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출생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크파크
사망
1961년 7월 2일 (향년 61세)
아이다호주 케첨
국적
직업
소설가, 언론인
활동 분야
소설, 평론
배우자
해이들리 리처드슨 (1921년 – 1927년, 이혼)
폴린 파이퍼 (1927년 – 1940년, 이혼)
마사 겔혼 (1940년 – 1945년, 이혼)
메리 웰시 헤밍웨이 (1946년 - 1961년 사별)
가족
아버지 클래런스 헤밍웨이(1871~1928)
어머니 그레이스 헤밍웨이(1872~1951)
누나 마르셀린 헤밍웨이(1898~1950)
여동생 우르술라 헤밍웨이(1902~1966)
여동생 매들린 헤밍웨이(1904~1995)
여동생 캐롤 헤밍웨이(1911~2002)
남동생 레스터 헤밍웨이 (1915~1982)[2]
조카딸 힐러리 헤밍웨이 (1961~)
조카사위 제프 린제이
자녀
3
1. 개요2. 위상3. 생애4. 특징
4.1. 문체론: 빙산 이론4.2. 하드보일드와 로스트 제너레이션4.3. 코드 히어로
4.3.1. 이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들4.3.2. 비판과 한계
4.4. 여성관
5. 인간관계6. 쿠바와의 관계7. 작품 목록
7.1. 장편 소설7.2. 단편 소설7.3. 단편 소설집7.4. 논픽션
8. 사후 출간작들
8.1. 파리는 날마다 축제8.2. 에덴의 동산
9. 여담
9.1. 술과 음식9.2. 고양이 사랑9.3. 가족 잔혹사9.4. 대중문화에서
9.4.1. 게임 및 서브컬처에서의 오마주9.4.2. 광고9.4.3. 밈(Meme)

1. 개요[편집]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20세기 영미문학의 지형도를 영원히 바꿔놓은 거장이자, 문학 역사상 가장 강렬한 '남성적 상징'으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병을 구하다 다리에 수백 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파시즘에 맞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보 부대를 조직하거나 파리 해방 작전에 참여하는 등 기행에 가까운 용맹함을 보였다. 이러한 실존적 경험들은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 죽음과 맞닥뜨린 인간의 품위(Grace under pressure)라는 독보적인 주제 의식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가 문학사에 남긴 가장 거대한 족적은 다름 아닌 '문체'다. 그는 수식어를 극도로 절제하고 짧고 강렬한 문장을 반복하는 하드보일드 문체를 확립했다. 이는 당시 유럽 문학의 주류였던 만연체와 화려한 묘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혁명적인 시도였으며, 현대 영어 산문의 표준을 정립했다는 평까지 받는다. 그의 문학적 철학인 '빙산 이론(Iceberg Theory)'은 겉으로 드러나는 10%의 문장 아래에 90%의 함축된 의미를 숨겨두는 방식으로,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 너머의 진실을 스스로 체감하게 만든다.

헤밍웨이는 단순한 작가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낚시, 사냥, 권투, 투우 등 거친 스포츠를 즐기는 야성적인 모습은 대중들에게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라는 친숙하면서도 경외심 섞인 애칭으로 불리게 했다. 그러나 화려한 명성 이면에는 지독한 우울증, 알코올 의존증, 그리고 전쟁의 참상이 남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도사리고 있었다. 평생을 죽음과 투쟁하며 살았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1961년 자신의 사냥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그 투쟁을 끝냈다.

2. 위상[편집]

헤밍웨이가 영미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서구 문학의 서술 방식이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가 정립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추리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레이먼드 카버미니멀리즘, 나아가 현대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한국에서도 김승옥이나 황석영 등 많은 근현대 작가들이 그의 문체적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남자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의 허무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무기여 잘 있거라》, 길을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의 방황을 다룬 《해는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승리를 노래한 《노인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고통과 그에 대응하는 개인의 태도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비록 후대에 이르러 그의 과도한 남성 중심적 시각이나 인종/성별에 대한 편견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영어라는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보여준 정교함과 절제미는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는 글쓰기를 "외롭고 고통스러운 전투"라고 표현했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문장의 완성도를 위해 수십 번씩 퇴고를 반복했던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1]

헤밍웨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대량 살상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기존의 도덕관과 가치 체계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헤밍웨이는 이들의 대변자였다. 그가 그리는 주인공들은 대개 신체적 혹은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채, 아무런 보상도 약속되지 않은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규칙(Code)에 의지해 버텨나가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정서는 그의 고향인 오크 파크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대비된다. 그는 자신을 옥죄던 중산층의 위선을 벗어나 전장으로, 스페인의 투우장으로, 아프리카의 초원으로, 그리고 쿠바의 바다로 끊임없이 탈출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을 자초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해나가는 과정이었다.

3. 생애[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특징[편집]

4.1. 문체론: 빙산 이론[편집]

"빙산의 이동이 장엄한 것은 수면 위에 8분의 1만 나와 있기 때문이다."[2]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자, 현대 산문의 문법을 재정립한 이론이다. 흔히 '생략의 미학'으로도 불리는 이 이론은, 작가가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 그 대상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과감히 생략하더라도 독자는 그 생략된 부분(수면 아래의 7/8)을 본능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는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특징이었던 만연체와 화려한 미사여구,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 이론의 뿌리는 헤밍웨이가 고등학교 졸업 후 수습기자로 일했던 《캔자스시티 스타(Kansas City Star)》지의 편집 지침에 닿아 있다. 당시 신문사는 기자들에게 "짧은 문장을 써라. 첫 문단은 힘차게 시작해라. 강력한 영어를 써라. 능동태를 써라."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가이드를 제공했다.[3]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형용사나 부사를 극도로 자제하고, 오로지 명사와 동사 위주의 건조한 사실 전달에 집중하는 방식은 훗날 그의 전매특허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발전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소설 속에서도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대신, 그가 처한 상황이나 행동, 그리고 파편화된 대화만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독자는 이 파편들을 조합하여 주인공의 고독, 공포, 사랑과 같은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를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 만약 작가가 90%를 직접 설명해 버린다면 그 글은 평면적인 설명문에 불과하겠지만, 90%를 수면 아래에 숨겨둠으로써 작품은 비로소 입체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빙산 이론의 또 다른 측면은 감정의 '직설'이 아닌 '재현'이다. 헤밍웨이는 독자에게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슬픔을 유발했던 구체적인 사물이나 동작을 나열함으로써 독자가 작가와 동일한 감정적 충격을 받도록 유도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무서웠다"는 표현 대신 "그는 권총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성을 느꼈다"거나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는 식의 감각적 묘사에 집중한다.

이는 에즈라 파운드T. S. 엘리엇이 주창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개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작가는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련의 객관적인 상황과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역설적으로 독자를 작품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이는 장치가 된다. 독자는 문장 사이의 여백을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채우며, 작가가 숨겨놓은 수면 아래의 빙산을 탐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인 절제미가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윌리엄 포크너는 헤밍웨이의 문체에 대해 "그는 독자가 사전을 찾아보게 만드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며 그의 단순함을 비판하기도 했다.[4] 또한 일부 비평가들은 빙산 이론이 지나치게 남성적인 강박에 사로잡혀 있으며, 인물의 복잡한 심리적 동기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산 이론은 현대 문학의 흐름을 '설명'에서 '전시(Show, don't tell)'로 바꾸어 놓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미니멀리즘 소설들, 코맥 매카시의 황량한 문체, 심지어 현대 시나리오 작법에 이르기까지 헤밍웨이의 그림자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문장의 화려함보다는 뼈대의 견고함을 믿었으며, 그 뼈대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힘을 가장 잘 이해했던 작가였다.

