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룩셈부르크
1. 개요2. 고대3. 중근세
3.1. 중세 초기
3.1.1. 룩셈부르크 백국3.1.2. 룩셈부르크 공국
4. 근현대
4.1. 프랑스의 지배4.2. 룩셈부르크 대공국
4.2.1. 네덜란드의 지배4.2.2.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통치

1. 개요[편집]

룩셈부르크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고대[편집]

고대에는 켈트계 민족인 갈리아인이 거주하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에 정복되면서 로마령 갈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3. 중근세[편집]

3.1. 중세 초기[편집]

중세 초기 룩셈부르크는 프랑크 왕국과 그 후신인 중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왕국 등의 지배를 받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인 니더로트링겐 공국에 속했다.

3.1.1. 룩셈부르크 백국[편집]

지크프리트라는 이름의 귀족백작을 칭하고 통치하면서 룩셈부르크 백국이 형성되었고, 해당 인물을 시조로 하는 가문은 룩셈부르크 가문이 되었다.

초기 룩셈부르크 가문은 한미한 백작가에 불과했으나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대귀족들의 합의를 통해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로 선출되면서[1] 명문가로 부상했고,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요한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로 즉위하면서 보헤미아 왕국[2]까지 차지했다.

3.1.2. 룩셈부르크 공국[편집]

룩셈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실 및 보헤미아 왕실로서의 입지를 확보하자 그 발상지인 룩셈부르크 백국 역시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다만 룩셈부르크 가문의 수장들은 황제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인 보헤미아의 가치에 주목하여 보헤미아로 근거지를 옮겼기에, 룩셈부르크 가문이 가진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룩셈부르크 공국이 제국 내에서 가진 입지는 백국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된 이후에는 여러 가문이 룩셈부르크 공작위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다가 16세기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룩셈부르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4. 근현대[편집]

4.1. 프랑스의 지배[편집]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룩셈부르크 공국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 나폴레옹이 멸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4.2. 룩셈부르크 대공국[편집]

4.2.1. 네덜란드의 지배[편집]

1815년 빈 회의 결과 룩셈부르크는 다시 프랑스에서 분리되었는데, 전쟁 이전과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네덜란드 왕가인 오라녀나사우 가문의 영지가 되어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다.

1831년 벨기에 독립전쟁 당시 룩셈부르크에서도 네덜란드 국왕의 지배에 반대하는 세력이 봉기하여 벨기에 뤽상부르 주로 떨어져 나갔지만, 수도 룩셈부르크 시를 비롯한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중심부는 계속 네덜란드와의 동군연합으로 남았다.

4.2.2.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통치[편집]

1890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사망하자 네덜란드에서는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했으나, 룩셈부르크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나라였기에 먼 친척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에게 룩셈부르크 대공위가 돌아갔고, 이로써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1] 백작으로서의 넘버링과 황제로서의 넘버링이 우연히 둘다 '하인리히 7세'로 겹쳤다.[2] 지금의 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