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현대그룹 초대 회장 정주영 鄭周永|Chung Ju-y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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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하동 정씨 (河東 鄭氏) | ||||||||||||||||||
호 | 아산(峨山) | ||||||||||||||||||
직업 | |||||||||||||||||||
학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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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10]정주영 어록 중 유명한 말.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가. 별칭은 '왕회장'[11].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30년대 쌀 배달부터 시작해 자동차 정비업, 건설업 등을 거치며,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인이었으며, 1990년대에는 정계에도 진출했지만, 낙선한 후 1998년에는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하다 2001년 사망했다.
호는 '아산(峨山)'이다. 북한 강원도 지역에 있는 고향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12] 오늘날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가 있다.
2. 생애[편집]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13]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14]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15],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16]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17]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속에서 이루어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또한 어느 기업인들보다 청렴하고 국민들이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다.
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13]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14]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15],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16]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17]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속에서 이루어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또한 어느 기업인들보다 청렴하고 국민들이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 1남 정주영 (1915 ~ 2001) 현대그룹 창업주, 명예회장 / 妾 (이름불명) (1917 ~ 1996)[20] / 妻 변중석 (1921 ~ 2007)[21] / 妾 (이름불명) (생사불명[22])[23][A] / 妾 (이름불명) (생사불명)[25][A] / 妾 (이름불명) (생사불명)[27][A] / 妾 김경희 (1953 ~ )[29]
- 1남 김진석 (2000 ~ )
- 2남 김진하 (2003 ~ )
- 1녀 정유미 (1989 ~ ) / 夫 김동혁
- 2녀 정유진 (1991 ~ ) 현대카드 디지털사업실 사원
- 1남 신우진 (1993 ~ )
- 2남 신우택 (1996 ~ )
- 1남 정창철 (1998 ~ )
- 2녀 정진아 (2003 ~ )
- 1남 정창덕 (2004 ~ )
- 1녀 정다나 (2007 ~ )#
- 1남 정창욱 (2007 ~ )
- 2남 정창준 (2009 ~ )
- 3남 정창윤 (2012 ~ )
- 1녀 정윤미 (1971 ~ ) / 夫 박승준 (1967 ~ ) 이건창호 사장
- 1남 정창현 (1998 ~ )
- 1녀 정진주 (1999 ~ )
- 2남 정창민 (2001 ~ )
- 1녀 정진원 (2004 ~ )
- 2녀 정진윤
- 3녀 정진예
- 1남 정창건 (2007 ~ )
- 2남 정창성 (2009 ~ )
- 1녀 신혜윤 (2013 ~ )
- 2녀 신혜리 (2015 ~ )
- 2녀 정영이 (1984 ~ ) / 夫 김도원 제네시스프라이빗에쿼티 이사[63]
- 3남
- 1남 정영선 (1985 ~ )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 / 妻 (1994 ~ )
- 1녀 정진율 (2021 ~ )
- 1남 정창빈 (2022 ~ )
- 2녀 정선이 (1986 ~ ) / 夫 백종현 (1983 ~ )
- 1남 정경선 (1986 ~ ) 루트임팩트 대표
- 2녀 정정인 (1979 ~ )[72]
- 3녀 정정임 (1981 ~ )[73]
- 1녀 정형숙 (1951 ~ 1974)
- 1녀 정지혜 (1973 ~ )
- 1남 정태선 (1976 ~ ) 前 KCC 상무이사 / 妻 김성민 (1983 ~ )
- 2녀 정사라 (1977 ~ )
- 1남 김윤수 (1946 ~ ) 서한그룹 회장
