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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Émile Zola
본명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Émile Édouard Charles Antoine Zola
출생
1840년 4월 2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902년 9월 29일 (향년 62세)
프랑스 파리
국적
학력
Lycée Saint-Louis
직업
소설가, 극작가, 시인, 비평가, 저널리스트
사조
부모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 (1796~1847)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 (1819~1880)
배우자
알렉산드리나 졸라 (1870년 결혼)
자녀
2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아셰트 출판사 시절2.3. 초기 문학 활동2.4. 충격의 데뷔, 테레즈 라캥2.5. 총서의 기획
2.5.1. 총서의 서막, 제1권 루공 가문의 영광2.5.2. 권력의 해부, 라 퀴레2.5.3. 정치적 이면, 외젠 루공 각하2.5.4. 하층민의 비극, 목로주점2.5.5. 매춘과 타락, 나나2.5.6. 노동의 지옥, 제르미날2.5.7. 농촌의 민낯, 대지2.5.8. 예술과 파멸, 작품2.5.9. 전쟁의 참상, 파멸2.5.10. 총서의 마침표, 파스칼 박사
2.6. 세 도시 총서2.7. 드레퓌스 사건의 발발2.8. 나는 고발한다(J'accuse...!)"2.9. 재판과 망명2.10. 네 복음서 총서2.11. 의문의 죽음
3. 평가4. 문학관5. 폴 세잔과의 관계6. 사회주의와 졸라7. 종교관8. 사생활9. 기타
9.1. 사진가9.2. 한국에서9.3.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회운동가이다. 사실주의를 넘어 인간의 유전적 요인과 환경의 영향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묘사하는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방대한 연작 소설인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해 제2제정 시대 프랑스 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문학적 성취 외에도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발표하며 진실과 정의를 위해 권력에 맞선 지성인의 표상으로 추앙받는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에밀 졸라는 1840년 4월 2일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불과 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남부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Francesco Zola)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유능한 토목 기사였으며, 당시 엑상프로방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운하와 댐 건설 프로젝트(일명 '졸라 댐')를 지휘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졸라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였다. 기술적 전문성과 개척자 정신을 가진 아버지는 졸라에게 '세상을 과학적으로 설계하고 구축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 신뢰를 심어주었다. 엑상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졸라는 풍족하고 촉망받는 엔지니어의 아들로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이 행복은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1847년, 졸라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얻은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유능한 기사였을지언정 빈틈없는 사업가는 아니었다. 그가 남긴 것은 거대한 운하 설계도와 산더미 같은 채무뿐이었다. 아버지의 동업자들과 채권자들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졸라 가문의 재산을 잠식해 들어갔다. 졸라의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는 아들의 교육권과 남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법정 투쟁을 시작했지만, 거대 자본과 법조계의 카르텔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시기 졸라는 처음으로 '계급적 추락'을 경험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던 소년은 순식간에 학교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엑상프로방스의 상류층 사회는 이들 모녀를 냉대했고, 졸라는 이 시기 느꼈던 소외감과 분노를 훗날 『루공 마카르 총서』 곳곳에 녹여낸다. 특히 권력을 쥔 자들이 어떻게 법과 정의를 이용해 약자를 짓밟는지에 대한 졸라의 비판적 시각은 바로 이 엑상프로방스에서의 법적 패배와 가난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가난 속에서도 졸라를 버티게 한 것은 우정이었다. 부르봉 중학교(현 리세 미녜)에 재학 중이던 졸라는 학교 내에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과 더불어, 당시 그가 사용하던 파리 특유의 억양은 남부 아이들에게 조롱거리였다. 이때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소년이 있었으니, 바로 훗날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폴 세잔이었다.

세잔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지만 기질적으로 고독하고 투박한 소년이었고, 졸라는 섬세하고 내성적이었다. 여기에 '바티스탱 바이유'라는 친구가 합류하며 그 유명한 '세 친구(Les Trois Inseparables)'가 결성된다. 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엑상프로방스 외곽의 생 빅투아르 산(Mont Sainte-Victoire)을 헤치고 다니며 아르크 강에서 수영을 하고, 빅토르 위고와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를 낭송했다.
"우리는 미친 듯이 걸었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숲속에서 낮잠을 자며, 태양 아래서 예술과 미래를 논했다. 그때의 우리에게 세상은 오로지 시(詩)와 우정뿐이었다." - 훗날 졸라의 회고 중.

이 시기 세잔과의 교류는 졸라에게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세잔을 통해 시각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으며, 이는 훗날 졸라가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하는 평론가로 활동하게 되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자연 속을 누비며 관찰했던 프로방스의 거친 풍경과 식생들은 훗날 그의 소설 속에서 배경이 단순한 무대가 아닌, 인간의 운명을 규정짓는 하나의 생생한 '유기체'로 묘사되는 기초가 된다.

졸라는 학교 성적이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문학에서만큼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고전 라틴어 문학과 수사학에 매료되었다. 10대 시절의 졸라는 소설가보다는 시인을 꿈꿨다. 그는 중세 기사도 이야기나 낭만주의적인 서사시를 썼는데, 이는 훗날 그가 주장하게 될 차갑고 객관적인 '자연주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하지만 이 역설이 졸라 문학의 위대함을 만든다.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문체를 지향하면서도, 그의 문장 저변에는 고전 비극의 웅장함과 낭만주의적 열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기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방대한 양의 독서를 집행했고, 이는 훗날 그가 총 20권에 달하는 거대 총서를 기획할 수 있는 지적 체력을 길러주었다.

1858년, 졸라의 어머니는 더 이상 엑상프로방스에서의 가망 없는 소송과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파리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18세의 졸라에게 이것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정든 산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과도 같았던 친구 세잔과의 이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졸라는 1858년 2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엑상프로방스의 따뜻한 햇살과 황금빛 대지를 뒤로하고, 매연과 소음이 가득한 거대 도시 파리로 던져졌다. 이 '강제적 이주'는 졸라의 인생에서 첫 번째 거대한 전환점이 된다. 남부의 전원적 낭만주의자였던 소년은 이제 북부의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거듭날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졸라는 훗날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엑상프로방스를 모델로 하여 가상의 도시 '플라상'을 창조해낸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 플라상이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잡한 권력 투쟁과 근친상간, 탐욕의 연대기는 졸라가 유년 시절 목격했던 엑상의 폐쇄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문학적 복수이기도 했다.

졸라는 파리의 명문 학교인 리세 루이 르 그랑(Lycée Louis-le-Grand)에 편입했다. 하지만 엑상프로방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던 그에게 파리의 학교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남부 특유의 억양을 사용하는 그를 향한 파리 학생들의 조롱은 내성적인 졸라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는 이 시기 철저히 혼자였으며, 유일한 위안은 남부에 남은 세잔과 주고받는 편지뿐이었다. 편지 속에서 그는 파리의 공기를 "답답하고 불결한 매연의 덩어리"라고 묘사하며 고향의 그리움을 토로했다.

이 시기 졸라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학업적 실패'였다. 그는 1859년, 프랑스의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에 응시했으나 불합격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나름의 재능을 보였으나, 정작 본인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될 문학(수사학)과 역사 시험에서 낙방한 것이다.[1] 재수를 결심하고 도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낙방은 그에게 '졸업장 없는 지식인'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이는 상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음을 의미했다.

이후 약 2년간, 졸라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한다. 어머니의 가계는 이미 파산 상태였고, 졸라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파리 6구의 저렴한 하숙집 옥탑방(Chambre de bonne)을 전전했다. 이 시기 졸라의 생활상은 훗날 그의 소설 『목로주점』이나 『나나』에서 묘사되는 빈민들의 비참한 삶의 원형이 된다. 그는 단 한 벌뿐인 외출복을 전당포에 맡기고 침대 시트를 몸에 두른 채 글을 썼으며, 겨울에는 땔감이 없어 잉크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잉크병을 품에 안고 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가장 처절했던 기록은 '비둘기 사냥' 사건이다. 며칠을 굶주림에 허덕이던 졸라는 창가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잡아 단백질을 보충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자신의 가난을 증오하는 대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배고픔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굶주림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가난이 인간의 신경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기처럼 기록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훗날 그가 주창하게 될 '실험 소설론'의 태동이었다. 작가가 직접 고통의 현장에 뛰어들어 임상 시험을 하듯 관찰하는 태도가 이 옥탑방의 굶주림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이 시기 졸라는 시인으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빅토르 위고나 알프레드 드 뮈세의 낭만주의 시풍을 흉내 낸 시집 『사랑하는 니농』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파리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길거리에는 오물이 넘쳐났고, 공장 노동자들은 술로 시름을 달랬으며, 여인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몸을 팔았다. 이러한 현실과 감상적인 시적 언어 사이의 괴리감은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결심한다. 꽃과 나비 대신 썩어가는 고기와 알코올에 찌든 노동자의 숨결을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졸라의 파리 하층민 생활은 그를 사회주의적 가치관에 눈뜨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것을 넘어, 왜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굶주려야 하며 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를 사회 구조적 문제와 유전적 요인에서 찾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하던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베르나르의 의학 이론은 그에게 가난을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만약 그가 순탄하게 대학에 입학하고 관료가 되었다면, 우리는 프랑스 제2제정의 추악한 뒷모습을 해부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옥탑방의 찬 공기와 텅 빈 위장은 그에게 '문장'이 아닌 '현실'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1862년, 그가 아셰트 출판사에 말단 직원으로 입사하며 이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천 명의 파리 시민이 각자의 욕망과 비극을 안고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2.2. 아셰트 출판사 시절[편집]

1862년 3월 1일, 굶주림에 지쳐 비둘기까지 잡아먹으려 했던 청년 졸라는 지인의 소개로 당시 프랑스 최대 규모였던 아셰트 출판사의 포장부(Service des expéditions)에 말단 직원으로 입사한다. 월급은 고작 100프랑.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박봉이었으나, 매일 아침 굶주림을 걱정하던 그에게는 성경보다 소중한 월급봉투였다.

그는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만 권의 책을 종이로 싸고 끈으로 묶는 단순 노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졸라는 여타 노동자들과 달랐다. 그는 자신이 포장하는 책들의 제목을 외우고, 그 책들이 어떤 비평가들에게 보내지는지, 어떤 서점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2] 그의 성실함과 지적 호기심은 금방 눈에 띄었고, 입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출판사의 창립자 루이 아셰트(Louis Hachette)의 눈에 들어 광고부(Service de la publicité)로 전격 발탁된다.

광고부로 옮긴 졸라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당시 프랑스 출판계는 여전히 귀족적인 문학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고, '광고'를 천박한 상업 행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졸라는 달랐다. 그는 "책도 하나의 상품이며,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책은 죽은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는 근대적 자본주의 논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아셰트에서 발간되는 책들을 홍보하기 위해 당대 주요 일간지의 기자들과 비평가들에게 정교하게 작성된 보도자료를 보냈다. 단순히 "좋은 책이니 읽어달라"는 식의 구걸이 아니었다. 그는 해당 도서가 가진 자극적인 요소, 사회적 쟁점, 그리고 논란이 될 만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어 기사화하기 좋게 가공했다. 소위 말하는 '언론 플레이'의 원형을 그가 설계한 것이다.

특히 그는 유명 비평가들에게 책을 보낼 때, 그들의 성향에 맞춘 정중하면서도 지적인 편지를 동봉하여 친분을 쌓았다. 이 네트워크는 훗날 그가 작가로 데뷔했을 때, 그가 쓴 작품들이 비록 욕은 먹을지언정 무관심 속에 사장되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방어막이자 공격 기지가 되었다. [3]

아셰트 출판사는 당대 프랑스 지성의 산실이었다. 광고부 책임자로 일하면서 졸라는 프랑스 최고의 비평가인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과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등을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다.

특히 이폴리트 텐의 '종족, 환경, 시대'라는 결정론적 사고는 졸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졸라는 텐의 이론을 접하며 "인간의 성격과 운명은 유전적인 요인과 주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는 훗날 자연주의 문학의 핵심 교리가 된다. 졸라는 퇴근 후 좁은 방으로 돌아와 아셰트에서 빌려온 의학 서적과 과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자신이 배운 홍보 기술을 자신의 '이론'을 전파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에드몽 드 콩쿠르 형제 같은 대작가들의 원고를 직접 접하며, 문장이 어떻게 다듬어지고 출판물로 완성되는지의 전 과정을 목격했다. 그는 아셰트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그 기계를 움직이는 운영체제를 해킹하고 있었던 셈이다.

1866년, 졸라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출판사 직원의 안정적인 급여(당시 200프랑까지 올랐다)를 포기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 것이다. 아셰트 측에서는 유능한 홍보 전문가였던 졸라를 붙잡으려 했으나, 졸라의 야망은 출판사 간부 따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퇴사 직전, 그는 동료들에게 "나는 10년 안에 파리 문단의 정점에 서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을 남긴다. 누군가는 비웃었겠지만, 졸라에게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 그는 이미 아셰트 시절 쌓아온 인맥을 통해 여러 일간지에 정기 칼럼을 기고할 루트를 확보해 두었으며, 대중이 어떤 소재에 반응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머릿속에 구축해 둔 상태였다.

그는 퇴사 직후 『에벤망(L'Événement)』지의 미술 비평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죽마고우였던 폴 세잔과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파리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이는 아셰트에서 배운 '노이즈 마케팅'의 실전 적용이었다. 대중은 분노했지만 졸라라는 이름 세 글자는 파리 전역에 각인되었다.

이 시기 그가 겪은 출판 업무의 디테일은 훗날 그의 모든 작품에서 나타나는 '직업에 대한 병적인 수준의 세밀한 묘사'의 근원이 된다. 그는 이제 펜이라는 칼을 들고, 자신이 홍보했던 그 화려한 파리의 이면, 즉 썩어가는 제2제정의 속살을 도려낼 준비를 마쳤다.

2.3. 초기 문학 활동[편집]

1864년 10월, 졸라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인 단편집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Contes à Ninon)를 출판한다. 당시 그는 아셰트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문단의 생리를 조금씩 익혀가던 중이었는데, 이 작품집은 그가 엑상프로방스 시절부터 품어온 소년기적 감성과 파리 상경 직후의 고독이 버무려진 결과물이었다.

이 단편집은 후기작들의 특징인 적나라한 묘사나 사회 비판보다는, 꿈과 환상, 그리고 이상화된 여성상에 대한 동경이 주를 이룬다. 이는 빅토르 위고알프레드 드 뮈세 같은 낭만주의 대가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남부 프랑스의 풍경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척박한 파리 생활 속에서 그가 도피하고 싶었던 안식처로서의 고향이 투영된 셈이다. 아직 '과학적 보고서' 같은 건조한 문체가 정립되기 전이라, 상당히 유려하고 수식어가 많은 문장을 구사한다.

하지만 이 초기작에서도 훗날의 졸라를 예견할 수 있는 씨앗은 발견된다. 단순히 아름다운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본능이나 결핍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비록 큰 상업적 성공은 아니었으나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라는 눈도장을 찍는 데 성공한다.

졸라가 자연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으로 '생계형 글쓰기'였던 신문 기고였다. 그는 『르 피가로』(Le Figaro)를 비롯한 여러 일간지에 서평, 예술 비평, 사회 시평 등을 기고하며 필력을 갈고닦았다.

기사는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졸라는 현장을 발로 뛰고 자료를 수집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주는 파괴력을 실감했다. 이는 훗날 그가 소설을 쓰기 전 방대한 양의 취재 수첩을 작성하는 습관으로 이어진다. 난해한 문학적 수사보다는 독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강렬하고 명확한 문장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비평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당시 화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던 에두아르 마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미래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운 사건은 유명하다. 이러한 심미안은 그가 고루한 관습을 타파하려는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1865년에 발표된 『클로드의 고백』(La Confession de Claude)은 졸라가 낭만주의적 외피를 벗고 본격적으로 '문제작'을 만들기 시작한 기점이 된다. 이 소설은 반자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가난한 청년 클로드가 매춘부 로랑스와 동거하며 그녀를 갱생시키려다 결국 실패하고 환멸을 느끼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법무부에서는 이 소설의 내용이 지나치게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검토하기도 했다. 졸라는 이 사건으로 인해 아셰트 출판사에서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4]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의 화사함은 온데간데없고, 파리 뒷골목의 습기 찬 방과 육체적인 타락, 질병 등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졸라는 여기서 "사랑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임을 암시하기 시작한다.

『테레즈 라캥』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나오기 직전, 졸라는 생계를 위해 『마르세유의 비사』(Les Mystères de Marseille)라는 통속 연재소설을 집필한다. 당시 유행하던 외젠 쉬의 『파리의 비사』 스타일을 차용한 이 작품은, 사실 졸라 스스로는 문학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졸라는 방대한 등장인물을 관리하고 복잡한 서사 구조를 짜는 법을 익혔다. 또한 마르세유라는 특정 지역의 사회적 지형도를 소설 속에 구현해보는 실험을 하게 된다. 이는 훗날 『루공 마카르 총서』에서 보여줄 '사회 전체의 조감도'를 그리는 연습 게임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 졸라의 서재에는 문학서만큼이나 의학서와 과학 잡지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유전이라는 설계도와 환경이라는 실험실 안에 놓인 '표본'으로 보기 시작했다.

1860년대 중반을 지나며 졸라는 마침내 자신의 무기인 '자연주의'라는 칼을 갈아내었고, 그 서슬 퍼런 칼날은 곧 발표될 『테레즈 라캥』을 통해 전 유럽 문단을 베어 넘기게 된다.

2.4. 충격의 데뷔, 테레즈 라캥[편집]

1867년, 파리 문단은 한 권의 소설로 인해 발칵 뒤집힌다. 에밀 졸라라는 무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가 내놓은 『테레즈 라캥』(Thérèse Raquin)은 단순한 치정 복수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학의 외피를 쓴 '해부학 보고서'였으며,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고 육체적 본능과 신경 체계의 반응만을 추적한 잔혹한 실험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졸라는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자연주의'의 깃발을 선명하게 내걸게 된다.