4.2. 하드보일드와 로스트 제너레이션[편집]

헤밍웨이 문학의 정서적 뿌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적 비극에 닿아 있다. 당시 젊은이들은 국가와 종교,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전장으로 내몰렸으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숭고한 가치가 아닌 참혹한 육체의 훼손과 무의미한 죽음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기존의 모든 가치 체계를 상실해버린 세대를 일컬어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 부르는데, 헤밍웨이는 이들의 허무주의를 가장 세련되고 강력한 문학적 문법인 하드보일드로 치환하여 제시했다.

본래 '달걀을 완숙하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하드보일드 문체는, 헤밍웨이에 의해 문학적 문법으로 정립되었다. 이는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작가의 주관적인 개입 없이 오로지 '보이는 사실'만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방식이다. 헤밍웨이는 인물의 내면적 슬픔을 "그는 슬펐다"라고 쓰지 않는다. 대신 "그는 술을 마셨고, 창밖을 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외부 객관적 상황만을 묘사한다. 독자는 이 메마른 서사 사이에서 오히려 인물이 억누르고 있는 거대한 감정의 파고를 체감하게 된다.

이러한 문체는 단순히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태도의 문제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감상에 젖는 것은 사치이자 나약함에 불과했다. 헤밍웨이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 예컨대 낚시 장비를 손질하거나, 칵테일을 정확한 비율로 섞거나, 총기를 닦는 일에 집중한다. 이러한 '절제된 행동'이야말로 하드보일드 문학이 지향하는 '압박 속의 품위(Grace under pressure)'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치다.

헤밍웨이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기수로 만든 결정적인 작품은 1926년에 발표된 《해는 다시 떠오른다》이다. 이 소설은 전쟁으로 인해 성적 불구가 된 제이크 바네스와 파괴적인 매력을 지닌 브렛 애슐리를 중심으로, 파리와 스페인을 떠도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린다. 이들은 낮에는 카페를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밤에는 축제와 투우에 열광하지만, 그 기저에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공허함이 깔려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단순히 '노는 세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기존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짓된 의미'를 거부한 대가로 방황을 선택했다. 헤밍웨이는 이들의 무목적적인 삶을 비난하는 대신, 투우라는 죽음의 의식을 통해 생의 감각을 일깨우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묘사한다. 제이크 바네스가 성적 불능이라는 육체적 거세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우사 로메로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자신만의 윤리를 지켜나가는 모습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허무 속에서 찾아낸 유일한 구원이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정서는 흔히 허무주의(Nihilism)로 요약되지만, 헤밍웨이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는 세상이 거대한 허무(Nada)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허무에 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는 인간상, 즉 '코드 히어로(Code Hero)'를 창조했다.
고통을 내색하지 않을 것
죽음 앞에서도 예의를 지킬 것
자기가 맡은 일(Professionalism)을 완벽하게 수행할 것

이 세 가지를 지키는 인간은 설령 육체적으로 파괴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다. 이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가졌던 '상실감'에 대한 헤밍웨이식 응답이었다. 신은 죽었고 조국은 나를 배신했을지라도, 내가 든 낚싯대와 내가 마시는 술, 그리고 내가 마주한 죽음 앞에서의 태도만큼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5]

4.3. 코드 히어로[편집]

헤밍웨이의 소설 속에는 자주 등장하는 특정한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평단에서는 이를 '헤밍웨이 코드 히어로(Hemingway Code Hero)'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싸움을 잘하거나 정의로운 영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대개 패배가 예정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엄격한 규칙(Code)을 지키며 품위 있게 몰락하는 인물들을 일컫는다.

헤밍웨이는 영웅적 태도를 정의하며 "압박 속의 우아함"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코드 히어로의 가장 큰 특징은 삶의 허무함(Nada)을 직시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세계가 근본적으로 잔인하고, 불공평하며, 결국 모든 생명은 죽음이라는 허무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허무주의에 빠져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스스로 설정한 '도덕적/직업적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증명한다. 예를 들어, 투우사는 황소에게 죽임을 당할지언정 규정된 보폭과 자세를 어기지 않으며, 사냥꾼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결과(승리나 생존)보다 '과정(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코드 히어로의 핵심이다.

이들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낚시, 투우, 전쟁, 권투 등)에서 최고의 숙련도를 자랑한다. 기술적인 완벽함은 이들이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공포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혐오한다. 감정의 과잉은 품위를 해친다고 믿으며, 오로지 행동으로만 자신을 입증한다.[6]

코드 히어로들은 대개 무언가를 잃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거나(프레데릭 헨리), 잡은 고기를 상어에게 뜯기거나(산티아고), 혹은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로버트 조던). 그러나 그 상실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정신적 투쟁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이 강인한 남자들은 밤이 되면 불을 끄지 못하거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는 낮 동안 행동으로 눌러왔던 실존적 허무(Nada)가 어둠과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의 노웨이터가 대표적인 예시다.

4.3.1. 이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들[편집]

  •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코드 히어로의 완성형.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음에도 바다로 나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다. 비록 고기는 뼈만 남았고 자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는 결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로버트 조던: 죽음이 확실시되는 다리 폭파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다한다. 부상으로 버려진 상황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총을 들고 적을 기다리는 모습은 전형적인 헤밍웨이식 순교다.
  •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 반스: 전쟁으로 성기능을 상실한 인물이지만, 이를 비관하며 무너지기보다 투우 관람과 낚시 등 일상의 질서를 지키며 삶을 영위해 나간다.

4.3.2. 비판과 한계[편집]

현대 문학 비평계에서는 이러한 코드 히어로를 '유독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감정을 억제하고 물리적인 강인함에 집착하는 모습이 남성들에게 건강하지 못한 롤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 캐릭터를 단순히 남성의 시련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나 파괴적인 유혹자로 소비했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묘사한 이 영웅들은 단순히 강한 척하는 남자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참혹함과 신의 부재를 경험한 세대가 상처받은 내면을 감추고 어떻게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후의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4.4. 여성관[편집]

헤밍웨이는 생전 '마초(Macho)'의 대명사로 불렸으며,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오랫동안 평단으로부터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수동적이다"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사후 공개된 미발표 원고와 편지, 그리고 심리학적 접근을 통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헤밍웨이가 가졌던 여성관과 성 정체성은 겉으로 드러난 강인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전통적인 헤밍웨이 비평에서 그의 여성 캐릭터는 크게 두 가지 전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 바클리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처럼 주인공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성녀형' 혹은 '치유자형' 캐릭터다. 이들은 대개 전쟁으로 상처 입은 남성 주인공의 안식처가 되어주며, 종국에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주인공의 고독을 완성하는 장치로 소모된다는 비판을 받는다.[7]

다른 하나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브렛 애슐리나 《프랜시스 매콤버의 짧고 행복한 생애》의 마고 매콤버처럼 남성을 파멸로 몰고 가거나 남성성을 위협하는 '팜 파탈(Femme Fatale)'형 캐릭터다. 이들은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거나 남성의 나약함을 조롱하며, 헤밍웨이가 가졌던 여성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불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그가 평생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겪었던 현실 세계의 갈등이 작품 속에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복잡한 성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홀 헤밍웨이와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레이스는 어린 헤밍웨이에게 여아용 옷을 입히고 머리를 길게 기르게 했으며, 한 살 터울인 누나 마르셀린과 마치 쌍둥이 자매인 것처럼 꾸미는 '트윈(Twin)' 놀이를 즐겼다. 심지어 그를 '에르네스티나'라는 여성형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경험은 헤밍웨이에게 극심한 성적 혼란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훗날 그가 권투, 사냥, 전쟁 등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에 집착하며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려 했던 것은, 사실 어린 시절 강제로 부여된 여성성을 지워내기 위한 필사적인 '과잉 보상'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8]

그의 사후인 1986년에 출간된 유작 《에덴의 동산(The Garden of Eden)》은 문단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부부는 성 역할을 바꾸는 '롤 플레이'를 즐기며, 아내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성처럼 행동하고 남편은 여성적인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알던 '마초 작가' 헤밍웨이가 실제로는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과 안드로지니(Androgyny, 양성구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자신의 실제 침실에서도 아내들에게 머리를 짧게 자를 것을 요구하거나, 성적인 역할 역전을 시도하는 등 실험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헤밍웨이는 "가장 남성적인 글을 쓰는 작가"라는 페르소나 아래, "여성이 되고 싶거나 혹은 양성성을 모두 소유하고 싶은" 내밀한 욕망을 평생 숨기고 살았던 셈이다.

