향합니다."(Beg leave to inform you, Fram proceeding Antarctic.)[21]
이 전보는 호주 멜버른에 도착해 있던 스콧에게 전달되었다. 스콧은 당시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걸고 거대한 자본과 최첨단(이라 믿었던) 장비를 동원해 남극점 정복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문센의 전보는 '신사적인 협정'을 깬 기만이자, 뒤통수를 치는 비겁한 행위로 비쳐졌다. 영국 언론들은 즉각 아문센을 '얼음 도둑', '부도덕한 사기꾼'이라 비난하며 파상공세를 퍼부었다.[22]
스콧은 이 전보를 받고 큰 심리적 동요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아문센의 등장이 계획에 차질을 줄 것이라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반면 아문센은 스콧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탐험은 영광스러운 스포츠가 아니라, 철저한 데이터와 준비로 승리해야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아문센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마데이라에서 폭탄선언을 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 자금 확보의 현실적 문제: 만약 처음부터 남극에 간다고 했다면, 북극 탐험을 지지했던 후원자들이 자금을 회수했을 가능성이 컸다.
- 난센과의 관계: 자신의 스승이자 노르웨이의 거물인 프리드요프 난센에게 빌린 프람 호는 북극 관측용이라는 명목이 있었다. 아문센은 난센의 허락을 받기보다 저지른 후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 심리적 우위: 스콧에게 자신이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스콧이 무리한 속도를 내게 만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마데이라를 떠난 프람 호는 이제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적도를 통과할 때 대원들은 열대 기후의 폭염 속에서 남극의 혹한을 견딜 가죽 옷을 수선하는 기묘한 풍경을 연출했다. 아문센은 이 시기에 식량 배분표를 다시 짜고, 97마리의 그린란드 산 썰매개들의 상태를 일일이 점검했다.
이 시기 아문센이 보여준 리더십은 '공포'가 아닌 '확신'이었다. 그는 스콧 탐험대가 말(포니)과 모터 썰매를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었다. 아문센은 극지의 얼음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와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이누이트들로부터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말은 얼음 위에서 땀을 흘려 얼어 죽을 것이고, 기계는 멈출 것이다. 하지만 개는 눈 위에서 잠을 자고, 정 안 되면 우리의 식량이 되어줄 것이다."라는 그의 냉혹한 판단은 훗날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예언이 된다.
마데이라에서의 선언은 아문센을 도덕적 논란의 중심에 세웠지만, 동시에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드는 첫 단추가 되었다. 스콧이 명예와 관습이라는 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일 때, 아문센은 모든 사회적 체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남극점'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는 육식동물의 자세를 갖추었다.
배 안의 서고에 있던 북극 지도는 치워졌고, 대신 섀클턴이 남긴 남극 지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프람 호의 선수(船首)가 가리키는 곳은 북위 90도가 아닌, 남위 90도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비극적인 '남극점 경주(The Race to the South Pole)'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2.9. 남극 상륙[편집]
1911년 1월 14일, 아문센의 탐험선 프람 호가 드디어 남극 대륙의 로스 빙붕 연안에 위치한 고래만(Bay of Whales)에 입성했다. 이 선택은 당시 극지 탐험계의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그야말로 '아문센 인생 최대의 도박'이라 불릴 만한 결정이었다.
당시까지 남극 탐험의 '정석'은 제임스 클라크 로스나 어니스트 새클턴, 그리고 아문센의 숙적인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용했던 맥머도 사운드(McMurdo Sound)였다. 맥머도 사운드는 견고한 지면(섬이나 대륙 본토) 위에 기지를 세울 수 있어 안전이 보장되었고, 이미 이전 탐험가들에 의해 경로가 어느 정도 검증된 상태였다. 반면 아문센이 선택한 고래만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인 '빙붕' 위에 기지를 세워야 했다.
당시까지 남극 탐험의 '정석'은 제임스 클라크 로스나 어니스트 새클턴, 그리고 아문센의 숙적인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용했던 맥머도 사운드(McMurdo Sound)였다. 맥머도 사운드는 견고한 지면(섬이나 대륙 본토) 위에 기지를 세울 수 있어 안전이 보장되었고, 이미 이전 탐험가들에 의해 경로가 어느 정도 검증된 상태였다. 반면 아문센이 선택한 고래만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인 '빙붕' 위에 기지를 세워야 했다.
"얼음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언제 빙산이 떨어져 나가 바다로 떠내려갈지 모르는 일이다." - 당시 영국 왕립지리학회(RGS)의 일반적인 견해.
하지만 아문센은 치밀했다. 그는 1841년 로스 경의 기록과 자신의 관찰을 비교 분석한 결과, 고래만의 빙붕 지형이 수십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간파했다. 그는 이 빙붕이 해저의 암초나 섬에 걸려 고정되어 있다고 결론지었고, 이 판단은 훗날 정확했음이 증명된다.
아문센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래만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다. 남극점까지의 거리가 스콧의 기지보다 약 60마일(약 100km)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문센의 탐험 철학은 철저하게 '효율성'에 기반했다. 왕복 200km의 거리를 단축한다는 것은 썰매개와 대원들이 소비할 엄청난 양의 칼로리를 절약할 수 있다. 남극의 짧은 여름 시즌 동안 기상 악화에 대비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벌어준다. 상대보다 앞서고 있다는 확신은 극한 상황에서 팀의 사기를 결정짓는 요소였다.
결과적으로 이 60마일의 차이는 훗날 아문센이 스콧보다 한 달 이상 빨리 남극점에 도달하고, 무사히 귀환하는 데 결정적인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월 15일부터 시작된 하역 작업은 아문센 특유의 조직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9명의 대원과 97마리의 그린란드 썰매개가 얼음 위로 내려졌다. 아문센은 기지 구축 장소로 빙붕 내륙 쪽으로 약 3km 떨어진 지점을 택했다.
이곳에 세워진 기지가 바로 그 유명한 프람헤임이다. '프람의 집'이라는 뜻의 이 기지는 단순한 임시 오두막이 아니었다.
프람헤임은 노르웨이의 목수 욜리우스 요한센이 미리 제작해온 조립식 가옥으로, 이중 벽체와 단열 설비를 갖추고 있어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도 내부 온도를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기지 주변의 눈을 파내어 거대한 지하 작업실과 창고를 만들었다. 대원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눈 속 터널을 통해 개집, 식량 창고, 목공소, 기상 관측소를 오갈 수 있었다.[23]
하역 작업이 한창이던 2월 초,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스콧의 탐험선인 테라 노바(Terra Nova) 호가 고래만 근처에 나타난 것이다. 테라 노바 호의 대원들은 아문센의 기지를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아문센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만남에서 양측은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으나, 속마음은 복잡했다.
영국 측 반응은 "아문센의 개들은 놀랍도록 건강해 보였고, 그들의 기동성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테라 노바 호 대원 캠벨의 일기 중)
아문센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스콧의 모터 썰매가 제대로 작동할지 여부를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개썰매가 남극의 눈 위에서는 압도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고래만 상륙은 단순히 '운 좋은 선택'이 아니라, 기존의 권위(영국 지리학계의 통설)를 거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데이터를 믿은 전문가적 결단의 산물이었다.
만약 아문센이 스콧과 같은 맥머도 사운드에 상륙했다면, 두 팀은 같은 경로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며, 지형 숙련도가 높았던 영국 팀에게 아문센이 고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문센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전장'을 선택함으로써 승부의 흐름을 초기에 결정지었다.
2.10. 식량 저장소 설치[편집]
"전쟁의 승패는 보급에 달려 있고, 탐험의 성패는 저장소(Depot)에 달려 있다."
아문센이 고래만에 기지 '프람헤임'을 건설한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남극점 본대를 위한 전진 보급 기지 구축이었다. 당시 남극 탐험은 단순히 걷는 문제가 아니라, 수천 킬로미터의 설원을 왕복하며 먹을 식량과 연료를 어떻게 운반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아문센은 본진에서 남극점까지의 경로에 일정 간격으로 식량을 묻어두는 '저장소 전략'을 채택했다. 이는 복귀 시 대원들이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필수적인 안전장치였다.[24]
1911년 2월 10일, 아문센은 4명의 대원과 18마리의 개를 이끌고 첫 번째 저장소 설치를 위해 출발했다. 목표는 남위 80도 지점이었다.
아문센은 기존의 무거운 썰매를 분해하여 무게를 대폭 줄였고, 개썰매의 기동성을 극대화했으며, 단 4일 만에 남위 80도에 도달하여 약 700kg에 달하는 보급품(물개 고기, 파라핀 연료, 비스킷 등)을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경이로운 속도였다.
2월 22일과 3월 31일, 아문센은 연달아 추가 저장소 설치를 강행했다.
81도 저장소는 약 500kg의 보급품을 매설했고 82도 저장소는 약 600kg의 보급품을 매설. 이 지점은 남극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단순히 식량을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표식 시스템을 발명했다. 안개가 자욱한 남극에서 저장소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그는 저장소를 중심으로 좌우 수 킬로미터에 걸쳐 검은 깃발을 꽂은 대나무 막대기를 일정 간격으로 배치했다.[25]
아문센은 저장소에 넣을 식량의 핵심으로 물개 고기를 선택했다.
신선한(혹은 냉동된) 물개 고기에는 괴혈병을 예방하는 비타민 C가 풍부하고 지방층이 두꺼운 물개 고기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대원들과 개들에게 최고의 에너지원이었다. 현지에서 조달한 물개 고기를 사용함으로써 노르웨이에서 가져온 비축 식량을 아낄 수 있었다.
스콧이 통조림과 가공 식품에 의존하다 괴혈병에 무너진 것과 대조적으로, 아문센의 대원들은 저장소의 물개 고기를 먹으며 오히려 탐험 전보다 체중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파라핀 연료통이 추위로 수축하여 연료가 새어 나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연료통을 납땜하여 밀봉했다. 또한, 비스킷 상자는 하나하나 개봉하여 개수를 확인한 뒤 다시 포장하는 등, '설마' 하는 변수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착에 가까운 꼼꼼함은 훗날 그가 "나는 모험을 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이 작업은 대원들에게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남위 82도까지의 길이 이미 '아는 길'이 되었고, 충분한 식량이 확보되었다는 확신은 공포를 지워버렸다. 아문센은 일기에서 "이제 우리는 남극점이라는 목적지까지의 절반 이상의 고비를 넘겼다. 남은 것은 지구력뿐이다"라고 적었다.
이때 사용된 개들은 무려 하루에 30~40km를 주파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아문센은 개들을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동료'로서 극진히 대접하면서도, 비상시에는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냉혹한 계산을 유지했다.
2.11. 첫 번째 시도와 실패[편집]
1911년 8월, 남극의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으나 대기는 여전히 영하 40도 이하를 맴도는 혹한의 시기였다. 아문센은 초조했다. 라이벌 로버트 팰컨 스콧의 테라 노바 원정대가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아문센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아직 봄이 채 오기도 전인 9월 8일을 출발일로 못 박았다.
이 결정은 아문센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기온은 영하 30도대였으나, 출발 직후 기온은 수직 하락하여 영하 56도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도달했다. 이는 액체 상태의 위스키가 얼어붙고, 썰매개의 발바닥이 얼음 바닥에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출발 며칠 만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개들은 얼어 죽기 시작했고, 대원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동상이 발생했다. 9월 12일, 아문센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회항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후퇴 과정은 '준비된 아문센'답지 않게 매우 무질서했다.
아문센은 가장 빠른 개썰매를 타고 대원들을 뒤로한 채 본부인 프람헤임(Framheim)으로 먼저 달려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대원들은 가시거리 0m의 블리자드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특히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과 크리스티안 프레우드(Kristian Prestrud)는 썰매도 없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요한센의 노련한 경험 덕분에 간신히 기지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기지에 도착한 요한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모든 대원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문센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이 결정은 아문센의 탐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기온은 영하 30도대였으나, 출발 직후 기온은 수직 하락하여 영하 56도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도달했다. 이는 액체 상태의 위스키가 얼어붙고, 썰매개의 발바닥이 얼음 바닥에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출발 며칠 만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개들은 얼어 죽기 시작했고, 대원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동상이 발생했다. 9월 12일, 아문센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회항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후퇴 과정은 '준비된 아문센'답지 않게 매우 무질서했다.
아문센은 가장 빠른 개썰매를 타고 대원들을 뒤로한 채 본부인 프람헤임(Framheim)으로 먼저 달려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대원들은 가시거리 0m의 블리자드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특히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과 크리스티안 프레우드(Kristian Prestrud)는 썰매도 없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요한센의 노련한 경험 덕분에 간신히 기지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기지에 도착한 요한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모든 대원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문센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이건 탐험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도망이었다! 리더가 대원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법이 어디 있는가!"[26]
아문센에게 이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는 즉시 요한센을 남극점 정복 명단에서 제외하는 보복성 인사를 단행했다. 요한센은 본래 아문센보다 선배격인 탐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은 그를 부하인 프레우드의 지휘 아래 두어 변방의 에드워드 7세 땅을 탐사하게 만드는 굴욕을 안겼다.
이 갈등의 뿌리는 깊었다. 요한센은 노르웨이 탐험계의 전설 프리드요프 난센과 함께 북극권에서 15개월간 단둘이 생존했던 영웅이었다. 아문센은 난센으로부터 프람 호를 빌리면서 "요한센을 꼭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포함시킨 상태였다.
아문센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경험 많고 명성이 높은 요한센이 원정대 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거나 자신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늘 눈엣가시였다. 9월의 실패는 그 잠재된 폭탄이 터진 사건이었고, 아문센은 이를 기회 삼아 원정대 내의 기강을 잡기 위해 요한센을 철저히 매장했다.