졸라는 『테레즈 라캥』을 집필하면서 철저하게 기존의 도덕관념을 배제했다. 그는 이 소설의 서문에서 자신을 '화학자나 의사'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살아있는 부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을 연구하고 싶었다. 주인공들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그들이 단지 자신의 신경과 피의 지배를 받는 유기체일 뿐임을 증명하려 했다."

이러한 발상은 당시 파리를 휩쓸던 실증주의 철학, 특히 이폴리트 텐의 "덕과 부도덕도 설탕이나 비트와 같은 화학적 생성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졸라는 인간의 범죄를 '악한 마음'이 아닌 '신경의 교란'과 '기질의 충돌'로 해석하고자 했다.

소설의 무대는 파리의 어둡고 습한 '퐁 뇌프 아케이드'다. 이곳은 햇빛이 들지 않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으로, 주인공들의 숨 막히는 운명을 암시하는 폐쇄적 실험실과 같다.

테레즈 라캥은 아프리카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강렬한 생명력과 욕망을 억누르고 사는 인물. 병약하고 무능한 남편 카미유와의 결혼 생활에서 질식해가고 있다.

카미유는 극도로 허약하고 이기적이며 수동적인 인물. 테레즈의 욕망을 전혀 채워주지 못하는 거세된 남성성을 상징한다.

로랑은 카미유의 친구이자 테레즈의 정부. 게으르고 식욕과 성욕이 강한 인물로, 테레즈와 결합하며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일깨운다.

이 세 인물의 관계는 로랑과 테레즈가 카미유를 살해하기로 공모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센 강에서 배놀이를 하던 중 카미유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은, 낭만주의적인 '비극적 사랑'이 아니라 냉혹한 '포식자의 사냥'처럼 묘사된다.

이 소설이 당대 독자들을 가장 전율케 했던 지점은 살인 이후의 묘사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범인들이 유령을 보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겠지만, 졸라는 이를 '생리학적 반응'으로 치환한다.

로랑과 테레즈는 결혼에 성공하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도덕적 죄책감이 아니라 '망가진 신경'이다. 살해당한 카미유의 이미지는 그들의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육체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들 사이에는 차갑고 축축한 카미유의 시신이 놓여있는 것 같은 감각적 환각이 발생한다. 이는 영혼의 고통이 아니라, 범죄라는 강력한 자극이 인간의 신경계에 가한 영구적인 손상이다.

졸라는 이를 "신경 질환의 발작"이라고 불렀다. 결국 서로를 증오하고 파멸시키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서로 다른 기질이 만나 화학 반응을 일으키다 폭발해버리는 실험관 속의 물질과 다를 바 없었다.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경악했다. 특히 유력 비평가 루이 윌바크(Louis Ulbach)는 『르 피가로』지에 「오물 문학」(La Littérature putride)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며 졸라를 맹비난했다.
"이 책은 인간성을 모독하는 쓰레기 더미다. 작가는 해부실의 시체 썩는 냄새를 문학이라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배설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역설적으로 졸라에게 엄청난 유명세를 안겨주었다. 졸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2판 서문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더욱 공고히 밝혔다. 그는 비평가들을 향해 "당신들은 지적인 장님들이다. 나는 인간의 수술을 집도했을 뿐이다"라고 맞받아쳤다.

졸라는 『테레즈 라캥』을 통해 자신이 나아갈 길을 확실히 정했다. 이제 그는 개별적인 범죄의 해부를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를 해부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인류 문학사상 가장 거대한 기획 중 하나인 『루공 마카르 총서』의 시작이었다.

2.5. 총서의 기획[편집]

1868년경, 졸라는 파리의 작고 초라한 서재에서 인류 문학사상 가장 거대하고 치밀한 프로젝트 중 하나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총 20권으로 구성된 대서사시, 『루공 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였다. 그는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여러 권 쓰겠다는 차원을 넘어, 발자크의 『인간 희극』에 대적할 만한,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새로운 문학적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졸라가 이 거대한 기획을 구상하게 된 일차적인 동기는 선배 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에 대한 존경과 경쟁심이었다. 발자크가 19세기 초반 프랑스 사회를 방대한 인물 군상으로 기록했다면, 졸라는 여기에 '유전학'과 '생리학'이라는 당대의 최신 과학을 접목하고자 했다.
"나는 발자크처럼 풍속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유전과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파괴되는지를 증명하는 실험을 할 것이다."

졸라는 발자크의 인물들이 다분히 전형적이고 문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은 철저히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혈통의 대물림이 한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지를 추적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자연주의 문학의 핵심인 '결정론'의 시작이었다.

졸라는 이 장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갈 가상의 가계를 설정했다. 그 정점에는 아델라이드 푸크(Adélaïde Fouque)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로 설정되었는데, 그녀의 두 남편(정식 남편 루공과 정부 마카르)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사회 계층으로 뻗어 나가는지가 총서의 핵심 줄기다.

루공 가문은 합법적인 혈통으로, 주로 권력, 정치, 부를 갈구하는 부르주아 계층을 상징한다. 탐욕스럽고 야망에 가득 찬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마카르 가문은 사생아적 혈통으로, 알코올 중독, 폭력, 빈곤, 매춘 등 사회 밑바닥의 병폐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노동자 계층을 상징한다.

무레 가문은 양측의 혼혈적 성격을 띠며 유통업이나 종교 등 중간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

졸라는 이 가계도를 그리기 위해 실제 의학 서적을 탐독하며 유전 법칙을 공부했다.[5] 그는 1대에서 시작된 '신경적 결함'이 세대를 거듭하며 환경에 따라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20권에 걸쳐 실증해 보이려 했다.

졸라가 배경으로 선택한 시대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기였다. 이 시기는 프랑스가 근대화의 열풍 속에 자본주의가 급격히 팽창하던 때이자, 이면에 부패와 타락이 공존하던 기묘한 시대였다.

그는 제2제정이라는 특수한 정치 체제가 인간의 본능을 어떻게 자극하고 부추겼는지를 기록함으로써, 소설을 단순한 허구가 아닌 '역사의 보고서'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그는 소설 한 권을 쓰기 전, 소설 내용보다 더 방대한 양의 취재 수첩을 만들었다.

『제르미날』을 쓸 때 직접 탄광 깊숙이 내려가 광부들의 작업 방식, 식단, 은어, 심지어 그들이 앓는 질병의 증상까지 수첩에 빼곡히 적었다.『목로주점』을 쓸 때는 파리 뒷골목의 선술집에 죽치고 앉아 알코올 중독자들의 대화 패턴과 그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를 그대로 채록했다. 그리고『나나』를 쓸 때 화려한 사교계 여성들의 드레스 재질부터 대기실의 냄새까지 조사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문단에서 "예술적 상상력을 포기한 서기"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으나, 졸라에게 소설은 '상상'이 아닌 '관찰과 실험'의 결과물이어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의 영혼을 해부하는 외과의사"라고 칭하며, 독자들에게 불편하리만큼 생생한 진실을 들이밀었다.

1868년 말, 졸라는 출판업자 라크루아와 계약을 맺고 이 총서의 원고를 연간 두 권씩 납품하기로 한다. 비록 초기에는 금전적인 어려움과 정치적 검열 때문에 고초를 겪었으나, 그는 이 계획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 20권의 벽돌로 거대한 건물을 지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 건물을 추하다고 욕하겠지만, 아무도 그 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결국 『루공 마카르 총서』의 기획은 한 작가의 개인적인 욕망을 넘어, 19세기 유럽 사회의 모든 치부와 영광을 담아낸 인류학적 금자탑이 되었다. 졸라는 이 설계를 통해 단순히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에서 사회를 분석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2.5.1. 총서의 서막, 제1권 루공 가문의 영광[편집]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에 출판된 『루공 가문의 영광』은 졸라가 평생을 바친 거대한 문학적 프로젝트 『루공 마카르 총서』의 기념비적인 첫 삽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소설 한 권의 의미를 넘어, 졸라가 주창한 자연주의(Naturalism)라는 거대한 실험 장치에 전원을 공급하는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졸라는 이 한 권의 책 속에 앞으로 전개될 20권의 방대한 서사, 수백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의 유전적 가계도, 그리고 제2제정이라는 시대적 모순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졸라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인 1868년경이었다. 그는 당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 보여준 방대한 사회적 파노라마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과학적 정밀함'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졸라는 당대의 최신 과학 이론이었던 클로드 베르나르의 의학 방법론과 이폴리트 텐의 환경 결정론을 문학에 이식하고자 했다.

그는 '유전'이라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를 증명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가상 도시 '플라상'을 무대로 설정했다. 여기서 그는 광기 섞인 혈통을 가진 여인 아델라이드 푸크를 종착역이자 출발점으로 삼아, 정당한 혈통인 '루공' 가문과 사생아적 혈통인 '마카르' 가문이 어떻게 분화되고 갈등하는지를 세밀하게 설계했다.

소설의 배경은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가 일어난 격동의 시기다.

아델라이드의 장남인 피에르 루공은 출세에 눈이 먼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정신병자로 몰아 가두고 가산을 탕취하며, 권력의 향방을 예민하게 살핀다. 파리에서 들려오는 쿠데타 소식에 그는 이것을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그는 보수 반동 세력에 가담하여 '질서의 수호자' 노릇을 하며 플라상 시의 권력을 장악하려 획책한다.

아델라이드가 밀수꾼 마카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사회적 냉대와 가난 속에서 분노를 키운다. 이들은 루공 가문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정치적 격변기를 틈타 약탈과 복수를 꿈꾼다.

탐욕스러운 어른들의 세계와 대조적으로, 아델라이드의 손자인 실베르와 그의 연인 미에트는 순수한 공화주의적 열정을 가진 청년들이다. 이들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쿠데타에 저항하는 의용군에 가담하지만, 결국 루공 가문의 비겁한 야욕과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희생되고 만다.

미에트가 붉은 깃발을 몸에 감고 죽어가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탐미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장면으로 꼽히며, 이는 순수한 이상주의가 현실의 비정한 권력욕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의 무대인 플라상은 실제 에밀 졸라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를 모델로 한 도시다. 졸라는 이 도시를 세 부분으로 해부한다.
  • 귀족 구역: 과거의 영광에 매몰된 채 성벽 뒤에 숨어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 세력.
  • 신흥 부르주아 구역: 루공 부부가 거주하는 곳으로, 돈과 권력을 향한 끝없는 갈증이 들끓는 곳.
  • 구시가지와 노동자 구역: 가난과 알코올, 유전적 결함이 대물림되는 비참한 현장.

졸라는 이 공간적 배치를 통해 사회적 계급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으며, 그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어떻게 역사를 추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플라상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자 실험실이다.

『루공 가문의 영광』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아델라이드 푸크의 '신경질환'이다. 졸라는 그녀의 신경증이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체계화했다.

루공 쪽은 유전적 기질이 '야망'과 '탐욕'으로 승화되어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방향으로 발현된다. (성공한 부르주아, 정치가 등)

마카르 쪽은 유전적 기질이 '폭력', '알코올 중독', '매춘' 등 파괴적인 본능으로 발현된다. (노동자, 부랑자 등)

졸라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생물학적 조건에 종속된 기계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비록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졸라의 유전 법칙은 다소 비과학적이고 숙명론적인 면이 있으나, 당시로서는 인간의 내면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파격적인 시도였다.[6]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는 자연주의의 시작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에 대한 통렬한 기소장이다. 졸라는 제2제정의 탄생이 숭고한 이념이 아니라, 피에르 루공과 같은 기회주의자들의 탐욕과 우연, 그리고 비겁한 학살 위에 세워졌음을 폭로한다.

작품 말미에서 루공 가문이 '승리자'가 되어 축배를 들 때, 그들의 발밑에는 실베르와 같은 무고한 이들의 시체가 깔려 있다. 졸라는 이를 통해 프랑스 근대사가 가진 태생적 부도덕성을 고발한다. "루공 가문의 영광은 곧 프랑스의 수치"라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다.

『루공 가문의 영광』에서 졸라의 문체는 이전의 서정성을 완전히 탈피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문체'로 변모한다. 그는 인물의 심리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 생리적 반응, 주변 환경을 묘사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특히 군중이 이동하는 장면이나 전투의 혼란을 묘사할 때 보여주는 역동적인 필치는 소설에 시각적인 생동감을 부여한다. 졸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도 감상적인 어휘를 배제하고, 사물의 질감과 냄새,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미온적이었으나, 평단은 새로운 거장의 등장을 직감했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향후 20년 동안 자신이 걸어갈 길을 명확히 제시했다. 『목로주점』의 처절한 빈곤도, 『나나』의 화려한 타락도, 『제르미날』의 거대한 함성도 모두 이 한 권의 책, 이 '플라상'이라는 작은 도시의 화약고에서 시작된 것이다.

졸라는 이 소설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전의 법칙을 따르는 한 가족의 변천사를 보여줄 것이다. 그들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번성하고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통해, 인간이라는 동물의 진실을 기록하겠다."

이 선언은 19세기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자연주의의 독립 선언문이 되었으며, 『루공 가문의 영광』은 그 거대한 성채의 가장 견고한 주춧돌로 남게 되었다.

2.5.2. 권력의 해부, 라 퀴레[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2권에 해당하는 『라 퀴레』(La Curée, 1871)는 에밀 졸라가 자신의 거대한 문학적 기획 속에서 '금력과 권력의 유착'을 어떻게 해부할 것인지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작인 『루공 가문의 영광』이 지방 소도시인 플라상에서 권력의 씨앗이 발아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라 퀴레』는 그 씨앗이 파리라는 거대한 비계 위에서 어떻게 추악한 꽃을 피우는지를 다룬다.

소설의 제목인 '라 퀴레(La Curée)'는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들에게 던져주는 짐승의 내장이나 고기 찌꺼기, 즉 '먹잇감' 혹은 '사냥물 나누기'를 의미한다. 이는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2제정기가 파리라는 도시를 어떻게 난도질하고 나누어 가졌는지를 상징하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당시 파리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에 의해 중세의 좁고 불결한 골목을 허물고 거대한 대로와 광장을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와 위생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바리케이드 구축을 방지하려는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부동산 투기의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졸라는 이 거대한 공사판을 지켜보며, 정직한 노동이 아닌 정보와 권력을 이용한 투기로 벼락부자가 되는 인간 군상에 주목했다.

본작의 주인공인 아리스티드 사카르(Aristide Saccard)는 루공 가문의 장남으로, 플라상에서의 야망을 품고 파리로 상경한 인물이다. 그는 형인 외젠 루공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시청의 도로국 직원으로 취직한다. 여기서 그는 파리 재개발 계획의 핵심 정보를 미리 빼내어 헐값에 땅을 사고, 국가 보상금을 타내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사카르는 돈 그 자체보다 '돈이 움직이는 역동성'에 미친 인물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방치하고, 재산을 가진 부유한 여성인 르네와 정략결혼을 하며, 아내의 지참금을 투기 자금으로 쏟아붓는다. 졸라는 사카르를 통해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차 없는 탐욕과 도덕적 불감증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졸라는 사카르의 투기적 광기를 루공 가문 특유의 '권력욕'과 파리라는 '기회주의적 환경'이 결합한 결과로 해석했다. 그는 단순히 악당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인 셈이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은 사카르의 후처인 르네(Renée)와 사카르의 전처 소생 아들인 막심(Maxime)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다. 졸라는 파리의 화려한 살롱 이면에 숨겨진 성적 타락을 투기판의 광기와 병렬시킨다.

르네는 막대한 부 속에서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 그녀에게 막심과의 관계는 금기를 깨트림으로써 얻는 찰나의 자극에 불과하다. 막심 역시 제2제정의 풍요 속에서 여성화되고 나약해진 '댄디'의 전형으로 묘사되며, 계모인 르네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쾌락만을 쫓는다.

졸라는 사카르가 파리의 땅을 파헤치며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 그의 가정 내부(침실) 역시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깨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제2제정이라는 체제 자체가 겉으로는 화려하나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썩어 문드러졌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메타포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사카르 저택의 '온실' 묘사다. 열대 식물들이 가득 찬 이 인공적인 공간은 르네와 막심의 밀회 장소이자, 비정상적인 욕망이 들끓는 압력솥 같은 곳이다.

졸라는 식물학적인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괴하고 관능적인 식물들을 나열한다.[7] 이 온실은 자연의 순리대로 자라는 공간이 아니라, 돈으로 억지로 만들어낸 기형적인 낙원이며, 결국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위 역시 기형적일 수밖에 없음을 상징한다.

『라 퀴레』는 출판 직후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특히 근친상간을 다룬 대목과 상류층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이 문제가 되어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졸라는 굴하지 않고 이 작품이 "실험적 보고서"임을 강조했다.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실제 파리의 공사 현장을 누비고, 시청의 장부를 조사했으며, 투기꾼들의 은어를 수집했다. 이는 소설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증언'이 되게 했다.

사카르가 파리의 지도를 펴놓고 칼로 베어내듯 도로를 긋는 장면은, 당시 나폴레옹 3세의 독재와 결탁한 자본가들이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졸라는 르네의 파멸을 통해 "아무리 고귀한 혈통(부르주아)이라도 주변 환경이 타락하고 유전적인 신경증이 발동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했다.

소설의 마지막, 르네는 자신이 저지른 부정과 남편의 비정함 속에서 정신적 파멸을 맞이하고 쓸쓸히 죽어간다. 반면 아리스티드 사카르는 승승장구하며 다음 투기판을 찾아 떠난다. 졸라는 이 불균형한 결말을 통해 사회적 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냉소한다.

