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포네 Al Capone | |
본명 | 알폰스 가브리엘 카포네 Alphonse Gabriel Capone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신체 | 178cm, 95kg |
부모 | 아버지 가브리엘리 카포네 어머니 테레사 카포네 |
배우자 | 메이 코플린 |
자녀 | 1 |
1. 개요2. 가문 배경3. 생애
3.1. 브루클린의 유년기3.2. 시카고 이주3.3. 콜로시모 암살과 세대교체의 서막3.4. 시서로 점령3.5. 시카고 아웃핏의 팽창3.6. 정치권과의 결탁3.7. 오배니언과의 갈등3.8. 플라워 샵의 처단3.9. 토리오의 은퇴3.10. 밤의 대통령3.11. 하이미 와이스의 최후3.12. 1926년 호텔 회담과 일시적인 휴전3.13.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3.14. 조직 내 프락치 숙청과 '야구 배트' 사건3.15. 애틀랜틱 시티 회의3.16. 허버트 후버3.17. '엘리어트 네스와 언터처블 부대'의 활약3.18. 재판3.19. 수감 생활3.20. 알카트라즈 이감3.21. 매독의 침식3.22. 이후3.23. 사망
4. 대중매체에서5. 여담5.1. 별명: 스카페이스
6. 인간관계1. 개요[편집]
미국의 마피아이자 범죄자. 1920년대 금주법 시대 시카고를 공포와 부패로 물들였던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의 제2대 수장. 별명인 '스카페이스(Scarface)'[1]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거리의 폭력배 수준에 머물렀던 기존의 갱단 체계를 탈피하여, 범죄 조직을 하나의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하며 현대적인 조직범죄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성기 시절 그의 위세는 시카고의 시장, 경찰총장, 국회의원까지 주머니 속에 넣고 흔들 정도였으며, 스스로를 '대중에게 필요한 술을 공급하는 사업가'라고 포장하는 등 고도의 언론 플레이에도 능했다.
그의 삶은 대부, 언터처블, 스카페이스 등 수많은 마피아 장르물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마피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중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비록 말년은 매독으로 인한 치매와 육체적 몰락으로 비참했으나, 그가 시카고에 남긴 피의 족적은 미국 현대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알 카포네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은 단순히 그가 잔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이 낳은 가장 완벽한 괴물"이었다. 1920년대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황금광 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금주법이라는 희대의 악법과 인종 차별, 그리고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혼란이 가득했다. 카포네는 이 혼란의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당시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Windy City)'라는 별명만큼이나 정치적 풍향이 변화무쌍했는데, 카포네는 막대한 밀주 자금을 바탕으로 유권자들을 매수하거나 투표소에 총잡이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인을 당선시켰다. 이로 인해 경찰은 카포네의 트럭이 술을 싣고 지나가도 거수경례를 붙여야 했고, 판사들은 그의 조직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기에 바빴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 덕분에 그는 '밤의 대통령(The Big Fellow)'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사회에서 일종의 '로빈 후드' 같은 이미지로 소비되기도 했다. 대공황 직후 시카고 시민들이 굶주릴 때 세계 최초로 무료 급식소(Soup Kitchen)를 운영한 인물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2] 그는 항상 최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채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카포네가 이끈 '시카고 아웃핏'은 기존의 주먹구구식 갱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조직을 관리직-행동대-회계 부서 등으로 세분화했으며, 특히 '장부'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밀주 사업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현금을 세탁하기 위해 세탁소(Laundromat) 체인을 인수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자금 세탁(Money Laundering)'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3]
그는 또한 영역 다툼에 있어서도 '비즈니스적 협상'을 선호했다. 물론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전용 톰슨 기관총(Chicago Typewriter)이 불을 뿜었지만, 가급적이면 다른 조직들과 구역을 나누고 이익을 배분하는 신디케이트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그가 스승 조니 토리오로부터 배운 '폭력은 비용이다'라는 철학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조직 운영도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살인, 강도, 밀주 등 수많은 강력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기소를 당하지 않았던 그를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국세청(IRS)의 '탈세' 혐의였다. 이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국가의 재정 시스템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는 교훈을 남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순한 거리의 폭력배 수준에 머물렀던 기존의 갱단 체계를 탈피하여, 범죄 조직을 하나의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하며 현대적인 조직범죄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성기 시절 그의 위세는 시카고의 시장, 경찰총장, 국회의원까지 주머니 속에 넣고 흔들 정도였으며, 스스로를 '대중에게 필요한 술을 공급하는 사업가'라고 포장하는 등 고도의 언론 플레이에도 능했다.
그의 삶은 대부, 언터처블, 스카페이스 등 수많은 마피아 장르물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마피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중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비록 말년은 매독으로 인한 치매와 육체적 몰락으로 비참했으나, 그가 시카고에 남긴 피의 족적은 미국 현대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알 카포네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은 단순히 그가 잔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이 낳은 가장 완벽한 괴물"이었다. 1920년대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황금광 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금주법이라는 희대의 악법과 인종 차별, 그리고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혼란이 가득했다. 카포네는 이 혼란의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당시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Windy City)'라는 별명만큼이나 정치적 풍향이 변화무쌍했는데, 카포네는 막대한 밀주 자금을 바탕으로 유권자들을 매수하거나 투표소에 총잡이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인을 당선시켰다. 이로 인해 경찰은 카포네의 트럭이 술을 싣고 지나가도 거수경례를 붙여야 했고, 판사들은 그의 조직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기에 바빴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 덕분에 그는 '밤의 대통령(The Big Fellow)'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사회에서 일종의 '로빈 후드' 같은 이미지로 소비되기도 했다. 대공황 직후 시카고 시민들이 굶주릴 때 세계 최초로 무료 급식소(Soup Kitchen)를 운영한 인물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2] 그는 항상 최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채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카포네가 이끈 '시카고 아웃핏'은 기존의 주먹구구식 갱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조직을 관리직-행동대-회계 부서 등으로 세분화했으며, 특히 '장부'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밀주 사업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현금을 세탁하기 위해 세탁소(Laundromat) 체인을 인수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자금 세탁(Money Laundering)'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3]
그는 또한 영역 다툼에 있어서도 '비즈니스적 협상'을 선호했다. 물론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전용 톰슨 기관총(Chicago Typewriter)이 불을 뿜었지만, 가급적이면 다른 조직들과 구역을 나누고 이익을 배분하는 신디케이트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그가 스승 조니 토리오로부터 배운 '폭력은 비용이다'라는 철학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조직 운영도 결국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살인, 강도, 밀주 등 수많은 강력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기소를 당하지 않았던 그를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국세청(IRS)의 '탈세' 혐의였다. 이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국가의 재정 시스템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는 교훈을 남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가문 배경[편집]
알 카포네의 전설은 미국 뉴욕의 뒷골목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거대한 비극의 뿌리는 멀리 이탈리아 남부의 척박한 땅에 맞닿아 있다. 그의 부모인 가브리엘 카포네(Gabriele Capone)와 테레사 라이올라(Teresa Raiola)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주의 소도시인 카스텔라마레 디 스타비아(Castellammare di Stabia) 출신이었다. 이곳은 나폴리 인근의 항구 도시로, 아름다운 풍광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서민들의 삶은 지독한 가난과 부패한 행정, 그리고 뿌리 깊은 계급 차별로 점철되어 있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남부는 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소외 정책과 지주들의 수탈로 인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가브리엘 카포네는 성실한 이발사였으나, 하루 14시간을 일해도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결국 그는 1893년, 수많은 동포가 그러했듯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선에 몸을 싣게 된다. 이때 그의 곁에는 만삭의 아내 테레사와 어린 두 아들이 함께였다.
뉴욕 엘리스 섬을 거쳐 미국 땅을 밟은 카포네 가문이 마주한 현실은 기회의 땅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정글'에 가까웠다. 이들은 브루클린의 네이비 야드(Navy Yard) 인근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유대계 이민자들이 뒤섞여 각자의 구역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슬럼가였다.
가브리엘은 성실함을 무기로 이발소를 운영하며 정착하려 애썼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자부심을 버리고 미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노력했던 '동화주의적' 이민자였다. 그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정직한 노동자였으며, 자식들에게도 미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실제로 알 카포네의 형들 중 일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거나 경찰관이 되는 등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걷기도 했다.[4]
하지만 1899년, 이 척박한 브루클린의 단칸방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알폰소 가브리엘 카포네(Alphonse Gabriel Capone)는 아버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굽신거리며 손님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받는 푼돈으로는 결코 이민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화이트(White)'로 온전히 대우받지 못했다. 이들은 아일랜드계보다 낮은 계급으로 취급받으며 '왁스(Wops)'나 '다고스(Dagos)' 같은 멸칭으로 불렸고, 가장 위험하고 지저분한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 어린 알폰소는 학교에서 아일랜드계 교사들에게 차별받고, 거리에서 타 인종 갱단에게 쫓기며 자랐다.
이러한 환경은 카포네에게 '정직한 노동은 가난을 증명할 뿐'이라는 비뚤어진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이민자의 인내' 대신, 거리의 형님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매료되었다. 당시 브루클린의 거리에는 정장 차림에 권총을 차고 활보하는 초기 마피아 조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난한 이민자 소년들에게 신이자 영웅이었다.
결국 가브리엘 카포네가 지키려 했던 가문은 알폰소라는 돌연변이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아버지가 가르친 이발 기술 대신 알폰소는 주먹질과 도박,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을 먼저 익혔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억눌린 이민자 사회의 에너지가 범죄라는 뒤틀린 분출구를 찾아 폭발하기 시작한 전조였다.
카포네 가문의 이민사는 전형적인 '상향 이동의 좌절'을 보여준다. 성실한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신사적인 미국인이 되길 바랐으나, 미국 사회의 차별과 냉대는 아들을 역설적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범죄자로 길러냈다.
훗날 알 카포네가 수조 원의 자산가가 된 뒤에도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열등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던 것은, 브루클린 슬럼가에서 겪었던 그 비참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이탈리아인들을 무시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복수" 혹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비즈니스"로 합리화하곤 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남부는 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소외 정책과 지주들의 수탈로 인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가브리엘 카포네는 성실한 이발사였으나, 하루 14시간을 일해도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결국 그는 1893년, 수많은 동포가 그러했듯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선에 몸을 싣게 된다. 이때 그의 곁에는 만삭의 아내 테레사와 어린 두 아들이 함께였다.
뉴욕 엘리스 섬을 거쳐 미국 땅을 밟은 카포네 가문이 마주한 현실은 기회의 땅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정글'에 가까웠다. 이들은 브루클린의 네이비 야드(Navy Yard) 인근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유대계 이민자들이 뒤섞여 각자의 구역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슬럼가였다.
가브리엘은 성실함을 무기로 이발소를 운영하며 정착하려 애썼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자부심을 버리고 미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노력했던 '동화주의적' 이민자였다. 그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정직한 노동자였으며, 자식들에게도 미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실제로 알 카포네의 형들 중 일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거나 경찰관이 되는 등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걷기도 했다.[4]
하지만 1899년, 이 척박한 브루클린의 단칸방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알폰소 가브리엘 카포네(Alphonse Gabriel Capone)는 아버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굽신거리며 손님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받는 푼돈으로는 결코 이민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화이트(White)'로 온전히 대우받지 못했다. 이들은 아일랜드계보다 낮은 계급으로 취급받으며 '왁스(Wops)'나 '다고스(Dagos)' 같은 멸칭으로 불렸고, 가장 위험하고 지저분한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 어린 알폰소는 학교에서 아일랜드계 교사들에게 차별받고, 거리에서 타 인종 갱단에게 쫓기며 자랐다.
이러한 환경은 카포네에게 '정직한 노동은 가난을 증명할 뿐'이라는 비뚤어진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이민자의 인내' 대신, 거리의 형님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매료되었다. 당시 브루클린의 거리에는 정장 차림에 권총을 차고 활보하는 초기 마피아 조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난한 이민자 소년들에게 신이자 영웅이었다.
결국 가브리엘 카포네가 지키려 했던 가문은 알폰소라는 돌연변이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아버지가 가르친 이발 기술 대신 알폰소는 주먹질과 도박,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을 먼저 익혔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억눌린 이민자 사회의 에너지가 범죄라는 뒤틀린 분출구를 찾아 폭발하기 시작한 전조였다.
카포네 가문의 이민사는 전형적인 '상향 이동의 좌절'을 보여준다. 성실한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신사적인 미국인이 되길 바랐으나, 미국 사회의 차별과 냉대는 아들을 역설적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범죄자로 길러냈다.
훗날 알 카포네가 수조 원의 자산가가 된 뒤에도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열등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던 것은, 브루클린 슬럼가에서 겪었던 그 비참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이탈리아인들을 무시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복수" 혹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비즈니스"로 합리화하곤 했다.
3. 생애[편집]
3.1. 브루클린의 유년기[편집]
카포네의 어린 시절은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이민자 가정의 범주 안에 있었다. 1899년 뉴욕 브루클린의 95 네이비 스트리트(Navy Street)에서 태어난 그는, 성실한 이발사였던 아버지 가브리엘과 자애로운 어머니 테레사 밑에서 자랐다. 당시 브루클린의 이탈리아 이민자 사회는 가난했지만 가톨릭 규율이 엄격했고, 카포네의 부모 역시 자식들이 정직한 노동자로 살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알폰소는 날 때부터 정해진 좁은 골목길의 삶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카포네는 머리가 영특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중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수리 감각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훗날 그가 거대 조직의 회계를 주무르고 복잡한 밀주 유통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기초 체력은 이때 형성된 셈이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뉴욕의 공립학교는 이민자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아일랜드계 교사들은 이탈리아계 학생들을 '더러운 이민자'라며 멸시했고, 사소한 실수에도 가혹한 체벌을 가했다. 어느 날 수업 도중 여교사가 알폰소의 태도를 문제 삼아 그의 뺨을 때리자, 알폰소는 참지 않고 교사의 뺨을 똑같이 때려눕혔다. 이 사건으로 그는 즉각 퇴학 처분을 당했고, 이는 그가 제도권 교육과 영원히 결별하고 '거리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떠난 카포네는 사탕 가게 점원, 제화공 조수, 볼링장 핀보이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10대 소년이 정직한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푼돈은 거리의 갱단들이 누리는 화려한 삶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점차 브루클린 하층민 구역을 지배하던 소규모 조직들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가입한 조직은 '제임스 스트리트 보이즈(James Street Boys)'였고,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당시 뉴욕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파이브 포인츠 갱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은사인 조니 토리오를 만나게 된다. 토리오는 카포네의 대담함과 영리함을 눈여겨보았고, 그에게 단순히 주먹을 쓰는 법이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쳤다.
18세 무렵, 카포네는 조니 토리오의 추천으로 코니 아일랜드에 있는 '하버드 인(Harvard Inn)'이라는 바(Bar)에서 바운서 겸 웨이터로 일하게 된다. 이곳은 갱스터와 정치인, 유흥객들이 뒤섞이는 위험한 사교장이었다. 1917년의 어느 날 밤, 카포네는 손님으로 온 프랭크 갈루치오(Frank Galluccio)의 여동생에게 "오늘 밤 당신 정말 섹시하군요. 엉덩이가 참 멋지네요."라는 저급한 농담을 던졌다.
이에 분노한 갈루치오가 칼을 뽑아 휘둘렀고, 카포네의 왼쪽 뺨은 세 차례나 깊게 베였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라 상처는 흉측한 흉터로 남았고, 이때부터 그는 평생을 따라다닌 별명 '스카페이스(Scarface)'를 얻게 된다. 카포네는 이 흉터를 매우 수치스러워해서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오른쪽 얼굴만 내밀거나, 분장용 파우더로 상처를 가리려 애썼다.[5]
1918년, 카포네는 아일랜드계 여성 메이 코글린(Mae Coughlin)과 결혼한다.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의 결혼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나, 카포네는 메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결혼 직후 아들 알버트 '소니' 카포네가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아들은 카포네가 결혼 전 문란한 생활로 얻은 매독균을 물려받아 선천성 질환을 앓게 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카포네를 더욱 독하게 만들었다. 그는 낮에는 평범한 사무원으로 일하며 신분을 세탁하려 했으나, 밤에는 조직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손에 피를 묻혔다. 1919년경, 그는 경쟁 조직원과의 시비 끝에 두 건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데, 뉴욕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니 토리오는 그에게 제안을 건넨다. "시카고로 와라. 거긴 기회의 땅이다."
이 제안은 한 명의 브루클린 양아치를 미국 역사를 뒤흔들 제왕으로 변모시키는 서막이었다.
카포네는 머리가 영특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중상위권을 유지했으며, 수리 감각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훗날 그가 거대 조직의 회계를 주무르고 복잡한 밀주 유통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기초 체력은 이때 형성된 셈이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뉴욕의 공립학교는 이민자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아일랜드계 교사들은 이탈리아계 학생들을 '더러운 이민자'라며 멸시했고, 사소한 실수에도 가혹한 체벌을 가했다. 어느 날 수업 도중 여교사가 알폰소의 태도를 문제 삼아 그의 뺨을 때리자, 알폰소는 참지 않고 교사의 뺨을 똑같이 때려눕혔다. 이 사건으로 그는 즉각 퇴학 처분을 당했고, 이는 그가 제도권 교육과 영원히 결별하고 '거리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떠난 카포네는 사탕 가게 점원, 제화공 조수, 볼링장 핀보이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10대 소년이 정직한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푼돈은 거리의 갱단들이 누리는 화려한 삶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점차 브루클린 하층민 구역을 지배하던 소규모 조직들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가입한 조직은 '제임스 스트리트 보이즈(James Street Boys)'였고,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당시 뉴욕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파이브 포인츠 갱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은사인 조니 토리오를 만나게 된다. 토리오는 카포네의 대담함과 영리함을 눈여겨보았고, 그에게 단순히 주먹을 쓰는 법이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쳤다.
18세 무렵, 카포네는 조니 토리오의 추천으로 코니 아일랜드에 있는 '하버드 인(Harvard Inn)'이라는 바(Bar)에서 바운서 겸 웨이터로 일하게 된다. 이곳은 갱스터와 정치인, 유흥객들이 뒤섞이는 위험한 사교장이었다. 1917년의 어느 날 밤, 카포네는 손님으로 온 프랭크 갈루치오(Frank Galluccio)의 여동생에게 "오늘 밤 당신 정말 섹시하군요. 엉덩이가 참 멋지네요."라는 저급한 농담을 던졌다.
이에 분노한 갈루치오가 칼을 뽑아 휘둘렀고, 카포네의 왼쪽 뺨은 세 차례나 깊게 베였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라 상처는 흉측한 흉터로 남았고, 이때부터 그는 평생을 따라다닌 별명 '스카페이스(Scarface)'를 얻게 된다. 카포네는 이 흉터를 매우 수치스러워해서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오른쪽 얼굴만 내밀거나, 분장용 파우더로 상처를 가리려 애썼다.[5]
1918년, 카포네는 아일랜드계 여성 메이 코글린(Mae Coughlin)과 결혼한다.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의 결혼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나, 카포네는 메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결혼 직후 아들 알버트 '소니' 카포네가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아들은 카포네가 결혼 전 문란한 생활로 얻은 매독균을 물려받아 선천성 질환을 앓게 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카포네를 더욱 독하게 만들었다. 그는 낮에는 평범한 사무원으로 일하며 신분을 세탁하려 했으나, 밤에는 조직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손에 피를 묻혔다. 1919년경, 그는 경쟁 조직원과의 시비 끝에 두 건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데, 뉴욕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니 토리오는 그에게 제안을 건넨다. "시카고로 와라. 거긴 기회의 땅이다."
이 제안은 한 명의 브루클린 양아치를 미국 역사를 뒤흔들 제왕으로 변모시키는 서막이었다.
3.2. 시카고 이주[편집]
1919년 말, 뉴욕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잔뼈가 굵어가던 카포네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시 뉴욕에서는 이탈리아계 갱단과 아일랜드계 갱단 사이의 유혈 낭자한 세력 다툼이 극에 달해 있었고, 카포네 역시 라이벌 조직원과의 시비 끝에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된다. 이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그의 영적 지주이자 스승인 조니 토리오였다. 토리오는 이미 시카고로 넘어가 그곳의 거물인 '빅 짐(Big Jim)' 제임스 콜로시모의 오른팔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포네가 처음 시카고 땅을 밟았을 때, 그는 화려한 마피아 보스가 아닌 일개 '해결사'이자 '바운서(Bouncer)'에 불과했다. 토리오는 그를 콜로시모가 운영하던 악명 높은 유곽이자 도박장인 '포 세컨즈(Four Deuces)'의 관리인으로 앉혔다. 이곳에서 카포네는 낮에는 손님을 맞이하고, 밤에는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는 험한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어깨가 아니었다. 특유의 사교성과 위협적인 외모를 동시에 활용하며 콜로시모의 사업장을 시카고에서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던 제임스 콜로시모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거물이었다. 그는 시카고 전역에 수백 개의 유곽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화려한 보석과 다이아몬드로 온몸을 치장해 '다이아몬드 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는 정치권에 막대한 뇌물을 뿌려 '제1구역(First Ward)'의 실세인 코플린과 케나 같은 부패 정치인들과 결탁해 있었다.