비록 첫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팀워크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실패는 아문센을 다시금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 출발을 위해 한 달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은 개들의 발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 장화를 보강했다. 또한 스콧이 먼저 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억누르고,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인내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비판적인 요한센을 배제함으로써, 아문센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최정예 5인 체제를 구축했다.
이 굴욕적인 후퇴와 내부 분열은 훗날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한 후에도 평생의 짐으로 남았다. 요한센은 원정 복귀 후 아문센의 냉대에 시달리다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하게 되는데, 이는 아문센의 업적 뒤에 가려진 가장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12. 결전의 날, 남극점을 향한 재출발[편집]
1911년 9월의 조기 출발 실패는 아문센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남극의 봄은 북반구의 그것과 달랐으며, 자연은 인간의 조급함을 비웃듯 거친 눈폭풍을 퍼부었다. 한 달간의 재정비 기간 동안 프람헤임(Framheim) 기지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베테랑 탐험가 잘마르 요한센과의 불화로 인해 팀의 결속력이 흔들렸으나, 아문센은 특유의 냉철한 카리스마로 팀을 재편했다. 요한센을 원정대에서 제외하고 대리인 노미네이션을 새로 구성한 아문센은, 마침내 기온이 영하 30도 선으로 안정된 10월 중순, 인류 역사를 바꿀 재출발을 선언한다.
아문센은 이번 '최종 병기'를 구성함에 있어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출발 당시 원정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아문센은 이번 '최종 병기'를 구성함에 있어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출발 당시 원정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인원 (총 5명): 로알 아문센(대장), 올라프 비욜란드(스키 전문가), 헬메르 한센(수석 마부), 스베레 하셀(마부), 오스카 위스팅(마부).[27]
- 썰매개: 엄선된 그린란드 허스키 52마리. 4대의 썰매에 각각 13마리씩 배치되었다.
- 썰매: 비욜란드가 개조한 초경량 썰매. 기존 75kg에 달하던 썰매 무게를 부품을 깎아내어 24kg까지 줄였다. 이는 개들의 피로도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 식량: 펨미컨(말린 고기와 지방 혼합물), 비스킷, 분유, 초콜릿. 특히 비타민 결핍을 막기 위해 건조 야채가 포함된 특수 비스킷을 준비했다.
기온 영하 30도, 풍속 5m/s. 남극의 대지는 눈부시게 하얀 '사무라이의 수의'를 입은 듯 고요했다. 아문센은 일기장에 "드디어 신의 주사위가 던져졌다"라고 기록했다. 52마리의 개들이 내뿜는 입김이 안개처럼 자욱했고, 대원들은 에스키모식 순록 가죽 옷으로 무장한 채 스키 바인딩을 조였다. 스콧의 '테라 노바' 팀이 아직 기지에서 날씨 눈치를 보며 모터 썰매를 점검하고 있을 때, 아문센은 이미 설원을 가르며 남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문센의 천재성은 '무게 배분'에서 드러났다. 그는 남위 80도, 81도, 82도 지점에 이미 거대한 식량 저장소(Depot)를 구축해 두었기에, 출발 시 썰매 무게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는 연료인 파라핀 유로 휘발을 막기 위해 납땜으로 밀봉된 특수 캔에 담겼다. 스콧의 팀이 나중에 연료 증발로 고초를 겪은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누이트 방식에 따라 헐렁하게 제작된 가죽 옷. 땀이 배출되지 않아 얼어붙는 울 소재의 영국식 의복과 달리, 공기층을 형성하여 체온을 유지했으며, 보급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검은색 깃발과 생선 찌꺼기를 보급소 좌우 5마일 간격으로 배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출발 후 첫 사흘간, 아문센 원정대는 하루 평균 30km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남진했다. 이는 당시 극지 탐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속도였다. 개들은 가벼워진 썰매를 경쾌하게 끌었고, 스키 전문가 비욜란드가 앞장서서 길을 닦았다.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 대신, 하루 5~6시간의 이동과 충분한 휴식, 그리고 고단백 식사를 강조했다.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깃발을 꽂고 돌아오기 위해 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원정대는 마치 기계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
비록 겉으로는 평온했으나, 아문센의 내면은 스콧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스콧의 '모터 썰매'가 빙원 위에서 압도적인 속도를 낼 것이라 오판하고 있었다.[28] 아문센은 매일 저녁 텐트 안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스콧의 예상 위치를 추정했다. 이러한 압박감은 대원들에게도 전달되어, 휴식 시간조차 최소한의 대화만을 나누며 다음날의 진격 경로를 복기하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10월 23일, 원정대는 출발 4일 만에 남위 80도 보급소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지난겨울 미리 비축해 둔 1톤 이상의 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아문센은 여기서 개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신선한 고기를 제공했다. 52마리의 개들 중 체력이 떨어진 몇 마리는 이미 도축되어 다른 개들의 사료가 되었는데, 이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잔인해 보일 수 있으나 극지 탐험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아문센식 '개 순환 전략'의 일환이었다.
아문센이 10월 중순을 재출발 시점으로 잡은 것은 철저히 '천문학적'이고 '기상학적'인 계산에 근거했다. 그는 하지(12월 22일경) 전후로 남극점에 도달하여 태양 고도를 이용한 정확한 위치 측정을 수행하고자 했다. 만약 스콧보다 늦게 도착하더라도 정확한 좌표 측정을 통해 '우리가 진짜 최초'임을 입증하기 위한 보험이었다. 또한, 11월부터 시작될 극지의 본격적인 여름(영하 15도~20도 사이)을 산맥 등반 시기에 맞추려는 고도의 전략적 배치였다.
10월 19일의 재출발은 단순히 여행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문성'과 '열정'의 대결에서 전문성이 승기를 잡는 순간이었다. 아문센의 썰매 날이 얼음판을 깎으며 나아갈 때마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은 멀리 뒤처지고 있었다. 이후 전개될 '악마의 춤판(The Devil's Ballroom)'이라 불리는 거대한 빙하 지대를 앞두고, 아문센 원정대는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미지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발을 들였다.
악마의 춤판: 퀸 모드 산맥과 빙하의 돌파
19.1. 거대한 장벽: 퀸 모드 산맥(Queen Maud Mountains)과의 조우
1911년 11월 중순, 아문센 일행은 마침내 로스 빙붕(Ross Ice Shelf)의 끝단에 도달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해발 3,000m가 넘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이 산맥은 훗날 노르웨이 왕비의 이름을 따서 **퀸 모드 산맥**이라 명명된다. 당시까지 이 경로를 통과한 인류는 아무도 없었다. 섀클턴이나 스콧은 비어드모어 빙하라는 이미 검증된(물론 죽을 만큼 힘들지만) 통로를 선택했으나, 아문센은 고래만에서 직선거리로 남하했기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아문센은 일기에서 이 광경을 "마치 거대한 파도가 얼어붙어 하늘을 찌르는 것 같다"라고 묘사했다.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빙원 주행이 아니라, 수천 킬로그램의 짐을 실은 썰매를 끌고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올라가야 하는 사투가 시작되었다.
2.13. 악마의 춤판[편집]
산맥을 오르는 과정에서 아문센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살인마, 크레바스였다. 특히 정상 부근의 평원은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으나, 얇은 눈 층 아래에 수십 미터 깊이의 낭떠러지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아문센은 이곳을 '악마의 춤판(The Devil's Ballroom)'이라고 불렀다.
지형적 공포: 이곳의 얼음은 마치 속이 빈 유리병처럼 층을 이루고 있어, 개썰매가 지나갈 때마다 '쩡- 쩡-' 하는 기분 나쁜 공명음을 내뱉었다. 대원들은 언제 발밑이 꺼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서로를 로프로 묶고 전진했다.
당시 아문센 팀이 사용한 스키는 노르웨이산 히코리 나무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을 덧대는 등 현장에서 즉석 개조가 이루어졌다.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한 걸음이라도 스키를 벗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엄중히 경고했다.
아문센이 선택한 등반 경로는 액셀 헤이베르그 빙하였다. 이 빙하는 경사도가 무려 45도에 육박하는 구간이 허다했다. 5명의 대원(아문센, 비스틸, 한센, 하셀, 베링)은 20마리의 개를 독려하며 썰매를 밀고 끌었다.
지형적 공포: 이곳의 얼음은 마치 속이 빈 유리병처럼 층을 이루고 있어, 개썰매가 지나갈 때마다 '쩡- 쩡-' 하는 기분 나쁜 공명음을 내뱉었다. 대원들은 언제 발밑이 꺼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서로를 로프로 묶고 전진했다.
당시 아문센 팀이 사용한 스키는 노르웨이산 히코리 나무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을 덧대는 등 현장에서 즉석 개조가 이루어졌다.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한 걸음이라도 스키를 벗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엄중히 경고했다.
아문센이 선택한 등반 경로는 액셀 헤이베르그 빙하였다. 이 빙하는 경사도가 무려 45도에 육박하는 구간이 허다했다. 5명의 대원(아문센, 비스틸, 한센, 하셀, 베링)은 20마리의 개를 독려하며 썰매를 밀고 끌었다.
"개들은 혀를 길게 내밀고 고통스럽게 헐떡였으나, 한센의 채찍질과 '무셔(Mush)!' 소리에 맞춰 죽을힘을 다해 발톱을 얼음에 박았다. 우리는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그 지옥 같은 경사를 올랐다."- 한센의 회고록 중.
이 구간에서 아문센의 철저한 계산이 빛을 발했다. 그는 올라가기 전, 불필요한 짐을 모두 산맥 아래 기지에 매립했다. 심지어 대원들의 옷에 달린 불필요한 단추까지 떼어내 무게를 줄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또한,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발생하는 고산병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초콜릿과 육포(Pemmican) 배급량을 늘려 칼로리를 보충했다.
산맥 정상인 해발 3,100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아문센은 원정대 역사상 가장 비정하고도 효율적인 결정을 내린다. 바로 썰매개의 도축이었다.
원래 52마리로 시작했던 개들 중 상당수는 이미 지쳐 있었고, 고원 지대에서는 산소 부족과 강추위로 인해 효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문센은 처음부터 이를 계획에 넣고 있었다.
죽인 개의 고기를 남은 개들에게 먹여 단백질을 보충시킨다는 것은 당시 동족 포식이라는 윤리적 비판이 있었으나, 극지 생존을 위해선 불가피했다. 대원들도 신선한(?) 고기를 섭취하여 괴혈병을 예방하고 체력을 회복했다. 또한 더 이상 끌 개가 없는 썰매를 폐기하여 속도를 높였다.
이 지점을 아문센은 '도살장(The Butchery)'이라고 명명했다. 훗날 스콧의 지지자들은 이 행위를 두고 "신사적이지 못한 잔인한 짓"이라며 비난했으나, 아문센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응수했다. "배고픈 대원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배불리 먹여 살려 보내는 것이 리더의 도리다."[29]
산맥을 넘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시야 1m 앞도 보이지 않는 블리자드와 '화이트아웃' 현상이었다. 남극 고원의 바람은 초속 30m를 넘나들었고, 기온은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졌다.
아문센은 여기서 '직선 주행법'을 도입했다. 나침반에만 의존해 걷는 것이 아니라, 뒤에 오는 대원이 앞사람의 궤적을 보고 방향 보정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면 그대로 죽음이었기에, 그들은 서로를 끈 하나에 의지한 채 안개 낀 '악마의 춤판' 위를 마치 유령처럼 걸어갔다.
11월 말, 마침내 지옥 같은 산맥 구간을 통과한 일행 앞에 끝을 알 수 없는 평원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남극점까지 이어진 남극 고원이다. 아문센은 여기서부터 남극점까지 장애물이 없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고도는 여전히 3,000m 이상이었고, 산소는 희박했다.
그는 대원들에게 마지막 전열 정비를 명령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위 90도를 향한 600km의 직선 질주뿐이었다. 아문센은 이때 자신의 시계를 노르웨이 시간에서 남극 현지 시간(추정치)으로 맞추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악마의 목덜미를 타고 넘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신의 영역뿐이다. 만약 신이 우리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열흘 안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찍게 될 것이다."
2.14. 인류 최초의 도달[편집]
"그리하여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끝없는 설원뿐이었으나, 그것은 우리가 평생을 바쳐 찾아 헤맨 바로 그 설원이었다." - 로알 아문센의 일기 중.
1911년 12월 초, 아문센과 4명의 대원(올라프 뵤란드, 헬메르 한센, 스베레 하셀, 오스카 위스팅)은 인류가 단 한 번도 딛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미 12월 8일, 그들은 어니스트 새클턴이 세웠던 남위 88도 23분의 기록을 경신했다. 새클턴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 지점을 통과할 때,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특별한 축사를 건네기보다 묵묵히 개썰매의 속도를 조절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당시 기상 조건은 기적적으로 양호했다. 남극 고원의 희박한 공기와 영하 30도에 달하는 추위가 육체를 갉아먹었지만, 아문센 원정대는 이누이트식 가죽 옷 덕분에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같은 시각, 수백 킬로미터 뒤처져 있던 스콧의 테라 노바 원정대는 기상 악화와 조악한 의복으로 인해 동상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문센은 철저하게 '개'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남은 개들은 이제 10여 마리에 불과했으나, 이들은 가장 강인한 정예병들이었으며 대원들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12월 14일 아침, 아문센은 눈을 뜨자마자 날씨를 확인했다. 하늘은 맑았고 시야는 끝도 없이 펼쳐졌다. 계산상으로는 오늘 중으로 남극점에 도달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오전 내내 대원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과 정적이 감돌았다. 평소 농담을 즐기던 하셀과 뵤란드조차 입을 굳게 다물고 썰매를 밀었다.
오후 3시경, 썰매의 거리계(Odometer)가 마침내 약속된 수치에 도달했다. 아문센이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환호성보다는 깊은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아문센은 미리 준비해온 노르웨이 국기를 꺼냈다. 그는 이 영광을 독점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섯 명의 대원 모두가 국기 봉을 함께 잡고 설원에 꽂게 했다. 이는 혹시라도 나중에 발생할지 모를 기록의 정당성 논란을 방지함과 동시에,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다.
