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유년기[편집]
1955년 10월 28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로, 아버지 빌 게이츠 2세(1925~2020)는 시애틀 최고의 법률 회사를 운영하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 메리 맥스웰 게이츠(1929~1994)는 미국 은행 재벌 가문 출신의 사교계 명사였다. 할아버지 빌 게이츠 1세(1891~1969)는 가구점 주인이었다. 1살 위의 누나 크리스티(Kristianne)와 9살 아래 여동생 리비(Libby)가 있으며, 중상류층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성장했다.
부유하고 지적인 분위기의 가정환경은 어린 시절의 게이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즐겼고, 부모는 그의 지적 호기심을 적극 지원했다. 반면 에너지 넘치고 돌출 행동이 잦아 학교에서는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본인의 자서전에서 회고한 바 있다.
1968년, 시애틀의 명문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레이크사이드 스쿨의 어머니회가 모금한 자금으로 GE 컴퓨터에 연결된 텔레타이프 터미널을 구입하면서, 빌 게이츠는 13세에 학교에서 생애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게 된다.
터미널을 처음 접한 순간부터 게이츠는 컴퓨터에 완전히 몰입했다. 수업보다 컴퓨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으며, 학교 컴퓨터 시스템의 버그를 이용해 무료로 사용하다 발각되어 1개월간 컴퓨터 사용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폴 앨런을 만나 함께 컴퓨터를 해킹하고 공부하며 컴퓨터 실력을 키웠다.
결과적으로 게이츠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실질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을 키웠다. 시애틀 도심의 교통 신호 체계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용역 계약을 따냈으며, 1972년에는 폴 앨런과 함께 교통 데이터를 분석하는 회사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를 설립하여 첫 사업 경험을 쌓았다.
이 당시 변호사였던 빌 게이츠 2세는 게이츠가 법률 공부에 소홀하고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부유하고 지적인 분위기의 가정환경은 어린 시절의 게이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즐겼고, 부모는 그의 지적 호기심을 적극 지원했다. 반면 에너지 넘치고 돌출 행동이 잦아 학교에서는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본인의 자서전에서 회고한 바 있다.
1968년, 시애틀의 명문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레이크사이드 스쿨의 어머니회가 모금한 자금으로 GE 컴퓨터에 연결된 텔레타이프 터미널을 구입하면서, 빌 게이츠는 13세에 학교에서 생애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게 된다.
터미널을 처음 접한 순간부터 게이츠는 컴퓨터에 완전히 몰입했다. 수업보다 컴퓨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으며, 학교 컴퓨터 시스템의 버그를 이용해 무료로 사용하다 발각되어 1개월간 컴퓨터 사용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폴 앨런을 만나 함께 컴퓨터를 해킹하고 공부하며 컴퓨터 실력을 키웠다.
결과적으로 게이츠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실질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을 키웠다. 시애틀 도심의 교통 신호 체계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용역 계약을 따냈으며, 1972년에는 폴 앨런과 함께 교통 데이터를 분석하는 회사 트래프-오-데이터(Traf-O-Data)를 설립하여 첫 사업 경험을 쌓았다.
이 당시 변호사였던 빌 게이츠 2세는 게이츠가 법률 공부에 소홀하고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2.2. Microsoft 시절[편집]
1973년 SAT에서 1600점 만점 중 1590점을 기록하고 하버드 대학교 법학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학보다는 수학과 컴퓨터 과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하버드 재학 중 하니웰이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폴 앨런과 함께 여름 인턴으로 근무하였다.
1975년 1월, 폴 앨런이 『파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잡지에서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컴퓨터 알테어 8800의 출시 기사를 발견하여 두 사람은 알테어 8800용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제조사 MITS에 공급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1975년 하버드를 휴학[1]하고 Microsoft 창업에 전념했으며,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중퇴를 선택했다.
1975년 4월 4일,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Microsoft[2]를 설립했다. 초기 자본금은 단 1,500달러였으며, 첫 번째 제품은 알테어 8800용 베이직 인터프리터였다. 게이츠는 비즈니스와 코딩을 병행했고, 앨런은 주로 프로덕트 매니저 및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역할을 맡았다고 하며 주요 모듈은 폴 앨런이 작성했다고 한다.
1977년에는 MITS와의 베이직 독점 공급 계약을 소송 끝에 파기하고 타 컴퓨터 업체에도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연 매출이 100만 달러를 돌파했으며, 1979년에는 본사를 워싱턴주 벨뷰로 이전했다.
이 시기 게이츠의 경영 방식은 매우 혹독한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이 일 중독자임을 공언하며 직원들에게도 장시간, 고강도 근무를 요구했다. 직원들의 차량 번호판을 모두 외워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Microsoft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80년의 IBM PC 운영체제 납품 계약이다. 1970년대 후반 PC 시장에 뒤늦게 진입한 IBM은 개인용 컴퓨터에 탑재할 운영체제가 필요했다. IBM은 처음에 당시 OS 업계의 표준이던 CP/M의 제작자 게리 킬달(Gary Kildall)을 찾아갔으나, 협상 과정에서 킬달이 나타나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IBM은 다시 Microsoft로 방향을 틀었다.