카포네는 콜로시모 밑에서 일하며 '권력과 범죄의 유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근거리에서 학습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 돈이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시카고의 부패한 공무원들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하지만 콜로시모는 카포네와 토리오가 가진 야망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안주해 있었다. 그는 이미 가진 것에 만족했으며, 특히 술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려 할 때도 "우리는 이미 유곽과 도박으로 충분히 벌고 있다. 위험하게 술 장사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라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1920년 1월 17일[6], 미국 전역에 수정헌법 제18조, 일명 금주법이 발효되었다. 알코올 도수 0.5% 이상의 음료를 제조, 판매, 운송하는 모든 행위가 헌법으로 금지된 이 초유의 사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주의적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실책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시카고의 젊은 야심가 알 카포네에게 이 법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무한한 자본의 원천'이었다.
당시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술을 '가정 파괴의 주범'이자 '악마의 눈물'로 규정하며 강력한 로비를 펼쳤다. 그들은 술만 없어진다면 미국의 범죄율이 낮아지고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며, 모든 가정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 '유흥'을 법으로 억누르자, 술의 가격은 암시장에서 수십 배로 폭등했고, 평범한 시민들은 이제 술을 마시기 위해 범죄 조직의 고객이 되어야만 했다.
카포네는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사람들은 술을 원하고, 나는 그것을 줄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평생 내세웠다. 실제로 금주법 이전의 갱단들은 유곽 운영이나 좀도둑질, 도박장 관리 등으로 용돈벌이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금주법 이후 그들은 '국가 규모의 유통 대기업'으로 체급을 키우게 된다.
금주법이 시행되자마자 카포네와 그의 스승 조니 토리오는 시카고 전역의 창고를 사들이고, 캐나다 및 바하마로부터 밀수 루트를 개척했다. 당시 시카고 아웃핏이 취급하던 술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카포네가 처음 시카고 땅을 밟았을 때, 그는 화려한 마피아 보스가 아닌 일개 '해결사'이자 '바운서(Bouncer)'에 불과했다. 토리오는 그를 콜로시모가 운영하던 악명 높은 유곽이자 도박장인 '포 세컨즈(Four Deuces)'의 관리인으로 앉혔다. 이곳에서 카포네는 낮에는 손님을 맞이하고, 밤에는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는 험한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어깨가 아니었다. 특유의 사교성과 위협적인 외모를 동시에 활용하며 콜로시모의 사업장을 시카고에서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던 제임스 콜로시모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거물이었다. 그는 시카고 전역에 수백 개의 유곽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화려한 보석과 다이아몬드로 온몸을 치장해 '다이아몬드 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는 정치권에 막대한 뇌물을 뿌려 '제1구역(First Ward)'의 실세인 코플린과 케나 같은 부패 정치인들과 결탁해 있었다.
카포네는 콜로시모 밑에서 일하며 '권력과 범죄의 유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근거리에서 학습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 돈이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시카고의 부패한 공무원들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하지만 콜로시모는 카포네와 토리오가 가진 야망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안주해 있었다. 그는 이미 가진 것에 만족했으며, 특히 술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려 할 때도 "우리는 이미 유곽과 도박으로 충분히 벌고 있다. 위험하게 술 장사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라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1920년 1월 17일[6], 미국 전역에 수정헌법 제18조, 일명 금주법이 발효되었다. 알코올 도수 0.5% 이상의 음료를 제조, 판매, 운송하는 모든 행위가 헌법으로 금지된 이 초유의 사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주의적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실책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시카고의 젊은 야심가 알 카포네에게 이 법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무한한 자본의 원천'이었다.
당시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술을 '가정 파괴의 주범'이자 '악마의 눈물'로 규정하며 강력한 로비를 펼쳤다. 그들은 술만 없어진다면 미국의 범죄율이 낮아지고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며, 모든 가정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 '유흥'을 법으로 억누르자, 술의 가격은 암시장에서 수십 배로 폭등했고, 평범한 시민들은 이제 술을 마시기 위해 범죄 조직의 고객이 되어야만 했다.
카포네는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는 "사람들은 술을 원하고, 나는 그것을 줄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논리를 평생 내세웠다. 실제로 금주법 이전의 갱단들은 유곽 운영이나 좀도둑질, 도박장 관리 등으로 용돈벌이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금주법 이후 그들은 '국가 규모의 유통 대기업'으로 체급을 키우게 된다.
금주법이 시행되자마자 카포네와 그의 스승 조니 토리오는 시카고 전역의 창고를 사들이고, 캐나다 및 바하마로부터 밀수 루트를 개척했다. 당시 시카고 아웃핏이 취급하던 술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였다.
- 캐나다산 고급 위스키: 국경을 넘어 트럭과 배로 실어 나르는 정품 양주. 가장 비싸고 수익률이 높았다.
- 산업용 알코올 재증류: 페인트나 의약품 제조용 알코올에서 독성 물질을 제거(혹은 대충 희석)하여 만든 술. 가끔 눈이 멀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카포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욕조 진(Bathtub Gin): 일반 가정집 지하실이나 은신처에서 조잡하게 증류한 저가형 술.
카포네는 이 술들을 유통하기 위해 시카고 전역에 수천 개의 '스피키지(Speakeasy)'[7]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장례식장, 꽃집, 심지어 경찰서 바로 옆 건물의 가짜 세탁소 간판을 달고 운영되었으나, 지하실 문을 열면 재즈 선율과 함께 카포네가 공급한 밀주가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금주법의 가장 큰 부작용은 공권력의 완전한 타락이었다. 당시 금주법 단속 요원들의 급여는 매우 낮았고, 카포네가 제시하는 한 달 치 '뇌물'은 그들의 일 년 연봉보다 많았다. 카포네는 단순히 경찰 개인을 매수하는 것을 넘어, 경찰 서장과 시의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월급'을 지급했다.
만약 매수에 응하지 않는 정직한 경관이 있다면? 카포네의 방식은 명확했다. "한 손에는 돈다발을, 다른 한 손에는 톰슨 기관총을(Lead or Silver)."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다. 이 시기 시카고 경찰의 약 60% 이상이 카포네 조직으로부터 직간접적인 금전적 혜택을 받았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법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카포네는 이 밀주 비즈니스를 통해 전성기 시절 연간 약 6,000만 달러(현재 가치로 환산 시 약 1조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막대한 자금력은 훗날 그가 시카고를 피로 물들이는 전쟁을 선포했을 때, 무한한 탄약과 변호사 비용, 그리고 정치적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카포네는 토리오와 함께 콜로시모를 설득했다. "보스, 이건 단순한 술 장사가 아닙니다. 이건 제국을 건설할 기회입니다." 하지만 콜로시모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밀주 사업이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을 불러올 것이라 두려워했고, 자신의 화려한 생활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지점에서 젊고 야심만만한 카포네와 안일한 콜로시모 사이의 균열이 발생한다. 카포네는 이때 깨달았다. "성장하지 않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시기 카포네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뉴욕에서 온 '뜨내기' 취급을 당하며 시카고 토착 갱단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거리의 총격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경호팀을 조직하고, 상대의 심리를 파악해 협상하거나 혹은 철저히 짓밟는 법을 체득했다.
특히 그는 콜로시모의 화려한 사교 파티를 지켜보며 언론과 대중을 대하는 법을 익혔다. 콜로시모는 오페라 가수와 결혼할 정도로 예술과 화려함을 즐겼는데, 카포네는 이를 보며 훗날 자신이 추구할 '셀러브리티 갱스터'의 표본을 보았다. 비록 나중에는 스승 토리오와 결탁해 콜로시모를 제거하게 되지만[8], 카포네에게 시카고 입성 초기의 이 바운서 생활은 훗날 '시카고 아웃핏'이라는 거대 기업을 경영하기 위한 현장 실습과도 같았다.
3.3. 콜로시모 암살과 세대교체의 서막[편집]
1920년 5월 11일, 시카고 남부의 고급 레스토랑인 '콜로시모 카페(Colosimo's Cafe)'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당시 시카고 암흑가의 황제로 군림하던 '빅 짐' 제임스 콜로시모는 평소처럼 자신의 식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다이아몬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며 부를 과시하던 전형적인 구세대 갱스터였으며, 시카고의 모든 유곽과 도박장을 손에 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카페 안쪽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나타난 괴한이 쏜 두 발의 총성이 정적을 깼다. 콜로시모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보스의 죽음을 넘어, 시카고 암흑가의 질서가 통째로 뒤바뀌는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의 차이였다. 당시 미국은 수정헌법 제18조가 발효되면서 본격적인 금주법 시대에 돌입해 있었다. 조니 토리오와 그의 오른팔인 알 카포네는 이 금주법이 가져올 폭발적인 수익성을 예견했다. 술이 금지되면 술값은 천정부지로 솟을 것이고, 이를 독점 공급한다면 합법적인 사업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조직의 수장인 콜로시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미 유곽 사업으로 매달 수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굳이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을 자초할 '밀주 사업'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토리오가 수차례 밀주 사업 진출을 건의했음에도 콜로시모는 완강히 거절했다.
사건의 발단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의 차이였다. 당시 미국은 수정헌법 제18조가 발효되면서 본격적인 금주법 시대에 돌입해 있었다. 조니 토리오와 그의 오른팔인 알 카포네는 이 금주법이 가져올 폭발적인 수익성을 예견했다. 술이 금지되면 술값은 천정부지로 솟을 것이고, 이를 독점 공급한다면 합법적인 사업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조직의 수장인 콜로시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미 유곽 사업으로 매달 수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굳이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을 자초할 '밀주 사업'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토리오가 수차례 밀주 사업 진출을 건의했음에도 콜로시모는 완강히 거절했다.
"조니,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이 벌고 있네. 술장사는 연방 요원들을 우리 뒤통수에 붙이는 꼴밖에 안 돼. 지금 이대로가 좋다." [9]
토리오와 카포네에게 콜로시모는 더 이상 존경하는 보스가 아니라, 조직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불과했다. 특히 야심만만했던 젊은 피 카포네에게 콜로시모의 보수적인 태도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 결국 토리오는 조직의 미래를 위해 '삼촌'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토리오는 치밀했다. 시카고 내부 인사가 콜로시모를 죽일 경우 발생할 조직 내 반발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뉴욕에서 활동하던 자신의 옛 동료이자 카포네의 전 보스인 프랭키 예일을 고용했다. 예일은 살인 청부의 전문가였고, 시카고 경찰의 수사망에서 자유로운 외부인이었다.
사건 당일, 토리오는 콜로시모에게 전화하여 "새로운 물건(창녀들)이 도착했으니 카페에서 확인해보라"는 가짜 정보를 흘려 그를 유인했다. 콜로시모가 무방비 상태로 카페에 도착했을 때, 예일은 매복하고 있다가 정확히 급소를 타격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유유히 사라졌고, 목격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경찰은 카포네와 토리오를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심문했으나, 그들은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하며 유유히 빠져나갔다.
콜로시모의 장례식은 시카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기괴한 행사 중 하나였다. 수천 명의 조문객 중에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경찰 간부들이 섞여 있었고, 그 중심에서 누구보다 슬프게 우는 척 연기했던 인물이 바로 조니 토리오와 알 카포네였다. 적을 죽인 뒤 장례식에서 가장 큰 화환을 보내는 마피아 특유의 '악어의 눈물' 문화가 이때부터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콜로시모가 사라진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조니 토리오가 차지했다. 토리오는 즉시 조직의 명칭을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으로 공식화하고, 밀주 비즈니스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불과 21세의 나이에 조직의 실질적인 운영과 무력을 책임지는 전무이사급으로 승격된 알 카포네가 있었다.
이 암살 사건 이후 시카고의 밤은 바뀌었다. 더 이상 거리의 깡패들이 푼돈을 뜯는 수준이 아니었다. 카포네는 토리오의 지휘 아래 수백 명의 행동대원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고, 트럭 운송망을 장악했으며, 양조장을 비밀리에 건설했다. 1920년의 그 총성은 단순히 한 남자의 죽음이 아니라, '알 카포네라는 제국'이 전 세계를 향해 쏘아 올린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이 사건 직후 카포네는 시카고 남부의 '시서로(Cicero)'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길 준비를 한다. 시카고 시내의 감시를 피해 자신들만의 '자치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3.4. 시서로 점령[편집]
시카고 시내에서 경찰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것에 실증이 난 조니 토리오와 알 카포네는 1923년경부터 시카고 외곽의 위성 도시인 시서로(Cicero)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시카고 시장 선거에서 개혁파인 윌리엄 데버(William Dever)가 당선되면서 대대적인 범죄 소탕 작전이 벌어지자, 아웃핏은 본거지를 안전한 외곽으로 옮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서로는 카포네의 '사유지'나 다름없는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이는 마피아가 현대적인 의미의 '정치적 기생'을 어떻게 완성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카포네가 시서로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1924년 4월 1일에 열린 시의회 선거였다. 당시 카포네는 자신들의 밀주 및 도박 사업을 보호해 줄 꼭두각시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투표 조작과 폭력을 동원했다.
카포네의 부하들은 투표소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버젓이 서 있었으며, 반대파 후보에게 투표하려는 시민들을 구타하거나 협박했다. 상대 진영의 선거 운동원들은 투표 당일 납치되어 지하실에 갇혔고, 투표함은 카포네 측에 유리한 표로 이미 채워진 채 교체되었다. 시서로 현지 경찰들은 이미 카포네의 돈에 매수되어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거나, 심지어 매수되지 않은 경찰은 갱단원들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시카고 시 경찰청은 70여 명의 사복 형사들을 급파했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의 친형인 프랭크 카포네(Frank Capone)가 경찰과의 교전 끝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형의 죽음에 분노한 알 카포네는 시서로 경찰서를 습격해 형사들을 공격하는 등 사실상 국가 공권력과 전면전을 벌였으나, 결국 선거 결과는 카포네가 지지한 후보들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로써 시서로는 공식적인 '마피아 자치구'가 되었다.
선거 승리 이후 카포네는 시서로의 호손 호텔을 통째로 빌려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 이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아웃핏의 전략 사령부였다.
카포네는 이곳에서 매일 아침 시서로의 공무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았으며, 어떤 법안을 통과시킬지, 어떤 경찰관을 승진시킬지를 직접 결정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시서로의 시장은 카포네의 집무실 앞에서 면담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 한번은 시장이 카포네의 명령을 거부하려 하자, 카포네가 시장실로 쳐들어가 시장을 계단 아래로 굴려버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10]
시서로를 장악한 것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시카고 시내의 단속을 피해 대규모 양조장을 시서로 곳곳에 건설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술은 전용 트럭을 통해 시카고 전역으로 공급되었다.
또한 카포네는 시서로 내의 모든 상점과 식당에 "우리 조직의 맥주를 쓰지 않으면 가게 문을 닫게 하겠다"며 강매를 일삼았다. 이를 거부하는 업소는 예외 없이 폭탄 테러(Bombing)를 당했다. 당시 시카고 인근에서 발생하는 폭발 사고의 90%가 카포네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시기 시서로의 범죄 수익은 연간 수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카포네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직의 무장을 강화하고 더 큰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 시서로 점령은 알 카포네라는 일개 갱스터가 '도시 위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시서로는 카포네의 '사유지'나 다름없는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이는 마피아가 현대적인 의미의 '정치적 기생'을 어떻게 완성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카포네가 시서로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1924년 4월 1일에 열린 시의회 선거였다. 당시 카포네는 자신들의 밀주 및 도박 사업을 보호해 줄 꼭두각시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투표 조작과 폭력을 동원했다.
카포네의 부하들은 투표소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버젓이 서 있었으며, 반대파 후보에게 투표하려는 시민들을 구타하거나 협박했다. 상대 진영의 선거 운동원들은 투표 당일 납치되어 지하실에 갇혔고, 투표함은 카포네 측에 유리한 표로 이미 채워진 채 교체되었다. 시서로 현지 경찰들은 이미 카포네의 돈에 매수되어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거나, 심지어 매수되지 않은 경찰은 갱단원들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시카고 시 경찰청은 70여 명의 사복 형사들을 급파했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의 친형인 프랭크 카포네(Frank Capone)가 경찰과의 교전 끝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형의 죽음에 분노한 알 카포네는 시서로 경찰서를 습격해 형사들을 공격하는 등 사실상 국가 공권력과 전면전을 벌였으나, 결국 선거 결과는 카포네가 지지한 후보들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로써 시서로는 공식적인 '마피아 자치구'가 되었다.
선거 승리 이후 카포네는 시서로의 호손 호텔을 통째로 빌려 자신의 본부로 삼았다. 이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아웃핏의 전략 사령부였다.
카포네는 이곳에서 매일 아침 시서로의 공무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았으며, 어떤 법안을 통과시킬지, 어떤 경찰관을 승진시킬지를 직접 결정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시서로의 시장은 카포네의 집무실 앞에서 면담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 한번은 시장이 카포네의 명령을 거부하려 하자, 카포네가 시장실로 쳐들어가 시장을 계단 아래로 굴려버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10]
시서로를 장악한 것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시카고 시내의 단속을 피해 대규모 양조장을 시서로 곳곳에 건설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술은 전용 트럭을 통해 시카고 전역으로 공급되었다.
또한 카포네는 시서로 내의 모든 상점과 식당에 "우리 조직의 맥주를 쓰지 않으면 가게 문을 닫게 하겠다"며 강매를 일삼았다. 이를 거부하는 업소는 예외 없이 폭탄 테러(Bombing)를 당했다. 당시 시카고 인근에서 발생하는 폭발 사고의 90%가 카포네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시기 시서로의 범죄 수익은 연간 수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카포네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직의 무장을 강화하고 더 큰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 시서로 점령은 알 카포네라는 일개 갱스터가 '도시 위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3.5. 시카고 아웃핏의 팽창[편집]
조니 토리오와 카포네가 이끄는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은 단순한 지역 거점 갱단을 넘어, 미 중서부 전체를 장악하는 거대 범죄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카포네가 스승 토리오의 '비즈니스 모델'을 흡수하여, 폭력과 자본이 결합했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낼 수 있는지를 증명한 기간이기도 하다. 당시 아웃핏의 팽창은 단순히 주먹의 힘이 아니라, 철저한 구역 분할, 공급망 독점, 그리고 공권력의 매수라는 삼박자가 맞물린 결과였다.
카포네는 금주법이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거대한 시장'임을 간파했다. 그는 밀주(Moonshine)를 외부에서 사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제조 공장을 운영하거나 캐나다에서 밀수해오는 루트를 확보했다. 특히 '리틀 이탈리아'와 시카고 서부 지역의 수많은 가내 수공업 형태의 증류소들을 조직망 아래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가 도입한 방식은 현대 기업의 '수직 계열화'와 매우 유사했다.
만약 어떤 바의 주인이 카포네의 술을 거부하고 다른 조직의 싼 술을 받으려 한다면, 다음 날 그 가게는 폭탄 테러를 당하거나 주인이 의문의 실종을 겪어야 했다. 카포네는 이를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관리"라고 불렀다.[11]
아웃핏 팽창의 결정점은 시카고 인근의 위성 도시인 시서로를 완전히 손에 넣은 사건이었다. 시카고 시내의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카포네는 아예 본거지를 시서로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1924년 시서로 시의회 선거 당시, 카포네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투표소마다 배치하여 반대파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의 친형인 프랭크 카포네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서로는 카포네의 '사유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장과 경찰서장이 카포네의 급여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시청 건물 바로 옆에서 대낮에 도박장과 유곽이 성행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시서로라는 안전한 후방 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아웃핏은 공권력의 간섭 없이 막대한 자금을 세탁하고 병력을 충원할 수 있게 되었다.
카포네는 조직의 질적 팽창을 위해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였다. 단순히 싸움 잘하는 건달이 아니라, 장부를 관리할 전문 회계사, 법망을 피해갈 교묘한 변호사, 그리고 효율적인 살인을 위한 기술자들을 불러모았다.
