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개요[편집]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 1939년 8월 9일 ~ )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이다. 이탈리아 총리를 두 차례(1996~1998, 2006~2008) 역임하였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장(1999~2004)을 지낸 인물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한 정치 거물이다.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이다. 이탈리아 총리를 두 차례(1996~1998, 2006~2008) 역임하였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장(1999~2004)을 지낸 인물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한 정치 거물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939년 8월 9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스칸디아노에서 태어났다. 1961년 밀라노에 위치한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를 졸업한 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건너가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볼로냐 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있었으며, 그 후에는 일 뮬리노 출판사 회장직을 맡았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볼로냐 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있었으며, 그 후에는 일 뮬리노 출판사 회장직을 맡았다.
2.2. 정치 입문[편집]
젊은 시절부터 기독교민주당 당원이었으며, 1978년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로부터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5개월만에 물러났다.
1982년에는 산업부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1993년에 같은 공직에 다시 임명되어 1994년까지 재직했다. 1993년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사회당을 포함한 여러 야당이 반대하자 이를 번복하고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중앙은행 총재를 대신 임명했다.
1982년에는 산업부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1993년에 같은 공직에 다시 임명되어 1994년까지 재직했다. 1993년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사회당을 포함한 여러 야당이 반대하자 이를 번복하고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중앙은행 총재를 대신 임명했다.
2.3. 제1차 총리 재임 (1996~1998)[편집]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좌파정당이 규합된 선거연합 올리브나무(L'Ulivo)의 총리후보로 추대되었다. 좌파정당 내 최대 세력인 좌파민주당을 이끌던 마시모 달레마를 대신해 그가 총리후보로 오르게 된 데는 기독교민주당과 경제학자 출신이기에 중도층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총선에서 올리브나무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연합을 근소한 표차로 꺾고 원내 다수 세력이 되었다. 다만 상하원 모두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해 올리브나무는 집권을 위해 재건공산당의 협조를 얻어야만 했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이동통신 기관을 민영화하고 정부 공무원 개혁에 나섰다. 이러한 정책은 연합 내 강성 좌파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1997년 재건공산당이 긴축 예산안에 반발해 내각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으나 재건공산당과 근로시간 단축 등을 합의한 후 내각 신임투표를 통과해 총리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 10월 9일 새 예산안이 빈민층 지원에서 소홀하다는 이유로 재건공산당에서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찬성 313표, 반대 312표로 1표차로 가결되자 스칼파로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달레마가 총리직에 올랐다.
총선에서 올리브나무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연합을 근소한 표차로 꺾고 원내 다수 세력이 되었다. 다만 상하원 모두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해 올리브나무는 집권을 위해 재건공산당의 협조를 얻어야만 했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이동통신 기관을 민영화하고 정부 공무원 개혁에 나섰다. 이러한 정책은 연합 내 강성 좌파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1997년 재건공산당이 긴축 예산안에 반발해 내각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으나 재건공산당과 근로시간 단축 등을 합의한 후 내각 신임투표를 통과해 총리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 10월 9일 새 예산안이 빈민층 지원에서 소홀하다는 이유로 재건공산당에서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찬성 313표, 반대 312표로 1표차로 가결되자 스칼파로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달레마가 총리직에 올랐다.
2.4.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1999~2004)[편집]
2.5. 제2차 총리 재임 (2006~2008)[편집]
2006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을 막기 위한 범좌파 연합의 총리후보로 다시 한 번 뽑혀 선거를 지휘했다. 당초 압승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좌파 연합은 우파 연합을 근소한 차로 이겼으며, 이로 인해 총리직에 다시 오른 후로도 여러 갈등에 시달렸다.
2007년에는 민주당 초대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내부 갈등 끝에 2008년에 내각 불신임이 가결되자 총리직과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에는 민주당 초대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내부 갈등 끝에 2008년에 내각 불신임이 가결되자 총리직과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6. 정계 은퇴 후[편집]
이후 2013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 중 하나로 부상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3.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2000년 서울 아시아·유럽 정상회의 때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2000년 ASEM 회의 참석차 줄리아노 아마토 총리가 이탈리아 총리로는 처음 방한하였으나, 양국 정상 회담을 위한 방한은 2007년 4월 프로디 총리가 처음이었다. 2007년 방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4. 평가[편집]
프로디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이탈리아 정치를 양분한 정치 거물로 평가받는다. 경제학자 출신답게 경제 정책에 강점을 보였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시절 유로 도입과 동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 가입이라는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좌파 연합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두 번의 총리 재임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한계를 보였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좌파 연합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두 번의 총리 재임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한계를 보였다.
5. 여담[편집]
- 이탈리아 정치인 가운데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학자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전에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이 때문에 정계에서는 “교수 총리”라는 별명이 자주 붙었고, 토론에서 감정보다 수치와 구조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외모와 말투 또한 이탈리아 정치인 치고는 차분한 편으로, 열정적이고 과장된 제스처가 흔한 이탈리아 정치 문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러한 성향은 지지자들에게는 신뢰감으로 작용했지만, 반대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의 대비 구도에서 이러한 차이가 더욱 부각되었다.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재임 시절에는 유럽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 프로디는 유럽연합의 확대 정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의 행정 비대화와 관료주의 심화에 대한 비판도 함께 받았다.
- 이탈리아 총리로 두 차례 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내내 정치적 기반은 불안정했다. 특히 연립정부의 특성상 소수 정당들의 이탈과 반발로 정국이 흔들리는 일이 잦았는데, 이는 프로디 개인의 리더십 문제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정치 구조 자체의 문제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 공화국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의회 신임을 유지하거나 상실한 총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는 개인적 성향부터 정치 스타일, 미디어 활용 방식까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베를루스코니가 언론 재벌 출신으로 대중적 선동과 이미지 정치에 능했다면, 프로디는 제도와 합의를 중시하는 전통적 정치인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대결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이탈리아 정치 노선의 충돌로 자주 묘사되었다.
- 프로디는 개인 비리나 사생활 문제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이탈리아 정치에서 부패 스캔들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특이한 이력으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정치적 타협 과정에서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비판도 동시에 따라다녔다.
-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완전히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지는 않았으며, 간헐적으로 이탈리아 정치 현안이나 유럽 통합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해 왔다. 다만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상징적 원로 정치인에 가까운 위치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 이탈리아 현대 정치사에서 로마노 프로디는 강력한 지도자라기보다는 과도기적 조정자, 혹은 제도적 안정성을 추구한 관리자형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지지층과 비판층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유럽 통합과 이탈리아 중도좌파 진영의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만큼은 대체로 공통된 평가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