헤밍웨이가 구축한 그 견고한 '마초 문학'은, 사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그는 남성성이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투쟁과 증명을 통해 획득해야 하는 위태로운 성취라고 믿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을 비현실적으로 묘사하거나 남성 간의 유대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 역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적 측면(Anima)을 끝내 수용하지 못한 채 밀어내려 했던 고통스러운 몸부림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체적인 시각은 오늘날 헤밍웨이를 단순한 근대 작가를 넘어, 인간의 성과 심리를 가장 깊숙이 파고든 현대적인 작가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5. 인간관계[편집]

5.1. 마사 겔혼[편집]

"당신은 작가인가요, 아니면 진짜 전쟁터의 인간인가요?"[9]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인생에는 수많은 여인이 거쳐 갔지만, 그중에서도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은 가장 독보적이고 강렬한 존재였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세 번째 아내이기 이전에, 20세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군 기자 중 한 명이었으며,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자신의 통제권 아래 두지 못한' 여성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파국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전쟁 영화와 같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36년 크리스마스 무렵,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단골 술집 '슬로피 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마사 겔혼은 이미 촉망받는 젊은 작가이자 기자였고, 헤밍웨이는 전성기를 누리던 대문호였다. 금발의 지적인 외모와 거침없는 말투를 가진 마사는 단숨에 헤밍웨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헤밍웨이는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와 결혼 생활 중이었으나, 마사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께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이들에게 전장은 단순한 취재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고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무대였다.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호텔에서 포탄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두 사람이 나누었던 사랑은 훗날 헤밍웨이의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정서적 토대가 되었다.[10]

1940년, 폴린과 이혼한 헤밍웨이는 마사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쿠바의 저택 '핀카 비히아'에 보금자리를 꾸린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마사가 자신의 곁에 머물며 현모양처가 되어주길 바랐지만, 마사는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각주(footnote)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균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발생했다. 마사는 종군 기자로서 유럽 전선으로 가길 원했으나, 헤밍웨이는 그녀의 출국을 방해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그녀의 자리를 가로채려 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헤밍웨이는 정식 취재 허가권을 따내어 호의호식하며 전선에 합류한 반면, 허가권을 얻지 못한 마사는 병원선 화장실에 숨어 밀항하여 실제 상륙 지점에 먼저 발을 딛는 근성을 보였다.[11]

헤밍웨이는 마사의 독립적인 성격과 뛰어난 능력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마사가 전선으로 떠날 때마다 "당신은 기자인가, 내 아내인가?"라고 물으며 집착했고, 결국 이들의 관계는 1945년 이혼으로 종결되었다. 헤밍웨이의 네 번의 결혼 중 그가 먼저 차인 유일한 사례였다.

마사 겔혼은 이혼 후에도 헤밍웨이와의 관계가 언급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녀는 헤밍웨이가 죽은 뒤에도 수십 년간 종군 기자로서 베트남 전쟁, 엘살바도르 내전 등을 취재하며 독자적인 업적을 쌓았다.[12] 그녀에게 헤밍웨이는 인생의 짧은 오점 혹은 피곤한 경쟁자였을 뿐이었다.

헤밍웨이는 마사와의 결별 이후 더 이상 자신에게 맞서는 여성을 찾지 않았고, 네 번째 아내인 메리 웰치에게는 철저한 복종과 헌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헤밍웨이 내부의 마초적 불안감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5.2. 거트루드 스타인[편집]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라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13]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다. 그녀는 당시 파리 예술계의 대모이자, 전위적인 문학 실험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헤밍웨이는 셔우드 앤더슨의 소개장을 들고 플뢰뤼스 가 27번지(27 rue de Fleurus)에 위치한 스타인의 살롱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만남은 청년 작가 헤밍웨이의 문학적 자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스타인의 집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이는 거대한 '박물관'이자 '교실'이었다. 벽면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폴 세잔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헤밍웨이는 그곳에서 시각 예술의 구성 방식을 문학에 도입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세잔의 풍경화에서 받은 영감은 헤밍웨이가 자연을 묘사할 때 단순히 예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지형의 굴곡과 질감을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14]

스타인은 헤밍웨이와 그의 동료 작가들을 향해 '길을 잃은 세대'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참상을 겪으며 기존의 가치관, 종교, 도덕적 지표를 모두 상실한 채 방황하던 젊은이들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이었다. 헤밍웨이는 처음에 이 표현을 듣고 반발심을 느꼈으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첫 장편 소설인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제사(題詞)로 이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이 용어를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선 묘한 애증의 관계였다. 스타인은 헤밍웨이에게 "글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쳐내라"고 조언하며 그의 미니멀리즘 문체를 다듬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초적인 태도와 허세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녀는 헤밍웨이가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과시한다고 생각했으며, 훗날 자신의 저서 《앨리스 B. 톡라스의 자서전》에서 헤밍웨이를 "황금빛 피부를 가진 노란색(겁쟁이) 청년"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헤밍웨이는 사후 출간된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스타인을 매우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복수했다.

5.3. 제임스 조이스[편집]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의 관계는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우정 중 하나로 꼽힌다. 극도로 절제된 문체를 구사하는 하드보일드의 기수와,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며 의식의 흐름을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끝판왕이 만났으니 그 자체로 문학적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하며 서로의 재능을 깊이 존경했으나, 정작 사석에서는 문학 토론보다 술판과 '싸움질'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헤밍웨이는 젊고 건장한 복싱 마니아였던 반면, 조이스는 체격이 왜소하고 시력이 극도로 나빠 안경 없이는 앞도 잘 보지 못하는 '샌님'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은 파리의 선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는데, 조이스는 술이 취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말싸움이 격해져서 상대방이 주먹을 휘두르려 하면, 조이스는 재빨리 덩치 큰 헤밍웨이 뒤로 숨으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제임스, 가서 저 친구 좀 패줘요!(Deal with him, Hemingway! Deal with him!)"[15] 그러면 헤밍웨이는 한숨을 쉬며 특유의 복싱 실력으로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 이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묘한 유대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헤밍웨이는 조이스의 성격은 희화화했을지언정, 그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갓 도착했을 당시, 조이스는 이미 《율리시스》의 출간으로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있었다. 헤밍웨이는 조이스를 만난 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특히 헤밍웨이는 조이스가 단어 하나하나를 배치할 때 들이는 공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언어적 에너지를 높게 평가했다. 비록 본인은 극도로 단순한 문장을 썼지만, 조이스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서술 방식이 가진 예술성을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율리시스》의 금서 조치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책을 밀반입하는 일을 돕기도 했으며, 자신의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를 조이스에게 헌사하고 싶어 할 정도로 그를 따랐다.

조이스 역시 헤밍웨이를 평범한 기자 출신 작가로 보지 않았다. 조이스는 헤밍웨이의 초기작들을 읽고 "그의 글에는 뼈가 있다"며, 감상주의를 배제한 그의 건조한 문체가 가진 힘을 인정했다. 조이스는 "헤밍웨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쓴다. 그것은 매우 정직하고 강력한 방식이다"라고 평했다.

