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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 | 中宗
출생
1488년 4월 25일[1]
(음력 성종 19년 3월 5일)
즉위
1506년 9월 28일[A] (18세)
(음력 연산군 12년/중종 1년 9월 2일)
사망
1544년 12월 9일[B] (향년 56세)
(음력 중종 39년 11월 15일)
능묘
희릉(禧陵) → 정릉(靖陵)
재위기간
조선 제11대 국왕
1506년 9월 28일[A] ~ 1544년 12월 9일[B]
(음력 중종 1년 9월 2일 ~ 중종 39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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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역(懌)
부모
부왕 성종
모후 정현왕후
형제자매
16남 10녀 중 8남
배우자
단경왕후 (1499년 혼인 / 1506년 이혼)
장경왕후 (1507년 왕비 책봉 / 1515년 사망)
문정왕후 (1517년 혼인)
후궁
자녀
9남 11녀 (14남 12녀)
종교
낙천(樂天)
봉호
진성대군(晉城大君) 혹은 진산대군(晉山大君)[7]
전호
경사전(景思殿)
묘호
중종(中宗)
시호
조선: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 공희(恭僖)
1. 개요2. 평가3. 기타4. 가계
4.1. 친가(전주 이씨)4.2. 조상4.3. 배우자/자녀
5. 중종이 등장한 대중매체
5.1. 드라마5.2. 영화5.3.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의 제11대 국왕.

묘호중종(中宗),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는 역(懌), 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적차자로 1506년 선왕 연산군폐위되고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2. 평가[편집]

임금(上)이 선(善)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곧은 말에 대해서 황효헌(黃孝獻)[8]이 홍문관 박사로 있을 때에 유독 말하기를 ‘임금이 선(善)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곧은 말에 대해서 반드시 자세를 고치고 용색(容色)을 바꾸시니 나는 매우 의심스럽게 여긴다.' 하였는데, 이제 그 말이 과연 옳았다.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위에서 볼수있듯이 중종은 왕권강화에 많이 신경을 쓴 왕이었고 오랜기간동안 집권한만큼 왕권 안정에 성공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 신하들에게 휘둘리고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하지못하는 왕은 냉정히 얘기해 있으나 마나였고, 결국 조선의 쇠퇴가 시작되는 가장 큰 원인인 정치 세력 분열에 큰 영향을 주었고 왕으로서는 절대로 하면 안되는짓인 판단 미스와 이랬다 저랬다를 재위 기간 대부분동안 보여준, 엄연한 암군이라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다.

조광조 사례에서도 볼수있다시피 본인이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줘서 조광조가 지멋대로 정책을 펴도록 만들어놓고 그걸 막지도 못했으며, 본인이 직접 조광조를 죽이는 말도 안되는일이 벌어졌다. 이것만 봐도 중종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줏대없는 왕인지 만천하에 보라고 알려버린꼴인데 당연히 훈구와 사림등 신하들이 중종의 명을 따르겠는가?

반정으로 추대된만큼 왕권강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지 대인배소인배의 모습을 모두 보여줘 38년간의 긴 재위기 동안 조선은 제법 반등하나 싶다가도 다시 떨어지는 등 나름의 혼란기를 겪게 된다. 물론 폭군인 이복형 연산군 보단 상대적으로 낫긴 했다.

