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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품 구성3. 의의
3.1.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3.2.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과 반박
3.2.1. 율도국에서 자신도 왕국을 세웠다?3.2.2. 자신이 서자였음에도 첩을 두었다?3.2.3.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4. 논란
4.1. 최초의 국문 소설인가?4.2. 저자가 허균인가?
4.2.1. 이윤석 교수의 주장4.2.2. 반박
5. 기타
5.1. 게임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됴션국 셰둉ᄃᆡ왕 즉위 십오 연의 홍희문 밧긔 ᄒᆞᆫ ᄌᆡ상이 잇스되 셩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조선국 세종대왕 즉위 십오 년에 홍희문 밖에 한 재상이 있으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홍길동전 완판 36장본. 홍길동전의 여러 판본 가운데 학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판본이다. 원본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된 이본(異本)이다.

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 정확한 창작년도는 알 수 없다. 원래는 작가가 허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허균의 문집에는 홍길동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그가 저자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다. 허균이 지었다는 근거는 허균과 동시대의 인물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고에서 허균이 저술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는 것 딱 하나고, 이본의 내용은 허균이 지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본이 전해져 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

창작 당시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고, 후대에 간행된 이본(異本)들만이 전해져온다. 크게 보면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 계열과,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완'산주(전주)에서 인쇄된 판본) 계열, 기타 필사본 계열들로 나뉘어진다. 아래 30장 경판본이 홍길동전의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홍길동은 실제 도적이었던 홍길동(洪吉同)을 모델로 삼았다. 하지만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洪吉童) 이라서 한자가 다르다. 일부 인터넷 백과 사전에서는 한자가 같은 것으로 나오지만, 조선 왕조 실록을 확인해보면 소설 주인공과 실존 인물은 서로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7차 교육과정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온 작품이다.

2. 작품 구성[편집]

홍길동의 어머니 춘섬은 홍판서의 첩이였다. 얼자로 태어난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요청하지만, 이를 거절당하여 집안에서는 더욱 고립되고, 상황이 꼬여서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야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도적단을 접수하여 정의의 비밀 결사 활빈당을 세우고 조선 전국을 무대로 의적활동을 하던 중, 길동의 형과 아버지를 협박한 임금 앞에서 일부러 잡혀주지만, 유유히 도술을 써서 탈출하고, 홍길동을 잡을 방법이 없었던 임금이 병조 판서 자리를 내준 후에, 저도라는 섬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갔다가 옆의 율도국으로 쳐들어가 결국엔 율도국의 왕이 된다.
(완판본에서는 율도국의 왕에 오른 후까지 다룬다. 세월이 지나 태자에게 왕위를 주고 중전과 함께 도를 닦아 백일승천白日昇天하여 신선이 되는 결말이다.)

홍길동전의 구성은 영웅 소설의 구성과 매우 유사하다.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비범한 능력, 위기, 위기를 벗어나고, 위기를 극복하는 전형적인 고전 소설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입신양명'만이 제일 가치였던 1차원적인 단순한 오락 소설들보다는 발달한 주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던진 교훈은 주로 서얼 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하여 계급 제도의 모순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계몽 소설로 보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다. 그로 인해서 단순한 활극 소설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존재한다. 다만, 이는 대중 장르를 겸하는 고전 소설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지나친 폄하라고 할 수도 있겠다.

3. 의의[편집]

홍길동전에서 "평등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홍길동 개인의 입지전일 뿐, 결코 계몽적인 메시지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 대한 비평은 계몽성을 내부에 숨긴 대중소설이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오락 소설이냐를 분간하려는 논쟁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적서 차별 제도와 탐관오리의 횡포를 비판한다. 그 당시 사찰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불리는 데 열중했기 때문에, 도적이 되어서 맨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해인사 탈취였다. 즉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홍길동전의 의의는 철학에까지 왕조 사상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사회적인 발전이 늦었던 동아시아에서, 서얼 제도라는 '피부에 와닿는' 요소를 통해서 차별 제도의 근본적인 모순점을 파헤치고, 이를 대중 소설로서 널리 읽히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비교 대상은 현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당시의 계급 제도를 두둔하는 프로파간다, 이에 길들여진 대중 소설들 사이에 계몽적인 성향을 스며들게 만들었던 작가의 통찰력이라고 보아야한다. 또한 당시의 부조리했던 관리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3.1.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오락 소설[편집]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들은 전부 근대 이후의 가치관을 기준에 두고 있다. 유럽에서조차 일부일처제는 기독교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데 수백년이나 걸렸고, 일부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는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16세기에 동양의 조선에서 나온 소설이 이 모든걸 동시에 생각해 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는건 말이 안 된다.

