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유년기[편집]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조앤 캐럴 시블(Joanne Carol Schieble)과 시리아 이민자 출신 압둘파타 존 잔달리(Abdulfattah John Jandali)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혼의 대학원생이었던 친모와 친부 양측 집안의 반대로 인해 출생 직후 폴 잡스(Paul Jobs)·클라라 잡스(Clara Jobs)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양부 폴 잡스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였으며, 그가 가진 뛰어난 손재주와 전자공학 지식은 어린 잡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1] 잡스는 후에 양부모에 대해 양부모라 부르지 않았으며 "그분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반면 친부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친모와는 추후 만나게 된 후 서로 연락 정도는 주고 받는 사이까지 관계를 일정 수준 회복했으며, 특히 친여동생 모나 심슨과는 상당히 친한 남매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친부와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하고 다녔다고 한다. 놀랍게도 스티브 잡스는 한때 친부가 캘리포니아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의 단골 손님이었다. 친부는 "스티브 잡스가 우리 식당에 자주 온다"고 자랑하기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아들인 사실을 몰랐고, 잡스 역시 자신이 양아들인 건 알지만 친부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다.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된 후 친부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잡스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끝내 만나지 않았다.
유년기의 잡스는 학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궂은 장난을 자주 치는 문제아로 유명했으나, 4학년 때 만난 이모진 힐이라는 담임을 만나 잡스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이모진 힐 선생은 잡스의 행동을 보며 "이 학생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지루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판단을 하였고, 잡스에게 문제집을 다 풀면 5달러를 준다고 공부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다. 놀랍게도 잡스는 문제를 빠르게 풀어냈고 공부에 흥미를 보이게 되었다. 이 후 공부에 흥미를 느낀 잡스는 두 학년을 건너뛰어 진급까지 하게 되었다. 훗날 잡스는 인터뷰에서
양부 폴 잡스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였으며, 그가 가진 뛰어난 손재주와 전자공학 지식은 어린 잡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1] 잡스는 후에 양부모에 대해 양부모라 부르지 않았으며 "그분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반면 친부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친모와는 추후 만나게 된 후 서로 연락 정도는 주고 받는 사이까지 관계를 일정 수준 회복했으며, 특히 친여동생 모나 심슨과는 상당히 친한 남매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친부와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하고 다녔다고 한다. 놀랍게도 스티브 잡스는 한때 친부가 캘리포니아에서 운영하던 레스토랑의 단골 손님이었다. 친부는 "스티브 잡스가 우리 식당에 자주 온다"고 자랑하기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아들인 사실을 몰랐고, 잡스 역시 자신이 양아들인 건 알지만 친부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다.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된 후 친부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잡스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끝내 만나지 않았다.
유년기의 잡스는 학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궂은 장난을 자주 치는 문제아로 유명했으나, 4학년 때 만난 이모진 힐이라는 담임을 만나 잡스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이모진 힐 선생은 잡스의 행동을 보며 "이 학생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지루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판단을 하였고, 잡스에게 문제집을 다 풀면 5달러를 준다고 공부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다. 놀랍게도 잡스는 문제를 빠르게 풀어냈고 공부에 흥미를 보이게 되었다. 이 후 공부에 흥미를 느낀 잡스는 두 학년을 건너뛰어 진급까지 하게 되었다. 훗날 잡스는 인터뷰에서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감옥에 갔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이모진 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2.2. 방황과 성장[편집]
잡스는 1972년, 리드 칼리지(Reed College)에 입학했으나 흥미에 맞지 않음+학비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 이후 1년가량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지내다 아타리(Atari)에 게임 디자이너로 입사하면서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불교 철학에도 깊이 빠져들어 인도 히말라야 일대를 수개월간 여행하기도 했다. 일본인 선승 오토가와 고분(乙川弘文)을 스승으로 삼아 2002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정신적 지주로 여겼으며, 이때 형성된 불교적 미니멀리즘 세계관은 이후 Apple 제품 디자인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1974년 아타리 시절 재회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컴퓨터 동호회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에 가입했다. 워즈니악의 기술적 천재성과 잡스의 상업적 직관이 결합되면서 두 사람은 직접 컴퓨터를 제작하기로 했다.
1974년 아타리 시절 재회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컴퓨터 동호회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에 가입했다. 워즈니악의 기술적 천재성과 잡스의 상업적 직관이 결합되면서 두 사람은 직접 컴퓨터를 제작하기로 했다.