게이츠는 팀 패터슨이 CP/M을 모방해 개발한 QDOS(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 86-DOS)를 단돈 5만 달러에 사들인 뒤 IBM용으로 수정하여 MS-DOS라는 이름으로 납품했다. 이 과정에서 IBM은 독점 계약을 원했으나, 게이츠는 OS 소유권을 자신이 보유하는 조건으로 낮은 가격에 납품하는 비독점 계약을 관철했다. 당시 IBM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가 돈이 된다는 판단 아래 이를 수락했고, 이 결정은 훗날 IBM 역사상 최대의 전략적 실수가 되었다.
IBM PC가 폭발적으로 성공하면서 수많은 PC 클론이 쏟아졌고, 이 모든 클론에는 MS-DOS가 탑재되었다. IBM은 하드웨어 경쟁에서 클론 업체들에게 치였지만, 게이츠는 OS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잡스는 제록스의 GUI 기술에 감명받아 Lisa와 Macintosh를 개발했으며, 게이츠는 잡스 퇴출 이전 Apple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게이츠는 Apple II 계약 갱신을 교모하게 이용해 1985년 당시 CEO 존 스컬리로부터 Macintosh GUI의 영구적인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11월에 Windows 1.0을 출시했다. 이후 Apple은 1988년에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Apple이 1985년 합의를 통해 스스로 라이선스를 영구 이양한 것으로 판결했다.
심지어 Apple은 제록스로부터 GUI와 GUI를 위한 기술들에 대한 사용권을 구매하여 자신들이 직접 개발한 GUI 요소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게이츠가 제록스 측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록스가 GUI 원천 특허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Apple의 GUI 특허까지 무효화되었다.
이후 출시한 Windows는 3.0과 3.1이 연속으로 성공을 거두며 시장 점유율을 확했고 1995년 8월 출시된 Windows 95는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을 기록했다. 이 때 빌 게이츠는 포브스 세계 부호 1위에 처음 올랐다.
또한 Microsoft Word, Excel, PowerPoint 등을 묶은 Office 제품군을 출시하여 기업용 생산성 소프트웨어 시장 역시 완전히 장악했다.
1995년 5월, 게이츠는 사내에 '인터넷 해일'이라는 제목의 메모를 배포하며 인터넷이 향후 컴퓨팅의 핵심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회사 전체의 전략 방향을 인터넷으로 전환했다. 당시 출시된 넷스케이프 웹브라우저에 대응하여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출시하여 이걸 Windows에 무료로 끼워팔기 하는 전략으로 브라우저 점유율을 먹었으며 넷스케이프는 이 전략에 급격히 밀려 몰락했다.
이에 대해 1998년 미국 법무부와 20개 주 정부는 Microsoft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핵심 쟁점은 Windows 운영체제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끼워팔기 하여 경쟁사를 부당하게 배제했다는 것이다. 2000년 법원은 Microsoft를 두 개 회사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2001년 항소심에서 분할 명령이 취소되고 법무부와의 합의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게이츠 본인은 이 소송으로 인해 모바일 시장 대응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인생 최대의 사업적 실수였다고 훗날 인정했다.
1994년에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의 옆자리에 빌 게이츠가 주차를 하여 빌게이츠가 데이트를 신청하여 성사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어머니인 메리 맥스웰 게이츠가 투병 끝에 사망했다.
1975년 1월, 폴 앨런이 『파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잡지에서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컴퓨터 알테어 8800의 출시 기사를 발견하여 두 사람은 알테어 8800용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제조사 MITS에 공급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1975년 하버드를 휴학[1]하고 Microsoft 창업에 전념했으며,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중퇴를 선택했다.
1975년 4월 4일,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Microsoft[2]를 설립했다. 초기 자본금은 단 1,500달러였으며, 첫 번째 제품은 알테어 8800용 베이직 인터프리터였다. 게이츠는 비즈니스와 코딩을 병행했고, 앨런은 주로 프로덕트 매니저 및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역할을 맡았다고 하며 주요 모듈은 폴 앨런이 작성했다고 한다.
1977년에는 MITS와의 베이직 독점 공급 계약을 소송 끝에 파기하고 타 컴퓨터 업체에도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연 매출이 100만 달러를 돌파했으며, 1979년에는 본사를 워싱턴주 벨뷰로 이전했다.