『라 퀴레』는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불쾌한 작품 중 하나다. 금색과 붉은색의 비단, 샴페인의 거품 뒤에 숨겨진 '먹잇감'을 차지하려는 사냥개들의 으르렁거림.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근대화라고 부르는 이 화려한 도시가, 사실은 누군가의 내장을 씹어 먹으며 세워진 것은 아닌가?"

이 작품에서 확립된 '도시와 자본에 대한 해부'는 이후 『목로주점』에서의 노동계급 묘사, 그리고 『돈』에서의 금융 자본 비판으로 이어지며 졸라의 거대한 세계관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 된다.

2.5.3. 정치적 이면, 외젠 루공 각하[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6권인 『외젠 루공 각하』(Son Excellence Eugène Rougon, 1876)는 졸라가 기획한 거대한 사회적 조감도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도 추악한 '정치적 심장부'를 겨냥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이 파리의 밑바닥 노동자(『목로주점』)나 투기꾼들의 광기(『라 퀴레』)를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시선을 돌려 제2제정의 최고 권력층인 튈르리 궁전과 의회, 그리고 장관의 집무실을 해부한다.

주인공 외젠 루공은 루공 가문의 장남으로, 『루공 가문의 영광』에서 이미 권력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인물이다. 졸라는 이 인물을 통해 '정치'라는 행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개인의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생리적 분출임을 증명하려 했다.

외젠 루공은 돈이나 명예보다 '타인을 굴복시키는 힘' 그 자체에 중독된 인물이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도와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끊임없이 실각과 복귀를 반복한다. 졸라는 이를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쫓듯 권력을 쫓는 본능"으로 묘사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50~60년대 프랑스는 외견상 화려한 제국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상호 감시와 밀고, 정경유착이 판을 치는 밀실 정치의 시대였다. 졸라는 이를 묘사하기 위해 당시의 의회 기록과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이 잡듯 뒤졌으며,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기용했다.[8]

이 소설에서 외젠 루공의 대척점이자 동반자로 등장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모의 여성 클로린드 발비(Clorinde Balbi)는 졸라의 뛰어난 인물 조형 능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의회에 서지는 못하지만, 살롱 정치를 통해 장관들을 주무르고 황제의 마음을 흔든다.

루공과 클로린드의 관계는 연인이라기보다 두 마리의 포식자가 서로를 탐색하는 관계에 가깝다. 루공은 그녀를 소유하려 하지만, 클로린드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루공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는 권력이 단순히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침실과 거실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어떻게 잉태되고 조작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졸라는 클로린드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의 욕망이 '정치적 음모'라는 비정상적인 형태로 분출되는 과정을 해부했다. 그녀는 현대의 로비스트보다 훨씬 교묘하며,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루공 주변에 모여든 소위 '루공당'이라 불리는 기생 집단이다. 이들은 루공이 장관직에 있을 때 온갖 이권(이권 사업, 훈장, 관직 임용)을 챙기며 그를 찬양하다가, 그가 실각하면 순식간에 등을 돌린다.

졸라는 이들을 통해 "지도자는 추종자들의 탐욕에 의해 유지된다"는 냉혹한 진실을 설파한다. 루공 역시 이들의 탐욕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들에게 사탕발림 같은 자리를 나누어준다.

국가의 안위나 정책의 올바름은 뒷전이다. 오직 "우리 편이 자리를 차지했는가"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졸라는 이러한 풍토가 결국 보불전쟁의 패배와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유전적 결함임을 암시한다.

졸라는 이 작품에서 권력의 핵심 공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묘사했다.

소설 중반의 의회 토론 장면은 압권이다. 졸라는 수백 명의 의원들이 황제의 연설에 환호하는 모습을 "거대한 기계의 작동"이나 "집단적인 최면 상태"로 묘사한다. 개인의 이성은 사라지고 오직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만이 남은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황실의 사냥 행사는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잔혹성을 상징한다. 짐승을 몰아 죽이는 과정과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과정이 겹쳐지며, 제국이 거대한 살육과 약탈 위에 세워졌음을 드러낸다.

많은 독자가 루공의 완전한 몰락을 기대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루공은 다시 권력의 요직으로 복귀한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바꾸는 데 능한 카멜레온 같은 존재다. 자유주의적 개혁이 대세가 되자,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다시 장관석에 앉는다.

졸라가 이 결말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명확하다. 권력은 결코 스스로 정화되지 않으며, 악순환은 구조적인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점이다. 『외젠 루공 각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소설을 넘어, 정치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지배욕이 발현되는 장임을 폭로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출간 당시 이 작품은 정치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실존 인물들과 너무나 흡사한 묘사 때문에 "졸라가 제국의 치부를 들춰냈다"는 비난과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특히 보나파르트파 지지자들은 이 소설을 '악의적인 왜곡'이라며 공격했으나, 졸라는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이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내세웠다.

오늘날 이 작품은 정치 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프랑스 정치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독자들은 소설 속 루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서 오늘날 정치판의 기시감을 느낀다. 권력에 눈먼 인간의 본성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졸라는 특유의 서늘한 필치로 증명해 냈다.

2.5.4. 하층민의 비극, 목로주점[편집]

1877년에 발표된 『목로주점』은 에밀 졸라라는 이름을 전 유럽에 각인시킨 결정적인 출세작이자,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7권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환경과 유전이라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처참하게 분쇄하는지를 '임상 기록' 수준으로 정밀하게 묘사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이 소설의 출간으로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오물을 쏟아부은 문학", "하수구의 기록"이라며 비난을 퍼부었으나, 대중은 열광했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하층민의 언어(속어)를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고, 장미빛 환상에 젖어 있던 파리의 이면을 날것 그대로 폭로했다.

소설의 중심에는 제르베즈 마카르(Gervaise Macquart)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루공 마카르 총서』의 가계도에서 '마카르' 계보의 전형적인 유전적 결함을 안고 태어난 인물이다.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그녀는 남부에서 연인 랑티에를 따라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상경한다. 하지만 무책임한 랑티에는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고, 제르베즈는 홀로 남겨진 절망 속에서 세탁부로 일하며 성실하게 삶을 꾸려가려 노력한다.

그녀는 지붕 수리공인 쿠포(Coupeau)와 결혼하며 잠시나마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그녀의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평화롭게 일하고, 항상 먹을 빵이 있고, 잠잘 깨끗한 곳이 있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침대에서 죽는 것"이 그녀의 소박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졸라는 이러한 소박한 꿈조차 자본주의의 비정한 도시 생태계와 유전적 저주 안에서는 허락되지 않음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비극의 시작은 물리적인 사고였다. 성실한 노동자였던 남편 쿠포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집안의 경제 기둥이 무너진다. 치료 기간 동안 쿠포는 노동의 의욕을 잃고 나태함에 빠져들며, 결국 파리의 노동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큰 악의 축, '독주(L'Assommoir)'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여기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소무아르(L'Assommoir)'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전적으로는 '목로주점'을 뜻하지만, 어원적으로는 '때려눕히는 도구'나 '도살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주점은 노동자들을 술로 때려눕혀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도살장인 셈이다. 주점의 구석에 자리 잡은 거대한 증류기는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묘사되며, 끊임없이 독한 술을 뿜어내어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마비시킨다.

제르베즈는 남편의 타락 속에서도 자신의 세탁소를 차리며 분투한다. 하지만 환경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도망갔던 전 애인 랑티에가 다시 나타나 남편 쿠포와 기묘한 공생 관계를 맺고, 두 남자는 제르베즈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술값으로 탕진한다.

졸라는 여기서 '환경의 압력'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변 이웃들의 시기 질투, 끊임없는 술의 유혹,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가 제르베즈를 옥죄어온다. 성실했던 그녀 역시 점차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남편과 함께 알코올의 늪으로 빠져든다.

특히 제르베즈의 생일 잔치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자 가장 소름 돋는 부분이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성대한 식사를 즐기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일시적인 쾌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파멸을 앞둔 최후의 만찬과도 같다. 기름진 거위 요리와 쉴 새 없이 흐르는 술은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가리는 일시적인 마취제일 뿐이었다.

소설의 후반부는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쿠포는 알코올성 치매와 발작(Delirium Tremens) 증세를 보이며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간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거세된, 짐승의 단말마와 다름없었다. 제르베즈 역시 모든 것을 잃고 구걸과 매춘의 언저리를 떠돌다, 계단 밑 어두운 구석에서 굶주림 속에 서서히 썩어간다.

졸라는 그녀의 죽음을 묘사할 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섞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아침, 악취가 진동하여 가보니 그녀가 죽어 있었다"는 식의 건조한 관찰 기록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냉정함이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더 큰 충격과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훗날 『나나』(제르베즈의 딸이 주인공)와 『제르미날』(제르베즈의 아들 에티엔이 주인공)로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의 뿌리가 된다.

졸라는 실제 파리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거칠고 비속한 언어들을 소설 전반에 배치했다. 이는 문학은 고상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순 혁명적인 시도였다. 세탁소의 습한 열기, 술의 독한 냄새, 썩어가는 음식의 악취 등을 시각을 넘어선 촉각과 후각으로 묘사하여 독자를 파리의 시궁창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사회개인의 타락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그러한 타락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와 유전적 굴레를 조명함으로써 지식인 사회에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9]

결국 『목로주점』은 한 여인의 몰락사를 통해 제2제정기 파리의 화려한 불빛 뒤에 숨겨진 어둡고 축축한 지옥도를 그려낸 보고서다. 졸라는 진실을 외면하는 대신 그 진실의 밑바닥까지 손을 집어넣어 오물을 끄집어냈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면목임을 선언했다.

2.5.5. 매춘과 타락, 나나[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9권인 『나나』(Nana, 1880)는 에밀 졸라의 문학적 경력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추악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전작 『목로주점』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제르베즈의 딸, '안나 쿠포(나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제2제정기 프랑스 상류사회의 도덕적 부패와 성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한 여인의 타락사를 그린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는 '유전적 독소'의 실체를 증명하고자 했다.

나나는 전형적인 '루공 마카르' 가문의 희생자이자 포식자다. 그녀의 혈관에는 할머니 아델라이드 푸크로부터 내려온 신경질환과 어머니 제르베즈의 무절제함, 그리고 파리 밑바닥 민중의 거친 생명력이 뒤섞여 흐른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나나는 파리의 바리에테 극장에서 '벌거벗은 비너스'로 데뷔하며 단숨에 파리 사교계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사실 나나는 노래도 못 하고 연기력도 형편없는 무능한 배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성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육체적 매력이 있었다. 졸라는 이를 "수렁에서 피어난 거대한 꽃" 혹은 "오물 위를 떠다니는 황금빛 파리"라고 묘사했다.

나나는 의도적으로 남성들을 파멸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파산, 자살, 가문의 몰락만이 남는다. 이는 하층민의 비참한 유전자가 상류층의 안방으로 침투하여 그들을 내부에서부터 썩게 만드는 '계급적 복수'의 성격을 띤다.

졸라는 『나나』를 쓰기 위해 당시 파리의 고급 창녀(Courtesan)들의 삶과 귀족들의 뒷조사를 철저히 수행했다. 그는 수첩에 "나나는 만인을 집어삼키는 암사자다"라고 적었으며, 그녀의 침실을 제2제정기 프랑스의 부패한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로 설정했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이자 황실의 측근인 뮈파 백작은 나나의 육체 노예로 전락한다. 그는 나나의 발치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며 자신의 자존감과 재산, 명예를 모두 헌납한다. 이는 겉으로는 고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탐욕에 찌든 당시 프랑스 지배층에 대한 졸라의 통렬한 풍자였다.

소설 속에서 돈은 가치를 잃고 오로지 나나의 변덕을 채우기 위한 숫자로 전락한다. 나나는 보석을 부수고, 가구를 때려 부수며, 남성들이 바치는 막대한 부를 허공에 날려 보낸다. 이러한 무의미한 소비는 멸망을 앞둔 로마 제국의 사치와 닮아 있다.

졸라는 나나를 묘사할 때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으로 다룬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나나의 죽음은 자연주의 문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나나는 아들을 돌보다 천연두에 걸려 죽게 되는데, 졸라는 그녀의 시신이 부패해가는 과정을 몇 페이지에 걸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한다.[10] 황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고름이 터지고 피부가 썩어가는 모습은, 그녀가 홀렸던 화려한 파리의 환상이 결국은 썩어가는 시체에 불과했음을 상징한다.

그녀가 죽어가는 창밖에서는 "베를린으로!(À Berlin!)"를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이는 보불전쟁의 시작과 제2제정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나나라는 개인의 죽음이 곧 프랑스라는 국가적 유기체의 붕괴와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절묘한 연출이다.

1880년 출간 당시 『나나』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초판 55,000부가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졸라는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비난 역시 거셌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졸라를 "분뇨 수거인"이라 부르며, 신성한 문학의 영역에 창녀의 침실과 전염병의 고름을 끌어들였다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졸라는 당당했다. 그는 "나는 단지 진실을 기록했을 뿐이다. 만약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구역질을 느낀다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구역질 나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나나는 이후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소설 출간 전부터 졸라와 교류하며 『나나』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고, 훗날 영화와 연극으로 수없이 리메이크되었다. 졸라는 나나를 통해 여성의 성(性)이 어떻게 권력으로 치환되는지, 그리고 그 권력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예견했다.

결국 『나나』는 단순한 치정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화려한 불꽃놀이이자, 그 불꽃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다. 나나는 죽었지만, 그녀가 상징하는 본능과 환경의 굴레는 『루공 마카르 총서』의 다음 권들로 이어지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2.5.6. 노동의 지옥, 제르미날[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도 제13권인 『제르미날』은 단연코 자연주의 문학의 정점이자, 인류 문학사를 통틀어 노동 계급의 고통을 가장 처절하고도 웅장하게 그려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88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단순히 한 가문의 타락사를 넘어, 산업혁명기 자본주의의 탐욕이 빚어낸 지옥도와 그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부한다.

졸라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884년 2월, 프랑스 북부 안쟁(Anzin) 광산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자 졸라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6개월 동안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마시는 탁한 공기와 그들이 먹는 딱딱한 빵의 질감을 직접 체험했다.

졸라는 광산 갱도 깊숙이 내려가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자세, 석탄 가루가 폐에 쌓여 발생하는 규폐증의 증상, 그리고 광산촌 특유의 은어를 꼼꼼히 수첩에 기록했다. 그는 광산 경영 보고서, 임금 체계, 당시의 경제 상황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섭취했다. 이는 소설 속에서 단순히 "가난하다"는 묘사가 아니라, "몇 상팀의 임금이 깎여서 몇 그램의 빵을 사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밀한 수치로 치환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아들인 에티엔 라티에다. 실직 후 일자리를 찾아 북부 광산촌인 '몽수'에 도착한 에티엔은 거대한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보수' 광산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외 가족을 만난다. 할아버지부터 어린 손자까지 대대로 광산에 몸을 바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어가는 빚과 굶주림뿐인 가족이다. 졸라는 여기서 '유전적 요인'(에티엔의 알코올 중독 및 폭력적 성향)과 '환경적 요인'(광산이라는 폐쇄적이고 가혹한 노동 환경)이 어떻게 한 개인과 집단을 파멸로 이끄는지 실험한다.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편법을 동원해 임금을 삭감하자, 에티엔의 선동으로 광부들은 파업에 돌입한다. 처 처음에는 정당한 요구로 시작된 파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굶주림과 분노에 잠식되어 광기로 변해간다. 군대의 발포로 마외가 죽고,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비극 속에서 광산은 서서히 피로 물든다.

졸라는 『제르미날』에서 비유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 기반은 철저히 생리적인 사실에 둔다.

소설 내내 광산은 인간의 살점을 씹어 삼키고 석탄을 뱉어내는 거대한 괴물로 묘사된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노동자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다.

파업 중 벌어지는 광부들의 폭동 장면은 졸라가 가장 공을 들인 대목 중 하나다. 굶주림에 미친 여성들이 자신들을 착취하던 상점 주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 등은 당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졸라는 이를 '도덕적 판단'이 아닌,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동물의 '생존 본능'으로 묘사했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사회주의적 조류가 충돌한다.

에티엔 라티에는 초기 사회주의자로,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내면의 폭력성과 리더로서의 허영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러사뇌르는 온건파 노동 운동가로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하지만 격앙된 군중에게 외면받는다.

수바린은 러시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그는 체제의 수정을 믿지 않는다. 오직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無)로 돌려놓아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으며, 결국 광산을 파괴하여 수많은 광부를 수장시킨다.

이들의 대립은 당시 유럽을 휩쓸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소설이라는 캔버스에 정확히 옮겨놓은 것이다.

광산 사고로 연인 카트린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에티엔은 다시 파리로 떠난다. 하지만 그의 발밑, 즉 땅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광부들의 곡괭이질 소리가 들려온다. 졸라는 이를 "복수의 군대가 땅속에서 자라나고 있으며, 머지않아 대지를 뚫고 싹을 틔울 것"이라고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력에서 7월을 뜻하는 '제르미날'(Germinal)은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록 파업은 실패했고 수많은 이가 희생되었지만, 노동자들의 각성이 미래의 혁명을 위한 씨앗이 되었음을 시사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제르미날』은 출간 직후 엄청난 논란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수 평단은 "노동 계급을 짐승처럼 묘사했다"며 분노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며 환호했다.