홍길동전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습은 동양 철학 전반의 한계이지, 허균이 주장했던 온건한 신분제 개혁과 양립 불가능한 소재들도 아니다. 즉, 홍길동전은 수백년 전의 대중 소설에서 계급 사상의 모순을 통찰하고 이를 퍼트린 비판 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 것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엄청나게 진보했던 서구의 사회 철학에 비할 작품은 아닐 수 있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이 담긴 리바이어던은 1650년대에 출판되었는데, 홍길동전은 학술서가 아닌 대중 소설이니만큼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천한 존재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마무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당대 동양 사회에서는 쉽사리 떠올려선 안 될 개념을 대중 소설로서 읽히게 만들었다는 의의는 분명히 낮게 평가할 수 없다.

단 유교에서 불교나 기독교 같은 평등 사상은 아니지만 폭군은 결국 역성혁명을 맞아 무너지고, 천한 사람도 순임금이 될 수 있다고는 등 충분히 유교적 가치관에 맞는 소설이다. 즉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즉, 홍길동전의 한계는 동양 사회의 사상적인 한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들은 홍길동전의 주제를 정치적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결국 홍길동전이 당대 조선 사회를 기준으로 상당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홍길동 같은 인재가 사회 제도적으로 차별받았던 계기, 즉 '호부호형'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세상이 나타나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를 생각해보자.

3.2. 홍길동전에 대한 비판과 반박[편집]

3.2.1. 율도국에서 자신도 왕국을 세웠다?[편집]

율도국을 정복한 홍길동은 정작 자신도 왕위에 올랐으므로, 민중을 살피기보다는 전형적인 왕조 소설의 인물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심지어 원래 주인이 있는 나라의 왕족을 몰살하고 세우는 것이다. 외딴 섬에 이상국을 세운다는 줄거리로 비슷한 허생전은 "세우려다 말고 그냥 간다"라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애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연주의를 주장한 노자도 왕국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이상 사회를 주장했다. 즉, 동아시아에서 왕정은 계급 제도가 아닌 체제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다고 보아야한다. 현대의 평등 사상은 사회 계약으로 모종의 규칙 때문에 권리가 침해받지 않은 계약 이전 상태의 순수한 권리인 자연권에 의거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정한 자연법 사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신들조차도 계급이 정해져있는 철학적으로 꽉 막힌 상태였음을 감안한다면, 홍길동의 왕이 된다는 마무리를 현대적인 사상으로 비판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즉 허균 입장에서는 군주제 이외의 정치 체계를 상상해보지도 못해서 홍길동이 새로운 이상 국가를 만들 때 정치체계가 왕국이 된 것이지, 홍길동이 무슨 독재자가 된 영웅 같은 것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왕조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그냥 좋지 않은 상태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역성혁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반란들 상당수가 기존의 부패한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천리"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물론 홍길동이 소위 문명국의 출신이고 조선과 중국에 조공하게 되었으므로 춘추필법에는 기존 "오랑캐" 왕가들 보다는 더 긍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족들의 씨를 말리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예를..들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씨를 말려버린 후로 개성 지방에서 이성계를 욕하는 민담이 많았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공화국'이라는 제도 자체가 생소했다. '공화국'이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프랑스가 전 유럽의 침공을 받았을 정도다. 심지어 바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 내에서조차 입헌군주제가 대세일 정도였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의 목을 날려버린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었고, 이후로도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다가 보불전쟁 이후에야 공화정이 정착되었다. 의회제를 선택한 영국도 왕 자체는 명목상이나마 남겨 지금까지 이어지고 미국의 대통령 또한 초기 개념은 선출하는 '왕'이었다. 그런데 늦어도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데다가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홍길동전에서 '왕국'을 이상향으로 제시했다고 비판하는 건 타당치 않다.