본인이 밀어준 조광조만 해도 한동안은 그토록 총애하다 기묘사화로 제거할 때가 되자, 조광조의 정적이었던 남곤마저 용서해달라고 하다가[10] 중종이 계속 죽여야 한다고 강조하니 그럼 조광조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주장했지만[11], 중종은 홀로 조광조를 사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피력하여 결국 이뤄내고 만다. 반대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남곤[12], 심정, 홍경주 등이 사사의 주청을 아뢰는데 중종이 고민 끝에 사사를 명하는 걸로 나온다. 실제 염증을 떠나서, 숙청 직전의 조광조는 이미 중종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의 견제로 훈구가 무너져 가고, 필연적으로 사림은 성장하는데 그 수장의 역할이 조광조였다. 게다가 조광조는 훈구에 대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대했으며,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성종이 대성군이라도 그것만은 실책이라고 비난하며 역적 취급 받을 수 있는 왕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위험하고 무례한 발언을 하며 이는 중종에게 위기 의식을 가져다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종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옹립된 왕이다. 심지어 대신들까지도 조광조에게 반대하더라도, "철이 없어서 마구 날뛰기는 해도 의지는 순수한 후배"라고 보는 듯 내심 좋게 보던 것으로 보이며, 이게 중종에게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대신들까지 조광조의 위훈 삭제에 처음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 중종에게 위협적이었는지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후 중종은 위훈 삭제는 계속 진행하려던 대신들을 대놓고 압박해서 강제로 위훈 삭제를 취소하게 시킨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발탁해 팍팍 밀어주며 개혁을 이뤄보고자 했던 중종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저렇게 돌변하여 그를 죽여버린 것을 보고, 사관들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씁쓸한 논평을 적어놨다. 또한 남곤이 배후로 억울하게 몰렸을 때, 조광조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관이 중종의 심기를 거스른 조광조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왜 한 편이던 남곤을 적으로 돌려서..."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중종은 자신의 왕권의 위협되는 인물들을 쳐내고 치세가 길어지면서 왕권도 점차 안정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정치방식은 초반에는 권력을 몰아준 뒤 견제해야되거나 위협이 될 상황이 오면 제거하는 정치방식인데 이러한 정치방식은 사실 종종 뿐만 아니라 선조 부터해서 후대의 임금들까지 이용하였다. 우선 아들인 명종은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이량을 등용했다가 심의겸과 기대항을 통해서 내치고 또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윤원형을 내친 과정도 중종과 비슷한 정치 방식이었고 그 이후에도 손자인 선조도 정언신, 정철, 유성룡, 윤두수, 이산해, 이순신 등을 등용했다가 토사구팽하거나 투옥시키는 과정과 증손자인 광해군의 경우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 황신, 이호민, 기자헌, 정창연 등을 높이 썼다가 옥사를 일으켜서 내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으며 인조도 심기원, 임경업을 처형하거나 며느리인 민회빈 강씨를 처형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정치 방식을 보여주었다. 성격이 온화했던 효종도 김자점을 처형할 때와 김홍욱을 때려죽일 때 이러한 정치방식을 이용하였고 지나친 숙청을 자제했던 현종도 예송논쟁 때 서인 관료들을 일부 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숙종은 환국정치로 업그레이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경종 또한 신임사화 전까지는 노론 대신들의 편을 들어주다가 신임사화를 일으켜서 노론을 숙청시킬 때 이러한 정치 방식을 이용하였으며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하는 과정이나 조정 대신들을 등용했다가 내쳤다가 복귀시켰다가 하는 과정이나 외척 중용 과정이나 사도세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이용하였고, 정조 역시 영조를 본받아 홍인한, 정후겸 등의 척신들을 퇴출시키는 과정이나 탕평책 시행 과정이나 홍국영을 등용했다가 내치는 과정 등에서 이러한 정치방식을 이용하였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역시 외척들을 중용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정치 방식을 이용하였고 헌종도 측근들을 양성하고 척신 정치를 척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치방식을 이용했으며 왕권이 가장 약했던 철종조차도 이러한 정치방식으로 왕권강화를 시도한 바 있고 고종도 자기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을 퇴출하는 과정이나 외척 중용 과정이나 개화파 인사 중용 과정이나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쓰였다.
  • 선조 왕들 같은 경우 세조는 일단 사육신들을 처형할 때 그 정치방식을 써 본 적이 있으며 공신들을 과하게 우대하다가 자신의 공신들이었던 정인지, 정창손 등에게 잠깐씩 벌을 내리기도 했으며 나중에 일단은 집현전계 인사들이나 기존 관료들을 통해서 정난계 인사들을 조금씩 견제해 보려고 했고 이시애의 난 때 한명회, 신숙주를 잠시 투옥시키고 이시애의 난 이후에는 신공신들을 등용해서 구공신들을 본격적으로 억제해 보려고 했다. 예종 또한 나름대로 구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했고 신공신들도 동시에 견제해 보려고 했으며 성종 또한 훈구파를 견제해보려고 사림파를 등용하고 친위세력을 등용했으며 그 외에도 무관, 역관, 의관까지 등용했으며 폐비 윤씨 폐출 및 사사 때도 그 정치방식을 써먹어 봤었다. 또한 연산군도 무오사화나 갑자사화에서 그 정치방식을 이용하여 이후 강력한 왕권을 얻게되었지만 나랏일은 내팽개치고 얻은 왕권을 자신의 향락적인 생활에 쓰이고 폭정을 부리게 되며 결국 폭군으로 몰락의 길을 자초하여 폐위되는 엔딩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 방식이 중간에 흐뜨러지지 않고 제대로 쓰여진건 중종 이후부터이다. 한편 세조의 경우는 첫 번째 시도는 집현전계 인사들이나 기존 관료들이 정난계 인사들과 한 편이 되면서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시도 또한 신공신들이 서로 분열되다가 결국은 남이의 옥으로 인해서 실각하면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예종 또한 구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했지만 성공하는 듯 하다가 실패했다. 성종 때부터는 사림파들이 정치에 진출하고 친위세력 또한 높은 벼슬에 진출하면서 조금씩 이 정치방식이 성공하기 시작했지만 이 또한 친위세력의 분열 등으로 이상적인 형태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연산군 또한 갑자사화 이후 2년 동안 폭군 행보로만 일관하여 폐위되었다. 어찌보면 이러한 정치방식은 세조가 고안해 낸 정치방식이라 볼 수 있다.
  • 특히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가 저지른 을사사화나 정미사화, 이홍윤 옥사나 구수담 옥사도 이러한 정치방식을 알차게 이용하였다.
  • 놀랍게도 이러한 정치방식은 현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중에서도 쓰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이러한 정치방식을 꽤 본받아서 사용했던 적이 있다. 특히 이승만이 실세들을 통제한 것과 박정희가 2인자 박치기, 용인술 등을 통해서 실세들을 통제한 것 또한 자세히 보면 기존의 조선시대 왕들의 정치 방식을 변형해서 본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일부 본받아서 허화평과 허삼수를 토사구팽 했던 적이 있고 그 이후로도 중종의 정치방식을 써봤던 적이 있다. 물론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도 이러한 정치방식을 이전보다 낮춰서 조금씩은 썼던 적이 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보았으며, 결국 과감한 정책 추진을 못했다. 특히 중종은 이러한 정국 주도 능력을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임금의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에만 지나치게 몰두를 했다는 게 문제점이다.
  • 사실 중종 시기는 조선이 거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침체기로 접어들 때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조선에 있어서는 상당히 고비였는데 경우에 따라 조선이 다시 일어서면서 회복할 수도 있었고, 완전히 망가지는 길을 갈 수도 있었다. 중종 시기는 침체기로 접어드는 조선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중종은 자기 자리와 권력을 지키는 데만 몰두했고 결국 이로 인해서 조선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14][15]

