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독립운동[편집]
1907년 7월 서울에서 윤이병이 주도한 동우회에 참여하여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에 반대하는 항일 시위에 가담하였다. 동우회는 1907년 6월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윤이병을 회장, 김재붕을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황실 존중, 청년 교육, 동양 평화를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광무황제의 퇴위와 일본의 내정 간섭에 반발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회원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1907년 7월 18일과 19일, 동우회는 회관에서 연속 특별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또한 광무황제에게 올릴 상소를 준비하기 위해 종로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항의 운동을 조직하였다. 당시 윤이병은 종로와 남대문 일대에서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며 광무황제의 일본행 저지와 퇴위 반대를 호소하였고, 이에 호응한 시민들은 대한문과 포덕문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제지에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하기도 하였다.
이후 광무황제의 일본 방문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퇴위가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자 동우회는 더욱 강력한 항쟁을 결의하였다. 7월 20일 동우회원과 시민 수천 명은 석고단에 집결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강태현과 송영근을 지휘자로 선출하였다. 이어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광수는 당시 동우회 이사로서 이러한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에서 내란죄 혐의로 유형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섬 지도로 유배되어 생활하였다.
1907년 7월 18일과 19일, 동우회는 회관에서 연속 특별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또한 광무황제에게 올릴 상소를 준비하기 위해 종로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항의 운동을 조직하였다. 당시 윤이병은 종로와 남대문 일대에서 군중을 상대로 연설하며 광무황제의 일본행 저지와 퇴위 반대를 호소하였고, 이에 호응한 시민들은 대한문과 포덕문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제지에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하기도 하였다.
이후 광무황제의 일본 방문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퇴위가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자 동우회는 더욱 강력한 항쟁을 결의하였다. 7월 20일 동우회원과 시민 수천 명은 석고단에 집결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강태현과 송영근을 지휘자로 선출하였다. 이어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광수는 당시 동우회 이사로서 이러한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07년 12월 29일 평리원에서 내란죄 혐의로 유형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섬 지도로 유배되어 생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