1902년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뒤따르던 광부들은 "제르미날! 제르미날!"을 연호했다. 이는 한 작가의 허구가 현실의 계급 투쟁에 얼마나 깊은 영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오늘날에도 노동 환경의 열악함이나 자본의 폭주를 다룰 때 『제르미날』은 항상 인용되는 '교과서'와 같은 존재다. 한국 문학에서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노동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졸라가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공상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대의 고름을 짜내기 위해 기꺼이 오물 속으로 뛰어든 '지식인'이었음을 증명한다.[11]

2.5.7. 농촌의 민낯, 대지[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 중 제15권에 해당하는 『대지』(1887)는 그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논란이 많았고, 동시에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문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프랑스 중앙부 보스(Beauce) 지방의 가상 마을인 본느를 배경으로, 토지에 결사적으로 집착하는 농민들의 탐욕과 잔혹함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전원생활에 대한 낭만주의적 환상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으며, 인간이 자연과 닮아가는 방식이 결코 숭고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졸라는 『대지』를 집필하기 위해 1886년 5월, 보스 지방을 직접 방문하여 치밀한 취재를 감행했다. 그는 농부들의 말투, 의복, 식습관,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땅을 대하는 태도를 관찰했다. 당시 도시 지식인들에게 농촌은 '순수함'과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졸라가 목격한 현실은 달랐다. 농민들에게 땅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뺏고 빼앗겨야 하는 처절한 전장이었다.

그는 수첩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농부는 땅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연인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방식 혹은 자신을 먹여 살리는 젖줄을 놓지 않으려는 굶주린 짐승의 방식이다." 이러한 시각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결정론적 자연주의'의 핵심이 된다.

소설의 중심축은 늙은 농부 '푸앙(Fouan)'과 그의 세 자녀 사이의 갈등이다. 기력이 다한 푸앙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누어주는 대신 매달 연금을 받기로 계약한다. 이는 리어왕의 비극을 농촌 버전으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을 띠지만, 그 결말은 훨씬 더 추잡하고 비참하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경제적 손실'로 간주하며 학대하기 시작한다. 장남 '이델(Hyacinthe)'은 방탕하고, 차남 '베르나르(Bouteau)'는 탐욕스러우며, 딸 '파니'는 냉혹하다. 이들은 아버지를 굶기고 모욕하며, 결국 막내아들 베르나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우는 참혹한 패륜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외지인 출신의 주인공 '장 마카르(Jean Macquart)'는 이 지옥 같은 마을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결국 토박이들의 배타성과 땅을 둘러싼 광기 어린 투쟁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마을을 떠난다. 졸라는 장의 시선을 통해 농촌 공동체의 폐쇄성과 잔인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대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테마는 바로 '땅' 그 자체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땅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피와 땀, 그리고 배설물을 먹고 자라는 괴물처럼 묘사된다.

졸라는 대지의 비옥함과 인간의 성적 본능을 동일 선상에 놓았다. 씨를 뿌리는 행위와 성행위는 소설 속에서 매우 노골적이고 거친 비유를 통해 연결된다.[12]

보스 지방의 평야는 끝없이 넓고 단조롭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농민들을 근시안적이고 고립된 존재로 만든다. 그들에게 세상의 전부는 발밑의 흙 한 줌이며, 이를 위해 형제도 부모도 버릴 수 있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대지』가 발표되자 프랑스 문단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졸라의 제자를 자처했던 젊은 작가 5인(폴 보네탱,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등)이 일간지 『르 피가로』에 소위 '5인의 선언'을 발표하며 스승을 공개 비판했다. 이들은 졸라가 "지나치게 저질스러운 소재에 탐닉하며, 인간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묘사하여 자연주의를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논란은 소설의 판매량을 폭증시켰다. 졸라는 비판에 굴하지 않고 반박했다. "나는 진실을 썼을 뿐이다. 농촌의 현실이 추하다면, 그것은 나의 문체가 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추한 것이다." 그는 도덕적 잣대가 아닌 과학적 관찰자의 태도를 견지하려 노력했다.

졸라는 이 소설에서 냄새와 촉각을 극대화한 묘사를 사용한다. 가축의 분뇨 냄새, 썩어가는 시신의 악취, 뙤약볕 아래서 풍기는 인간의 체취는 독자로 하여금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불쾌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암소의 출산을 돕는 장면이나 폭풍우 속에서 수확물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인간이 대자연의 일부로서 얼마나 보잘것없고 본능적인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졸라에게 문학은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이 자라기 위해 뿌리가 내리고 있는 검고 축축한 흙속의 벌레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모든 범죄와 탐욕이 휘몰아친 뒤에도 대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땅을 차지하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대지의 비료가 될 뿐이다.

졸라는 『대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신성한 선물인가, 아니면 당신의 탐욕을 시험하는 거대한 무덤인가?" 이 작품은 19세기 농촌의 기록을 넘어, 인간 본연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서늘한 해부도로서 문학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2.5.8. 예술과 파멸, 작품[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14권인 『작품』(1886)은 에밀 졸라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고통스럽고도 사적인 기록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파리의 예술계를 배경으로 한 화가의 몰락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졸라 자신의 예술론, 창작의 고통, 그리고 평생의 벗이었던 폴 세잔과의 비극적인 결별이 얽혀 있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듯 답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로드 란티에는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아들이자, 『나나』의 주인공 나나의 오빠이다. 졸라는 총서의 설계도에 따라 클로드에게 '예술적 천재성'과 '신경증적 광기'라는 위험한 유전을 부여했다.

클로드는 전통적인 관념의 미(美)를 거부하고, 살아있는 진실을 캔버스에 담고자 분투한다. 그는 당시 보수적인 살롱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자연의 빛과 찰나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에게 예술은 구원이 아니라 서서히 영혼을 갉아먹는 질병이었다.

클로드는 머릿속에 존재하는 완벽한 이상을 현실의 캔버스에 구현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수차례 찢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점차 정신적 파멸로 치닫는다.

모델이자 아내, 크리스틴은 클로드의 예술적 영감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족쇄가 된다. 클로드는 살아있는 아내보다 캔버스 속의 여인(그림)을 더 사랑하게 되고, 이는 가정의 붕괴로 이어진다.

졸라는 이 소설에서 1860년대 파리 예술계를 정밀하게 복원해냈다. 특히 1863년의 '낙선전' 묘사는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다.

클로드의 작품 『야외』는 마네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모델로 한다.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이 이 파격적인 작품 앞에서 조롱과 야유를 퍼붓던 상황을 졸라는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설 속 '야외파' 화가들은 실제 인상주의자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졸라는 자신이 비평가로서 옹호했던 예술적 혁명이 대중의 무지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해부했다.

소설에는 클로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가인 '산도즈'가 등장한다. 그는 명백히 에밀 졸라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산도즈는 거대한 소설 총서를 기획하며 밤낮없이 집필에 매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여기서 졸라는 작가로서 느끼는 창작의 공포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글을 쓴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매일 아침 빈 종이 앞에 앉아 내 머릿속의 유령들을 끄집어내야 하지. 이건 일종의 분만 통증이야."

산도즈의 입을 빌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이 지향하는 '진실의 기록'이 얼마나 가혹한 노동인지를 역설한다. 클로드가 그림에 먹혀 죽어갔다면, 산도즈(졸라)는 글을 써서 자신을 증명함으로써 간신히 생존해나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13]

『작품』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슬픈 결별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졸라는 클로드 란티에를 형상화하면서 많은 부분을 소꿉친구 폴 세잔에게서 따왔다.

세잔은 소설 속 클로드가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자살하는 '실패한 천재'로 묘사된 것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던 졸라가 자신을 '미완의 광기 어린 패배자'로 규정했다고 느꼈다.

소설을 읽은 세잔은 졸라에게 짧고 냉담한 감사 편지를 보낸 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30년 넘게 이어온 '엑상프로방스의 우정'은 이 소설 한 권으로 인해 영원히 단절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졸라는 세잔을 비하하려던 것이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가 겪는 보편적인 비극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예술가였던 세잔에게 소설 속 허구는 너무나 아픈 진실의 왜곡으로 다가왔다.

소설의 결말에서 클로드는 자신의 거대한 미완성 역작 앞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그가 평생을 바쳐 그리고자 했던 '진실된 여인'은 결국 괴물 같은 색채의 덩어리로 남았고, 그는 그 실패를 견디지 못했다.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19세기 말 프랑스 예술계가 직면했던 '재현의 위기'를 상징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자연주의적 시도가 극단에 다다랐을 때, 예술가는 결국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은 출간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창작 과정의 심리학을 이토록 처절하게 다룬 작품은 드물다. 후대 예술가들에게 이 소설은 창작의 바이블이자 경고장으로 읽혔다. 파리의 풍경 묘사에서 졸라는 세느강의 변화무쌍한 빛과 파리의 지붕들을 인상주의 화가의 붓질처럼 문장으로 묘사해냈다. 이는 문학이 회화의 영역을 어디까지 침범할 수 있는지 보여준 실험이었다. 자연주의의 수장인 졸라가, 자연주의적 관찰에 집착하다 파멸하는 주인공을 그렸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졸라가 자신의 방법론이 가진 한계와 위험성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졸라는 이 소설을 마친 후 극심한 우울감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친구를 잃고, 자신의 내면을 너무 많이 노출한 대가였다. 하지만 『작품』은 오늘날 졸라의 20권 총서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고뇌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2.5.9. 전쟁의 참상, 파멸[편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제19권인 『파멸』(1892)은 에밀 졸라가 평생을 바쳐 기록해 온 '제2제정'이라는 거대한 바벨탑이 어떻게 스스로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총서의 실질적인 종착역이자, 근대 전쟁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 졸라는 단순히 한 가족의 유전적 결함을 넘어, 프랑스라는 국가 전체가 앓고 있던 '도덕적 부패'와 '군사적 무능'이라는 암세포가 어떻게 파국을 불러왔는지를 뼈저리게 해부한다.

졸라는 『파멸』을 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수행했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겪었던 치욕적인 패배와 세당 전투, 그리고 파리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파리 코뮌의 비극은 프랑스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졸라는 이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위해 직접 격전지를 방문하고, 생존 군인들의 증언을 수집했으며, 당시의 군사 작전 지도를 샅샅이 분석했다.

그는 전쟁을 미화하는 기존의 낭만주의적 전쟁 소설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승리의 환호성이나 영웅적 기개 대신,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병사들, 지휘부의 무능으로 갈팡질팡하다 학살당하는 보병들, 그리고 전쟁의 화마 속에서 불타버린 농가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이는 졸라 특유의 '실험 소설' 기법이 국가적 재난이라는 거대 담론에 적용된 결과였다.

소설은 대조적인 두 인물의 우정을 축으로 전개된다.

장 마카르(Jean Macquart)은 『대지』에서 농부로 등장했던 인물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내심 강한 전형적인 민중의 상징이다. 그는 유전적으로 건강하며, 비록 무식할지언정 대지의 생명력과 상식적인 도덕관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모리스 르바쇠르(Maurice Levasseur)은 지식인 계층을 대변하며, 신경질적이고 감상적이며 쉽게 선동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제국주의적 영광에 잠시 도취되었다가, 패배 직후 급격한 허무주의와 혁명적 광기에 휩싸인다.

이 두 사람의 동행은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건강한 노동력'과 '병든 지성'의 결합을 상징한다. 전쟁 초기, 장은 무질서한 퇴각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만, 모리스는 정신적인 붕괴를 겪으며 프랑스의 몰락을 예견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세당의 참혹한 포화 속에서 깊어지지만, 결국 파리 코뮌이라는 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소설의 전반부를 장악하는 것은 세당(Sedan)에서의 패배다. 졸라는 여기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지휘 체계의 혼선과 전략의 부재로 인해 프랑스군이 어떻게 독일(프로이센)군의 포위망 속에 갇혀 '도살'당했는지를 소름 끼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특히 전장의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야전 병원의 풍경은 자연주의 묘사의 극치다. 마취제도 없이 다리를 절단당하는 병사들의 비명, 썩어가는 시체들이 내뿜는 악취, 그리고 그 모든 비극 위로 무심히 내리쬐는 햇살의 대비는 독자들로 하여금 전쟁의 본질이 '영광'이 아닌 '도살'임을 깨닫게 한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이 소설에서 병들고 무기력한 노인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군대가 궤멸되는 와중에 화장을 하고 마차를 탄 채 방황하는 그의 모습은, 화려한 겉치레만 남고 속은 텅 비어버린 제2제정 프랑스의 자화상이었다. 결국 황제의 항복과 함께 수만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면서, 졸라가 총서 내내 그려왔던 탐욕의 시대는 '파멸'이라는 이름으로 막을 내린다.

소설의 후반부는 장소를 옮겨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파리로 향한다. 기아와 추위에 지친 파리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에 분노하며 코뮌(Commune)을 결성한다. 모리스는 이 혁명의 불길에 몸을 던지며 파괴를 통한 정화를 꿈꾸지만, 군대로 복귀한 장은 질서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코뮌 진압군으로 파리에 입성한다.

졸라는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벌어진 '피의 일주일'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불타는 튈르리 궁전과 시청사, 그리고 골목마다 쌓인 시체들 사이에서 장과 모리스는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장은 자신이 찌른 상대가 친구 모리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총검을 휘두른다.

죽어가는 모리스를 품에 안은 장의 오열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일부를 죽여야만 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은 국가적 재생을 위한 뼈아픈 희생을 의미했다. 모리스가 상징하는 '병든 과거'가 죽고, 장이 상징하는 '인내하는 미래'가 남는 이 결말은 졸라가 프랑스에 던지는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파멸』은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퇴역 군인들은 졸라의 묘사가 당시의 혼란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보급 문제로 인해 병사들이 말의 가죽을 씹어 먹거나 진흙탕 물을 마시는 장면 등은 단순한 픽션을 넘어선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보수적인 군부와 애국주의자들은 졸라가 프랑스군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맹비난했다. 그들은 졸라가 패배의 원인을 군 내부의 부패와 무능에서 찾은 것에 분노했다.

졸라는 코뮌의 이상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폭력적 광기에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코뮌을 "위대한 환각"으로 묘사하며, 사회적 변혁은 피의 보복이 아닌 이성과 진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졸라에게 있어 1870년의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전적으로 오염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이 상징하는 시대적 병폐가 임계점에 도달해 폭발한 사건이었다. 『파멸』은 그 폭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프랑스가 태동하기 위한 필연적인 '진통'을 다룬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 마카르는 불타는 파리를 뒤로하고 다시 대지로 돌아간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하는 농부의 숙명처럼, 프랑스 역시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암시였다. 이 소설은 『루공 마카르 총서』의 방대한 서사를 마무리 짓는 웅장한 진혼곡이자, 드레퓌스 사건에서 그가 보여줄 '행동하는 지성'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14]

2.5.10. 총서의 마침표, 파스칼 박사[편집]

1893년, 에밀 졸라는 무려 22년에 걸친 거대한 문학적 대장정인 『루공 마카르 총서』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제20권 『파스칼 박사』는 단순한 시리즈의 결말을 넘어, 졸라가 평생을 바쳐 탐구해온 '유전과 환경'이라는 거대한 실험의 최종 보고서이자, 작가 자신의 철학적 유언장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의 피가 어떻게 섞이고 변질되어 왔는지를 총정리하며, 죽음과 몰락의 서사였던 총서를 '생명과 희망'의 찬가로 반전시키며 마무리한다.

소설의 주인공 파스칼 루공은 루공 가문의 시조인 피에르 루공과 펠리시테 푸크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눈이 먼 형 외젠 루공이나, 황금에 미친 동생 아리스티드 사카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는 남부 프랑스의 플라상(Plassans)에서 은둔하며 평생을 의학 연구와 가계도 분석에 바친 과학자다.

파스칼의 서재에는 거대한 수납장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루공-마카르 가문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상세한 관찰 기록과 병력, 유전적 특징이 담긴 파일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대신, 실험실의 표본처럼 분석한다. 이는 작가 에밀 졸라 본인이 소설을 집필하며 견지했던 '박물학자적 태도'를 투영한 것이다.

파스칼은 가문의 피에 흐르는 '정신병', '알코올 의존', '탐욕' 등의 형질이 세대를 거치며 어떻게 발현되는지 추적한다. 그는 인간이 유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나 '회복력'에 주목한다.

『파스칼 박사』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파스칼과 그의 조카딸인 클로틸드 사이의 관계다. 클로틸드는 사카르의 딸로, 어린 시절부터 숙부인 파스칼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50대의 과학자와 20대의 조카딸 사이에서 피어나는 이 감정은 당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졸라는 이를 단순한 근친상간이나 외설로 그리지 않는다.

초기 클로틸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설정되어, 신의 섭리를 거스르고 인간의 운명을 해부하려는 숙부 파스칼과 격렬하게 대립한다. 그녀는 파스칼의 연구 기록을 '가문의 수치'라 여기며 불태우려 한다.

그러나 파스칼이 보여주는 진실의 힘과 그의 고결한 인격에 감화된 클로틸드는 점차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루공-마카르라는 오염된 가계의 끝에서, 가장 순수하고 건강한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설정은 졸라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다.

가문의 수장인 노모 펠리시테 루공은 이 소설에서 악역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는 루공 가문이 이룩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치부가 담긴 파스칼의 기록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파스칼이 심장병으로 쓰러져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펠리시테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서재의 수납장을 먼저 뒤진다. 그녀는 가문의 추악한 역사가 담긴 종이 뭉치들을 벽난로 속에 던져 넣으며 광기 어린 희열을 느낀다. 이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기득권과 보수적인 사회 세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펠리시테가 모든 종이를 태울 수는 없었다. 클로틸드가 지켜낸 일부 기록과, 그녀의 품 안에서 자라는 아이 자체가 바로 지울 수 없는 진실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졸라의 개인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0대에 접어든 졸라는 아내 알렉상드린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젊은 하녀였던 잔 로즈로(Jeanne Rozerot)와 사랑에 빠져 두 아이를 얻게 된다.

『파스칼 박사』에서 파스칼이 클로틸드를 통해 느끼는 노년의 환희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실제 졸라가 잔 로즈로를 통해 얻은 경험의 문학적 승화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도덕해 보일 수 있는 사생활을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정당화하고 축복받고자 했다.

『파스칼 박사』의 마지막 문장은 클로틸드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20권 내내 이어졌던 살인, 강간, 탐욕, 질병의 연대기를 뒤로하고 나타난 찬란한 일출과도 같다.

