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진서》(晉書)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권신 사마의의 시절부터 서진을 거쳐 동진의 공제 때 유유에 의해 동진이 멸망할 때까지의 사마진의 역사 기록을 담은 이십사사 역사서이다.
당나라의 제2대 황제였던 태종 이세민은 이전 시대 사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사서들을 모아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에 대한 정사를 새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따라서 646년 윤 3월 조서를 내려서 조정 신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진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작업은 당시 명재상인 방현령 등 3명이 감수하고 그 아래에 18명의 사관을 두어 분담해서 실행되었다. 방현령 등은 육조시대 제나라의 학자였던 장영서(臧榮緖, 415년~488년)의 저서인《진서》를 저본으로 하고, 다른 역사서를 참고로 하여 편찬을 실행했으며, 2년 후인 648년에 완성했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1] 3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130권이다. 〈서례(敍例; 서문)〉, 〈목록〉이 1권씩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고조선제기(高祖宣帝紀)〉, 〈세조무제기(世祖武帝紀)〉, 〈육기육운전(陸機陸雲傳)〉, 〈왕희지전(王羲之傳)〉은 당태종이 직접 편찬에 관여했기에 '어찬'(御撰)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진나라에 대한 기록은 동진~남북조시대를 걸쳐서 여러 사람이 각각 저술한 18 가지의 《진서》및 《진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라졌고, 《태평어람》, 《세설신어》, 《삼국지》 주석에, 다른 진나라에 대한 기록 몇몇만이 인용되어 남아있다. 이로서 《진서》는 유일하게 온전히 현존하는 진나라의 기록에 대한 역사서다.
당나라의 제2대 황제였던 태종 이세민은 이전 시대 사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사서들을 모아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에 대한 정사를 새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따라서 646년 윤 3월 조서를 내려서 조정 신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진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작업은 당시 명재상인 방현령 등 3명이 감수하고 그 아래에 18명의 사관을 두어 분담해서 실행되었다. 방현령 등은 육조시대 제나라의 학자였던 장영서(臧榮緖, 415년~488년)의 저서인《진서》를 저본으로 하고, 다른 역사서를 참고로 하여 편찬을 실행했으며, 2년 후인 648년에 완성했다.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1] 3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130권이다. 〈서례(敍例; 서문)〉, 〈목록〉이 1권씩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고조선제기(高祖宣帝紀)〉, 〈세조무제기(世祖武帝紀)〉, 〈육기육운전(陸機陸雲傳)〉, 〈왕희지전(王羲之傳)〉은 당태종이 직접 편찬에 관여했기에 '어찬'(御撰)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진나라에 대한 기록은 동진~남북조시대를 걸쳐서 여러 사람이 각각 저술한 18 가지의 《진서》및 《진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라졌고, 《태평어람》, 《세설신어》, 《삼국지》 주석에, 다른 진나라에 대한 기록 몇몇만이 인용되어 남아있다. 이로서 《진서》는 유일하게 온전히 현존하는 진나라의 기록에 대한 역사서다.