조광조나 김안로 등 특정인물에게 지나치게 힘을 몰아주었다가 제거하기를 반복하면서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16] 또한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들,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는 결코 막지 못해서 이로 인한 폐단이 크게 발생했다.[17]
  • 이러한 정치방식을 어느 정도씩 본받은 후대의 임금들도 중종의 경우처럼 말년에는 특정인 또는 특정세력에 힘을 몰아주는 행보를 보인 임금들이 상당히 많은데 예를 들어서 선조, 광해군, 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철종, 고종 등도 극히 말년에는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각각 유영경, 이이첨, 임취정, 김자점,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홍인한과 정후겸, 외척세력,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외척, 여흥 민씨 외척이나 일부 고종의 측근들에 너무 많이 힘을 몰아줬다. 다만 비슷한 정치방식을 썼던 임금들 중 명종, 효종, 현종, 경종, 헌종 등은 말년에도 판단력이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았다.
  • 중종은 성격 또한 변덕이 심했고 사람들을 잘 못 믿거나 이용하고 버리는 성격이 있었는데 이러한 중종의 성격은 후대 임금들도 거의 그대로 물려받는다. 선조, 광해군, 인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거의 모든 왕들이 의심병 또는 편집증이 있거나 사람을 잘 못 믿거나 이용하고 버리는 성격이 있었는데 이는 중종의 성격을 어느 정도씩은 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성격이 온화한 효종조차도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화를 내기도 했으므로, 효종 또한 약간은 중종의 성격을 본받았다고 볼 수 있다.
  • 물론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도 숙청을 자행했던 적이 있었고, 세종 또한 숙청을 자행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방식은 고조부였던 세종이나 현조부였던 태종 때부터 방식이 이어져왔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은 숙청을 하면서도 직언을 하는 신하들의 의견은 다 받아줬고, 너무 지나치게 숙청을 하지는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위협이 되거나 견제해야할 상황이 보이면 즉각 숙청을 했고,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썼다. 세종은 부패한 신하들만 일부 숙청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으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썼다. 반면 중종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특정인에게 권력을 몰아줬다가 제거하는 식의 방식을 썼으며, 자신의 왕권과 안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했는데 태조, 태종, 세종과는 너무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이 후대의 수많은 조선왕들이 무수히 먹혀든 것도 어찌 보면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조선의 기반을 엄청나게 잘 닦아놨기 때문이기도 하다.
  • 조선 이전의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의 왕들이나 중국 역대 나라의 황제들 중에도 비슷한 정치방식을 쓴 경우가 있다.[18] 일본의 경우는 천황들은 비슷한 정치방식을 쓴 경우는 많지 않거나 극히 제한적으로 쓴 경우가 많지만 주로 쇼군들이 비슷한 정치방식을 쓴 경우가 있다.
  • 자신의 아들인 인종과 먼 후손인 순종은 이러한 정치방식을 쓴 사실이 없다. 우선 인종의 경우는 재위 기간이 7개월로 짧았던 것도 있지만 천성이 선했고 자신의 정적들이나 반대세력들에게 잘해줬던 것도 있다. 하지만 순종의 경우는 이러한 정치방식을 써보지조차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일제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이다.

중종 생전에도 평이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중종의 사망 후 사관의 평들이 매우 엇갈린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은 인자(仁慈)하고 현명(賢明)하여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혼암(昏暗)한 폐조(廢朝)의 시대를 당하여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하고 신하의 도리에 극진하였다. 폐주(廢主)의 난정(亂政)이 더욱 혹독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황천(皇天)의 돌보심으로 천명(天命)이 돌아오게 되었다. 신민의 추대를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중흥한 공적은 너무도 높아서 어떻게 이름지을 수 없다. 즉위한 당(唐)·우(虞)의 다스림에 간절하여 백성을 언제나 불쌍히 여겼고 간언(諫言)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었다. 재위 39년 동안에 치도(治道)를 이루기 위해 근심하고 괴로와한 것이 모두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현주(賢主)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인자하고 온화함은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하여 진퇴(進退)시키고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현·불초(賢不肖)가 뒤섞이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함으로써 권간(權奸)이 왕명을 도둑질하여 변고가 자주 일어났고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 삼한(三韓)의 신민이 끝내 다시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정성으로 만일 함께 일을 할 만한 신하를 얻어서 일을 맡기고 소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였다면 군신이 덕(德)을 함께 하고 시종 서로 신임하여 완성된 미덕(微德)을 이루었으리니, 그 치적이 융성함과 공업(恭業)의 성대함이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신(臣)은 상고하건대, 중종 대왕은 공검(恭儉) 인자(仁慈)하시어 재위 40년 동안에 안으로는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하며 즐기는 데 빠진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로 힘써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바라보고 태평을 기약했는데 신하의 보좌를 받을 즈음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처음에는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 조정이 조용하지 않고 붕당을 지어 서로 모함함으로써 드디어는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혀지고 말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광조(趙光祖) 등이 옛것을 사모한다는 이름만 있었고 옛것을 사모하는 실상은 없이 한갓 번잡하게 고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점차로 개선해 나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삼대(三代)의 정치가 진실로 이러한 것인가. 그후로는 비록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누가 혹 앞에서 진술하더라도 전후로 징계된 바 있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청납(聽納)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무리 슬기 있는 사람도 뒤끝을 잘 맺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을 추구해보면 모두가 기묘년 사람들이 단서를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仁厚)한 성덕(聖德)으로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상국을 정성으로 섬기고, 백성들의 질고(質苦)를 잘 알아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함에 힘입어 나라 안이 소생되고 원망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고 할 만하다.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이 때문인가 보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仁慈)하고 유순(兪順)한 면은 남음(濫音)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仁慈)하고 공검(恭儉)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19]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20]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유시에 상이 환경전 소침에서 훙하다(중종의 졸기)

중종의 됨됨이를 두고 미완의 현군, 중흥성군, 혼군, 비정한 임금 등 통일된 의견이 없이 참 다양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오직 임금이 겉으로는 인자했다는 것뿐으로,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21]

3. 기타[편집]

