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원주민 시대[편집]
3. 식민지 시대[편집]
3.1. 페루 부왕령[편집]
스페인 식민지배 초기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에 속했다.
3.2.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편집]
4. 근현대[편집]
4.1.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편집]
1810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2]에서 혁명이 일어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가 선포되었으며, 스페인이 임명한 부왕은 반다 오리엔탈[3]의 몬테비데오로 도피했는데, 반다 오리엔탈에서도 1811년부터 혁명이 일어나 리오데라플라타 부왕은 1814년에 결국 몬테비데오에서도 축출되었다.
이후 반다 오리엔탈 역시 연합주에 가입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주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령 지위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1816년에 이르러 연합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위기감을 느낀 포르투갈이 반다 오리엔탈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시스플라티나 주를 설치했다.
이후 연합주는 1819년부터 남아메리카 연합주로 국호를 변경했고, 1820년 독립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1825년부터는 포르투갈로부터 시스플라티나 영유권을 승계받은 브라질 제국과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 도중인 1826년에 아르헨티나 연합주로 국호를 변경했다.
연합주와 브라질의 전쟁은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통해 양국 중 어느쪽도 시스플라티나를 소유하지 않고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킨다는 결과로 귀결되었는데, 비록 자국령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시스플라티나를 브라질에서 분리시키는데는 성공했다.
이후 연합주는 1831년에 아르헨티나 연합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후 반다 오리엔탈 역시 연합주에 가입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주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이 아닌 자치령 지위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1816년에 이르러 연합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위기감을 느낀 포르투갈이 반다 오리엔탈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시스플라티나 주를 설치했다.
이후 연합주는 1819년부터 남아메리카 연합주로 국호를 변경했고, 1820년 독립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1825년부터는 포르투갈로부터 시스플라티나 영유권을 승계받은 브라질 제국과 전쟁을 치렀는데 전쟁 도중인 1826년에 아르헨티나 연합주로 국호를 변경했다.
연합주와 브라질의 전쟁은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통해 양국 중 어느쪽도 시스플라티나를 소유하지 않고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킨다는 결과로 귀결되었는데, 비록 자국령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시스플라티나를 브라질에서 분리시키는데는 성공했다.
이후 연합주는 1831년에 아르헨티나 연합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4.2. 아르헨티나 연합[편집]
1831년부터 1861년까지 30년간 존속한 아르헨티나 연합은 중앙정부가 없고 수도를 보유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사실상의 국가원수였는데, 1852년에는 다른 주들과 갈등을 빚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연합에서 탈퇴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단독으로 나머지 주들 전체를 상대하면서도 우세를 보였고, 결국 1861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합 전체를 점령하고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아르헨티나 연합 체제는 종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단독으로 나머지 주들 전체를 상대하면서도 우세를 보였고, 결국 1861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합 전체를 점령하고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아르헨티나 연합 체제는 종식되었다.
4.3. 아르헨티나 공화국[편집]
4.3.1. 19세기 후반[편집]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1861년에 수도를 보유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나머지 주들 전체를 점령하면서 성립된 국가인만큼 이전의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아르헨티나 연합과 달리 단일한 중앙정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사막 전쟁이라 불리는 남부 사막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거쳐 1884년에는 지금의 국토를 완성했고, 유럽계 이민자를 대량으로 수용하여 백인 인구를 늘렸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사막 전쟁이라 불리는 남부 사막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거쳐 1884년에는 지금의 국토를 완성했고, 유럽계 이민자를 대량으로 수용하여 백인 인구를 늘렸다.
4.3.2. 20세기 전반[편집]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독일 등 왠만한 유럽 국가들보다 소득이 높고 당대 열강인 프랑스와 맞먹을 정도의 1인당 소득을 자랑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제 구조는 대지주 중심의 농업 위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유럽의 산업국가들보다 내실은 취약했고, 결국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1930년대에는 미국과 유럽 역시 대공황을 겪었고 1939년부터는 유럽에서 2차 대전이 일어났기에, 전쟁에 직접 휘말리지 않은 아르헨티나가 눈에 띌 정도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제 구조는 대지주 중심의 농업 위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유럽의 산업국가들보다 내실은 취약했고, 결국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1930년대에는 미국과 유럽 역시 대공황을 겪었고 1939년부터는 유럽에서 2차 대전이 일어났기에, 전쟁에 직접 휘말리지 않은 아르헨티나가 눈에 띌 정도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지는 않았다.
4.3.3. 페론주의 VS 군부[편집]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에는 노동부 장관 출신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사회 복지 정책을 추구하며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1951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2기 임기 말에는 경제 침체로 인해 민심을 잃고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대통령직을 잃은 페론은 국외로 추방되고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도 금지되었으나, 군정 하에서 실시된 1958년 대선에서 페론은 그나마 반페론주의 성향이 덜한 아르투로 프란디시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호소했고, 그 결과 프론디시가 당선되며 페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페론은 프론디시 정권 하에서 사면과 귀국 허가를 받으려 했으나, 1962년 쿠데타로 프론디시가 축출되며 좌절되었다.