2. 편찬자[편집]
「正史類」稱:「《晉書》一百三十卷,房玄齡、褚遂良、許敬宗、來濟、陸元仕、劉子翼、令狐德棻、李義府、薛元超、上官儀、崔行功、李淳風、辛丘馭、劉引之、陽仁卿、李延壽、張文恭、敬播、李安期、李懷儼、趙弘智等修,而名為御撰。」《신당서》 〈예문지〉
3. 구성[편집]
3.1. 〈제기〉(紀)[편집]
3.2. 〈지〉(志)[편집]
진서(晉書) 지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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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열전〉(列傳)[편집]
진서(晉書) 열전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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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재기〉(戴記)[편집]
진서(晉書) 재기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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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진서》(晋書)의 구성과 특징. 당대(唐代) 방현령(房玄齡) 등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서진(西晋) 4세(265~316) 52년간, 동진(東晋)의 11세(317~418) 102년간 두 왕조와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역사를 편찬, 정관(貞觀) 22년(646)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진(晋)나라의 기록은 이른바 18가 《진서》(十八家晋書)를 필두로 20여 종(二十餘種)이 있으나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당시 저명한 문인들이 분할 집필(分擔執筆)하고 장영서(臧英緖)의 《晋書》110권을 중심으로 여러 책들을 참조하여 만든 관찬서이다. 이 책은 종종 《태종어찬》(太宗御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선제(宣帝)·무제(武帝) 두 본기(本紀)와 육기(陸機)·왕희지(王羲之) 두 전(傳)의 논(論)을 태종(太宗)이 직접 썼기 때문이다. 집필자는 18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분담 집필은 이제까지의 개인이 편찬한 정사와 달라 이후 분업적 정사(正史) 편찬 방식의 선례가 되었다. 구성은 〈본기〉(本紀) 10권[8],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재기〉(載記) 30권의 총 130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5호16국(五胡十六國)의 기록인 〈재기〉(載記)는 산일된 최홍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저본으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 다른 정사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어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이후 제가(諸家)의 《진서》(晋書)는 점차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진사(晋史)에 관해서는 이 책이 가장 완비된 기록이다. 그 내용이 분담 집필 때문에 통일되지 않거나 모순되기도 하지만 기존의 여러 사서를 특정의 사관에 구애받지 않고, 총망라하여 이용한 것을 볼 때 진(晋)나라의 멸망 이후 200년 이상 지난 뒤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상세하다. 다만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집필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보다 전기(傳奇), 소설류(小說類)에서 소재를 찾은 기사가 적지 않았음이 지적된다.
4.1. 호평[편집]
《진서》가 수찬(修撰)되었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다. 《진서》의 편찬자들은 대부분 남제의 학자였던 장영서(臧榮緖, 415년~488년)의 사찬인《진서》(晉書)[9]를 바탕으로 하고,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세간의 악평과 달리 현존하는 《진서》는 후대의 남북조 관련 사서들과 다르게 주요 내용이 산일된 적도 없으며, 사마진의 역사 전체에 대한 기재가 완비되어 있다. 《구당서》의 〈방현령전〉에는 "《진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주로 삼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져 있으나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속이거나 틀리거나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곳곳에서 평론하며 화려함을 다투었으나, 사실을 살피는 것을 구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몹시 비웃음을 받았다."라고 서술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악평에서도 인정했듯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진 사서"인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전대의 기록을 다룬 정사인 《삼국지》가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해 유송때의 배송지가 주석으로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했을때 여기저기서 1차 사료를 많이 보존한 《진서》의 서술 태도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많은 도움이 된다.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는, 서진의 역사만 기록하거나, 양진의 역사를 병기했지만, 오호십육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모두 완벽하지 않은 진사였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서》가 수찬(修撰)되었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는데 현존하고 있는 《진서》는 이것에 대한 종합본이다. 때문에 청나라때의 역사학자였던 조익은 "당나라 초에 《진서》를 편찬했는데, 장영서본(臧榮緖本)을 위주로 했고, 여러 학자들이 아울러서 조사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현재 《진서》, 《송서》 등 책의 〈열전〉은 여러 학자들이 기재한 것이며, 《진서》는 대략 수십가지 자료를 가지고 저술되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진서》는 옛 사서의 부족분을 보충했다. 《진서》는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에 비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광범위하며, 기전에 수록된 대량의 조령(詔令), 주소(奏疏, 상소), 서찰 및 문장이 장황하지만 다방면의 역사를 담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예컨데 《진서》 이전의 시기를 서술한 《삼국지》는 분명 명저였지만 〈본기〉와 〈열전〉만 있었고, 〈지〉(志)가 없었다.