- 1남 김용석 (1972 ~ ) 서한산업 대표
- 2남 김용범 (1975 ~ )
- 3남 김용준 (1977 ~ ) 서한ENP 부사장
- 1남 김호중
- 1녀 김나연 (1979 ~ ) 후성HDS 전무
- 2녀 김주연 (1984 ~ )
- 1녀 노희진 (1983 ~ )
- 1남 노인영 (1984 ~ )
- 2남 정원선 (1994 ~ )
- 3남 정운선 (1998 ~ )
- 1녀 김지수 (2002 ~ )
- 2녀 김연수 (2004 ~ )
- 1녀 정일경 (1960 ~ ) / 夫 임광수 (1959 ~ )
- 1녀 정현이 (1988 ~ )
- 1남 정두선 (1989 ~ ) 현대코퍼레이션 부장
- 2남 정우선 (1997 ~ )
- 1녀 정재림 (1990 ~ ) KCC 이사
- 1남 정명선 (1994 ~ )
- 1녀 정선우 (1991 ~ )
- 2녀 정수윤 (1995 ~ )
- 1남 정제선 (1998 ~ )
- 2남 정한선 (2007 ~ )[93]
- 3남 정연선 (2011 ~ )
- 1남 정도선 (1995 ~ )
- 1녀 정다인 (1996 ~ )
- 2남 정인식 (1890 ~ 1960)[94]
- 1남
- 2남 (? ~ 생존 불분명[95])
- 1남
- 1녀
- 2녀
- 3남 정진식 (1892 ~ 1966)[97]
- 1남 (? ~ 1989 이후)
- 2남 (? ~ 1989 이후)
- 3남 (? ~ 1989 이후)
- 4남 정명식 (1894 ~ 1972)
- 5남 정택식 (1900 ~ 1980)[98]
- 1녀 정순식 (1905 ~ 1997)
[1] 음력 10월 19일.[2]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3] 사후 2002년 고인의 뜻에 따라 현재 명칭인 서울아산병원으로 변경했다.[4] 현재의 초졸에 해당하나 당시에는 무학도가 많았다. 이후 고려대,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5] 1886년~1953년 1월, 향년 69세.[6] 1930년대 정주영과 결혼했다. 변 여사 동네에 살던 정주영의 숙부가 후덕한 변 여사를 맘에 들어해 선을 연결해 서울에서 정주영이 통천군으로 왔다 얼굴 한 번 보고 한 달 보름 후 빠른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정주영과 서울로 가 같이 고생하며 식구들 챙기고 남편을 내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결혼 이후 본인은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친정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가 좀처럼 만나지 못하다, 분단이 되면서 진짜 평생 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이 점을 정주영도 미안해했고, 변중석도 남편 역시 마찬가지 신세라며 이해했다. 다만, 정주영의 바람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7] 일제강점기 평균 신장이 163cm이었음을 고려하면, 단순 계산으로는 지금의 185.7cm와 대응된다고 보면 된다. 상당한 장신이었던 셈이다. 1992년 78세의 나이에 한 신체 검사에서는 신장이 조금 줄어서 173cm이었다. 모친이 신장이 큰 편이었다고 한다. 부인 변중석 여사는 신혼 첫날밤 정주영 체구가 커서 무서웠다고 한다.[8] 임종 직전, 아들 정몽준의 권유로 온누리교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본당) 담임목사였던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정몽준의 부인이자 여섯째 며느리인 김영명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9] 이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섣불리 포기하려 들지 말고 적어도 시행착오는 겪어보고 결정하라는 얘기다. 물론 후술하고 있듯, 이 말 듣고 진짜 무리하게 하다가 사업 실패한 사람을 일컬어 기업가에서 정주영 병이란 말도 나돌 정도니,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시도를 해 보든지 하자.[10] 2001년에 나온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11] 재계 서열 1위였고 재벌 중에 왕이라는 뜻으로 불렸다.[12] 통천군의 아산리 지역으로 북한 행정 구역상 로상리(노상리)로 개칭했다. 즉, 충청남도 아산시와는 상관없다.[13] 이것을 충청남도 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관련이 없긴 하지만 아산시에 대형 의료기관이 없어서 제발 아산병원좀 와달라고 절규하는 아산시민들이 많다(...) 또한 이곳에도 현대자동차 공장이 아산시 인주면에 있다.[14]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동생들의 학력은 준수하다. 둘째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을 중퇴했고, 넷째 동생 정세영 현대산업개발그룹 명예회장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 기자는 독일에서 유학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맏형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이 죽을 때까지 맏형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을 가능성ㅡ도 높다. 그리고 1910년대 출생자의 초졸을 현대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 당시는 정규 학교 근처에도 못간 무학이 인구 비율로 굉장히 많던 시절이다.