특히 이 시기 아웃핏은 톰슨 기관총(일명 '시카고 타이프라이터')을 조직의 표준 무기로 도입했다. 이전까지의 갱단 전쟁이 권총이나 칼부림 위주였다면, 카포네는 군대식 화력을 동원해 경쟁자들을 압살했다. 또한 자동차에 장갑판을 덧댄 '방탄차'를 처음으로 제작하여 타고 다닌 것도 이 시기의 카포네였다.[12]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아웃핏의 연간 수익은 현재 가치로 수조 원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카포네는 이 돈을 단순히 유흥에 쓰지 않고 다시 정계와 경찰계에 뿌려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았다. 시카고의 어느 누구도 카포네의 허락 없이는 술 한 잔 팔 수 없었고, 도박판 하나 벌릴 수 없었다.
이러한 급격한 팽창은 필연적으로 기존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특히 아일랜드계 갱단인 '노스 사이드 갱'과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이는 훗날 미국 범죄사상 가장 끔찍한 기록 중 하나인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된다. 카포네는 이제 시카고의 왕이었지만, 그 왕좌는 수많은 시체 위에 세워진 불안정한 것이었다.
카포네는 금주법이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거대한 시장'임을 간파했다. 그는 밀주(Moonshine)를 외부에서 사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제조 공장을 운영하거나 캐나다에서 밀수해오는 루트를 확보했다. 특히 '리틀 이탈리아'와 시카고 서부 지역의 수많은 가내 수공업 형태의 증류소들을 조직망 아래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가 도입한 방식은 현대 기업의 '수직 계열화'와 매우 유사했다.
만약 어떤 바의 주인이 카포네의 술을 거부하고 다른 조직의 싼 술을 받으려 한다면, 다음 날 그 가게는 폭탄 테러를 당하거나 주인이 의문의 실종을 겪어야 했다. 카포네는 이를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관리"라고 불렀다.[11]
아웃핏 팽창의 결정점은 시카고 인근의 위성 도시인 시서로를 완전히 손에 넣은 사건이었다. 시카고 시내의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카포네는 아예 본거지를 시서로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1924년 시서로 시의회 선거 당시, 카포네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투표소마다 배치하여 반대파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카포네의 친형인 프랭크 카포네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서로는 카포네의 '사유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장과 경찰서장이 카포네의 급여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시청 건물 바로 옆에서 대낮에 도박장과 유곽이 성행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시서로라는 안전한 후방 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아웃핏은 공권력의 간섭 없이 막대한 자금을 세탁하고 병력을 충원할 수 있게 되었다.
카포네는 조직의 질적 팽창을 위해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였다. 단순히 싸움 잘하는 건달이 아니라, 장부를 관리할 전문 회계사, 법망을 피해갈 교묘한 변호사, 그리고 효율적인 살인을 위한 기술자들을 불러모았다.
특히 이 시기 아웃핏은 톰슨 기관총(일명 '시카고 타이프라이터')을 조직의 표준 무기로 도입했다. 이전까지의 갱단 전쟁이 권총이나 칼부림 위주였다면, 카포네는 군대식 화력을 동원해 경쟁자들을 압살했다. 또한 자동차에 장갑판을 덧댄 '방탄차'를 처음으로 제작하여 타고 다닌 것도 이 시기의 카포네였다.[12]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아웃핏의 연간 수익은 현재 가치로 수조 원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카포네는 이 돈을 단순히 유흥에 쓰지 않고 다시 정계와 경찰계에 뿌려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았다. 시카고의 어느 누구도 카포네의 허락 없이는 술 한 잔 팔 수 없었고, 도박판 하나 벌릴 수 없었다.
이러한 급격한 팽창은 필연적으로 기존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특히 아일랜드계 갱단인 '노스 사이드 갱'과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이는 훗날 미국 범죄사상 가장 끔찍한 기록 중 하나인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된다. 카포네는 이제 시카고의 왕이었지만, 그 왕좌는 수많은 시체 위에 세워진 불안정한 것이었다.
3.6. 정치권과의 결탁[편집]
시카고 아웃핏이 단순한 거리의 갱단을 넘어 하나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동력은 단순히 총구의 화력에만 있지 않았다. 알 카포네는 "법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법을 소유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막대한 밀주 자금을 투입해 시카고의 행정, 입법, 사법부를 통째로 매수했으며, 그 정점에는 시카고 역사상 가장 부패한 시장으로 꼽히는 '빅 빌(Big Bill)' 윌리엄 헤일 톰슨(William Hale Thompson)이 있었다.
알 카포네와 윌리엄 톰슨 시장의 관계는 현대 정치사와 범죄사에서 '정경유착'의 가장 추악한 표본으로 거론된다. 1927년 시카고 시장 선거 당시, 카포네는 톰슨의 당선을 위해 무려 25만 달러[13] 이상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단순한 기부뿐만이 아니었다. 카포네의 조직원들은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톰슨에게 투표하지 않는 시민들을 협박하거나, 상대 후보의 선거 벽보를 훼손하고, 심지어는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톰슨은 당선 이후 카포네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그는 시카고 경찰국장직에 카포네의 입김이 닿는 인물을 앉혔으며, 금주법 단속반이 카포네의 창고를 급습하기 전 반드시 '사전 통보'를 하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카포네의 밀주 트럭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시내를 활보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낮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자들이 밤에는 마피아의 보디가드로 돌변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카포네와 정치권의 유착이 극에 달했던 사건이 바로 1928년의 공화당 예비선거, 일명 '파인애플 선거'다. 여기서 '파인애플'은 당시 갱단들이 수류탄을 부르던 은어였다. 카포네는 톰슨 파벌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수류탄 테러를 감행했다.
반대파 후보의 지지율이 높은 지역의 투표소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시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톰슨의 정적이었던 주 상원의원 오타비아노와 검사 에이브러햄 롬네스의 집이 폭파되거나 총격을 받았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당연하게도 톰슨 파벌의 압승으로 끝났고, 시카고의 민주주의는 마피아의 총칼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카고는 '미국 내의 무법천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으며, 연방 정부가 시카고의 부패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법부 역시 카포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카포네 조직원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더라도, 법정에 서면 목격자들이 갑자기 증언을 거부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판사들은 교묘한 법리 해석을 통해 카포네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배심원들은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 '무죄'를 선언하기 일쑤였다.
카포네는 판사와 검사들에게 정기적인 '월급'을 지급했으며, 그들의 자녀 유학 비용이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꼼짝 못 하게 옭아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카고 경찰의 약 60% 이상이 카포네로부터 직간접적인 뇌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시카고라는 도시 자체가 카포네라는 거대한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카포네는 공권력을 매수하는 동시에 대중의 마음을 사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신문사에는 테러를 가하는 한편,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는 기자들에게는 최고급 양복과 술을 선물했다.
알 카포네와 윌리엄 톰슨 시장의 관계는 현대 정치사와 범죄사에서 '정경유착'의 가장 추악한 표본으로 거론된다. 1927년 시카고 시장 선거 당시, 카포네는 톰슨의 당선을 위해 무려 25만 달러[13] 이상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단순한 기부뿐만이 아니었다. 카포네의 조직원들은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톰슨에게 투표하지 않는 시민들을 협박하거나, 상대 후보의 선거 벽보를 훼손하고, 심지어는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톰슨은 당선 이후 카포네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그는 시카고 경찰국장직에 카포네의 입김이 닿는 인물을 앉혔으며, 금주법 단속반이 카포네의 창고를 급습하기 전 반드시 '사전 통보'를 하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카포네의 밀주 트럭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시내를 활보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낮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자들이 밤에는 마피아의 보디가드로 돌변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카포네와 정치권의 유착이 극에 달했던 사건이 바로 1928년의 공화당 예비선거, 일명 '파인애플 선거'다. 여기서 '파인애플'은 당시 갱단들이 수류탄을 부르던 은어였다. 카포네는 톰슨 파벌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수류탄 테러를 감행했다.
반대파 후보의 지지율이 높은 지역의 투표소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시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톰슨의 정적이었던 주 상원의원 오타비아노와 검사 에이브러햄 롬네스의 집이 폭파되거나 총격을 받았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당연하게도 톰슨 파벌의 압승으로 끝났고, 시카고의 민주주의는 마피아의 총칼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카고는 '미국 내의 무법천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으며, 연방 정부가 시카고의 부패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법부 역시 카포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카포네 조직원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더라도, 법정에 서면 목격자들이 갑자기 증언을 거부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판사들은 교묘한 법리 해석을 통해 카포네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배심원들은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 '무죄'를 선언하기 일쑤였다.
카포네는 판사와 검사들에게 정기적인 '월급'을 지급했으며, 그들의 자녀 유학 비용이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꼼짝 못 하게 옭아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시카고 경찰의 약 60% 이상이 카포네로부터 직간접적인 뇌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시카고라는 도시 자체가 카포네라는 거대한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카포네는 공권력을 매수하는 동시에 대중의 마음을 사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신문사에는 테러를 가하는 한편,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는 기자들에게는 최고급 양복과 술을 선물했다.
3.7. 오배니언과의 갈등[편집]
시카고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을 꼽으라면 단연 '사우스 사이드(토리오-카포네)'와 '노스 사이드(디온 오배니언)' 간의 전면전일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구역 다툼을 넘어, 이탈리아계 마피아와 아일랜드계 갱단이라는 인종적 자존심,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의 정면충돌이었다.
당시 시카고 북부(North Side)를 장악하고 있던 디온 오배니언(Dion O'Banion)은 알 카포네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카포네가 철저한 계산과 조직적 시스템을 중시했다면, 오배니언은 전형적인 '거리의 무법자' 스타일이었다. 그는 낮에는 꽃집 주인으로 위장해 평화롭게 꽃을 다듬었지만, 밤에는 누구보다 잔인하게 경쟁자들의 머리에 구멍을 내는 이중생활을 즐겼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카포네의 신경을 사사건건 긁는 기폭제가 된다.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술 판매 구역에 관한 '상도덕' 문제였다. 당시 시카고 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지네 형제(Genna Brothers)는 이탈리아계 조직으로 카포네와 동맹 관계였다. 이들은 저질 밀주를 대량으로 생산해 싼값에 유통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오배니언의 구역인 노스 사이드까지 침범해 술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배니언은 당연히 폭발했다. 그는 조니 토리오에게 "당신네 이탈리아 놈들이 내 구역에서 장난질하는 걸 당장 멈추게 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토리오는 지네 형제와의 관계 때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분노한 오배니언은 지네 형제의 술 트럭을 강탈하고 운전사들을 폭행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카포네는 이 과정에서 오배니언의 오만방자함에 깊은 살의를 느끼기 시작한다.[14]
결정적인 사건은 1924년 5월에 터졌다. 오배니언은 갑자기 토리오에게 "이제 범죄 세계가 질렸다. 내 지분을 다 팔고 은퇴할 테니 시브리 브루어리(양조장)를 인수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토리오는 의심하면서도 거대한 양조장을 합법적으로 가질 기회에 눈이 멀어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는 오배니언의 정교한 함정이었다. 오배니언은 이미 경찰이 해당 양조장을 급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토리오를 그 자리에 불러낸 것이었다. 결국 계약 현장을 덮친 경찰에 의해 토리오는 체포되었고, 오배니언은 미리 빠져나가며 뒤에서 비웃음을 날렸다. 이 사건으로 토리오는 막대한 보석금과 함께 실형 위기에 처했으며, 조직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카포네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분노한 토리오를 대신해 "오배니언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는 곧 시카고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갱스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시카고 거리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배니언은 카포네의 보복을 예상하고 자신의 꽃집 주변에 무장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카포네 역시 방탄차를 개조하고 조직원들에게 톰슨 기관총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들의 갈등을 '시카고의 남북전쟁'이라 칭하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정작 카포네는 여유로운 척하며 "나는 그저 사업상 오해를 풀고 싶을 뿐"이라는 위선적인 인터뷰를 남겼다. 하지만 수면 아래서 그는 이미 뉴욕에서 온 전문 킬러들과 접촉하며 오배니언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시카고 북부(North Side)를 장악하고 있던 디온 오배니언(Dion O'Banion)은 알 카포네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카포네가 철저한 계산과 조직적 시스템을 중시했다면, 오배니언은 전형적인 '거리의 무법자' 스타일이었다. 그는 낮에는 꽃집 주인으로 위장해 평화롭게 꽃을 다듬었지만, 밤에는 누구보다 잔인하게 경쟁자들의 머리에 구멍을 내는 이중생활을 즐겼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카포네의 신경을 사사건건 긁는 기폭제가 된다.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술 판매 구역에 관한 '상도덕' 문제였다. 당시 시카고 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지네 형제(Genna Brothers)는 이탈리아계 조직으로 카포네와 동맹 관계였다. 이들은 저질 밀주를 대량으로 생산해 싼값에 유통했는데, 문제는 이들이 오배니언의 구역인 노스 사이드까지 침범해 술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배니언은 당연히 폭발했다. 그는 조니 토리오에게 "당신네 이탈리아 놈들이 내 구역에서 장난질하는 걸 당장 멈추게 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토리오는 지네 형제와의 관계 때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분노한 오배니언은 지네 형제의 술 트럭을 강탈하고 운전사들을 폭행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카포네는 이 과정에서 오배니언의 오만방자함에 깊은 살의를 느끼기 시작한다.[14]
결정적인 사건은 1924년 5월에 터졌다. 오배니언은 갑자기 토리오에게 "이제 범죄 세계가 질렸다. 내 지분을 다 팔고 은퇴할 테니 시브리 브루어리(양조장)를 인수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토리오는 의심하면서도 거대한 양조장을 합법적으로 가질 기회에 눈이 멀어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는 오배니언의 정교한 함정이었다. 오배니언은 이미 경찰이 해당 양조장을 급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토리오를 그 자리에 불러낸 것이었다. 결국 계약 현장을 덮친 경찰에 의해 토리오는 체포되었고, 오배니언은 미리 빠져나가며 뒤에서 비웃음을 날렸다. 이 사건으로 토리오는 막대한 보석금과 함께 실형 위기에 처했으며, 조직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카포네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분노한 토리오를 대신해 "오배니언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는 곧 시카고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갱스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시카고 거리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배니언은 카포네의 보복을 예상하고 자신의 꽃집 주변에 무장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카포네 역시 방탄차를 개조하고 조직원들에게 톰슨 기관총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들의 갈등을 '시카고의 남북전쟁'이라 칭하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정작 카포네는 여유로운 척하며 "나는 그저 사업상 오해를 풀고 싶을 뿐"이라는 위선적인 인터뷰를 남겼다. 하지만 수면 아래서 그는 이미 뉴욕에서 온 전문 킬러들과 접촉하며 오배니언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3.8. 플라워 샵의 처단[편집]
1924년 11월 10일, 시카고 노스 사이드(North Side)의 한 꽃집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단순한 갱단 간의 살인을 넘어, 시카고 전체를 거대한 전쟁터로 몰아넣은 서막이었다. 이 사건은 알 카포네와 그의 스승 조니 토리오가 시카고의 완전한 패권을 쥐기 위해 단행한 가장 대담하고도 치명적인 승부수였다.
당시 시카고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오배니언은 카포네에게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는 아일랜드계 갱단 '노스 사이드 갱'의 수장으로, 낮에는 '쇼필드 꽃집(Schofield’s Flower Shop)'에서 우아하게 꽃알을 다듬고 밤에는 밀주와 강도질을 일삼는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오배니언은 이탈리아계인 토리오와 카포네를 '스파게티 놈들'이라 부르며 대놓고 멸시했고, 특히 수익 배분 문제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시베로(Cicero) 지역의 수익 배분과 관련된 갈등이었다. 오배니언은 토리오를 속여 곧 경찰의 단속이 들이닥칠 양조장을 비싼 값에 넘겼고, 이 과정에서 토리오는 체포되어 구류를 살게 된다. '비즈니스 매너'를 중시하던 토리오에게 이는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결국 토리오는 카포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포네는 즉시 거사를 준비한다.
사건 당일 오전 11시 30분경, 평소와 다름없이 꽃집에서 일하던 오배니언에게 세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들은 며칠 전 암살당한 마피아 간부 마이크 메를로의 장례식에 쓸 꽃을 주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오배니언은 의심 없이 손을 내밀며 그들을 반겼다.
당시 시카고 북부를 장악하고 있던 오배니언은 카포네에게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는 아일랜드계 갱단 '노스 사이드 갱'의 수장으로, 낮에는 '쇼필드 꽃집(Schofield’s Flower Shop)'에서 우아하게 꽃알을 다듬고 밤에는 밀주와 강도질을 일삼는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오배니언은 이탈리아계인 토리오와 카포네를 '스파게티 놈들'이라 부르며 대놓고 멸시했고, 특히 수익 배분 문제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시베로(Cicero) 지역의 수익 배분과 관련된 갈등이었다. 오배니언은 토리오를 속여 곧 경찰의 단속이 들이닥칠 양조장을 비싼 값에 넘겼고, 이 과정에서 토리오는 체포되어 구류를 살게 된다. '비즈니스 매너'를 중시하던 토리오에게 이는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결국 토리오는 카포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포네는 즉시 거사를 준비한다.
사건 당일 오전 11시 30분경, 평소와 다름없이 꽃집에서 일하던 오배니언에게 세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들은 며칠 전 암살당한 마피아 간부 마이크 메를로의 장례식에 쓸 꽃을 주문하러 왔다고 말했다. 오배니언은 의심 없이 손을 내밀며 그들을 반겼다.
"반갑소, 친구들. 메를로를 위한 아주 멋진 장식을 준비해 두었지."
오배니언이 악수를 하기 위해 오른손을 뻗은 순간, 가운데 있던 남자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15] 그와 동시에 양옆에 있던 두 남자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오배니언의 가슴과 머리에 총탄을 퍼부었다. 오배니언은 자신이 아끼던 꽃들 위로 쓰러졌고, 범인들은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암살은 카포네의 직속 해결사들이 아닌, 뉴욕에서 파견된 전문 킬러 프랭키 예일과 제나 형제들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포네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오배니언의 장례식은, 수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정작 그를 죽인 배후인 알 카포네와 조니 토리오는 수천 달러 상당의 거대한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16]
하지만 이 평화로운(?) 장례식 뒤편에서는 복수의 칼날이 갈리고 있었다. 오배니언의 뒤를 이은 하이미 와이스(Hymie Weiss)와 벅스 모란(Bugs Moran)은 "토리오와 카포네의 심장에 구멍을 내주겠다"라고 맹세하며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카고의 범죄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전까지는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조직들이 이제는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제로섬 게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북부 지역의 구심점을 제거함으로써 시카고 전역을 통합할 기회를 잡았다. 노스 사이드 갱의 처절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이 사건 직후 조니 토리오는 노스 사이드 갱의 매복 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게 되고, 이는 카포네가 1인자로 등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국 디온 오배니언 암살은 카포네가 시카고의 왕좌에 오르기 위해 건너야 했던 '루비콘강'이었던 셈이다. 이 강을 건넌 후, 시카고의 거리는 매일같이 기관총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3.9. 토리오의 은퇴[편집]
1925년 1월 24일, 시카고의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마피아 세계의 권력 지형도를 영원히 바꿀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시카고 아웃핏의 절대 권력자이자 알 카포네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니 토리오가 노스 사이드 갱단의 보복 습격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보스의 퇴장을 넘어, '젊은 사자' 알 카포네가 시카고의 진정한 1인자로 등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디온 오배니언의 암살 이후, 노스 사이드 갱단의 잔당인 하이미 와이스와 벅스 모란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들은 치밀한 감시 끝에 토리오가 그의 아내 안나와 함께 쇼핑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순간을 노렸다. 토리오가 차에서 내리는 찰나, 매복해 있던 괴한들이 산탄총과 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토리오는 턱, 목, 오른쪽 팔, 복부 등에 총 7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벅스 모란은 쓰러진 토리오의 머리에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려 권총을 발사했으나, 천운인지 불발(Mis-fire)이 일어났고 때마침 들려온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암살자들은 도주했다. 토리오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으나 심신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던 토리오를 지킨 것은 다름 아닌 알 카포네였다. 카포네는 병원 층 전체를 빌려 무장한 부하들을 배치했고, 본인도 직접 침대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스승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지만 약 한 달간의 회복 기간을 거치며 토리오가 내린 결론은 의외였다. 그는 더 이상 시카고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토리오는 병실로 카포네를 불러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를 남긴다.