반면에《진서》의 〈지〉는 삼국시대부터 묘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조위가 일으킨 둔전제와 관련하여 수리를 건설해 농업을 발전시키고, 북서쪽을 경영하는 모습 및 진나라가 일으킨 점전제에 대한 많은 서술이 있다. 《진서》의 〈식화지〉는 후한 및 삼국시대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고 있으며, 〈여복지〉(輿服志)와 〈예지〉(禮志) 및 〈악지〉(樂志)는 위진남북조시대 지배계급이 의례의 복식을 숭상하는 풍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이로써 《후한서》와 《삼국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진서》 〈지리지〉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허나 《진서》 〈지리지〉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용 자체가 다 오류가 있다는 건 아니다. 중화서국 표점본 《진서》를 교감한 학자들이 쓴 출판 설명에 의하면 《진서》의 〈지리지〉가 가진 문제는 서진의 정황만 자세하고, 영가의 난 이후 동진시대의 지명(地名), 관명(官名), 관직(官職), 시기(時期), 지점(地點)의 착오와 불일치가 많은 것이라고 했다.[10] 때문에 청나라의 제6대 황제인 고종 건륭제의 치세때 《동진강역지》(東晉疆域志)라는 책을 쓴 홍량길(洪亮吉)이 서문에서 말하기를, "역대 정사의 《지리지》에는 각자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착오가 많기로는 오직 《진서》 〈지리지〉 뿐이다. 이 책은 태시(泰始) 및 태강(太康)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에는 몇 마디 말을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진(西晉)의 〈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진(東晉)의 강역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동진의 〈지리지〉를 따로 편찬하는 이유를 들었다.[11] 즉 《진서》 〈지리지〉의 문제는 〈지리지〉 전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성격 자체가 '삼국통일 이후 통일제국 서진의 〈지리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지〉가 아예 없는 전대의 사서인 《삼국지》 자체의 보완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동진 시기는 이후 다른 학자들이 편수한 동진의 〈지리지〉나 《송서》의 〈지리지〉를 살펴볼 필요성은 있다.[12]
당대의 1차 사료를 망라한 풍부한 기록을 자랑하는 만큼 《진서》는 〈재기〉(載記) 30권에서 서진 붕괴 이후 화북에서 난립하던 5호 16국의 역사도 정리하여 후대의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5호 16국의 역사서로는 《십육국춘추》가 있었지만 《진서》와 《십육국춘추》가 다루는 시기가 거의 겹치는 만큼,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면서 《진서》의 〈재기〉 역시 신뢰도를 가지며 인용하고 있다. 《진서》에는 〈재기〉 이외에도 〈열전〉 부분에 16국 인물들에 관련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진서》는 동시기 화북에 존재한 이민족 정권의 역사도 기록함으로서 혼란한 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종합하자면 《진서》는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동안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보존한 사서로써 위진남북조시대 전기(前期)에 대한 상세한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진서》에 대해 "당대를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료와 잔존하는 기록을 망라하여 고증해 모았다"라며 《진서》의 풍부한 사료 채집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세간의 악평과 달리 현존하는 《진서》는 후대의 남북조 관련 사서들과 다르게 주요 내용이 산일된 적도 없으며, 사마진의 역사 전체에 대한 기재가 완비되어 있다. 《구당서》의 〈방현령전〉에는 "《진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주로 삼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져 있으나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속이거나 틀리거나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곳곳에서 평론하며 화려함을 다투었으나, 사실을 살피는 것을 구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몹시 비웃음을 받았다."라고 서술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악평에서도 인정했듯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진 사서"인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전대의 기록을 다룬 정사인 《삼국지》가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해 유송때의 배송지가 주석으로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했을때 여기저기서 1차 사료를 많이 보존한 《진서》의 서술 태도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많은 도움이 된다.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는, 서진의 역사만 기록하거나, 양진의 역사를 병기했지만, 오호십육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모두 완벽하지 않은 진사였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서》가 수찬(修撰)되었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는데 현존하고 있는 《진서》는 이것에 대한 종합본이다. 때문에 청나라때의 역사학자였던 조익은 "당나라 초에 《진서》를 편찬했는데, 장영서본(臧榮緖本)을 위주로 했고, 여러 학자들이 아울러서 조사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현재 《진서》, 《송서》 등 책의 〈열전〉은 여러 학자들이 기재한 것이며, 《진서》는 대략 수십가지 자료를 가지고 저술되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진서》는 옛 사서의 부족분을 보충했다. 《진서》는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에 비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광범위하며, 기전에 수록된 대량의 조령(詔令), 주소(奏疏, 상소), 서찰 및 문장이 장황하지만 다방면의 역사를 담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예컨데 《진서》 이전의 시기를 서술한 《삼국지》는 분명 명저였지만 〈본기〉와 〈열전〉만 있었고, 〈지〉(志)가 없었다.