[15] 부친이 소를 판 돈인 70원.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소 한 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보냈다. 이후 얘기가 나온 바로는 모두 암소인 데다가 새끼를 밴 소여서 1001마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16] 그 시대의 부잣집 자제들 중에는 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사냥, 도박, 주색으로 소일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사냥꾼들은 윈체스터 라이플로 무장했는데, 이 윈체스터가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값비싼 소총이었다. 혹은 김용환처럼 위장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청년 정주영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이 복흥상회 외아들이 어느 부류를 택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17]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18] 평범한 농사꾼이었으며 정주영의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다.[19]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 한계봉(韓季鳳)의 딸.[20] 장남 정몽필의 생모. 정주영이 변중석과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여자다.[21] 정주영의 배우자로, 차남 정몽구, 3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4남 정몽우, 5남 정몽헌만 낳았다. 장남 정몽필은 변중석이 시집 오기 전에 먼저 태어나 있었다.[22] 1978년 정몽준의 생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망했을 시 1978년 이후 사망이다.[23] 6남 정몽준의 생모.[A] 24.1 24.2 24.3 아들들의 생모가 모두 다른 인물이라는 얘기가 유력하다. 정체에 대해선 아직도 다양한 설이 많으며, 여러 예술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25] 7남 정몽윤의 생모.[27] 8남 정몽일의 생모.[29] 차녀인 정정인과 3녀인 정정임의 생모. 딸의 미국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생계가 힘들다고 한다.[30] 1982년 4월 29일, 경북 김천시 아포읍 근처를 지나던 중 경부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향년 48세.[31] 전 아나운서, 유방암으로 1990년 9월 25일 사망. 향년 47세.[32] 사내 결혼이었다고 전해진다.[33] 대일외고, 이화여대 수석입학.[34] 초등학교 동창으로 김석원 前 쌍용그룹 회장 장남. 과거 방송인 김성경과의 열애설 보도로 보아 이혼 또는 별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범쌍용가 참고.[35] 2009년 10월 5일 미국에서 담낭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0세.[36] 선호영(선병원 설립자)의 아들, 부자가 모두 정형외과 의사다.[37] 배우 길용우의 아들.[38]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주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채몽인과 장영신의 장남인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채형석의 차녀.[39] 종로학원 설립자 정경진의 장남.[40] 영문명 Jun Chung.[41] 평사원 출신으로 신데렐라라고 불렸다. 현대하이스코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하고, 실적도 좋아서 현대하이스코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혼하게 되면서 백지화 되었다. 하이스코 역시 현대제철에 합병되었다. 현재는 부친이 차린 1차 협력사 삼우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42] 포뮬러 3 드라이버로 활동 중[43]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의선 부회장의 처제 정지윤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과 결혼했다.[44] 정의선의 사촌동생인 현대백화점 정지선과는 동명이인이고, 성별도 다르다. 같은 정씨인데다 이름까지 현대백화점 정지선과 같아서 처음에는 집안 어른들이 반대했지만 집안 최고어른이자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이 본이 다르기 때문에(이쪽은 김포 정씨이다.) 괜찮다고 허락했다고 한다.[45] 김덕중 전 교육부장관의 손자. 자세한 내용은 범대우가 참고.[46] 여담으로 드라마 영웅시대에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47] 30대 그룹 총수중 최연소였으나 1978년생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취임으로 밀려났다.[48] 법무부장관 황산덕의 손녀.[49] 현대차에 스프링을 개발·공급하는 자동차 부품 전문 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회장의 장녀.