디온 오배니언의 암살 이후, 노스 사이드 갱단의 잔당인 하이미 와이스와 벅스 모란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들은 치밀한 감시 끝에 토리오가 그의 아내 안나와 함께 쇼핑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순간을 노렸다. 토리오가 차에서 내리는 찰나, 매복해 있던 괴한들이 산탄총과 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토리오는 턱, 목, 오른쪽 팔, 복부 등에 총 7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벅스 모란은 쓰러진 토리오의 머리에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려 권총을 발사했으나, 천운인지 불발(Mis-fire)이 일어났고 때마침 들려온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암살자들은 도주했다. 토리오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으나 심신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던 토리오를 지킨 것은 다름 아닌 알 카포네였다. 카포네는 병원 층 전체를 빌려 무장한 부하들을 배치했고, 본인도 직접 침대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스승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지만 약 한 달간의 회복 기간을 거치며 토리오가 내린 결론은 의외였다. 그는 더 이상 시카고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토리오는 병실로 카포네를 불러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를 남긴다.
"알, 이제 모든 것은 네 것이다. 나는 떠나겠다.(It's all yours, Al. I'm quitting.)"
이 선언과 함께 토리오는 자신이 일궈온 수백만 달러 가치의 밀주 루트, 도박장, 유곽, 그리고 정치권 인맥 등 '시카고 아웃핏'의 전권을 카포네에게 양도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카포네는 스승의 은퇴를 존중하며 매달 막대한 생활비를 송금하는 의리를 보였다.[17]
이로써 알 카포네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체계적인 범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토리오가 '조용한 막후 조정자' 스타일이었다면, 카포네는 훨씬 더 공격적이고 화려한 통치 스타일을 고수했다.
카포네는 집권 직후 조직의 본부를 시카고 남부의 '메트로폴 호텔(Metropole Hotel)'로 옮기고, 하루에 수천 달러를 지불하며 50개가 넘는 방을 조직원들의 숙소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는 단순히 '갱단 두목'이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 보이길 원했다. 그는 매일 아침 실크 내의를 입고, 5,000달러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뽐내며, 장갑차가 부럽지 않은 특수 제작된 캐딜락[18]을 타고 시내를 활보했다.
카포네는 토리오가 중시했던 '협상'의 가치를 알고 있었지만, 필요할 때는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해야 제국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직 내에 '집행부(Enforcers)'를 강화하고, 당시 최신 화기였던 톰슨 기관총을 대량으로 들여왔다.
드럼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가 타자기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시카고 타이프라이터(Chicago Typewriter)'라는 별명이 붙은 이 무기는, 이후 시카고 갱스터 전쟁의 상징이 된다. 카포네는 이 화력을 바탕으로 토리오를 공격했던 노스 사이드 갱단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히 복수를 넘어, 시카고 전체를 단 하나의 색깔로 물들이기 위한 '통일 전쟁'의 서막이었다.
이 시기부터 카포네는 언론을 다루는 법을 완벽히 익혔다. 기자들에게 돈봉투를 건네는 것은 기본이었고, 자신을 '공공 서비스 제공자'로 묘사하는 기사가 나가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3.10. 밤의 대통령[편집]
토리오의 은퇴 이후 시카고의 1인자로 등극한 카포네는 단순히 무력으로 도시를 억압하는 구시대적 갱스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대중의 지지가 곧 권력의 방패'라는 사실을 유난히 빨리 깨달은 인물이었다. 1920년대 중반, 카포네는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금주법이라는 악법에 맞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정당한 사업가'로 포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에게 붙여진 '밤의 대통령(The Big Fellow)'이라는 별명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시카고라는 도시의 실질적인 통치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카포네는 당시 기자들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으며, 심지어 그들을 매수하거나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해 자신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유도했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치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카포네는 당시 기자들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으며, 심지어 그들을 매수하거나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해 자신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유도했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치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줄 뿐이다. 내가 파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존경받는 판사, 경찰관, 그리고 부유한 비즈니스맨들이다. 그런데 왜 나만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단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르는 사업가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는 금주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당시 미국인들에게 묘한 설득력을 얻었다. 카포네는 항상 최고급 실크 맞춤 정장을 입고, 5만 달러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채 링컨 리무진에서 내리며 대중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을 '자수성가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포지셔닝했고, 실제로 많은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그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카포네의 이미지 메이킹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사건은 1929년 대공황 직후에 실시한 자선 사업이었다. 경제가 붕괴하고 수만 명의 시카고 시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 시 정부나 연방 정부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카포네였다.
그는 시카고 시내에 거대한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고 매일 수천 명에게 고기와 빵, 커피를 제공했다. 당시 급식소 앞에는 "알 카포네의 무료 급식소: 하루 세 끼 식사 제공"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배고픈 시민들에게 그가 벌어들인 돈이 밀주나 도박, 매춘에서 나온 '더러운 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주는 카포네는 무능한 정부보다 훨씬 나은 존재로 비춰졌다.
이러한 행보는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면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려 할 때 배심원단을 구성하기 어려워지고, 정치인들이 자신을 공격할 명분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시카고의 많은 빈민층은 경찰이 카포네를 체포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그를 숨겨주거나 수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카포네는 스포츠 경기장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야구와 복싱을 좋아했는데, 경기장에 그가 나타나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유명 운동선수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에게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또한 시카고의 밤 문화를 주도하며 수많은 재즈 클럽을 운영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포네는 루이 암스트롱 같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을 자신의 클럽에 세우고 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었다.[19] 덕분에 시카고 재즈의 전성기는 카포네의 치세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선가'의 가면 뒤에는 여전히 잔혹한 갱스터의 본능이 숨쉬고 있었다. 낮에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100달러 지폐를 용돈으로 건네주던 그였지만, 밤에는 자신의 사업에 방해가 되는 경쟁 조직원을 산 채로 시멘트에 공구리쳐 미시간 호수에 던져버리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홍보 담당자를 따로 고용할 정도로 치밀했지만, 한 번 분노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직접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시카고 시민들은 '카포네를 지지하지만, 카포네를 두려워하는' 기묘한 공포 정취 속에 살고 있었다.
3.11. 하이미 와이스의 최후[편집]
조니 토리오가 은퇴하고 알 카포네가 시카고의 1인자로 부상하면서, 시카고의 밤은 더욱 잔혹한 피의 연대기로 접어들었다. 특히 북부 구역을 장악하고 있던 노스 사이드 갱은 그들의 수장 디온 오배니언이 카포네 측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복수심에 불타는 맹수와도 같았다. 오배니언의 뒤를 이은 인물은 바로 하이미 와이스(Hymie Weiss)였다. 본명은 '에마뉴엘 골드스타인'이었으나, 폴란드계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같은 이름 때문에 하이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이미 와이스는 카포네가 평생 만난 적수 중 가장 위험하고 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살인을 비즈니스처럼" 대했던 카포네와 달리, 오배니언의 죽음을 사적인 원한으로 받아들였고 카포네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26년 9월 20일, 시서로에 위치한 카포네의 본부 '호손 호텔'에 수십 대의 차량이 줄지어 지나가며 수천 발의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전무후무한 습격 사건을 주도한 것도 바로 와이스였다. 당시 카포네는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은 카포네에게 엄청난 굴욕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1920년대 중반, 시카고의 갱 전쟁은 '기관총의 시대'로 요약된다. 흔히 톰슨 기관총(Thompson Submachine Gun), 일명 '시카고 타이프라이터(Chicago Typewriter)'[20]가 본격적으로 범죄 현장에 투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카포네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와이스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시카고의 완벽한 통치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와이스는 카포네의 평화 협의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오배니언을 죽인 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라고 못 박았다. 결국 카포네는 이 '통제 불능의 광견'을 안락사시키기로 결심한다.
카포네의 해결사들인 '머신건' 잭 맥건(Jack McGurn)을 필두로 한 암살단은 노스 사이드 갱의 본거지인 성명교회(Holy Name Cathedral) 인근 건물을 임대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창가에 매복하여 와이스의 동선을 파악했다. 이는 단순히 차를 타고 지나가며 총을 쏘는 '드라이브 바이 슈팅'보다 훨씬 진보하고 치명적인 '스나이퍼 매복' 방식이었다.
운명의 날 오후 4시경, 하이미 와이스가 자신의 보디가드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 교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매복 지점에 들어서는 순간, 건너편 건물 2층 창문에서 두 자루의 기관총과 산탄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불과 몇 초 만에 10여 발 이상의 탄환이 와이스의 몸을 관통했다. 와이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선배 오배니언이 살해당했던 그 거리에서 똑같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은 노스 사이드 갱의 척추를 부러뜨린 것과 다름없었다. 조직의 브레인이자 심장이었던 와이스가 사라지자, 노스 사이드 갱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포네는 이 승리를 통해 시카고 전체에 자신의 압도적인 화력과 정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전쟁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이미 와이스 암살 당시 발사된 수많은 유탄들은 인근 건물의 벽을 걸레짝으로 만들었고, 성명교회의 초석에는 아직도 당시의 총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21]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쟁터 같은 광경에 시카고 시민들은 서서히 공포를 넘어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들만의 리그"라며 방관하던 여론이 "아이들이 길을 걷다 죽을 수도 있다"라는 위기감으로 변한 것이다. 카포네는 여전히 "나는 시민들에게 술을 주는 서비스업자일 뿐"이라고 강변했지만, 하이미 와이스의 시체 위에 뿌려진 선혈은 그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잔혹한 학살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와이스의 죽음 이후 노스 사이드 갱의 지휘권은 훗날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의 주인공이 되는 벅스 모란에게 넘어간다. 이는 더 큰 비극의 전초전이었다.
하이미 와이스는 카포네가 평생 만난 적수 중 가장 위험하고 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살인을 비즈니스처럼" 대했던 카포네와 달리, 오배니언의 죽음을 사적인 원한으로 받아들였고 카포네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26년 9월 20일, 시서로에 위치한 카포네의 본부 '호손 호텔'에 수십 대의 차량이 줄지어 지나가며 수천 발의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전무후무한 습격 사건을 주도한 것도 바로 와이스였다. 당시 카포네는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은 카포네에게 엄청난 굴욕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1920년대 중반, 시카고의 갱 전쟁은 '기관총의 시대'로 요약된다. 흔히 톰슨 기관총(Thompson Submachine Gun), 일명 '시카고 타이프라이터(Chicago Typewriter)'[20]가 본격적으로 범죄 현장에 투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카포네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와이스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시카고의 완벽한 통치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와이스는 카포네의 평화 협의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오배니언을 죽인 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라고 못 박았다. 결국 카포네는 이 '통제 불능의 광견'을 안락사시키기로 결심한다.
카포네의 해결사들인 '머신건' 잭 맥건(Jack McGurn)을 필두로 한 암살단은 노스 사이드 갱의 본거지인 성명교회(Holy Name Cathedral) 인근 건물을 임대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창가에 매복하여 와이스의 동선을 파악했다. 이는 단순히 차를 타고 지나가며 총을 쏘는 '드라이브 바이 슈팅'보다 훨씬 진보하고 치명적인 '스나이퍼 매복' 방식이었다.
운명의 날 오후 4시경, 하이미 와이스가 자신의 보디가드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 교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매복 지점에 들어서는 순간, 건너편 건물 2층 창문에서 두 자루의 기관총과 산탄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불과 몇 초 만에 10여 발 이상의 탄환이 와이스의 몸을 관통했다. 와이스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선배 오배니언이 살해당했던 그 거리에서 똑같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은 노스 사이드 갱의 척추를 부러뜨린 것과 다름없었다. 조직의 브레인이자 심장이었던 와이스가 사라지자, 노스 사이드 갱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포네는 이 승리를 통해 시카고 전체에 자신의 압도적인 화력과 정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전쟁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이미 와이스 암살 당시 발사된 수많은 유탄들은 인근 건물의 벽을 걸레짝으로 만들었고, 성명교회의 초석에는 아직도 당시의 총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21]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쟁터 같은 광경에 시카고 시민들은 서서히 공포를 넘어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들만의 리그"라며 방관하던 여론이 "아이들이 길을 걷다 죽을 수도 있다"라는 위기감으로 변한 것이다. 카포네는 여전히 "나는 시민들에게 술을 주는 서비스업자일 뿐"이라고 강변했지만, 하이미 와이스의 시체 위에 뿌려진 선혈은 그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닌 잔혹한 학살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와이스의 죽음 이후 노스 사이드 갱의 지휘권은 훗날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의 주인공이 되는 벅스 모란에게 넘어간다. 이는 더 큰 비극의 전초전이었다.
3.12. 1926년 호텔 회담과 일시적인 휴전[편집]
1926년 가을, 시카고의 거리는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였다. 하이미 와이스를 비롯한 노스 사이드 갱단(North Side Gang)의 수뇌부들이 카포네의 톰슨 기관총 세례에 낙엽처럼 쓸려 나갔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시카고 전역은 유동적인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시카고 경찰조차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막장이 되자, 역설적으로 '비즈니스'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서 손님들은 유곽과 도박장을 찾길 꺼렸고, 연방 정부의 감시는 날로 매서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알 카포네는 특유의 수완을 발휘하여 시카고 내 모든 주요 조직 수장들을 소집한다. 이것이 바로 마피아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긴박했던 '1926년 호텔 셔먼 회담(Hotel Sherman Conference)'이다.
1926년 10월 21일, 시카고 루프 지구에 위치한 호텔 셔먼의 연회장에는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어제의 적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카포네는 이 회담을 위해 시카고 경찰과 미리 협의하여 회담장 주변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각 조직의 보디가드들은 연회장 밖에서 서로를 쏘아보며 대기해야 했다.
회담에 참석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에 알 카포네는 특유의 수완을 발휘하여 시카고 내 모든 주요 조직 수장들을 소집한다. 이것이 바로 마피아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긴박했던 '1926년 호텔 셔먼 회담(Hotel Sherman Conference)'이다.
1926년 10월 21일, 시카고 루프 지구에 위치한 호텔 셔먼의 연회장에는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어제의 적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카포네는 이 회담을 위해 시카고 경찰과 미리 협의하여 회담장 주변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각 조직의 보디가드들은 연회장 밖에서 서로를 쏘아보며 대기해야 했다.
회담에 참석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았다.
- 시카고 아웃핏: 알 카포네 (의장 격)
- 노스 사이드 갱: '벅스' 모란, 빈센트 드루치
- 조나 제나 갱: 남은 제나 형제들
- 사우스 사이드 갱: 폴카 자코 등 소규모 분파 수장들
카포네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는 데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쓰고 있다. 우리가 싸우는 동안 이득을 보는 건 장례식장뿐이다"라며 파격적인 제안을 건넨다. 그것은 바로 시카고 전체를 '구역별 전매권' 형태로 분할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시카고는 마치 케이크처럼 조각조각 나뉘어 각 조직의 전유물이 되었다. 카포네는 자신의 본거지인 시서로(Cicero)와 시카고 남부 일대를 확고히 했고, 숙적이었던 노스 사이드 갱단에게는 시카고 북부의 노다지 땅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영역 침범 자제: 타 조직의 구역에서 술을 팔거나 도박장을 개설할 경우 공동의 적(Public Enemy)으로 간주한다. 폭력의 자제: 개인적인 원한은 조직 차원에서 중재하며, 무단 투옥이나 암살은 금지한다. |
정치적 공동 대응: 경찰 및 정계 매수를 위한 비용과 정보를 공유하여 외부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한다. ||
놀랍게도 이 '피의 약속'은 이후 약 2개월 동안 철저히 지켜졌다. 시카고 시민들은 오랜만에 총성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었고, 갱단들은 평화(?) 속에서 역대 최대의 매출을 올렸다. 카포네는 이 기간을 이용해 자신의 조직을 더욱 기업화하고, 합법적인 사업체(우유 유통, 세탁업 등)로 자금을 세탁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 평화는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다. 특히 노스 사이드 갱의 새로운 수장 벅스 모란은 카포네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카포네를 '저질스러운 이탈리아 놈'이라 비하하며, 그가 제안한 평화 협정을 단순히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 벌기용으로 치부했다.
실제로 협정 체결 직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국지전이 계속되었다. 트럭 탈취 사건이 빈번해졌고, 각 조직의 하부 조직원들은 여전히 술집에서 만나면 서로에게 침을 뱉었다. 카포네 역시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평화를 외쳤지만, 뒤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작은 불씨들을 하나하나 꺼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이 위태로운 평화는 1927년 초, 노스 사이드 갱이 카포네의 밀주 트럭을 대대적으로 습격하면서 산산조각 난다.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시카고는 다시 한번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마피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건인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로 치닫는 전초전이었다.[22][당시][24]
3.13.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편집]
"미국 범죄 사상 가장 악명 높은 날"이자, 알 카포네라는 이름이 전 미국의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1929년 2월 14일 오전, 시카고 북부 링컨 파크 인근의 한 차고지에서 벌어진 이 참극은 단순한 조직 간의 항쟁을 넘어, 공권력의 무능함과 마피아의 잔혹함이 극단적으로 치닫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시카고는 카포네의 '사우스 사이드 갱'과 벅스 모란이 이끄는 '노스 사이드 갱'이 피 비린내 나는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벅스 모란은 카포네의 밀주 트럭을 탈취하거나 카포네의 측근들을 암살하려 시도하는 등 카포네에게 끊임없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카포네는 그의 오른팔이자 살인 기계였던 '머신건' 잭 맥건(Jack McGurn)과 모의하여 모란 일당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을 세운다.
계획은 치밀했다. 카포네 측은 밀주 업자로 위장하여 벅스 모란에게 "고급 위스키(Old Log Cabin)를 헐값에 넘기겠다"라고 유혹했다. 거래 장소는 노스 사이드 갱의 아지트였던 에스엠씨 카트리지 컴퍼니(S.M.C. Cartage Co.) 창고였다.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경, 모란의 부하 7명이 창고에서 물건을 기다리고 있을 때, 시카고 경찰차 한 대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경찰 제복을 입은 2명과 사복 차림의 2명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고, 모란의 부하들은 일상적인 경찰 단속(Raid)인 줄 알고 저항 없이 벽에 손을 짚고 일렬로 늘어섰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수갑이 아니라 톰슨 기관총이었다. 가짜 경찰들은 벽을 등지고 서 있는 7명을 향해 70발 이상의 총탄을 퍼부었고, 확인 사살까지 마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전의 제1 타겟이었던 벅스 모란은 현장에 없었다. 그는 거래 시간에 맞춰 창고로 향하던 중, 입구에 세워진 경찰차를 보고 단속이 뜬 줄 알고 근처 식당으로 몸을 피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몰살당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목숨을 건진 것이다. 나중에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확인한 모란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뱉었다.
당시 시카고는 카포네의 '사우스 사이드 갱'과 벅스 모란이 이끄는 '노스 사이드 갱'이 피 비린내 나는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벅스 모란은 카포네의 밀주 트럭을 탈취하거나 카포네의 측근들을 암살하려 시도하는 등 카포네에게 끊임없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카포네는 그의 오른팔이자 살인 기계였던 '머신건' 잭 맥건(Jack McGurn)과 모의하여 모란 일당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을 세운다.
계획은 치밀했다. 카포네 측은 밀주 업자로 위장하여 벅스 모란에게 "고급 위스키(Old Log Cabin)를 헐값에 넘기겠다"라고 유혹했다. 거래 장소는 노스 사이드 갱의 아지트였던 에스엠씨 카트리지 컴퍼니(S.M.C. Cartage Co.) 창고였다.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경, 모란의 부하 7명이 창고에서 물건을 기다리고 있을 때, 시카고 경찰차 한 대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경찰 제복을 입은 2명과 사복 차림의 2명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고, 모란의 부하들은 일상적인 경찰 단속(Raid)인 줄 알고 저항 없이 벽에 손을 짚고 일렬로 늘어섰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수갑이 아니라 톰슨 기관총이었다. 가짜 경찰들은 벽을 등지고 서 있는 7명을 향해 70발 이상의 총탄을 퍼부었고, 확인 사살까지 마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전의 제1 타겟이었던 벅스 모란은 현장에 없었다. 그는 거래 시간에 맞춰 창고로 향하던 중, 입구에 세워진 경찰차를 보고 단속이 뜬 줄 알고 근처 식당으로 몸을 피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몰살당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목숨을 건진 것이다. 나중에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확인한 모란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뱉었다.
"오직 카포네만이 그따위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Only Capone kills like that.)