재미있는 점은, 두 사람 모두 '침묵과 생략'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이스가 수만 가지 단어를 나열하며 그 사이의 여백을 만들었다면, 헤밍웨이는 수만 가지 단어를 삭제하며 핵심만 남겼다. 도달하는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결국 독자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느끼게 한다'는 모더니즘의 본질적 목표는 일치했던 셈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각자의 삶이 복잡해지면서 예전만큼 가깝지는 않게 되었다. 조이스는 건강 악화와 가족 문제로 고통받았고, 헤밍웨이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전 세계를 누비는 '파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이스가 사망했을 때 헤밍웨이는 큰 슬픔에 빠졌으며, 말년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도 조이스와 함께했던 파리 시절을 애틋하게 기록했다.

헤밍웨이는 조이스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기꺼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배웠다. 조이스가 눈이 멀어가는 와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던 집념은, 훗날 헤밍웨이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노인과 바다》를 써 내려갈 때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5.4. 에즈라 파운드[편집]

"그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아니라, 글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가르쳐준 사람이었다."[16]

1922년, 파리에 갓 상륙한 무명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당시 유럽 예술계의 '대부' 노릇을 하던 에즈라 파운드를 만나게 된다. 파운드는 이미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편집하여 현대시의 지형을 바꾼 인물로,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파운드에게 권투를 가르쳐주었고, 파운드는 헤밍웨이에게 '현대적 문장'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초기 원고를 보고 불필요한 형용사와 부사를 가차 없이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는 헤밍웨이가 추구하던 '신문 기자식 절제미'와 맞물려 훗날 하드보일드 문체의 기틀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훗날 "에즈라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친절하고 이타적인 예술가였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그에게 큰 빚을 졌음을 인정했다.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원고를 파란 잉크로 난도질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헤밍웨이에게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마라. 구체적인 사물로 감정을 전달하라"라고 강조했다. 이는 파운드가 주창한 [이미지즘] 운동의 핵심이었는데, 헤밍웨이는 이를 산문에 적용하여 독자가 상황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현장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재미있는 점은 파운드가 헤밍웨이에게 고전 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방대한 독서 목록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겉으로는 마초적인 야성미를 풍겼지만, 실제로는 파운드의 지도 아래 스탕달, 투르게네프, 플로베르 등을 탐독하며 치밀하게 문학적 기초를 다진 '공부하는 작가'였다. 파운드는 헤밍웨이를 두고 "그는 내가 가르친 제자 중 유일하게 내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든 녀석이다"라며 극찬했다.[17]

두 사람의 관계는 1930년대 들어 정치적 이념 차이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반파시즘 진영의 상징이 된 반면, 파운드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에 경도되어 반유대주의 선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파운드의 정치적 행보를 경멸했으나, 그의 문학적 재능만큼은 끝까지 부정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파운드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될 위기에 처하자 헤밍웨이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파운드의 광기를 비난하면서도, "위대한 시인을 교수대에 세워서는 안 된다"라며 그의 구명 운동에 간접적으로 힘을 보탰다. 1954년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는 사석에서 "이 상은 에즈라 파운드가 받아야 마땅했다"라고 말하며 과거의 스승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그 원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다이아몬드로 세공한 최고의 편집자이자 스승이었다. 파운드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건조하고 강력한 헤밍웨이의 문체는 탄생하지 않았거나, 훨씬 늦게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게 평단의 분석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문학적 동지애가 정치적 광기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존경심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20세기 문학사의 비극적인 갈등 사례로 남았다.[18]

5.5. F. 스콧 피츠제럴드[편집]

"그는 마치 죽어가는 왕자 같았다."[19]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관계는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복잡한 '브로맨스'이자 애증의 드라마로 손꼽힌다. 1920년대 파리의 카페 '딩고 바(Dingo Bar)'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즉각적으로 알아봤으나, 성격, 문체, 삶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극단을 달렸다. 피츠제럴드가 화려한 수식어와 낭만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재즈 시대'의 총아였다면, 헤밍웨이는 거칠고 건조한 문체로 무장한 '하드보일드'의 신성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선배 작가였던 피츠제럴드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시작되었으나, 훗날 헤밍웨이의 냉혹한 비판과 피츠제럴드의 몰락으로 비극적인 종결을 맞이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피츠제럴드는 이미 《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하며 미국 문단의 정점에 서 있었던 대스타였다. 반면 헤밍웨이는 아직 첫 장편 소설도 내지 못한, 가난하지만 야심만만한 무명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의 초기 단편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의 출판사인 '스크리브너스(Scribner's)'와 전설적인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지금 당장 이 친구를 잡아야 한다. 그는 진짜다"라며 열렬한 추천사를 보냈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시기하기보다 오히려 숭배에 가까운 태도로 지지했다. 그는 헤밍웨이의 원고를 직접 교정해주기도 했고, 헤밍웨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헤밍웨이 역시 초기에는 피츠제럴드의 세련된 감각과 조언을 존중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라는 변수를 만나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헤밍웨이는 젤다를 극도로 혐오했는데, 그는 그녀가 스콧의 재능을 갉아먹는 '미친 여자'라고 굳게 믿었다. 헤밍웨이의 시각에서 젤다는 남편이 글에 집중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파티와 소동을 일으키며, 그의 예술적 혼을 알코올과 사치에 탕진하게 만드는 독부(毒婦)였다.[20]

반대로 젤다 역시 헤밍웨이를 "가슴에 털을 붙인 가짜 마초"라며 조롱했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거친 남성성이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이라고 간파했고, 두 사람의 기싸움 사이에서 피츠제럴드는 고통받으며 점차 알코올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헤밍웨이는 친구의 몰락을 지켜보며 안타까움보다는 일종의 멸시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는 두 사람의 서신 왕래에서 점점 더 노골적인 독설로 변해갔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츠제럴드가 감상에 젖어 "부자들은 우리와 다르다네(The rich are different from you and me)."라고 말하자, 헤밍웨이가 냉소적으로 "그래, 그들은 돈이 더 많지(Yes, they have more money)."라고 받아쳤다는 이야기다. 이는 낭만주의적 환상을 쫓던 피츠제럴드와 차가운 현실주의를 고수하던 헤밍웨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가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글을 쓰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변명일 뿐이다. 자네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정작 피츠제럴드가 심장마비로 쓸쓸히 사망했을 때, 헤밍웨이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아주 긴 분량을 할애해 묘사했다. 비록 그 묘사가 피츠제럴드의 나약함을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그 기저에는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에 대한 깊은 연민이 깔려 있었다.

비록 사적으로는 결별에 가까운 파국을 맞았으나, 두 거장의 교류는 영미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츠제럴드의 화려한 문체는 헤밍웨이에게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정표가 되었고, 헤밍웨이의 절제된 문체는 피츠제럴드에게 '현대적 산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독자들은 《위대한 개츠비》의 서정성과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건조함을 비교하며 1920년대 파리를 수놓았던 두 천재의 불꽃 튀는 우정을 되새긴다. 헤밍웨이는 평생 수많은 적을 만들고 친구를 버렸지만, 피츠제럴드만큼은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라이벌이자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다.[21]

5.6. 피델 카스트로[편집]

많은 이들이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가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고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1960년 5월, 아바나에서 열린 '헤밍웨이 기념 낚시 대회'에서였다. 당시 혁명 정부의 수반이었던 카스트로는 이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고, 주최자였던 헤밍웨이가 그에게 트로피를 건네주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촬영된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데, 이는 쿠바 혁명 정부에 의해 '거장 작가가 혁명을 지지한다'는 상징적인 프로파간다로 적극 활용되었다. 카스트로는 생전에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게릴라 전술의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열렬한 팬이었음을 자처했다. 반면 헤밍웨이는 카스트로의 혁명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몰락에는 찬성했으나, 혁명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사회주의화와 그 과정에서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2]

헤밍웨이의 친쿠바적 행보는 미 정부, 특히 FBI의 수장 존 에드거 후버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에 미국 최고의 작가가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에 거주하며 카스트로와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FBI는 헤밍웨이를 '잠재적 공산주의 동조자'로 분류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훗날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헤밍웨이가 노년에 겪었던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도청한다"는 피해망상은 상당 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1960년, 미-쿠바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미국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쿠바 철수를 권고했다. 건강 악화와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던 헤밍웨이는 결국 사랑하던 핀카 비히아와 수많은 고양이, 그리고 집필 중이던 원고들을 뒤로한 채 쿠바를 떠나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으로 향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쿠바행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 쿠바 정부는 핀카 비히아를 국유화하여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헤밍웨이는 쿠바 관광의 핵심 키워드로 남아 있다.