2.3. Apple 창업과 초기 성공 (1976~1979)[편집]
1976년 4월 1일, 잡스는 워즈니악·로널드 웨인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차고에서 Apple을 창업했다. 같은 해 7월 첫 제품 Apple I을 666.66달러에 발표했으며, 모니터도 없는 투박한 회로 기판이었음에도 예상 외의 반응을 얻었다.
1977년에는 Apple II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Apple은 기업공개를 단행하여 잡스는 약 2억 달러의 자산가로 등극했다.
사실 위 컴퓨터들은 모두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것이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참여하지 않은 Apple III는 설계 결함으로 망했고, 이후 1983년에는 최초로 GUI가 적용된 자신 딸의 이름에서 따온 Lisa를 발표했으나 9,995달러[2]라는 자동차보다 더 비싼, 미친 가격으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3]
1984년에는 GUI와 마우스를 탑재한 Macintosh를 발표했다. "왜 1984년은 소설 『1984』와 같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설적인 슈퍼볼 광고와 함께 세상에 등장했지만 잠깐 반짝이고 망했다. 그러나 매킨토시가 이후 PC 인터페이스 표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는 성격 때문에 Lisa 팀에서 쫒겨나고 Macintosh 팀으로 합류했는데, 당시 연봉 관련 문제와 팀 간 갈등 + 잡스의 독선적인 태도 인해 이사진 등과도 큰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77년에는 Apple II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Apple은 기업공개를 단행하여 잡스는 약 2억 달러의 자산가로 등극했다.
사실 위 컴퓨터들은 모두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것이다. 스티브 워즈니악이 참여하지 않은 Apple III는 설계 결함으로 망했고, 이후 1983년에는 최초로 GUI가 적용된 자신 딸의 이름에서 따온 Lisa를 발표했으나 9,995달러[2]라는 자동차보다 더 비싼, 미친 가격으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3]
1984년에는 GUI와 마우스를 탑재한 Macintosh를 발표했다. "왜 1984년은 소설 『1984』와 같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설적인 슈퍼볼 광고와 함께 세상에 등장했지만 잠깐 반짝이고 망했다. 그러나 매킨토시가 이후 PC 인터페이스 표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는 성격 때문에 Lisa 팀에서 쫒겨나고 Macintosh 팀으로 합류했는데, 당시 연봉 관련 문제와 팀 간 갈등 + 잡스의 독선적인 태도 인해 이사진 등과도 큰 갈등을 빚게 되었다.
2.4. NeXT와 픽사 (1985~1996)[편집]
잡스의 독선적 경영 방식과 내부 인사 갈등으로 Apple 이사회의 신뢰를 잃은 잡스는 1985년 CEO 존 스컬리 및 이사회와의 표결 끝에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Apple을 떠나게 된 잡스는 그와 같이 나온 엔지니어 몇 명을 이끌고 NeXT를 창업했다. NeXT의 하드웨어는 일부 대학교에서만 팔려나갈 정도로 부진했으나, 이 시기 개발된 NeXTSTEP이라는 운영 체제는 꽤 인기가 있었다.[4] 그러나 회사 자체는 부도나기 직전이었다.
한편 1986년에는 루카스필름의 컴퓨터 그래픽 부문을 인수하여 '픽사(Pixar)'로 개명했다. 1995년 픽사가 제작한 최초의 장편 컴퓨터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가 3억 6,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잡스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재기했다. 이후 2006년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74억 달러에 인수하며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 개인 주주가 되었다.
Apple을 떠나게 된 잡스는 그와 같이 나온 엔지니어 몇 명을 이끌고 NeXT를 창업했다. NeXT의 하드웨어는 일부 대학교에서만 팔려나갈 정도로 부진했으나, 이 시기 개발된 NeXTSTEP이라는 운영 체제는 꽤 인기가 있었다.[4] 그러나 회사 자체는 부도나기 직전이었다.
한편 1986년에는 루카스필름의 컴퓨터 그래픽 부문을 인수하여 '픽사(Pixar)'로 개명했다. 1995년 픽사가 제작한 최초의 장편 컴퓨터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가 3억 6,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잡스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재기했다. 이후 2006년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74억 달러에 인수하며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 개인 주주가 되었다.