아문센은 단순한 도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라이벌인 스콧, 혹은 후대의 과학자들이 "당신들이 도달한 곳은 진짜 남극점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다. 사실 당시의 조악한 육분의(Sextant)와 인공 수평의만으로는 정확한 극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즉시 기지를 구축하고 이곳을 '폴헤임(Polheim, 극지의 집)'이라 명명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집요한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대원들은 6시간 간격으로 교대로 태양의 고도를 측정했다.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태양의 고도가 변하지 않는 지점이 정확한 극점이기 때문이었다. 아문센은 세 명의 대원(뵤란드, 한센, 위스팅)을 각각 서로 다른 세 방향으로 20km씩 더 전진하게 했다. 이는 혹시라도 계산 착오로 인해 극점을 지나쳤거나 미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그물망처럼 해당 지역을 훑기 위함이었다. [30]
며칠간의 관측 결과, 그들은 처음 멈췄던 곳에서 약 수백 미터 떨어진 지점이 더 정확한 극점임을 확인하고 국기를 옮겨 심었다.
아문센은 12월 17일까지 폴헤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장비를 점검했다. 출발 전, 그는 그곳에 작은 실크 텐트를 남겨두었다. 텐트 안에는 스콧에게 보내는 편지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의 글이 담겨 있었다.
이는 겉으로는 신사적인 예우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가장 잔인한 증명이었다. 아문센은 자신이 귀환하는 길에 조난당해 죽더라도, 나중에 올 스콧이 이 편지를 발견함으로써 노르웨이 팀이 먼저 도착했음을 세상에 알리게 설계한 것이다. 또한 스콧에게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증인이 되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친애하는 스콧 선장님, 당신은 아마 우리가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디 이 편지를 노르웨이 국왕님께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안전한 귀환을 빕니다." [31]
12월 18일, 아문센 원정대는 폴헤임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올 때보다 짐은 가벼웠고, 개들은 여전히 힘이 넘쳤으며, 무엇보다 '성공했다'는 정신적 고양이 대원들을 지탱했다. 그들은 올 때 설치해둔 식량 저장소(Depot)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히 찾아내며 복귀했다.
그는 남극점 도달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에도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후대의 검증을 대비해 과학적 증거를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차가운 이성이 그를 '탐험의 신'으로 만들었으나, 동시에 영국인들에게는 '스포츠맨십이 없는 사기꾼'으로 매도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15. 완벽한 귀환[편집]
"우리는 단지 갔다가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한 시간에, 우리가 계획한 장소에, 우리가 계획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32]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게양한 아문센 일행은 약 3일간 주변 지형을 정밀 측정하며 자신들이 정말로 '점(Point)' 위에 서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12월 17일, 이들은 기지인 프람헤임(Framheim)을 향해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 귀환길은 탐험사에서 '가장 지루할 정도로 완벽한 후퇴'로 불린다.
라이벌 로버트 팰컨 스콧의 테라 노바 원정대가 귀환길에서 추위와 굶주림, 괴혈병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것과 달리, 아문센의 팀은 오히려 갈 때보다 올 때 더 살이 쪄서 돌아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여유로웠다. 이는 아문센의 치밀한 보급소(Depot) 설치 전략과 개썰매 운용의 극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문센은 남극점으로 향하는 길에 1도(약 110km) 간격으로 거대한 보급소를 설치했다. 단순히 식량을 묻어둔 것이 아니라, 각 보급소에서 좌우로 8km씩 약 300m 간격으로 '검은 깃발'을 매단 대나무 장대를 박아두었다.
남극의 화이트아웃(White-out) 현상 속에서도 대원들이 보급소의 본체를 놓치더라도 좌우로 길게 늘어선 깃발 중 하나만 발견하면 본체로 접근할 수 있게 설계했다.
아문센은 귀환 길에 필요한 식량의 3배 이상을 각 보급소에 비치했다. 심지어 마지막 보급소에서는 식량이 너무 많이 남아 대원들이 초콜릿과 비스켓을 눈 위에 버리고 갈 정도였다.[33]
당시 석유 캔은 납땜이 약해 기온 차로 연료가 증발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문센은 모든 연료 캔을 이중으로 밀봉하고 납땜 부위를 강화하여, 귀환 시점에 단 한 방울의 연료 유실도 허용하지 않았다.
귀환길에서 아문센 일행의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갈 때는 지형 정찰과 보급소 설치를 겸하느라 하루 평균 20~25km를 이동했지만, 돌아올 때는 이미 닦여진 길을 따라 하루 평균 35~50km를 주파했다.
탐험 시작 당시 52마리였던 개들은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 18마리로 줄어 있었다. 아문센은 지치거나 부상당한 개를 사살하여 남은 개들과 대원들의 식량으로 사용하는 냉혹한 결단을 내렸다. 비인도적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이 '신선한 고기' 공급 덕분에 대원들은 괴혈병 증세가 전혀 없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노르웨이인답게 전 대원이 수준급의 스키어였다. 이들은 썰매에 몸을 맡기거나 스키를 타며 가볍게 이동했다. 반면 영국팀은 스키가 서툴러서 썰매를 직접 몸으로 끌어야 했기에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귀환길은 너무나 순조로웠기에 대원들은 탐험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오스카 비스팅(Oscar Wisting)의 일기에 따르면, "우리는 마치 일요일 오후 산책을 하는 기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1년 12월 25일, 이들은 빙하 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아문센은 미리 준비해둔 특별식과 시가를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영하 30도의 극지에서 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첫 번째 출발 실패 당시 아문센과 크게 충돌했던 얄마르 요한센은 본대에서 제외되어 부차적인 탐험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귀환 후 그를 차갑게 대했으나, 적어도 탐험의 성과를 공유하는 데 있어서는 절차를 지켰다.[34]
남극점을 떠난 지 38일 만에 아문센 일행은 기지인 프람헤임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기지에 도착했을 때, 기지 잔류 대원들은 아문센 일행이 너무 빨리 돌아온 것에 경악했다. 아문센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기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커피 좀 남았나?"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총 여행 거리 약 3,000km, 소요 시간 99일.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원래 계획보다 약 열흘 정도 일찍 도착했다. 이 완벽한 일정 관리는 아문센이 극지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경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아문센은 승리를 만끽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스콧에 대한 걱정과 경쟁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남극점에 남겨둔 자신의 편지를 스콧이 발견했을지, 혹은 스콧이 자신보다 먼저 다른 경로로 귀환했을지를 염려했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은 완벽했으며, 만약 누군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시스템의 부재 때문일 것이라고.
2.16. 승리와 비극[편집]
1912년 3월 7일, 호주 태즈메이니아의 호바트 항구에 프람 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아문센은 상륙하자마자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와 자신의 형 레온(Leon)에게 "남극점에 도달했음. 모두 무사함."이라는 짧은 전보를 보냈다.이 승전보는 전 세계 언론을 강타했다. 아문센은 즉시 전 세계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동시에 '영국 신사 스콧의 뒤통수를 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 섞인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아문센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세운 치밀한 계획이 완벽하게 작동했음을 증명했고, 대원 전원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아문센은 호바트에서 열린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개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문센이 호바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때, 로버트 팰컨 스콧과 그의 네 동료(에드워드 윌슨, 로런스 오츠, 헨리 바워스, 에드거 에반스)는 남극의 빙붕 위에서 처절한 죽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문센보다 34일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던 스콧 일행은 그곳에서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를 보며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35]스콧 탐험대의 비극은 단순한 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문센이 5,200kcal 이상의 고열량 식단과 신선한 고기를 섭취하며 괴혈병을 원천 차단한 것과 달리, 스콧 일행은 극심한 영양실조와 비타민 결핍에 시달렸다. 특히 스콧이 고집했던 '인력 거치(Man-hauling)' 방식은 대원들의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냈고,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비정상적인 추위는 그들을 한계로 몰아넣었다.
에드거 에반스는 빙하에서 추락한 뒤 뇌진탕 증세를 보이다 가장 먼저 사망했다. 로런스 오츠는 심각한 동상으로 일행의 짐이 되자,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군."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했다.
마지막 3인은 1912년 3월 말, 보급 기지를 단 18km 남겨두고 강력한 눈보라에 갇혀 텐트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 속에 숨을 거두었다.
1912년 11월, 스콧의 소식이 끊긴 지 수개월이 지난 후 수색대에 의해 발견된 그들의 최후는 참혹했다. 스콧과 두 명의 동료(에드워드 윌슨, 헨리 바워스)는 거대한 보급소인 '원 톤 데포(One Ton Depot)'를 고작 11마일(약 18km) 남겨두고 텐트 안에서 동사했다.[36]
1913년 2월, 스콧 일행의 시신과 일기가 발견되자 영국 사회는 거대한 슬픔과 동시에 분노에 휩싸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RGS)와 언론들은 아문센의 승리를 축하하기보다 스콧의 '숭고한 희생'을 신격화하는 데 집중했다.
영국인들에게 아문센은 '개를 잡아먹으며 비겁하게 앞서 나간 사냥꾼'이었고, 스콧은 '과학적 탐구와 영국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킨 기사'였다. 아문센이 런던에서 강연할 때, 청중들이 "개를 위한 세 번의 치어스(Three cheers for the dogs)!"를 외치며 그를 조롱한 일화는 유명하다.[37]
스콧의 시신 옆에는 그의 일기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문센에 대한 원망보다는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비장미 넘치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이 일기가 공개되자 영국은 물론 전 세계는 죽은 스콧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숭배하기 시작했고, 역설적으로 살아서 승리한 아문센은 "비겁하게 이긴 기술자"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아문센의 승리는 완벽해 보였으나 내부적인 상처도 깊었다. 원정 초기에 아문센의 무리한 출발 결정에 항의했던 유능한 탐험가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과의 불화가 치명적이었다. 아문센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요한센을 남극점 도달 명단에서 제외하고 기지에 남겨두는 복수를 감행했다.
귀환 후, 아문센은 요한센의 공로를 철저히 무시했고, 남극 탐험의 모든 영광에서 그를 배제했다. 난센과 함께 북극을 누볐던 영웅 요한센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1913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38] 아문센은 요한센의 부고를 듣고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으나, 평생 동안 이 사건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증언이 많다.
오늘날 현대 탐험사에서는 아문센을 압도적인 승자로 평가한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식 영웅주의에 밀려 스콧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었으나, 현대 과학과 생존술의 관점에서 보면 아문센의 판단은 매 순간이 정답에 가까웠다.
아문센은 비타민 C가 풍부한 신선한 고기와 베리류를 포함한 페미컨을 섭취했으나, 스콧은 통조림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여 괴혈병을 자초했다. 극지 환경에 최적화된 그린란드 견종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이동했으나, 스콧은 땀 배출이 안 되어 얼어 죽는 포니(조랑말)와 금방 고장 나는 초기형 모터 썰매를 가져갔다.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지혜를 빌려 통기성이 좋은 가죽 옷을 입어 땀이 얼어붙는 것을 방지했지만, 스콧은 '최첨단'이라 믿었던 울 소재 의류를 입어 땀이 얼어붙어 체온을 뺏겼다.
결국 이 시기 아문센에게 "영광스러운 승리 뒤에 가려진 냉혹한 리더십의 대가와 라이벌의 죽음으로 인한 엇갈린 명성"이었다. 그는 지구의 끝을 정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동료와의 신뢰와 대중의 시선이라는 또 다른 극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2.17.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문센[편집]
1911년 남극점 정복이라는 인류사적 쾌거를 이루고 귀환한 로알 아문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평화로운 영광만이 아니었다. 1914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극 중 하나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문센의 향후 탐험 계획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을 표방했으나, 지정학적 위치상 영국과 독일 제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아문센은 본래 남극점 정복 이후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북극점 표류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프리드요프 난센이 프람 호를 타고 시도했던 방식, 즉 배를 얼음에 가두어 해류의 흐름에 따라 북극점을 통과하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물류와 자금을 집어삼켰다. 탐험에 필요한 특수 선박의 건조 비용은 폭등했고, 대원들은 군에 징집되거나 전쟁의 공포 속에서 탐험 참여를 망설였다.
아문센은 전쟁 초기,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노르웨이 상선들이 침몰하고 수많은 노르웨이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하며 분노했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보수적인 유럽 탐험계와 귀족 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정치적 선언이었다.[39]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 뜻밖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 중 발생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주식 시장의 과열 속에서 아문센은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영리한 투자를 통해 탐험 자금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가 '전쟁 중에 돈을 벌려 했다'는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프람 호가 노후화되어 더 이상 북극의 거친 압축빙을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 새로운 탐험선인 '마드 호'를 설계하고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배의 이름은 당시 노르웨이의 왕비였던 마드 왕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마드 호는 아문센의 모든 경험이 집약된 결정체였다.
선체 구조는 압축빙에 눌렸을 때 위로 솟구쳐 오를 수 있도록 달걀 모양의 곡선을 극대화했다.
엔진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세미-디젤 엔진을 장착하여 연료 효율을 높였다.
내부 설비는 장기간의 고립 생활을 견디기 위해 대원들의 심리적 안정을 고려한 개인 공간과 전용 도서실을 갖추었다.
