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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창당2.2. 발췌 개헌2.3. 이승만의 재선2.4. 사사오입 개헌2.5. 이승만의 3선2.6. 몰락
2.6.1. 몰락의 전주곡: 2.28 민주화 운동2.6.2. 몰락의 신호탄: 3.15 부정선거2.6.3. 파멸: 4.19 혁명과 5대 총선2.6.4. 5.16 군사정변과 강제 해산
2.7. 1963년 재창당
3. 주요 인물
3.1. 대통령3.2. 총재
4. 선거 결과

1. 개요[편집]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이승만 정부의 집권여당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가 4.19 혁명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심의 심판을 받아 몰락했고, 5.16 군사정변 직후 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당[편집]

1951년에 여러 친이승만 계열 정치단체 및 정파들이 통합하여 자유당을 창당했다.

2.2. 발췌 개헌[편집]

야당이 다수 의석을 갖고 있던 국회의 간접 선거로는 이승만의 재선이 불가능해지자, 야당 국회의원들의 출근버스를 견인하여 구금하는 등의 불법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단행했다.

2.3. 이승만의 재선[편집]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에 성공했다.

2.4. 사사오입 개헌[편집]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려 했는데, 당시 의결 정족수인 135.333... 석에 모자라는 135표만이 개헌안에 찬성하여 부결되자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136표가 아닌 135표를 정족수로 간주함으로써 가결로 바꾸었다.

2.5. 이승만의 3선[편집]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치러진 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장면 후보가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이승만 대통령 유고시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2.6. 몰락[편집]

2.6.1. 몰락의 전주곡: 2.28 민주화 운동[편집]

1960년 4대 대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4선에 도전하였고, 동시에 치러진 5대 부선에는 이기붕이 다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는데, 민주당 대선후보 조병옥이 대선 이전에 사망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사실상 확정되었다.[1]

그러나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까지 가져가기 위해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방해했는데, 이 과정에서 장면 후보의 대구시[2] 유세가 있을 예정인 2월 28일 일요일에 대구시 고등학생들의 등교를 강제하자, 이에 반발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며 2.2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2.6.2. 몰락의 신호탄: 3.15 부정선거[편집]

투표일인 3월 15일에 자유당은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는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2.6.3. 파멸: 4.19 혁명과 5대 총선[편집]

3.15 마산의거 당시 최루탄에 피격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것과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무력 진압한 행위는 4월 19일에 이르러 시위가 본격적인 혁명으로 발전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혁명 총선'인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의원(상원)과 민의원(하원) 모두 절대다수 의석을 획득한 반면 자유당은 한자릿수 의석 확보에 그치면서 완전히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2.6.4. 5.16 군사정변과 강제 해산[편집]

5대 총선 이후에도 자유당은 원내정당으로서 존속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사라졌다.

2.7. 1963년 재창당[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자유당(1963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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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자유당 인사들은 1963년에 같은 이름으로 당을 재건했는데, 해당 정당은 1970년까지 존속하다가 신민당에 흡수합당되면서 사라졌다.[3]

3. 주요 인물[편집]

3.1. 대통령[편집]

3.2. 총재[편집]

4. 선거 결과[편집]

[1] 무투표 당선이 아니라 사실상 확정인 이유는 후보가 1명만 남아도 투표는 예정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2] 당시에는 아직 대구광역시가 아닌 경상북도 대구시였다.[3] 역설적이게도 신민당은 제1공화국 시절 라이벌이던 민주당을 계승한 정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