  • 6조 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다시 되돌린 왕이다. 조선은 정도전이 구상한 왕권과 신하의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만들고자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했으나, 무인정사로 왕좌를 찬탈한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고, 세종이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되돌렸으나, 계유정난으로 왕좌를 찬탈한 세조가 또 다시 6조 직계제를 시행한 후,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이어졌는데, 중종이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되돌렸고, 이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바뀔 때까지 왕권 지상주의의 6조 직계제가 부활하지 못하고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의정부서사제로 운영되었다.
  • 막내 딸 인순공주를 제외하고는 딸 11명의 이름이 전부 알려져있는데 조선 왕조에서 한 왕에게서 태어난 왕녀들의 이름 대부분이 알려진 경우는 중종이 유일하다. 적녀들은 옥()□으로 지었고 서녀들은 □환()으로 지었다.
  • 부인 4명[22]과 딸 3명[23]이 출산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아들 인종세조의 경우처럼 묘호를 조(祖)로 바꾸어 "중조(中祖)''로 격상시키도록 명했으나, 신하들이 송 고종이 중흥하였으나 송 휘종의 아들로서 바로 대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유로 고조가 아닌 고종으로 칭해진 역사가 있고[24] 세조는 형 문종의 왕위를 동생으로서 이어받은 경우이므로 성종의 왕위를 아들로서 이어받은 중종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반대했다. 이에 인종은 부왕이 성종의 아들이지만 사이에 폐주가 있으니 문종과 세조의 사이에 노산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반박했으나, 결국 중조로 격상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세조에게 직접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억울하게 폐위당하고 죽임까지 당한 단종과 폭군으로서 전횡을 휘두르다가 천벌을 받아 폐위당한 연산군을 동일시하기는 곤란하다는 인식이 신하들의 밑바탕에 어느 정도 깔려 있었기에 생긴 일이다.
  • 사관에게 비판당한 적이 있다. 당시 중종의 딸 효정옹주가 병으로 사망한 직후였는데, 중종은 부마조의정의 과거 일까지 꺼내며 욕을 했다.[25] 이에 대해 한 사관이 "조의정도 죄가 있기는 하지만 왕의 행동이 너무 과하고,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내용의 글이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2월 21일 경인 2번째기사에 적혀 있다.
  •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자식이자 자신의 조카에게도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하들이 훗날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폐세자 이고[26]를 비롯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라고 상소하자, 아이들이 아직 어린 데다가 조카들을 죽이는 행위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어떻게든 조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의견이 거세지자 결국 연산군 아들들의 사형을 허락하면서도 조카들의 장례만이라도 제대로 치러주라고까지 했다. 연산군의 장녀인 휘신공주가 '폐주의 딸'이라는 이유로 시댁에서 내쳐지자 조카를 가여워한 중종이 도움을 주어 휘신공주는 남편과 화해하고 재결합을 할 수 있었다. 중종은 휘신공주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다른 딸들도 나름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 설상가상으로 중종의 치세 때, 조선은 이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세종세조 때에 평정된 여진족들이 북방에서 다시 힘을 회복하여 조선의 북방을 괴롭혔고, 남방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잇달았는데, 왜구의 침략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삼포왜란이다. 비변사[27]가 생겨난 것도 이 때.
  • 1533년에 한성에서 6살의 노비 여아가 괴한에게 발목이 절단된 상태로 길거리에 방치된 용산 소아 발목 절단사건이 발생하자 대노하여 국문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는 역모 사건이 아니면 왕이 국문을 명령할 수는 있어도 주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종 이전에 연산군도 그렇고 훗날 봉산옥사와 계축옥사를 직접 주도한 광해군도 국문을 주도하였다. 중종은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이같은 어린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피해자를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이는 동상에 걸려서 발이 절단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절단된 부위가 칼처럼 정교한 물질에 베인 것이 명확해서 중종은 수사를 지속하라고 명하였다. 피해자는 범인을 알고 있었고 포도대장에게 진술하였지만 10세 이하의 증언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어서 결국 범인은 체벌받지 않았으며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되며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루었다.#
  • 모든 군, 공주, 옹주의 집이 궁궐에 비길 정도로 왕실의 사치가 오늘 같은 때가 없었다면서 실록에서 사관들이 비판할 만큼 동역하는 관원들이 사치를 숭상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면서 출궁한 자녀들의 집을 호화스럽게 꾸며 문제가 되었다.# 그 중 적장녀 효혜공주는 중종의 잠저 시절 본궁[28]을 하사받았고,# 적차녀 의혜공주의 집은 훗날 동생 명종이 감탄할 정도였다.
  • 세자궁에 불이 나서 세자가 타 죽을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세자빈이 세자에게 빨리 나가자고 청했으나 세자는 이 화재가 자신을 미워한 계모 문정왕후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살아나가도 어차피 문정왕후의 심기를 건드려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겨서 나가지 않고 세자빈과 함께 그대로 타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세자궁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중종이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달려가서 세자를 애타게 부르자 이를 듣고 마음을 바꾸어 세자궁을 탈출했다는 일화도 있다.[29]
  • 효정옹주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중종이 가장 신경쓰고 애착하였다고 한다. 효정옹주는 숙원 이씨 소생이었는데 조의정에게 시집가게 된다. 효정옹주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조의정은 효정옹주를 소박놓고 효정옹주가 궁에서 데려온 몸종 풍가이를 더 사랑해서 첩으로 삼는다. 부마는 첩을 들이지 못하는 법을 어긴 것으로 중종은 조의정을 꾸짖었으나 조의정이 태도를 고치지 않자 풍가이를 함흥으로 귀양보내려고 마음먹는다. 이 와중에 효정옹주는 중종에게 2번이나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데 중종은 효정옹주에게 "부녀로서 질투가 없다는 것은 진짜 정(情)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풍가이는 귀양을 갔으나 조의정이 왕명에 불복하면서 가지 않았으며 조의정이 풍가이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몸종을 대신 귀양보내고 풍가이는 빼돌려 자신의 고향에 숨겨두고는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난다. 이는 명백히 왕명을 어긴 것이나 효정옹주가 함구하였으므로 조의정의 목숨이 붙어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효정옹주는 출산한지 15일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조의정은 효정옹주가 난산한 이래 15일 동안이나 왕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사망 직전에서야 비로소 보고하였으며 중종이 효정옹주를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고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중종은 이에 빡쳐서 조의정과 풍가이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했으나 조의정은 부마를 지냈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형으로 끝날 수 있었다. 