전쟁 중이라 강철과 목재 가격이 평시의 5~10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빚을 내어 이 배를 완성시켰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전쟁의 끝자락에서 북동항로를 거쳐 북극해로 진입하려는 대담한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1차 대전은 인류에게 비행기와 잠수함, 독가스라는 기계화된 전쟁의 공포를 알려주었다. 아문센 역시 이 대전쟁을 지켜보며 탐험의 방식이 바뀌어야 함을 직감했다. 그는 더 이상 개썰매와 인력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현대 탐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아문센은 미국을 방문하여 항공기 기술의 발전을 목격하게 된다. 전쟁터에서 정찰과 폭격을 담당하던 비행기가 극지의 광활한 얼음 평원을 가로지르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24번 챕터에서 다루는 이 짧은 전쟁기 동안, 아문센은 '지상의 정복자'에서 '하늘의 개척자'로 변모하는 사상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쟁은 아문센의 인간관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랜 동료였던 이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곁을 떠났고, 아문센 자신도 탐험 준비 과정에서 겪는 막대한 부채와 압박감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겪었다. 그는 우란니엔보르의 자택에서 홀로 지도와 도표를 그리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세상은 피로 물들고 있는데, 나는 얼음 조각 위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론적으로 "전쟁이 파괴를 일삼을 때, 탐험은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유일한 창조적 행위"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아문센은 마침내 마드 호를 이끌고 오슬로 항을 떠난다. 전 세계가 종전의 기쁨과 혁명의 불길(러시아 혁명)로 뒤덮여 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문명 세계를 등지고 얼음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는 단순한 탐험의 재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광기에서 벗어나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질서 앞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본래 남극점 정복 이후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북극점 표류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프리드요프 난센이 프람 호를 타고 시도했던 방식, 즉 배를 얼음에 가두어 해류의 흐름에 따라 북극점을 통과하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물류와 자금을 집어삼켰다. 탐험에 필요한 특수 선박의 건조 비용은 폭등했고, 대원들은 군에 징집되거나 전쟁의 공포 속에서 탐험 참여를 망설였다.
아문센은 전쟁 초기,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노르웨이 상선들이 침몰하고 수많은 노르웨이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하며 분노했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보수적인 유럽 탐험계와 귀족 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정치적 선언이었다.[39]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 뜻밖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 중 발생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주식 시장의 과열 속에서 아문센은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자금을 모으는 한편, 영리한 투자를 통해 탐험 자금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가 '전쟁 중에 돈을 벌려 했다'는 비난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프람 호가 노후화되어 더 이상 북극의 거친 압축빙을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 새로운 탐험선인 '마드 호'를 설계하고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배의 이름은 당시 노르웨이의 왕비였던 마드 왕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마드 호는 아문센의 모든 경험이 집약된 결정체였다.
선체 구조는 압축빙에 눌렸을 때 위로 솟구쳐 오를 수 있도록 달걀 모양의 곡선을 극대화했다.
엔진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세미-디젤 엔진을 장착하여 연료 효율을 높였다.
내부 설비는 장기간의 고립 생활을 견디기 위해 대원들의 심리적 안정을 고려한 개인 공간과 전용 도서실을 갖추었다.
전쟁 중이라 강철과 목재 가격이 평시의 5~10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빚을 내어 이 배를 완성시켰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대신, 전쟁의 끝자락에서 북동항로를 거쳐 북극해로 진입하려는 대담한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1차 대전은 인류에게 비행기와 잠수함, 독가스라는 기계화된 전쟁의 공포를 알려주었다. 아문센 역시 이 대전쟁을 지켜보며 탐험의 방식이 바뀌어야 함을 직감했다. 그는 더 이상 개썰매와 인력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현대 탐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아문센은 미국을 방문하여 항공기 기술의 발전을 목격하게 된다. 전쟁터에서 정찰과 폭격을 담당하던 비행기가 극지의 광활한 얼음 평원을 가로지르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24번 챕터에서 다루는 이 짧은 전쟁기 동안, 아문센은 '지상의 정복자'에서 '하늘의 개척자'로 변모하는 사상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쟁은 아문센의 인간관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랜 동료였던 이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곁을 떠났고, 아문센 자신도 탐험 준비 과정에서 겪는 막대한 부채와 압박감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겪었다. 그는 우란니엔보르의 자택에서 홀로 지도와 도표를 그리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 그는 "세상은 피로 물들고 있는데, 나는 얼음 조각 위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론적으로 "전쟁이 파괴를 일삼을 때, 탐험은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유일한 창조적 행위"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아문센은 마침내 마드 호를 이끌고 오슬로 항을 떠난다. 전 세계가 종전의 기쁨과 혁명의 불길(러시아 혁명)로 뒤덮여 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문명 세계를 등지고 얼음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는 단순한 탐험의 재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광기에서 벗어나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질서 앞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이기도 했다.
2.18. 북동항로 개척 (1918-1920)[편집]
"우리는 다시 얼음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동쪽이다. 남극에서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노르웨이의 깃발이 북쪽 바다에서도 당당히 휘날릴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40]
1911년 남극점 정복이라는 인류사적 대업을 달성한 아문센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년 시절부터 꿈꿔왔던 북극점 도달과 북동항로(Northern Sea Route)의 완전 개척이었다. 이미 북서항로를 완주했던 그에게 북동항로(유럽 북단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연안을 거쳐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항로)는 탐험가로서의 커리어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과도 같았다.
당시 북동항로는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셸드가 1878~1879년에 걸쳐 베가(Vega) 호를 타고 최초로 통과했으나, 이는 상업적 이용 가능성을 타진하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여정이었다. 아문센은 단순히 통과하는 것을 넘어, 북극해의 해류를 타고 북극점 근처까지 표류하며 과학적 데이터를 수집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는 그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프리드쇼프 난센이 프람 호를 타고 시도했던 방식의 재현이기도 했다.
아문센은 이번 원정을 위해 새로운 배를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배의 이름은 당시 노르웨이의 왕비였던 마드 왕비의 이름을 따서 '마드(Maud) 호'라 명명되었다.[41] 이 배는 프람 호의 설계를 계승하면서도 얼음의 압력을 견디는 능력을 더욱 강화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마드 호는 건조 단계부터 난항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자재비가 폭등했고, 숙련된 조선공들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으로 얻은 명성과 강연료, 그리고 개인적인 빚까지 끌어다 쓰며 제작비를 충당했다. 마드 호는 프람 호보다 선체가 짧고 폭이 넓어 얼음 위에 얹혀지는 구조였으나, 훗날 항해 과정에서는 지나치게 둔중한 기동성 때문에 대원들의 애를 먹이게 된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은 아문센의 계획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원래 1914~1915년경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전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보급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특히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노르웨이 선박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 시기 아문센은 탐험가로서의 활동 대신 비즈니스와 정치적 행보에 집중했다. 그는 전쟁 특수로 요동치는 주식 시장에 뛰어들어 자금을 불리려 노력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42] 또한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노르웨이 선원들이 사망하자, 그는 과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받은 훈장을 반납하며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모험가를 넘어 노르웨이의 민족적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18년 6월 16일, 마드 호는 오슬로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대원은 아문센을 포함해 총 9명이었으며, 여기에는 남극점 원정의 동지였던 오스카 위스팅(Oscar Wisting)과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항해 초반부터 난관은 계속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시베리아 연안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했고, 북극해의 얼음 상태는 예년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마드 호는 항해 시작 불과 몇 달 만인 1918년 9월, 첼류스킨 곶(Cape Chelyuskin) 근처에서 얼음에 갇히고 말았다. 아문센은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
이 첫 번째 월동(Wintering) 기간 동안 아문센은 인생 최악의 시련 중 하나를 겪게 된다.
그는 배 근처에서 관측 활동을 하던 중 빙판에서 미끄러져 왼쪽 어깨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그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깨 부상이 채 낫기도 전인 11월, 배 근처에 나타난 북극곰의 습격을 받았다. 부상당한 몸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나, 곰의 발톱에 등과 엉덩이를 깊게 긁히는 부상을 입었다. 만약 동료들이 제때 총을 들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는 북극곰의 먹이가 되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또한 좁은 선실 내에서 난로를 피우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 사고로 인해 아문센의 심장은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으며, 훗날 그의 건강 악화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 시기 마드 호의 내부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아문센은 부상으로 인해 예민해져 있었고, 대원들은 끝 보이지 않는 얼음 속의 고립에 지쳐갔다. 특히 아문센은 과거 남극점 원정 당시 자신에게 대들었던 햘마르 요한센을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마드 호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재현되었다.
항해술의 달인이었던 헬메르 한센과의 불화가 대표적이었다. 아문센은 자신의 지시가 즉각 이행되지 않는 것에 분노했고, 결국 원정 도중 한센을 파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아문센이 목표 달성을 위해 동료와의 관계조차 도구화하는 '냉혹한 리더'로서의 면모가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마드 호는 1919년 여름 다시 항해를 시작했으나, 또다시 얼음에 막혀 아욘 섬(Ayon Island)에서 두 번째 겨울을 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현지 원주민인 추크치족과 교류하며 인류학적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결국 1920년 7월 27일, 마드 호는 알래스카의 노움(Nome)에 도착하며 북동항로의 주요 구간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문센이 목표로 했던 '북극해 표류를 통한 과학적 검증'은 선체의 결함과 기상 악화로 인해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2.19. 경제적 파산[편집]
"남극점의 정복자도 결국 은행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1920년대 초반 그의 삶은 처절한 경제적 파산으로 점철되었다. 흔히 탐험가라고 하면 미지의 세계를 유랑하는 낭만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현실의 탐험은 거대한 '자본의 집약체'였다. 아문센은 뛰어난 탐험가였을지는 몰라도, 능숙한 사업가나 회계사는 아니었다. 특히 마드(Maud) 호 원정의 장기화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아문센이 북동항로 개척과 북극점 도달을 위해 건조한 '마드 호'는 그 자체로 돈을 먹는 하마였다. 1918년부터 시작된 이 원정은 당초 계획보다 훨씬 길어졌고, 러시아 혁명과 내전이라는 정세 불안까지 겹치며 보급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1차 대전 직후 노르웨이 크로네의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은 아문센의 예산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아문센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비행기를 탐험에 도입하려 했으나, 당시 항공기 기술은 걸음마 단계였고 기체 구입비와 유지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을 했지만, 대중은 이미 '남극점 정복'이라는 과거의 영광보다는 당장의 경제 불황에 더 민감했다.
결국 1924년 9월, 아문센은 노르웨이 법원으로부터 개인 파산 선고를 받게 된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았던 민족 영웅이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그의 부채는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우란니엔보르(Uranienborg) 저택마저 압류될 위기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극심한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얼음 위에서 죽음과 싸울 때보다, 오슬로의 은행가들 앞에서 서류 뭉치를 들고 서 있을 때 더 큰 공포를 느낀다."
파산 소식이 전해지자 노르웨이 여론은 급격히 냉담해졌다. "영웅이 돈 관리도 못 하느냐"는 비아냥부터, 그가 탐험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근거 없는 루머까지 돌았다. 특히 그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인물들과 채권자들은 그를 '무책임한 도박꾼'으로 몰아세웠다.
아문센의 형이자 평생의 사업 파트너였던 레온은 동생의 무절제한 탐험 비용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아문센은 형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었으며,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43]
당시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던 일부 신문들은 아문센의 파산 과정을 생중계하듯 보도하며 그의 명예를 난도질했다.
경제적 몰락은 그의 사생활에도 비극을 가져왔다. 아문센은 시베리아 원정 당시 만난 두 명의 원주민 소녀(카코니타와 카밀라)를 입양하여 노르웨이에서 교육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파산으로 인해 더 이상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어지자, 눈물을 머금고 아이들을 다시 시베리아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는 아문센에게 평생의 죄책감으로 남았으며, 훗날 그가 더욱 고립되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던 순간, 아문센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미국의 부유한 석탄 재벌의 아들이자 모험가였던 링컨 엘즈워스(Lincoln Ellsworth)였다. 엘즈워스는 아문센의 영웅적 면모를 존경해 왔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해 아문센의 빚을 갚아주고 새로운 항공 탐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 만남은 아문센을 나락에서 건져 올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노르웨이의 영웅이 미국의 자본에 팔려 갔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아문센에게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다시 극지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이 시기의 파산은 아문센이라는 인간의 '강철 같은 의지'가 경제적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어떻게 균열이 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남극의 블리자드는 견뎌냈지만, 자본주의의 냉혹한 생리는 견뎌내지 못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망가졌고, 경제적으로는 파산 위기에 몰렸으며, 대원들과의 신뢰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실패에 가까운 경험은 아문센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이제 선박의 시대는 끝났다. 극지를 정복할 새로운 도구는 비행기다."
이후 아문센의 탐험은 바다에서 하늘로 그 무대를 옮기게 되며, 이는 탐험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2.20. 선박에서 비행기로[편집]
1920년대 초반, 로알 아문센은 일생일대의 전환점에 직면한다. 1918년부터 시작된 '마드(Maud) 호' 원정이 시베리아 연안의 얼음에 갇혀 지지부진해지면서,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해상 탐험이 가진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수 년 동안 얼음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식은 너무나 느렸고, 예산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아문센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태동기였던 항공기였다.
당시 항공 기술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급격히 발전했으나, 극지의 살인적인 추위와 불규칙한 기류를 견디기에는 여전히 미성숙한 단계였다. 하지만 아문센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직관했다. "이제 개썰매나 배로 수개월 걸릴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주파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그는 1921년경부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공기를 이용한 북극점 도달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아문센은 단순히 비행기를 '타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14년 이미 노르웨이 민간인 최초로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을 정도로 선구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44] 그는 쉰 살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조종간을 잡으려 했으며, 이는 당시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는 북극의 유빙 지대는 배가 접근하기 너무 위험하지만, 하늘을 통해서라면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 세우기를 넘어, 북극해 중앙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대륙'을 찾으려는 과학적 호기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공 탐험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드 호 원정으로 이미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아문센에게 비행기 구입비와 유지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는 강연 정기권 판매, 자서전 집필, 심지어는 자신의 명성을 담보로 한 사채까지 끌어다 쓰며 자금을 모았다.
