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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국전 폭동
首都圏国電暴動
Tokyo Metropolitan National Railway Riot
파일:AS20210422001084_comm.jpg
경시청 기동대와 대치하는 시위대
발생 일시
1973년 4월 24일
유형
발생 위치
주요 원인
일본국유철도 노조 단체의 파업으로 인한 승객들의 반발
피해
수도권 내 기차역 내부 시설 및 다수의 전철 파괴
검거 인원
총 138명 검거
영향
1. 개요2. 원인3. 상세
3.1. 오미야역 소요 사태3.2. 불타는 아카바네역3.3. 수도권 전역으로 번진 폭동
4. 여파

1. 개요[편집]

1973년 4월 24일 일본국유철도 노동조합(이하 "국노")일본국유철도 전동차 노동조합(이하 "동노")를 비롯한 주요 철도 노조들의 준법투쟁에 반발한 승객들이 수도권 내에 있는 주요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폭동 사건이다. 4·24 소요, 혹은 4·24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2. 원인[편집]

1973년 춘계 임금 협상 결렬 이후 국노와 동노는 운전 안전 규범등의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면 오히려 열차의 운행이 지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으로 이용해 해당 규칙을 필요 이상으로 준수함으로써 시각표를 혼란시키는 식의 합법적인 투쟁, 이른바 준법 투쟁을 쟁의 전술로서 이용하며 경영 당국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투쟁은 승객으로부터는 비판과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3월 13일 아침, 타카사키선 아게오 역 등 주요 역에서 준법 투쟁 때문에 일어난 열차 지연에 분노한 승객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를 아게오 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아게오 사건을 계기로 노조 측도 준법투쟁을 중단했지만 이후에도 노사 양측 모두 타협을 보이지 않아 노사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자 국노와 동노는 지속적인 파업을 진행하였고, 운수성과 국철은 파업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엄청난 교통마비를 계속해서 만들어 갔다.

여기에 더해서 국노와 동노는 "아게오 사건은 운수성과 국철의 선동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라는 근거가 전혀 없는 반론을 냈고 이 발언은 한창 불타오르고 있던 이용객들의 교통체계에 대한 분노에 기름을 드럼통째 들이부었다.

3. 상세[편집]

3.1. 오미야역 소요 사태[편집]

4월 24일, 이 날도 어김없이 준법투쟁 때문에 국철 시각표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24일은 27일에 있을 교통 총파업을 앞두고 준법투쟁을 강화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후 4시 30분경, 오미야역에서 도호쿠 본선타카사키선이 준법 투쟁에 의해 1시간 30분 가량이 지연되고 있던 것과 퇴근 시간이 겹친 것으로 승강장에는 승객이 넘쳐났다. 이에 일부 승객이 역장실을 점거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등 한때는 상황이 매우 험악해졌지만, 사이타마현 경찰 병력이 급히 출동하며 진화에 나섰고 도부 철도의 노다선이나 버스 노선 등으로 분산유도를 하면서 겨우 진정되었다.

3.2. 불타는 아카바네역[편집]

문제는 아카바네역에서 일어났다.

오미야역과는 다르게 아카바네역 도호쿠 본선 및 다카사키선 하행 승강장에서는 전혀 도착하지 않는 열차에 승객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심지어 오후 8시에는 아오모리행 급행 츠가루호를 우츠노미야역까지 보통열차로 운행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정시 운행 중이었다면 츠가루 1호는 오후 7시 35분에 우에노역에서 출발해야 했으나 준법투쟁과 화물 적재 지연의 영향으로 20시 15분이 돼서야 발차했고 출발할 때부터 열차 안에는 지옥도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츠가루호가 아카바네 역에 도착하기 전에 상행 중거리 열차가 역에 들어왔는데 홈 안의 승객 1,500명이 오지 않는 하행열차에 불만이 폭발해 '정차 중인 열차를 되돌려서 하행으로 운전해라.'고 요구하고 기관사를 끌어낸 후 열차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오후 8시 30분, 츠가루 1호가 수백 명이 기다리는 아카바네역에 들어왔으나 우에노역에서부터 승객을 마구잡이로 태우고 도착했던 터라 이 이상의 승객을 더 태울 수 없었다. 이에 이용객들은 기관차를 둘러쌌고 이 기세에 놀란 기관사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츠가루 1호는 꿈쩍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승객들은 움직이지 않는 열차 창문을 깨부수기 시작했으며 국철 측은 케이힌토호쿠선으로 승객을 분산하려고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노선의 열차 또한 신호기 고장으로 아카바네역 바로 앞에서 운행을 정지했고 버티다 못한 승객들이 철길 위를 도보로 걸어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9시, 아카바네역은 6천 명이 넘는 승객들로 넘쳐났다. 화가 날 대로 난 승객들은 역장실로 몰려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에 급히 경시청에서 기동대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본 시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져 결국 대치상황까지 흘러갔다.

오후 9시 30분 경에는 1번 선에 정차되어 있던 케이힌토호쿠선 이소고역행 열차 내부에서 발연통이 폭발해 차내가 파괴되었다. 22시 30분 경에는 어느 남성이 운전대에 불을 질렀다.