풍가이의 경우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귀양형[30]을 내렸다. '조의정이 효정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정처로 앉히려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분노는 대단했는데 중종은 풍가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나 풍가이가 과거 몸이 편찮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인 일로 동정심을 느낀 신하들이 목숨만은 살려주기 위해 간청했기에 감형된 것이었다. 그러나 풍가이는 직후 상궁 은대[31]에게 납치당한 뒤 10여 일 동안 갇히는데 풍가이가 죽지 않자 은대는 하인을 시켜 풍가이의 장 맞은 곳을 지속적으로 때리게 하였고 결국 후유증으로 20일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신하들은 은대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나[32] 중종은 은대의 벌을 미적지근하게 처리했고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 못해 은대를 유배보냈지만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방면된다.[33] 중종이 조의정의 목숨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당시에 이미 조의정과 효정옹주 사이에 낳은 5살 아들이 있었고[34] 조의정의 아버지인 조침은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 쫀쫀한 면도 있고 변덕이 심해서 자질구레한 일에도 참견이 심했다고 한다. 군 열병식을 할 때에도 병사들로 하여금 여기 모이라고 했다가 저기 모이라고 했다가 '아니, 아니 다시 저쪽에 서 봐라' 라면서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기도 했고, 오래 재위하면서 궁궐 행사나 의례 등의 규칙, 절차에 대해 도통하게 되면서 행사 접전 중에 조그마한 실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뭐가 틀렸다고 꼬치꼬치 따지며 아랫사람들을 마구 갈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사가 있으면 현장에서까지 가서 둘러보고 확인해가며 잔소리를 해대고 행차를 할 때면 내구마(왕이 타는 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쉴새 없이 바꿔 타곤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탄 말이 맘에 안들면 괜히 아랫사람들에게 괜히 잔소리를 해댔고 담당자를 처벌했을 정도.
  • 심각한 만성 치통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중종 14년(1519년) 음력 6월 16일 기사에는 중종의 잇병, 즉 치통에 관해서 처음 언급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치통은 중종의 재위 기간 39년 중 무려 25년 동안이나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중종이 죽기 4개월 전인 중종 39년(1544) 6월 29일자 중종실록 기사에서는 아픈 이가 빠지고 다른 이도 아프며 진물이 흐른다고 기록이 있는데 통증의 원인을 긁어내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상, 중종은 최소 25년을 끔찍한 고통을 계속해서 겪었을 것이다.[35][36]
  • 재위하는 도중 기형 동물이 많이 태어나기도 했다. 중종 5년, 경상도 김해에서 오른쪽 앞다리에 다리 하나 더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고 재위 10년째에는 한 달도 안되는 사이에 다리가 5개 달린 수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으며, 11년엔 전라도 해남에서 머리에 얼굴 2개가 붙어있는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평안도 상원군에서는 머리는 1개인데 다리는 8개, 콧구멍이 4개, 귀는 3개, 등뼈는 2개, 꼬리는 2개, 배꼽 아래로는 몸이 갈라져 꽁무니가 2개인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충청도 대흥현에서는 발이 6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난 바 있다. 재위 24년과 25년에도 기형 송아지가 출생했다고 한다. 또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괴이한 일도 수차례 일어났는데 대간들은 이러한 괴변의 원인이 중종이 부도덕해서 그렇다며 중종을 까내렸다.
  • 식중독 사태가 2차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중종 20년 세자가 수업을 마치고 나서 익위사[37]에 음식을 내렸는데, 이 음식 가운데 포육을 먹은 관원 조광원이 식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음식을 먹은 하인들 중에서도 같은 증상을 보고가 있었다. 사옹원 제조 윤희인은 독이 있는 포육이 아니라면 반드시 독충이 오줌을 싸서 그런 것이니 각 도에 포육을 만들 때 청결하자고 건의하며 대책을 보고하였다. 이에 중종은 식중독을 유발한 포육이 어디에서 진상된 것인지 확인하고 만약 남은 음식이 있다면 하인들에게 다시 시험해 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임상실험? 대상인 하인들은 다행히도 남은 음식을 먹어도 식중독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부승지 이환은 포육과 함께 닭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식중독에 걸렸다면서 닭이 지네를 먹으면 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이에 따라 지네를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자 사람들이 닭고기를 전부 토하면서 병이 나았다면서 이번 식중독의 원인이 포육이 아닌 지네를 먹인 닭이 의심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중종은 포육은 하인들에게 임상실험 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추문할 근거가 없지만 닭고기를 섞어서 식중독이 발생했다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고 만일 닭고기만 먹었다면 의심할 것이 없지만 포육도 함께 먹었으니 이에 대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한편 대간들 사이에서 포육을 진상한 지방의 도 관찰사와 담당 관원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중종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포육을 진상하면 이를 모두 섞어서 보관하기 때문에 출처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식중독 사태에 관련해서 음식관리를 담당하는 감선제조와 내관,선부에 대한 조사와 닭고기의 식중독 가능성에 대해 조광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증상이 동일한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며칠 후 승정원 관리들은 초반에는 포육을 식중독의 원인이라고 말하였다가 나중에는 포육에서 닭고기로 결국 돌고돌아 포육으로 식중독의 원인으로 의심된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사관은 말바꾸기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결국 포육으로 의심되는 식중독 사태의 진상은 밝히지 못하며 흐지부지되었다.
포육으로 의심되는 식중독 사태가 일어난지 3년 후인 중종 23년 또 다시 세자의 아침 수라의 퇴선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자의 아침 수라 퇴선 중 생치와 식해를 설서[38] 허항과 하인 6~7인이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 이번에는 구토, 복통에 이어 현기증까지 동반한 식중독이었다고 한다. 이에 경악한 중종은 이 음식이 언제 궁에 반입되었는지, 먹은 자들은 이것만 먹었는지, 식해는 어느 고을에서 진상된 것인지에 대해 조사를 명하였다. 아울러 이번에도 남은 식해에 대해 하인들을 먹여서 식종독 여부에 대해 임상실험을 실시하였다. 이후 이귀령은 문제의 식해는 지난 달 16일에 바친 것인데, 이 달 6일에 궁에 들어왔다고 말하며 식중독에 걸린 세자시강원의 하인들은 퇴선 후 남은 음식들을 다 먹었는데, 토한 뒤에 보니 먹은 식해가 날 것이고 색깔이 붉으므로 이것이 식중독을 유발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하며 이 남은 식해를 가지고 시강원의 사령 8~9인에 먹이니 모두 구토와 복통을 일으켰고 이 중 2~3인은 밤새 몹시 심하게 앓았다고 보고하였다. 식해 관련 식중독과 관련하여 이 식해를 올린 고을은 용인임이 확인되었고 용인현령 남세평은 진상물을 봉진할 때 신중히 하지 않았기에, 결국 용인현령 남세평은 5일만에 파직되었다.
  • 1514년(중종 9)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1518년(중종 13)에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4. 가계[편집]