1922년, 그는 마침내 미국에서 '커티스 오리올(Curtiss Oriole)' 기종을 구입하여 마드 호에 실었다. 계획은 마드 호가 얼음에 갇혀 있는 동안 비행기를 띄워 북극점을 찍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비행기는 이륙 과정에서 파손되었고, 수리 부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아문센이 드디어 노망이 났다", "바다의 사자가 하늘에서 길을 잃었다"라며 조롱 섞인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아문센이 직면했던 항공 탐험의 기술적 난관은 크게 세 가지였다.
당시 항공 기술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급격히 발전했으나, 극지의 살인적인 추위와 불규칙한 기류를 견디기에는 여전히 미성숙한 단계였다. 하지만 아문센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직관했다. "이제 개썰매나 배로 수개월 걸릴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주파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그는 1921년경부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공기를 이용한 북극점 도달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아문센은 단순히 비행기를 '타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14년 이미 노르웨이 민간인 최초로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을 정도로 선구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44] 그는 쉰 살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조종간을 잡으려 했으며, 이는 당시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는 북극의 유빙 지대는 배가 접근하기 너무 위험하지만, 하늘을 통해서라면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 세우기를 넘어, 북극해 중앙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대륙'을 찾으려는 과학적 호기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공 탐험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마드 호 원정으로 이미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아문센에게 비행기 구입비와 유지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는 강연 정기권 판매, 자서전 집필, 심지어는 자신의 명성을 담보로 한 사채까지 끌어다 쓰며 자금을 모았다.
1922년, 그는 마침내 미국에서 '커티스 오리올(Curtiss Oriole)' 기종을 구입하여 마드 호에 실었다. 계획은 마드 호가 얼음에 갇혀 있는 동안 비행기를 띄워 북극점을 찍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비행기는 이륙 과정에서 파손되었고, 수리 부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주변에서는 "아문센이 드디어 노망이 났다", "바다의 사자가 하늘에서 길을 잃었다"라며 조롱 섞인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아문센이 직면했던 항공 탐험의 기술적 난관은 크게 세 가지였다.
-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극지의 공기는 엔진 내부의 연료 공급 장치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이는 곧 엔진 정지와 추락으로 이어졌다.
- 자북점에 가까워질수록 자기 나침반은 미친 듯이 회전하며 방향을 잡지 못했다. 아문센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태양의 위치를 이용한 '태양 나침반'을 별도로 고안해야 했다.
- 평탄한 활주로가 있을 리 만무한 북극에서, 울퉁불퉁한 유빙 위에 착륙하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아문센은 결국 바퀴 대신 스키를 장착하거나, 물 위와 얼음 위를 동시에 오갈 수 있는 '비행정(Flying Boat)'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아문센은 이 시기 쓴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썰매는 위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영광이다. 이제 인간은 새의 눈으로 지구의 정점을 바라봐야 한다. 엔진 소음이 정적을 깨뜨릴 때, 나는 비로소 20세기형 탐험가로 다시 태어남을 느낀다."
이러한 신념은 훗날 그를 파산 위기에서 구해줄 귀인, 미국의 부호 링컨 엘즈워스(Lincoln Ellsworth)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엘즈워스는 아문센의 항공 탐험 계획에 매료되어 거액의 자금을 쾌척했고, 이는 인류 최초의 북극점 비행 시도인 N-24, N-25 원정으로 이어지는 서막이 되었다.
비록 초기 시도들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고, 아문센은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으며 조롱당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류의 미래는 하늘에 있으며, 자신이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집념은 훗날 1925년 N-25 비행정의 사투와 1926년 '노르웨이 호' 비행선의 대성공으로 증명되게 된다.
2.21. N-24와 N-25 비행정[편집]
그는 미국의 자산가 링컨 엘즈워스(Lincoln Ellsworth)로부터 극적인 자금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제 비행정인 '도르니에 발(Dornier Wal)' 두 대를 구입한다. 이것이 바로 전설적인 N-24와 N-25호다.
아문센이 선택한 도르니에 발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였다.
롤스로이스 이글 IX (Rolls-Royce Eagle IX) 360마력 엔진 2기[45]는 금속제 선체를 가진 비행정으로, 물 위뿐만 아니라 눈 위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아문센은 이 비행기에 자신과 엘즈워스, 그리고 숙련된 조종사 히알마르 리세르라르센(Hjalmar Riiser-Larsen) 등 총 6명의 정예 요원을 태우고 1925년 5월 21일, 스발바르 제도의 킹스베이(Ny-Ålesund)를 떠나 북극점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순조롭던 비행은 이륙 8시간 만에 비극으로 변했다. N-25호의 엔진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고, 설상가상으로 주변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아문센은 얼음의 틈새(리드, Lead)를 발견하고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뒤따라오던 N-24호 역시 기체 결함으로 인근에 불시착하며 두 기체는 서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채 고립되었다.
이들이 착륙한 지점은 북극점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북위 87도 44분. 인류가 항공기로 도달한 가장 높은 위도였으나,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N-24호는 착륙 과정에서 기체가 심하게 파손되어 재이륙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6명의 대원은 N-25호 주변으로 모여 생존을 위한 사투를 시작했다.
당시 이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루 배급량은 불과 300g의 펨미컨과 비스킷뿐이었다. 얼음을 치울 도구라고는 짧은 목재 삽과 식칼뿐이었다.
북극해의 해류는 끊임없이 얼음을 이동시켰고, 정성껏 닦아놓은 활주로가 하룻밤 사이에 갈라지거나 솟아오르기 일쑤였다.
여기서 아문센의 무시무시한 리더십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그는 대원들에게 "우리가 스스로 활주로를 만들지 못하면 여기서 죽는다"며 독려했다. 대원들은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약 600톤에 달하는 얼음과 눈을 맨손으로 옮겼다. 비행정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평평한 500m 길이의 활주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6월 15일, 불시착 25일째 되는 날. 마지막 남은 연료를 모두 쏟아부은 N-25호에 6명의 대원이 모두 탑승했다. 기체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불필요한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버렸다. 조종사 리세르라르센은 부서질 듯 요동치는 기체를 이끌고 얼음 끝단에서 극적으로 부상(Lift-off)에 성공했다.
노르웨이 본국에서는 이미 이들이 전멸했을 것이라고 믿고 추도식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N-25호가 스발바르 앞바다에 내려앉았을 때, 전 세계는 다시 한번 아문센이라는 이름 앞에 경악했다. 비록 북극점 정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극한의 상황에서 전원이 살아 돌아온 이 사건은 '남극점 정복' 못지않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각인되었다.
이 사건 이후 아문센은 비행기보다 더 안정적인 비행선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 '노르웨이(Norge) 호' 원정으로 이어진다.
이 탐험을 통해 아문센은 미국의 억만장자 링컨 엘즈워스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엘즈워스는 이후 아문센의 모든 탐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문센은 이 사투를 거치며 더욱 냉철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함께 고생했던 대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여 일부와는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46]
아문센이 선택한 도르니에 발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였다.
롤스로이스 이글 IX (Rolls-Royce Eagle IX) 360마력 엔진 2기[45]는 금속제 선체를 가진 비행정으로, 물 위뿐만 아니라 눈 위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아문센은 이 비행기에 자신과 엘즈워스, 그리고 숙련된 조종사 히알마르 리세르라르센(Hjalmar Riiser-Larsen) 등 총 6명의 정예 요원을 태우고 1925년 5월 21일, 스발바르 제도의 킹스베이(Ny-Ålesund)를 떠나 북극점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순조롭던 비행은 이륙 8시간 만에 비극으로 변했다. N-25호의 엔진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고, 설상가상으로 주변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아문센은 얼음의 틈새(리드, Lead)를 발견하고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뒤따라오던 N-24호 역시 기체 결함으로 인근에 불시착하며 두 기체는 서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채 고립되었다.
이들이 착륙한 지점은 북극점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북위 87도 44분. 인류가 항공기로 도달한 가장 높은 위도였으나, 기쁨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N-24호는 착륙 과정에서 기체가 심하게 파손되어 재이륙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6명의 대원은 N-25호 주변으로 모여 생존을 위한 사투를 시작했다.
당시 이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루 배급량은 불과 300g의 펨미컨과 비스킷뿐이었다. 얼음을 치울 도구라고는 짧은 목재 삽과 식칼뿐이었다.
북극해의 해류는 끊임없이 얼음을 이동시켰고, 정성껏 닦아놓은 활주로가 하룻밤 사이에 갈라지거나 솟아오르기 일쑤였다.
여기서 아문센의 무시무시한 리더십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그는 대원들에게 "우리가 스스로 활주로를 만들지 못하면 여기서 죽는다"며 독려했다. 대원들은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약 600톤에 달하는 얼음과 눈을 맨손으로 옮겼다. 비행정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평평한 500m 길이의 활주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6월 15일, 불시착 25일째 되는 날. 마지막 남은 연료를 모두 쏟아부은 N-25호에 6명의 대원이 모두 탑승했다. 기체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불필요한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버렸다. 조종사 리세르라르센은 부서질 듯 요동치는 기체를 이끌고 얼음 끝단에서 극적으로 부상(Lift-off)에 성공했다.
노르웨이 본국에서는 이미 이들이 전멸했을 것이라고 믿고 추도식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N-25호가 스발바르 앞바다에 내려앉았을 때, 전 세계는 다시 한번 아문센이라는 이름 앞에 경악했다. 비록 북극점 정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극한의 상황에서 전원이 살아 돌아온 이 사건은 '남극점 정복' 못지않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각인되었다.
이 사건 이후 아문센은 비행기보다 더 안정적인 비행선에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 '노르웨이(Norge) 호' 원정으로 이어진다.
이 탐험을 통해 아문센은 미국의 억만장자 링컨 엘즈워스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엘즈워스는 이후 아문센의 모든 탐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문센은 이 사투를 거치며 더욱 냉철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함께 고생했던 대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여 일부와는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46]
2.22. 움베르토 노빌레와의 갈등[편집]
1926년, 비행선 '노르게(Norge) 호'를 이용한 북극점 상공 통과 비행은 인류 탐험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두 거물급 인사의 치졸하고도 파괴적인 자존심 싸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노르웨이의 영웅 로알 아문센과 이탈리아의 비행선 설계자이자 조종사인 움베르토 노빌레였다.
이들의 만남은 애초부터 '필요에 의한 비즈니스'였다. 아문센은 비행기(N-24, N-25)를 이용한 북극 정찰 실패 이후, 장거리 비행에 유리한 비행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반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자국의 기술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고, 비행선 'N-1'의 설계자인 노빌레를 파견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문제는 "누가 이 원정의 진짜 주인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아문센은 이 원정을 자신의 원정으로 생각했다. 그는 원정 비용의 상당 부분을 미국인 자산가 링컨 엘즈워스와 함께 조달했으며, 탐험의 총책임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 그러나 노빌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비행선을 직접 설계하고 조종하는 자신이 원정의 핵심이며, 아문센은 그저 '승객' 혹은 '가이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갈등은 원정 전부터 조짐을 보였다. 노빌레는 이탈리아인 승무원들을 대거 동행시키며 원정대를 이탈리아 색채로 물히려 했고, 아문센은 이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특히 비행선에 게양할 국기를 두고도 노르웨이 국기보다 이탈리아 국기가 더 크거나 화려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유치한 기 싸움이 오갔다.[47]
1926년 5월 12일, 노르게 호가 북극점 상공에 도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아문센과 엘즈워스는 엄숙하게 국기를 투하하며 탐험의 성공을 만끽하려 했으나, 노빌레는 비행선 안에서 요란하게 축하 파티를 벌이며 이탈리아 군가를 틀어댔다. 아문센의 회고에 따르면, 노빌레는 마치 자신이 로마 제국의 정복자인 양 행동했으며, 이는 정적인 탐험을 지향하던 아문센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귀환 이후의 언론 플레이였다. 노빌레는 이탈리아 언론을 동원해 "이탈리아의 기술과 용기가 아문센을 북극으로 데려다주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에 분노한 아문센은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노빌레를 "오만하고 무능하며, 비행선 조종사일 뿐인 주제에 탐험가 행세를 하는 자"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노빌레를 가리켜 "공명심에 눈이 먼 이탈리아인", "탐험의 기본도 모르는 초짜"라며 깎아내렸다.
이들의 만남은 애초부터 '필요에 의한 비즈니스'였다. 아문센은 비행기(N-24, N-25)를 이용한 북극 정찰 실패 이후, 장거리 비행에 유리한 비행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반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자국의 기술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고, 비행선 'N-1'의 설계자인 노빌레를 파견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문제는 "누가 이 원정의 진짜 주인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아문센은 이 원정을 자신의 원정으로 생각했다. 그는 원정 비용의 상당 부분을 미국인 자산가 링컨 엘즈워스와 함께 조달했으며, 탐험의 총책임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 그러나 노빌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비행선을 직접 설계하고 조종하는 자신이 원정의 핵심이며, 아문센은 그저 '승객' 혹은 '가이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갈등은 원정 전부터 조짐을 보였다. 노빌레는 이탈리아인 승무원들을 대거 동행시키며 원정대를 이탈리아 색채로 물히려 했고, 아문센은 이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특히 비행선에 게양할 국기를 두고도 노르웨이 국기보다 이탈리아 국기가 더 크거나 화려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유치한 기 싸움이 오갔다.[47]
1926년 5월 12일, 노르게 호가 북극점 상공에 도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아문센과 엘즈워스는 엄숙하게 국기를 투하하며 탐험의 성공을 만끽하려 했으나, 노빌레는 비행선 안에서 요란하게 축하 파티를 벌이며 이탈리아 군가를 틀어댔다. 아문센의 회고에 따르면, 노빌레는 마치 자신이 로마 제국의 정복자인 양 행동했으며, 이는 정적인 탐험을 지향하던 아문센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귀환 이후의 언론 플레이였다. 노빌레는 이탈리아 언론을 동원해 "이탈리아의 기술과 용기가 아문센을 북극으로 데려다주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에 분노한 아문센은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노빌레를 "오만하고 무능하며, 비행선 조종사일 뿐인 주제에 탐험가 행세를 하는 자"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노빌레를 가리켜 "공명심에 눈이 먼 이탈리아인", "탐험의 기본도 모르는 초짜"라며 깎아내렸다.