2.5. Apple 복귀와 제2의 전성기 (1997~2010)[편집]
1996년 Apple이 NeXT를 4억 2,900만 달러에 인수하면서 잡스는 11년 만에 Apple로 돌아왔다. 복귀하자마자 그는 경영권을 장악해 길 아멜리오를 CEO직에서 쫒아냈으며 1997년 '임시' CEO에 취임하였고,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거의 파산 직전에 몰렸던 Apple을 수습했다. 같은 해 8월 라이벌 Micrososft로부터 1억 5,0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잡스는 1998년 반투명케이스를 적용한 세련된 디자인의 iMac을 출시하여 많은 호응을 이끌었으며[5], 2001년 iPod로 음반 산업 전체를 뒤흔들었고 2003년에는 (iTunes를 출시함으로써 곡당 0.99달러의 합법적 음악 유통 플랫폼을 확립했다.[6][7]
2007년에는 iPhone을 공개하며 당시 노키아, 모토로라 중심의 기존 휴대폰 시장 구도가 완전히 재편되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기반이 되었다. 2010년 iPad를 공개했다.[8]
2000년 1월 '임시' CEO 딱지를 떼고 정식 CEO에 취임했다.
이후 잡스는 1998년 반투명케이스를 적용한 세련된 디자인의 iMac을 출시하여 많은 호응을 이끌었으며[5], 2001년 iPod로 음반 산업 전체를 뒤흔들었고 2003년에는 (iTunes를 출시함으로써 곡당 0.99달러의 합법적 음악 유통 플랫폼을 확립했다.[6][7]
2007년에는 iPhone을 공개하며 당시 노키아, 모토로라 중심의 기존 휴대폰 시장 구도가 완전히 재편되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기반이 되었다. 2010년 iPad를 공개했다.[8]
2000년 1월 '임시' CEO 딱지를 떼고 정식 CEO에 취임했다.
2.6. 췌장암 투병과 사망[편집]
잡스는 2003년 무렵부터 췌장의 신경내분비종양(Neuroendocrine tumor)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나 6개월간이나 치료를 거부하고 식이요법, 침술, 수행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2004년 8월 췌장암 수술 사실을 공개했으며, 이후 건강 악화와 일시적 회복을 반복했다.
2011년 8월 24일, 잡스는 팀 쿡에게 CEO직을 이양하면서 이사회 의장직만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첫 번째 여자친구 크리산 브레넌(Chrisann Brennan) 사이에서 태어난 딸 리사 브레넌 잡스(Lisa Brennan-Jobs)[9]와, 아내 로렌 파월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리드, 에린, 이브)를 두었다.
2011년 8월 24일, 잡스는 팀 쿡에게 CEO직을 이양하면서 이사회 의장직만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첫 번째 여자친구 크리산 브레넌(Chrisann Brennan) 사이에서 태어난 딸 리사 브레넌 잡스(Lisa Brennan-Jobs)[9]와, 아내 로렌 파월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리드, 에린, 이브)를 두었다.
3. 사후[편집]
사후에 스티브 잡스는 사실 제때 치료만 받았어도 살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가 대체의학에 의존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잡스는 수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부인의 설득 끝에 겨우 수술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게다가 잡스는 채식주의자였고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즐겨 먹었는데, 췌장암 수술 뒤 이것도 문제가 됐다. 췌장 절제 후에는 단백질 섭취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 발견 당시에 췌장의 5%만 퍼져 있었던 암은 9개월 뒤에는 췌장 전체로 퍼졌고 수술을 한 뒤에도 전이가 계속되어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
잡스의 사망 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라는 잡스의 철학을 인용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의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Steve Jobs)』를 2011년 10월 24일 출간했다.
잡스의 사망 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라는 잡스의 철학을 인용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의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Steve Jobs)』를 2011년 10월 24일 출간했다.
4. 평가[편집]
잡스는 곤경과 실패, 몰락을 겪으면서도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게 재기했다는 점에서 IT 업계 최고의 재기 서사로 평가받는다. 다만 독선적인 성격, 직원들에 대한 인격적 모욕, 딸에 대한 오랜 부정 등 인간적 결함 역시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5. 어록[편집]
- "Design is how it works."
- "소비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보여주면 된다."
[1] 잡스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2] 1,500원 환율 반영시 한화로 약 4,760만 원.[3] NASA에서는 [4] 그것은 길 아멜리오가 NeXT를 인수하며 훗날 macOS와 iOS의 기반이 되었다.[5]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는 승진했다.[6] 잡스가 iPod과 iTunes를 출시한 이유가 음악 불법 복제 배포 때문이었다.[7] 이 때 Apple은 Apple Records라는 회사와 법적 소송을 통해 Apple이 음악 산업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한 바 있는데, 이를 어기게 되어 다시 소송이 걸리자 Apple Records 전체를 인수했다.[8] 원래 iPad가 먼저 출시 예정이었지만, 터치 스크린의 제작이 빨라져서 iPhone이 먼저 출시된 것이다.[9] 잡스는 한동안 리사의 친부임을 부정했으나, 이후 법원 판결과 자신의 전기에서 이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