6. 쿠바와의 관계[편집]

헤밍웨이의 생애에서 쿠바는 단순한 거주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인생의 가장 찬란한 황금기와 쓸쓸한 쇠락기를 동시에 보낸 곳이 바로 쿠바 하바나 외곽의 저택 핀카 비히아(Finca Vigía)[23]였다. 이곳에서의 삶은 헤밍웨이라는 인물이 가진 '야성적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완성된 시기이자, 동시에 그가 '쿠바의 파파'로 불리며 현지인들과 깊은 유대를 쌓았던 전설적인 연대기이다.

그가 쿠바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세 번째 아내 마사 겔혼의 권유 때문이었다. 키웨스트의 번잡함과 관광객들의 간섭을 피하고 싶어 했던 헤밍웨이는 하바나에서 남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샌프란시스코 드 파울라(San Francisco de Paula) 마을의 이 낡은 농장을 임대했다가,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엄청난 인세 수입으로 아예 매입해 버렸다. 약 15,000평에 달하는 이 넓은 부지는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수많은 고양이들과 개들, 그리고 그의 집필 작업에 필요한 절대적인 고독을 보장해 주는 요새가 되었다.

핀카 비히아에서의 일과는 엄격하리만큼 규칙적이었다. 헤밍웨이는 매일 새벽 6시경에 일어나 서재의 타자기 앞에 서서(그는 서서 글을 쓰는 습관이 있었다) 점심 무렵까지 집필에 몰두했다.[24] 글쓰기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애선(愛船)인 '필라(Pilar) 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청새치 낚시는 그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과의 실존적 투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얻은 영감은 훗날 그의 최대 걸작인 《노인과 바다》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바나 시내에서의 생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단골 술집인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에서 모히토를 마시고,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에서 설탕을 뺀 더블 다이키리인 일명 '파파 도블레(Papa Doble)'를 즐겼다. 플로리디타 술집 구석에는 오늘날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헤밍웨이가 쿠바인들에게 단순한 외국인 작가가 아니라 하바나의 풍경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핀카 비히아의 평화는 외부 세계의 격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50년대 후반,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의 불길이 거세지자 미국 정부와 카스트로 정권 사이에서 헤밍웨이의 위치는 위태로워졌다. 비록 그는 카스트로와 낚시 대회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25], 미국 대사관은 그를 잠재적인 공산주의 동조자로 의심하며 압박했다.

결국 1960년, 악화되는 건강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헤밍웨이는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들었던 핀카 비히아를 떠나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으로 향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쿠바 행이었다. 그가 떠난 뒤 핀카 비히아는 쿠바 정부에 의해 박물관으로 보존되었으며, 그가 사용하던 타자기, 수만 권의 장서, 벽에 걸린 사냥 전리품들, 심지어 정원에 묻힌 애견들의 묘비까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전 세계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쿠바인들은 그를 '미스터 헤밍웨이'가 아닌 '에르네스토(Ernesto)' 혹은 '파파(Papa)'라고 불렀다. 그는 마을의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낚시 기술을 논했으며,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는 필라 호의 선장으로서 헤밍웨이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헤밍웨이가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수여된 메달을 스웨덴 왕실이나 미국 박물관이 아닌 쿠바의 '엘 코브레 성모 마리아 성당'에 기증했다. 이는 쿠바 민중들에 대한 그의 진심 어린 애정과 존중의 표현이었다. 쿠바인들에게 그는 단순한 점령국 미국의 작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바다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쿠바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다.

7. 작품 목록[편집]

7.1. 장편 소설[편집]

7.2. 단편 소설[편집]

7.3. 단편 소설집[편집]

  • 1923년: 《세 편의 이야기와 열 편의 시》 (Three Stories and Ten Poems)
  • 1924년: 《우리들의 시대에》 (in our time)[27]
  • 1927년: 《여자 없는 남자들》 (Men Without Women)
  • 1933년: 《승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마라》 (Winner Take Nothing)
  • 1938년: 《제5열과 첫 번째 49개의 단편들》 (The Fifth Column and the First Forty-Nine Stories)

7.4. 논픽션[편집]

  • 1932년: 《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
  •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Green Hills of Africa)

8. 사후 출간작들[편집]

  • 1970년: 《해류 속의 섬들》 (Islands in the Stream)
  • 1985년: 《위험한 여름》 (The Dangerous Summer)
  • 1999년: 《첫 햇살 아래의 진실》 (True at First Light)

8.1. 파리는 날마다 축제[편집]

"만약 당신이 젊은 시절 파리에서 살 수 있는 행운이 있다면, 당신이 남은 인생을 어디서 보내든 파리는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이기 때문이다."[28]

헤밍웨이 사후인 1964년에 출간된 회고록으로, 그가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첫 번째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함께 파리에서 보낸 가난하지만 찬란했던 시절을 다루고 있다. 헤밍웨이의 전성기 하드보일드 문체와는 또 다른, 노년의 작가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유려하고도 애틋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비록 사후에 편집되어 출간되었으나,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노인과 바다》에 비견될 만큼 뜨거운 사랑을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서 헤밍웨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마초 거장'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경마장에서 돈을 잃어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집이 추워 카페에서 럼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쓰는 가난한 무명 작가다. 하지만 그는 그 가난을 비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매우 가난했지만, 매우 행복했다"라고 술회하며, 배고픔마저도 예술적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재료로 승화시킨다.

작품 곳곳에는 당시 파리 예술계의 중심지였던 몽파르나스와 생제르맹데프레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비아 비치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책을 빌려 읽고, 세느 강변에서 고서적을 뒤적이며, 세잔의 그림을 보며 문장의 구성을 고민하는 젊은 헤밍웨이의 모습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낭만을 선사한다. 특히 배고픔을 잊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 그림을 감상했다는 에피소드는 이 책의 백미 중 하나다.

이 책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당대 거물들에 대한 헤밍웨이의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신랄한 평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거트루드 스타인: 헤밍웨이의 멘토였으나 점차 관계가 틀어지는 과정이 묘사된다. 헤밍웨이는 그녀의 문학적 조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녀의 오만함과 기묘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알코올 의존증과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와의 파괴적인 관계를 아주 상세하게(심지어는 치졸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록했다.[29]
  • 에즈라 파운드: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거의 비판 없이 존경심을 표한 인물로, 가난한 작가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파운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가 1950년대 후반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우울증과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이 작품 속에 묘사된 일화들이 100% 객관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특히 첫 번째 아내 해들리에 대한 미화와,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작품 속에서는 관계를 망친 침입자로 묘사됨)에 대한 원망 섞인 서술은 헤밍웨이 특유의 기억 왜곡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2009년에는 헤밍웨이의 손자인 숀 헤밍웨이가 초판의 편집(네 번째 아내 메리 웰치가 주도함)이 작가의 의도를 훼손했다며 '복원판(Restored Edition)'을 출간하기도 했다. 복원판은 초판에서 삭제되었던 부분들을 되살렸으나, 오히려 초판의 유려한 흐름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슬픔에 잠긴 파리 시민들이 이 책을 광장에 헌화하고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파리는 굴복하지 않는 축제의 도시"라는 메시지가 시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생전 이 원고를 쿠바의 집(핀카 비히아)에 두었다가, 쿠바 혁명 이후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리츠 호텔 지하 창고에 맡겨두었던 가방에서 30년 만에 원고를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작가 특유의 극적인 연출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8.2. 에덴의 동산[편집]