반면에《진서》의 〈지〉는 삼국시대부터 묘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조위가 일으킨 둔전제와 관련하여 수리를 건설해 농업을 발전시키고, 북서쪽을 경영하는 모습 및 진나라가 일으킨 점전제에 대한 많은 서술이 있다. 《진서》의 〈식화지〉는 후한 및 삼국시대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고 있으며, 〈여복지〉(輿服志)와 〈예지〉(禮志) 및 〈악지〉(樂志)는 위진남북조시대 지배계급이 의례의 복식을 숭상하는 풍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이로써 《후한서》와 《삼국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진서》 〈지리지〉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허나 《진서》 〈지리지〉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용 자체가 다 오류가 있다는 건 아니다. 중화서국 표점본 《진서》를 교감한 학자들이 쓴 출판 설명에 의하면 《진서》의 〈지리지〉가 가진 문제는 서진의 정황만 자세하고, 영가의 난 이후 동진시대의 지명(地名), 관명(官名), 관직(官職), 시기(時期), 지점(地點)의 착오와 불일치가 많은 것이라고 했다.[10] 때문에 청나라의 제6대 황제인 고종 건륭제의 치세때 《동진강역지》(東晉疆域志)라는 책을 쓴 홍량길(洪亮吉)이 서문에서 말하기를, "역대 정사의 《지리지》에는 각자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착오가 많기로는 오직 《진서》 〈지리지〉 뿐이다. 이 책은 태시(泰始) 및 태강(太康)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에는 몇 마디 말을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진(西晉)의 〈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진(東晉)의 강역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동진의 〈지리지〉를 따로 편찬하는 이유를 들었다.[11] 즉 《진서》 〈지리지〉의 문제는 〈지리지〉 전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성격 자체가 '삼국통일 이후 통일제국 서진의 〈지리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지〉가 아예 없는 전대의 사서인 《삼국지》 자체의 보완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동진 시기는 이후 다른 학자들이 편수한 동진의 〈지리지〉나 《송서》의 〈지리지〉를 살펴볼 필요성은 있다.[12]
당대의 1차 사료를 망라한 풍부한 기록을 자랑하는 만큼 《진서》는 〈재기〉(載記) 30권에서 서진 붕괴 이후 화북에서 난립하던 5호 16국의 역사도 정리하여 후대의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5호 16국의 역사서로는 《십육국춘추》가 있었지만 《진서》와 《십육국춘추》가 다루는 시기가 거의 겹치는 만큼,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면서 《진서》의 〈재기〉 역시 신뢰도를 가지며 인용하고 있다. 《진서》에는 〈재기〉 이외에도 〈열전〉 부분에 16국 인물들에 관련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진서》는 동시기 화북에 존재한 이민족 정권의 역사도 기록함으로서 혼란한 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종합하자면 《진서》는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동안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보존한 사서로써 위진남북조시대 전기(前期)에 대한 상세한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진서》에 대해 "당대를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료와 잔존하는 기록을 망라하여 고증해 모았다"라며 《진서》의 풍부한 사료 채집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4.2. 혹평[편집]
21명이나 되는 학자들이 총괄자 없이 제각각 집필한 탓인지 엄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아 전후 기록이나 전기간 기록들 사이에 모순된 서술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 청나라때의 역사학자였던 장증은 저서인 《독사거정》(讀史擧正)에서 《진서》의 오류와 틀린 것 450여 부분을 찾아냈고, 청대에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攷異)를 지은 전대흔은 "《진서》는 집필하고 편집한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을 보완한 것으로 《진서음의》(晉書音義)(3권), 중화민국 시대인 1928년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이 각종 자료를 주석으로 추가해 지은 《진서각주》(晉書斠注)(130권) 등이 있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서》가 《어림》(語林),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명록》(幽明錄), 《수신기》(搜神記)와 같은 책에 기록된 괴이한 내용까지 수록한 것을 지적하고, "분량만 많으면 무조건 좋은 자료이며, 수집이 넓고 좋다고 하는 태도다. (이런 건) 소인은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군자가 비웃고 있다.", "사료의 선별 취득을 중시하지 않고, 문자의 화려함만 추구한다."