"노빌레는 비행선이 조금만 흔들려도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했으며,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조종간을 잡고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진정한 탐험은 지상에서 발로 뛰는 자들의 몫이다." - 로알 아문센 [48]
이러한 아문센의 태도는 노르웨이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아무리 노빌레가 무례했더라도, 대선배이자 세계적인 영웅인 아문센이 젊은 기술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을 한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아문센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바쳐 쌓아온 '탐험가'라는 타이틀이 일개 기술자의 공명심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아문센과의 불화와 비난에 직면한 노빌레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아문센 없이 오로지 이탈리아의 힘만으로 북극을 정복하겠다며 새로운 비행선 '이탈리아(Italia) 호'를 건조하여 1928년 다시 북극으로 향했다.
이것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아문센은 노빌레의 이 무모한 계획을 전해 듣고 "그는 얼음을 우습게 보고 있다. 반드시 사고가 날 것이다"라며 냉소적인 예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예언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탈리아 호는 귀환 길에 추락했고, 노빌레와 대원들은 얼음 위에서 조난당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증오의 관계는 아문센의 마지막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아문센은 자신을 그토록 비난하고 괴롭혔던 라이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건 최후의 비행에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진정한 탐험가는 라이벌의 목숨조차 외면하지 않는다"는 아문센 식의 마지막 자존심 증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북극 탐험을 파시즘 선전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노빌레가 아문센과 사사건건 부딪힌 배경에는 무솔리니의 압박과 "이탈리아의 영광을 세계에 떨치라"는 특명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반면 아문센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철저히 개인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기에, 파시즘의 화신처럼 구는 노빌레와는 애초부터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또한, 노르게 호 내부의 열악한 환경도 갈등을 부추겼다. 영하의 기온 속에서 좁은 비행선 내부에 갇혀 지내던 대원들 사이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고, 노르웨이인 승무원들과 이탈리아인 승무원들 사이의 파벌 싸움까지 겹치면서 원정대는 이미 북극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심리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아문센은 이를 조율하기보다 자신의 권위로 찍어누르려 했고, 이것이 훗날 노빌레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2.23. 마지막 구출 작전과 최후[편집]
1928년 5월, 이탈리아의 항공 공학자이자 탐험가인 움베르토 노빌레가 지휘하는 비행선 '이탈리아(Italia) 호'가 북극점 도달 후 귀환하던 중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는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당시 아문센과 노빌레의 관계는 최악을 넘어 증오에 가까웠다. 2년 전인 1926년, 비행선 '노르웨이(Norge) 호'를 타고 북극 상공을 비행했을 당시, 탐험의 주도권과 공적을 두고 두 사람은 피 튀기는 설전을 벌였기 때문이다.[49] 아문센은 자서전에서 노빌레를 가리켜 "거만하고 무능하며 명예에 눈이 먼 이탈리아인"이라고 비난하며 은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빌레의 조난 소식이 전해지자 아문센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을 모두 접어두고 "한 명의 탐험가로서 조난당한 동료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선언하며 구조대 조직에 앞장섰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와 이탈리아 간의 외교적 긴장감 속에서도 아문센이 보여준 진정한 대인배적 면모이자, 탐험가로서의 숭고한 직업윤리였다.
정작 노르웨이 정부는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아문센의 직접적인 구조대 파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문센은 이미 여러 차례의 탐험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 상태에 가까웠기에 자력으로 비행기를 구할 수도 없었다. 이때 손을 내민 것이 프랑스 정부였다.
프랑스는 자국의 최신형 비행정인 '라탐(Latham) 47'호와 베테랑 조종사 르네 길보(René Guilbaud)를 아문센에게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이 비행정은 장거리 극지 비행에 완벽히 검증된 기종은 아니었으나, 일 분 일 초가 급했던 아문센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1928년 6월 18일, 아문센은 노르웨이 트롬쇠에서 라탐 47호에 몸을 실었다. 출발 직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묘한 말을 남겼다.
당시 아문센과 노빌레의 관계는 최악을 넘어 증오에 가까웠다. 2년 전인 1926년, 비행선 '노르웨이(Norge) 호'를 타고 북극 상공을 비행했을 당시, 탐험의 주도권과 공적을 두고 두 사람은 피 튀기는 설전을 벌였기 때문이다.[49] 아문센은 자서전에서 노빌레를 가리켜 "거만하고 무능하며 명예에 눈이 먼 이탈리아인"이라고 비난하며 은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빌레의 조난 소식이 전해지자 아문센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을 모두 접어두고 "한 명의 탐험가로서 조난당한 동료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선언하며 구조대 조직에 앞장섰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와 이탈리아 간의 외교적 긴장감 속에서도 아문센이 보여준 진정한 대인배적 면모이자, 탐험가로서의 숭고한 직업윤리였다.
정작 노르웨이 정부는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아문센의 직접적인 구조대 파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문센은 이미 여러 차례의 탐험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 상태에 가까웠기에 자력으로 비행기를 구할 수도 없었다. 이때 손을 내민 것이 프랑스 정부였다.
프랑스는 자국의 최신형 비행정인 '라탐(Latham) 47'호와 베테랑 조종사 르네 길보(René Guilbaud)를 아문센에게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이 비행정은 장거리 극지 비행에 완벽히 검증된 기종은 아니었으나, 일 분 일 초가 급했던 아문센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1928년 6월 18일, 아문센은 노르웨이 트롬쇠에서 라탐 47호에 몸을 실었다. 출발 직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묘한 말을 남겼다.
"나는 오랫동안 얼음과 싸워왔다.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얼음 위에서, 혹은 차가운 바다 위에서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탐험가의 가장 영광스러운 종말이기 때문이다."
당시 비행기에는 아문센을 포함해 조종사 길보, 부조종사 디트리히손 등 총 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기상 조건은 최악이었다. 짙은 안개와 낮은 구름이 트롬쇠 북쪽 바다를 뒤덮고 있었으며, 기온은 급격히 떨어져 기체 결빙(Icing)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문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노빌레와 그의 대원들이 얼음 위에서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오후 4시경, 라탐 47호로부터 마지막 무전이 도착했다. "베르뵤(Bjørnøya, 곰섬) 부근 통과 중, 짙은 안개로 시계 불량." 이것이 인류 최강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후 비행기는 무선 응답을 멈췄고,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으나 발견된 것은 몇 달 뒤 바다를 떠다니던 비행기의 보조 플로트(부표) 하나뿐이었다.[50] 아문센은 그렇게 자신이 평생을 바쳐 정복했던 북극해의 차가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아문센이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지 불과 며칠 뒤인 6월 23일, 노빌레는 스웨덴 조종사 에이나르 룬드보리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문센이 그토록 비판했던 노빌레는 살아 돌아왔고, 그를 구하려던 아문센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전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원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던진 아문센의 최후는 그를 비판하던 정적들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노빌레 역시 생존 후 평생 동안 아문센에 대한 부채 의식과 미안함을 안고 살아야 했다.[51]
그는 당시 탐험계에서 반쯤 은퇴한 상태였고, 경제적 파산과 명예 훼손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감을 겪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 구호 작전을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마감할 '최후의 무대'로 여겼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그는 구차하게 늙어가는 대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전장인 '얼음 바다'에서 영웅으로 남기를 택했다는 분석이다.
3. 탐험 철학[편집]
"준비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로알 아문센을 상징하는 단어는 '철저함(Thoroughness)'과 '실용주의(Pragmatism)'다. 그는 당시 대영제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이 지향했던 '영웅주의적 탐험' 즉, 인간의 정신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산화하는 방식을 극도로 혐오했다. 아문센에게 탐험은 '사투'가 아니라 '정밀하게 설계된 프로젝트'였으며, 대원이 고생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은 탐험가의 명예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준비 부족의 결과라고 믿었다.
아문센 철학의 정수는 "가장 잘 사는 법을 아는 자에게 배운다"는 것이었다. 그는 북서항로 개척 당시 네칠릭 에스키모 부족과 2년 가까이 생활하며 그들의 생존 방식을 흡수했다. 이는 당시 오만했던 유럽 탐험가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 탐험대(스콧 등)가 최첨단 울(Wool) 소재의 방한복을 고집하며 땀 배출 실패로 인한 동사에 시달릴 때,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순록 가죽 옷을 입었다. 가죽 옷은 헐거워서 공기층을 형성하고 땀을 배출하면서도 체온을 완벽히 보존했다.
아문센은 인간이 썰매를 끄는 '인력 거치(Man-hauling)'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대원의 체력을 고갈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고 보았다. 그는 수년 동안 개썰매 운용법을 익혔고, 개들을 단순히 '운송 수단'을 넘어 '비상시 식량'으로까지 계산에 넣는 냉혹할 정도의 치밀함을 보였다.[52]
아문센의 치밀함은 식량과 장비 보급에서 극에 달했다. 그는 남극점 정복을 위해 설치한 보급소(Depot)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보급소를 단순히 쌓아두는 게 아니라, 보급소를 중심으로 좌우 수 킬로미터에 걸쳐 깃발을 꽂은 깃대들을 배치했다. 이는 눈보라 속에서 보급소를 못 보고 지나쳐 몰사하는 비극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53]
당시 통조림은 납땜 문제나 무게 문제가 있었다. 아문센은 특수 제작된 가벼운 케이스를 사용했고, 모든 보급품의 무게를 1g 단위로 체크하여 썰매의 하중을 최적화했다.
그는 괴혈병이 신선한 비타민의 결핍에서 온다는 것을 벨지카 호 원정 때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남극행 식단에 절인 채소, 산딸기 잼, 그리고 무엇보다 신선한 고기(물개, 썰매개)를 반드시 포함시켰다.
그는 계획에 미친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변하면 그 계획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줄 아는 유연함도 갖추고 있었다.
평생의 꿈이었던 북극점을 피어리가 먼저 정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단 하루 만에 남극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투자자들의 반대나 사회적 체면은 그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최초'라는 결과값과 '탐험의 성공' 그 자체였다.
또한 1911년 9월, 너무 일찍 남극점으로 출발했다가 이상 기후(영하 56도)를 만나자 아문센은 대원들의 동상 위험을 감지하고 즉시 기지로 회군했다. 이때 부대장 요한센이 무능함을 비난하며 항명했으나, 아문센은 조직의 기강을 위해 그를 원정대에서 배제하는 냉정한 리더십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 이른 철수는 대원들의 생명을 구했고, 10월의 완벽한 재출발을 가능케 했다.
아문센은 탐험 중에도 매일같이 기상 데이터, 이동 거리, 대원들의 상태를 기록했다. 그는 감정에 호소하는 일기보다는 수치화된 기록을 선호했다.
"우리는 매일 오후 6시에 캠프를 쳤다. 개의 상태는 양호, 눈의 질감은 마찰계수 0.15 수준..."
이러한 데이터 중심적 사고는 훗날 그가 비행기(N-24, N-25)와 비행선(노르웨이 호)을 이용한 항공 탐험으로 전환할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기술의 발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자 '기계'를 통해 극지를 정복하는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의 철학이 완벽한 찬사만 받은 것은 아니다. 동료였던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을 파멸로 몰아넣은 냉혹함이나, 남극으로 갈 때 난센과 노르웨이 국왕을 속인 행위 등은 아문센의 인간적인 결함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는 '팀의 화합'보다는 '팀의 효율'을 중시했고, 리더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철학은 오늘날 현대 경영학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서도 자주 인용될 만큼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아문센의 탐험 철학은 한 마디로 '철저하게 통제된 모험'이었다. 그는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의 의지를 내세우는 대신, 자연의 법칙을 공부하고 그에 순응하는 장비를 갖추어 자연을 '이용'했다. 그가 남극점에서 영국 국기를 찾지 않고 자신의 노르웨이 국기를 꽂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콧보다 더 용감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치밀하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3.1. 장비와 기술[편집]
"영국인들은 고통을 견디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지만, 아문센은 고통을 방지하는 것을 실력으로 삼았다." 현대 극지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평가.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 정복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은 그의 초인적인 체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용주의에 기반한 '장비의 혁신'과 현지 적응 기술에 있었다. 그는 서구 문명의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당대 탐험가들과 달리, 수천 년간 극지에서 살아남은 이누이트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근대적 과학 기술과 접목시켰다.
아문센 탐험의 알파이자 오메가. 당시 대영제국의 로버트 팰컨 스콧이 "개썰매는 잔인하며, 인간이 직접 썰매를 끄는(Man-hauling) 것이 더 숭고하다"는 빅토리아 시대적 도덕관에 매몰되어 있을 때, 아문센은 철저하게 효율성만을 따졌다.
아문센은 그린란드산 에스키모 개 97마리를 엄선했다. 이 개들은 영하 40도 이하의 혹한에서도 잠을 자고, 최소한의 식량으로도 엄청난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개를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닌 '움직이는 식량'으로도 계산에 넣었다.[54] 여정 중 체력이 다하거나 쓸모가 없어진 개들을 도축하여 다른 개들에게 먹이고, 대원들의 단백질 섭취원으로 사용했다. 이는 썰매의 짐을 줄이면서도 식량을 확보하는 '자기 소모적'이지만 확실한 보급 전략이었다.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은 모두 숙련된 스키어였다. 개썰매 뒤에 매달려 스키를 타고 이동함으로써 체력 소모를 최소화했고, 이는 스콧 탐험대가 무거운 짐을 직접 끌며 에너지를 낭비하다 괴혈병과 동상에 걸린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문센은 요아(Gjøa) 호 항해 당시 네칠릭 이누이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복식 구조를 연구했다.