이 시기 게이츠의 경영 방식은 매우 혹독한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이 일 중독자임을 공언하며 직원들에게도 장시간, 고강도 근무를 요구했다. 직원들의 차량 번호판을 모두 외워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Microsoft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80년의 IBM PC 운영체제 납품 계약이다. 1970년대 후반 PC 시장에 뒤늦게 진입한 IBM은 개인용 컴퓨터에 탑재할 운영체제가 필요했다. IBM은 처음에 당시 OS 업계의 표준이던 CP/M의 제작자 게리 킬달(Gary Kildall)을 찾아갔으나, 협상 과정에서 킬달이 나타나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IBM은 다시 Microsoft로 방향을 틀었다.
게이츠는 팀 패터슨이 CP/M을 모방해 개발한 QDOS(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 86-DOS)를 단돈 5만 달러에 사들인 뒤 IBM용으로 수정하여 MS-DOS라는 이름으로 납품했다. 이 과정에서 IBM은 독점 계약을 원했으나, 게이츠는 OS 소유권을 자신이 보유하는 조건으로 낮은 가격에 납품하는 비독점 계약을 관철했다. 당시 IBM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가 돈이 된다는 판단 아래 이를 수락했고, 이 결정은 훗날 IBM 역사상 최대의 전략적 실수가 되었다.
IBM PC가 폭발적으로 성공하면서 수많은 PC 클론이 쏟아졌고, 이 모든 클론에는 MS-DOS가 탑재되었다. IBM은 하드웨어 경쟁에서 클론 업체들에게 치였지만, 게이츠는 OS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잡스는 제록스의 GUI 기술에 감명받아 Lisa와 Macintosh를 개발했으며, 게이츠는 잡스 퇴출 이전 Apple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게이츠는 Apple II 계약 갱신을 교모하게 이용해 1985년 당시 CEO 존 스컬리로부터 Macintosh GUI의 영구적인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11월에 Windows 1.0을 출시했다. 이후 Apple은 1988년에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Apple이 1985년 합의를 통해 스스로 라이선스를 영구 이양한 것으로 판결했다.
심지어 Apple은 제록스로부터 GUI와 GUI를 위한 기술들에 대한 사용권을 구매하여 자신들이 직접 개발한 GUI 요소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게이츠가 제록스 측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록스가 GUI 원천 특허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Apple의 GUI 특허까지 무효화되었다.
이후 출시한 Windows는 3.0과 3.1이 연속으로 성공을 거두며 시장 점유율을 확했고 1995년 8월 출시된 Windows 95는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을 기록했다. 이 때 빌 게이츠는 포브스 세계 부호 1위에 처음 올랐다.
또한 Microsoft Word, Excel, PowerPoint 등을 묶은 Office 제품군을 출시하여 기업용 생산성 소프트웨어 시장 역시 완전히 장악했다.
1995년 5월, 게이츠는 사내에 '인터넷 해일'이라는 제목의 메모를 배포하며 인터넷이 향후 컴퓨팅의 핵심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회사 전체의 전략 방향을 인터넷으로 전환했다. 당시 출시된 넷스케이프 웹브라우저에 대응하여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출시하여 이걸 Windows에 무료로 끼워팔기 하는 전략으로 브라우저 점유율을 먹었으며 넷스케이프는 이 전략에 급격히 밀려 몰락했다.
이에 대해 1998년 미국 법무부와 20개 주 정부는 Microsoft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핵심 쟁점은 Windows 운영체제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끼워팔기 하여 경쟁사를 부당하게 배제했다는 것이다. 2000년 법원은 Microsoft를 두 개 회사로 분할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2001년 항소심에서 분할 명령이 취소되고 법무부와의 합의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게이츠 본인은 이 소송으로 인해 모바일 시장 대응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인생 최대의 사업적 실수였다고 훗날 인정했다.
1994년에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의 옆자리에 빌 게이츠가 주차를 하여 빌게이츠가 데이트를 신청하여 성사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어머니인 메리 맥스웰 게이츠가 투병 끝에 사망했다.
2.3. 은퇴 이후[편집]
2.3.1. 기부 활동[편집]
2000년 CEO 사임과 함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했다.[3] 이 재단은 멜린다 게이츠의 권유로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자선재단으로, 세계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기준 누적 기부액은 591억 달러를 넘어섰다.
2021년에 두 사람이 이혼하며 '게이츠 재단'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0년 워렌 버핏과 함께 더 기빙 플레지 캠페인을 창설했다. 이는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생전 또는 사후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하는 운동으로, 게이츠 본인도 첫 번째 서명자 중 한 명이다. 현재까지 전 세계 200명 이상의 억만장자가 서명했다.
2021년에 두 사람이 이혼하며 '게이츠 재단'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0년 워렌 버핏과 함께 더 기빙 플레지 캠페인을 창설했다. 이는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생전 또는 사후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하는 운동으로, 게이츠 본인도 첫 번째 서명자 중 한 명이다. 현재까지 전 세계 200명 이상의 억만장자가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