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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6대 국왕 단종 | 端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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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표준영정 |
1. 개요[편집]
조선의 제6대 국왕. 묘호는 단종(端宗),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1], 휘는 홍위(弘暐).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야사, 민담, 전설 등 많은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수양대군 일당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다. 당장 숙종 때 단종 복위를 논하면서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이러한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아직도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와 사육신제는 영월의 명물로 홍보되고 있다.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야사, 민담, 전설 등 많은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수양대군 일당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다. 당장 숙종 때 단종 복위를 논하면서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이러한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아직도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와 사육신제는 영월의 명물로 홍보되고 있다.
2. 평가[편집]
유시민은 <알쓸신잡> 영월편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결코 옳지 못했던 세조에 대한 민중의 역사적 단죄라고 해석했다. 백성들로서는 단종이 계유정난을 겪지 않고 오래 집권했다고 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정도의 군주가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고 단종 자신의 집권기 동안 무언가 자신들을 위해 남긴 업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2] 특별히 어떤 정치적 실책이나 정통성의 흠결도 없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 죽음을 맞은 희생양이기에 더욱 그를 추모하고 동시에 그럴싸한 좋은 목표를 내세우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부정한 방법과 수단을 정당화하는 일이 역사에 또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는 것.
다만 여기서 유시민은 세조에 대해 "단종의 일만 아니었다면 세종대왕급은 아니더라도 정조 정도의 평은 받았을 것"이라며 세조의 치적을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세조가 세종, 문종 치하에서 실무를 오래 맡아 보는 등 아주 능력 없는 인물은 아니었고 명석한 사람이었던 건 맞지만, 이미 시작(탈법의 극치로 집권)부터 큰 문제가 있던, 즉 유시민이 말한 '단종의 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임금이 되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세조 치하에서 중요한 핵심 인재들이 대거 소멸되고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하는 등 그 실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상당히 부실하다. 정조의 경우 비록 나름대로 한계는 있었어도 일단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한 명군이었고 최소한 세조 수준의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정조 사후에 생겨난 여러 문제점은 정조 본인의 책임보다는 조선왕조 전체의 적폐에 더 가까운 편이다.
사실 이는 비단 유시민뿐 아니라 유시민 세대의 사람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군사정권 시절의 세조 미화에 따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감이 있다. 그리고 세조가 본격적으로 암군 취급을 받게 된 것도 2010년대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세조를 비판하더라도 쿠데타 및 과도한 정적 숙청을 비판할 뿐 군주로서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즉, 민주화 이후 세조가 부정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할 때도 2010년대 이전까지 세조는 쿠데타와 별개로 군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게 대중의 인식이었다.
다만 여기서 유시민은 세조에 대해 "단종의 일만 아니었다면 세종대왕급은 아니더라도 정조 정도의 평은 받았을 것"이라며 세조의 치적을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세조가 세종, 문종 치하에서 실무를 오래 맡아 보는 등 아주 능력 없는 인물은 아니었고 명석한 사람이었던 건 맞지만, 이미 시작(탈법의 극치로 집권)부터 큰 문제가 있던, 즉 유시민이 말한 '단종의 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임금이 되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세조 치하에서 중요한 핵심 인재들이 대거 소멸되고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하는 등 그 실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상당히 부실하다. 정조의 경우 비록 나름대로 한계는 있었어도 일단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한 명군이었고 최소한 세조 수준의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정조 사후에 생겨난 여러 문제점은 정조 본인의 책임보다는 조선왕조 전체의 적폐에 더 가까운 편이다.
사실 이는 비단 유시민뿐 아니라 유시민 세대의 사람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군사정권 시절의 세조 미화에 따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감이 있다. 그리고 세조가 본격적으로 암군 취급을 받게 된 것도 2010년대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세조를 비판하더라도 쿠데타 및 과도한 정적 숙청을 비판할 뿐 군주로서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즉, 민주화 이후 세조가 부정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할 때도 2010년대 이전까지 세조는 쿠데타와 별개로 군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게 대중의 인식이었다.
3. 사망[편집]
단종은 유배 이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나 이후의 다양한 기록들로 인해 타살의 가능성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세조 3년(丁丑年)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淸泠浦)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장릉지
병자년 12월 25일에 우승지 신상(申鏛)이 노산(魯山 단종)을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노산의 묘(墓)는 영월군(寧越郡) 서편 5리 밖 길가에 있는데 모두 무너지고 높이가 겨우 2척 남짓 했다. 무덤 옆에는 여러 무덤이 널려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군왕(君王)의 묘(墓)라고 불러왔고 비록 어린애라도 능히 알아낼 수가 있었으며 또 여러 무덤은 모두 돌이 곁에 벌려 있는데 유독 이것만은 그런 것이 없었다. 당초에 노산이 죽던 날에 진무사(鎭撫使)가 와서 형벌하는 것을 감시할 제 핍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서 시체를 밖에 내버려두니, 읍재(邑宰 군수)와 종인(從人)들은 그 위엄에 겁내어 감히 시체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군(郡)의 수리(首吏) 엄흥도(嚴興道)란 자가 가서 곡하고 관(棺)을 가지고 가서 염습(斂襲)했는데, 그 관은 곧 관노(官奴)가 만든 것으로 화재가 무서워서 고을의 옥에 갖다 두었던 것을 갖다가 쓴 것이었다. 혹 다른 이론(異論)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즉시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라 한다. 사기(史記)에, “노산이 물러나 영월에 있다가 금성(錦城)이 패했단 말을 듣고 자진(自盡)했다.”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어서 한 말이었다. 대개 후일에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자들은 모두 당시에 아첨하던 자들이었고, 계병일록(癸丙日錄)도 자못 이같은 것이 많다. 혹은 말하기를, “노산의 묘(墓)는 충의(忠義)가 있는 무리들이 몰래 시체를 빼다가 옮겨 장사지낸 것이라.” 하나, 역시 근거 없이 전하는 말이다. 다만 고을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애통해 하고 제물을 차려 제사지내며, 심지어 길흉(吉凶)이나 화복(禍福)을 당해서도 모두 여기 나가서 제사지내서, 비록 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해 내려오는 말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정인지(鄭麟趾) 같은 간사한 적신(賊臣)들에게 격동되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마치지 못하게 했으니, 아, 옛날부터 충절(忠節)의 선비란 반드시 대대로 녹을 받는 귀한 집안에서 나는 것은 아니로다. 당시에 임금을 팔아서 이익을 도모하고 반드시 그의 임금을 지나친 환란 속에 두게 한 연후에라야 마음이 쾌했던 자들은 그가 음군(陰君 염라대왕)을 볼 때에 어떻게 하였겠는가. 한편 촌에 있는 부녀나 마을 어린이들은 마음으로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흉변을 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울분에 쌓여 불평하면서 그 말이 입에서 나오고 소리로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사람의 성품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을 알겠다.음애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