"우리는 서로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30]

헤밍웨이 사후인 1986년에 출간된 유작 소설 《에덴의 동산》(The Garden of Eden)은 대중이 알고 있던 '마초 작가' 헤밍웨이의 이미지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문제작이다. 그가 1946년부터 쓰기 시작해 15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음에도 결국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이 소설은, 작가 사후에 편집자들의 손을 거쳐 대폭 축약된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 축약된 내용만으로도 문단은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 작품 속에서 헤밍웨이는 양성애, 성 역할의 전도(Role Reversal), 안드로지니(Androgyny, 양성구유), 그리고 페티시즘에 가까운 짧은 머리에 대한 집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소설은 갓 결혼한 젊은 작가 데이비드 본과 그의 아내 캐서린이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 보낸 신혼여행을 다룬다. 초기 설정은 전형적인 헤밍웨이식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아내 캐서린이 자신의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소년'이라 부르라고 강요하면서 극은 기묘하게 흘러간다. 캐서린은 남편인 데이비드에게도 머리를 자신과 똑같이 자르고 백금색으로 탈색할 것을 요구하며, 침대 위에서의 성 역할을 뒤바꾸는 실험을 감행한다.

여기에 '마리타'라는 제3의 여성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본격적인 3인조(Ménage à trois) 관계와 복잡한 심리전으로 치닫는다. 캐서린은 마리타를 데려와 남편과 공유하려 하고, 스스로가 남자가 되어 마리타를 소유하려는 욕망까지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묘사되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과 탐닉은 그간 《무기여 잘 있거라》나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주었던 강인하고 절제된 남성상과는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헤밍웨이의 자전적 경험을 깊게 투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유년 시절 어머니 그레이스 홀에 의해 여장을 당한 채 '에르네스티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트라우마가 있었다.[31]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 역시 소설 속 캐서린처럼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는 것을 선호했거나 헤밍웨이가 이를 종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파격은 단순히 '성적 취향'의 전시가 아니다. 헤밍웨이는 평생에 걸쳐 과도할 정도로 남성성을 과시(Overcompensation)해 왔는데, 《에덴의 동산》은 그가 스스로 구축한 '마초'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내면의 비명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경계 없이 섞이는 상태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가져올 파멸과 창작력의 상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작중 주인공 데이비드가 아내의 기행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원고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혼돈 속에서도 작가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헤밍웨이 자신의 사투이기도 했다.

초기 평단은 이 작품을 "노작가의 망령 난 배설물"이라며 혹평하기도 했다. 특히 편집 과정에서 원고의 절반 이상이 삭제되고 인물의 다층적인 심리가 단순화되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젠더 비평(Gender Criticism)과 퀴어 이론이 부상하면서 《에덴의 동산》은 헤밍웨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급부상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사냥꾼'이나 '군인'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성적 욕망과 그로 인한 실존적 고뇌를 가장 앞서서 탐구한 선구자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9. 여담[편집]

  • 《무기여 잘 있거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성적 묘사와 군대 내의 거친 비속어, 그리고 '탈영'이라는 소재 때문에 초기 연재 당시 잡지사로부터 상당한 검열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문장이 훼손되는 것에 극도로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서는 이 소설의 '카포레토 퇴각' 묘사가 이탈리아 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판금 조치되었다.
  • 그의 넷째 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는 훗날 성전환 수술을 받고 '글로리아'라는 이름으로 살았는데, 헤밍웨이는 아들의 이러한 성향을 격렬하게 비난했으나 사실 본인의 내면적 투쟁을 아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 쿠바 혁명 직후 "쿠바 사람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나라를 갖게 되었다"며 긍정적인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그가 사랑했던 쿠바 민중들에 대한 애정표현에 가까웠다.
  • 카스트로는 헤밍웨이 사후에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으며, 핀카 비히아를 보존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 인터넷이나 SNS 등지에서 헤밍웨이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일화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6단어 소설'이다. 동료 작가들과 점심을 먹던 중 "여섯 단어만으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나"라는 내기에 헤밍웨이가 즉석에서 냅킨에 썼다는 문장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32]

이 일화는 헤밍웨이의 미니멀리즘과 '빙산 이론'을 설명하는 완벽한 예시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글쓰기 강의에서 인용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헤밍웨이 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이 문장을 썼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이와 유사한 문구는 헤밍웨이가 작가로 데뷔하기 훨씬 전인 1900년대 초반 신문의 구인광고란 등에 이미 등장했었다. 헤밍웨이 사후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이 일화가 그와 결합되어 전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9.1. 술과 음식[편집]

헤밍웨이는 단순한 애주가를 넘어, 특정 칵테일을 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최고의 홍보대사이자 스스로 레시피를 변형해 즐기던 탐닉가였다. 그에게 술은 글쓰기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인 동시에, 하드보일드한 삶을 지탱해 주는 연료와도 같았다.

헤밍웨이는 "술은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것 중 하나"라고 공언할 정도로 술에 진심이었다. 특히 그가 쿠바에서 보낸 20여 년의 세월은 람브라스, 다이키리, 모히토라는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가 쿠바의 단골 바(Bar)였던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에서 남긴 "내 다이키리는 플로리디타에서, 내 모히토는 보데기타에서(My daiquiri in El Floridita, My mojito in La Bodeguita)"라는 문구는 오늘날 쿠바 관광객들이 반드시 따라가는 성지 순례의 지침이 되었다.[33]

헤밍웨이가 가장 사랑한 칵테일은 단연 다이키리(Daiquiri)였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다이키리를 마시지 않았다. 그는 설탕을 극도로 멀리했는데, 이는 가문의 내력인 당뇨병에 대한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헤밍웨이 스페셜', 일명 '파파 도블레(Papa Doble)'다.

이 레시피의 특징은 설탕을 빼는 대신 럼의 양을 두 배(Doble)로 늘리고, 자몽 주스와 마라스키노 리큐르를 첨가하는 것이다. 엘 플로리디타의 바텐더는 그를 위해 특별히 얼음을 아주 곱게 갈아 거의 슬러시 형태로 제공했는데, 헤밍웨이는 이 독하고 차가운 술을 앉은 자리에서 수십 잔씩 들이켰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단 하루 만에 파파 도블레 16잔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34]

그가 직접 고안한 칵테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저서 제목을 딴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다. 레시피는 간단하면서도 파괴적이다. 샴페인 잔에 압생트 한 지거(Jigger)를 붓고, 그 위에 차가운 샴페인을 거품이 일 때까지 채우는 것이다.

그는 이 술을 마시는 법에 대해 "샴페인이 압생트의 유백색 안개를 뚫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마셔라. 서너 잔을 마시면 다시 삶이 즐거워질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압생트의 높은 도수와 샴페인의 탄산이 결합된 이 술은 이름 그대로 '죽음'과 같은 숙취를 선사하기로 악명이 높다.

헤밍웨이는 식도락가이기도 했다. 특히 파리 시절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보면 가난했던 시절 그가 느꼈던 허기와 그 허기를 달래주던 음식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배가 고플 때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며, 그때 비로소 진실된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즐겼던 음식들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투박하고 직관적이었다.
  • 굴과 화이트 와인: 파리의 카페에서 차가운 샤블리 한 잔과 함께 먹는 굴을 사랑했다. "굴을 먹으며 바다의 차가운 맛을 느끼면 비로소 고독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고 서술했을 정도다.
  • 사냥감 요리: 직접 사냥한 꿩, 오리, 사슴 요리를 즐겼다. 아프리카와 미국 서부에서 그는 자신이 잡은 고기를 요리해 동료들과 나누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 쿠바 요리: 쿠바 거주 시절에는 청새치 스테이크나 흑미밥(Moros y Cristianos) 같은 현지 음식을 즐겨 먹었다.

