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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r3 B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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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실향민]][[분류:현대그룹 회장]][[분류:현대건설/인물]][[분류:대학교 설립자]][[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창업주]][[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분류:대한체육회 회장]][[분류:세종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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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fdb911><tablebgcolor=#ffffff,#191919><colbgcolor=#00a650><colcolor=#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4'''현대그룹 초대 회장[br]{{{+1 정주영}}}[br]鄭周永|Chung Ju-yung'''}}} ||
5||<-2> {{{#!wiki style="margin: -6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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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파일:정주영.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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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width=25%> '''출생''' ||[[1915년]] [[11월 25일]][* 음력 10월 19일.] ||
8||[[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br](現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북한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 ||
9||<|2> '''사망'''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 ||
10||[[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서울중앙병원]][* 사후 2002년 고인의 뜻에 따라 현재 명칭인 서울아산병원으로 변경했다.][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11||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12||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
13|| '''호''' ||아산(峨山) ||
14|| '''직업''' ||[[기업인]], [[정치가]] ||
15|| '''학력''' ||송전공립보통학교 {{{-2 ([[졸업]])}}}[* 현재의 초졸에 해당하나 당시에는 무학도가 많았다. 이후 고려대, 서강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6|| '''서명''' ||[[파일:IE002283935_STD.jpg|width=100&bgcolor=#ffffff]] ||
17||<-2><bgcolor=#ffffff,#1f2023><color=#373a3c,#ddd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18{{{#!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colbgcolor=#00a650><colcolor=#ffffff><width=25%>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1886년]]~[[1953년]] [[1월]], 향년 69세.] ||
21|| '''형제자매''' ||남동생 [[정인영(기업인)|정인영]], [[정순영]], [[정세영]], [[정신영]], [[정상영]][br]여동생 정희영 ||
22|| '''배우자''' ||변중석^^(1921~2007)^^[* 1930년대 정주영과 결혼했다. 변 여사 동네에 살던 정주영의 숙부가 후덕한 변 여사를 맘에 들어해 [[선]]을 연결해 서울에서 정주영이 통천군으로 왔다 얼굴 한 번 보고 한 달 보름 후 빠른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정주영과 서울로 가 같이 고생하며 식구들 챙기고 남편을 내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결혼 이후 본인은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친정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가 좀처럼 만나지 못하다, 분단이 되면서 진짜 평생 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이 점을 정주영도 미안해했고, 변중석도 남편 역시 마찬가지 신세라며 이해했다. 다만, 정주영의 바람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
23|| '''자녀''' ||장남 [[정몽필]]^^(1934~1982)^^[br]차남 [[정몽구]]^^(1938~ )^^[br]삼남 [[정몽근]]^^(1942~ )^^[br]장녀 정경희^^(1944~ )^^[br]사남 [[정몽우]]^^(1945~1990)^^[br]오남 [[정몽헌]]^^(1948~2003)^^[br]육남 [[정몽준]]^^(1951~ )^^[br]칠남 [[정몽윤]]^^(1955~ )^^[br]팔남 [[정몽일]]^^(1959~ )^^[br]차녀 정정인^^(1979~ )^^[br]삼녀 정정임^^(1981~ )^^ ||
24|| '''신체''' ||175cm[* 일제강점기 평균 신장이 163cm이었음을 고려하면, 단순 계산으로는 지금의 185.7cm와 대응된다고 보면 된다. 상당한 장신이었던 셈이다. 1992년 78세의 나이에 한 신체 검사에서는 신장이 조금 줄어서 173cm이었다. 모친이 신장이 큰 편이었다고 한다. 부인 변중석 여사는 신혼 첫날밤 정주영 체구가 커서 무서웠다고 한다.], 72kg, [[O형]] ||
25|| '''의원 선수''' ||'''1''' ||
26|| '''의원 대수''' ||'''[[제14대 국회의원|14]]''' ||
27|| '''종교''' ||[[유교]] → [[개신교]] {{{-2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 임종 직전, 아들 [[정몽준]]의 권유로 [[온누리교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본당) 담임목사였던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http://www.kbbchurch.com/?mid=propesal&trackback_srl=7854&page=4&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document_srl=2805|#]] 정몽준의 부인이자 여섯째 [[며느리]]인 김영명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http://m.kmib.co.kr/view.asp?arcid=0005516899#RedyAi|#]]] ||
28|| '''병역''' ||해당 사항 없음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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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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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개요 ==
34>'''[[https://www.youtube.com/watch?v=dZjpEcMmcYk)|"이봐, 채금자(책임자). 해 보기나 했어?"[* 이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섣불리 포기하려 들지 말고 적어도 시행착오는 겪어보고 결정하라는 얘기다. 물론 후술하고 있듯, 이 말 듣고 진짜 무리하게 하다가 사업 실패한 사람을 일컬어 기업가에서 '''정주영 병'''이란 말도 나돌 정도니,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시도를 해 보든지 하자.] ]]'''
35>-----
36>'''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2001년에 나온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
37>-----
38>정주영 어록 중 유명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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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가]]. 별칭은 '왕회장'[* 재계 서열 1위였고 재벌 중에 왕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초졸|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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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930년대 [[쌀]] 배달부터 시작해 [[자동차]] [[정비]]업, [[건설]]업 등을 거치며, 20세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기업인이었으며, 1990년대에는 [[통일국민당|정계에도 진출]]했지만, 낙선한 후 1998년에는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하다 20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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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는 '아산(峨山)'이다. 북한 강원도 지역에 있는 고향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통천군의 '''아산'''리 지역으로 북한 행정 구역상 로상리(노상리)로 개칭했다. 즉, 충청남도 아산시와는 상관없다.] 오늘날 울산광역시에는 그의 호를 딴 [[아산로(울산)|아산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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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생애 ==
47[[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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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그의 호는 고향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남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이것을 [[충청남도]] [[아산시|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관련이 없긴 하지만 아산시에 대형 의료기관이 없어서 제발 아산병원좀 와달라고 절규하는 아산시민들이 많다(...) 또한 이곳에도 현대자동차 공장이 아산시 인주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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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졸|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동생들의 학력은 준수하다. 둘째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을 중퇴했고, 넷째 동생 정세영 현대산업개발그룹 명예회장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 기자는 독일에서 유학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맏형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이 죽을 때까지 맏형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을 가능성ㅡ도 높다. 그리고 1910년대 출생자의 초졸을 현대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 당시는 정규 학교 근처에도 못간 무학이 인구 비율로 굉장히 많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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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 부친이 소를 판 돈인 70원.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소 한 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보냈다. 이후 얘기가 나온 바로는 모두 암소인 데다가 새끼를 밴 소여서 1001마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레디메이드 인생|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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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 그 시대의 부잣집 자제들 중에는 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사냥, 도박, 주색으로 소일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사냥꾼들은 [[윈체스터(총기회사)|윈체스터]] [[윈체스터 소총|라이플]]로 무장했는데, 이 윈체스터가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값비싼 소총이었다. 혹은 [[김용환]]처럼 위장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청년 정주영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이 복흥상회 외아들이 어느 부류를 택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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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딛고 일어서서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속에서 이루어낸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다. 또한 어느 기업인들보다 청렴하고 국민들이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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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https://web.archive.org/web/20110411005235/http://www.time.com/time/asia/2006/heroes/bl_yung.html|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