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다만 유지기의 이러한 혹평은 유지기 본인이 사찬 사서의 예찬론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진서》가 각종 당대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한 면은 분명히 칭찬받을만 하나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진서》는 당 태종의 명령으로 인해 뛰어난 사관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씨의 진나라를 폄하할 목적으로 지나치게 《세설신어》류의 세어 소설을 많이 인용했는데, 좀 과장해서 말해, 이것은 오늘날로 보면 타블로이드지의 기사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역사서에 집어넣는 격과 같다. 때문에 《진서》에서 지나치게 폄하하는 일화가 적혀 있는데도 실제 평가는 높았던 인물들의 경우엔 평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대 평가의 허상 외에도 《진서》의 저자들이 진나라 시대 인물들을 폄훼하거나 할 목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화를 집어넣어 당대 평가와 일화를 유리시킨 경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진서》를 비판하는 인물들이 언급했듯이 진나라의 검증된 기록인 기거주나 공문서들도 《진서》 편찬 당시엔 충분히 많았는데 이런 기록을 사료의 풍부함을 이유로 축약할 이유는 사실 없는 것이고, 풍부한 채록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런 기록들은《진서》의 내용을 불리는 한이 있어도 더 넣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왕 다양한 사료를 넣으려고 했다면 기거주 등 검증된 사료를 우선했어야 했다'는 유지기의 비판 자체는 딱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이 때문에 《진서》는 편찬자들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사료 비판이 이루어지지는 못한 편이라 사마씨 집권 당시의 프로파간다와 사마진 멸망 이후 사마씨를 깎아내리는 프로파간다가 섞인 괴이한 사서가 되어버려, 24사 중에서도 유독 《송사》와 함께 비판이 많은 편에 속하는 정사이다.
또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면, 고구려가 존속하던 시기를 다룬 정사가 외국전을 쓸 때 고구려를 '〈고구려전〉'이든 고구려 후기의 이름인 '〈고려전〉'이든 주요 외국전으로 집어넣은 반면에 《진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가 있었던 시기 외국전이 있는 정사 중에선 〈고구려전〉, 〈고려전〉이 없다는 것이다.[13] 통틀어 〈동이열전〉으로 넣어도 고구려 관련 내용은 보통 넣는 법인데 《진서》에는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다. 뭐 굳이 사서를 만들 때 외국전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태종 이세민이 정권 초기에 만들었던 사서들, 특히《수서》[14]에는 '〈고려전〉'을 넣고 수양제의 패배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면서, 본인이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생애 마지막에 편찬한 사서인 《진서》에 '〈고구려전〉' 단독 입전이나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15] 고구려에서 퇴각한 태종 본인의 사감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16] 태종 자신이 집권 당시에 만들어진 사서의 내용에 많이 개입하곤 했었던 군주란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사실 모순된 기록에 대한 비판을 《진서》만이 오로지 받는 것은 억울한 점이, 사찬 정사인 《사기》나《삼국지》 에서도 기(紀)•전(傳) 간에 서로 모순된 기록들이 나타나므로《진서》 만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고대 기록이 다들 그렇듯이 《진서》 역시 여러 사람이 쓴 수많은 진나라 사료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었기 때문에 원본인 1차 사료를 작성한 사람에 따라 모순된 기록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 이런 오류 교감은 비단 《진서》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진서》 말고도 24사 전체에 대한 다양한 보충 주석들과 오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서》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진서》자체만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이전의 기록들은 개인이 작성한 사찬 사서이며,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문학적인 윤색이 더해진 《사기》 같은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문학과 역사서의 차이가 부정확한 시기에 작성된 사서도 있다.