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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여담

1. 개요[편집]

망령될
스스로
높을

「망령되이 자기를 높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생각없이 함부로 잘난 체함을 가리킨다.

2. 유래[편집]

是時公孫述稱帝於蜀囂使援往觀之援素與述同里閈相善以爲既至當握手歡如平生而述盛陳陛衛以延援入交拜禮畢使出就館更爲援製都布單衣交讓冠會百官於宗廟中立舊交之位述鸞旗旄騎警蹕就車磬折而入禮饗官屬甚盛欲授援以封侯大將軍位賓客皆樂留援曉之曰天下雄雌未定公孫不吐哺走迎國士與圖成敗反修飾邊幅如偶人形此子何足久稽天下士乎因辭歸謂囂曰子陽井底蛙耳而妄自尊大不如專意東方

이때 공손술公孫述이 촉에서 칭제하자 외효隗囂는 마원馬援을 보내 만나보게 하였다. 마원은 예전에 공손술과 한마을에 살아 서로 친했는데 마원이 도착하자 손을 맞잡고 예전처럼 기뻐하였지만, 공손술은 층계에 위병을 많이 세워놓고 마원을 영입했으며, 상견례를 마치고 객관에 나가 쉬게 하였는데, 마원에게 좋은 천으로 옷을 새로 지어 주고 새 관도 만들어 주었으며, 종묘의 관원을 다 모은 뒤에 마원을 옛 벗의 자리에 서게 하였다. 공손술은 난조鸞鳥가 그려진 깃발과 장식이 달려 있는 깃대를 든 기병을 세우고 길을 치운 뒤에 수레에 올라 허리를 바짝 구부리고 들어갔으며, 많은 관원을 모아 매우 엄숙한 의례를 갖추고서 마원에게 작위와 대장군 직위를 하가하려 했다. 마원과 동행한 빈객들이 모두 기꺼이 남으려 하자, 마원이 말했다.
"천하의 자웅雄雌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공손술은 열심히 인재를 영입하여 성패를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겉모습만 꾸미고 있으니 마치 허수아비偶人形와 같다. 그런 사람이 어찌 천하의 인재를 끌어 모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인사하고 돌아와서 외효에게 말했다.
"공손술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며 망령되게 제 잘난 줄만 알고 있으니 오로지 동쪽에 뜻을 두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전한前漢 왕조는 왕망王莽에게 제위를 선양하여 멸망하고 신나라가 세워졌다.[2] 그러나 왕망의 실정으로 인해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와중에 천수군에서 외효가 자립했다.[3][4][5] 외효는 지역의 명사였던 마원을 등용하여 방책을 도모하였는데, 남쪽에 위치한 촉땅에서 공손술이 자립하자 이를 탐색하기 위해 마원을 사신으로 보냈다.[6] 공손술은 옛 친구인 마원을 맞이하여 황제의 위엄을 보이고는 객사에 머무르게 하여 선물을 하사했고, 자신이 주관하는 황실의례를 펼쳐 보이고서 관직을 하사했다. 사신단의 일원으로 같이 온 마원의 빈객들은 공손술의 제안을 받으려 했지만 마원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벌써 천하를 통일한 황제처럼 행세하는 공손술을 비판했다. 천수로 돌아온 마원은 외효에게 공손술과 관계하지 말고 동쪽에서 칭제한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할 것을 간했다.

3. 여담[편집]

  • 마원은 외효와 광무제 간의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외효가 한나라에 맞서기로 결심하자 그와 관계를 끊고 광무제에게 귀부했다.[7]
  • 마원은 광무제 밑에서 종군하며 수차례 군공軍功을 세워 제후新息侯에 봉해졌다.[8][9] 외효는 광무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세력을 보존했지만 끝내 구호 식량糗糒에 의지하는 처지를 격분하다가 사망했다.[10]
  • 공손술은 청수현清水의 현장이었지만 신나라가 무너진 틈을 타 촉군蜀郡을 거점으로 자립했다.[11] 제위에 오르는 것을 고민하던 중 꿈에서 12년 동안 고귀하다는 말을 들은 후 아내도 강력하게 원하는데다 집안에 상서로운 기운이 일자 손바닥에 "황제公孫帝"라고 새기고는 제위에 올랐다.[12] 마지막까지 광무제의 원정군에 저항하다가 난전 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원정군은 항복한 공손술의 부중部衆을 도륙했다.[13]
  • 공손술은 젊은 시절 낭관으로 일하면서 조정의 제도를 익힌 바가 있어 대다수의 지방 사람들은 접하지 못한 황실 의례를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혔다.[14] 마원과 동행한 그의 식객들이 공손술이 제수한 벼슬을 받아들이려 한 것도 연출의 효과였다. 하지만 마원은 세력의 성패成敗를 염두에 둔 까닭에 그의 허례의식을 논파했다. 이는 광무제를 처음 알현했을 때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當今之世非獨君擇臣也臣亦擇君矣臣與公孫述同縣少相善臣前至蜀述陛戟而後進臣臣今遠來陛下何知非刺客奸人而簡易若是

