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바이킹 정착 이전[편집]
기원전 4세기경 고대 그리스 탐험가 피테아스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1]을 거쳐 도달한 극북의 땅 툴레(Thule)가 바로 아이슬란드라는 설이 있지만, 페로 제도, 노르웨이 등 다른 지역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어서 아직까진 확실하지 않다.
3세기 로마 주화가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일부 고대 로마인 집단이 아이슬란드까지 도달한 것이 확인되지만, 해당 집단의 정착이 장기간 지속되지는 못했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로마의 중앙정부에서는 이를 인지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슬란드인의 조상이 된 바이킹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자신들이 이주해오기 전에 파파르(Papar)라는 게일인 수도사 집단이 거주하고 있다가, 이교도 바이킹과 섞이기 싫어한 그들이 섬을 떠나면서 바이킹이 차지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정착한 시기와 역사성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3세기 로마 주화가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일부 고대 로마인 집단이 아이슬란드까지 도달한 것이 확인되지만, 해당 집단의 정착이 장기간 지속되지는 못했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로마의 중앙정부에서는 이를 인지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슬란드인의 조상이 된 바이킹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자신들이 이주해오기 전에 파파르(Papar)라는 게일인 수도사 집단이 거주하고 있다가, 이교도 바이킹과 섞이기 싫어한 그들이 섬을 떠나면서 바이킹이 차지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정착한 시기와 역사성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3. 바이킹의 정착[편집]
870년경 잉코울뷔르 아르트나르손이라는 바이킹이 무리를 이끌고 정착했고, 이후 여러 바이킹 집단이 이주하여 부족 사회를 형성했다.
4. 아이슬란드 연방[편집]
930년에 아이슬란드의 여러 부족들이 합의하여 아이슬란드 연방 또는 아이슬란드 연방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아이슬란드 연방은 세계 최초로 의회 제도를 실시한 나라였으며, 알팅그라는 의회에서 알스헤랴르고디, 로그마드 등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아이슬란드 연방은 초기에는 북유럽 신화를 믿었으나, 이후 가톨릭을 받아들여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상당수가 노르웨이계 이민자들이라 노르웨이와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했는데, 섬의 부족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연방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자 1262년에 노르웨이 국왕에게 합병을 청원하면서 노르웨이령이 되었다.
아이슬란드 연방은 세계 최초로 의회 제도를 실시한 나라였으며, 알팅그라는 의회에서 알스헤랴르고디, 로그마드 등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아이슬란드 연방은 초기에는 북유럽 신화를 믿었으나, 이후 가톨릭을 받아들여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상당수가 노르웨이계 이민자들이라 노르웨이와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했는데, 섬의 부족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연방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자 1262년에 노르웨이 국왕에게 합병을 청원하면서 노르웨이령이 되었다.
5. 노르웨이령 ~ 덴마크령 아이슬란드[편집]
1262년 이래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 왕국에 속했고, 1397년에 덴마크 국왕이 노르웨이 및 스웨덴 왕위까지 겸임하는 칼마르 연합이 형성되자, 아이슬란드는 법적으로는 노르웨이령이면서도 덴마크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 되었다.
다만 노르웨이, 덴마크 치하에서도 아이슬란드 의회(알팅그)는 수백년 동안 유지되었고, 노르웨이 및 덴마크 군주들은 아이슬란드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제하기보다는 알팅그에 권한을 위임하여 자치권을 보장했다.
1523년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을 탈퇴하면서 연합은 덴마크-노르웨이로 재편되었는데, 덴마크-노르웨이 치하에서 루터교회가 가톨릭 대신 국교로 선포되어, 가톨릭 교세가 거의 소멸하고 루터교회가 주류를 차지하는 현재 아이슬란드의 종교 분포가 형성되었다.
1799년에 알팅그가 폐지되면서 노르웨이(사실상 덴마크)의 통제가 강해졌다.
1814년에는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했으나, 이전까지 법적으로 노르웨이령이던 아이슬란드는 정식으로 덴마크령이 되었다.
덴마크 치하에서 아이슬란드 자치운동이 일어나자 덴마크 정부는 1844년 아이슬란드 의회(알팅그)가 45년만에 부활하는 것을 승인했다.
1874년부터 덴마크 내각의 아이슬란드 장관이 아이슬란드 행정을 담당하며 입법을 담당하는 아이슬란드 의회와 공존했으나, 1904년부터는 아이슬란드 의회 다수당 대표가 아이슬란드 장관을 맡으면서 아이슬란드는 행정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다만 노르웨이, 덴마크 치하에서도 아이슬란드 의회(알팅그)는 수백년 동안 유지되었고, 노르웨이 및 덴마크 군주들은 아이슬란드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제하기보다는 알팅그에 권한을 위임하여 자치권을 보장했다.
1523년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을 탈퇴하면서 연합은 덴마크-노르웨이로 재편되었는데, 덴마크-노르웨이 치하에서 루터교회가 가톨릭 대신 국교로 선포되어, 가톨릭 교세가 거의 소멸하고 루터교회가 주류를 차지하는 현재 아이슬란드의 종교 분포가 형성되었다.
1799년에 알팅그가 폐지되면서 노르웨이(사실상 덴마크)의 통제가 강해졌다.
1814년에는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했으나, 이전까지 법적으로 노르웨이령이던 아이슬란드는 정식으로 덴마크령이 되었다.
덴마크 치하에서 아이슬란드 자치운동이 일어나자 덴마크 정부는 1844년 아이슬란드 의회(알팅그)가 45년만에 부활하는 것을 승인했다.
1874년부터 덴마크 내각의 아이슬란드 장관이 아이슬란드 행정을 담당하며 입법을 담당하는 아이슬란드 의회와 공존했으나, 1904년부터는 아이슬란드 의회 다수당 대표가 아이슬란드 장관을 맡으면서 아이슬란드는 행정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