아카바네역에서 열차운행이 중지되며 야마노테선 등 다른 노선에도 영향이 전해졌고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국철 노선들은 유례가 없는 대혼란에 빠졌다.

3.3. 수도권 전역으로 번진 폭동[편집]

우에노역에서는 오후 9시 전부터 출발하지 않는 열차 때문에 지친 승객들이 타카사키선 카고하라역행 열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타카사키선과 토호쿠 본선 양쪽의 기관사를 끌어내어 열차를 끌고 가 버렸다. 7번 선 승강장에서 승객 3천 명이 발화통에 불을 붙이고 유리창을 깨부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부터 역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승객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자 출동한 경찰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폭도들은 역사의 매표소 등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직원들은 전부 도주해 역이 무인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파괴행위는 계속되어 다음날 오전 0시 20분 경에는 역 광장에서 방화소동이 일어났고 움직이지 않는 열차의 행선판을 뜯어내 불 속에 던져넣는 사태도 벌어졌다.

신주쿠역에서는 우에노역의 소란 발생 영향을 받아 21시 10분 경부터 소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후 9시 30분 경에는 역장이 야마노테선의 운행 중지를 안내했고 사철과 다른 노선들로 승객을 분산시키려 했다. 이에 승객들이 역장실에 난입하는 소동이 있었다. 오후 10시에는 서쪽 출구 요금정산소와 매점이 습격당했다. 동쪽 출구에서는 철도공안실에 방화가 벌어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폭동은 그 다음날 7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가담자는 최대 2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주쿠역의 직원들은 도망가지 않고 사태 수습에 끝까지 힘을 써서 후에 감사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시부야역, 아키하바라역, 유라쿠초역 등 총 38개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 등 폭동이 벌어졌다. 군중은 32,000명에 이르렀고 일부는 현금, 승차권, 매점의 상품을 약탈하기도 해서 피해액은 현금으로만 1천만 엔이 넘어갔다. 이케부쿠로역에서는 군중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칸다역에서는 택시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신바시역에서는 역 시설의 파괴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가스 누출도 일어났다.

오후 10시에 경시청에서는 파괴행위 방지, 역무원과 차량보호를 위해 기동대를 최대한으로 소집하는 한편 각 역장들과 역무원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오후 11시 30분에는 각 경찰관에게 악질행위자를 체포, 검거하고 사건 확대 방지를 위한 대체 열차편 확보 지시를 내리고 각 사철에 전동차와 버스의 임시운행과 막차시간 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소란에는 유효한 방법이 없었고 군중에 겁을 먹은 역무원들이 줄행랑을 치는 사태가 줄줄이 발생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노조측에서는 오후 9시 30분에 투쟁을 중지하고 정부에 전면 협력하기로 했으나 이미 물은 엎어진 지 오래라서 오후 9시 45분 경에는 아카바네선, 케이힌도호쿠선, 야마노테선,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 조반선(조반선 각역정차 포함)이 이미 운행정지된 상태였다.

이 때 다수의 철도차량과 시설이 파손되어 4월 25일 10시까지 수도권 내 열차운행이 전면 중지되었다.[1]

4. 여파[편집]

인계서[2]

일본국유철도는, 쇼와 24년 일본국유철도법의 시행에 의해, 국책사업으로써 철도사업을 인계하여, 이후 나라의 기간적 수송기관으로써 우리 나라의 수송의 근간을 맡아, 국가의 발전, 국민생활의 향상에 큰 공헌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의 수송구조의 변화, 경제정세의 진전에 의해, 철도수송은 그 독점성을 상실하고, 경영현황의 악화 일변도를 걸어, 파국적 상황에 빠져 있다.
(중략)
일본국유철도는, 민영분할에 따른 철도사업의 재생이야말로, 철도를 미래지향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유일의 방도라고 확신하여, 국가와 한 마음으로, 또한 임직원이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 역사적 대개혁에 임해, 마침내 이 어려운 사업을 완수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중략)
쇼와 62년 3월 31일 24시 0분 현재
국철 전 노선에 사고 발생 보고 없음. 일본국유철도는, 모든 열차 운행을 무사고로 확실히 각사에 인계하고, 여기에서 철도 사업의 역할을 마친다.
쇼와 62년 3월 31일
일본국유철도
(후략)

- 1987년 3월 31일, 일본국유철도가 JR그룹 각 계열사에 업무를 이관하면서 총재 스기우라 타카야 외 4인[3] 명의로 쓴 인계서 중 일부 내용에서.
- 문맥에 맞게끔 일부 의역한 부분이 있음.
인계서 전문(일어주의)

당연하지만 폭동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국유철도 및 폭동 당사자인 주요 철도 노조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과 정치권의 질타 속에 몰락했고[4], 이후 민영화 과정을 거쳐 당해 1987년 4월 1일 부를 끝으로 해체되어 JR그룹으로 바뀌었다.
[1]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실상 복구를 하지 못했다.[2] 군에서 사용하는 인수인계할 때 그 인계이다.[3] 부총재 하시모토 마사시, 기사장 오카타 히로시, 총재실장 이데 마사타카, 총재실 문서과장 혼다 유이치로.[4] 다만 주요 노조 중 하나였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철도노동조합(철노)는 살아남았고, 이후 JR 체제에서 제1노조가 된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총련)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