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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앤드루 존슨

1. 개요2. 대통령 시기
2.1. 급진공화당과의 갈등 심화2.2. 남부 재건 정책과 사면 조치2.3. 흑인 시민권 문제와 정치적 후퇴2.4. 의회와의 정면 충돌2.5. 공직자 임기 보장법과 위헌 논란2.6. 스탠턴 해임과 탄핵 사태의 발단2.7. 하원 탄핵 가결 과정2.8. 상원 탄핵 재판과 무죄 판결2.9. 정치적 고립과 레임덕화2.10. 퇴임

1. 개요[편집]

미국의 제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의 대통령 시기를 서술한 문서.

2. 대통령 시기[편집]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 존슨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는 전쟁이 막 끝난 남부를 어떤 방식으로 연방에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865년 봄, 남북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남부 각 주의 정치 질서와 사회 구조는 붕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링컨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출범한 존슨 행정부는 즉각적인 안정과 질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존슨의 초기 국정 기조는 강력한 연방 보존 의지와 행정부 중심의 재건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연방의 분열을 시도한 소수 엘리트의 반역으로 규정하였으며, 남부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는 접근을 거부했다. 이러한 인식은 남부 주민 다수를 연방으로부터 영구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으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신속하고 관대한 복귀 절차를 선호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존슨은 재건 문제를 의회의 주도 아래 두기보다는 대통령의 전시 권한 연장선에서 처리하려 했다. 그는 주의 탈퇴가 헌법적으로 무효였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남부 주들은 법적으로 여전히 연방에 속해 있으며 단지 반란 상태에 있었을 뿐이라는 해석을 내세웠다. 이 논리에 따르면 재건은 새로운 주를 승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란 상태를 종료하고 합법적 주 정부를 복원하는 행정 절차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존슨은 대통령 권한을 활용해 남부 주들의 정치 재편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충성 서약을 조건으로 남부 주민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일정 기준을 충족한 주에는 자치 정부 구성을 인정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접근은 링컨이 전쟁 말기에 구상했던 이른바 ‘관대한 재건’ 구상과 형식적으로 유사해 보였으나, 실제 내용과 추진 방식에서는 중요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존슨 재건 구상의 핵심은 사면 정책과 주 헌법 개정 요구였다. 그는 반연방 인사들에게 충성 서약을 전제로 광범위한 사면을 제공함으로써, 남부 사회의 조기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동시에 노예제 폐지를 기정사실화하고, 각 주가 수정헌법 제13조를 승인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노예제 폐지에 한정되었을 뿐, 흑인의 시민권이나 정치적 권리 보장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제한적 재건 구상은 즉각적인 정치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급진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는 전쟁의 결과가 단순한 노예제 폐지에 그쳐서는 안 되며, 남부 사회의 구조적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존슨은 흑인의 정치 참여 확대가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이를 재건의 필수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존슨은 초기 연설과 메시지에서 ‘헌법과 법률에 따른 재건’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급진적 입법이나 강제적 사회 개편에 대한 거부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의회의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기도 했다. 그는 재건 문제를 둘러싼 주도권을 행정부가 쥐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에서 의회와의 잠재적 충돌은 이미 예고된 상태였다.

대통령 취임 초기의 국정 기조는 안정과 연속성을 표방하면서도, 재건의 범위와 방향을 둘러싼 깊은 이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존슨은 빠른 복귀와 제한적 개혁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봉합하려 했으나, 이러한 접근은 전쟁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축소한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이 시점에서 설정된 재건 구상은 이후 행정부와 의회의 전면적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존슨 대통령 재임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1][2]

2.1. 급진공화당과의 갈등 심화[편집]

존슨의 재건 구상이 구체화되면서, 행정부와 급진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 사이의 긴장은 빠르게 고조되었다. 전쟁 직후 의회는 남부를 단순히 질서 회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반란의 결과로 기존 정치·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 존슨은 재건을 행정부 주도의 제한적 조치로 규정하며, 의회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곧 정치적 충돌로 이어졌다.