졸라가 20권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유전은 운명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조상의 형질을 물려받지만, 생명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고 새로워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고통은 진보의 과정이다: 루공-마카르 가문의 비극적인 멸망은 낡은 시대(제2제정)의 종말을 의미하며,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세대(제3공화국)가 피어난다.
  • 노동과 생산의 가치: 파스칼의 연구와 클로틸드의 출산은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행위'다. 졸라는 허무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의 노력이 결국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견지하며 붓을 놓는다.

이로써 에밀 졸라는 19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문학적 피라미드를 완공했다. 『파스칼 박사』는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놓인 '캡스톤'이며, 자연주의 문학이 단순히 인간의 추악함을 들춰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애라는 거대한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한 명작이다.

2.6. 세 도시 총서[편집]

졸라의 문학 여정에서 『루공 마카르 총서』가 유전과 환경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집중한 거대한 실험실이었다면, 그 직후 집필된 『세 도시 총서』(Les Trois Villes)는 작가의 시선이 '가족'이라는 단위를 넘어 '인류의 정신적 지주와 미래의 대안'이라는 거시적 담론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1894년부터 1898년에 걸쳐 발표된 『루르드』(Lourdes), 『로마』(Rome), 『파리』(Paris) 세 권의 소설은 주인공 피에르 프로망(Pierre Froment) 신부의 고뇌와 순례를 통해 당대 가톨릭교회의 한계와 근대 과학 문명의 충돌을 정면으로 다룬다.

『루공 마카르 총서』를 완결한 졸라는 당대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또 다른 거대한 축인 '종교'를 해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가톨릭적 전통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졸라는 신의 기적이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혹은 종교가 가난한 민중의 고통을 진정으로 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이 연작을 통해 "과거의 종교(루르드), 현재의 종교(로마), 그리고 미래의 종교(파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주인공 피에르 신부는 신앙의 위기를 겪으며 진실을 찾아 떠나는 현대판 순례자의 표상으로 설정되었다.

졸라는 『루르드』를 쓰기 위해 직접 루르드 성지를 방문하여 꼼꼼한 취재를 감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목격한 광경을 소설가라기보다는 의사나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기록했다.

소설 속에서 졸라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로 알려진 루르드에 모여드는 수만 명의 병자와 순례자들을 묘사한다. 그는 '기적에 의한 치유'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집단적인 암시와 심리적 흥분에 의한 일시적인 증상 완화(생리학적 현상)라고 분석했다.

졸라는 성스러운 장소가 어떻게 거대한 비즈니스 모델로 변모했는지 고발한다. 성수 판매, 숙박업, 기념품 등 종교가 고통받는 이들의 절망을 담보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기적을 목격하여 자신의 흔들리는 신앙을 다잡으려 했던 피에르 신부는, 오히려 그곳에서 종교의 기만과 군중의 맹목적인 광기를 목격하며 더욱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가톨릭 교단의 거센 반발을 샀고, 결국 교황청에 의해 금서(Index Librorum Prohibitorum)로 지정되는 불명예이자 영광을 안게 된다.[15]

루르드에서 실망한 피에르 신부는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로 향한다. 그는 자신이 쓴 책 '새로운 기독교'를 옹호하고, 교황 레오 13세를 직접 알현하여 교회가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한다.

졸라는 로마의 화려한 예술적 유산 뒤에 숨겨진 부패한 종교 권력과 경직된 관료주의를 날카롭게 묘사한다. 교황청은 진보적인 사회 개혁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교리를 수호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소설 속 로마는 웅장한 고대 유적과 쇠락해가는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졸라는 로마를 '과거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죽은 도시'로 규정한다.

피에르 신부는 마침내 교황을 만나지만, 교황은 그의 이상주의를 차갑게 거절한다. 여기서 피에르는 가톨릭교회가 인류를 구원할 생명력을 상실했음을 깨닫고, 사제복을 벗지는 못할망정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교회를 떠나게 된다.

졸라는 이 책을 위해 로마에 머물며 지형과 풍습을 연구했는데, 그의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당시 이탈리아 비평가들조차 "졸라가 로마의 영혼을 훔쳐갔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시리즈의 결말인 『파리』는 종교적 순례를 마친 피에르가 세속의 도시 파리로 돌아와 겪는 일을 다룬다. 이 작품은 졸라의 사상이 종교적 초월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인도주의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파리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와 노동 운동이 격화되던 혼란의 도가니였다. 피에르의 형 기욤(Guillaume)은 강력한 폭발물을 발명한 과학자이자 혁명가로 등장하여 피에르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소설의 절정은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폭파하려는 계획이다. 이는 낡은 질서(종교)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과학과 이성)를 열겠다는 상징적인 시도였으나, 피에르의 만류로 무산된다.

졸라는 파리를 '지성이 꿈틀거리는 용광로'로 묘사한다. 결말에서 피에르는 사제직을 완전히 버리고 가정을 꾸리며,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동력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과학적 진보'에 있음을 선언한다.

이 연작은 단순히 종교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졸라는 이 작품들을 통해 세기말(Fin de siècle) 유럽이 겪고 있던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정리하고자 했다.

주인공 피에르 신부는 훗날 드레퓌스 사건에서 졸라가 보여준 '행동하는 지식인'의 원형이 된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으로 떠나고, 기득권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수정할 줄 아는 용기가 소설 전반을 관통한다.

유전학적 관찰에 머물던 자연주의가 사회적, 종교적 구조 분석으로 확장되었다. 졸라는 종교 또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환경'의 일부로 간주하고 이를 해부했다.

비극적 결말이 많았던 『루공 마카르 총서』와 달리, 『세 도시 총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이는 졸라의 후기작인 『네 복음서 총서』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이 시기 졸라는 가톨릭 단체로부터 수많은 협박 편지를 받았으며, 그의 집 앞에서는 그의 책을 불태우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졸라는 이 연작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그의 유명한 별장인 '메당'의 유지비를 충당할 수 있었을 만큼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루르드』는 당시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을 휩쓸며 "가장 논쟁적인 소설"로 등극했다.

졸라에게 있어 『세 도시 총서』는 신이라는 허상을 지우고 그 자리에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채워 넣는 거대한 '정신적 청소'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그는 운명적으로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거대한 실천적 현장으로 불려 나가게 된다.

2.7. 드레퓌스 사건의 발발[편집]

1894년 가을, 프랑스 전역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인류사적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이 그 막을 올렸다. 에밀 졸라의 생애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사회 참여를 넘어, 그가 평생을 바쳐 구축해온 '진실과 정의'라는 문학적 신념을 현실 세계에서 직접 증명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프랑스 정보국(통계과)의 여성 청소부[16] 마리 바스티앙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한 통의 편지였다. 이 편지는 '명세서(bordereau)'라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프랑스의 신형 포병 장비와 관련된 기밀 정보가 독일 측에 넘겨졌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 군부는 발칵 뒤집혔다. 보불전쟁의 패배 이후 독일(프로이센)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과 복수심(Ranchisme)이 팽배해 있던 군 상층부는 반드시 내부의 배신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인물이 바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대위였다.

드레퓌스가 용의자로 지목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는 에두아르 드뤼몽 같은 선동가들이 퍼뜨린 반유대주의 정서가 극에 달해 있었다. "유대인은 조국이 없으며, 오직 돈을 위해 프랑스를 배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편견이 군부 내에 만연했다.

드레퓌스는 독일에게 빼앗긴 알자스 출신의 부유한 유대인 가문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는 매우 애국적인 군인이었으나, 동료들 사이에서는 차갑고 거만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군부는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와 유사하다는 억지 결론을 내렸다. 전문가들의 반대 의견은 묵살되었고, 오직 군의 명예와 반유대주의적 광기만이 수사를 주도했다.

졸라는 훗날 이 과정을 지켜보며 "이것은 사법의 실수가 아니라, 사법의 범죄"라고 규정했다. 과학적 실증주의를 신봉하던 졸라에게, 명확한 증거 없이 인종적 편견만으로 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악(惡)이었다.

1894년 12월, 드레퓌스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피고인과 변호인조차 보지 못한 '비밀 서류함'이 재판관들에게 전달되는 등 법적 절차는 무시되었다. 결국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종신형과 함께 군적 박탈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게 된다.

1895년 1월 5일, 에콜 밀리테르 광장에서 거행된 군적 박탈식은 잔인했다. 드레퓌스의 계급장이 찢기고 칼이 꺾이는 순간, 구경하던 군중은 "유대인을 죽여라!"라고 울부짖었다. 드레퓌스는 남미 인근의 생지옥이라 불리는 악마섬(Île du Diable)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고립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사건이 묻힐 뻔했던 1896년, 새로운 정보국장으로 부임한 조르주 피카르(Georges Picquart) 중령이 우연히 또 다른 서류(petit bleu)를 발견하며 반전이 일어난다. 이 서류의 필적은 명세서와 완벽히 일치했으나, 주체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도박 빚에 시달리던 페르디낭 발쟁 에스테라지(Ferdinand Walsin Esterhazy) 소령이었다.

피카르는 상부에 보고했으나, 군 수뇌부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은폐를 택했다. 그들은 피카르를 좌천시키고 에스테라지를 보호하는 악수를 두었다. 이 시기 졸라는 외부에서 이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접하며 점차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사실 졸라는 초기에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피카르의 발견과 스헤레르 케스트너 같은 정치인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그는 이 사건이 단순히 한 군인의 억울함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 전체의 가치관이 걸린 싸움임을 직감했다.

당시 졸라는 『루공 마카르 총서』를 끝내고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굳이 이 위험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친구들은 만류했다.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냐"는 경고도 쏟아졌다. 하지만 졸라에게 '진실'은 문학 속의 수사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목표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쓸 것이다." 졸라가 펜을 들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드는 '폭탄'을 투척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1897년 말 파리 전역을 감싸고 있었다.

2.8. 나는 고발한다(J'accuse...!)"[편집]

1898년 1월 13일, 프랑스의 조간신문 『로로르』(L'Aurore)의 1면은 인류 문학사와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일격으로 기록될 문장으로 도배되었다. 에밀 졸라가 당시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바로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등장이었다. 이 챕터는 안락한 대문호의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간 졸라의 생애 가장 찬란하고도 위험했던 순간을 다룬다.

사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초기부터 깊이 관여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루공 마카르 총서』를 완간하고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은, 소위 '주류 중의 주류'였다. 그러나 1897년 말, 상원의 부의장 셰러 케스트너를 통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작가적 양심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졸라는 처음에는 온건한 방식으로 여론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르 피가로』에 몇 편의 기고문을 올리며 "진실이 전진하고 있다"고 역설했으나, 신문사는 독자들의 항의와 광고주들의 압박에 굴복해 졸라의 글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졸라는 더 이상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진짜 범인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군사법원에서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졸라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로로르』지의 편집장 조르주 클레망소[17]와 협력하여 대통령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작성했다.

원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나, 클레망소의 제안으로 "나는 고발한다!"라는 도발적인 헤드라인이 붙었다. 이 글은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었다. 졸라는 특유의 치밀한 분석력을 동원하여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고, 군부의 고위 장성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그들이 어떻게 증거를 조작하고 사법 정의를 유린했는지 조목조목 비판했다.

졸라는 빌 뒤 파티 드 클람 중령, 메르시에 국방장관, 비용 장군 등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이는 명백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며, 졸라는 이를 통해 자신이 재판정에 서기를 자처했다. 군사법원이 은폐한 진실을 민사법원의 공개 재판으로 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 글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평소 3만 부 정도 발행되던 『로로르』지는 그날 하루에만 3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파리 시내는 글자 그대로 뒤집어졌다. 거리 곳곳에서는 "졸라를 죽여라!"라고 외치는 반드레퓌스파(Antidreyfusards)와 "진실을 밝혀라!"라고 맞서는 드레퓌스파(Dreyfusards)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글이 단순한 고발장을 넘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프랑스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리는 광기 어린 인종차별에 제동을 걸었다. "군대의 명예"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했다.

졸라는 글 쓰는 자가 사회적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몸소 증명했다.

졸라는 이 글의 결말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이 고발은 사법 절차를 가속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나는 법을 어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는 매우 영리한 법적 장치였다. 군부는 드레퓌스 사건 자체를 '기판력(이미 판결이 난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심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졸라가 군 고위직을 실명으로 비방한 이상 그를 명예훼손으로 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라를 재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증거들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졸라는 바로 이 지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졸라는 즉시 군부와 우익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그가 쌓아온 문학적 명성은 "이탈리아계 혈통을 가진 배신자"라는 낙인 아래 난도질당했다. 그의 집에는 매일같이 협박 편지와 오물이 배달되었고, 한때 그를 찬양하던 친구들조차 등을 돌렸다. 하지만 졸라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팡테옹에 묻힐 명예보다, 단 한 명의 무고한 인간을 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고발한다!>는 내용 면에서도 졸라의 문학적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그는 사실(Fact)을 나열하면서도 서사적 긴장감을 잃지 않았으며, 반복적인 문구("나는 고발한다")를 사용해 리듬감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후대 정치적 팸플릿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권력에 맞서는 언론의 상징으로 추구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졸라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그는 더 이상 서재에 앉아 유전과 환경을 연구하는 박물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진실이라는 깃발을 들고 광장에 선 투사였으며, 그의 펜은 어떤 칼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제3공화국의 근간을 흔들었다.

졸라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은 결국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졸라의 뒤를 이어 연명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의 시초이자, '지식인(Intellectual)'이라는 단어가 명사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 순간이었다.

2.9. 재판과 망명[편집]

졸라의 고발장이 공개되자마자 프랑스 정부와 군부는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졸라를 '군부 모독' 및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이는 사실 졸라가 의도한 바였다. 밀실에서 이뤄지는 군법회의와 달리, 민사 법정에서의 재판은 사건의 실체를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1898년 2월 7일, 파리 중죄 재판소에서 열린 제1차 재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법정 밖에는 "유대인에게 죽음을!", "졸라를 죽여라!"라고 외치는 반드레퓌스파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졸라는 매일 아침 법정에 출석할 때마다 돌팔매질과 욕설을 견뎌야 했다.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장성들은 "국가 기밀"이라는 핑계로 핵심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그들은 훈장을 단 군복을 입고 나타나 배심원들을 위협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군부는 졸라를 압박하기 위해 또 다른 위조 서류를 들이밀며 애국심을 자극했다.

결과는 뻔했다. 2월 23일, 배심원단은 졸라에게 법정 최고형인 징역 1년과 벌금 3,000프랑을 선고했다.

졸라는 판결 직후 항소했으나, 7월에 열린 베르사유 재판에서도 결과는 뒤집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혹한 사회적 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박탈되었고, 그의 집 집기들은 벌금을 내지 못해 압류당할 위기에 처했다.

항소마저 기각되자, 동료들과 변호사 페르낭 라보리는 졸라에게 망명을 권고했다. 감옥에 갇히면 더 이상 글을 통해 싸울 수 없다는 논리였다. 처음에는 "도망치는 것은 비겁하다"며 완강히 거부하던 졸라도, "진실을 위해 싸울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설득에 결국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1898년 7월 18일 밤, 졸라는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홀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아내 알렉상드린에게조차 행선지를 비밀로 한 채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이는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영국에 도착한 졸라는 '파스칼(M. Pascal)'이라는 가명을 쓰며 숨어 지냈다. 대문호로서 누리던 화려한 삶은 온데간데없었고, 런던 근교의 평범한 호텔과 하숙집을 전전하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영어를 전혀 못 했던 그는 런던의 안개 속에서 철저한 고립감을 느꼈다.

망명 생활 중에도 졸라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영국에서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네 복음서 총서』의 두 번째 작품인 『노동』을 집필하는 한편,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을 소설화한 『진실』(Vérité)의 구상을 구체화했다.

졸라는 파리에 남겨진 아내 알렉상드린과 연인 잔 로즈로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두 여성은 졸라가 부재한 사이 그의 재산을 지키고,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리는 전령 역할을 했다. 특히 알렉상드린은 졸라의 집기들이 경매에 부쳐질 때 직접 입찰에 참여해 그의 서재를 지켜내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망명 기간 중 졸라는 프랑스 내 지식인들이 결성한 '인권연맹'의 활동 소식을 들으며 희망을 품었다.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후배 작가들이 그의 용기에 감화되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망명 생활 11개월째 접어들 무렵,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서류를 위조했던 앙리 중령이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고 자살한 것이다. 이로 인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졸라의 1년여에 걸친 망명은 그를 단순히 유명 소설가에서 전 유럽이 주목하는 '도덕적 권위자'로 격상시켰다.

영국 언론들은 졸라를 지지하며 프랑스 군부의 폐쇄성을 비판했다. 이는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문제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졸라는 자신의 명예, 재산, 안락한 삶을 모두 걸고 진실을 택했다. 이는 훗날 장폴 사르트르 등으로 이어지는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 문학의 원형이 되었다.

망명 시절의 고독은 졸라의 후기 작품들에 더욱 깊은 인본주의적 성찰을 부여했다. 초기 자연주의의 냉소는 사라지고, 인류의 진보와 정의에 대한 낙관적인 열망이 그 자리를 채웠다.[18]

졸라의 재판과 망명은 한 개인의 수난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광기 어린 애국주의와 진실 사이의 투쟁이었으며, 결국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거대한 서사시의 절정이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펜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암살 위협과 증오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진실을 밝힌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길고 무거웠다.