4.1. 친가(전주 이씨)[편집]

  • 고조부 : 세종(世宗) 이도(李祹)
  • 고조모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증조부 : 세조(世祖) 이유(李瑈)
    • 증조모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친조부 : 덕종(德宗) 이장(李暲)
      • 친조모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 조부 : 예종(睿宗) 이황(李晄)
      • 조모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부왕 : 성종(成宗) 이혈(李娎)
  • 모후 :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4.2.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중종
(中宗)
성종
(成宗)
덕종
(德宗)
세조
(世祖)
정희왕후
(貞熹王后)
소혜왕후
(昭惠王后)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정현왕후
(貞顯王后)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영천부원군 윤삼산
(鈴川府院君 尹三山)
고성 이씨
(固城 李氏)
연안부부인 전씨
(延安府夫人 田氏)
전좌명
(田佐命)
전주 이씨
(全州 李氏)

4.3. 배우자/자녀[편집]

5. 중종이 등장한 대중매체[편집]

5.1. 드라마[편집]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배우 박지영[44]이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이진우가 연기했다. 조광조의 도학 정치를 지지하다가 조광조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결국 죽이는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나온다. 드라마는 정사와는 거리가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데 중종이 평생 단경왕후 신씨만을 사랑했다는 야사를 채택해 중종이 왕권을 세우고 도학 정치를 펴려던 시도 역시 단경왕후를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45]했다. 이 과정에서 '단경왕후 복위'라는 안건에 동의하지 않는 조광조와 끝까지 맞서 그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결국 죽여버린다. 드라마 내내 사춘기 소년 같은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데 의외로 누르고 참았다가 결국 자기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중종의 다크 사이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치 행위보다는 반은 눈물과 애원, 나머지 반은 분노와 저주. 극 중에 묘사되는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랑이 애절하기는 하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최우혁[46]이 연기했다. <왕과 비>가 끝나기 채 몇 회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데다 비중 또한 적다는 것이 함정.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유일한 적통 왕자로 인정받지만 이복형 연산군에게 허구한날 호구잡혀 내리갈굼당하는 불쌍한 신세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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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최종환[47]이 연기했다. "그 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는 대사로 유명하며 주로 조정 대신들에게 외치지만 치부책 에피소드의 일부인 제75화에서 정난정에게도 시전한다. 문정왕후, 경빈 박씨 등의 여인들과 조정 권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임금으로 그려진다.
  •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48] 중종이 제일 긍정적으로 나온 드라마다. 여기서는 미식가 임금이자 사상 최초로 여성을 어의를 임명하는 대범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초기에는 "맛있구나" "맛이 아주 좋구나" "이 음식은 ~하고…" 하는 식의 대사밖에 없어서 시청자들에게 "저 놈은 왕이냐 심사위원이냐"라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49] 임호도 그 날 메뉴가 무엇인지만 알면 자기 대본은 거의 다 외운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50] 다만, 드라마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중종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는 내용은 없다. 그나마 진성대군 시절 역모에 휘말리는 내용이 정치적인 장면의 전부이며, 후반부에는 민정호와의 삼각관계를 그리며, 질투 많은 서브 남주인공 역할이라서 왕으로서의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백승환(아역)과 배우 연우진이 연기했다.[52] 한국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로 등장한 만큼 실제 역사나 다른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중종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 많다. 우선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최소 30대 이상으로 나오며 이미 왕위에 등극한 상태로 등장하거나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 시절만 그려지고는 했으나 여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부터 중종 즉위 이후까지 폭넓은 연령대가 다뤄졌다. 사실 그동안 중종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 작품의 주인공이 될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지만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역(중종의 본명)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어려서부터 한 여자[53]밖에 모르는 로맨티스트[54]이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목숨처럼 여기는 인물로 나왔다. 그동안 중종은 역사적 기록을 비롯해 여러 작품으로 인해 왕이 될 의지가 하나도 없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반정 공신들 때문에 왕이 되어서 공신들 눈치나 보다가 조강지처도 못 지킨 한심하고 유약한 인물로 인식돼 왔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건 역사와 동일하지만 절대 유약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연산군 앞에서 기죽지 않고 할 말 있으면 다 하는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55] 왕이 되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정반대로 그려지는데 여기에서는 직접 반정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가 연산군을 벌한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반정 공신들이 중종과 단경왕후를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중종은 끽 소리도 못 하고 반정 공신들의 요구에 따르지만 작중에서는 이런 요구를 하는 대신들을 중종이 카리스마로 제압한다.[56]

5.2. 영화[편집]

  • 1967년 개봉한 영화 <문정왕후>에서는 배우 김동원이 연기했다.
  • 2015년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배우 고경표가 연기했다.
  • 2018년 개봉한 영화 <물괴>에서는 배우 박희순이 연기했다.

5.3. 기타[편집]

  •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 에서도 등장한다. 실제 역사처럼 이전 중전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성우 최한이 연기했다.

6. 관련 문서[편집]