급진공화당은 남부 재건의 핵심을 흑인 해방 이후의 시민권 보장과 정치 참여 확대에 두었다. 이들은 노예제 폐지만으로는 전쟁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며, 남부 엘리트가 기존 질서를 유지한 채 권력에 복귀할 가능성을 강하게 경계했다. 따라서 남부 주들이 연방에 완전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 흑인 참정권 보장, 연방의 강력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요구는 존슨의 관대한 재건 구상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갈등은 186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존슨의 사면 정책에 따라 다수의 전 남부 연합 인사들이 정치 활동을 재개하자, 의회 내에서는 전쟁 책임자들이 처벌 없이 권력을 되찾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남부 각 주에서 구성된 임시 정부들이 흑인에 대한 차별적 법률을 제정하자, 급진공화당은 존슨의 재건 정책이 전쟁의 성과를 훼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존슨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급진공화당을 소수의 급진 세력이자 헌법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규정하며, 의회가 행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개 연설과 메시지에서 그는 재건 문제를 둘러싼 의회의 개입을 ‘전쟁 이후 또 다른 분열’로 묘사했고, 자신이 연방의 헌법적 질서를 수호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존슨의 언사는 점점 공격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의회 역시 존슨의 행보를 좌시하지 않았다. 급진공화당은 남부 대표들의 의회 복귀를 거부하고, 재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재건의 주도권을 의회가 확보하려는 명확한 신호였으며, 존슨 행정부에 대한 불신을 제도적으로 표출한 조치였다. 이로써 재건 문제는 단순한 정책 논쟁을 넘어, 헌법적 권한을 둘러싼 대결의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양측의 갈등은 흑인 시민권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었다. 급진공화당은 흑인에 대한 법적 보호와 시민권 보장을 연방 정부의 책임으로 인식했으나, 존슨은 이를 주의 권한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의 정치 참여 확대가 남부 사회의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백인 노동자 계층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회관과 인종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1866년 초에 이르러 행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사실상 파국으로 치달았다. 상호 불신과 공개적 비난 속에서 협력의 여지는 점점 사라졌고, 재건 정책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존슨은 자신의 정책이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유일한 정통 재건 노선이라고 확신했으며, 의회는 그러한 확신이 전쟁의 결과를 무력화한다고 판단했다. 급진공화당과의 갈등 심화는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전쟁 이후 미국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근본적 충돌이었다. 이 시점에서 형성된 대립 구도는 이후 시민권 입법, 헌법 개정, 그리고 탄핵 사태로까지 이어지며 미국 정치사의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3][4]

2.2. 남부 재건 정책과 사면 조치[편집]

앤드루 존슨 행정부의 남부 재건 정책은 광범위한 사면 조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남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대규모 처벌보다는 빠른 화해와 복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대통령의 사면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존슨에게 사면은 단순한 관용의 표현이 아니라, 연방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시키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1865년 5월, 존슨은 반란에 가담한 남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포괄적 사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사면은 일정한 예외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고위 남부 연합 관리, 일정 재산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 반란 중 연방 정부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인물들은 자동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 대상자들 역시 개별 청원을 통해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사면 정책의 핵심은 충성 서약이었다. 사면을 원하는 남부 주민들은 연방 헌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며, 이를 통해 법적으로 반란 상태가 종료된 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존슨은 이 과정을 남부 사회를 연방 질서 안으로 재흡수하는 통제된 절차로 인식했다. 충성 서약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전쟁의 정치적 결과를 인정하게 만드는 상징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 사면 정책은 존슨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자동 사면 대상에서 제외된 남부 엘리트들은 대거 특별 사면을 신청했고, 존슨은 상당수의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 이전의 정치·경제적 지배층이 비교적 빠르게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남부의 권력 구조는 근본적으로 재편되지 않은 채 복원되는 양상을 보였다.