[17] 반면 그로부터 수백년 뒤에 작성된 《진서》는 최초의 관찬 사서로서 그나마 체계적인 사서 편찬구조를 처음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무조건 이전의 사찬 사서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서》가 《어림》(語林), 《세설신어》(世說新語), 《유명록》(幽明錄), 《수신기》(搜神記)와 같은 책에 기록된 괴이한 내용까지 수록한 것을 지적하고, "분량만 많으면 무조건 좋은 자료이며, 수집이 넓고 좋다고 하는 태도다. (이런 건) 소인은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군자가 비웃고 있다.", "사료의 선별 취득을 중시하지 않고, 문자의 화려함만 추구한다."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다만 유지기의 이러한 혹평은 유지기 본인이 사찬 사서의 예찬론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진서》가 각종 당대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한 면은 분명히 칭찬받을만 하나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진서》는 당 태종의 명령으로 인해 뛰어난 사관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씨의 진나라를 폄하할 목적으로 지나치게 《세설신어》류의 세어 소설을 많이 인용했는데, 좀 과장해서 말해, 이것은 오늘날로 보면 타블로이드지의 기사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역사서에 집어넣는 격과 같다. 때문에 《진서》에서 지나치게 폄하하는 일화가 적혀 있는데도 실제 평가는 높았던 인물들의 경우엔 평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대 평가의 허상 외에도 《진서》의 저자들이 진나라 시대 인물들을 폄훼하거나 할 목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화를 집어넣어 당대 평가와 일화를 유리시킨 경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진서》를 비판하는 인물들이 언급했듯이 진나라의 검증된 기록인 기거주나 공문서들도 《진서》 편찬 당시엔 충분히 많았는데 이런 기록을 사료의 풍부함을 이유로 축약할 이유는 사실 없는 것이고, 풍부한 채록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런 기록들은《진서》의 내용을 불리는 한이 있어도 더 넣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왕 다양한 사료를 넣으려고 했다면 기거주 등 검증된 사료를 우선했어야 했다'는 유지기의 비판 자체는 딱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다. 이 때문에 《진서》는 편찬자들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사료 비판이 이루어지지는 못한 편이라 사마씨 집권 당시의 프로파간다와 사마진 멸망 이후 사마씨를 깎아내리는 프로파간다가 섞인 괴이한 사서가 되어버려, 24사 중에서도 유독 《송사》와 함께 비판이 많은 편에 속하는 정사이다.
또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문제가 있다면, 고구려가 존속하던 시기를 다룬 정사가 외국전을 쓸 때 고구려를 '〈고구려전〉'이든 고구려 후기의 이름인 '〈고려전〉'이든 주요 외국전으로 집어넣은 반면에 《진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가 있었던 시기 외국전이 있는 정사 중에선 〈고구려전〉, 〈고려전〉이 없다는 것이다.[13] 통틀어 〈동이열전〉으로 넣어도 고구려 관련 내용은 보통 넣는 법인데 《진서》에는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다. 뭐 굳이 사서를 만들 때 외국전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태종 이세민이 정권 초기에 만들었던 사서들, 특히《수서》[14]에는 '〈고려전〉'을 넣고 수양제의 패배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면서, 본인이 고구려에게 패배하고 생애 마지막에 편찬한 사서인 《진서》에 '〈고구려전〉' 단독 입전이나 〈동이열전〉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15] 고구려에서 퇴각한 태종 본인의 사감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16] 태종 자신이 집권 당시에 만들어진 사서의 내용에 많이 개입하곤 했었던 군주란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사실 모순된 기록에 대한 비판을 《진서》만이 오로지 받는 것은 억울한 점이, 사찬 정사인 《사기》나《삼국지》 에서도 기(紀)•전(傳) 간에 서로 모순된 기록들이 나타나므로《진서》 만의 잘못은 아니다. 