[1] 율리우스력 4월 16일[A] 2.1 2.2 율리우스력 9월 18일[B] 3.1 3.2 율리우스력 11월 29일[6] 시조 27세, 태조 6대손[7]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4월 3일 갑오 1번째기사》. 봉호는 경상도 진주에서 따왔다. 대부분 진성대군으로 알고 있으니 진성대군으로 봐도 상관이 없다.[8] 황효헌은 세종 대에 활약한 황희의 현손(6대손)이고 조광조의 당여였던 기준과 동서지간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홍문관은 조광조 일파가 장악했다. 이때 황효헌은 홍문관 박사로 재직하던 중 이 발언을 했다고 기록되었다.[9] 조광조를 숙청하는 모습을 두고 한 사관의 논평이다. 일반적으로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끌려다니는 나약한 군주의 인상이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종반정 직후 ~ 초기 때의 모습이지,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위선적인 면모를 많이 보인 임금이었다.[10] 젊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해보려다가 자신들이 소인이 되어가는 줄 몰랐던 것뿐이라고 하며, 이장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 역시 술에 취해서 미친 사람 같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냥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거니 봐줘야한다고 했다.[11] 중종이 죽여야 한다고 할 때마다, 남곤이 수없이 반대를 반복하는 것이 계속될 정도.[12] 사실 남곤은 단지 현실론자였을 뿐, 뇌물을 멀리하고 검소하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청렴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김종직의 직계 제자이기도 했고. 결국 남곤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을 때까지 조광조에게 저지른 짓[13]을 후회하였으며,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며 그간 쓴 글은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자식들에게 유언했다. 이런 반성 때문인지 그는 심정, 이행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 대국적으로 보자면 사장(詞章, 문장 + 시가)을 중시한 조선 초기 도학파의 마지막 걸물로 불린다.[13] 초반에 중종의 기세에 눌려서 조광조 일파를 체포할 때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죽었을 때 남곤이 정광필과 더불어서 대표적으로 슬퍼했던 사람이라거나 정광필을 설득하라는 중종의 밀명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돌리며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을 보면 조광조 일파의 체포 자체도 내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4] 비슷하게 쿠데타로 옹립된 고려 현종은 고려를 전성기로 이끈 성군이 된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고 볼 수 있는데, 고려 현종과 조선 중종 모두 쿠데타로 옹립되었고 인재풀이 꽤 상당했던 것과 또한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고 고려의 성군이 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던 반면에 조선 중종은 자기 자리와 권력을 지키는 데만 몰두하면서 조선을 더욱 침체기로 떨어뜨렸다. 물론 비슷하게 쿠데타로 옹립되었던 고려 명종보다는 어느 정도 나았다.[15] 비슷한 시기 명나라는 명 4대 암군 중에 두 명인 정덕제와 가정제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역시 명나라의 마지막 명군이던 홍치제가 죽은 후에 망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정덕제는 명 4대 암군 중에서는 최근 들어서서 평가가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가정제 때 들어서서 명나라는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가정제 역시 김안로의 명나라 버전이자 명나라의 최강 간신인 엄숭을 중용했고, 도교에 빠진 암군이었다.[16] 조광조는 둘째치고 김안로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간신이요 탐관오리다보니 부정부패가 심각했다.[17] 특정인에게 힘을 몰아줬다가 실각시키거나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서 왕권을 안정시켰던 중종 역시 극히 말년에는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의 남동생들이던 윤원형-윤원로 형제에 너무 많이 힘을 몰아줬는데 이는 나중에 대윤-소윤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명종 즉위 이후의 을사사화정미사화로 이어지는 참극을 초래했고 윤원형과 정난정의 횡포를 초래하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남동생이던 윤원형에게는 승정원의 우두머리이자 요직에 해당되는 도승지 자리까지 줬고, 윤원로에게는 한직을 주기는 했으나 역시 정치적 힘을 키워준 반면에 인종의 외숙부였던 윤임에게는 판돈녕부사라는 한직을 주고 정치적 실권도 떨어뜨렸다.[18] 다만 고려는 해당 정치방식을 많이 썼던 명종이 민생과 실무에 무관심했고 게을렀으며 최충헌에 의해 폐위를 당해서인지 해당 정치방식을 상설화 시키는 데 실패했고 최충헌 암살을 시도했던 희종이 최충헌 암살에 실패하고 폐위를 당하면서 해당 정치방식이 아예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물론 원종 이후 부활하기는 하지만 온전한 형태로 부활하지는 못했다. 고려 이전 국가들을 보면 고구려는 해당 정치방식을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 끝에 상설화 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영류왕이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당하고 180명의 유력 인사들도 연개소문에 의해 제거당하면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백제 역시 해당 정치방식을 상설화 시켜내는 데 성공했지만 말년에 의자왕의 지나친 왕권강화와 성충 투옥으로 결국 역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반면 신라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 끝에 해당 정치방식을 상설화 시켜내는 데 성공했고 신라 후기에도 해당 정치방식이 계속 사용되었다.[19] 중종 초 이과의 옥사가 터졌는데 정국공신이 되고자 했으니 되지 못한 이과가 불만세력들을 끌어모아 중종을 끌어내리고 성종의 서자인 진성군(甄城君)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었다. 문제는 이과와 그 일당은 반역자이니 그렇다고 쳐도 진성군(甄城君)은 단지 이름만 나왔을 뿐이었지만 결국 죽어야 했다. 훗날 왕족들이 역모에 이름만 오르내려도 죽어야 했다는 점에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은 틀림없다.[20] 경빈 박씨 소생인 혜정옹주의 남편으로, 중종의 사위이다.[21] 다만 북한조선력사에서는 인민을 기만하고 충신을 일부러 죽게 만들며 위선을 떤 폭군이라고 무지막지하게 까임을 당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에서도 중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은 편이다.[22]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사망, 숙의 나씨는 아들을 낳고 사망(아들도 같이 사망하였다), 숙의 이씨는 덕양군을 낳고 사망, 숙원 이씨는 효정옹주를 낳고 사망했다.[23] 효혜공주는 딸 김선옥을 낳고 사망, 효순공주는 난산으로 사망, 효정옹주는 둘째 아들을 낳고 사망했다.[24] 사실 휘종이 빤스런하여 흠종이 황위를 이어받아 1년간 재위했다.[25]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종이 딸의 죽음에 사위인 조의정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의정은 부마에겐 금지된 첩을 들여 바람을 피고 난산으로 몸져누운 효정옹주를 간호하려고 중종이 직접 보낸 의녀를 내쫓는 등 가히 조선 최악의 부마였다. 이런 망나니 사위에게 욕을 한 중종의 행동이 완전히 상식밖의 행동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조의정은 결국 효정옹주 문제로 귀양까지 갔다.[26]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적장자.[27] 비변사는 이후 명종 대에 일어난 을묘왜변이 지난 시기에 상설 기구화되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권한이 막강해져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최고 국정 기구가 되는데 결국 세도가의 놀이터로 전락하여 삼정의 문란을 낳는다. 