존슨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크게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남부 엘리트의 복귀가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이들이 연방 질서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지속적인 불안과 저항을 낳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남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도층을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태도는 급진공화당의 기대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남부 각 주의 정치 재편 과정에서도 존슨의 사면 정책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면을 받은 인물들은 주 헌법 제정 회의와 임시 정부 구성에 참여했고, 전쟁 이전과 유사한 정치적 인맥과 구조를 빠르게 복원했다. 그 결과, 노예제 폐지는 수용되었지만 흑인의 법적 지위와 시민권을 제한하는 법률들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는 연방 차원의 강력한 개입 없이 진행된 재건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였다.

존슨은 남부 주들에게 수정헌법 제13조 비준을 요구했으나, 그 이상의 조건을 부과하지 않았다. 그는 노예제 폐지를 전쟁의 공식적 종결 조건으로 보았으며, 사회적 평등이나 정치적 권리 문제는 각 주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접근은 남부 주 정부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연방 정부가 전쟁의 성과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결국 존슨의 사면 중심 재건 정책은 단기간의 질서 회복에는 일정한 효과를 보였으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야기했다. 급진공화당은 이를 남부 반란 세력의 사실상 복권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재건의 주도권을 행정부로부터 의회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사면 정책은 존슨 행정부와 의회 간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5][6]

2.3. 흑인 시민권 문제와 정치적 후퇴[편집]

앤드루 존슨 행정부의 재건 정책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을 낳은 쟁점은 흑인 시민권 문제였다.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이후, 해방된 흑인들이 어떤 법적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될 것인지는 전쟁의 성과를 가늠하는 핵심 기준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존슨은 이 문제를 재건의 중심 과제로 인식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적 부담이 큰 사안으로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남부 각 주는 존슨의 관대한 재건 정책 하에서 비교적 빠르게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른바 ‘흑인법’으로 불리는 차별적 법률들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법률들은 흑인의 이동, 노동 계약, 집회, 법적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실질적인 종속 상태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급진공화당은 이를 노예제의 사실상 부활로 규정했지만, 존슨은 주의 입법 권한 범위 내의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존슨의 인식에서 흑인 시민권 문제는 헌법적·연방적 개입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흑인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백인 노동자 계층과의 경쟁 심화를 우려했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인종관과 계급관을 반영한 것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는 받아들였지만, 시민권과 참정권 확대에는 명확한 선을 그었다.

1866년, 의회는 흑인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민권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 법안은 모든 미국 태생 인물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주 정부가 이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존슨은 이 법안이 연방 권력을 과도하게 확장하고 주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판단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주요 시민권 입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첫 사례로,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을 극적으로 심화시켰다.

존슨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공개 메시지에서 헌법적 권한 분산과 주권 존중을 강조했다. 그는 연방 정부가 흑인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며, 백인과 흑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언은 북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존슨이 전쟁의 결과를 부정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의회는 존슨의 거부권을 재의결을 통해 무력화시켰고, 이는 대통령 권한에 대한 중대한 정치적 도전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입법 갈등을 넘어, 재건의 주도권이 행정부에서 의회로 이동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신호였다. 존슨은 이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정책 노선이 더 이상 의회의 다수와 공존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흑인 시민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존슨의 정치적 입지를 급속히 약화시켰다. 그는 급진공화당뿐만 아니라 온건 공화당 일부로부터도 신뢰를 잃었고, 재건 문제에 대한 발언은 점점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중 연설에서는 의회를 비난하는 표현이 잦아졌고, 이는 정치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흑인 시민권 문제에 대한 존슨의 소극적 태도와 거부권 정치는 재건 정책 전반의 후퇴로 이어졌다. 이는 남부에서의 차별적 질서를 사실상 방치한 결과를 낳았으며, 동시에 의회가 보다 강력한 재건 입법과 헌법 개정에 나서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존슨은 재건의 주도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7]