1899년 6월 5일, 마침내 프랑스 파기원(Cour de Cassation)은 알프레드 드레퓌스에 대한 1894년의 유죄 판결을 파기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이는 에밀 졸라가 『로로르』(L'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며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투쟁한 지 약 1년 반 만에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영국 런던 근교에서 고독하고도 고통스러운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졸라에게 이 소식은 단순한 승전보를 넘어, '진실은 전진한다'는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재심 결정 소식을 듣자마자 졸라는 짐을 챙겼다. 1899년 6월 4일 밤, 그는 11개월간의 영국 유배 생활을 뒤로하고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자신의 귀환을 알리는 짧은 글을 투고하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늘 파리로 돌아간다. 진실의 승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승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졸라가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열렬한 환호와 여전한 증오가 뒤섞인 혼돈의 도가니였다. 드레퓌스파(Dreyfusards)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그를 '정의의 사도'로 추앙하며 맞이했지만, 반대파인 반드레퓌스파(Anti-Dreyfusards)와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여전히 '조국을 배신한 유대인의 앞잡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졸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개인의 안위보다 더 큰 가치인 '정의'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드레퓌스의 즉각적인 무죄 방면을 예상했으나, 현실은 잔혹했다. 1899년 8월, 브르타뉴 지방의 도시 렌에서 열린 재심 군사법정은 프랑스 군부의 자존심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뒤엉킨 난장판이었다.

이미 에스테라지(Esterhazy)가 진범이라는 증거와 앙리(Henry) 중령의 유서 조작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 수뇌부는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보다 거짓을 고수하는 쪽을 택했다.

9월 9일, 군사법정은 드레퓌스에게 다시 한번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정상을 참작하여' 징역 10년으로 감형한다는 기괴한 판결을 내렸다. "유죄지만 죄가 가볍다"는 이 논리적 모순은 전 세계의 비웃음을 샀다.

졸라는 이 판결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즉시 「여전히 고발한다」는 취지의 논설을 준비하며 군부의 비겁함을 질타했다. 그는 이 판결을 "프랑스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오점"이라고 규정했다. 다행히 당시 대통령 에밀 루베는 국내외의 거센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판결 10일 만에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했다. 드레퓌스는 자유를 얻었지만, 법적인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그로부터 7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졸라의 문학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이전의 졸라가 인간의 추악함과 유전적 한계를 냉철하게 관찰하는 '해부학자'였다면, 사건 이후의 졸라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예언자'이자 '사회 개혁가'로 변모했다.

이 시기 그는 『네 복음서 총서』(Les Quatre Évangiles)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졸라는 이제 단순히 현실을 고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비록 후기작들이 문학적인 세밀함보다는 프로파간다(선전)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는 그만큼 그가 사회 정의 구현에 절박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진실은 승리했으나 졸라가 지불한 대가는 가혹했다.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소송 비용과 벌금으로 날렸으며, 파리의 별장과 가구들이 경매에 붙여지는 수모를 겪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오랜 친구들과의 단절이었다.

『작품』으로 이미 사이가 벌어졌던 폴 세잔은 물론이고, 에드가 드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예술가들조차 반드레퓌스파 혹은 침묵하는 쪽을 선택하며 졸라와 절교했다.[19]

또한 졸라의 집에는 매일같이 협박 편지가 배달되었고, 거리에서는 그를 죽이겠다는 광기 어린 군중의 외침이 들렸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이 무엇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졸라의 귀환과 투쟁을 통해 비로소 지식인은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부조리에 몸을 던져 저항하는 존재로 재정의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가 사면된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잃은 명성이나 재산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프랑스가 이제 진실의 빛 아래에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승리는 훗날 1906년 드레퓌스의 완전한 복권과 명예 회복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었으며, 졸라 자신은 비록 그 최종적인 영광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으나, 그의 이름은 진실을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의 상징이 되었다.

2.10. 네 복음서 총서[편집]

졸라의 말년은 『루공 마카르 총서』의 차가운 결정론과 『세 도시 총서』의 종교적 회의주의를 넘어, 인류가 나아가야 할 거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시기로 접어든다. 그 결정체가 바로 『네 복음서 총서』(Les Quatre Évangiles)다. 이 시리즈는 졸라의 문학적 생애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가장 야심 찬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의 졸라가 사회의 부패와 인간의 추악함을 해부하는 '외과 의사'였다면, 이 시기의 그는 인류의 고통을 치유하고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예언자' 혹은 '설계자'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루공 마카르 총서』를 끝낸 졸라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대신,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며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고, 이는 그의 문학관을 '비극적 관찰'에서 '희망적 실천'으로 급격히 선회하게 만들었다.

이 총서는 성경의 사복음서를 본떠 인류를 구원할 네 가지 핵심 가치를 제시한다.
  • 풍요(Fécondité): 인구 문제와 가족의 재생산.
  • 노동(Travail): 산업 사회의 모순 해결과 사회주의적 공동체.
  • 진실(Vérité): 드레퓌스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와 교육의 중요성.
  • 정의(Justice): 전 인류의 형제애와 평화 (졸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

졸라는 이 시리즈를 통해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종교, 즉 '인류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는 더 이상 유전의 굴레에 갇힌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사회를 개조하는 능동적인 주체들을 소설 전면에 내세웠다.

첫 번째 복음서인 『풍요』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문제였던 저출산과 인구 감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졸라는 이 작품에서 다산(多産)을 애국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묘사하며, 인위적인 산아제한을 문명의 타락으로 규정했다.

주인공 마티외와 마리안 부부는 도시의 타락을 뒤로하고 농촌으로 내려가 수많은 자녀를 낳고 땅을 개간한다. 그들의 가계는 번성하여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는 반면, 쾌락만을 쫓으며 출산을 거부한 다른 가문들은 비참한 몰락을 맞이한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배 이후 독일의 인구 증가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졸라는 인구 증대를 통해 프랑스의 국력을 회복하고 인류의 생명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여성의 역할을 출산의 도구로 한정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졸라에게 있어 출산은 단순한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죽음에 대항하는 유일한 승리이자 우주적 생명력의 발현이었다.[20]

두 번째 복음서 『노동』은 졸라가 꿈꾼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담고 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퓨리에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으며, 이 소설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해소된 '팔랑스테르'(Phalanstère) 스타일의 공동체를 묘사했다.

소설 속 주인공 뤽 프로망은 부패한 제철소를 인수하여 노동자들이 주인인 협동조합형 공장 '보클레르'를 건설한다. 전기라는 새로운 에너지가 도입되면서 고된 노동은 사라지고, 모든 구성원이 창조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낙원이 그려진다.

졸라는 폭력적인 혁명보다는 교육과 기술 혁신, 그리고 박애 정신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 개조를 믿었다. 그는 노동이 형벌이 아닌 축복이 되는 세상을 예견했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사회적 논문 혹은 거대한 서사시에 가깝다. 묘사는 극도로 상세하며, 미래 사회에 대한 낙관주의가 지면 곳곳에서 뿜어져 나온다.

졸라가 죽기 직전 완성한 『진실』은 그가 몸소 겪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교육 현장으로 옮겨와 재구성한 작품이다.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는 유대인 교사 시몽으로, 군부는 가톨릭 교단과 보수적인 교육계로 치환되었다.

주인공 마크 프로망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동료 교사 시몽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졸라는 종교적 편견과 국가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눈을 가리는지 신랄하게 고발한다.

졸라는 "진실은 오직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만 전파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가톨릭 학교의 폐쇄적인 교육에 맞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였던 졸라가 쓴 만큼 그 절박함과 진정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선악의 구도로 너무 명확히 나뉘어 있어, 초기 자연주의 소설들이 보여주었던 복합적인 인간미는 다소 희석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마지막 권인 『정의』는 구상 단계에서 멈추고 말았다. 졸라는 이 책에서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물고 전 인류가 하나의 형제로서 평화를 유지하는 '세계 연방'의 개념을 다루려 했다. 그는 "군대 없는 세상, 전쟁 없는 미래"를 정의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1902년 9월, 갑작스러운 가스 중독 사고는 이 장대한 마침표를 영원히 앗아가 버렸다.

『네 복음서 총서』는 문학적으로는 『루공 마카르 총서』의 치밀함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너무나 명백한 교훈성과 낙관주의가 소설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19세기 말 지식인이 도달할 수 있었던 휴머니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2.11. 의문의 죽음[편집]

1902년 9월 29일,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거성 에밀 졸라가 파리 루 드 브뤼셀(Rue de Bruxelles) 21번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표면적으로는 굴뚝 결함으로 인한 단순 사고사로 처리되었으나, 그가 드레퓌스 사건의 선봉에 서서 국가 권력과 군부, 그리고 극우 세력과 정면으로 맞섰던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죽음은 즉각적인 음모론과 암살 의혹에 휩싸였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프랑스 근대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미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사건 전날인 9월 28일, 졸라와 그의 아내 알렉상드린은 메당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가을의 초입이었으나 날씨는 꽤 쌀쌀했고, 습기가 많았다. 졸라는 평소 추위에 민감했기에 하인들에게 안방의 벽난로에 불을 지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벽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방 안은 곧 연기로 가득 찼다.

알렉상드린은 가스 냄새와 메스꺼움을 느껴 졸라를 깨웠으나, 졸라는 "단순히 감기 기운이 있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요"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9시경, 부부가 기상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하인들이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졸라는 침대 옆 바닥에 고꾸라진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알렉상드린 역시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나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21]

당시 경찰과 전문가들의 초기 조사 결과는 '굴뚝 청소 불량으로 인한 사고사'였다. 굴뚝 내부에 쌓인 그을음과 석회 가루가 배출구를 막았고, 이로 인해 연기가 실내로 역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파리의 오래된 가옥들에서 이러한 사고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발표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의문점이 존재했다. 사고 직후 실시된 재연 실험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불을 지폈을 때 일산화탄소 농도가 치사량에 도달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도저히 사람이 죽을 정도의 가스가 고일 수 없는 구조"라고 고개를 저었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매일같이 "너를 죽이겠다", "네 집을 불태우겠다"는 협박 편지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길을 걸어갈 때 오물을 던지거나 돌을 던지는 극우파 청년들도 부지기수였다.

졸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반유대주의 언론인 『라 파롤 리브르』(La Parole Libre)는 "사회적 해충이 제거되었다"는 식의 저급한 축전을 보냈다. 이러한 증오의 분위기는 사고사를 암살로 의심케 하기 충분했다.

사건 발생 후 반세기가 지난 1953년,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충격적인 제보를 보도한다. '앙리 부라동'이라는 이름의 전직 굴뚝 청소부가 자신의 친구인 약사에게 죽기 직전 고백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1902년 당시 졸라의 옆집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 중 한 명이 극우 단체인 '애국자 연맹'의 사주를 받아 밤중에 몰래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는 졸라의 집 굴뚝 위에 판자를 덮고 그 위에 기와 조각과 먼지를 쌓아 배출구를 인위적으로 차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인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혼란을 틈타 다시 지붕으로 올라가 판자를 치워 증거를 인멸했다는 것이다.

이 제보는 졸라의 죽음이 단순 사고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테러'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비록 직접적인 법적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했으나, 현재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고백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1902년 10월 5일 거행된 졸라의 장례식은 단순한 영결식을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시위였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제르미날!"(Germinal)을 연호하며 운구 행렬을 따랐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그와 연대했던 지식인들이 총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졸라의 오랜 친구이자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역사에 남을 추도사를 남겼다.
"그는 잠시 동안 인류의 양심이었다(Il fut un moment de la conscience humaine)."

이 문장은 졸라의 생애를 정의하는 가장 완벽한 문구가 되었다. 프랑스는 졸라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 진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모두 건 투사였음을 강조했다. 또한 장례식장 근처에는 혹시 모를 극우파의 습격에 대비해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는데, 이는 죽어서도 졸라가 기득권층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반증한다.

졸라의 유해는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치되었다가, 1908년 프랑스 정부의 결정에 따라 국가 위인들의 안식처인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이 이장식조차 순탄치 않았다. 이장식 도중 한 극우파 기자가 드레퓌스 사건 때 졸라를 도왔던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졸라는 죽어서도 프랑스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죽음은 자연주의 문학의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식인이 사회적 불의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원한 이정표를 남겼다. 그의 사인이 사고였든 암살이었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진실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22]

3. 평가[편집]

당대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와 열광을 동시에 한 몸에 받았던 작가다. 그의 문학적 위상은 생전과 사후,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왔으며, 단순히 '소설가'라는 틀에 가두기에는 그가 근대 지성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나 거대하다.

졸라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프랑스 보수 평단과 가톨릭 교회는 그를 향해 입에 담기 힘든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에게 졸라는 '아름다운 문학'을 '추잡한 생리학 보고서'로 타락시킨 주범이었다.

졸라가 『목로주점』이나 『나나』에서 하층민의 적나라한 언어,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구토, 매춘부의 성적인 묘사를 가감 없이 서술하자 평단은 이를 '분뇨의 문학(Littérature putride)'이라 비하했다. 비평가 레옹 도데는 졸라를 두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배설을 하는 인간"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계층은 졸라의 소설이 청년들의 도덕성을 파괴한다고 믿었다. 특히 『나나』가 출간되었을 때, 상류층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그들의 성적 타락을 생물학적으로 묘사한 것은 지배 계급의 거대한 발작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나 '영혼'이 아닌 '유전'과 '환경'이라는 굴레를 씌운 그의 자연주의 철학은 종교계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인간을 단지 실험실의 해부용 개구리처럼 취급한다는 비판은 그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비난의 폭풍 속에서도 졸라는 현대 소설의 기틀을 닦은 혁신가였다. 오늘날 그가 받는 높은 평가는 그가 문학에 도입한 '방법론적 엄밀함'에서 기인한다.

졸라는 소설을 쓰기 전 반드시 현장을 답사하고 전문가를 인터뷰하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제르미날』을 쓰기 위해 직접 광산 밑바닥까지 내려가 광부들의 삶을 관찰했고, 『파멸』을 위해 보불전쟁의 격전지를 샅샅이 뒤졌다. 이러한 철저한 현장 검증 정신은 훗날 현대의 저널리즘과 르포 문학, 나아가 네오리얼리즘 영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20권의 방대한 시리즈를 통해 한 가문의 5대에 걸친 유전적 흐름과 제2제정기라는 시대 전체를 조망한 기획력은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그는 개별 인물의 삶을 넘어,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어떻게 작동하고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설계자였다.

졸라 이전의 소설들이 주로 주인공 개인의 내면과 연애사에 집중했다면, 졸라는 '군중(Mass)'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제르미날』의 파업하는 노동자 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쇼핑객들, 『파멸』의 패잔병 무리 등, 거대한 집단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묘사하는 데 있어 졸라는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

졸라에 대한 평가는 드레퓌스 사건 전후로 완전히 나뉜다. 그는 글솜씨 좋은 작가에서 '진실을 위해 국가와 맞서는 투사'로 진화했으며, 이는 전 세계 지식인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반유대주의와 군부의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졸라는 자신의 명성과 안락한 삶을 모두 걸고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무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짓밟을 때 지식인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23]

졸라는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폭발적인 힘을 축적하게 되며, 마침내 폭발하는 날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문학적 자연주의가 '현상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이었다면, 드레퓌스 사건에서의 투쟁은 '정치적 진실'을 수호하는 작업이었다. 이 두 영역은 졸라라는 인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졸라가 사망한 후, 그에 대한 평가는 비단 프랑스 내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졸라는 노동자 계급을 단순한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이자 욕망을 가진 생생한 인간으로 묘사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과 노동 운동가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셸 푸코 등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졸라가 묘사한 파리의 도시 구조, 감시 체제, 소비 자본주의의 맹아 등에 주목했다. 그가 단순히 '더러운 것을 묘사한 작가'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어두운 심연을 예민하게 포착한 선지자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1908년, 졸라의 유해가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히는 팡테옹으로 이장된 것은 그에 대한 국가적 평가가 '스캔들 제조기'에서 '공화국의 수호자'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한다.[24]

물론 졸라의 문학에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비판들도 상당하다.

인간의 삶이 오로지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그의 시각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생물학적 숙명론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변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다.

졸라의 작품 속 여성들은 대개 성녀이거나 창녀, 혹은 유전적 결함을 물려받은 히스테리 환자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9세기 가부장적 사회의 시각과 당대의 미성숙한 의학 지식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4. 문학관[편집]

에밀 졸라를 상징하는 단 한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자연주의다. 그는 단순히 소설을 쓰는 작가를 넘어, 문학을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실험실'로 격상시키려 했던 문학 이론가이기도 했다. 졸라가 주창한 자연주의는 당대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실증주의, 결정론, 그리고 생물학적 성과들을 문학이라는 틀 안에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졸라의 문학관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는 1880년에 발표한 이론서『실험 소설론』이다. 여기서 그는 소설가의 역할을 의사나 과학자의 역할과 동일시했다.
"생리학자가 살아 있는 유기체를 연구하듯, 소설가는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연구해야 한다."

졸라는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 연구 서설』에서 영감을 얻어, 의학이 신비주의를 벗어나 과학이 되었듯 문학도 형이상학적인 추측에서 벗어나 실험적 분석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소설이란 작가가 임의로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특정 조건을 부여받은 인물(피실험자)이 유전적 형질과 환경이라는 변수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파멸해가는지를 관찰하는 기록지였다.

졸라 이전의 사실주의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면, 졸라의 자연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라는 인과관계에 집착했다. 그는 소설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 관찰(Observation): 작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상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한다.
  • 실험(Experiment): 관찰한 사실들을 토대로 인물들을 특정 상황(소설의 설정)에 던져 넣은 뒤, 그들이 자연 법칙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주관적 감정이나 도덕적 판단은 배제되어야 한다. 졸라는 소설가가 작품 속에서 설교하거나 독자에게 교훈을 주려 하는 행위를 지극히 혐오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진실'이었으며, 그 진실이 아무리 추악하고 냄새나는 오물 덩어리일지라도 과학자의 눈으로 냉철하게 기술해야 한다고 믿었다.