아무튼 이런 비판 때문인지 일부 판본에서 율도국 왕과 왕족들은 충혜왕, 연산군 수준의 답이 없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왕가 몰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고, 또 일부 판본에서는 홍길동은 율도국 왕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율도국 왕과 왕족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자결해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몇몇 판본에서는 섬을 접수하는 과정이 아예 요괴 퇴치로 바뀌어있다. 참고로 이때 퇴치하는 괴물이 한국 요괴 중에서 은근히 오우거랑 비슷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하국대적의 카테고리에 속한 괴물이다. 그리고 홍길동전의 주제 의식을 현대적인 평등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왕정)을 만든다' 는 생각으로 생각해본다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3.2.2. 자신이 서자였음에도 첩을 두었다?[편집]

홍길동전의 서술을 보면 '처첩'이 아니라 두 부인, 즉 '이처'를 두었다고 나와 있다. 처와 첩은 지위 및 그것이 갖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일단 작중 내용에 따를 때,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에서 서얼을 차별하는 의식이나 관념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본을 보면, 홍길동은 백 소저와 조 소저 두 아내를 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고 그 중 장남을 세자로 삼고 나머지는 모두 대군으로 삼았으니 결코 자식들을 차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홍길동전은 어디까지나 첩의 자식이 차별받는 서얼 제도를 비판하면서 계급제도의 모순을 통찰한 작품이다. '처첩'을 두고 자식에게 차별 대우를 했다면 작품의 주제 의식이 흐트러지겠지만, 여러 여인들을 거두더라도 서로 동등하게 대우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오히려 두 부인과 그 자식들을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서 차별철폐라는 주제의식을 완성하는 장치로 파악 할 수 있다.

3.2.3.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편집]

오히려 홍길동이 왕이 된다는 마무리는 출신이 천한 인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테마를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편이다. 노비의 자식 = 왕이라는 등호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홍길동전의 마무리는 당대 기준으로 파격적인 것이었고 단순히 평등 의식이 없는 영웅론적 왕조 소설이라고만 평할 수가 없는 가치가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건국 설화에서는 왕족이 하늘이나 자연에서 출생한다는 신화소를 통하여 왕족이 '인간들과 다른 존재'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현대의 독재자들조차도 종교와 권위 태몽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혈통을 신성한 것으로 포장한다.

위에서 적혀있지만 당시에는 계급 사상이 더욱 철두철미해서 같은 가족끼리도 서얼과 노비들은 적자들에게 을 기본으로 하거나 대중소설들마저도 죄다 정숙한 선비와 하늘의 혈통 따위를 강조하는 주인공들만 성공하는 근본적으로 계급 사상에 모든 사람들이 푹 삭어버린 상태였다.

4. 논란[편집]

홍길동전은 작품 내적이 아닌 외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데, 하나같이 다양한 가설들이 혼재하고 있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 원본이 국문본인가?
  • 원본이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
  •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맞는가?
  • 허균은 원본과 이본 중 어느 쪽을 저술했는가?
  • 원본과 이본 사이에 달라진 내용은 없는가?

4.1. 최초의 국문 소설인가?[편집]

과거에는 단순히 '최초의 한글 소설'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거듭된 연구결과로 이렇게 수식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졌다.

홍길동전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후대의 여러 이본(異本)만 존재하며, 원본이 한문이나 한글로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즉, 원본이 한문본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홍길동전의 한문본은 유일하게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전하는데 이는 역으로 국문본을 한문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소설 설공찬전의 경우, 원본은 왕명으로 모두 불태워져 전하지 않고 묵재일기 이면에 필사된 국문 번역본이 1997년에 발견된 바 있다. 서경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이복규 교수가 발굴.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설공찬전이 언문(한글)으로 번역되어 전파되면서 민중을 미혹시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설공찬전의 원본은 한문본임이 명확하다.

홍길동전과 관련된 가장 큰 쟁점들은 최초 저자가 허균이냐는 논란과 원본이 국문 소설이냐는 논란인데 둘중 하나는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저자가 허균이 맞다면, 굳이 국문으로 저술할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 허균은 엄처사전(嚴處士傳)·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장산인전(張山人傳)·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장생전(蔣生傳)과 같은 한문 소설을 여러 편 지은 바 있기 때문에, 허균이 정말 지었다면 홍길동전도 최초본은 한문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대 작품인 구운몽처럼 저자 김만중이 한문을 잘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한글로 지었다는 목적이 확실한 경우라면 모를까 여지껏 한문으로 집필을 잘 해오던 허균이 갑자기 홍길동전만 국문으로 적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만에 하나 홍길동전의 원본이 국문본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현대까지 전해져 오는 고전소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이지 이전에 다른 한글 소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결론을 내리자면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우며, '현전하는 고전소설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한글 소설일 가능성이 높은 소설' 정도로 봐야한다.