2.4. 의회와의 정면 충돌[편집]

존슨 행정부와 미국 의회의 관계는 재임 초반부터 긴장 상태였으나, 1866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타협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이견이 아니라, 재건의 주도권을 둘러싼 헌법적·정치적 충돌로 발전하였다. 대통령은 행정부 중심의 온건 재건을 고수한 반면, 의회 다수를 차지한 급진공화당은 입법부 주도의 강경한 재건을 추진하며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존슨은 자신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후계자로서 전쟁 중 형성된 행정부 권한을 계승했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남부 주들의 복귀, 사면 정책, 주정부 구성 문제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급진공화당은 전쟁 종결 이후의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보았으며, 연방 의회가 재건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인식 차이는 곧바로 입법 과정에서 충돌로 나타났다.

가장 상징적인 갈등은 1866년 민권법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이 법안은 해방된 흑인들에게 연방 차원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주 정부가 이를 침해할 경우 연방이 개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존슨은 해당 법안이 연방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한을 연방 정부에 부여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인종 문제와 관련된 최초의 주요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기록되었다.[8]

그러나 의회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원과 상원은 각각 필요한 표를 확보하여 대통령의 거부권을 재의결로 무력화시켰다. 이는 존슨 재임 중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의 시작이었으며, 대통령 권위가 의회에 의해 공개적으로 도전받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존슨은 이를 단순한 정책 패배가 아닌, 행정부의 존립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갈등은 수정헌법 제14조 비준 문제로 더욱 격화되었다. 의회는 남부 주들이 해당 수정헌법을 비준해야만 연방에 완전히 복귀할 수 있도록 조건을 걸었으나, 존슨은 이를 강압적 조치로 규정하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공개 연설과 성명을 통해 수정헌법이 남부 주들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주장하였고, 남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발언이 반공화당 정서와 결합하여 의회의 재건 정책에 대한 저항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866년 중간선거를 전후로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은 개인적 적대감의 수준까지 상승하였다. 존슨은 이른바 ‘원형 연설’이라 불리는 전국 순회 연설에서 급진공화당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자신을 링컨의 진정한 계승자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중도층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급진공화당은 의회에서 더욱 강력한 다수를 확보하게 되었다.[9]

의회는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착수하였다. 재건 정책 전반을 대통령의 재량에서 배제하고, 군사구역 설치 및 연방 감독을 강화하는 법안들이 연속적으로 통과되었다. 존슨은 이러한 조치들을 위헌으로 간주하고 반복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였으나, 의회는 이를 무력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고, 행정부는 의회의 입법을 집행하는 소극적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는 더 이상 협력이나 조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존슨은 의회를 적대 세력으로 인식하였고, 의회는 대통령을 재건의 장애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상호 불신은 이후 공직자 임기 보장법 제정과 탄핵 절차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66~1867년의 의회와의 정면 충돌은, 존슨 재임기의 분수령이자 미국 헌정사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 권력 투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2.5. 공직자 임기 보장법과 위헌 논란[편집]

존슨과 미국 의회의 갈등은 1867년에 이르러 제도적·헌법적 차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공직자 임기 보장법이 있었다. 이 법은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 없이 연방 고위 공직자를 해임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으며, 표면적으로는 행정부의 인사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존슨을 직접 겨냥한 입법으로 인식되었고,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존슨 행정부 초기부터 급진공화당은 대통령이 재건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행정부 권한을 활용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전쟁부 장관 에드윈 스탠턴은 급진공화당과 밀접한 인물로, 재건 정책 집행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의회는 존슨이 스탠턴을 해임할 경우 재건 체제가 붕괴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로 제정된 것이 공직자 임기 보장법이었다.

