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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앙시앵 레짐의 모순2.2. 프랑스 왕국의 재정난과 중과세
3. 주요 정당 및 정파4. 발단
4.1. 삼부회와 국민의회4.2. 테니스 코트의 맹세
5. 전개
5.1.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5.2.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5.3. 1791년 헌법과 입헌 왕국5.4. 바렌 사건과 혁명 전쟁의 시작5.5. 1792년 8월 10일 봉기와 공화정 수립5.6. 1793년 5월 31일 봉기5.7. 자코뱅의 공포 정치5.8. 테르미도르 반동
6.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의 전개
6.1. 총재정부6.2. 통령정부와 제1제국

1. 개요[편집]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점으로 하여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

중세 이래 수백년간 유지된 프랑스 왕국의 구체제(앙시앵 레짐)을 붕괴시키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유럽 각국에 공화주의,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등을 전파하여 프랑스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중대한 파장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2. 배경[편집]

2.1. 앙시앵 레짐의 모순[편집]

2.2. 프랑스 왕국의 재정난과 중과세[편집]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왕국은 겉으로는 유럽 최강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잦은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을 비롯한 과도한 건축, 토목 공사 지출은 그 후손들인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대에 부담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루이 15세 시대까지는 물려받은 유산과 유능한 재무관료들의 활약으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선왕들보다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루이 16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빚더미에 오르면서, 재정난이 프랑스 정계의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 역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근대적인 세금 및 예산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시대적 한계상 아무리 온갖 세금을 쥐어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과중한 세금으로 인한 민심 이반만 심해졌다.

3. 주요 정당 및 정파[편집]

4. 발단[편집]

4.1. 삼부회와 국민의회[편집]

더이상 국왕 주도의 중앙정부만으로는 재정난 해소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루이 16세는 프랑스 왕국의 세 신분 대표들이 모두 모이는 삼부회를 개최하여 이를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삼부회에서 제1신분(성직자)와 제2신분(귀족) 의원들이 세 신분 의회의 표를 각각 1표로 계산하는 신분별 투표를 주장한 반면, 제3신분(평민) 의원들은 신분과 상관 없이 의원 개개인의 1표를 따로 계산하는 투표를 주장하며 이견을 보였고, 결국 제3신분 의원들과 일부 진보 성향 성직자, 귀족 의원들이 삼부회를 이탈하여 국민의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4.2. 테니스 코트의 맹세[편집]

의회의 개회와 폐회가 국왕의 고유 권한이었던 프랑스 왕국에서 의원들이 사사로이 '국민의회'라는 별도의 의회를 만든 것은 국왕 루이 16세 입장에선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고, 그는 국민의회 의원들에게 당장 자진 해산하고 삼부회에 복귀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죄드폼'이라는 테니스와 유사한 스포츠를 위해 지어진 경기장에서 모여 회의를 열어 해산 명령을 거부했고, 더 나아가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죄드폼의 맹세' 또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5. 전개[편집]

5.1.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편집]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인해 국왕과 국민의회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자,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국왕이 지방군을 끌고 와서 국민의회를 무력 진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시민들은 군에 맞서 스스로 무장하기로 결정하고 7월 14일에 무기고로도 쓰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올랐다.

파리 시민들의 무력 시위에 놀란 루이 16세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국민의회를 합법적인 의회로 승인했고, 이에 따라 국민의회는 제헌국민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제헌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에 앞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는데 이는 유럽 대륙 최초의 인권 선언이었다.

5.2.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편집]

인권 선언 이후에도 프랑스의 경제난은 여전했는데 이를 참지 못한 파리의 하층민(상퀼로트)들이 국왕 일가가 머물던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기혼 여성들이 선봉에 서고 남편들은 뒤에서 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유 습격 못지 않게 과격한 분위기로 흘러가 시위대가 왕궁에 난입하여 근위병들을 살해하는 유혈사태로 번졌고, 결국 이에 굴복한 루이 16세는 파리 시내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5.3. 1791년 헌법과 입헌 왕국[편집]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공식 국호는 프랑스인의 왕국[1]으로 변경되고, 루이 16세 역시 프랑스 시민을 대표하는 왕을 뜻하는 '프랑스인의 왕'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헌법 제정이라는 임무를 완수한 제헌국민의회는 해산되고 입법의회라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었다.

5.4. 바렌 사건과 혁명 전쟁의 시작[편집]

그러나 순순히 혁명 세력의 의도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던 루이 16세는 일가족과 함께 아직 왕당파 부대가 남아있던 국경지대로의 탈출을 시도했는데, 해당 부대와의 접선 장소를 불과 몇 km 남겨두지 않은 바렌이라는 지역에서 붙잡혀 파리로 돌아왔고, 모든 실권을 입법의회에 빼앗긴 상태로 연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아직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 주변국들을 극도로 자극했고, 1792년 4월에 이르러 프랑스와 주변국들 간의 혁명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5. 1792년 8월 10일 봉기와 공화정 수립[편집]

혁명 전쟁 시작 이후에도 입법의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전환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상태였으나, 분노한 파리 하층민(상퀼로트)들이 1792년 8월 10일 일제히 봉기하자 입법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왕권을 공식적으로 정지시키고 국민공회라는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국민공회에 의해 1791년 프랑스 헌법이 폐지되고 공화정을 규정한 1792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프랑스 왕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5.6. 1793년 5월 31일 봉기[편집]

5.7. 자코뱅의 공포 정치[편집]

5.8. 테르미도르 반동[편집]

6.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의 전개[편집]

6.1. 총재정부[편집]

6.2. 통령정부와 제1제국[편집]

[1] 훗날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도 같은 국호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