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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로마 제국]][[분류: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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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로마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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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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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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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Succession of the Roman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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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한 국가 및 그에 관련된 사상 및 이론들을 다루는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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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관련 이론 중에서는 '[[제3의 로마]]'가 가장 유명해서 그냥 로마 계승 주장이면 싹다 제3의 로마로 묶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나무위키]]의 제3의 로마 문서와 그에 영향을 받은 역덕 커뮤니티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오해로, 실제로는 [[서로마]], [[동로마]]를 분열 이전의 로마와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고 제2의 로마를 선포하거나, 아예 자국이 로마 제국 그 자체라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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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 [[로마 황제|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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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 [[서로마 제국|서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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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 [[동로마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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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로마 제국]]이 서기 395년에 동서로 분리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을 정통 로마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인식했다. 이는 단순한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적·문화적·법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자각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인들의 나라(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ia tōn Rhōmaiōn)"라 칭했으며, 황제는 "로마인의 황제(Βασιλεὺς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us tōn Rhōmaiōn)"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은 단순히 로마의 영향을 받은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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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서방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가리켜 "비잔티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붙인 명칭일 뿐, 동로마 제국 스스로는 결코 자신들을 로마 제국과 분리된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Νέα Ῥώμη, Nea Rhōmē)"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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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특히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서부 히스파니아 지역을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유지하고, 로마 법전을 집대성하여 제국의 법적 연속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은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로마의 전통을 이어가는 국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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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그러나 8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서방 세계와의 문화적 간극이 심화되었다. 또한 9세기 말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면서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로마 계승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도 스스로를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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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제국의 계승권은 자신들에게만 속해 있었다. 서방에서 등장한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가질 수 없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적·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13세기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오스만 제국조차도 동로마의 황제 칭호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로마의 유산을 인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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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결론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연속성을 유지한 유일한 국가였으며, 이를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를 통해 실질적으로 유지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는 신념이었으며, 제국의 존재 자체가 로마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 후 동로마는 서로마의 제위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여겼고, 그 증거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수복 전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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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 프랑크 왕국 ~ [[신성 로마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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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 프랑스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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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 오스트리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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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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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 독일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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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동로마 제국|동로마 황제위]] 계승 주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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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 불가리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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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불가리아 제국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7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존속한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12세기 말부터 14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다. 이 두 시기는 각각 다른 정치적·군사적 상황 속에서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었으며, 동로마 황제위 계승과 관련한 입장 또한 차이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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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 제1차 불가리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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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제1차 불가리아 제국(681~927)의 차르 시메온 1세는 동로마 황제위를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적·문화적 위상을 확립하는 한편, 동로마 제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나아가 스스로 로마 황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군사적 침략과 외교적 전략을 병행하였으며, 동로마 황실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합법적인 정통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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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시메온 1세는 어린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리스 문화를 익혔고, 동로마 황실의 정치 구조와 외교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불가리아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통치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능력 있는 지도자로, 동로마 제국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불가리아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917년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동로마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불가리아는 발칸반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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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시메온 1세는 자신의 승리를 정치적으로도 활용했다. 그는 기존의 불가리아 군주가 사용했던 "카간" 또는 "왕"이라는 칭호를 뛰어넘어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불가리아가 더 이상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 독자적인 황제권을 주장하는 국가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메온은 동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황제 권위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불가리아의 위상을 강화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동로마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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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그러나 동로마 황제들은 이러한 시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강성함을 위협으로 여겼으며, 시메온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점령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결국 시메온은 수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의 야심은 실현되지 못한 채 927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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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시메온의 후계자인 페타르 1세(재위 927~969)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조정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협정을 맺고, 동로마 황실과 혼인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불가리아 군주의 지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불가리아 군주는 제한적이나마 동로마 황제의 승인 아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불가리아 황제가 동로마 황제와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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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결국 11세기 초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불가리아가 동로마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위 계승론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은 1018년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이를 제국의 일부로 통합하였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불가리아 지역은 동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으며, 불가리아의 독립적인 황제위는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불가리아는 동로마의 행정 체제 속에 편입되었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총대주교 임명 등 불가리아 정교회에 대한 실권은 모두 황제에게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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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시메온 1세의 야망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의 통치는 불가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이후 불가리아의 독립성과 국가적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비록 불가리아가 동로마 황제위를 온전히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불가리아 제국이 단순한 변방 국가가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는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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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 제2차 불가리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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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제2차 불가리아 제국(1185~1396)의 군주들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직접적인 군사적 정복보다는 외교적·정치적 수단을 통해 동로마 황제위와 관련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초창기를 이끈 아센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독립적인 불가리아 황제로 선언하면서도,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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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특히 칼로얀(재위 1197~1207)은 동로마 제국과 서방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협력하여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인정받았고, 동시에 서방 세계로부터 불가리아 황제의 권위를 승인받았다. 