해당 법은 대통령이 상원의 인준을 거쳐 임명한 공직자를 해임할 경우에도 상원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관행과 명확히 충돌하는 조항이었으며, 대통령의 인사권을 헌법이 부여한 고유 권한으로 인식해 온 존슨에게는 명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 법이 미국 헌법의 권력 분립 원칙을 침해하며, 입법부가 행정부를 종속시키려는 시도라고 주장하였다.[10]

존슨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즉각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거부권 메시지에서 그는 대통령의 해임권은 행정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며, 상원의 개입은 행정부를 사실상 의회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헌법 어디에도 상원이 해임 과정에 관여할 권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이전 대통령들, 특히 앤드루 잭슨 시기의 행정부 권한 확대 논리와도 일정 부분 맥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존슨의 거부권을 재의결로 무력화시켰다. 이는 단순한 입법 절차상의 승리가 아니라, 의회가 대통령의 헌법 해석을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이었다. 이 시점부터 공직자 임기 보장법은 단순한 법률을 넘어, 대통령 권한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치적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존슨은 법률이 시행된 이후에도 이를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행정부 내부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일부 각료들은 의회와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법률을 형식적으로나마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존슨은 위헌적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대통령의 책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헌법적 판단 이전에 정치적 협박으로 간주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시험하기 위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 임기 보장법은 재건 정책의 실행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미국 헌정사 전반에 걸친 선례 문제로 확장되었다. 대통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법률을 어디까지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의회가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단기간에 결론이 날 사안이 아니었으며, 결국 존슨의 실질적 행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판가름 나게 된다.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둘러싼 위헌 논란은 이후 스탠턴 해임 시도로 직결되며, 존슨 탄핵 사태의 법적 토대를 형성하였다. 이 법은 재건기의 혼란 속에서 입법부가 행정부를 통제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존슨에게는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시험대였다. 공직자 임기 보장법은 존슨 개인의 정치적 운명뿐만 아니라, 대통령 권한의 범위를 둘러싼 미국 정치의 구조적 갈등을 응축한 상징적 법률로 남게 되었다.

2.6. 스탠턴 해임과 탄핵 사태의 발단[편집]

공직자 임기 보장법이 발효된 이후에도 존슨은 해당 법률을 위헌적 산물로 인식하였으며, 이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던 상황에서, 에드윈 스탠턴 전쟁부 장관의 거취 문제는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라 헌법 질서와 재건 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면 충돌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스탠턴은 급진공화당과 긴밀히 협력하며 의회 주도의 재건 정책을 집행하는 핵심 인물이었고, 존슨에게는 행정부 내부의 반대 세력이자 정치적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존슨은 이미 1867년 여름부터 스탠턴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표명하였다. 그는 전쟁부가 대통령의 지침보다 의회의 의도를 우선시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는 행정부의 일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공직자 임기 보장법의 존재로 인해 스탠턴을 해임하는 것은 곧바로 법률 위반 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존슨은 즉각적인 해임이 아닌, 법률의 적용 범위를 시험하는 우회적 조치를 먼저 선택하였다.

1867년 8월, 존슨은 상원이 휴회 중이라는 점을 근거로 스탠턴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율리시스 S. 그랜트를 전쟁부 장관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였다. 대통령은 이를 공직자 임기 보장법이 허용한 임시 조치로 해석하였으나, 급진공화당은 이를 법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스탠턴 역시 자신의 해임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하였다.[11]

상원이 재개되자 상황은 더욱 격화되었다. 1868년 1월, 상원은 존슨의 조치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스탠턴을 원직에 복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스탠턴은 다시 전쟁부 장관직에 복귀하였고, 그랜트는 직무대행직에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존슨은 그랜트가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고 판단하여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후 존슨과 그랜트 간의 공개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존슨은 상원의 결정을 행정부 권한에 대한 노골적인 침해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직자 임기 보장법의 합헌성 여부를 최종적으로 시험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를 통해 헌법적 선례를 남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868년 2월, 존슨은 상원의 동의 없이 스탠턴을 전격 해임하고, 로렌조 토머스를 전쟁부 장관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의회가 설정한 법적 한계를 정면으로 넘어선 조치였다.