졸라의 자연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유전(Hérédité)과 환경(Milieu)이다. 이는 당시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이폴리트 텐의 결정론적 비평 철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졸라는 인간의 성격, 지능, 심지어 범죄적 충동이나 알코올 중독까지도 혈통을 통해 대물림된다고 보았다. 『루공 마카르 총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테마가 바로 '한 가족 속에 흐르는 유전적 결함'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경적 장애나 피의 갈망은 인물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며, 졸라는 이를 소설 속에서 잔인할 정도로 정교하게 증명해낸다.

유전이 내부의 엔진이라면, 환경은 그 엔진이 작동하는 외부의 트랙이다. 졸라는 인물이 처한 사회적 계급, 주거 환경, 직업적 특성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목로주점』에서 제르베즈의 몰락은 그녀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파리 뒷골목이라는 불결한 환경과 빈곤이라는 구조적 압력이 그녀를 서서히 짓눌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졸라의 문학관은 당대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하수구 문학", "오물을 핥는 작가"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졸라는 소설 속에 성매매, 알코올 중독, 질병, 배설, 시체의 부패 등 당시 문학에서 금기시되던 노골적이고 불쾌한 소재들을 가감 없이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라에게 이는 단순한 충격 요법이 아니었다. 그는 "해부학자가 시체를 가를 때 그것이 징그럽다고 멈추지 않듯이, 작가도 사회의 환부를 드러낼 때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아름다운 것만을 노래하는 것은 기만이며, 추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보시키는 첫걸음이라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실존주의나 현대 리얼리즘 문학이 성역 없는 소재를 다룰 수 있게 만든 선구적인 업적이 되었다.

졸라는 청년 시절 한때 낭만주의 시를 쓰기도 했으나,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빅토르 위고식의 거창한 영웅주의나 감상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인간을 천사 혹은 악마로 이분법적으로 묘사하며 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졸라가 보기에 인간은 그저 '옷을 입은 짐승'에 불과했으며, 신비로운 영혼보다는 역동적인 근육과 신경 시스템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였다.

이러한 철저한 물질주의적 사고관은 졸라의 문학을 매우 건조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의 문장은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명확한 명사와 동사 위주로 구성되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밀하게 그려진 설계도나 보고서를 읽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졸라의 이러한 확고한 문학관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졸라가 지나치게 '유전'과 '환경'이라는 공식에 집착한 나머지, 인간이 가진 자유 의지나 돌발적인 변수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물이 정해진 파멸의 궤도를 걷는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기계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객관성'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졸라의 묘사는 때때로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거대하여(예를 들어 『제르미날』의 광산을 거대한 괴물로 묘사하는 방식 등)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신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즉, 본인은 과학을 지향했으나 실제로는 '자연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낭만주의'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때때로 그의 소설은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예를 들어 『실패한 작품』에서의 예술론이나 『돈』에서의 주식 시장 설명 등)로 인해 서사의 흐름이 끊기고 독자를 지치게 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소설이 당시의 풍속을 완벽하게 복원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5. 폴 세잔과의 관계[편집]

두 사람의 인연은 1852년, 프랑스 남부의 고도(古都) 엑상프로방스의 부르봉 중학교(Collège Bourbon)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졸라는 이탈리아계 혼혈이라는 혈통과 가난한 집안 형편,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부 사투리가 아닌 파리 표준어를 쓴다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지독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이때 덩치가 크고 성격이 불같았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 폴 세잔이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던 졸라를 구해주었다. 다음 날, 졸라는 감사의 표시로 세잔에게 사과 한 바구니를 선물했는데, 훗날 세잔이 정물화의 대가가 되어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고 호언장담하게 된 무의식적 기원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25]

이들은 곧이어 합류한 장 바티스트 바유(Jean-Baptiste Baille)와 함께 자신들을 '세 친구(Les Trois Inseparables)'라고 부르며 끈끈한 결속력을 과시했다. 이 시기 세 소년은 엑상프로방스 주변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오르고, 아르크 강에서 수영을 하며, 빅토르 위고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를 낭송하는 등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공유했다. 졸라에게 세잔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고, 세잔에게 졸라는 유일하게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해 주는 지적 동반자였다.

졸라가 1858년 파리로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수많은 편지를 통해 이어졌다. 졸라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세잔에게 끊임없이 상경을 권유했다. "이곳 파리는 지옥 같지만, 진정한 예술을 하려면 이곳으로 와야 하네."라는 졸라의 설득에 결국 세잔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향한다. 하지만 파리의 화단은 세잔의 거친 화풍을 거부했고, 좌절한 세잔을 뒷바라지하며 끝까지 그의 천재성을 믿어준 사람이 바로 졸라였다. 졸라는 미술 비평가로서 활동하며 당시 비난받던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세잔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시간이 흐르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거두로서 사회적 성공과 부를 거머쥐며 점차 체제 내로 편입된 반면, 세잔은 여전히 '낙선전'의 단골손님이자 기인 취급을 받으며 은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파국은 1886년 졸라가 발표한 소설『작품』(L'Œuvre)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클로드 란티에는 천재적이지만 끝내 자신의 이상을 캔버스에 구현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화가로 묘사되는데, 세잔은 이 인물이 자신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세잔은 졸라에게 "이 책을 보내주어 고맙다"라는 짧고 차가운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낸 뒤, 30년 넘게 이어온 우정의 고리를 끊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졸라가 죽었을 때, 세잔은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한다. 비록 소설로 인해 절교에 이르렀으나, 세잔에게 졸라는 자신의 청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창작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이 창작물로 인해 상처받고 떠나간, 문학사와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브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6. 사회주의와 졸라[편집]

졸라의 사상적 궤적을 추적할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평생 유지했던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위치가 삶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회적 실천가'이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로 변모해가는 과정이다. 초기 졸라가 인간을 유전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생물학적 표본으로 보았다면, 후기의 졸라는 인간이 연대를 통해 가혹한 환경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개인적인 변심이 아니라, 그가 목격한 19세기 프랑스의 처참한 노동 현실과 부패한 권력 구조에 대한 치열한 고찰의 산물이었다.

초기 졸라의 정치적 스탠스는 철저히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에 가까웠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가진 권위주의와 부패를 혐오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태동하던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에 전폭적으로 동조하지도 않았다.

졸라는 작가가 정치적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사회의 환부를 드러내기만 하면, 치유는 독자와 사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초기작 『목로주점』에서 묘사된 노동자들은 혁명의 주체라기보다는 알코올 중독과 환경의 굴레에 갇힌 비참한 희생자들에 가깝다. 이 시기 졸라는 노동자들의 비극을 동정했으나, 그들이 가진 집단적 힘에 대해서는 일종의 두려움이나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오직 '진실'의 편에 서서 사회를 해부하는 관찰자를 자처했다.

졸라가 사회주의적 가치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제르미날』의 집필이었다. 그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취재하기 위해 안쟁 광산을 방문했고, 거기서 지옥 같은 노동 환경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족들을 목격했다.

1890년대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졸라를 골방의 작가에서 광장의 투사로 끌어냈다. 이 사건을 거치며 그는 국가 권력, 군대, 교회가 결탁한 기득권 세력의 거대한 벽을 실감했다.

그는 사회주의적 연대가 단순히 경제적 분배의 문제를 넘어, 진실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임을 깨달았다.

드레퓌스 구명 운동 과정에서 졸라는 장 조레스 같은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 정치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조레스는 졸라의 문학이 가진 사회 비판적 힘을 높이 평가했고, 졸라는 조레스의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졸라의 생애 마지막 연작인 『네 복음서』 총서(풍요, 노동, 진실, 정의)는 그의 사회주의적 이상이 정점에 달한 작품들이다. 특히 『노동』(Travail, 1901)에서 그는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노동이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 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묘사했다.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폐기하고, 과학 기술과 협동 조합이 결합한 이상 사회를 꿈꿨다.

졸라의 사회주의는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난 철저한 세속적 휴머니즘에 기반했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인내만을 강요한다고 비판하며, 현세에서의 분배와 정의를 강조했다.

그는 폭력적 혁명보다는 교육과 과학, 그리고 인간 본성의 개선을 통한 점진적 사회 변화를 믿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 혁명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프랑스 전통의 '인도주의적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졸라는 정당 정치인이나 이론가는 아니었으나, 그의 소설은 그 어떤 이론서보다 강력하게 대중의 사회 의식을 일깨웠다. 노동 현장의 밑바닥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사회 입법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실제로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노동법 개정 논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진실을 말하고 고발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는 그의 태도는 이후 장 폴 사르트르 등으로 이어지는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 문학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초기에 인간을 "유전의 감옥에 갇힌 짐승"으로 보았으나, 말년에는 "서로를 보듬으며 공동체를 일궈나가는 형제"로 보기 시작했다. 그의 사회주의는 복잡한 수식이나 경제 이론이 아니라, 굶주리는 아이가 없고 정당한 노동이 대접받는 세상을 향한 소박하고도 거대한 '진실의 열망'이었다.

비록 그가 꿈꿨던 완벽한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지만, 졸라는 문학이 어떻게 사회의 양심이 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사회주의적 휴머니스트'였다.

7. 종교관[편집]

졸라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혁명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세속주의와 전통적인 가톨릭 보수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졸라는 단순히 종교를 부정하는 수준을 넘어, 종교가 인간의 진보를 어떻게 가로막는지, 그리고 신이라는 환상이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은폐하는지를 문학이라는 해부용 칼로 파헤쳤다.

졸라의 종교관은 그의 문학적 뿌리인 자연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신성한 피조물이 아니라, '유전'이라는 생물학적 설계도와 '환경'이라는 사회적 실험실 속에 놓인 표본으로 보았다.

졸라에게 있어 기적이나 영성 같은 개념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 심지어 종교적 황홀경조차도 신경계의 작용이나 심리적 질병의 발현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인류가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지나 이제 과학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믿었기에, 구시대의 유물인 종교적 도그마는 마땅히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는 소설 『파스칼 박사』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모든 것은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신의 자리에 자연과 과학을 배치한 일종의 선전포고와 같았다.

졸라의 종교 비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지점은 바로 『세 도시 총서』(Lourdes, Rome, Paris)이다. 이 시리즈는 젊은 신부 '피에르 프로망'이 신앙의 위기를 겪으며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루르드』는 성모 발현지로 유명한 루르드의 기적을 정면으로 다룬다. 졸라는 직접 루르드를 방문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뒤, 그곳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사실은 집단 히스테리와 간절한 소망이 빚어낸 심리적 착각임을 폭로했다. 그는 고통받는 환자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교회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로마』는 바티칸을 방문한 피에르를 통해 가톨릭 권력의 핵심부를 해부한다. 졸라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의 편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음모를 일삼는 거대한 관료 조직임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 가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랐다.[ 졸라는 실제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그는 더욱 강경한 반교회주의자가 된다.]

『파리』는 신앙을 완전히 버린 피에르가 과학과 노동의 가치에서 새로운 구원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졸라는 종교가 준 '내세의 천국' 대신, 지상에서 인간의 손으로 일궈낼 '미래의 유토피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졸라가 종교와 완전히 원수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 보수 세력은 군부와 결탁하여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갔다. 특히 가톨릭 기관지들은 노골적인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며 졸라를 '반역자'이자 '신을 모독하는 자'로 공격했다.

졸라에게 가톨릭은 더 이상 개인의 신앙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는 사회적 악의 근원이었다. 그는 교회가 대중의 무지를 이용해 편견을 확산시킨다고 믿었으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지식인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졸라를 단순히 '종교 파괴자'로만 보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이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인간의 생명력(Vitalism)과 진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였다.

졸라에게 구원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땀 흘려 일하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생명의 순환 속에 있었다. 후기작 『네 복음서』 연작(풍요, 노동, 진실, 정의)은 제목부터 성경의 형식을 차용했으나, 내용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진실은 종교적 절대자와 같은 권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이를 수호하는 것이 지식인의 종교적 소명과도 같았다.

졸라의 사후에도 교회와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1902년 그가 의문의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보수적인 종교인들은 이를 "신의 천벌"이라며 조롱했다. 그가 팡테옹(국가 위인 묘역)에 안치될 때도 가톨릭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졸라가 비판했던 교회의 부패와 무지는 훗날 프랑스의 정교분리 원칙(라이시테)을 확립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졸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를 끝내고,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근대의 문을 연 '세속적 선지자'였던 셈이다.

8. 사생활[편집]

알렉상드린 졸라(Alexandrine Zola)는 졸라가 무명 시절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 허덕일 때부터 세계적인 대문호로 우뚝 서기까지,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거대한 풍파를 겪는 내내 그의 곁을 지킨 가장 강력한 조력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화려한 작가의 아내라는 수식어 뒤에 숨겨진 인내와 희생, 그리고 남편의 외도라는 개인적인 비극으로 점철된 복합적인 서사였다.

알렉상드린(본명 알렉상드린 멜리)은 1839년생으로 졸라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그녀 역시 졸라처럼 하층민 출신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864년경, 졸라는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던 무명 작가였고, 알렉상드린은 생계를 위해 모델 일을 하거나 잡일을 하던 처지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졸라를 만나기 전, 졸라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폴 세잔의 모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세잔의 초기 작품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인연은 당시 가난한 예술가 공동체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준다. 졸라와 알렉상드린은 1865년부터 동거를 시작했고, 1870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시기는 졸라가 『테레즈 라캥』을 발표하며 문단에 충격을 던지고 『루공 마카르 총서』의 거대한 설계를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두 사람의 생활은 처참할 정도로 가난했다. 졸라는 훗날 "우리는 전당포에 옷을 잡히고 침대 시트 한 장으로 겨울을 났다"고 회상했다. 알렉상드린은 이러한 환경에서도 졸라의 집필 활동을 독려하며 집안을 꾸려나갔다. 그녀는 졸라의 첫 번째 독자이자 비평가였으며, 졸라가 외부의 비난에 시달릴 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안식처였다.

졸라가 『목로주점』과 『나나』의 기록적인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자, 알렉상드린의 역할도 변화했다. 그들은 파리 근교의 메당(Médan)에 거대한 저택을 구입했다. 알렉상드린은 이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졸라를 찾아오는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을 접대하는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졸라가 오로지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저택의 모든 행정적, 가사적 업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졸라의 까다로운 식단과 집필 시간을 철저히 관리한 것도 그녀였다.

또한 알렉상드린은 졸라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목로주점』의 제르베즈나 여러 작품 속 헌신적인 여성상에는 알렉상드린의 강인한 생활력과 인내심이 투영되어 있다.

졸라는 원고를 마칠 때마다 알렉상드린에게 먼저 읽어주곤 했다. 그녀의 직관적인 피드백은 대중의 정서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던 이들의 부부 생활에도 깊은 그늘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자손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졸라에게 이는 큰 상처였고, 알렉상드린에게는 평생의 죄책감이자 아픔이었다. 졸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유전과 혈통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의 적통을 잇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결국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잔 로즈로(Jeanne Rozerot)였다. 1888년, 알렉상드린은 집안일을 돕기 위해 젊은 세탁부 잔 로즈로를 고용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졸라는 젊고 생기 넘치는 잔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그토록 원하던 두 아이(드니즈와 자크)를 얻게 된다.

알렉상드린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891년의 일이었다. 익명의 투서로 남편의 이중생활을 확인한 그녀의 분노와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졸라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으며, 가구와 집기를 부수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졸라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으나 잔과의 관계를 끊지는 못했다. 결국 알렉상드린은 졸라를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이 기묘한 '두 살림'을 묵인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내린다.[26]

알렉상드린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역설적으로 졸라 인생 최악의 위기였던 드레퓌스 사건 때였다.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고 국가적 반역자로 낙인찍혀 영국으로 망명했을 때, 알렉상드린은 파리에 남아 분노한 군중의 투석전과 협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졸라의 재산을 지켰다.

그녀는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남편과 비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전달했고, 영국으로 직접 건너가 남편의 건강을 챙겼다. 졸라는 망명지에서 쓴 편지에 "당신의 용기만이 나를 지탱해준다"며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졸라 사후의 행보였다. 1902년 졸라가 의문의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자, 알렉상드린은 홀로 남은 잔 로즈로와 그녀의 두 아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법적 절차를 밟아 잔의 아이들이 '졸라'라는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이는 자신의 불임을 극복하고 남편의 문학적, 생물학적 유산을 보존하려는 숭고한 결단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은 죄가 없다. 그들은 에밀의 혈육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알렉상드린 졸라는 단순히 대문호의 뒷바라지를 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졸라의 자연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고, 그가 사회적 광풍 속에서 흔들릴 때 뿌리를 잡아준 지지대였다.

오늘날 에밀 졸라의 이름이 팡테옹에 새겨지고 그의 작품들이 세계 문학의 정점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명 시절의 굶주림을 함께 견디고 말년의 치욕적인 외도까지도 문학적 대의를 위해 품어 안았던 알렉상드린이라는 거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192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졸라의 유고를 정리하고 그의 명예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쳤다.