이는 동로마 황제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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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13세기 이후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혼인 동맹을 활용하여 황실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려 했다. 14세기에는 불가리아의 일부 군주들이 동로마 제국의 계승 문제에 영향을 미치며 동로마 황제들과 연합하거나 경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골과 오스만 제국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불가리아의 동로마 황제위 계승론은 점점 약화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자체적인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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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결국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4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고, 동로마 제국 역시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불가리아와 동로마의 황제위 경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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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결론적으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주로 군사적 정복과 직접적인 황제위 주장을 통해 동로마 황제와 경쟁하였다. 특히 시메온 1세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정통성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동로마 제국의 승리로 불가리아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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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반면,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보다 외교적·정치적 수단을 활용하여 동로마 제국과 경쟁하였으며, 동로마 황제위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과 오스만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전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불가리아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약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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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이처럼 두 시기의 불가리아 제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동로마 황제위 계승과 관련된 야망을 드러냈으나, 결국 불가리아 군주들이 동로마 황제위를 차지하는 일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불가리아 제국이야 말로 그나마 진정항 의미의 동로마 제위에 가장 가까웠으나 그 조차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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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 [[라틴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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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라틴 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차지하면서 수립된 국가로,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유럽 봉건 제후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세워진 정권으로, 기존 동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와 정치적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라틴 제국의 황제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을 근거로 자신들이 로마 황제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승인 아래 이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동로마 제국의 법적·문화적 전통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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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동로마 제국은 오랜 세월 동안 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황제권은 교회를 수호하고 관료제를 통해 제국을 다스리는 전통적 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라틴 제국은 서유럽의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라틴 제국의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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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특히, 동로마 제국의 귀족과 지식인 계층은 라틴 제국을 서유럽 십자군이 강압적으로 세운 불법적인 정권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주요 귀족과 지도층은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공국과 같은 후계 국가들이 형성되었으며, 이 중 니케아 제국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니케아 제국은 동방 정교회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한편, 라틴 제국의 지배를 부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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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이러한 대립은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면서 종결되었다.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였고, 라틴 제국은 붕괴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전통이 라틴 제국의 지배보다 더 강력하게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라틴 제국은 동로마 황제위를 계승하려 했으나, 기존의 행정 체계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으며, 동방 정교회를 따르는 주민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단명한 국가로 남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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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 세르비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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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로마 제국의 계승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더욱 복잡해졌고, 주변의 여러 강대국들이 자신을 로마의 정통 후계자로 내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세르비아 제국은 니케아 제국과 더불어 동로마 황제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유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스테판 두샨의 통치 아래 세르비아 제국은 단순한 지역 강국이 아닌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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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 세르비아는 본래 동로마 제국과 신하 관계를 유지하며 자치권을 인정받는 형태로 존재했으나, 13세기 후반부터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이 잇따른 내전과 외세의 압박으로 크게 약화되면서, 세르비아의 세력 확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 이후 요한네스 5세와 요한네스 6세의 내전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이는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와 신흥 강국인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배경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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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 이러한 혼란을 틈타 스테판 두샨은 1346년 세르비아 수도 스코페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명확한 동로마 계승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 칭호를 사용한다고 해서 단순히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었고, 두샨은 동로마 황제가 가진 종교적 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강수를 두었다. 기존 동로마 황제가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로서 권위를 행사한 것처럼, 세르비아 총대주교가 자신을 정통 황제로 인정하도록 만들면서 황제의 종교적 권위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세르비아 제국이 동로마 황제로서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걸림돌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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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스테판 두샨은 단순히 칭호를 선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하여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에피루스 등지를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동로마의 중요한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몇 가지 현실적인 장애물에 부딪혔다. 첫째,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일시적인 동맹을 고려했지만, 오스만 세력은 점점 강대해지면서 결국 세르비아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해갔다. 둘째, 세르비아 제국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독립성이 강했고, 중앙집권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제국의 통일성이 부족했다. 셋째, 1355년 스테판 두샨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원대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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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 두샨 사후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슈 5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세르비아 제국은 급속도로 분열되었다. 지방의 귀족들은 점차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중앙 정부와의 연계를 약화시켰고, 제국은 강한 통합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갔다. 결국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대는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였고, 이는 세르비아 제국이 붕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세르비아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으며 결국 1453년 멸망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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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세르비아 제국이 동로마 황위를 계승하려 했던 시도는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이는 동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점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지 못한 점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황제 칭호를 선언하고, 정교회의 독립을 통해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며, 군사적 확장을 통해 동로마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동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기에는 부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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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결국 세르비아 제국의 계승론은 일시적인 정치적 야망에 그쳤으며, 역사적으로도 실질적인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로마의 붕괴와 함께 세르비아 역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스테판 두샨의 위대한 야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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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
| 84 | ==== 오스만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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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 러시아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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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 근대적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로마 계승 의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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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8
| 87 | === [[이탈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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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 [[그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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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5
| 89 | === 루마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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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2
| 90 | == 여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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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3
| 91 | 여담으로 대한민국이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주장은 인터넷 밈화되어 주장되고 있는데, 이 밈에서는 대한민국과 로마 제국의 유사점을 다양한 요소에서 찾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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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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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 예를 들어,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은 대한 해협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와 대한민국의 군부 정권을 비교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 중 하나가 교황청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와의 기독교적 연결고리를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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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 이 외에도, 대한민국의 발달된 도로망을 로마의 도로 체계와 비교하거나, 북한의 군사 경제 구조를 로마의 둔전병(테마) 제도와 유사하다고 사거나, 더 나아가 한반도의 분단이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열과 닮았다는 점, 북한 김씨 일가의 통치 방식이 왕은 아니지만 왕이다라는 점에서 로마 황제의 사실상 세습과 비슷하다는 점도 밈화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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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대한민국이 ‘제4의 로마’ 혹은 ‘로마의 후예’라는 밈이 형성되었으며, 로마 관련 떡밥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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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5
| 98 | ==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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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7
| 99 | * [[황제/유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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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5
| 100 | * [[로마인의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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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 * [[두 황제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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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 [[제3의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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