스탠턴은 즉각 해임 명령을 거부하고, 전쟁부 건물에 남아 직무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자신이 합법적인 장관이며, 대통령의 명령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전쟁부는 사실상 두 명의 장관이 존재하는 초유의 상황에 놓였고, 행정부의 기능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 장면은 재건기 권력 투쟁의 상징적 장면으로 회자되었다.

의회는 존슨의 행동을 명백한 법률 위반이자 헌법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였다. 하원 내 급진공화당 지도부는 즉각 탄핵 절차 개시를 논의하였으며, 이전까지 신중론을 유지하던 일부 온건파 의원들까지 대통령의 행위를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스탠턴 해임은 단순한 위법 여부를 넘어, 대통령이 의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재건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의도적 행위로 해석되었다.

이로써 존슨은 사실상 스스로 탄핵의 문을 열게 되었다.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둘러싼 위헌 논란은 스탠턴 해임이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정치적 심판의 단계로 전환되었다. 1868년 2월의 이 사건은 존슨 탄핵 사태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본격적인 탄핵 절차에 직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7. 하원 탄핵 가결 과정[편집]

에드윈 스탠턴 해임 조치 이후, 미국 하원 내에서는 앤드루 존슨에 대한 탄핵 논의가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이전에도 존슨의 재건 정책과 행정부 운영 방식에 대해 비판적 시각은 존재하였으나, 스탠턴 해임은 더 이상 정치적 견해 차이로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법률 위반 사례로 인식되었다. 특히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는 하원 다수파에게 대통령을 헌정 질서의 위협으로 규정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하원은 즉각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의 행위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원회는 스탠턴 해임 과정, 존슨의 명령 전달 방식, 그리고 전쟁부의 혼란 상태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존슨이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이를 고의적으로 무시하였다는 정황이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다. 급진공화당은 이를 대통령의 고의적 법률 위반으로 규정하며 탄핵 추진을 공식화하였다.

탄핵 논의는 단기간에 하원 전체로 확산되었다. 1868년 2월 중순, 하원 본회의에서는 존슨의 행위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탄핵 찬성파는 대통령이 법률을 선별적으로 준수한다면 공화국의 근간이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소수의 반대파와 온건파는 공직자 임기 보장법 자체의 합헌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치적 이유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흐름은 이미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기울어 있었다. 남부 재건 정책을 둘러싼 혼란, 흑인 시민권 문제에서의 소극적 태도, 그리고 반복적인 의회와의 충돌은 존슨에 대한 신뢰를 크게 훼손한 상태였다. 여기에 스탠턴 해임이라는 직접적인 위법 행위가 더해지면서, 다수의 하원의원들은 탄핵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시점에서 탄핵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헌법적 의무로 제시되었다.

1868년 2월 24일, 하원은 존슨에 대한 탄핵안을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는 탄핵 찬성 다수가 명확히 확보되었으며, 이에 따라 존슨은 공식적으로 탄핵되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하원 탄핵 가결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12]

탄핵 가결 이후, 하원은 구체적인 탄핵 조항 작성을 위한 절차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총 11개의 탄핵 조항이 마련되었으며, 그 핵심은 공직자 임기 보장법 위반, 의회의 권위 훼손, 그리고 전쟁부 운영을 통한 재건 정책 방해였다. 일부 조항은 대통령의 연설과 발언 내용까지 문제 삼아, 의회를 비방하고 국민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를 포함하였다.

탄핵 조항 작성 과정에서도 하원 내부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급진공화당은 가능한 한 폭넓은 혐의를 포함시켜 대통령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고, 온건파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조항이 상원 재판에서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 결과 최종 탄핵 조항은 법률 위반과 권력 남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순수한 정책적 견해 차이는 비교적 배제되었다.