4.2. 저자가 허균인가?[편집]

4.2.1. 이윤석 교수의 주장[편집]

2019년 4월 24일, 이윤석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한문 홍길동전을 찾아냈으며, "한글 홍길동전은 허균이 아닌 18세기 후반에 알 수 없는 어떤 작가가 창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 몇몇 뉴스에서는 홍길동전의 작자를 지소 황일호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덤으로 홍길동전의 원래 이름은 노혁전. 그동안 이윤석 전 교수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이미 홍길동전을 허균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근거를 내놓았었는데 한글 홍길동전이 허균 작이 아닌 5+1가지 이유
  • 허균(1569~1618)은 16세기의 인물인데 '홍길동전'에는 17세기 후반의 인물인 장길산이 등장한다.
  • 소설에 등장하는 선혜청은 18세기에 들어서야 활성화된 관청이다.
  • '홍길동전'을 제외한 모든 한글 소설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허균이 시간여행자가 아닌 이상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았었다.

이윤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최초의 홍길동전은 황일호가 쓴 '노혁전'으로, 현재 대중들에게 알려져있는 '홍길동전 판본'은, 후대의 인물인 장길산 등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18세기 이후에 불명의 저자가 각색하거나 변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일호의 '노혁전'은 일종의 야담 모음집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홍길동전은 사회 비판을 담은 저술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이 밖에도 학계에서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데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허균 문서에도 보듯이 허균은 한문에 능한 문장가인 데다 홍길동전을 제외하면 한글로 남긴 글이 없다는 것이 근거. 다른 글들을 모두 한문으로 남겼는데 홍길동전만 한글로 남길 이유가 있냐는 것. 허균 작가설의 근거가 뒷대의 사람인 이식(1584~1647)이 쓴 '택당집'에 등장하는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문장 하나뿐이라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4.2.2. 반박[편집]

물론 이에 반박하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우선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근거는 동시대를 살았던 이식의 기록 때문이다. 허균은 1569년생이고 이식은 본문에도 나왔다시피 1584년생인데 두 사람의 나이는 15세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허균이 죽었을 때 이식은 이미 30대 중반의 선비었으므로 허균의 행적을 실제로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실질적으로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리고 이식은 허균의 제자였다. 직접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

이식의 말은 인과관계를 헷갈릴 만한 복잡한 내용도 아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발언한 것도 아닌, 자신의 문고에 적은 내용이므로 딱히 곡필했을 가능성은 낮다.

'현전하는 최초의 국문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금의 상황에서야 재조명받은 것이다. 이식이 살던 당대에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또한 공개석상에서 중요하게 한 발언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문고에 '홍길동전의 저자는 허균이다' 정도로 짧게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었다 해도, 이식이 의도적으로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 만들어서 얻는 이득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소문 자체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닌 이상 진실을 적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

이윤석 교수의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이본(異本)의 내용에 근거한다.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이본' 홍길동전의 내용에 시간이 지나면서 글이 추가되거나 소실되면서 다른 내용을 후대 사람이 넣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쉽게 말해 '이본'의 내용에 허균이 알 수 없는 내용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원본의 저자가 허균일 가능성'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고전소설 중에 유명한 사례로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있다. 나관중은 원명교체기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적절한 내용이지만 소설 배경과는 맞지 않는 점이 존재한다. 병력 규모가 원나라 말기 군벌과 비슷하거나 후대에 고안되는 무기가 나오는게 대표적. 하지만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지를 다룬 소설은 많았으며, '삼국지연의'도 크게 보면 삼국지평화 등 이전 삼국지 소설들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해지는 '이본'에 허균의 시대적 상황과 맞지 않는 요소가 등장하더라도 저자가 완전히 아니라는 근거로는 보기 어렵다. 즉 '이본'이 저술된 시기는 '장길산'이나 '선혜청'이라는 요소를 봤을 때 18세기 이후인 것이 거의 명확하지만, 원본과 이본이 얼마나 다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허균이 원본의 저자일 가능성은 아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국문 소설이라는 점을 근거로 허균이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애초에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한 논쟁이다. 현재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국문본'들은 죄다 이본이며 한문본도 국문본을 번역한 이본이다. 당시 조선은 식자층을 위한 한문소설과 일반 평민들 및 아녀자들을 위한 국문소설로 저작 문화가 나뉘어 있었으며 두 계층 간의 번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해지는 국문 이본들도 원본을 '번역'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본들을 보면 국문본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한문을 잘 모르는 계층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이 원본이 국문본인 이유가 되진 않는다. 허균은 한문본으로 남겼는데 이게 국문으로 번역된 것이 히트를 쳐서 많이 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허균의 주요 문집인 성소부부고도 허균 본인이 역모로 죽고 나서 외손 이필진(李必進)이 편찬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제시되는 상황에서 허균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홍길동전도 있는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결국 이 논란은 원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5. 기타[편집]

소설 속 홍길동이 조직한 활빈당은 훗날 동명의 조선 말 의병운동 단체로도 활동하게 된다.