헤밍웨이의 알코올 사랑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그의 문학적 생산성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엄격하게 절제하며 글을 썼고, 오후와 밤에는 폭음하며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면서 술은 그의 뇌세포를 파괴했고, 항공기 사고로 입은 부상과 겹쳐 심각한 간 경변 및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독이 되었다.

결국 의사들이 금주를 권고했을 때, 헤밍웨이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며 절망했다.

9.2. 고양이 사랑[편집]

"고양이는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정직하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지만, 고양이는 결코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고양이는 단순한 반려동물을 넘어, 거칠고 고독한 투쟁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해 준 동반자이자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그가 사랑했던 고양이들은 일반적인 고양이와는 다른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앞발가락이 6개 이상인 다지증 고양이들이다.

헤밍웨이와 다지증 고양이의 인연은 1930년대 키웨스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헤밍웨이는 스탠리 덱스터(Stanley Dexter)라는 선장으로부터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스노우볼'이라는 이름의 이 하얀 고양이는 앞발가락이 6개인 다지증 고양이였다.

당시 뱃사람들 사이에서 다지증 고양이는 '행운의 상징'으로 통했다. 발가락이 더 많아 발바닥이 넓기 때문에 거친 파도가 치는 갑판 위에서도 중심을 잘 잡고, 쥐를 잡는 실력도 월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배 위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스스로를 '선장'이라 칭하길 좋아했던 헤밍웨이에게 이 고양이는 완벽한 선물이었다. 이후 헤밍웨이는 이 스노우볼의 후손들을 번식시키며 수십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헤밍웨이가 쿠바의 저택 '핀카 비히아(Finca Vigía)'로 거처를 옮겼을 때, 고양이들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저택 한편에 고양이를 위한 전용 타워를 세울 정도로 극진한 정성을 쏟았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일 때 독특한 규칙을 가졌는데, 주로 당대의 유명 인사나 예술가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는 집 안에서 고양이들이 식탁 위를 걸어 다니거나 침대 위에서 함께 잠을 자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양이들이 자신의 원고 위에 앉아 있어도 혼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 정도다. 그에게 고양이는 인간 사회의 위선과 복잡함에서 벗어난, 순수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한 마리의 고양이는 또 다른 고양이를 부르고, 결국 당신은 45마리의 고양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위치한 '헤밍웨이 생가 및 박물관'에는 약 50~60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조상인 '스노우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징인 6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35]

이 고양이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박물관의 실질적인 주인 대접을 받는다.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헤밍웨이 고양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2000년대 중반, 미국 농무부(USDA)가 이 고양이들을 '전시 동물'로 규정하여 우리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박물관 측은 9년여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이 고양이들이 헤밍웨이 유산의 일부이자 '역사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받아 자유로운 생활권을 지켜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고양이에게 쏟은 애정은 그의 '마초적 이미지'와 대비되어 더욱 흥미로운 평가를 받는다. 사자나 버펄로를 사냥하고 투우의 잔혹함에 열광하던 남자가, 집에서는 고양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고 이름을 불러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는 사실은 그가 가진 내면의 취약함과 부드러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고양이의 독립적이면서도 고고한 성품을 존경했다. 개처럼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대등한 주체로서 곁을 지키는 고양이의 태도는 헤밍웨이가 추구했던 '품위 있는 인간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가 겪었던 수많은 전쟁의 트라우마와 인간관계에서의 실패 속에서, 고양이는 아무런 판단 없이 그를 받아주었던 유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9.3. 가족 잔혹사[편집]

"헤밍웨이 가문의 비극은 대를 이어 흐르는 독(毒)과 같았다."

헤밍웨이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바로 그의 가족사이다. 대중들에게는 강인한 '마초'의 표상으로 각인되었으나, 정작 그의 내면과 가정사는 끊임없는 불화, 결핍, 그리고 무엇보다 거부할 수 없는 '자살의 굴레'로 점철되어 있었다. 헤밍웨이 본인을 포함하여 그의 아버지, 형제, 손녀에 이르기까지 무려 4대에 걸쳐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잔혹한 내력은 훗날 의학계와 문학계에서 '헤밍웨이 가문의 저주'라는 이름으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정신적 충격 중 하나는 1928년 12월 6일 발생한 아버지 클러렌스 헤밍웨이의 자살이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당뇨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부동산 투자 실패로 인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아내 그레이스와의 불화 끝에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 중이던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으며, 이는 곧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강압적인 성격과 사치 때문에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고 굳게 믿었다. 헤밍웨이는 훗날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가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버지가 사용했던 그 권총은 헤밍웨이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평생 그 총을 보며 자신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유혹 사이에서 갈등했다.[36]

헤밍웨이는 평생 네 번의 결혼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지만, 역설적으로 관계가 안정되면 곧 권태를 느끼고 새로운 자극(혹은 새로운 여인)을 찾아 떠나는 패턴을 반복했다.
  • 해들리 리처드슨 (Hadley Richardson, 1921~1927): 가장 순수했던 파리 시절을 함께한 아내. 헤밍웨이는 훗날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그녀와 헤어진 것을 평생의 가장 큰 후회로 꼽았다. 그러나 그는 해들리의 친구였던 폴린 파이퍼와 불륜을 저지르며 첫 번째 가정을 파괴했다.
  • 폴린 파이퍼 (Pauline Pfeiffer, 1927~1940): 부유한 집안 출신의 패션 에디터. 그녀와의 결혼 생활 중 헤밍웨이는 경제적 안정을 찾고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스페인 내전 현장에서 만난 종군 기자 마사 겔혼과 사랑에 빠지며 다시 이혼을 선택한다.
  • 마사 겔혼 (Martha Gellhorn, 1940~1945): 헤밍웨이와 가장 닮았던 여인이자, 그를 먼저 차버린 유일한 아내. 그녀는 헤밍웨이의 그늘에 가려진 '작가 부인'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전장을 누볐다. 자존심 강한 두 마초의 결합은 끊임없는 충돌 끝에 파국을 맞이했다.
  • 메리 웰치 (Mary Welsh, 1946~사별): 헤밍웨이의 마지막을 지킨 아내. 그녀는 헤밍웨이의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 폭언, 망상을 묵묵히 견뎌냈다. 헤밍웨이가 자살하던 날 아침, 총성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도 그녀였다.

헤밍웨이 가문의 비극은 그의 죽음(1961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 여동생 우르술라: 1966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
  • 남동생 레스터: 1982년 형과 똑같이 총기로 자살.
  • 손녀 마고 헤밍웨이: 1996년, 할아버지의 사망 35주기를 하루 앞두고 약물 자살.

이러한 연쇄적인 비극에 대해 의학계에서는 헤밍웨이 가문에 유전적인 질환인 '헤모크로마토시스(혈색소 침착증)'가 있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이는 철분이 몸에 과다하게 쌓여 장기를 파괴하고 극심한 우울증과 감정 기복을 유발하는 병이다.[ 실제로 헤밍웨이가 말년에 겪은 편집증과 기력 저하가 이 유전병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그의 마초적인 기질 뒤에는 유전적 질병과 싸우며 서서히 무너져 가던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가 숨겨져 있었던 셈이다.