하원의 탄핵 가결은 존슨 개인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미국 헌정 체계 전반에 중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그 판단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심판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의회가 대통령을 통제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탄핵 절차는 하원의 손을 떠나, 상원의 재판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8. 상원 탄핵 재판과 무죄 판결[편집]

하원에서 존슨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사건은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미국 상원의 탄핵 재판으로 이관되었다. 1868년 3월, 상원은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고로 한 재판을 개정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정치 분쟁을 넘어 헌정 질서의 작동 방식을 시험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재판은 형식상 사법 절차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판단과 법적 해석이 복합적으로 얽힌 과정이었다.

상원 탄핵 재판은 연방대법원장 새먼 체이스의 주재 아래 진행되었다. 이는 대통령 탄핵 재판에서 최고사법부 수장이 재판장을 맡도록 한 헌법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상원 의원들은 배심원에 해당하는 위치에 놓였으며, 엄숙한 선서를 통해 공정한 판단을 내릴 것을 요구받았다. 이와 같은 절차는 재판의 정당성과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하원은 탄핵 관리위원을 선임하여 검찰 역할을 맡겼다. 이들은 존슨이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고의적으로 위반하고, 의회의 권위를 훼손하며, 재건 정책을 방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에드윈 스탠턴 해임 조치는 법률의 명문 규정을 무시한 명백한 불법 행위로 제시되었다. 탄핵 측은 대통령이 위헌 여부 판단을 명분으로 법률을 무시할 수 있다면, 공화국의 법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맞서 존슨 측 변호인단은 방어 논리를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들은 공직자 임기 보장법 자체가 헌법에 위배되며, 대통령의 고유한 인사권을 침해하는 입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존슨의 행위는 개인적 권력 남용이 아니라, 헌법적 권한을 수호하기 위한 시험적 조치였다고 해석하였다. 스탠턴 해임 역시 법률 해석의 문제이지 범죄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상원은 법률 조항 하나하나를 검토하며, 대통령의 행위가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논의하였다. 일부 상원의원들은 존슨의 정치적 행보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이라는 수단이 과도하게 사용될 경우 향후 대통령제 자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특히 대통령과 의회 간의 정책 갈등을 형사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선례를 남기는 데 대한 경계심이 존재하였다.

표결은 탄핵 조항별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1868년 5월, 핵심 조항에 대한 표결에서 유죄 판결을 위해 필요한 상원 3분의 2 찬성에는 단 1표가 부족하였다. 이로써 존슨은 유죄를 면하고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13] 이후 진행된 추가 표결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반복되면서, 상원은 더 이상의 심리를 중단하였다.

무죄 판결 이후 존슨은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되었으나, 정치적 타격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의회와의 관계에서 사실상 고립된 상태였으며, 재건 정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탄핵 재판은 대통령직을 박탈하지는 않았지만, 존슨의 정치적 권위와 지도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상원 탄핵 재판과 무죄 판결은 미국 헌정사에서 중요한 선례로 남았다. 이 사건은 대통령이 법률 해석을 둘러싸고 의회와 충돌할 경우, 어디까지가 정치적 책임이고 어디서부터가 탄핵 사유가 되는지를 둘러싼 기준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이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탄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로 작용하였다. 존슨의 무죄 판결은 개인의 생존을 넘어, 대통령제의 구조적 안정성과 권력 분립의 균형을 둘러싼 논쟁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는 계기였다.

2.9. 정치적 고립과 레임덕화[편집]

상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존슨의 정치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탄핵 실패는 대통령직 유지라는 형식적 결과만을 남겼을 뿐, 존슨의 권위와 영향력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의회 다수파는 그를 사실상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행정부는 헌법상 권한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정치 동력을 상실한 전형적인 레임덕 국면에 접어들었다.