9. 기타[편집]

  • 졸라는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먹는가는 그 인간이 누구인가를 결정한다"는 철학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소설 속에서도 음식을 묘사하는 집요함으로 나타난다. 『목로주점』에서 거위 구이를 먹는 장면이나 『파리의 복부』에서 치즈 시장을 묘사하는 대목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졸라 자신의 미각적 경험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 엄청난 수집광이었는데, 그의 수집 목록은 종교적 제단 장식부터 중세의 갑옷, 동양의 도자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경계가 없었다. 특히 중세풍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매료되어 별장의 창문을 모두 진귀한 유리 공예로 장식했다. 외부에서는 평범한 시골 집처럼 보였으나, 내부는 마치 성당이나 골동품 가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맥시멀리즘의 극치를 달렸다.
  • 냉철한 이성을 숭상했던 자연주의자 졸라였지만, 정작 개인적인 삶은 강박장애(OCD)와 기묘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특히 숫자와 관련된 강박이 심했다.
  • 숫자 7을 극도로 불길하게 여겼다. 계단을 오를 때 발자국 수를 세거나, 문을 닫을 때 특정 횟수만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증상이 있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도 가스 밸브나 창문 등을 수차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게 되는 비극적 아이러니와 연결되기도 한다.
  •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1,000단어 이상을 쓰는 규칙을 평생 지켰다. 영감이 오지 않아도 일단 앉아서 펜을 움직여야 한다는 '노동자적 작가관'은 그의 강박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 졸라는 인간의 잔인함과 추악함을 묘사하는 데 평생을 바쳤지만, 동물에게만큼은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당 별장에서 수많은 개와 고양이를 키웠다. 특히 '핀(Pin)'이라는 이름의 개를 끔찍이 아꼈는데, 핀이 죽었을 때 졸라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 그는 동물들이 인간처럼 거짓을 말하거나 배신하지 않기 때문에 더 고결하다고 믿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도 동물은 종종 인간의 탐욕에 희생되는 순수한 존재로 그려지며, 작가의 연민이 투영되는 유일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9.1. 사진가[편집]

졸라가 문학계에서 자연주의의 기수로 이름을 날리던 전성기, 그는 펜이 아닌 또 다른 도구에 매료된다. 바로 '카메라'다. 189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단순한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스스로를 '아마추어'라 칭했으나, 그가 남긴 7,000여 점에 달하는 유리 건판 사진들과 인화물들은 당대 어떤 전문 사진가보다도 정교하고 집요한 기록 정신을 보여준다. 졸라에게 사진은 문학적 자연주의를 시각적으로 완성하는 최후의 수단이자, 현실을 왜곡 없이 포착하려는 그의 철학이 투영된 결정체였다.

졸라가 사진에 입문한 시기는 그의 나이 54세 무렵이었다. 당시 사진술은 육중한 장비와 복잡한 현상 과정이 필요한 '기술적 도전'이었지만, 평소 기계 장치와 과학적 도구에 호기심이 많았던 졸라에게는 최적의 유희였다. 그는 당대 최신 기종인 코닥(Kodak) 카메라를 비롯해 10여 대의 카메라를 소유했으며, 자신의 저택인 메당(Médan)과 파리의 아파트에 전용 암실을 설치할 정도로 몰입했다.

그가 사진에 집착한 이유는 그의 문학론인 '실험 소설론'과 궤를 같이한다.

졸라는 "나는 내가 보는 것을 쓰기 위해 본다"고 말하곤 했다. 카메라 렌즈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하기 전의 원시적 사실을 포착하는 가장 정직한 눈이었다.

그는 급변하는 19세기 말 파리의 풍경, 철도, 만국박람회의 철강 구조물 등을 찍으며 근대성을 기록했다. 이는 『루공 마카르 총서』에서 묘사된 거대한 기계 문명의 시각적 증거물들이기도 했다.

졸라의 사진첩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사생활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의 공식적인 아내인 알렉상드린과, 비밀스러운 연인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잔 로즈로(Jeanne Rozerot)를 대하는 시각이 사진에서도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아내를 찍은 사진들은 대개 정적이고 격식 지켜져 있다. 메당의 화려한 저택을 배경으로 고가의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그녀의 모습은 졸라의 사회적 성공과 부르주아적 안정을 상징한다.

반면 잔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드니즈, 딸 자크를 찍은 사진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졸라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마치 식물학자가 성장 일기를 쓰듯 꼼꼼하게 촬영했다. 소풍을 가거나 강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찰나를 포착한 사진들은 차가운 자연주의자 졸라의 내면에 숨겨진 따뜻한 부성애를 드러낸다.[27]

졸라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열렬한 기록자였다. 그는 매일같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박람회장을 찾아가 에펠탑의 골조, 전기 궁전의 화려한 조명,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를 촬영했다.

그의 사진은 단순히 '관광객의 기념사진'이 아니었다. 그는 도시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했다.

철골 구조와 유리창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문양에 주목했다. 이는 그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묘사된 근대적 상업 공간의 시각적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대중이 광장에 모여 이동하는 모습은 졸라가 평생 소설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집단적 인격'으로서의 군중을 사진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졸라는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노출 시간을 계산하고, 암실에서 화학 약품을 배합하여 인화하는 전 과정을 스스로 통제했다.

리모컨 역할을 하는 긴 줄을 이용해 자신의 서재에서 글을 쓰는 모습이나 카메라를 조작하는 모습을 스스로 찍기도 했다. 이는 '관찰자인 나 자신조차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자연주의적 자의식을 반영한다.

당시 사진술은 은염 과정(Silver process)을 포함한 정교한 화학 지식이 필요했는데, 졸라는 이 과정을 즐기며 자신의 사진이 변색되지 않고 영구히 보존되기를 원했다.

많은 평론가는 졸라가 사진에 심취한 이후의 작품들에서 묘사 방식이 더욱 '시각 중심적'으로 변했다고 분석한다. 졸라의 사진은 인물의 동작을 순간 포착하듯 묘사하는 기법이 두드러진다.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해 인물의 내면이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이 사진의 명암 대비(Chiaroscuro)와 유사해진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졸라는 사진이 가진 '부인할 수 없는 증거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진실은 가릴 수 없으며, 렌즈가 포착한 실재는 거짓된 선동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가졌다.

졸라 사후, 그의 방대한 사진 컬렉션은 한동안 잊혔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1970년대 그의 손자인 프랑수아 에밀 졸라에 의해 정리된 사진들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등에서 전시되며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사진들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사적 기록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노동자의 남루한 옷차림부터 귀족들의 화려한 연회까지, 졸라의 카메라는 계급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훑었다. 이는 그가 소설로 일궈낸 『루공 마카르』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복제해놓은 또 하나의 '평행 우주'였다.

졸라에게 사진은 단순히 순간을 멈추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의 연장선이었다. 그는 펜으로 세상을 해부했듯, 렌즈로 세상을 박제했다. 오늘날 우리가 19세기의 파리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문학가 졸라뿐만 아니라 사진가 졸라가 남긴 집요한 '빛의 기록' 덕분이기도 하다.

9.2. 한국에서[편집]

졸라의 문학이 한반도라는 낯선 땅에 발을 들인 과정은 단순히 외국 문학의 유입을 넘어, 한국 근대 문학이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라는 거대한 파도를 어떻게 맞이하고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다. 졸라의 문학은 대한제국 말기 지식인들에게는 부패한 사회를 개혁할 '과학적 메스'로 다가왔고, 일제강점기 작가들에게는 식민지 현실의 비참함을 드러낼 '냉혹한 거울'이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 에밀 졸라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 일본을 거쳐 들어온 근대 문학의 조류를 통해서였다. 당시 일본 문단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이나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같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본식 자연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신문학과 유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최남선은 『소년』 등의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물과 사상을 소개하며 졸라를 '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의사' 같은 작가로 묘사했다. 이광수 역시 졸라의 과학적 태도와 관찰력을 높이 평가했으나, 정작 졸라가 지향했던 '유전과 환경의 결정론'보다는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태도' 자체에 더 주목했다.

한국 근대 소설의 개척자인 염상섭은 그의 대표작 『삼대』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졸라식 자연주의의 흔적을 보여준다. 특히 '표본실'이라는 설정 자체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에서 강조한 '실험실의 관찰자'로서의 작가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반면 김동인은 졸라의 자연주의를 '인생의 어두운 면만을 들춰내는 추악한 문학'으로 치부하며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의 단편들에서 보여준 냉정한 관찰력은 졸라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0~30년대 신경향파와 카프 작가들에게 졸라는 특별한 의미였다. 『제르미날』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발은 사회주의 계열 작가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주었다. 비록 졸라 자신은 엄밀히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그가 묘사한 민중의 역동성은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에게 투쟁의 서사를 구축하는 모델이 되었다.

한국에서 졸라의 작품이 온전한 형태로 번역되어 대중에게 읽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기에는 일본어 중역(重譯)본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마저도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나나』나 『목로주점』 같은 자극적인 소재의 작품들에 치중되어 있었다.

해방 이전 신문 연재 소설이나 짤막한 단편 위주로 소개되었다. 당시 독자들에게 졸라는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성적인 묘사를 즐기는 작가'라는 편견 섞인 인식이 강했는데, 이는 『나나』가 가진 매춘과 타락의 이미지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전후 복구기와 독재 정권 시기, 졸라의 문학은 잠시 주춤했다. 검열의 칼날 아래서 그의 사회 비판적인 성향은 위험 요소로 간주되기도 했고,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주의'는 낡은 사조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학전집의 단골 손님으로 『나나』와 『목로주점』은 꾸준히 출간되었다.

1990년대 프랑스 문학 전공자들에 의한 불어 원전 번역이 본격화되면서 졸라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뀐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문학동네, 열린책들 등 주요 출판사들이 『루공 마카르 총서』의 주요작들을 수준 높은 번역으로 내놓으면서, 졸라는 '통속 소설가'라는 오명을 벗고 '거대한 서사 구조를 설계한 건축가'로 재조명받게 된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에밀 졸라가 가장 뜨겁게 소환되는 지점은 그의 소설보다도 "나는 고발한다(J'accuse...!)"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사회적 참여(앙가주망) 측면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그 이후의 수많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펜을 든 졸라의 모습은 한국 지식인들의 이상향이자 준거점이 되었다.

군부 독재 시절, 글을 썼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거나 탄압받았던 작가들은 종종 스스로를 졸라의 처지에 비유하곤 했다. 진실을 외면하는 주류 사회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지식인의 원형으로 졸라가 자리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언론인들이나 칼럼니스트들이 권력의 은폐 의혹을 제기할 때 가장 자주 인용하는 문구가 바로 졸라의 "진실이 전진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는 졸라의 정신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한국의 사회적 양심을 깨우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8]

21세기 한국 소설에서도 졸라의 유전자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세밀하게 해부하는 소설들, 이른바 '신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작품들 속에서 졸라의 향취가 느껴진다.

광산 노동자들의 사투를 그린 『제르미날』의 정신은 70~80년대 한국의 노동 문학을 거쳐,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나 플랫폼 노동자의 삶을 다루는 젊은 작가들의 시선으로 이어졌다.

파리라는 거대 도시의 욕망을 해부한 졸라처럼, 서울이라는 메가시티 속에서 소외되고 파편화된 인간 군상을 그리는 한국 작가들에게 졸라는 여전히 유효한 교과서다.

결국 한국에서 에밀 졸라는 단순히 19세기 프랑스 작가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문학이 어디까지 정직해질 수 있는가'와 '지식인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

초기 유입 과정에서의 '추악한 리얼리즘'이라는 오해를 넘어, 이제 한국 독자들은 졸라의 작품 속에서 인간을 옭아매는 구조적 모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진실의 발걸음을 읽어내고 있다.

9.3. 미디어 믹스[편집]

졸라 스스로가 소설을 쓸 때 마치 '카메라'처럼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는 후대의 영화감독과 연출가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시나리오였다. 19세기 말 영화의 탄생부터 21세기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졸라의 문학은 시대의 옷을 갈아입으며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영화라는 매체가 갓 태어난 시기, 졸라의 작품은 이미 스크린의 단골 소재였다. 특히 프랑스 영화의 선구자들은 졸라의 사실주의적 묘사가 활동사진의 '기록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고 판단했다.

1902년 졸라가 사망한 직후부터 그의 작품은 단편 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1909년 페르디낭 제카(Ferdinand Zecca) 감독이 연출한 『함정』(L'Assommoir)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연출로 알코올 중독의 파멸을 그렸다.

1920년대 유럽 영화계의 거장들은 졸라의 대작들을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제작했다. 장 르누아르(Jean Renoir) 감독은 1926년 『나나』를 무성 영화로 제작하며, 졸라의 원작이 가진 탐욕과 화려함 뒤의 부패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29]

소리에 색이 입혀진 유성 영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졸라의 대사들은 더욱 생생한 생명력을 얻었다. 이 시기 영화들은 졸라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집중했다.

졸라의 원작 중 가장 어두운 범죄 심리를 다룬 이 작품은 장 가뱅이라는 프랑스 국민 배우를 통해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기차라는 근대적 괴물과 인간의 살인 본능을 결합한 이 영화는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르네 클레망의『제르베즈』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졸라의 자연주의를 가장 충실하게 재현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제르베즈의 절망적인 삶을 미화 없이 그려내어 베네치아 영화제 등에서 찬사를 받았다.

컬러 영화와 TV 시리즈의 발달은 졸라의 방대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시리즈물로 담아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클로드 베리의 『제르미날』은 당시 프랑스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입된 이 작품은 광산촌의 비참한 현실과 노동자들의 봉기를 압도적인 스케일로 그려냈다.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주연을 맡아 민중의 분노를 대변했으며, 졸라 문학이 가진 사회적 파급력을 현대 관객들에게 다시금 각인시켰다.

영국 BBC를 포함한 유럽 각국의 방송사들은 『나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등을 드라마화했다. 특히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영국에서 『더 파라다이스』(The Paradise)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19세기 백화점의 화려함과 자본주의의 명암을 대중적으로 풀어냈다.

한국의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 『박쥐』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명시했다. 남편을 죽인 아내와 내연남이 겪는 죄책감과 생리적 거부 반응이라는 졸라의 핵심 모티브를 '흡혈귀'라는 설정과 결합하여 현대적으로 변주한 사례다.

『테레즈 라캥』은 발표 직후부터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졸라 본인이 직접 각색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무대 위에서도 실제와 똑같은 가구와 소품을 사용하는 '환경의 재현'을 강조했다. 이는 현대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졸라의 작품들이 뮤지컬로도 제작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브로드웨이와 유럽 등지에서 『테레즈 라캥』이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으며, 원작의 어둡고 강렬한 감정선을 음악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 당시 시험관은 졸라의 답안지가 지나치게 장황하며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평가했다. 훗날 세계적인 대문호가 될 이에게 내린 평가치고는 지독한 역설이다.[2] 이 시기 졸라는 훗날 『루공 마카르 총서』의 '유통과 자본'을 다룬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보여준 그 치밀한 시스템 분석 능력의 맹아를 보여준다.[3] 실제로 졸라는 훗날 자신의 작품이 '오물 문학'이라고 공격받을 때, 미리 포섭해 둔 기자들을 통해 반박 기사를 쓰게 하거나 스스로 논란을 키워 판매량을 올리는 노련함을 보였다.[4]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직원이 검찰 조사를 받는 상황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졸라 역시 이 일을 계기로 "내 글을 쓰기 위해선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5] 당시 그는 '유전은 필연적인 저주'라고 믿었던 클로드 베르나르의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6] 졸라는 실제로 유전학 서적을 탐독하며 가계도를 그렸는데, 이는 단순히 소설적 설정을 넘어 인류학적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의도에 가까웠다.[7] "검은 반점이 있는 잎들, 끈적거리는 수액을 흘리는 줄기들..." 같은 묘사는 식물이 마치 인간의 성기나 내장처럼 보이게 하는 공감각적 효과를 준다.[8] 주인공 외젠 루공은 나폴레옹 3세의 심복이자 '부황제'로 불렸던 외젠 루에(Eugène Rouher)를 모델로 삼았음이 정설이다.[9] 실제로 이 소설 이후 프랑스 내에서 알코올 중독 문제와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10] 당시 평단은 이 묘사를 보고 "졸라가 문학을 해부실로 만들었다"며 경악했다.[11] 실제로 졸라는 이 작품을 쓰면서 자신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몰입했으며, 탈고 후 "나는 이제야 인간의 바닥을 보았다"고 했다.[12] 이 때문에 출간 당시 평단에서는 '외설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심지어 그의 지지자들 중 일부도 "지나치게 추하다"며 등을 돌리기도 했다.[13] 졸라는 실제로 집필 기간 중 극심한 강박증과 건강 악화에 시달렸으며, 산도즈의 대사들은 당시 졸라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과 흡사하다.[14] 사실 졸라는 이 작품을 통해 이미 당대의 정치적 지형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권력에 맞서 "나는 고발한다"를 쓸 수 있었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15] 졸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는 진실을 썼을 뿐이다"라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16] 사실 프랑스 첩보부의 고용된 스파이였다.[17] 훗날 프랑스의 총리가 된다.[18] 이 시기 집필된 『네 복음서』 시리즈가 초기작들에 비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졸라 개인의 사상적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9] 특히 드가는 지독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졸라를 격멸했다. 평생을 함께해온 예술적 동지들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라서는 과정은 졸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20] 실제로 졸라는 조강지처 알렉상드린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었으나, 연인 잔 로즈로를 통해 두 아이를 얻은 후 생명의 기쁨에 눈을 떴다고 전해진다. 이 사적인 경험이 소설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21] 졸라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이유는 신선한 공기를 찾아 창문 쪽으로 기어가려 했던 필사의 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산화탄소는 공기보다 무겁지 않지만, 당시 방 하부의 대류 현상과 졸라의 건강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22] 졸라의 침실에는 그가 집필 중이던 『네 복음서 총서』의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과 '정의'를 기록하고 있었다.[23] 이 사건 이후 프랑스어에서 '인텔리전트(Intelligent)'라는 단어는 단순히 '지적인 사람'을 넘어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지식인'이라는 정치적 함의를 갖게 되었다.[24] 이 이장식 도중 드레퓌스 사건에 불만을 품은 극우 인사가 졸라의 운구 행렬에 총을 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죽어서까지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셈이다.[25] 세잔은 노년에 이 일화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26] 이 시기 알렉상드린의 일기를 보면 남편에 대한 사랑과 증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묘한 질투와 연민이 뒤섞여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27] 졸라는 잔과 아이들의 사진을 현상할 때 더욱 정성을 들였으며, 이 사진들은 그에게 정서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28] 실제로 한국의 인권 운동이나 사법 정의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서적에서 졸라의 일대기가 인용되는 횟수는 다른 서구 작가들을 압도한다.[29] 흥미롭게도 장 르누아르는 졸라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작가의 작품을 아들이 영화화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