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安 | 然 | 無 | 恙 |
편안 안 | 그럴 연 | 없을 무 | 근심할 양 |
「평안하여 아무 탈이 없다」라는 뜻으로 전국책戰國策 에서 유래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근심 없게 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2. 유래[편집]
齊王使使者問趙威后書未發威后問使者曰歲亦無恙耶民亦無恙耶王亦無恙耶使者不說曰臣奉使使威后今不問王而先問歲與民豈先賤而後尊貴者乎威后曰不然苟無歲何有民苟無民何有君故有問舍本而問末者耶乃進而問之曰齊有處士曰鍾離子無恙耶是其為人也有糧者亦食無糧者亦食有衣者亦衣無衣者亦衣是助王養其民也何以至今不業也葉陽子無恙乎是其為人哀鰥寡卹孤獨振困窮補不足是助王息其民者也何以至今不業也北宮之女嬰兒子無恙耶徹其環瑱至老不嫁以養父母是皆率民而出於孝情者也胡為至今不朝也此二士弗業一女不朝何以王齊國子萬民乎於陵子仲尚存乎是其為人也上不臣於王下不治其家中不索交諸侯此率民而出於無用者何為至今不殺乎
제나라 왕이 사자를 통해 조나라 위후趙威后를 문안했다. 위후는 서신을 보지 않은 체 사자에게 물었다.
"올해 농사는 별 탈이 없는가, 백성은 별 탈이 없는가, 왕은 별 탈이 없는가?"
사자는 기뻐하지 않으며 말했다.
"신臣이 사명을 받들고 위후께 왔는데 이제 우리 왕의 안부는 묻지 않으시고, 먼저 농사와 백성을 물으시니 어찌 천한 것을 먼저 물으시고 존귀한 것을 뒤로 하십니까?"
위후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참으로 농사가 잘 되지 않으면 어찌 백성이 있겠으며, 참으로 백성이 없다면 어찌 임금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어찌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묻겠느냐?"
그리고는 나아가 물었다.
"제나라에는 종리자鍾離子라는 처사處士가 있다고 하던데 별 탈이 없는가? 그의 사람됨은 자기 식량이 남아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라도 나누어 주며, 옷이 있어도 입혀 주고 옷이 없어도 입혀 준다고 하니, 이는 왕을 도와 백성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오늘날에 이르도록 관직을 주지 않는가?"
"섭양자葉陽子는 별 탈이 없는가? 그 사람됨은 홀아비와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며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들을 긍휼히 여기며, 곤궁한 자를 진구振救하며 부족한 자를 보태 주고 있다. 이는 왕을 도와 백성을 안식安息시키는 자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관직을 주지 않는가?"
"북궁北宮씨 집의 영아자嬰兒子는 별 탈이 없는가? 그 여자 역시 장신구를 하지 않고 늙도록 출가하지 않은 채 부모를 봉양하고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효행孝行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지금까지 입조入朝하지 않는가?"
"앞서 말한 두 선비가 관직을 얻지 못하고 한 효녀가 입조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제나라의 임금이라 하겠으며 만민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진중자於陵子仲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그의 사람됨은 위로는 왕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제 가정도 다스리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제후들과 교제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백성들을 무용無用한 데로 인도하는 자인데 어찌 아직도 죽이지 않고 있는가?"
전국시대 제나라의 왕 전건田建은 즉위 인사를 위해 조나라 효성왕의 섭정 위후에게 사신을 보냈다. 위후는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서신을 열어보지 않은 체 안부를 묻는데, 제나라의 작황作況과 백성의 상황 다음에 왕의 안위 순으로 물었다. 이에 사신이 외교 결레를 주장하자, 위후는 백성 없이는 왕이 있을 수 없기에 나라의 근본은 백성에 있음을 지적했다.
통상적으로 안연무양의 고사는 여기서 끝을 맺지만, 원 출전에서 위후는 제나라 내부 사정에 대해 넌지시 질의質疑함으로써 제나라 내정에 간섭하는 발언을 이어간다. 조나라는 효성왕 즉위 원년에 진나라秦의 침공을 받아 세 개의 성을 빼앗기자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한 바가 있다. 당시 전건의 선친인 양왕襄王은 원병을 보내는 조건으로 위후의 막내 아들 장안군長安君을 볼모로 요구했고 위후는 분노하여 대화를 단절했다. 조나라의 좌사左師 촉룡觸龍이 위후의 마음을 달래어 두 나라가 합의에 이르렀다.[1] 위후는 당시의 앙금을 양왕의 아들이 보낸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 양왕이 볼모를 요구했던 까닭은 이전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세 차례 침공당했던 전사前事에 근거한 것이다.[2][3][4]
3. 여담[편집]
- 출전에서 인용된 진중자는 제나라의 학자로서 오릉於陵에 은거하여 청빈淸貧한 삶을 살았다. 맹자孟子는 그가 추구한 청빈이 극단적인 까닭에 사람이 따를 수 없는 것이라 비판했다.[9]
[1] 사기 조세가 「孝成王元年 秦伐我 拔三城 趙王新立 太后用事 秦急攻之... 於是為長安君約車百乘 質於齊 齊兵乃出」[2] 사기 조세가 「趙奢將 攻齊麥丘取之」[3] 사기 조세가 「燕周將 攻昌城高唐取之」[4] 사기 조세가 「藺相如伐齊 至平邑 罷城北九門大城」[5] 사기 진본기 「徐廣曰 世本作 鍾離; 應劭曰 氏姓注云有姓終黎者是」[6] 한서 조이한장양왕전 「葉陽 秦昭王后也」[7] 맹자집주 공손추장구 「北宮 姓 黝 名」[8] 묵자 권12 「墨子曰 夫嬰兒子之知 獨慕父母而已」[9] 맹자집주 등문공장구 「匡章曰 陳仲子豈不誠廉士哉 居於陵... 孟子曰... 若仲子者 蚓而後充其操者也」[10] 사기 전경중완세가 「襄王在莒五年 田單以即墨攻破燕軍... 齊故地盡復屬齊」[11] 자치통감강목 제2 「初 齊君王后事秦謹 與諸侯信... 以故 王建 立四十餘年 不受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