원래 고대 기록이 다들 그렇듯이 《진서》 역시 여러 사람이 쓴 수많은 진나라 사료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었기 때문에 원본인 1차 사료를 작성한 사람에 따라 모순된 기록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 이런 오류 교감은 비단 《진서》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진서》 말고도 24사 전체에 대한 다양한 보충 주석들과 오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서》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진서》자체만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이전의 기록들은 개인이 작성한 사찬 사서이며,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문학적인 윤색이 더해진 《사기》 같은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문학과 역사서의 차이가 부정확한 시기에 작성된 사서도 있다.[17] 반면 그로부터 수백년 뒤에 작성된 《진서》는 최초의 관찬 사서로서 그나마 체계적인 사서 편찬구조를 처음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무조건 이전의 사찬 사서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5. 여담[편집]
- 육조시대를 다루는 《송서》, 《남제서》, 《양서》, 《진서》, 《남사》는 유독 중국의 여느 정사에 비해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정사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비슷한 시대를 다룬 다른 기록 같으면 성씨와 아버지가 누군지만 기록에 남았을 황후들의 이름이 《진서》에서는 본명으로 많이 남기도 했다. 당나라 시기에 쓰여진 《진서》도 이런 전례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지》 관련 컨텐츠에 종종 나오는 장춘화, 왕원희, 양휘유, 양염 등이다. 흔히 창작물에서 위•촉•오 여인들의 이름으로 쓰이는 장성채, 견희 등은 실제로는 성씨만 기록에 남아 있고, 이름은 후대에 임의로 붙인 것인 반면, 위와 같이 《진서》에 실린 여인들은 전원 본명이 맞다. 당장 나무위키 문서들만 봐도 삼국시대 황제들의 황후들은 성씨만 남아있는 것이 많은 반면, 남조시대 황제들의 문서들을 찾아보면 황후들의 휘가 기록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관련 고사성어[편집]
[1] 여러 나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 《진서》에서는 5호 16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2] 서진의 태상 정무의 처.[3] 서진 시기 정씨 가문의 정휴(鄭休)의 처[4] 동진의 태위 도간의 모친[5] 서진의 산기상시 양위(梁緯)의 처[6] 서진의 익주별가 허연(許延)의 처[7] 전량의 군주 장천석의 첩.[8] 서진(西晋) 5권, 동진(東晋) 5권[9]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진서》 110권이 있는데 남제(齊)의 서주 주부(徐州 主薄) 장영서가 사찬했다'고 했다.[10] 방현령 등찬, 《진서》(晉書), 중화서국 , 출판 설명, 1~5[11] 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354쪽 참조[12]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지〉나 〈표〉가 없었던 《삼국지》가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삼국지》의 본전이 예로부터 단점으로 지적받은 것이 기록이 너무 간소해서 빠뜨린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13] 《한서》에도 고구려 관련 내용이 없기는 하지만, 중국 왕조들이 고구려와 접촉하기 시작한 때가 왕망의 신나라 때라서 관련 내용도 《후한서》부터 정리한다.[14] 《수서》 〈양제본기〉와 〈고려전〉, 고구려에 패배한 장수들의 주요 열전은 태종 이세민의 집권 중반인 636년에 만들어졌다.[15] 사마진이 고구려와 접촉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나라의 고토인 한사군을 최종적으로 상실한 때가 서진 멸망 당시 고구려의 미천왕이 행한 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중국 입장에서도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16] 이와는 별개로 어쨌든 사마진에 대한 당대 기록의 총합이었므로 《진서》 내에 고구려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사마진 당시의 고구려가 어땠는지 설명하는 파트가 없어서 문제일 뿐이다.[17] 특히 《사기》의 경우엔 전국시대 관련 기록이 후대의 1차 사료 발굴로 인해 오류가 매우 많은 것이 증명되었다.[18]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승하한 654년에 왕으로 추대되며, 648년 당시는 신라 국왕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