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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 鄭周永|Chung Ju-yung |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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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
본관 | 하동 정씨 (河東 鄭氏) | ||||||||||||||||||
호 | 아산(峨山) | ||||||||||||||||||
직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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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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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10]정주영 어록 중 유명한 말.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가. 별칭은 '왕회장'[11].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30년대 쌀 배달부터 시작해 자동차 정비업, 건설업 등을 거치며,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인이었으며, 1990년대에는 정계에도 진출했지만, 낙선한 후 1998년에는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하다 2001년 사망했다.
호는 '아산(峨山)'이다. 북한 강원도 지역에 있는 고향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12] 오늘날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가 있다.
[1] 음력 10월 19일.[2]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3] 사후 2002년 고인의 뜻에 따라 현재 명칭인 서울아산병원으로 변경했다.[4] 현재의 초졸에 해당하나 당시에는 무학도가 많았다. 이후 고려대,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5] 1886년~1953년 1월, 향년 69세.[6] 1930년대 정주영과 결혼했다. 변 여사 동네에 살던 정주영의 숙부가 후덕한 변 여사를 맘에 들어해 선을 연결해 서울에서 정주영이 통천군으로 왔다 얼굴 한 번 보고 한 달 보름 후 빠른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정주영과 서울로 가 같이 고생하며 식구들 챙기고 남편을 내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결혼 이후 본인은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친정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가 좀처럼 만나지 못하다, 분단이 되면서 진짜 평생 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이 점을 정주영도 미안해했고, 변중석도 남편 역시 마찬가지 신세라며 이해했다. 다만, 정주영의 바람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7] 일제강점기 평균 신장이 163cm이었음을 고려하면, 단순 계산으로는 지금의 185.7cm와 대응된다고 보면 된다. 상당한 장신이었던 셈이다. 1992년 78세의 나이에 한 신체 검사에서는 신장이 조금 줄어서 173cm이었다. 모친이 신장이 큰 편이었다고 한다. 부인 변중석 여사는 신혼 첫날밤 정주영 체구가 커서 무서웠다고 한다.[8] 임종 직전, 아들 정몽준의 권유로 온누리교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본당) 담임목사였던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정몽준의 부인이자 여섯째 며느리인 김영명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9] 이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섣불리 포기하려 들지 말고 적어도 시행착오는 겪어보고 결정하라는 얘기다. 물론 후술하고 있듯, 이 말 듣고 진짜 무리하게 하다가 사업 실패한 사람을 일컬어 기업가에서 정주영 병이란 말도 나돌 정도니,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시도를 해 보든지 하자.[10] 2001년에 나온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11] 재계 서열 1위였고 재벌 중에 왕이라는 뜻으로 불렸다.[12] 통천군의 아산리 지역으로 북한 행정 구역상 로상리(노상리)로 개칭했다. 즉, 충청남도 아산시와는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