한편, 이 사건의 배후인 알 카포네는 사건 당일 시카고에 없었다. 그는 플라워 주 마이애미의 호화 저택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으며, 검찰과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지역 보안관과 담소를 나누는 등 완벽한 알리바이를 구축해 둔 상태였다. 법적으로 그는 '무죄'였으나, 전 국민은 누가 이 일을 저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은 카포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으나, 동시에 파멸의 서곡이 되었다. 이전까지 대중은 카포네를 '의적'이나 '매력적인 무법자'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나,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을 벽에 세워두고 도살한 이 사건의 잔혹함에 경악했다.[25]
이 사건 이후 연방 정부와 존 에드거 후버의 FBI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언론은 카포네를 '공공의 적 1호(Public Enemy No. 1)'라고 명명하며 대대적인 비난을 쏟아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는 "저 사람(카포네)을 반드시 감옥으로 보내라"는 특명을 내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대학살은 카포네 제국의 정점이자, 국가라는 거대한 공권력이 마피아를 향해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게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사건]
사건에 사용된 톰슨 기관총 2정은 훗날 조직원의 집에서 발견되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지만, 카포네를 직접적으로 기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렌타인 대학살 이전까지만 해도 카포네는 대중에게 일종의 '비뚤어진 영웅' 혹은 '금주법이라는 악법에 저항하는 유능한 사업가'로 비쳐졌다. 그는 시카고 시민들에게 공짜 수프를 나눠주고, 야구 경기장에 나타나 환호하는 군중에게 손을 흔드는 '셀러브리티 갱스터'였다. 하지만 1929년 2월 14일, 무고한 시민들과 비무장 상태의 경쟁 조직원들이 벽에 늘어선 채 기관총 세례를 받고 처참하게 도륙된 사건은 미국 사회 전체를 경악게 했다.
대학살의 현장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하자, 시카고 시민들이 느끼던 막연한 동경은 순식간에 공포와 혐오로 바뀌었다.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시카고는 문명 도시인가, 아니면 도살장인가?"라는 헤드라인을 뽑아내며 카포네를 압박했다. 특히 당시 연방 정부와 수사 기관이 무능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격노하며 "시카고의 그 자(That man in Chicago)를 반드시 잡아넣으라"는 특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카고 범죄 위원회(Chicago Crime Commission)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의 적(Public Enemy)' 명단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영예(?)로운 제1호(Number One)가 바로 알폰소 카포네였다.[ 이 명단에는 카포네의 형인 랄프 카포네, 조직의 2인자였던 프랭크 니티 등 시카고 아웃핏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공공의 적 1호'라는 명칭은 카포네가 그토록 공들여 쌓아온 '친근한 이웃 사촌 사업가'라는 가면을 완전히 벗겨버렸다.
카포네의 몰락을 부추긴 것은 단순한 수사 기관의 압박만이 아니었다. 시카고의 평범한 중산층 부모들과 부인회, 종교 단체들이 "내 아이가 자라는 도시에서 대낮에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시카고 정화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이는 카포네와 유착 관계에 있던 부패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카포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언론 인터뷰를 자청하며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술을 가져다준 죄밖에 없다. 학살은 나와 무관하다"며 발뺌했으나, 이미 여론의 화살은 그를 향해 고정된 상태였다. 특히 그가 학살 당일 플로리다의 별장에 있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는 오히려 수사관들에게 "그가 미리 계획하고 자리를 피했다"는 확신만 심어주는 꼴이 되었다.
여론이 악화되자 시카고의 유력 기업인들과 재력가들로 구성된 비밀 결사체인 '6인 위원회(The Secret Six)'가 결성된다. 이들은 정부의 수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사비로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사설 탐정을 고용해 카포네의 자금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훗날 엘리어트 네스의 '언터처블' 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카포네 제국의 숨통을 조이는 경제적 배후 역할을 수행한다.
카포네는 그동안 경찰과 검찰을 돈으로 매수해왔으나, 분노한 민심과 거대 자본이 결탁하자 그의 돈줄은 더 이상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과거에는 그에게 뇌물을 받던 공무원들조차 "이제 카포네와 엮이면 정치 생명이 끝난다"는 판단하에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제국은 여전히 거대해 보였지만, 기반은 이미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27][28]
카포네는 이 시기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으며, 자신의 경호원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등 편집증적인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3.14. 조직 내 프락치 숙청과 '야구 배트' 사건[편집]
1920년대 후반, 알 카포네의 시카고 아웃핏은 표면적으로는 무적의 요새와 같았으나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의심과 배신의 징후가 포착되고 있었다. 특히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이후 수사 당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조직 내에서도 "카포네의 시대가 끝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때 카포네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던 최측근들의 변절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배신은 카포네가 형제처럼 아꼈던 세 명의 간부, 알버트 안셀미(Albert Anselmi), 존 스칼리제(John Scalise), 그리고 조셉 '홉 토드' 지운타(Joseph Giunta)의 음모였다. 이들은 단순한 조직원이 아니라, 아웃핏 내에서도 '최고의 킬러'로 통하며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던 핵심 전력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시칠리아 연맹(Unione Siciliana)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카포네는 비록 이탈리아계였으나 나폴리 출신이었기에, 정통 시칠리아파 마피아들 사이에서는 은근한 차별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지운타는 시칠리아 연맹의 회장직을 노리고 있었고, 안셀미와 스칼리제는 카포네의 라이벌이었던 조셉 아이엘로(Joseph Aiello)와 손을 잡고 카포네를 암살한 뒤 조직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답게 카포네의 정보망은 치밀했다. 그는 자신의 경호원이자 충복이었던 프랭크 리오(Frank Rio)를 통해 이들의 밀당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29] 카포네는 분노했지만, 이를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피아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도 상징적인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1929년 5월 7일 밤, 카포네는 인디애나주 해먼드 근처의 한 식당(혹은 호손 호텔의 연회장으로 전해짐)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안셀미, 스칼리제, 지운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음모가 들통난 줄도 모르고 카포네가 제공하는 최고급 요리와 와인을 즐겼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카포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의 배신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장내에 서늘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 카포네는 미리 준비해둔 도금된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당황해하는 세 사람의 머리와 어깨를 향해 무차별적인 난타를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배신은 카포네가 형제처럼 아꼈던 세 명의 간부, 알버트 안셀미(Albert Anselmi), 존 스칼리제(John Scalise), 그리고 조셉 '홉 토드' 지운타(Joseph Giunta)의 음모였다. 이들은 단순한 조직원이 아니라, 아웃핏 내에서도 '최고의 킬러'로 통하며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던 핵심 전력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시칠리아 연맹(Unione Siciliana)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카포네는 비록 이탈리아계였으나 나폴리 출신이었기에, 정통 시칠리아파 마피아들 사이에서는 은근한 차별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지운타는 시칠리아 연맹의 회장직을 노리고 있었고, 안셀미와 스칼리제는 카포네의 라이벌이었던 조셉 아이엘로(Joseph Aiello)와 손을 잡고 카포네를 암살한 뒤 조직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답게 카포네의 정보망은 치밀했다. 그는 자신의 경호원이자 충복이었던 프랭크 리오(Frank Rio)를 통해 이들의 밀당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29] 카포네는 분노했지만, 이를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피아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도 상징적인 '최후의 만찬'을 준비했다.
1929년 5월 7일 밤, 카포네는 인디애나주 해먼드 근처의 한 식당(혹은 호손 호텔의 연회장으로 전해짐)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안셀미, 스칼리제, 지운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음모가 들통난 줄도 모르고 카포네가 제공하는 최고급 요리와 와인을 즐겼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카포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의 배신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장내에 서늘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 카포네는 미리 준비해둔 도금된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당황해하는 세 사람의 머리와 어깨를 향해 무차별적인 난타를 시작했다.
"너희는 내 음식을 먹고, 내 술을 마시고, 내 돈을 받으면서 나를 팔아넘기려 했다."
이 처형 방식은 마피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모욕적이고 잔인한 방식이었다. 보통 총이나 칼로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관례였으나, 카포네는 그들을 '스포츠 도구'로 때려죽임으로써 조직 내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세 사람이 피떡이 되어 쓰러지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그들의 몸에 확인 사살을 한 뒤 시신을 교외 쓰레기장에 버렸다.
이 사건은 카포네의 광기와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일화로 굳어졌다. 훗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언터처블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카포네가 연회장에서 부하의 머리를 배트로 박살 내는 장면이 바로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시 부검 기록에 따르면 시신들의 뼈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카포네가 단순한 처벌을 넘어 극도의 감정적 분노를 쏟아냈음을 시사한다. 이 사건 이후 아웃핏 내부에서 카포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비즈니스에 감정을 섞지 말라"던 스승 조니 토리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행보였으나, 단기적으로는 완벽한 공포 정치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카포네가 '신사적인 사업가'가 아니라 '미친 도살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과 연이은 배트 처형 사건으로 인해 연방 정부는 그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사건 당시 카포네가 사용했던 배트가 진짜 금으로 도금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고가의 제품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 처형식 직후 카포네는 심리적 불안감을 느꼈는지, 필라델피아에서 고의로 총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짧은 징역형을 사는 '셀프 투옥'을 택하기도 했다.[30]
3.15. 애틀랜틱 시티 회의[편집]
1929년 5월, 뉴저지주의 휴양지 애틀랜틱 시티의 해변 산책로에는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암흑가의 거물들이 집결했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사업가들의 휴양 모임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미국 범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환점이 된 '애틀랜틱 시티 회의(Atlantic City Conference)'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인물은 '마피아의 회계사'라 불리던 마이어 랜스키와 뉴저지의 지배자 이녹 '너키' 존슨, 그리고 시카고의 제왕 알 카포네였다.
이 회의가 소집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카포네가 저지른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이 있었다. 카포네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는 대중의 공포를 넘어 연방 정부의 강력한 압박을 불러왔고, 이는 곧 모든 조직의 밀주 비즈니스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랜스키와 찰스 '럭키' 루치아노 같은 신세대 마피아들은 "총질은 돈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카포네 역시 자신의 통제 불능한 폭력을 제도화된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거물들은 뉴욕의 루치아노, 조니 토리오(카포네의 스승이자 고문 자격), 필라델피아의 '부부' 호프먼, 디트로이트의 퍼플 갱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애틀랜틱 시티의 리츠 칼튼 호텔을 통째로 빌려 사흘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카포네는 이 회의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지역 보스들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마피아가 단순한 '거리의 갱단'에서 국가 규모의 '보이지 않는 정부'로 진화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카포네는 이 회의를 통해 시카고 내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전국적인 보스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효과를 누렸다.
회의가 끝나고 시카고로 돌아가던 카포네는 기묘한 사건에 휘말린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것이다.[31]
이를 두고 범죄학자들 사이에서는 분분한 해석이 오간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카포네의 자진 투옥설'이다.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이후 시카고 내의 살해 위협과 연방 수사관들의 추적이 극에 달하자, 신변 보호를 위해 안전한 감옥으로 잠시 피신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필라델피아 교도소에서 마치 사무실처럼 꾸며진 호화로운 독방을 사용하며 조직을 원격으로 지휘했다.
하지만 이 '휴가' 같은 수감 생활은 카포네의 오판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시카고의 권력 구도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칼을 갈던 국세청의 프랭크 윌슨과 엘리어트 네스의 수사가 본궤도에 오르는 시간을 벌어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애틀랜틱 시티 회의는 카포네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자, 동시에 마피아라는 조직이 개별 보스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단계를 넘어 '시스템'으로 안착한 순간이었다. 카포네는 이 회의를 통해 "나는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라 거대한 경제 주체의 수장"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스템의 정교함은 훗날 그가 몰락했을 때 조직이 그를 빠르게 대체하고 버릴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카포네가 구축에 일조한 이 '전국 위원회' 시스템은 그가 감옥에 간 이후에도 수십 년간 미국 암흑가를 지배하게 된다.
이 회의가 소집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카포네가 저지른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이 있었다. 카포네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는 대중의 공포를 넘어 연방 정부의 강력한 압박을 불러왔고, 이는 곧 모든 조직의 밀주 비즈니스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랜스키와 찰스 '럭키' 루치아노 같은 신세대 마피아들은 "총질은 돈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카포네 역시 자신의 통제 불능한 폭력을 제도화된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거물들은 뉴욕의 루치아노, 조니 토리오(카포네의 스승이자 고문 자격), 필라델피아의 '부부' 호프먼, 디트로이트의 퍼플 갱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애틀랜틱 시티의 리츠 칼튼 호텔을 통째로 빌려 사흘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카포네는 이 회의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지역 보스들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마피아가 단순한 '거리의 갱단'에서 국가 규모의 '보이지 않는 정부'로 진화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카포네는 이 회의를 통해 시카고 내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를 전국적인 보스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효과를 누렸다.
회의가 끝나고 시카고로 돌아가던 카포네는 기묘한 사건에 휘말린다.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것이다.[31]
이를 두고 범죄학자들 사이에서는 분분한 해석이 오간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카포네의 자진 투옥설'이다.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이후 시카고 내의 살해 위협과 연방 수사관들의 추적이 극에 달하자, 신변 보호를 위해 안전한 감옥으로 잠시 피신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필라델피아 교도소에서 마치 사무실처럼 꾸며진 호화로운 독방을 사용하며 조직을 원격으로 지휘했다.
하지만 이 '휴가' 같은 수감 생활은 카포네의 오판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시카고의 권력 구도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칼을 갈던 국세청의 프랭크 윌슨과 엘리어트 네스의 수사가 본궤도에 오르는 시간을 벌어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애틀랜틱 시티 회의는 카포네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자, 동시에 마피아라는 조직이 개별 보스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단계를 넘어 '시스템'으로 안착한 순간이었다. 카포네는 이 회의를 통해 "나는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라 거대한 경제 주체의 수장"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스템의 정교함은 훗날 그가 몰락했을 때 조직이 그를 빠르게 대체하고 버릴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카포네가 구축에 일조한 이 '전국 위원회' 시스템은 그가 감옥에 간 이후에도 수십 년간 미국 암흑가를 지배하게 된다.
3.16. 허버트 후버[편집]
1920년대 후반, 시카고는 더 이상 미국의 일개 도시가 아닌 '범죄의 수도'라는 오명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카포네는 단순히 지하 세계의 거물이 아니라, 국가의 공권력을 비웃으며 군림하는 '밤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1929년 3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허버트 후버는 이를 묵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후버에게 있어 카포네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체제 위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후버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미국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특히 1929년 2월에 발생한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낮에 경찰로 위장한 괴한들이 경쟁 조직원들을 벽에 세워두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사건은, 시카고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상징했다.
후버는 취임 직후 내각 회의에서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을 불러 다음과 같이 엄중히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후버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미국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특히 1929년 2월에 발생한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낮에 경찰로 위장한 괴한들이 경쟁 조직원들을 벽에 세워두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사건은, 시카고의 치안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상징했다.
후버는 취임 직후 내각 회의에서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을 불러 다음과 같이 엄중히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 자(카포네)가 감옥에 가는 것을 보고 싶소.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동해서라도 말이오."
이 선언은 미국 정부가 조직범죄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역사적 기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마피아 소탕은 시카고 시경(CPD)이나 주 정부의 소관이었으나, 이들이 카포네의 뇌물에 오염되어 제 기능을 못 하자 결국 연방 정부가 직접 칼을 빼 든 것이다. 후버는 카포네를 잡는 것이 자신의 행정부 능력을 입증하는 시험대라고 판단했다.
후버의 명령에 따라 연방 정부는 두 갈래의 '쌍방향 공격' 전략을 수립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치밀한 작전이었다.
첫 번째 루트는 법무부 산하 금주국(Bureau of Prohibition)을 동원하여 카포네의 자금줄인 밀주 제조 공장과 유통망을 직접 타격하는 것. 이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엘리어트 네스와 그의 팀 '언터처블'이었다. 이들은 카포네의 뇌물을 거부하며 물리적인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두 번째 루트는 재무부 산하 국세청(IRS)의 특별 수사국을 동원하여 카포네의 탈세 혐의를 입증하는 것. 이 임무의 총책임자는 프랭크 윌슨이었다. 총과 폭력에 익숙한 갱스터들에게 '장부'와 '세금'이라는 생소한 무기로 접근하는 전략이었다.
카포네는 처음에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을 비웃었다. 그는 이미 시카고의 수많은 공무원을 매수해 두었기에, 워싱턴에서 온 '샌님'들이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자만했다. 하지만 후버 대통령의 의지는 카포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완강했다.
정부는 카포네를 압박하기 위해 심리전도 병행했다. 시카고 범죄위원회(Chicago Crime Commission)는 1930년, 사상 처음으로 '공공의 적(Public Enemy)'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 리스트의 맨 윗자리에 적힌 이름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 [32]
이 '공공의 적 1호'라는 타이틀은 카포네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는 더 이상 음지에서 활동하는 쥐가 아니라, 전 국가적 추적을 받는 사냥감이 된 것이다. 후버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수사 진척 상황을 보고받았으며, 수사관들에게 "예산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결과로 증명하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후버의 선언 이후, 카포네 제국에는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연방 수사관들이 시카고에 상주하며 카포네와 연관된 모든 사업체를 들쑤시고 다니자, 카포네에게 뇌물을 받던 부패 경찰들과 정치인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는 소문은 카포네의 철옹성 같던 로비 네트워크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포네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일부러 체포되어 가벼운 죄목으로 수감되는 등 '소나기 피하기' 작전을 썼으나, 후버 행정부는 그가 출소하기만을 기다리며 거대한 그물을 짜고 있었다. 훗날 카포네는 알카트라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후버가 내 사업을 망쳐놓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후버의 선언은 범죄가 국가 시스템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서막이자 카포네라는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린 사건이었다.
3.17. '엘리어트 네스와 언터처블 부대'의 활약[편집]
카포네 제국이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 거대한 성벽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화려한 중무장 군대가 아니라 연방 정부 소속의 젊은 수사관들과 그들의 '결벽에 가까운 청렴함'이었다. 1929년, 법무부 산하 금주국(Bureau of Prohibition)은 시카고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26세의 젊고 야심 찬 수사관 엘리어트 네스(Eliot Ness)를 팀장으로 임명한다. 이것이 훗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전설적인 수사팀, '언터처블(The Untouchables)'의 시작이다.
당시 시카고 경찰의 90% 이상이 카포네의 뇌물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연방 수사관들조차 카포네가 건네는 두둑한 돈봉투 앞에서 눈을 감아주기 일쑤였다. 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팀원을 선발할 때 수사 능력보다 '절대 매수되지 않을 도덕성'을 최우선 지표로 삼은 것이다. 그는 수천 명의 요원 기록을 검토하여 단 9명(나중에 11명으로 증원)의 정예요원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카포네가 제안한 수만 달러의 뇌물을 단칼에 거절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언터처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네스와 그의 팀이 선택한 전략은 카포네의 자금줄인 밀주 공장(Brewery)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수사관들이 카포네의 눈치를 보며 변두리 창고나 단속하는 시늉만 했다면, 네스는 카포네의 핵심 제조 시설을 파악해 대형 트럭에 강철판을 덧댄 '충돌용 램(Ram)'을 장착하고 그대로 들이받아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과감한 전술을 구사했다.
1930년 한 해 동안 네스의 팀은 카포네 소속의 밀주 공장 수십 곳을 급습하여 수백만 달러 상당의 설비와 술을 파기했다. 이는 카포네에게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무적의 카포네"라는 신화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카포네는 분노하여 네스에게 1주일에 2,000달러(현재 가치로 약 3만 달러 이상)라는 거액의 뇌물을 제안했으나, 네스는 이를 언론에 공개하며 카포네를 조롱했다.
당시 시카고 경찰의 90% 이상이 카포네의 뇌물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연방 수사관들조차 카포네가 건네는 두둑한 돈봉투 앞에서 눈을 감아주기 일쑤였다. 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팀원을 선발할 때 수사 능력보다 '절대 매수되지 않을 도덕성'을 최우선 지표로 삼은 것이다. 그는 수천 명의 요원 기록을 검토하여 단 9명(나중에 11명으로 증원)의 정예요원을 선발했는데, 이들은 카포네가 제안한 수만 달러의 뇌물을 단칼에 거절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언터처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네스와 그의 팀이 선택한 전략은 카포네의 자금줄인 밀주 공장(Brewery)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수사관들이 카포네의 눈치를 보며 변두리 창고나 단속하는 시늉만 했다면, 네스는 카포네의 핵심 제조 시설을 파악해 대형 트럭에 강철판을 덧댄 '충돌용 램(Ram)'을 장착하고 그대로 들이받아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과감한 전술을 구사했다.