[50] 입사동기가 무려 전직 대통령이다.[51] 주 분야는 수상 운송업이며,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스키장 스타힐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52] 학생 때 스키 선수를 한 적이 있다.[53] 스타힐리조트 정면 슬로프 중앙에 비비안 광고 간판이 십수년째 서 있다.[54] 1990년 4월 24일 음독 자살하였다.[55] 숙명여자대학교 메이퀸 출신.[56] 2016년 기사 갑질 논란…정일선 사장, 수행기사 3년간 12명 교체 참고.[57] 구자엽의 딸이자 구태회의 손녀이다. 자세한 내용은 범LG가 참조.[58] 김영무 김앤장 대표의 장녀. 시어머니 이행자는 설립자겸 고문.[59] 구 현대BS&C.[60] 8월 4일 투신자살, 향년 54세. 사후에는 아내가 회장이 되었다.[61] 현대상선 대표 현영원와 용문학원 이사장 김문희 부부의 차녀. 김문희가 김무성의 이복누나이니 김무성의 외조카가 되는 셈이다.[62] 신현우 전 국제종합기계 대표이사와 신혜경 서강대 일본학과 명예교수의 차남. #[63] 김인 새마을금고중앙회장의 차남. #[64] 김동조 前 외무부장관 막내딸.[65] 철강업체 유봉 대표이사. 그의 누나(서지원, 1969)는 현 두산그룹 부회장 박지원의 아내이다.[66] 정몽주니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사람이다.[67] 부국물산 회장 김진형의 장녀.[68] 김인규 前 KBS 사장, 前 경기대 총장의 아들.[69] 현대파이낸스 회장 권영찬의 딸.[70] 2019년 기사 '변종마약 투약' 현대가 3세 체포.."조사받으려고 귀국" 참고.[71] 2012년 기사 대마초 피운 현대가 3세는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딸? 참고.[72] 할리우드에서 그레이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단역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73] 당시 정주영의 나이 65세였다. 엘리자베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살며 토요타 미국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74]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의 아들.[75] 백지연 아나운서의 아들.[76] 1990년 9월 30일 경기도 광주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향년 54세.[77] 1993년 10월 9일 태릉 아이스링크 선수 대기실에서 일어난 불의의 화재 사고로 딸과 함께 중화상을 입고 투병하다가 사망. 사고 당시 김씨는 불과 37세, 정지은은 11살 어린 나이에 불과해 더욱 안타까움을 남긴다.[78] 화재사고로 죽은 딸.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다가 1993년 11월 8일 사망했다.[79] 진영심 소생.[80] 조동길의 아들이자 이인희의 손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범삼성가 참조.[81] 2013년 기사 현대家 또 대마초, 마약 천국?… 현대 성우효광그룹 장남 구속 참고.[82] 김성수의 막내 아들인 김상겸 고려대 명예교수의 딸. 김상겸 교수는 고려대 체육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참고.[83] 2009년 기사 천방지축 재벌 3세 ‘現代 이미지’ 먹칠...대마초흡입 혐의로 집행유예 선고 참고.[84] 한일시멘트에게 인수된 이후 현대시멘트에서 한일현대시멘트로 사명변경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8/07/452929/ 참고.[85] 노신영 前 국무총리의 아들.[86] 김성두 전 대한화재보험 사장의 딸. 미국 국적자로 한국명은 김나영.[87] 치과의사로 알려졌다. #[88] 섬유생산업체 전남방직 회장이던 김석성의 아들. 김석성은 김무성의 사촌형으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외당숙이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있어 김종엽은 육촌동생이다.[89]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한 장폐색증으로 1962년 4월 14일 사망.[90]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91] 더헤븐리조트 권모세 회장의 조카이다.[92]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의 외조카로, 2022년 9월 7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실시한 정몽익 측과 최은정 측의 이혼사건의 조정 성립으로 재판상 이혼에 준하여 조정성립일을 기해 이혼처리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정몽익 측이 2012년 경 이후 가출하여 내연녀(현 배우자)와의 사실혼관계를 통한 혼외아들 2명 출산 사실 등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범롯데가 참고.[93] 이하 현 배우자 곽지은 소생. #[94] 가족 관계 출처.[95] 사망했다면 1935 이후.[96] 장녀로 추정된다.[97] 가족 관계 출처.[98] 변중석 여사를 정주영에게 소개시켜 준 숙부가 바로 이 숙부다.[99] 가족 관계 출처.[100] 장남 또는 차남으로 추정된다.[B] 101.1 101.2 101.3 101.4 여섯째 숙부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