이는 고려의 도평의사사와 동일한 양상.[28] 중종이 진성대군 시절 살던 본집.[29] 이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의 행동이 가관이였다.(중종 100권, 38년(1543년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월 7일(임자) 1번째 기사) 승지와 사관 등이 정신없이 세자궁(동궁)에 달려갔으나 불을 꺼야할 군사는 게을러 모이지 않았으며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영의정 윤은보가 "세자가 어느 곳에 피했는지 살펴보았는가?"라고 물어봤더니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마 피하여 대내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식으로 세자궁의 주인인 세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세자는 중종과 같이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세자는 왕인 중종이 직접 데려왔고 신하들은(심지어 중종의 옆을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해야 할 사관마저) 멀뚱멀뚱 화재를 끄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30] 귀양은 여자라 하여 돈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31] 기록에 따르면 숙원 이씨의 동생이자 효정옹주의 이모였다. 한편 그것과 별개로 왕의 밀명을 받은 궁중 내의 해결사였다는 설도 있다. 이 사건 이전에 효정옹주의 친언니인 정순옹주의 남편인 송인이 몰래 첩을 두고 서자를 얻었을 때도 은대가 나서서 그 첩과 아이를 모두 장살한 일이 있었다.[32] 풍가이의 경우 조의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조의정의 첩이 되거나 효정옹주가 박해받는 것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조의정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신하들은 생각하였다.[33] 문정왕후는 명령을 내리는 카리스마가 달랐는지 중종 때 기를 쓰고 은대를 처벌하라던 신하들이 이 때는 다들 조용. 심지어는 중종 때 자신은 은대를 처벌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소수 의견으로 묻혀버려 안타까웠다는 말을 하는 신하들도 있었다.[34] 효정옹주는 18세에 조천계라는 첫 아들을 낳았고 난산은 23살 때의 일이었다.[35] 사실 중종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성종과 이복형인 연산군 모두 치통 때문에 괴로움을 호소했다. 성종은 말년에 가면 갈수록 치통 때문에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연산군은 20세 때 치통을 앓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본인이 스스로 칫솔을 만들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사에 기록된 첫 칫솔 사용이었다. 가족력이거나 공통적으로 식습관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연산군은 각종 단 음식에 푹 빠졌던 사람이라 식습관 때문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36] 현대의학의 발달로 치과 치료가 대중화되었지만, 사실 치과는 의학중에서도 매우 늦게 발달한 분야이다. 지금이야 썩은 부분만 파내고 떼우는 등 처치가 가능하지만, 19세기 초중반까지도 치과 치료는 그저 아픈 이를 발치해 뽑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37]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관청[38] 세자시강원에 소속된 정7품 관직[39] 의혜공주의 부마인 한경록은 한치인의 증손자인데 한치인의 여동생 중 한 명이 바로 인수대비 한씨이다. 8촌이다.[40] 혜정옹주의 딸이 윤임의 손자와 혼인을 하는데, 윤임은 중종의 첫째 왕비(전체로 보면 둘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이다. 이 때문에 명종 즉위 후 벌어진 대윤 숙청 사건 때 목숨을 보전받는다. 혜정옹주와 시어머니와는 인척관계로도 연결되는데, 혜정옹주의 시어머니는 세종대왕신빈 김씨의 아들 중 하나인 밀성군의 증손녀이다. 혜정옹주는 세종대왕의 아들 세조의 현(서)손녀이니 9촌이다.[41] 창빈 안씨는 손자 선조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 순종 임금까지 전부 직계 후손이다.[42] 정신옹주의 부마인 한경우는 한치례의 증손자인데 한치례의 여동생이 인수대비 한씨이다. 정신옹주와 8촌이며 앞서 설명했던 의혜공주의 부마인 한경록과도 8촌인 동시에 동서이다.[43] 선조의 부친[44] 장녹수 역을 맡은 여자 배우 박지영과는 당연히 동명이인. 후에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최지몽 역을 맡게 된다. 현재는 지아니 박이라는 이름의 음악가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45] 극 중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할 것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그를 데리고 간 곳이 폐비가 머무는 죽동궁이었다.[46] 2000년 KBS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송승헌아역.[47] 최종환은 사극에는 자주 출연하지만 왕 역을 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이게 첫 왕 배역인 셈. 그 후에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영류왕 역,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는 고종 역, 2011년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무왕 역.[48] 임호는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를 절륜하게 연기하여, 정몽주가 조선 왕으로 환생해서 미식가가 되었다는 배우개그가 흥하기도 했다.[49] 심지어 종영 후, 대장금 총집 편에서 조차 '정사는 멀리하고 미식만 즐겼는지' 운운하기도 했다. 스페셜에서 '맛있구나' 하는 장면만 편집한 장면을 방영했다.[50] 물론, 먹는 장면을 몰아서 찍다보니 배가 부르거나, 음식이 식어서 연기하기 힘들었다는 고충도 살짝 했다.[51] <여인천하> 이후 16년 만에 같은 배역을 다시 연기한 셈.[52] 두 배우가 너무 비슷하게 닮아서 아역과 성인의 싱크로율이 높은 드라마에 뽑히기도 했다.[53] 중종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 극 중에서는 '신채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54] 작가가 중종 안티이나 연우진 안티였던건지 아니면 작가가 서브 연산군에 너무 닥빙을 한 탓인지 실컷 '신채경 바라기'로 잘 그리다가 마지막회 때쯤 중종이 신채경이 아닌 다른 여인을 중전으로 맞아들여 원자를 생산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이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어차피 역사와 다르게 중종을 로맨티스트로 그리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그렇게 하지. 왜 끝에 가서 갑자기 역사적 내용에 충실해서 흥을 다 깨냐"며 비난이 폭주했다.[55] 중종은 연산군을 지지하는 간신 임사홍 및 요부 장녹수의 계략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겨우 살아나는데 이 때문에 왕이 되어 형의 것을 다 빼앗고 복수하겠다는 마음까지 품는다.[56] 심지어 1등 반정 공신인 박원종을 귀양 보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중종과 단경왕후가 역사와 다르게 해피 엔딩을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종이 반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왕권도 강력하고 단경왕후를 쫓아내자고 주장하는 박원종도 축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작가는 단경왕후에게 연산군과의 추문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 일로 인해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가 분노해서 단경왕후를 무려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고 이로 인해 단경왕후가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스스로 중종의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는 황당무계하고 기상천외한 결말을 내고 역사왜곡이 심해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