탄핵 재판 직후 존슨은 공개적으로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깊은 좌절과 분노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음에도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인식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더 이상 정치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고, 의회는 대통령의 발언과 제안을 거의 전면적으로 무시하였다. 존슨은 더 이상 재건 정책의 방향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의회는 탄핵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입법부 주도의 재건 정책을 밀어붙였다. 재건법에 따른 군사구역 통치, 남부 주 정부 재편, 흑인 남성 참정권 확대 등의 조치는 대통령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존슨은 일부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였으나, 이는 형식적 절차에 가까웠고 대부분 재의결로 무력화되었다. 이 시기의 거부권 행사는 더 이상 정치적 신호가 아니라, 대통령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였다.

행정부 내부에서도 존슨의 고립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탄핵 사태를 거치며 다수의 각료와 고위 관료들은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고, 차기 정권을 염두에 두고 의회와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존슨은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동맹을 거의 상실하였으며, 국정 운영은 최소한의 행정적 유지에 그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행정부 수반이 얼마나 빠르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정치적 고립은 차기 대선 국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186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존슨은 재선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민주당 내부에서도 그의 입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는 탄핵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의 당사자였고, 남부와 북부 양측에서 모두 확고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존슨은 당내 후보 지명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대선 국면에서 주변 인물로 밀려나게 되었다.[14]

이 시기의 존슨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보다는 개인 정치인으로서의 명예 회복에 더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을 변호하는 발언과 서신을 남기며, 후대의 평가에 기대를 거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재임 말기의 국정 운영은 이러한 개인적 서사와 무관하게 진행되었고, 행정부는 사실상 의회 주도의 정치 질서 속에 흡수되었다.

존슨의 레임덕화는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전쟁 직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의회 간 권력 균형이 급격히 이동한 결과였다. 탄핵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는 대통령제의 안정성과 책임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탄핵 이후의 존슨은 명목상 국가 원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차기 정권으로 넘어가기까지 시간을 관리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그의 재임 마지막 해는 정치적 영향력 상실, 입법부와의 단절,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이러한 레임덕 국면은 이후 미국 정치에서 대통령 권력이 어떻게 약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2.10. 퇴임[편집]

존슨은 1869년 3월 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행정부를 떠났다. 재임 말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탄핵 소추와 상원 무죄 판결 이후에도 사실상 크게 약화되어 있었으며, 급진공화당과의 지속적 갈등으로 인해 정책 추진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퇴임 직전, 존슨은 남부 재건 정책과 사면 조치에 대한 비판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려 했으나, 의회의 협조 부족과 레임덕 현상으로 인해 대통령 권한 행사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퇴임 과정에서 그는 공식 행정 절차와 의전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지만, 이미 정치적 고립 상태였기 때문에 “권한만 남은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1] 존슨은 재건을 대통령 권한에 기반한 행정 절차로 인식했다.[2] 그의 초기 재건 구상은 노예제 폐지에 한정되고 시민권 문제를 포함하지 않았다.[3] 급진공화당은 재건의 핵심을 흑인 시민권 보장과 남부 구조 개혁에 두었다.[4] 존슨은 의회의 재건 개입을 헌법 질서에 대한 침해로 인식했다.[5] 존슨은 대통령 사면권을 재건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했다.[6] 광범위한 사면은 남부 엘리트의 조기 복귀를 초래했다.[7] 존슨은 흑인 시민권을 재건의 핵심 과제로 인정하지 않았다.[8] 존슨은 이 법안이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9] 이 선거 결과로 존슨은 사실상 의회 내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였다.[10] 존슨은 공직자 임기 보장법을 공개적으로 위헌이라 규정하였다.[11] 스탠턴은 자신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직위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12] 존슨은 하원의 탄핵 가결로 인해 직무 정지 상태에 들어가지는 않았다.[13] 무죄 판결은 존슨의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탄핵 요건 충족 여부에 대한 판단이었다.[14] 존슨은 18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공식 후보로 지명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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