1930년 한 해 동안 네스의 팀은 카포네 소속의 밀주 공장 수십 곳을 급습하여 수백만 달러 상당의 설비와 술을 파기했다. 이는 카포네에게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무적의 카포네"라는 신화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카포네는 분노하여 네스에게 1주일에 2,000달러(현재 가치로 약 3만 달러 이상)라는 거액의 뇌물을 제안했으나, 네스는 이를 언론에 공개하며 카포네를 조롱했다.
"우리는 당신의 돈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 엘리어트 네스가 카포네의 사자(使者)에게 남긴 말.
네스는 단순히 수사관에 머물지 않고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그는 압수한 카포네의 고급 승용차와 밀주 트럭들을 일렬로 세워 카포네의 본부인 렉싱턴 호텔 앞을 천천히 지나가게 하는 퍼레이드를 벌였다. 창밖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카포네는 평정심을 잃고 고함을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사건은 시카고 시민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공권력이 드디어 카포네를 압도하고 있다"는 희망이었다. 네스는 기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활약상을 보도하게 함으로써, 카포네가 구축해 놓은 '자선 사업가' 이미지를 '법을 어기는 파렴치한 범죄자'로 치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중문화에서는 네스가 카포네를 직접 체포하고 모든 공을 세운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카포네를 감옥으로 보낸 결정타는 네스의 금주법 위반 수사가 아니라 국세청(IRS)의 탈세 수사였다.[33]
네스의 활약은 카포네의 수입원을 차단하고 조직을 위축시켜 국세청 수사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조력자' 역할에 가까웠다. 또한 네스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활약을 다소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4]
그럼에도 모두가 부패에 찌들어 있던 시대에 "매수되지 않는 공무원"의 존재를 증명했다는 점에서 엘리어트 네스와 언터처블의 가치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그들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무서운 것이 '꺾이지 않는 원칙'임을 카포네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3.18. 재판[편집]
1931년 10월, 시카고 연방 법원 청사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구름 떼처럼 몰려든 취재진과 호기심 어린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범죄 조직의 수장인 알 카포네가 마침내 피고인석에 앉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살인도, 강도도, 밀주 판매도 아닌 바로 '탈세(Income Tax Evasion)'였다.
카포네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법정에 나타났다. 그는 5,000달러짜리 맞춤형 겨자색 정장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빛내며, 자신을 기소한 검사들을 향해 "국가가 사업가의 주머니를 털려고 한다"라며 조롱 섞인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자신의 제국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카포네를 법정에 세운 결정적인 공신은 엘리어트 네스의 '언터처블'이 아닌, 국세청(IRS)의 특별 수사관 프랭크 윌슨이었다. 윌슨은 수년간 카포네 조직의 뒤를 쫓으며 수만 장의 영수증과 장부를 뒤졌고, 마침내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카포네가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에 대해 단 한 푼의 소득세도 내지 않았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검찰 측의 전략은 명확했다. "카포네가 직접 살인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지만, 그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소득 신고를 누락했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카포네의 은신처에서 압수한 비밀 장부를 통해 그가 경마, 도박, 밀주로 벌어들인 액수를 낱낱이 공개했다.
특히 카포네의 자산 관리인이었던 레슬리 슘웨이(Leslie Shumway)를 증인석에 세운 것은 결정타였다. 슘웨이는 보복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카포네가 조직의 수익금을 어떻게 배분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카포네 측 변호인단은 "도박으로 번 돈은 소득이 아니며, 카포네는 그저 친구들의 돈을 대신 관리했을 뿐"이라는 궁색한 논리를 펼쳤으나 법망을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카포네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돈의 힘'을 사용하려 했다. 그는 배심원단 명단을 미리 입수하여, 배심원 전원을 거액으로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 획책했다. 실제로 재판 직전, 카포네의 부하들은 배심원들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의 안녕을 생각하라"며 은밀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재판장 제임스 윌커슨(James H. Wilkerson) 판사는 재판 당일 아침, 미국 법정 역사상 유례없는 결단을 내린다.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옆방에서 진행 중이던 다른 재판의 배심원단과 카포네 재판의 배심원단을 통째로 맞바꿔버린 것이다.[35]
카포네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사법 매수가 차단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카포네 측 변호인단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전의를 상실했다.
1931년 10월 17일, 배심원단은 9시간의 숙의 끝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카포네는 23개 혐의 중 5개 항목에서 유죄가 인정되었다. 윌커슨 판사는 그에게 당시 탈세 사건으로는 파격적인 징역 11년, 벌금 5만 달러, 재판 비용 3만 달러 부담을 선고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동안 카포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는 그저 사람들에게 술을 줬을 뿐이다!"라고 소리쳤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웅장했던 '시카고의 황제'는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갔고, 이 장면은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이 재판은 단순히 한 명의 갱스터를 처벌한 사건이 아니었다. 국가 시스템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군림하던 무법자를 어떻게 '합법적인 방식'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이정표였다. 1920년대 무법천지였던 시카고의 시대가 저물고, 연방 정부의 공권력이 범죄 조직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재판 초기만 해도 카포네는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해 배심원 명단을 입수했고, 그들 전원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무죄' 평결을 받아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카포네는 변호인단을 통해 "단돈 5천 달러면 시카고에서 못 할 일이 없다"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카포네의 뒷조작을 눈치챈 윌커슨 판사가 재판 직전, 옆방에서 진행 중이던 다른 재판의 배심원단과 카포네 재판의 배심원단을 통째로 맞바꿔버리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36] 준비했던 매수 공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카포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그의 변호인단은 패닉에 빠졌다.
카포네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법정에 나타났다. 그는 5,000달러짜리 맞춤형 겨자색 정장을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빛내며, 자신을 기소한 검사들을 향해 "국가가 사업가의 주머니를 털려고 한다"라며 조롱 섞인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자신의 제국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카포네를 법정에 세운 결정적인 공신은 엘리어트 네스의 '언터처블'이 아닌, 국세청(IRS)의 특별 수사관 프랭크 윌슨이었다. 윌슨은 수년간 카포네 조직의 뒤를 쫓으며 수만 장의 영수증과 장부를 뒤졌고, 마침내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카포네가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에 대해 단 한 푼의 소득세도 내지 않았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검찰 측의 전략은 명확했다. "카포네가 직접 살인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지만, 그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소득 신고를 누락했다는 사실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카포네의 은신처에서 압수한 비밀 장부를 통해 그가 경마, 도박, 밀주로 벌어들인 액수를 낱낱이 공개했다.
특히 카포네의 자산 관리인이었던 레슬리 슘웨이(Leslie Shumway)를 증인석에 세운 것은 결정타였다. 슘웨이는 보복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카포네가 조직의 수익금을 어떻게 배분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카포네 측 변호인단은 "도박으로 번 돈은 소득이 아니며, 카포네는 그저 친구들의 돈을 대신 관리했을 뿐"이라는 궁색한 논리를 펼쳤으나 법망을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카포네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돈의 힘'을 사용하려 했다. 그는 배심원단 명단을 미리 입수하여, 배심원 전원을 거액으로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 획책했다. 실제로 재판 직전, 카포네의 부하들은 배심원들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의 안녕을 생각하라"며 은밀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재판장 제임스 윌커슨(James H. Wilkerson) 판사는 재판 당일 아침, 미국 법정 역사상 유례없는 결단을 내린다.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옆방에서 진행 중이던 다른 재판의 배심원단과 카포네 재판의 배심원단을 통째로 맞바꿔버린 것이다.[35]
카포네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사법 매수가 차단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카포네 측 변호인단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전의를 상실했다.
1931년 10월 17일, 배심원단은 9시간의 숙의 끝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카포네는 23개 혐의 중 5개 항목에서 유죄가 인정되었다. 윌커슨 판사는 그에게 당시 탈세 사건으로는 파격적인 징역 11년, 벌금 5만 달러, 재판 비용 3만 달러 부담을 선고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동안 카포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는 그저 사람들에게 술을 줬을 뿐이다!"라고 소리쳤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웅장했던 '시카고의 황제'는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갔고, 이 장면은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이 재판은 단순히 한 명의 갱스터를 처벌한 사건이 아니었다. 국가 시스템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군림하던 무법자를 어떻게 '합법적인 방식'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이정표였다. 1920년대 무법천지였던 시카고의 시대가 저물고, 연방 정부의 공권력이 범죄 조직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재판 초기만 해도 카포네는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해 배심원 명단을 입수했고, 그들 전원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무죄' 평결을 받아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카포네는 변호인단을 통해 "단돈 5천 달러면 시카고에서 못 할 일이 없다"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카포네의 뒷조작을 눈치챈 윌커슨 판사가 재판 직전, 옆방에서 진행 중이던 다른 재판의 배심원단과 카포네 재판의 배심원단을 통째로 맞바꿔버리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36] 준비했던 매수 공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카포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그의 변호인단은 패닉에 빠졌다.
3.19. 수감 생활[편집]
1932년 5월, 징역 11년형을 확정받은 알 카포네는 조지아주의 애틀랜타 연방 교도소(Atlanta Federal Penitentiary)에 입소한다. 당시 이 교도소는 미국 내에서도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시카고의 '밤의 대통령'에게 담장 따위는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포네는 수감 직후부터 특유의 친화력과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교도소 시스템 자체를 매수하기 시작했다.
카포네가 애틀랜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전설'이었다. 수많은 수감자와 간수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카포네는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그는 간수들에게 뇌물을 뿌려 교도소 내에서 거의 치외법권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했다.
그의 수감 생활은 일반적인 죄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감방에는 개인용 타자기, 안락의자, 고급 카펫이 깔렸다. 카포네는 수감자 중 한 명을 자신의 '개인 비서'처럼 부리며 편지 작성과 잔심부름을 시켰다. 외부와의 연락이 엄격히 제한되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카포네는 간수들의 묵인하에 시카고의 아웃핏 간부들과 수시로 소통하며 조직의 운영 지침을 하달했다.[37]
카포네는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대부'로 통했다. 가난한 수감자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거나, 교도소 내 매점에서 산 물건들을 나누어 주며 환심을 샀다. 덕분에 그는 감옥 안에서도 강력한 경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카포네의 '황제 수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임 법무부 장관과 연방 교도소국(BOP)은 카포네가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격분했다. 국가의 권위를 비웃듯 감옥을 별장처럼 사용하는 카포네의 행태는 연방 정부 입장에서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적폐'였다.
당시 연방 정부는 한 가지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만의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요새, 알카트라즈 섬을 민간인 죄수용 최첨단 교도소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돈이나 권력으로도 절대 뚫을 수 없는 감옥"이 필요했고, 그 첫 번째 입주자로 알 카포네를 점찍었다.
애틀랜타 시절은 카포네가 마지막으로 '권위'를 누렸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몰락이 생물학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수감 생활의 스트레스와 과거 방탕한 생활의 대가로, 젊은 시절 감염되었던 매독이 잠복기를 지나 서서히 뇌와 신경계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혹 기억력을 상실하거나 이유 없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교도소 의료진은 이를 단순한 수감 스트레스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를 폐인으로 만들 '신경 매독'의 전조 증상이었다.
1934년 8월, 카포네는 다른 50여 명의 흉악범과 함께 극비리에 무장 열차에 태워졌다. 도착지는 샌프란시스코. 이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처절한 기록이 시작될 '더 록(The Rock)'으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기차에 오르며 간수에게 건넨 마지막 말은 "내가 돌아오면 이 감옥을 통째로 사버리겠다"는 허풍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다시는 그 위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카포네가 애틀랜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전설'이었다. 수많은 수감자와 간수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카포네는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그는 간수들에게 뇌물을 뿌려 교도소 내에서 거의 치외법권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했다.
그의 수감 생활은 일반적인 죄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감방에는 개인용 타자기, 안락의자, 고급 카펫이 깔렸다. 카포네는 수감자 중 한 명을 자신의 '개인 비서'처럼 부리며 편지 작성과 잔심부름을 시켰다. 외부와의 연락이 엄격히 제한되는 다른 죄수들과 달리, 카포네는 간수들의 묵인하에 시카고의 아웃핏 간부들과 수시로 소통하며 조직의 운영 지침을 하달했다.[37]
카포네는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대부'로 통했다. 가난한 수감자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거나, 교도소 내 매점에서 산 물건들을 나누어 주며 환심을 샀다. 덕분에 그는 감옥 안에서도 강력한 경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카포네의 '황제 수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임 법무부 장관과 연방 교도소국(BOP)은 카포네가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격분했다. 국가의 권위를 비웃듯 감옥을 별장처럼 사용하는 카포네의 행태는 연방 정부 입장에서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적폐'였다.
당시 연방 정부는 한 가지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만의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요새, 알카트라즈 섬을 민간인 죄수용 최첨단 교도소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돈이나 권력으로도 절대 뚫을 수 없는 감옥"이 필요했고, 그 첫 번째 입주자로 알 카포네를 점찍었다.
애틀랜타 시절은 카포네가 마지막으로 '권위'를 누렸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몰락이 생물학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수감 생활의 스트레스와 과거 방탕한 생활의 대가로, 젊은 시절 감염되었던 매독이 잠복기를 지나 서서히 뇌와 신경계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혹 기억력을 상실하거나 이유 없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교도소 의료진은 이를 단순한 수감 스트레스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를 폐인으로 만들 '신경 매독'의 전조 증상이었다.
1934년 8월, 카포네는 다른 50여 명의 흉악범과 함께 극비리에 무장 열차에 태워졌다. 도착지는 샌프란시스코. 이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처절한 기록이 시작될 '더 록(The Rock)'으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기차에 오르며 간수에게 건넨 마지막 말은 "내가 돌아오면 이 감옥을 통째로 사버리겠다"는 허풍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다시는 그 위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3.20. 알카트라즈 이감[편집]
1934년 8월, 카포네는 애틀랜타 연방 교도소에서의 '꿀맛 같은' 수감 생활을 뒤로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기차에 올랐다. 그의 목적지는 샌프란시스코 만 한가운데 솟아 있는 차가운 바위섬, 일명 '더 록(The Rock)'이라 불리는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였다. 이는 연방 교정국이 카포네라는 '부패한 권력'을 일반 범죄자들과 완전히 격리하고, 그의 조직 장악력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기획한 특수 작전의 결과였다.
알카트라즈에 도착한 카포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틀랜타에서의 황제 대접이 아닌, 철저한 익명성과 규율이었다. 알카트라즈의 초대 소장 제임스 존스턴(James A. Johnston)은 카포네와의 첫 대면에서 다음과 같이 못 박았다.
알카트라즈에 도착한 카포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틀랜타에서의 황제 대접이 아닌, 철저한 익명성과 규율이었다. 알카트라즈의 초대 소장 제임스 존스턴(James A. Johnston)은 카포네와의 첫 대면에서 다음과 같이 못 박았다.
"너는 여기서 더 이상 '알 카포네'가 아니다. 너는 그저 죄수 번호 85번일 뿐이다."
실제로 카포네는 알카트라즈에서 그 어떤 특권도 누리지 못했다. 외부와의 서신 왕래는 극도로 제한되었고, 신문 구독은 금지되었으며, 면회는 오직 직계 가족에 한해 한 달에 한 번,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전화기로만 가능했다. 시카고의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뇌물로 간수를 매수하는 행위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통하지 않았다. [38]
카포네가 알카트라즈에서 배정받은 공식 보직은 세탁물 수거 및 복도 청소부였다. 한때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며 수천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던 사내가 이제는 다른 죄수들이 쓴 수건을 수거하고 바닥을 닦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신분 하락은 카포네의 정신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다른 죄수들로부터 "스카페이스가 이제는 걸레질이나 한다"며 비웃음을 샀고, 심지어 1936년에는 이발소에서 줄을 서다가 제임스 루카스라는 죄수에게 가위로 등을 찔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39]
알카트라즈의 가장 큰 효과는 카포네와 '시카고 아웃핏' 사이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에 있었다. 카포네가 섬에 갇혀 있는 동안, 시카고의 조직은 '폴 리카'와 '토니 아카르도' 등 새로운 실력자들에 의해 재편되었다. 그들은 카포네를 여전히 상징적인 인물로 예우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했다.
역설적이게도 알카트라즈에서의 고립은 카포네의 육체적 몰락을 가속화했다. 외부의 자극이 사라진 상태에서 젊은 시절 감염되었던 매독균이 그의 뇌를 본격적으로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감방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날카로웠던 그의 지능은 급격히 감퇴했고, '밤의 대통령'은 알카트라즈의 차가운 해풍 속에서 서서히 정신적 유아기 상태로 퇴행하고 있었다.
3.21. 매독의 침식[편집]
알카트라즈의 차가운 벽 안에서 알 카포네를 진정으로 무너뜨린 것은 연방 정부의 감시나 라이벌 갱단의 칼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 전, 그가 브루클린의 하급 갱스터 시절 나이트클럽 바운서로 일하며 방탕하게 보냈던 젊은 날의 대가였다.
카포네는 20대 초반에 이미 매독에 감염된 상태였으나, 당시의 낙후된 의료 수준과 본인의 자만심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에는 증상이 잠복기에 있었기에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었지만, 알카트라즈의 극한 환경과 스트레스는 잠자던 병마를 깨우는 촉매제가 되었다. 병세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뇌와 중추신경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카포네의 상태는 간수들과 동료 수감자들이 눈치챌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가 겪은 것은 매독의 최종 단계인 '신경매독'이었다. 한때 시카고 전체를 호령하던 냉철한 전략가는 온데간데없고,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허공에 대고 화를 내는 치매 노인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카포네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제왕이라고 착각하며, 간수들에게 "내 부하들이 곧 너희를 처리하러 올 것"이라고 횡설수설했다. 보행이 불안정해지고 손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교도소 내 세탁소 작업조차 수행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밤마다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거나, 이미 죽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0]
알카트라즈의 수감자들은 과거의 거물이었던 카포네를 예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나간 그를 '워피(Woppy)'[41]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때 그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구걸하던 밑바닥 범죄자들이, 이제는 복도에서 그를 밀치거나 음식에 오물을 섞는 등 노골적인 모욕을 주었다.
카포네는 이러한 괴롭힘 속에서도 자신이 왜 비웃음을 사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감퇴해 있었다. 교도소 측은 그가 다른 수감자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우려해 결국 그를 일반 사동에서 격리하여 교도소 병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시카고의 '밤의 대통령'이 머물던 펜트하우스는 이제 사방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좁은 병실로 바뀌어 있었다.
1938년, 카포네의 지능 지수는 7세 아동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당시 교도소 주치의는 "카포네는 더 이상 범죄를 모의하거나 조직을 이끌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연방 정부 입장에서 그는 이제 위협적인 범죄자가 아니라, 단지 국고를 축내는 병든 노인에 불과했다.
당시 매독 치료에 혁명적인 기여를 한 페니실린은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었고, 카포네가 받은 치료라고는 수은이나 비소를 이용한 원시적이고 고통스러운 요법뿐이었다. 이러한 '치료'는 오히려 그의 신체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결국 1939년, 카포네는 형기를 약 1년 남겨두고 가석방 결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축복이라기보다,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느니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겠다"는 정부의 차가운 계산에 가까웠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스카페이스는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채, 자신의 제국이 무너진 줄도 모르는 상태로 알카트라즈를 떠나게 된다.
카포네는 20대 초반에 이미 매독에 감염된 상태였으나, 당시의 낙후된 의료 수준과 본인의 자만심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에는 증상이 잠복기에 있었기에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었지만, 알카트라즈의 극한 환경과 스트레스는 잠자던 병마를 깨우는 촉매제가 되었다. 병세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뇌와 중추신경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카포네의 상태는 간수들과 동료 수감자들이 눈치챌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가 겪은 것은 매독의 최종 단계인 '신경매독'이었다. 한때 시카고 전체를 호령하던 냉철한 전략가는 온데간데없고,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허공에 대고 화를 내는 치매 노인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카포네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제왕이라고 착각하며, 간수들에게 "내 부하들이 곧 너희를 처리하러 올 것"이라고 횡설수설했다. 보행이 불안정해지고 손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교도소 내 세탁소 작업조차 수행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밤마다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거나, 이미 죽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0]
알카트라즈의 수감자들은 과거의 거물이었던 카포네를 예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나간 그를 '워피(Woppy)'[41]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때 그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구걸하던 밑바닥 범죄자들이, 이제는 복도에서 그를 밀치거나 음식에 오물을 섞는 등 노골적인 모욕을 주었다.