아문센은 영국식 두꺼운 모직(Wool) 코트와 캔버스 소재의 겉옷을 과감히 버렸다. 대신 순록 가죽과 늑대 털로 만든 이누이트 식 의복을 채택했다. 이 옷들의 특징은 '통기성'과 '보온성'의 완벽한 조화였다.
느슨하게 제작되어 옷 안의 공기가 순환하게 함으로써 땀이 차는 것을 방지했다. 극지에서 땀이 차서 얼어붙는 것은 곧 동사와 직결되는 문제였는데, 아문센은 이를 이누이트의 지혜로 해결했다. 에스키모식 장화를 개조하여 가볍고 따뜻하며 수분 배출이 용이하게 만들었다. 스콧의 대원들이 젖은 가죽 장화가 얼어붙어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던 것에 비해, 아문센의 팀은 발에 관련된 부상이 거의 없었다.
아문센은 탐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적이었던 괴혈병을 완벽히 통제했다.
말린 고기, 지방, 견과류를 섞어 만든 고열량 보급식. 아문센은 여기에 야채와 오트밀을 추가하여 영양 균형을 맞춘 '아문센 식 페미컨'을 특수 제작했다.
벨지카 호 원정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현지에서 잡은 물개와 펭귄 고기를 수시로 섭취했다. 날고기에 포함된 비타민 C가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는 몰랐을지언정, 경험적으로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연료 누출을 막기 위해 모든 연료통을 납땜하여 밀봉했다. 스콧 탐험대가 연료통 증발 문제로 인해 식수를 만들지 못해 갈증에 시달린 것과는 대조적인 꼼꼼함이었다.
또한 기존의 장비를 그대로 믿지 않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끊임없이 개조했다.
남극점 최종 돌격 전, 아문센은 겨울 내내 기지에서 썰매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다. 불필요한 무게를 깎아내어 썰매 자체의 무게를 기존의 절반 가까이 줄였으면서도 강도는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남극점 부근에서는 자기 나침반이 오작동하기 쉬웠기에, 그는 태양의 위치를 이용해 방향을 잡는 정밀한 측정 기구들을 여러 개 구비했다. 이는 그가 스콧보다 훨씬 정확한 경로로 남극점에 도달하고 귀환할 수 있게 했다.
아문센의 보급소 설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자 공학이었다.
그는 보급소를 설치할 때 단순히 한 지점에만 표시를 한 것이 아니라, 보급소를 중심으로 좌우 수 킬로미터에 걸쳐 검은색 깃발을 꽂은 긴 선을 구축했다.[55]
그리고 모든 보급 상자는 개봉하기 쉽도록 설계되었으며, 내용물은 1g 단위까지 계산되어 대원들의 열량 소비량과 완벽히 일치하도록 배분되었다.
4. 라이벌 로버트 스콧[편집]
인류 탐험사에서 이토록 극명하게 대비되는 라이벌은 드물다. 로알 아문센과 로버트 스콧은 같은 시기, 같은 목표(남극점)를 향해 달렸으나 그 과정과 결과, 그리고 사후 평가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었다. 흔히 이들의 대결을 '실용주의적 전문가와 명예로운 아마추어의 대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비교는 단순히 누가 먼저 도착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극한의 환경에서 리더의 의사결정이 조직원의 생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경영학적, 심리적 텍스트로도 자주 인용된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무엇이 썰매를 끄는가'였다.
이 비교는 단순히 누가 먼저 도착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극한의 환경에서 리더의 의사결정이 조직원의 생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경영학적, 심리적 텍스트로도 자주 인용된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무엇이 썰매를 끄는가'였다.
- 스콧 (잡종 식): 스콧은 개를 부리는 것을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베리아산 포니와 초기 형태의 모터 썰매를 도입했다. 그러나 포니는 발이 눈에 빠지고 땀이 얼어붙어 남극 환경에 최악이었고, 모터 썰매는 초기에 고장 나 버려졌다. 결국 스콧 탐험대는 막판에 사람이 직접 썰매를 끄는 '인력 거치(Man-hauling)' 방식을 택했다. 이는 대원들의 급격한 체력 저하와 동상을 유발했고, 결국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4.1. 복장과 장비[편집]
- 아문센: 이누이트의 전통 복장을 철저히 따랐다. 순록 가죽과 늑대 털로 만든 옷은 땀을 배출하면서도 체온을 완벽히 유지했다. 또한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링' 시스템을 활용해 상황에 맞게 체온을 조절했다.
- 스콧: 당시 대영제국 해군의 표준이었던 두꺼운 울 소재의 옷을 고집했다. 울은 땀에 젖으면 무거워지고 얼어붙어 오히려 체온을 뺏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스콧의 대원들은 행군 내내 젖고 얼어붙은 옷 무게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4.2. 식량 관리와 보급소(Depot) 전략[편집]
아문센의 치밀함이 가장 빛난 부분이다.
- 아문센의 보급: 아문센은 보급소 위치를 찾기 쉽게 하기 위해 주 보급소 좌우 수 킬로미터에 걸쳐 깃발을 꽂아 '그물망'을 형성했다. 또한 식량 상자에 페인트를 칠해 눈 속에서도 잘 보이게 했으며, 등유 통을 밀봉하여 연료가 증발하는 것을 막았다. 결정적으로 식단에 비타민 C가 풍부한 물개 고기를 포함해 괴혈병을 원천 차단했다.
- 스콧의 보급: 스콧은 보급소를 찾기 어려운 단일 지점에 설치했다. 눈보라가 치면 보급소를 지나치기 일쑤였다. 또한 등유 통의 마개가 부실해 연료가 상당량 증발해 버렸고, 이는 대원들이 추위 속에서 음식을 데워 먹지 못하고 눈을 녹여 물을 마시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타가 되었다.
4.3. 리더십[편집]
- 아문센: 대원들과 목표를 공유했다. 그는 남극으로 방향을 틀 때 대원 전원에게 동의를 구했고, 장비 개조나 루트 결정 시 전문가(한센, 비스틀링 등)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대원들은 자신들이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 스콧: 철저한 영국 해군식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스콧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마지막 남극점 돌격대를 선발할 때도 계획에 없던 5명(원래 4명 분의 식량만 준비됨)을 데리고 가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57]
4.4. 결과[편집]
결과는 참혹할 정도로 극명했다. 아문센은 예정보다 빠르게 남극점에 도달한 후, 심지어 살이 쪄서 돌아올 정도로 여유로운 항해를 마쳤다. 반면 스콧은 아문센의 깃발을 보고 절망한 채 귀환하다 보급소 18km를 남겨두고 전원 동사했다.
흥미로운 점은 사후 평가다. 당대 영국 사회는 아문센을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리자'로 깎아내리고 스콧을 '장렬하게 전사한 비극적 영웅'으로 신화화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아문센의 준비성이 리더십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반면, 스콧은 무능하고 고집스러운 리더의 전형으로 비판받는 경향이 강해졌다.[58]
흥미로운 점은 사후 평가다. 당대 영국 사회는 아문센을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리자'로 깎아내리고 스콧을 '장렬하게 전사한 비극적 영웅'으로 신화화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아문센의 준비성이 리더십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반면, 스콧은 무능하고 고집스러운 리더의 전형으로 비판받는 경향이 강해졌다.[58]
비교 항목 | 로알 아문센 | 로버트 팰컨 스콧 |
주요 운송 | 개썰매 (그린란드 견), | 포니, 모터 썰매, 인력 거치 |
복장 | 이누이트식 가죽옷 | 전통적인 울(Wool) 의복 |
식량 | 페미컨, 물개 고기 | 비스킷, 고기 |
스키 실력 | 전 대원이 스키 전문가 | 스키 사용을 경시하거나 미숙함 |
보급소 표시 | 다수의 깃발로 횡단 라인 형성 | 단일 깃발 혹은 빈약한 표시 |
결과 | 전원 무사 귀환 | 대원 5명 전원 사망 |
5. 평가[편집]
아문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국가, 그리고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편이다. 탐험 성공 직후와 20세기 중반까지는 '철저한 준비성으로 승리를 쟁취한 완벽주의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롤란트 헌트포드(Roland Huntford) 등 전기 작가들에 의해 그의 비정함과 정치적 수완, 그리고 라이벌 스콧에 대한 '기만' 등이 조명되면서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승부사'라는 비판적 시각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감상주의를 배제한 채 '대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한 가장 현대적인 리더'라는 재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문센은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적 탐험'을 끝내고 '현대적인 전문 탐험'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탐험을 스포츠나 영웅적 서사로 보지 않았고, 해결해야 할 '프로젝트'로 보았다. 오늘날 경영학에서 '아문센의 리더십'이 리스크 관리와 목표 달성 전략의 모범 사례로 연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생 반목했던 라이벌 노빌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북극해로 뛰어든 것은, 그가 단순히 승리에 미친 냉혈한이 아니라 극지 탐험가로서의 깊은 유대감과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정복했던 얼음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인간 아문센으로서의 모든 논란을 뒤로하고 위대한 탐험가로 기억된다.
결론적으로 아문센은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적 탐험'을 끝내고 '현대적인 전문 탐험'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탐험을 스포츠나 영웅적 서사로 보지 않았고, 해결해야 할 '프로젝트'로 보았다. 오늘날 경영학에서 '아문센의 리더십'이 리스크 관리와 목표 달성 전략의 모범 사례로 연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생 반목했던 라이벌 노빌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북극해로 뛰어든 것은, 그가 단순히 승리에 미친 냉혈한이 아니라 극지 탐험가로서의 깊은 유대감과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정복했던 얼음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인간 아문센으로서의 모든 논란을 뒤로하고 위대한 탐험가로 기억된다.
5.1. 긍정적 평가[편집]
아문센이 후대 탐험가들과 경영학자들에게까지 추앙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철저한 실용주의에 있다.
당시 대영제국을 비롯한 유럽 탐험계는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에 매몰되어 원주민들의 지혜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아문센은 에스키모(이누이트)를 미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수천 년간 극지에서 살아남으며 터득한 기술(개썰매, 가죽 옷, 설상화 등)을 완벽하게 습득했다.[59] 아문센은 문명이라는 오만을 버리고 생존이라는 본질에 집중했다.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을 위해 보급소를 설치할 때, 목표 지점을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보급소 좌우로 수 킬로미터에 걸쳐 깃발을 꽂아두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또한, 식량이 부족해질 것을 대비해 상태가 나빠진 썰매개를 도축하여 다른 개와 대원들에게 먹이는 '도그 이트 도그(Dog-eat-dog)' 전략을 취했는데, 이는 도덕적 비난의 소지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대원 전원을 살려 돌아오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관보다 과학적 데이터와 경험적 사실을 믿었다. 북서항로 개척 당시 작은 배인 '요아 호'를 선택한 것이나, 남극 기지를 빙붕 위인 고래만에 건설한 것 모두 철저한 관측과 계산 끝에 나온 결과였다.
당시 대영제국을 비롯한 유럽 탐험계는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에 매몰되어 원주민들의 지혜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아문센은 에스키모(이누이트)를 미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수천 년간 극지에서 살아남으며 터득한 기술(개썰매, 가죽 옷, 설상화 등)을 완벽하게 습득했다.[59] 아문센은 문명이라는 오만을 버리고 생존이라는 본질에 집중했다.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을 위해 보급소를 설치할 때, 목표 지점을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보급소 좌우로 수 킬로미터에 걸쳐 깃발을 꽂아두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또한, 식량이 부족해질 것을 대비해 상태가 나빠진 썰매개를 도축하여 다른 개와 대원들에게 먹이는 '도그 이트 도그(Dog-eat-dog)' 전략을 취했는데, 이는 도덕적 비난의 소지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대원 전원을 살려 돌아오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관보다 과학적 데이터와 경험적 사실을 믿었다. 북서항로 개척 당시 작은 배인 '요아 호'를 선택한 것이나, 남극 기지를 빙붕 위인 고래만에 건설한 것 모두 철저한 관측과 계산 끝에 나온 결과였다.
5.2. 부정적 평가[편집]
반면, 그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북극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극으로 기수를 돌린 사건은 당시 후원자들과 노르웨이 정부, 심지어 동료 탐험가였던 난센에게도 큰 결례였다. 비록 결과적으로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사기꾼으로 몰려 매장당했을 수준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평이 많다. 스콧에게 보낸 전보 역시 "알려 드립니다. 남극으로 갑니다"라는 식의 도발적인 형태였기에, 영국 측에서는 그를 '신사 협정을 어긴 비열한 침입자'로 간주했다.
남극점 첫 번째 시도 실패 후, 자신의 실수를 지적한 베테랑 탐험가 햘마르 요한센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모욕 준 사건은 아문센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 요한센은 난센과 함께 북극을 탐험했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그를 남극점 도달 명단에서 제외하고 기지에 남겨두었으며, 귀국 후에도 그의 공로를 묵살했다. 결국 요한센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게 되는데, 이는 아문센 생애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북극 비행 성공 이후 이탈리아의 조종사 움베르토 노빌레와 공적을 다투며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나, 자신보다 주목받는 인물을 견제했던 모습 등은 그가 대인배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북극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극으로 기수를 돌린 사건은 당시 후원자들과 노르웨이 정부, 심지어 동료 탐험가였던 난센에게도 큰 결례였다. 비록 결과적으로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사기꾼으로 몰려 매장당했을 수준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평이 많다. 스콧에게 보낸 전보 역시 "알려 드립니다. 남극으로 갑니다"라는 식의 도발적인 형태였기에, 영국 측에서는 그를 '신사 협정을 어긴 비열한 침입자'로 간주했다.