홍길동은 이 소설로 인해 유명해져서, 미국의 John Doe와 같은 '대표적인 이름' 위치에 올라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지방 자치 단체에서 홍길동의 고향이 어디냐를 문제로 다툰일도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세종대왕(장헌대왕) 때이기 때문에 세종이 그다지 명군이 아니었다는 떡밥이 뿌려진 적이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세종을 딱히 암군으로 묘사하고 있진 않으며 역사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당시로서는 오래된 임금 중 널리 알려진 왕의 이름을 끌어온 것 뿐이다. 따라서, 딱히 저자가 세종에게 반감을 가진 건 아닌 듯하다. 혹은 태종 때 부터 계획된 서얼금고법노비종부법 태종을 거처 바로 세종때 시작하던터라 간접적으로 작품 주제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는 해석도 있어보인다.

게다가 소설 첫머리를 보면 세종 15년부터 "사방의 일이 업고 도젹이 업스며 시화연풍하여 나라이 태평하더라."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고 나와 있는데 이를 보면 세종 치세는 오히려 평안한 시대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저자가 세종 대왕의 이미지를 역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즉, 성군인 세종대왕의 치세 때도 적서차별과 같은 사회의 폐단은 존재했으며 따라서 극복해야 할 존재임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주장이다.

완판본에서 나와있듯이 세종 15년에 아버지가 동침해 애를 가졌으니 실제 홍길동의 출생은 10개월 뒤인 세종 16년(1434년)일테고, 11살에 집을 뛰쳐 나왔으니 세종 27년(1445년)이다. 이후 천하를 주유하다 도적단의 두목이 되어 활빈당을 세웠는데 도적단의 두목이 되려면 아무리 못해도 15살은 넘었을 테니 1450년 이후일 것이다. 세종 대왕의 재위 기간은 1450년까지니까 실제 홍길동이 활약한 것은 당연히 문종 이후, 아마도 세조 치세가 된다.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는 신동우 화백의 명작 만화 풍운아 홍길동으로 인해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위에서도 비판받았던 중세적인 캐릭터성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위에서 나온 모순적인 캐릭터성이 대규모로 물갈이 되고, 푸른 쾌자초립을 쓰는 이미지도 해당 만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동우 화백의 만화를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홍길동이란 작품이고 이를 리메이크 한 작품은 돌아온 영웅 홍길동 참조. 다른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2011년에 개봉한 홍길동 2084도 있다.

고우영판의 경우 홍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닌, 모함으로 몰락한 양반의 자제로 나온다.

박수동 화백의 홍길동과 헤딩박도 유명하다.

뱀발로 실질객관동화 60화에서 이걸 막장 드라마에도 쓸 수 있는 재료라 한다.

명성 덕분에 펭귄 북스에서도 영역판을 내놓았다. 만화 내지 한국 웹툰을 연상시키는 커버 디자인이 이채로운 편.

사회주의적 계급투쟁 요소 덕분에 북한에서는 많은 인기를 얻었고 무장투쟁기 김일성의 신격화에도 축지법, 둔갑술 등 많은 요소들이 홍길동전으로부터 차용되기도 하였다. 구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에서는 번역서를 통해 홍길동전을 접한 사람들이 많았고 80년대에는 홍길동전을 소재로 한 오락 영화가 북한에서 수입되어 제법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홍길동이 세운 나라인 율도국을 소재로 한 국산 RPG게임 '망국전기'가 있었다. 홍길동 사후의 율도국이 배경이며, 주인공은 홍길동의 손자인 홍세영.

홍길동전의 '호부호형'에 대한 오래된 꽁트가 있다. 홍 판서가 홍길동에게 호부호형을 허락한다고 말하자 홍길동은 울먹거리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을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홍판서가 답답해하며 '그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다.'라고 말하자 홍길동은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게 하면 무합니까. 호부호형을 못하는데......'라고 말한다는 바보 개그.

'빨간 길에 떨어진 동전의 이름은?'이란 수수께끼의 정답이다.

메카 웹툰인 공길동전으로 재탄생되었다.

5.1. 게임[편집]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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