카포네는 이러한 괴롭힘 속에서도 자신이 왜 비웃음을 사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감퇴해 있었다. 교도소 측은 그가 다른 수감자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우려해 결국 그를 일반 사동에서 격리하여 교도소 병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시카고의 '밤의 대통령'이 머물던 펜트하우스는 이제 사방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좁은 병실로 바뀌어 있었다.
1938년, 카포네의 지능 지수는 7세 아동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당시 교도소 주치의는 "카포네는 더 이상 범죄를 모의하거나 조직을 이끌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연방 정부 입장에서 그는 이제 위협적인 범죄자가 아니라, 단지 국고를 축내는 병든 노인에 불과했다.
당시 매독 치료에 혁명적인 기여를 한 페니실린은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었고, 카포네가 받은 치료라고는 수은이나 비소를 이용한 원시적이고 고통스러운 요법뿐이었다. 이러한 '치료'는 오히려 그의 신체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결국 1939년, 카포네는 형기를 약 1년 남겨두고 가석방 결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축복이라기보다,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느니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겠다"는 정부의 차가운 계산에 가까웠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스카페이스는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채, 자신의 제국이 무너진 줄도 모르는 상태로 알카트라즈를 떠나게 된다.
3.22. 이후[편집]
1939년 11월 16일, 한때 시카고를 호령하던 '밤의 대통령' 알 카포네가 마침내 교도소 문을 나섰다. 1931년 탈세 혐의로 수감된 지 약 8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교도소 정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서 과거 당당하고 위풍당당했던 갱스터의 풍모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곁에 있는 가족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적 파멸' 상태의 노인 한 명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교도소 당국과 연방 정부는 더 이상 카포네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감옥 안에서 사망할 경우,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불필요한 동정론이 일거나 순교자 대접을 받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사회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폐인"이라는 판단하에, 남은 형기를 면제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카포네가 사회로 복귀했을 때, 그가 지배했던 시카고는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그가 쌓아 올린 밀주 왕국의 근간은 사라졌고, '시카고 아웃핏'은 카포네의 후계자인 폴 리카(Paul Ricca)와 토니 아카도(Tony Accardo)에 의해 철저하게 비즈니스 중심의 기업형 조직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이들은 카포네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카포네가 보여준 과시적인 행태를 조직의 생존에 방해되는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했다.]
카포네는 석방 직후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수개월 동안 집중 치료를 받았다. 당시 막 개발되기 시작한 페니실린을 투여받기도 했으나[42], 손상된 뇌 세포를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왕이라고 착각하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환각 증세를 보였으나, 정작 그를 찾아오는 옛 동료는 거의 없었다.
마이애미에서의 삶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처참했다. 그는 종종 대저택의 발코니에 서서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이미 수년 전에 죽은 조니 토리오나 하이미 와이스와 대화를 나누는 기행을 보였다. 한때 냉철한 판단력으로 수천 명의 조직원과 정치가들을 움직였던 그 지략은 온데간데없었다.
카포네는 마이애미 저택 뒷마당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는데, 실제 물고기가 없는 수영장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43] 또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수장이라고 믿었기에,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으며 가상의 명령을 내렸다.
카포네의 아내 메이 카포네는 남편의 비참한 몰락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기자들이 별장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차단했고, 카포네가 정원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낚시 시늉을 하거나 죽은 경쟁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한때 세상을 벌벌 떨게 했던 거물은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며, 육체적인 소멸보다 앞서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FBI는 카포네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그가 정신병을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며 저택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수차례의 잠입 조사와 의료 기록 확인 결과, 카포네가 실제로 파멸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정부는 비로소 그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이 시기의 카포네는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시카고의 모든 술과 도박을 통제했던 사내가, 이제는 초콜릿 사탕 하나를 마음대로 먹지 못해 아내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은거는 화려했지만, 그 속은 텅 빈 고독과 질병의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1947년 1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따뜻한 햇살도 알 카포네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한때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카페이스'는 이제 병상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체중이 급격히 빠진 노인에 불과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수년 전부터 매독균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어, 지능 지수는 7세 아동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교도소 당국과 연방 정부는 더 이상 카포네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감옥 안에서 사망할 경우,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불필요한 동정론이 일거나 순교자 대접을 받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사회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폐인"이라는 판단하에, 남은 형기를 면제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카포네가 사회로 복귀했을 때, 그가 지배했던 시카고는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그가 쌓아 올린 밀주 왕국의 근간은 사라졌고, '시카고 아웃핏'은 카포네의 후계자인 폴 리카(Paul Ricca)와 토니 아카도(Tony Accardo)에 의해 철저하게 비즈니스 중심의 기업형 조직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이들은 카포네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카포네가 보여준 과시적인 행태를 조직의 생존에 방해되는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했다.]
카포네는 석방 직후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수개월 동안 집중 치료를 받았다. 당시 막 개발되기 시작한 페니실린을 투여받기도 했으나[42], 손상된 뇌 세포를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왕이라고 착각하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환각 증세를 보였으나, 정작 그를 찾아오는 옛 동료는 거의 없었다.
마이애미에서의 삶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처참했다. 그는 종종 대저택의 발코니에 서서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이미 수년 전에 죽은 조니 토리오나 하이미 와이스와 대화를 나누는 기행을 보였다. 한때 냉철한 판단력으로 수천 명의 조직원과 정치가들을 움직였던 그 지략은 온데간데없었다.
카포네는 마이애미 저택 뒷마당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는데, 실제 물고기가 없는 수영장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43] 또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시카고의 수장이라고 믿었기에,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으며 가상의 명령을 내렸다.
카포네의 아내 메이 카포네는 남편의 비참한 몰락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기자들이 별장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차단했고, 카포네가 정원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낚시 시늉을 하거나 죽은 경쟁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한때 세상을 벌벌 떨게 했던 거물은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며, 육체적인 소멸보다 앞서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FBI는 카포네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그가 정신병을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며 저택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수차례의 잠입 조사와 의료 기록 확인 결과, 카포네가 실제로 파멸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정부는 비로소 그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이 시기의 카포네는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시카고의 모든 술과 도박을 통제했던 사내가, 이제는 초콜릿 사탕 하나를 마음대로 먹지 못해 아내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의 은거는 화려했지만, 그 속은 텅 빈 고독과 질병의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1947년 1월,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따뜻한 햇살도 알 카포네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한때 시카고의 밤을 지배하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카페이스'는 이제 병상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체중이 급격히 빠진 노인에 불과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수년 전부터 매독균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어, 지능 지수는 7세 아동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3.23. 사망[편집]
1947년 1월 21일, 카포네는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이튿날 설상가상으로 기관지 폐렴까지 겹치면서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24일 저녁,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결국 1월 25일 오후 7시 25분, 심장마비로 인해 4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완전한 종언을 의미했다. 금주법이라는 시대적 모순이 낳은 가장 화려하고도 잔혹했던 괴물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살인마의 마지막은 총성이나 폭발음이 아닌, 고요한 저택 안에서의 쓸쓸한 신음뿐이었다.
카포네의 시신은 처음에 시카고의 마운트 올리브 묘지(Mount Olivet Cemetery)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이 호기심 많은 관광객이나 그를 증오하는 이들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한 유족들은, 1950년 시카고 인근 힐사이드의 마운트 카멜 묘지(Mount Carmel Cemetery)로 이장했다.
그의 묘비에는 본명인 '알폰소 카포네(Alphonse Capone)'라는 이름과 함께 "나의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My Jesus Mercy)"라는 짧은 문구만이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카포네 본인의 요청이라기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테레사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가 저지른 죄악에 비하면 지극히 역설적인 묘비명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까지도 그의 묘소에는 익명의 방문객들이 두고 간 위스키 병이나 시가, 꽃다발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카포네가 사라진 후에도 그가 남긴 그림자는 미국 사회 곳곳에 짙게 깔렸다. 그는 단순히 '나쁜 놈'을 넘어 현대 사회의 여러 시스템에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포네는 갱단을 단순한 폭력 집단에서 탈피시켜, 회계 장부를 작성하고 세탁소를 이용해 자금을 세탁하는 '기업형 모델'로 진화시켰다. 이는 훗날 '전국 범죄 신디케이트'의 모태가 되었다. 카포네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은 FBI의 수사 기법 발전과 국세청(IRS)의 권한 강화로 이어졌다. "아무리 거물이라도 세금 앞에서는 장사 없다"라는 공식이 이때 확립되었다. 그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드림'의 뒤틀린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로 박제되었다.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 그는 냉혹한 지도자이자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소비되고 있다.
카포네의 죽음과 함께 시카고 아웃핏의 절대 권력은 약화되었으나, 그가 만들어놓은 범죄의 메커니즘은 이후 폴 리카, 토니 아카르도 같은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은밀하고 정교하게 이어지게 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만든 '어둠의 비즈니스'는 여전히 미국 현대사의 이면에서 숨 쉬고 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완전한 종언을 의미했다. 금주법이라는 시대적 모순이 낳은 가장 화려하고도 잔혹했던 괴물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살인마의 마지막은 총성이나 폭발음이 아닌, 고요한 저택 안에서의 쓸쓸한 신음뿐이었다.
카포네의 시신은 처음에 시카고의 마운트 올리브 묘지(Mount Olivet Cemetery)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이 호기심 많은 관광객이나 그를 증오하는 이들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한 유족들은, 1950년 시카고 인근 힐사이드의 마운트 카멜 묘지(Mount Carmel Cemetery)로 이장했다.
그의 묘비에는 본명인 '알폰소 카포네(Alphonse Capone)'라는 이름과 함께 "나의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My Jesus Mercy)"라는 짧은 문구만이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카포네 본인의 요청이라기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테레사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가 저지른 죄악에 비하면 지극히 역설적인 묘비명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까지도 그의 묘소에는 익명의 방문객들이 두고 간 위스키 병이나 시가, 꽃다발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카포네가 사라진 후에도 그가 남긴 그림자는 미국 사회 곳곳에 짙게 깔렸다. 그는 단순히 '나쁜 놈'을 넘어 현대 사회의 여러 시스템에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포네는 갱단을 단순한 폭력 집단에서 탈피시켜, 회계 장부를 작성하고 세탁소를 이용해 자금을 세탁하는 '기업형 모델'로 진화시켰다. 이는 훗날 '전국 범죄 신디케이트'의 모태가 되었다. 카포네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은 FBI의 수사 기법 발전과 국세청(IRS)의 권한 강화로 이어졌다. "아무리 거물이라도 세금 앞에서는 장사 없다"라는 공식이 이때 확립되었다. 그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드림'의 뒤틀린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로 박제되었다.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 그는 냉혹한 지도자이자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소비되고 있다.
카포네의 죽음과 함께 시카고 아웃핏의 절대 권력은 약화되었으나, 그가 만들어놓은 범죄의 메커니즘은 이후 폴 리카, 토니 아카르도 같은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은밀하고 정교하게 이어지게 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만든 '어둠의 비즈니스'는 여전히 미국 현대사의 이면에서 숨 쉬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카포네는 생전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던 인물이었지만, 사후에 그가 누린 문화적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다. 그는 실존 인물을 넘어 갱스터라는 장르 그 자체가 되었으며, 할리우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카포네라는 원석을 끊임없이 가공하여 대중에게 선보였다. 카포네는 대중문화 속에서 때로는 냉혹한 사이코패스로, 때로는 비극적인 제왕으로, 때로는 부패한 시스템에 맞서는 뒤틀린 영웅으로 묘사되며 소비되어 왔다.
카포네를 모델로 한 가장 직접적인 작품은 역시 1932년작 영화 스카페이스다. 카포네가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 제작된 이 영화는, 주인공 '토니 카몬테'를 통해 카포네의 폭력성과 권력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흥미로운 점은 카포네 본인이 이 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수하들을 제작진에게 보내 대본을 검토하게 했으며, 영화가 완성된 후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개인 상영회를 열고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44]
이후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스카페이스는 배경을 1980년대 마이애미의 코카인 전쟁으로 옮겼지만, 주인공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 분)의 성격과 파멸 과정은 카포네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세상은 너의 것이다(The World is Yours)"라는 슬로건은 카포네가 꿈꿨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하는 문구로 남았다.
1987년작 영화 언터처블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알 카포네는 대중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모습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카포네는 우아하게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도,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야구 배트로 부하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광기 어린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식탁에서 "팀워크"에 대해 연설하다가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은 카포네의 잔인함과 위선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시퀀스로 꼽힌다. 비록 영화적 각색이 많이 가미되었으나, 이 작품을 통해 카포네는 법 집행자 엘리어트 네스와 대척점에 선 '절대 악'이자 '무너뜨려야 할 거악'의 아이콘으로 고착되었다.
명대사는 "친절한 말 한마디보다 친절한 말 한마디와 총 한 자루가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준다."[45]
엠파이어 오브 신 등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략 게임에서는 언제나 플레이 가능한 메인 캐릭터나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카포네에 대한 묘사는 한층 입체적으로 변했다. HBO의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는 카포네의 젊은 시절부터 집권기까지를 밀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카포네는 단순히 잔인한 갱스터가 아니라, 청각 장애가 있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고뇌, 이탈리아계 이민자로서 겪는 차별과 분노, 그리고 조니 토리오 밑에서 비즈니스를 배워가는 성장주의(?)적 측면이 부각된다.
이는 카포네를 신화 속 괴물이 아닌, 특수한 시대 상황이 낳은 '인간'으로 재조명하려는 시도였다. 대중은 이 드라마를 통해 카포네가 왜 그토록 폭력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그가 구축한 제국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 위에 세워졌는지를 목도하게 되었다.
범죄 전문가들과 문화 평론가들은 카포네가 대중문화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이유를 '금기시된 욕망의 투사'에서 찾는다. 누구나 법과 규칙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카포네는 그 모든 것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법을 세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은 비참했으나,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부의 축적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판타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카포네를 모델로 한 가장 직접적인 작품은 역시 1932년작 영화 스카페이스다. 카포네가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 제작된 이 영화는, 주인공 '토니 카몬테'를 통해 카포네의 폭력성과 권력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흥미로운 점은 카포네 본인이 이 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수하들을 제작진에게 보내 대본을 검토하게 했으며, 영화가 완성된 후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개인 상영회를 열고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44]
이후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스카페이스는 배경을 1980년대 마이애미의 코카인 전쟁으로 옮겼지만, 주인공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 분)의 성격과 파멸 과정은 카포네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세상은 너의 것이다(The World is Yours)"라는 슬로건은 카포네가 꿈꿨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하는 문구로 남았다.
1987년작 영화 언터처블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알 카포네는 대중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모습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카포네는 우아하게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도,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야구 배트로 부하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광기 어린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식탁에서 "팀워크"에 대해 연설하다가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은 카포네의 잔인함과 위선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시퀀스로 꼽힌다. 비록 영화적 각색이 많이 가미되었으나, 이 작품을 통해 카포네는 법 집행자 엘리어트 네스와 대척점에 선 '절대 악'이자 '무너뜨려야 할 거악'의 아이콘으로 고착되었다.
명대사는 "친절한 말 한마디보다 친절한 말 한마디와 총 한 자루가 더 많은 것을 얻게 해준다."[45]
엠파이어 오브 신 등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략 게임에서는 언제나 플레이 가능한 메인 캐릭터나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카포네에 대한 묘사는 한층 입체적으로 변했다. HBO의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는 카포네의 젊은 시절부터 집권기까지를 밀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카포네는 단순히 잔인한 갱스터가 아니라, 청각 장애가 있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고뇌, 이탈리아계 이민자로서 겪는 차별과 분노, 그리고 조니 토리오 밑에서 비즈니스를 배워가는 성장주의(?)적 측면이 부각된다.
이는 카포네를 신화 속 괴물이 아닌, 특수한 시대 상황이 낳은 '인간'으로 재조명하려는 시도였다. 대중은 이 드라마를 통해 카포네가 왜 그토록 폭력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그가 구축한 제국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성 위에 세워졌는지를 목도하게 되었다.
범죄 전문가들과 문화 평론가들은 카포네가 대중문화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이유를 '금기시된 욕망의 투사'에서 찾는다. 누구나 법과 규칙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카포네는 그 모든 것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법을 세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은 비참했으나, 그가 보여준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부의 축적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판타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5. 여담[편집]
- 평소 야구를 무척 좋아했으며, 시카고 컵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 당시 시카고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카포네가 수감되었을 때 그의 방은 교도소가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 수준이었다. 카펫이 깔리고 라디오와 고급 가구가 구비되었으며, 심지어 외부에서 스테이크 요리가 배달되어 왔다고 한다.
- 의외로 가족 지상주의자였다. 아들인 알버트 '소니' 카포네를 끔찍이 아꼈으며, 아들에게만큼은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소니 카포네는 훗날 평범한 시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 야구 방망이를 살인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을 배신하려 했던 간부 3명을 성대한 만찬에 초대해 배불리 먹인 뒤, 그 자리에서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박살 내 죽였다는 일화는 영화 '언터처블'에서 아주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 콜로시모의 암살 배후에는 사실 카포네가 직접 총을 쐈다는 루머도 오랫동안 돌았다. 하지만 당시 카포네의 위치나 토리오의 치밀한 성격상, 외부 킬러인 프랭키 예일을 썼다는 것이 현재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 카포네는 "콜로시모는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자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라고 냉소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 금주법 시대에 '칵테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밀주의 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고약한 맛을 감추기 위해 과일 주스나 설탕을 섞어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카포네가 공급한 조악한 술들이 역설적으로 현대 칵테일 제조법의 시초가 된 셈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카포네 자신은 취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적에게 빈틈을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사업가로서 술을 팔았을 뿐, 그 술에 취해 몰락하는 루저들을 비웃었다.
- 토리오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카포네는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직접 총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참모들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 토리오가 은퇴를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감옥에 대한 공포였다. 그는 암살 시도 직후 밀주 혐의로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총에 맞아 죽느니 감옥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게 낫다"는 심경의 변화가 컸다고 전해진다.
- 형 프랭크 카포네의 장례식은 약 2만 달러(현재 가치로 수억 원) 상당의 꽃 장식이 동원되었으며, 카포네는 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시서로의 모든 도박장과 유곽에 이틀간 휴업령을 내렸다.
- 시서로 주민들 중 일부는 오히려 카포네를 환영하기도 했다. 그가 장악한 이후 거리의 잡범들이 사라졌고(카포네가 허락하지 않은 범죄는 불가능했으므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카포네가 돈을 뿌렸기 때문이다. 공포와 자선이 공존하는 기묘한 통치 방식이었다.
- 하이미 와이스는 죽기 직전까지 성경책을 들고 다녔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는 아이러니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성경책도 카포네의 총알로부터 그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이 시기부터 카포네는 자신의 전용 차량을 7톤에 달하는 방탄 장갑차로 개조했다. 뒷유리를 내리고 기관총을 쏠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된 이 차량은 훗날 그가 체포된 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용차로 쓰이기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 현재 발렌타인 대학살이 일어났던 창고 건물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평범한 주차장과 화단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피의 발렌타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곤 한다.
- 오페라를 무척 좋아했으며, 특히 주세페 베르디의 작품을 즐겨 감상했다. 감옥에서도 라디오를 통해 오페라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 그의 흉터는 사진을 찍을 때 교묘하게 가려지곤 했다. 대부분의 공식 사진은 상처가 없는 오른쪽 얼굴 위주로 촬영되었으며, 상처가 보이는 왼쪽 얼굴 사진은 극히 드물다.
5.1. 별명: 스카페이스[편집]
카포네를 상징하는 가장 강렬한 시각적 요소는 단연 그의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세 줄기 흉터다. 이 흉터는 그에게 '스카페이스(Scarface)'라는 평생의 별명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단순한 이민자 청년에서 잔혹한 거리의 생존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얻은 '훈장'이자 '낙인'이었다. 이 사건은 1917년경, 카포네가 브루클린의 코니 아일랜드에 위치한 '하워드 인(Harvard Inn)'이라는 유흥업소에서 바운서 겸 웨이터로 일하던 시절에 발생했다.
당시 18세였던 카포네는 건장한 체격과 배짱을 인정받아 조니 토리오의 동업자인 프랭키 예일(Frankie Yale)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날, 카포네는 가게를 방문한 손님 중 한 명인 레나 갈루치오(Lena Galluccio)라는 여성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기록에 따르면 카포네는 그녀에게 "자기, 엉덩이가 참 예쁘네. 내 집 안방처럼 편안해 보여(Honey, you got a nice ass and I mean that as a compliment)"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옆에 오빠인 프랭크 갈루치오(Frank Galluccio)가 동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모욕당하는 것을 본 갈루치오는 즉각 사과를 요구했으나, 혈기 왕성했던 카포네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응수하며 싸움을 걸었다. 이에 분노한 갈루치오는 품 안에서 면도날(Straight Razor)을 꺼내 카포네의 왼쪽 얼굴을 세 차례나 그어버렸다.