헤밍웨이는 세 아들(잭, 패트릭, 그레고리)을 두었으나 아버지로서의 점수는 낙제점에 가까웠다. 그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강요했고, 아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폭언을 퍼부었다. 특히 막내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와의 관계는 파멸적이었다. 그레고리는 여장 남자(트랜스젠더) 성향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헤밍웨이는 그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레고리는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수감 시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9.4. 대중문화에서[편집]

헤밍웨이는 단순히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를 넘어, 20세기와 21세기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의 '강인한 인간상' 혹은 '비극적 예술가'의 스테레오타입을 구축한 아이콘이다. 그의 이름은 곧 거친 바다, 사냥, 독주(毒酒), 그리고 전쟁터를 누비는 마초적 지성인의 대명사로 소비되며, 수많은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심지어는 상업 브랜드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헤밍웨이 본인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하다 보니,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 미드나잇 인 파리 (2011): 우디 앨런 감독의 이 영화에서 코리 스톨이 연기한 헤밍웨이는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를 가장 유쾌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모든 대사를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말하며, "누구와 싸우고 싶은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라고 묻는 모습은 헤밍웨이의 문학적 자아를 희화화하면서도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 헤밍웨이 & 겔혼 (2012): HBO에서 제작한 영화로, 스페인 내전 당시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사랑을 나눴던 세 번째 부인 마사 겔혼과의 치열한 삶을 다룬다. 클라이브 오웬이 헤밍웨이 역을 맡아 그의 불같은 성격과 파괴적인 천재성을 연기했다.

9.4.1. 게임 및 서브컬처에서의 오마주[편집]

헤밍웨이의 '코드 히어로(Code Hero)' 개념은 현대 게임 서사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 폴아웃 시리즈: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다루는 이 게임 시리즈에서는 헤밍웨이의 문구들이 종종 인용된다. 특히 황무지에서 고독하게 생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헤밍웨이식 고립된 영웅주의와 맞닿아 있다.
  • 동물의 숲 시리즈: 낚시 시스템이 핵심인 이 게임에서 거대 어종을 잡았을 때 나오는 텍스트나 연출 중 일부는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 일본 애니메이션: 《문호 스트레이 독스》 등 작가들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물에서도 헤밍웨이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곤 한다. 대개 그의 거친 취미(사냥, 전쟁)가 능력의 모티프가 된다.

9.4.2. 광고[편집]

역설적이게도 헤밍웨이가 평생 지향했던 '진정성'과 '가식 없는 삶'은 현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마케팅 도구가 되었다.
  • 패션: 사파리 재킷, 피셔맨 스웨터, 거친 린넨 셔츠 등 헤밍웨이가 즐겨 입던 복식은 이른바 '헤밍웨이 룩'이라 불리며 아메리칸 캐주얼 패션의 고전이 되었다. 그가 사용했던 '몰스킨' 수첩 역시 그가 썼다는 사실(혹은 마케팅적 주장) 하나만으로 프리미엄 문구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37]
  • 주류 브랜드: 쿠바의 '라 보데기타(La Bodeguita del Medio)'와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는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성지순례를 오는 명소가 되었다. "내 모히토는 보데기타에서, 내 다이키리는 플로리디타에서(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라는 문구는 전 세계 바(Bar)의 가장 유명한 광고 카피가 되었다.

9.4.3. 밈(Meme)[편집]

  • 6단어 소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음.)"이라는 짧은 문장이 헤밍웨이의 작품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비록 실제 그가 썼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대중들은 이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이 오직 헤밍웨이만이 할 수 있는 예술적 성취라고 믿고 싶어 한다.[38]
  • 마초의 대명사: 현대에 들어서 지나친 남성성을 풍자할 때 헤밍웨이는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구축한 '남성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견고하고 거대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1]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은 무려 47번이나 고쳐 썼다고 전해진다.[2] 헤밍웨이의 저서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 중.[3] 이는 훗날 헤밍웨이가 "기자 시절 배운 규칙들이 내 글쓰기의 기초가 되었다"고 회고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4] 이에 대해 헤밍웨이는 "불쌍한 포크너, 그는 정말 큰 감정이 큰 단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라고 응수하며 자신의 문체적 자부심을 드러냈다.[5] 훗날 이 정신은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를 통해 완성형에 이르게 된다.[6] 이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문체와도 궤를 같이한다.[7] 특히 캐서린 바클리의 경우, 헤밍웨이의 첫사랑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문학적으로 보상받기 위해 탄생시킨 캐릭터라는 설이 유력하다.[8] 헤밍웨이는 성인이 된 후 어머니를 "그 여자(That woman)"라고 부르며 극도로 혐오했으나, 역설적으로 그가 결혼한 여성들은 대부분 어머니처럼 강한 자아를 가졌거나 그를 통제하려 했던 여성들이었다.[9] 마사 겔혼이 헤밍웨이의 안일함을 비판하며 던졌던 일갈.[10] 실제로 이 소설은 마사 겔혼에게 헌정되었다.[11] 이때 마사는 여성 기자로서는 최초로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기록을 세웠으나, 헤밍웨이는 이를 질투하며 그녀를 비난했다.[12] 그녀는 80대의 고령에도 파나마 침공을 취재하러 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13] 거트루드 스타인이 헤밍웨이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1차 대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정의하는 가장 강력한 문구가 되었다.[14] 헤밍웨이는 세잔의 그림을 보며 "풍경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회고했다.[15] 사실 헤밍웨이도 조이스의 이런 뻔뻔한 태도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훗날 "조이스는 정말 훌륭한 싸움꾼이었다. 물론 내 등 뒤에 있을 때만 말이다."라고 회고했다.[16] 훗날 헤밍웨이가 회고한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평가.[17] 실제로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가 출판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18] 헤밍웨이는 파운드와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가 가진 '인간적인 결함'보다는 '예술에 대한 헌신'을 더 크게 조명했다.[19] 헤밍웨이가 사후 출간된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피츠제럴드를 회상하며 남긴 묘사.[20] 훗날 헤밍웨이는 젤다가 스콧의 '남성적 근원'을 의심하게 만들어 그를 심리적으로 거세하려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21] 헤밍웨이는 노년에도 피츠제럴드와의 일화를 자주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했다.[22] 헤밍웨이는 친구들에게 "나는 카스트로가 체포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23] 스페인어로 '전망대 농장'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하바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24] 그는 하루에 쓴 단어 수를 매일 기록했으며, 스스로 정한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극도로 예민해졌다고 한다.[25] 카스트로는 헤밍웨이의 광팬이었으며, 산맥에서 게릴라 전을 펼칠 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전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26] 《인디언 캠프》,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등 다수 포함.[27] 초판은 소문자로 제목이 표기되었으며, 1925년 정식 증보판이 발간됨.[28] 원제: A Moveable Feast. '날마다 축제'라는 번역은 이 문장에서 유래했다.[29] 특히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에 대해 상담해오자 헤밍웨이가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과 비교하며 달래주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30] 《에덴의 동산》 본문 중.[31] 어머니 그레이스는 헤밍웨이와 그의 누나 마셀린을 쌍둥이처럼 보이게 하려고 같은 옷을 입히는 등 기괴한 육아 방식을 고수했다.[32] "판매합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신지 않았음."[33]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히토에 대한 이 문구는 보데기타 델 메디오의 주인이 마케팅을 위해 조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작 헤밍웨이는 당뇨 문제 때문에 설탕이 많이 들어가는 모히토를 그렇게 즐기지 않았다는 것.[34] 16잔이면 럼주 32온스 이상을 섭취한 셈인데, 웬만한 알코올 중독자도 감당하기 힘든 치명적인 양이다. 그의 강철 같은 체력과 동시에 심각했던 알코올 의존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35] 유전학적으로 다지증은 우성 형질이기 때문에 세대를 거듭해도 그 특징이 잘 유지된다.[36] 실제로 헤밍웨이는 지인들에게 "나도 아마 아버지처럼 갈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남겼으며, 이는 소름 돋는 예언이 되었다.[37] 사실 헤밍웨이가 썼던 수첩은 현재의 몰스킨 브랜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프랑스제 수첩이었으나, 마케팅이 역사를 새로 쓴 케이스다.[38] 이 일화 자체가 하나의 '헤밍웨이적 신화'로 기능하며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