    지금 세상에는 주군만 신하를 선택하지 않고 신하도 주군을 골라서 섬깁니다. 신은 공손술과 동향이라서 어려서부터 가까웠습니다. 신이 전에 촉에 갔을 때 공손술은 계단에 병졸을 많이 세워놓고서 저를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제가 먼 곳에서 왔는데 폐하께서는 자객이나 이간질을 할 사람인 줄도 모르면서 어찌 이처럼 태연히 만나주십니까?


[1] 번역: 후한서 범엽 저, 진기황 역주, 명문당 2018[2] 漢書 卷九十九上 王莽傳 「戊辰莽至高廟拜受金匱神嬗御王冠謁太后還坐未央宮前殿下書曰... 以戊辰直定御王冠即真天子位定有天下之號曰新」[3] 後漢書 馬援列傳 第十四 「王莽末四方兵起」[4] 後漢書 卷十三 隗囂公孫述列傳 「及更始立豪傑各起其縣以應漢...」[5] 앞의 출전 「隗囂字季孟天水成紀人也」, 囂既立遣使聘請平陵人方望以為軍師」[6] 앞의 출전 「述曰吾亦慮之公言起我意於是自立為蜀王都成都」, 「建武元年四月遂自立為天子號成家」 [7] 後漢書 馬援列傳 第十四 「建武四年冬囂使援奉書洛陽... 及還以爲待詔使太中大夫來歙持節送援西歸隴右」, 「然雅信援故遂遣長子恂入質」, 「會隗囂用王元計意更狐疑援數以書記責譬於囂囂怨援背己得書增怒其後遂發兵拒漢」, 「援乃上疏曰臣援自念歸身聖朝奉事陛下本無公輔一言之薦左右爲容之助臣不自陳陛下何因聞之」[8] 앞의 출전 「十八年春軍至浪泊上與賊戰破之斬首數千級降者萬餘人援追徵側等至禁谿數敗之賊遂散走明年正月斬徵側徵貳傳首洛陽封援爲新息侯食邑三千戶」[9] 마원 사후 광무제는 그에 대한 참소를 모두 받아들여 마원의 직위를 박탈하고 가솔들을 탄압했다. 후한後漢의 2대 황제인 효명황제孝明皇帝 치세에 마원의 딸이 황후가 되었지만 마원은 여전히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원의 복권은 3대 황제인 효장황제孝章皇帝 치세에 이루어 졌다. 앞의 출전 「會援病卒松宿懷不平遂因事陷之帝大怒追收援新息侯印綬」, 「及卒後有上書譖之者以爲前所載還皆明珠文犀... 嚴與援妻子草索相連詣闕請罪」, 「永平初援女立爲皇后顯宗圖畫建武中名臣列將於雲臺以椒房故獨不及援」, 「建初三年肅宗使五官中郎將持節追策謚援曰忠成侯」[10] 後漢書 卷十三 隗囂公孫述列傳 「會吳漢等食盡退去於是安定北地天水隴西復反為囂...」[11] 앞의 출전 「哀帝時以父任為郎後父仁為河南都尉而述補清水長」, 「於是自立為蜀王都成都」[12] 앞의 출전 「述曰帝王有命吾何足以當之熊曰天命無常百姓與能能者當之王何疑焉述夢有人語之曰八厶子系十二為期覺謂其妻曰雖貴而祚短若何妻對曰朝聞道夕死尚可況十二乎會有龍出其府殿中夜有光耀述以為符瑞因刻其掌文曰公孫帝建武元年四月遂自立為天子號成家」[13] 앞의 출전 「漢因令壯士突之述兵大亂被刺洞胸墮馬左右輿入城述以兵屬延岑其夜死明旦岑降吳漢乃夷述妻子盡滅公孫氏並族延岑遂放兵大掠焚述宮室」[14] 앞의 출전 「然少為郎習漢家制度出入法駕鸞旗旄騎陳置陛戟然後輦出房闥」[15] 앞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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