이 공격으로 카포네는 얼굴에 깊은 자상을 입었으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훗날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사람들은 이 흉터를 보며 그가 전장의 영웅이거나 치열한 갱단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사라고 추측하며 두려움에 떨었으나, 실상은 술집에서 여자에게 수작을 걸다 얻어맞은 민망한 상처였던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사건 이후 카포네의 대처 방식이다. 상처가 아문 뒤, 카포네는 복수를 위해 갈루치오를 찾아가는 대신 사과를 선택했다. 물론 이는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보스인 프랭키 예일의 중재에 따른 것이었으나, 카포네는 이 과정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프랭키 예일은 카포네에게 "비즈니스를 망치는 사적인 감정은 사치다"라고 훈계했고, 카포네는 갈루치오와 화해의 술잔을 나눴다. 심지어 훗날 카포네가 시카고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과거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프랭크 갈루치오를 찾아내 처벌하기는커녕 주급 100달러짜리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46]
이 일화는 알 카포네가 단순한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폭력배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상황을 통제할 줄 아는 정치적인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카포네 본인은 '스카페이스'라는 별명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이 별명이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천박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항상 왼쪽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거나 화장품으로 상처를 가리려 애썼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처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의 '로스트 배틀리온(Lost Battalion)'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입은 영광스러운 부상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군 복무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중 앞에서는 "전쟁 영웅"을 연기하고, 뒤에서는 "무자비한 포식자"로 군림했던 그의 이중성은 이 작은 흉터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18세였던 카포네는 건장한 체격과 배짱을 인정받아 조니 토리오의 동업자인 프랭키 예일(Frankie Yale)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날, 카포네는 가게를 방문한 손님 중 한 명인 레나 갈루치오(Lena Galluccio)라는 여성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기록에 따르면 카포네는 그녀에게 "자기, 엉덩이가 참 예쁘네. 내 집 안방처럼 편안해 보여(Honey, you got a nice ass and I mean that as a compliment)"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옆에 오빠인 프랭크 갈루치오(Frank Galluccio)가 동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모욕당하는 것을 본 갈루치오는 즉각 사과를 요구했으나, 혈기 왕성했던 카포네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응수하며 싸움을 걸었다. 이에 분노한 갈루치오는 품 안에서 면도날(Straight Razor)을 꺼내 카포네의 왼쪽 얼굴을 세 차례나 그어버렸다.
이 공격으로 카포네는 얼굴에 깊은 자상을 입었으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훗날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사람들은 이 흉터를 보며 그가 전장의 영웅이거나 치열한 갱단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사라고 추측하며 두려움에 떨었으나, 실상은 술집에서 여자에게 수작을 걸다 얻어맞은 민망한 상처였던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사건 이후 카포네의 대처 방식이다. 상처가 아문 뒤, 카포네는 복수를 위해 갈루치오를 찾아가는 대신 사과를 선택했다. 물론 이는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보스인 프랭키 예일의 중재에 따른 것이었으나, 카포네는 이 과정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프랭키 예일은 카포네에게 "비즈니스를 망치는 사적인 감정은 사치다"라고 훈계했고, 카포네는 갈루치오와 화해의 술잔을 나눴다. 심지어 훗날 카포네가 시카고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과거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프랭크 갈루치오를 찾아내 처벌하기는커녕 주급 100달러짜리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46]
이 일화는 알 카포네가 단순한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폭력배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상황을 통제할 줄 아는 정치적인 인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카포네 본인은 '스카페이스'라는 별명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이 별명이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천박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항상 왼쪽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거나 화장품으로 상처를 가리려 애썼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처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의 '로스트 배틀리온(Lost Battalion)'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입은 영광스러운 부상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군 복무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중 앞에서는 "전쟁 영웅"을 연기하고, 뒤에서는 "무자비한 포식자"로 군림했던 그의 이중성은 이 작은 흉터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인간관계[편집]
6.1. 조니 토리오[편집]
알 카포네의 일생에서 가장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이자, 그를 단순한 거리의 부랑아에서 제국의 통치자로 탈바꿈시킨 인물이 바로 조니 토리오(Johnny "The Fox" Torrio)다. 토리오는 당시 뉴욕과 시카고를 주름잡던 여타 이탈리아계 갱스터들과는 질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불필요한 폭력을 혐오했고, 모든 범죄를 철저히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접근한 현대적 신디케이트의 설계자였다.
카포네가 브루클린의 파이브 포인츠 갱(Five Points Gang) 하부 조직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조직의 간부였던 토리오의 눈에 들게 된다. 당시 토리오는 거친 주먹질보다는 장부 정리와 세력 판도를 읽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어린 카포네에게서 자신과 닮은 영특함과 동시에 자신에게는 부족한 '압도적인 무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토리오는 카포네에게 단순히 사람을 패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키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를 가르쳤다. 그는 카포네를 자신의 개인 비서이자 경호원으로 삼아 사교계와 도박장, 유곽을 드나들며 상류층의 생리와 부패한 권력의 메커니즘을 학습시켰다. 카포네가 훗날 "나는 단지 대중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가일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는 모두 이 시기 토리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토리오가 카포네에게 주입한 핵심 철학은 "폭력은 곧 지출(Expense)이다"라는 개념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조직원이 죽어 인건비가 손실되고, 경찰의 단속이 심해져 뇌물 비용이 상승하며, 무엇보다 사업장이 폐쇄되어 매출이 끊긴다는 논리였다.
그는 카포네에게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철저히 교육했다.
카포네가 브루클린의 파이브 포인츠 갱(Five Points Gang) 하부 조직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조직의 간부였던 토리오의 눈에 들게 된다. 당시 토리오는 거친 주먹질보다는 장부 정리와 세력 판도를 읽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어린 카포네에게서 자신과 닮은 영특함과 동시에 자신에게는 부족한 '압도적인 무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토리오는 카포네에게 단순히 사람을 패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키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를 가르쳤다. 그는 카포네를 자신의 개인 비서이자 경호원으로 삼아 사교계와 도박장, 유곽을 드나들며 상류층의 생리와 부패한 권력의 메커니즘을 학습시켰다. 카포네가 훗날 "나는 단지 대중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가일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는 모두 이 시기 토리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토리오가 카포네에게 주입한 핵심 철학은 "폭력은 곧 지출(Expense)이다"라는 개념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조직원이 죽어 인건비가 손실되고, 경찰의 단속이 심해져 뇌물 비용이 상승하며, 무엇보다 사업장이 폐쇄되어 매출이 끊긴다는 논리였다.
그는 카포네에게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철저히 교육했다.
- 낮은 자세를 유지하라: 대중과 언론의 눈에 띄는 것은 곧 수사 기관의 타겟이 되는 지름길이다.[47]
- 정치인을 매수하라: 총알 한 발보다 투표용지 한 장과 판사의 판결문 하나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 영역을 존중하라: 무리한 확장은 전쟁을 부른다. 적당한 타협을 통해 공생하는 것이 장기적인 수익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토리오의 '기업형 마피아' 전략은 훗날 알 카포네가 시카고를 장악했을 때, 단순히 폭력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기업체'처럼 아웃핏을 운영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1909년, 토리오는 시카고에서 거대한 유흥 제국을 건설한 삼촌 빅 짐 콜로시모의 부름을 받고 뉴욕을 떠나 시카고로 근거지를 옮긴다. 토리오는 시카고에서 삼촌의 사업을 확장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힌다. 콜로시모는 보수적이었고, 새로운 수익원(특히 마약과 초기 단계의 밀주)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1919년, 뉴욕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압박을 받던 카포네에게 토리오는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시카고로 와라. 이곳은 기회의 땅이다."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카포네는 브루클린의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시카고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이것이 시카고의 역사를, 그리고 미국 범죄사를 영원히 바꾼 운명적인 이동이었다.
토리오는 훗날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카포네에게 "너무 눈에 띄지 마라"고 경고했으나, 이미 권력에 취한 카포네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마피아 역사학자들은 조니 토리오를 '근대 범죄 조직의 진정한 창시자'로 꼽는다. 카포네가 화려한 '무대 위의 주연'이었다면, 토리오는 그 무대를 설계하고 조명을 배치한 '천재 연출가'였던 셈이다.
6.2. 벅스 모란[편집]
그가 시카고의 패권을 두고 벌인 '맥주 전쟁(Beer Wars)'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바로 조지 "벅스" 모란(George "Bugs" Moran)이다. 그는 디온 오배니언, 하이미 와이스의 뒤를 이어 노스 사이드 갱(North Side Gang)의 수장이 된 인물로, 알 카포네가 일생 동안 마주한 적수 중 가장 저돌적이고 통제 불능인 인물이었다.
모란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특유의 고집과 이탈리아계 마피아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포네를 향해 공개적으로 "저 지저분한 이탈리아 놈(That low-life Italian)"이라 비하하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고, 이는 단순한 이권 다툼을 넘어 자존심을 건 민족 간의 대결 양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벅스'라는 별명은 당시 은어로 "미친놈(Buggy)" 또는 "예측 불가능한 놈"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모란은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까운 성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카포네의 트럭을 탈취하는 것은 기본이고 카포네가 자주 들르는 식당이나 호텔에 대낮부터 기관총 소사를 퍼붓는 등 상상을 초초월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카포네가 '비즈니스'로서의 범죄를 지향하며 가급적 협상을 통해 파이를 나누려 했던 것과 달리, 모란은 "카포네의 숨통을 끊는 것" 자체를 조직의 제1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모란의 호전성은 시카고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시민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20년대 후반, 시카고 아웃핏과 노스 사이드 갱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모란은 카포네의 최측근이었던 잭 맥건(Jack 'Machine Gun' McGurn)에 대한 암살 시도를 여러 차례 감행했고, 카포네의 밀주 수송로를 집요하게 방해하여 아웃핏의 수익 구조에 타격을 입혔다.
특히 모란은 디트로이트의 악명 높은 '퍼플 갱(Purple Gang)'과 손을 잡고 카포네의 구역으로 캐나다산 위스키를 몰래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는 카포네 입장에서 단순한 도발을 넘어선 '시장 교란' 행위였으며, 조직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본보기적인 처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카포네는 겉으로는 마이애미의 별장에서 휴양을 즐기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모란과 그 핵심 간부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최종 해결책'을 구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범죄사상 가장 잔혹한 페이지로 기록될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의 전조였다.
모란은 운 좋게도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현장에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48] 하지만 그의 조직은 그날 이후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오른팔과 왼팔을 모두 잃은 모란은 더 이상 카포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시카고의 패권은 완전히 카포네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란은 카포네가 감옥에 간 이후에도 좀도둑질과 강도질을 전전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훗날 기자들이 카포네에 대해 묻자 "알 카포네는 비겁한 놈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거물이었지. 지금의 갱스터들은 쥐새끼들뿐이다"라며 씁쓸한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모란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특유의 고집과 이탈리아계 마피아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카포네를 향해 공개적으로 "저 지저분한 이탈리아 놈(That low-life Italian)"이라 비하하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고, 이는 단순한 이권 다툼을 넘어 자존심을 건 민족 간의 대결 양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벅스'라는 별명은 당시 은어로 "미친놈(Buggy)" 또는 "예측 불가능한 놈"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모란은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까운 성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카포네의 트럭을 탈취하는 것은 기본이고 카포네가 자주 들르는 식당이나 호텔에 대낮부터 기관총 소사를 퍼붓는 등 상상을 초초월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카포네가 '비즈니스'로서의 범죄를 지향하며 가급적 협상을 통해 파이를 나누려 했던 것과 달리, 모란은 "카포네의 숨통을 끊는 것" 자체를 조직의 제1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모란의 호전성은 시카고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이는 결국 시민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20년대 후반, 시카고 아웃핏과 노스 사이드 갱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모란은 카포네의 최측근이었던 잭 맥건(Jack 'Machine Gun' McGurn)에 대한 암살 시도를 여러 차례 감행했고, 카포네의 밀주 수송로를 집요하게 방해하여 아웃핏의 수익 구조에 타격을 입혔다.
특히 모란은 디트로이트의 악명 높은 '퍼플 갱(Purple Gang)'과 손을 잡고 카포네의 구역으로 캐나다산 위스키를 몰래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는 카포네 입장에서 단순한 도발을 넘어선 '시장 교란' 행위였으며, 조직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본보기적인 처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카포네는 겉으로는 마이애미의 별장에서 휴양을 즐기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모란과 그 핵심 간부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최종 해결책'을 구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범죄사상 가장 잔혹한 페이지로 기록될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의 전조였다.
모란은 운 좋게도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현장에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48] 하지만 그의 조직은 그날 이후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오른팔과 왼팔을 모두 잃은 모란은 더 이상 카포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시카고의 패권은 완전히 카포네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란은 카포네가 감옥에 간 이후에도 좀도둑질과 강도질을 전전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훗날 기자들이 카포네에 대해 묻자 "알 카포네는 비겁한 놈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거물이었지. 지금의 갱스터들은 쥐새끼들뿐이다"라며 씁쓸한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1]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으며, 기자들에게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종군하다 입은 상처라고 허풍을 떨었으나 실제로는 나이트클럽에서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다 그 오빠인 프랭크 갈루치오에게 면도날로 왼쪽 뺨을 세 차례 그인 것이다. 훗날 권력을 잡은 뒤 카포네는 갈루치오를 용서하고 자신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2] 물론 이는 철저히 계산된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3] 다만 학계에서는 이 용어가 카포네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에 대해 증거가 부족하다는 반론도 제기한다.[4] 특히 카포네의 큰형인 제임스 빈첸초 카포네는 가출 후 이름을 '리처드 하트'로 바꾸고 네브래스카주에서 금주법 단속관(!!)으로 활동하며 동생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동생은 술을 팔고 형은 술을 단속하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형제의 비극이었다.[5] 재미있는 점은 훗날 권력을 잡은 카포네가 갈루치오를 찾아내 보복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자신의 경호원으로 고용했다는 사실이다. "비즈니스에 감정을 섞지 말라"는 토리오의 가르침을 실천한 첫 사례로 꼽힌다.[6] 우연하게도 이 날은 알 카포네의 21번째 생일이었다. 자신의 생일에 맞춰 현대 범죄사의 가장 큰 축복(?)이 내려진 셈.[7] 비밀 술집. 입구에서 낮은 목소리로(Speak easy) 암호를 말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8]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상세히 다룬다.[9] 실제 콜로시모가 토리오에게 했던 말로 알려진 대목이다. 그는 구시대적 범죄의 틀 안에 안주하려 했다.[10] 시장은 이후 기자들에게 "넘어져서 다친 것"이라며 해명하는 추태를 보였다.[11] 실제로 카포네는 생전에 "나는 단지 대중이 원하는 갈증을 해소해 주는 비즈니스맨일 뿐이다. 내가 파는 술은 신사들이 마시는 것과 같다"라는 망언에 가까운 자기합리화를 즐겨 했다.[12] 카포네의 전용 방탄차는 훗날 그가 체포된 후 압수되었다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의전 차량으로 재사용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13]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14] 카포네는 훗날 "오배니언은 머리가 너무 컸다. 자기가 시카고의 왕인 줄 알았지"라며 당시의 불쾌감을 회고했다.[15] 이것이 마피아 암살 기술 중 하나인 '치명적 악수(The Death Grip)'다.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지 못하게 손을 결박하는 방식이다.[16] '나의 친구 디온에게'라는 문구가 적힌 이 조화는 당시 시카고 시민들에게 카포네의 대담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각인시켰다.[17] 훗날 토리오는 미국으로 돌아와 전국 범죄 신디케이트의 고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시카고의 실권에서는 완전히 손을 뗀다.[18] 무게만 3.5톤에 달하며, 방탄유리와 경찰 무전 수신기가 장착되어 있었다.[19] 물론 이는 인권 의식 때문이라기보다, 최고의 재즈 공연이 곧 최고의 손님(과 수입)을 불러온다는 비즈니스적 판단이었다.[20] 총성이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악기 가방에 넣어 운반하기 쉬워 마피아들이 애용했다.[21] 현재도 시카고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다크 투어리즘 명소 중 하나다.[22] 이 회담은 훗날 전미 범죄 신디케이트(National Crime Syndicate)의 모태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범죄자들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카포네가 증명했기 때문이다.[당시] 언론은 이 회담을 두고 "정부보다 강력한 지하 정부의 탄생"이라며 조롱 섞인 보도를 내놓았다. 실제로 시장이나 주지사가 해결하지 못한 치안 문제를 범죄자들끼리 모여 해결한 꼴이었으니 말이다.[24] 카포네는 회담 중 제공된 모든 음식과 술에 독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모든 음식을 맛보는 결벽증에 가까운 신중함을 보였다.[25] 심지어 범죄에 전혀 가담하지 않은 민간인 광학 기술자 존 메이(John May)까지 사살되었다. 그는 단지 갱단의 트럭을 수리해주러 왔을 뿐이었다.[사건]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는데, 바로 부하 중 한 명인 프랭크 구텐베르크였다. 그는 14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아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경찰이 누가 쐈냐고 묻자 "아무도 쏘지 않았소(Nobody shot me)"라는 마피아의 침묵의 계율(Omerta)을 지키며 숨을 거두었다.[27] 당시 시카고 시민들은 카포네를 미워하면서도, 그가 사라지면 질 좋은 밀주를 공급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8] '공공의 적'이라는 용어는 훗날 존 딜린저 등 수많은 범죄자에게 붙여졌으나, 그 원조이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은 역시 카포네였다.[29] 카포네는 일부러 리오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불만을 품은 것처럼 연기하게 했고, 이에 속아 넘어간 배신자들이 리오에게 접근해 포섭하려다가 계획이 탄로나고 말았다.[30] 외부의 보복을 피하고 연방 정부의 수사망을 따돌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31] 당시 카포네가 소지했던 총기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화려한 권총이었다고 전해진다.[32] 이전까지 카포네는 자신을 '가난한 자들에게 술과 일자리를 주는 사업가'로 포장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나, 이 명단 발표를 기점으로 언론과 대중의 시선은 그를 '사회악'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33] 엘리어트 네스는 금주법 위반 혐의로 카포네를 기소하기 위해 5,000건 이상의 증거를 수집했으나, 검찰은 더 확실한 유죄 판결을 위해 국세청의 탈세 혐의를 주력으로 채택했다.[34] 실제로 네스는 카포네 체포 이후 정치권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말년에는 사업 실패와 알코올 의존증으로 다소 쓸쓸한 생을 마감했다.[35] 이 기습적인 교체로 인해 카포네가 매수해두었던 배심원들은 엉뚱한 절도 사건 재판장으로 끌려갔고, 카포네는 일면식도 없는 깨끗한(?)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36] 이를 '배심원 교체(Switching the Jury)' 사건이라 부르며, 현대 법조계에서도 사법 정의를 지키기 위한 전설적인 결단으로 회자된다.[37] 실제로 그는 감옥 안에서도 밀주 유통망의 지분을 정리하고, 후계 구도를 조율하는 등 '원격 경영'을 이어갔다.[38] 알카트라즈는 교도관 대 죄수의 비율이 다른 교도소보다 훨씬 높았고, 간수들 역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었기에 매수가 거의 불가능했다.[39] 카포네는 이 습격으로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이 더 이상 범죄 세계의 경외 대상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40] 일설에는 그가 성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당시 죽인 '제임스 클라크'의 유령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하며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41] 이탈리아계를 비하하는 은어인 'Wop'에서 따온 멸칭.[42] 알 카포네는 미국 내에서 페니실린 치료를 받은 최초의 민간인 환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병세는 이미 약물로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43] 이 모습은 훗날 그를 다룬 여러 영화에서 몰락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장치로 자주 사용된다.[44] 다만 자신의 흉터를 묘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후문이 있다.[45] 이 명언은 사실 카포네가 직접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그의 통치 철학을 가장 잘 요약한 문장으로 여겨지며 수많은 매체에서 인용된다.[46] 갈루치오는 평생 카포네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살았으나, 카포네는 오히려 "덕분에 내 인상이 강해졌으니 고맙다"며 농담을 던졌다고 전해진다.[47]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카포네는 이 가르침을 어기고 지나치게 화려한 삶을 살다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48] 약속 장소인 창고로 향하던 중 경찰차(변장한 카포네의 부하들)를 보고 골목으로 몸을 숨겨 화를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