프론디시를 축출한 군정은 1963년에 대선을 치러 민정 이양을 했으나, 해당 선거에도 페론 본인을 포함한 페론주의자들의 입후보는 금지되었고, 1966년에는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무능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경제 침체가 지속되자 페론의 복귀를 원하는 여론이 갈수록 커져, 결국 1972년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가 합법화되고 1973년 총선에서는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압승했으며, 그 직후 치러진 대선에서 후안 페론 본인이 압승하며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이렇게 후안 페론은 오랜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긴 했으나 고령에다 지병까지 앓고 있어서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된 부인 이사벨 페론이 사실상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고, 1974년에는 후안 페론이 사망하여 이사벨 페론이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어디까지나 남편의 후광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고 대통령직까지 승계했기에, 본인 스스로의 정치력이나 지지 기반은 취약했고, 결국 1976년 쿠데타로 축출되며 아르헨티나에는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는 사회 복지 정책을 추구하며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1951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2기 임기 말에는 경제 침체로 인해 민심을 잃고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대통령직을 잃은 페론은 국외로 추방되고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도 금지되었으나, 군정 하에서 실시된 1958년 대선에서 페론은 그나마 반페론주의 성향이 덜한 아르투로 프란디시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호소했고, 그 결과 프론디시가 당선되며 페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페론은 프론디시 정권 하에서 사면과 귀국 허가를 받으려 했으나, 1962년 쿠데타로 프론디시가 축출되며 좌절되었다.
프론디시를 축출한 군정은 1963년에 대선을 치러 민정 이양을 했으나, 해당 선거에도 페론 본인을 포함한 페론주의자들의 입후보는 금지되었고, 1966년에는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무능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경제 침체가 지속되자 페론의 복귀를 원하는 여론이 갈수록 커져, 결국 1972년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가 합법화되고 1973년 총선에서는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압승했으며, 그 직후 치러진 대선에서 후안 페론 본인이 압승하며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이렇게 후안 페론은 오랜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긴 했으나 고령에다 지병까지 앓고 있어서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된 부인 이사벨 페론이 사실상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고, 1974년에는 후안 페론이 사망하여 이사벨 페론이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어디까지나 남편의 후광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고 대통령직까지 승계했기에, 본인 스스로의 정치력이나 지지 기반은 취약했고, 결국 1976년 쿠데타로 축출되며 아르헨티나에는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4.3.4. 7년간의 군사정권(1976~1983)[편집]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페론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경제난을 해결하겠다며 야심차게 출범했으나, 그의 집권하에서도 아르헨티나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1979년 제2차 오일 쇼크 이후에는 군부 내에서도 지지를 잃어 1981년에 사임했다.
이후에는 로베르토 비올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다시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교체되었는데, 갈티에리는 영국에게 빼앗긴 고토인 말비나스 제도(영국명 포클랜드 제도)를 수복하겠다고 말비나스 전쟁(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참패하고 실각했다.
종전 직후에는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집권하여 언론통제를 실시하며 패전 사실을 숨기며 군사정권을 연장하려 했으나, 결국 여론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실패하여 사임하고 민주화가 실현되었다.
이후에는 로베르토 비올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다시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교체되었는데, 갈티에리는 영국에게 빼앗긴 고토인 말비나스 제도(영국명 포클랜드 제도)를 수복하겠다고 말비나스 전쟁(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참패하고 실각했다.
종전 직후에는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집권하여 언론통제를 실시하며 패전 사실을 숨기며 군사정권을 연장하려 했으나, 결국 여론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실패하여 사임하고 민주화가 실현되었다.
4.3.5. 민주화 이후[편집]
1983년 대선에서 급진시민연합의 라울 알폰신이 당선되며 문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알폰신 정권은 군사독재 청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금융 위기 대처에는 실패했고, 1989년 대선에서는 페론주의 정당(정의당) 후보인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며 정권이 교체되었다.
메넴은 페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음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1999년까지 집권했는데, 1999년 대선에서는 급진시민연합의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당선되며 다시 정권이 교체되었다.
데 라 루아는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해 집권 2년만인 2001년에 사임했고, 이후 임시 대통령들의 통치를 거쳐 2003년 대선에서 페론주의 좌파 후보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4년간 집권하다가 2007년 대선에서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대타로 내세워 당선되었는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임기 말에는 네스토르의 재선 도전이 예상되었으나, 그가 2011년 대선 이전에 사망하여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재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 대선에서는 키르치네르 부부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주의 제안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를 당선시켰으나, 2019년 대선에서는 키르치네르 부부 밑에서 수석장관을 지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당선되며 페론주의 좌파가 재집권했다.
2023년 대선에서는 우파 유권자들이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에게 결집하면서, 군사정권 종식 이후 최초의 극우 정권이 민주선거를 통해 들어서는 결과가 나타났다.
알폰신 정권은 군사독재 청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금융 위기 대처에는 실패했고, 1989년 대선에서는 페론주의 정당(정의당) 후보인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며 정권이 교체되었다.
메넴은 페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음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1999년까지 집권했는데, 1999년 대선에서는 급진시민연합의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당선되며 다시 정권이 교체되었다.
데 라 루아는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해 집권 2년만인 2001년에 사임했고, 이후 임시 대통령들의 통치를 거쳐 2003년 대선에서 페론주의 좌파 후보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4년간 집권하다가 2007년 대선에서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대타로 내세워 당선되었는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임기 말에는 네스토르의 재선 도전이 예상되었으나, 그가 2011년 대선 이전에 사망하여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재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2015년 대선에서는 키르치네르 부부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주의 제안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를 당선시켰으나, 2019년 대선에서는 키르치네르 부부 밑에서 수석장관을 지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당선되며 페론주의 좌파가 재집권했다.
2023년 대선에서는 우파 유권자들이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에게 결집하면서, 군사정권 종식 이후 최초의 극우 정권이 민주선거를 통해 들어서는 결과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