남극점 첫 번째 시도 실패 후, 자신의 실수를 지적한 베테랑 탐험가 햘마르 요한센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모욕 준 사건은 아문센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 요한센은 난센과 함께 북극을 탐험했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그를 남극점 도달 명단에서 제외하고 기지에 남겨두었으며, 귀국 후에도 그의 공로를 묵살했다. 결국 요한센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게 되는데, 이는 아문센 생애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북극 비행 성공 이후 이탈리아의 조종사 움베르토 노빌레와 공적을 다투며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나, 자신보다 주목받는 인물을 견제했던 모습 등은 그가 대인배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5.3. 스콧과의 비교[편집]
아문센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로버트 팰컨 스콧과의 비교다.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중심의 사학계는 비극적으로 전사한 스콧을 '숭고한 영웅'으로, 아문센을 '기회주의적인 승부사'로 묘사했다. 그러나 현대의 평가는 "탐험가는 죽어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결과를 보고하는 자"라는 아문센의 손을 들어준다.
6. 여담[편집]
- 프람 호를 수리할 때 아문센은 배의 내부에 도서관과 레크리에이션 공간을 만드는 데도 신경을 썼다. 수년간의 표류 생활에서 대원들의 정신 건강(Cabin Fever)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난센의 기록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 난센의 부인이었던 에바 난센은 아문센을 매우 아꼈는데, 난센이 프람 호를 넘겨주기로 한 결정을 듣고 아문센에게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 고래만 근처에는 수많은 고래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아문센은 이를 보고 식량 확보(고래 고기) 면에서도 탁월한 선택이라며 기뻐했다.
- 프람헤임 기지는 현재 수십 미터의 눈 아래 파묻혀 있거나, 빙붕이 분리되면서 바다 속으로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1세기 탐험가들이 이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아직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 저장소 설치 기간 중 아문센은 대원들에게 매일 저녁 스키 실력을 연마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빙하의 크레바스를 안전하게 건너기 위한 필수 훈련이었다.
- 그는 탐험을 떠나기 전 항상 빚 독촉에 시달렸다. 남극에서 돌아온 직후에도 강연을 다니며 빚을 갚아야 했다. "남극 정복보다 빚쟁이들을 피하는 게 더 힘들었다"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
-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 사용했던 노르웨이 국기는 현재 오슬로의 프람 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 아문센의 실종 이후, 수많은 탐색대가 파견되었으나 그의 시신이나 비행기 파편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북극의 얼음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기를 원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가 사라진 노르웨이 해 근처에는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그의 기일에는 전 세계 탐험가들의 추모가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문센이 구하려 했던 노빌레는 구조되어 93세까지 장수했다. 하지만 노빌레는 평생 아문센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살았다.
- 생전에 "누군가 나에게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얼마나 준비하지 않았는지를 비웃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자주 했다. 실제로 아문센이 마주한 날씨도 결코 좋지 않았으나, 그의 철저한 장비 점검과 시스템 구축이 그 모든 악조건을 '관리 가능한 변수'로 만든 것이다. 반면 스콧은 비정상적인 한파라는 '불운'에 직면했을 때 이를 돌파할 예비책(Contingency Plan)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들의 대결은 "자연은 용기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철저한 준비에만 응답한다"는 극지의 진리를 증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6.1. 기념물 및 지명[편집]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구 곳곳, 심지어 지구 밖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 아문센-스콧 남극 기지(Amundsen–Scott South Pole Station): 남극점에 세워진 미국의 과학 기지.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붙였다. 하지만 기지 내 기념관에는 아문센이 먼저 도착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 아문센해(Amundsen Sea): 남극 대륙 마리버드랜드 연안의 바다.
- 아문센 분화구(Amundsen Crater): 달의 남극 근처에 위치한 거대한 분화구. 미래 인류의 달 기지 건설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이다.
- 우란니엔보르(Uranienborg): 오슬로 근교에 있는 그의 저택.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그가 탐험 당시 사용했던 나침반, 의복, 스키 등을 전시하고 있다.
6.2. 대중매체에서[편집]
- 영화 '아문센' (2019): 에스펜 산드베르크 감독의 작품. 그의 영웅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형 레온 아문센과의 갈등, 냉혹한 성격 등 인간적인 어두운 면도 가감 없이 묘사했다.
- 애니메이션 '지구 대기행': 과거 교육용 애니메이션에서 스콧과의 대결 구도로 자주 등장했다. 대개 아문센은 '영악하고 철저한 승리자', 스콧은 '비극적이고 숭고한 패배자'로 묘사되곤 했다.
- 다큐멘터리 'The Last Place on Earth' (1985): 롤랜드 헌트포드의 저서 '스콧과 아문센'을 바탕으로 제작된 7부작 드라마. 아문센에 대한 현대적 재평가를 확립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웹툰 및 게임: 극한 생존을 다루는 매체(예: 프로스트펑크)나 탐험을 주제로 한 게임에서 '철저한 준비' 아이템이나 스킬의 명칭으로 자주 인용된다.
[1] 아문센의 자서전 '나의 탐험 생애' 중 가장 유명한 구절. 그의 철저한 실용주의와 준비성을 상징하는 문장이다.[2] 사람이 직접 썰매를 끄는 방식. 영국 탐험계에서는 이것이 더 숭고한 고통이라고 믿었다.[3] 아문센의 이 독특한 사고방식은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닌, 철저하게 '극복'에 초점을 맞춘 현실주의자로 성장할 것임을 암시한다. 남들은 비극이라 부르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했다.[4] 훗날 아문센이 직접 구입한 요아 호나 난센에게 빌린 프람 호의 운용 방식에 이때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5] 정확히는 비타민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신선한 고기를 먹는 원주민들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임상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6] 벨지카 호 원정대는 당시 남극 대륙의 일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는데, 오늘날에도 '아르츠토프스키 섬' 등 대원들의 이름이 남극 지도에 남아 있다.[7] 아문센은 이때 쿡에게 배운 '개썰매 조종 기술'의 기초를 닦았으며, 훗날 에스키모들에게서 이를 완성하게 된다.[8] 이를 두고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반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아문센은 성공한 뒤에 이 빚을 모두 청산했다.[9] 1872년에 건조된 낡은 배였으나 아문센은 이 배의 유연한 구조를 신뢰했다.[10] 당시 아문센은 장비 구입과 배 수리비로 인해 엄청난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채권자들이 배를 압류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비가 내리는 밤에 도망치듯 출항했다.[11] 실제로 아문센은 자서전에서 "유럽의 최첨단 의류 기술은 에스키모의 가죽 옷 앞에선 장난감 수준에 불과했다"고 극찬했다.[12] 당시에는 비타민 C의 존재가 명확히 규명되기 전이었으나, 아문센은 경험적으로 신선한 고기(특히 피와 내장)가 괴혈병을 막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3] 실제로 아문센은 남극점에서 돌아올 때 "오히려 몸무게가 늘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여유로운 여정이었다.[14] 이때 아문센은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 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펼쳤는데, 이는 그의 강철 같은 체력과 집념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15] 이 획기적인 설계 덕분에 프람 호는 수년간 얼음 속에 갇혀 표류하면서도 파손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는 현대 쇄빙선 설계의 기초적인 개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6] 난센은 훗날 자서전에서 "아문센에게 프람 호를 넘겨주기로 결정한 그날 밤, 내 생애 가장 괴로운 이별을 경험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이 결정은 난센에게도 뼈아픈 희생이었다.[17] 이는 탐험선 역사상 최초의 디젤 엔진 장착 사례 중 하나였다. 디젤 엔진은 증기 기관보다 연료 효율이 좋고 예열 시간이 짧아 극지방의 변덕스러운 기상 상황에 대응하기 최적이었다.[18] 실제로 훗날 쿡의 기록은 조작으로 밝혀졌고, 피어리의 기록 역시 북극점에 정확히 도달했는지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19] 아문센은 심지어 출항 직전 채권자들이 배를 압류하러 오자, 한밤중에 몰래 닻을 올리고 도망치듯 오슬로항을 빠져나갔다. 이른바 '야반도주 출항'이었다.[20] 사실 당시 노르웨이의 민족주의적 열풍도 한몫했다. 신생 독립국 노르웨이가 대영제국이라는 거인을 꺾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원들은 피가 끓어올랐다.[21] 원문은 "Fram proceeding South"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남극 대륙(Antarctic)을 명시했다. 이 짧은 문장은 영국 탐험계에 그야말로 핵폭탄급 투하가 되었다.[22]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남극은 제임스 쿡 이후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기에, 노르웨이인의 '침범'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23] 이는 강풍과 눈보라로부터 대원들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동계 기간 동안 장비를 정비하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24] 반면 스콧은 이 저장소 설치 과정에서부터 보급품의 양과 위치 선정에 난항을 겪으며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25] 이를 통해 복귀 시 가시거리가 최악인 상황에서도 저장소를 '그물'처럼 걸려들게 설계했다. 이는 아문센의 천재적인 치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26] 당시 요한센은 난센과 함께 북극을 탐험했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기에, 아문센의 리더십 부재를 누구보다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27] 요한센은 아문센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남극점 본대에서 제외되어 프레스루드와 함께 에드워드 7세 땅 탐사를 명받았다. 사실상의 좌천이었다.[28] 실제 스콧의 모터 썰매는 남극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출발 직후 고장 나 버렸다.[29] 실제로 이 육류 섭취 덕분에 아문센의 대원들은 스콧 일행이 겪었던 치명적인 영양실조와 근육 약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30] 이때 대원들은 눈 위에 표식을 남기며 이동했는데, 이는 나중에 도착할 스콧이 "우리가 먼저 왔다"라고 거짓말을 할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31] 실제 편지의 내용은 이보다 더 정중했으나, 스콧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글귀였다.[32] 아문센이 호바트에 도착한 직후 인터뷰에서 남긴 것으로 알려진 말. 그의 탐험이 '운'이 아닌 '계산'의 결과였음을 강조한다.[33] 스콧 일행이 단 11마일(약 17km)을 남겨두고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사망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34] 하지만 아문센은 끝내 요한센을 용서하지 않았고, 이는 훗날 요한센이 자살하는 비극적 원인 중 하나가 된다.[35] 스콧의 일기에는 "맙소사, 이곳은 끔찍한 곳이다. 우리가 그토록 고생해서 왔는데 보상도 없이 돌아가야 하다니."라고 적혀 있다.[36] 이 11마일의 거리는 아문센의 철저함과 대비되는 스콧의 결정적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만약 스콧이 보급소를 계획대로 좀 더 남쪽에 설치했더라면 그들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37] 이는 아문센이 이동 중에 힘이 빠진 개를 도축해 다른 개와 대원들에게 먹인 '실용적' 방식을 비꼬는 것이었다. 정작 아문센 본인은 이 조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38] 이는 아문센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훗날 아문센이 냉혹한 리더라는 비판을 받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39] "나는 독일 정부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는 취지의 편지를 독일 대사관에 보낸 사건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아문센이 단순한 모험가를 넘어 확고한 윤리적 기준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40] 아문센이 출항 전 남긴 기록 중 일부.[41] 노르웨이식 발음으로는 '마우드'에 가깝다.[42] 아문센은 탐험에는 천재적이었으나 경제적 감각은 다소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는 평생을 빚 독촉에 시달리며 다음 탐험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43] 레온은 아문센의 탐험을 위해 자신의 재산까지 쏟아부었으나, 아문센은 형의 조언을 간섭으로 치부하며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는 아문센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가족사 중 하나로 꼽힌다.[44] 사실 그는 남극점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항공기의 가능성을 점쳤다. 다만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실행이 늦춰졌을 뿐이다.[45] 직렬로 배치되어 하나는 끌고 하나는 미는 '푸시-풀(Push-Pull)' 방식이었다. 이는 한쪽 엔진이 고장 나도 최소한의 비행을 유지하기 위한 아문센의 전형적인 안전장치였다.[46] 특히 조종사 리세르라르센과의 관계는 이때의 긴장감으로 인해 훗날 미묘한 기류를 형성하게 된다.[47] 실제로 북극점 상공에서 노빌레는 거대한 이탈리아 국기와 파시스트당의 상징물을 투하했는데, 아문센은 이를 '공중 투기'라며 비웃었다.[48] 이 발언은 훗날 아문센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노빌레가 실제로 유능한 설계자이자 조종사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49] 노빌레는 비행선을 설계하고 조종한 자신의 공이 가장 크다고 주장했고, 아문센은 탐험의 총책임자이자 자금 조달자로서 자신의 업적을 강조했다. 노빌레가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문센을 '단순한 승객' 취급하자 아문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50] 이 플로트의 파손 상태를 분석한 결과, 비행기가 수면에 아주 강하게 충격했거나 추락 후 기체가 급격히 파손되었음을 암시했다.[51] 노빌레는 훗날 "나를 구하려다 사라진 그 위대한 노르웨이인에 비하면 나의 생존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라며 회한 섞인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52] 이는 당시 영국인들에게 '동물 학대'이자 '비신사적 행위'라고 비난받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문센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 죽어서 영웅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일축했다.[53] 스콧 탐험대는 귀환 길에 보급소를 단 몇 마일 차이로 찾지 못해 텐트 안에서 굶어 죽었다.[54]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매우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극지 탐험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아문센의 냉혹한 계산이었다.[55] 눈보라 속에서 보급소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으나, 이 '차단선' 방식 덕분에 아문센 팀은 단 한 번도 보급소를 놓치지 않았다.[56]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 후 돌아오는 길에 지친 개들을 도축하여 남은 개들과 대원들에게 먹였다. 이는 당시 영국인들에게 '야만적'이라는 비난을 샀으나, 결과적으로 대원들의 체력을 보존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57] 이 5번째 인물인 헨리 바워스는 스키도 없이 합류하여 나머지 대원들의 속도를 늦추는 원인이 되었다.[58] 롤런드 헌트퍼드의 저서 '라스트 플레이스 온 어스(The Last Place on Earth)'가 출간되면서 스콧의 무능함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59] 이는 당시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인 스콧이 "짐승을 부려 남극점에 가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며 인력 거치(Man-hauling)를 고집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