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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기타

1. 개요[편집]

노나라
어린아이
지킬

「노나라의 여인 영이 위나라의 정세로 인해 눈물을 흘리다」라는 뜻으로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유래한다.

본래는 시경詩經 용풍 재치鄘風載馳편에 등장하는 허목부인許穆夫人의 유사 사례로 인용되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2. 유래[편집]

魯監門之女嬰相從績中夜而泣涕其偶曰何謂而泣也嬰曰吾聞衛世子不肖所以泣也其偶曰衛世子不肖諸侯之憂也子曷為泣也嬰曰吾聞之異乎子之言也昔者宋之桓司馬得罪於宋君出於魯其馬佚而𩥇吾園而食吾園之葵是嵗吾聞園人亡利之半越王勾踐起兵而攻吳諸侯畏其威魯往獻女吾姊與焉兄往視之道畏而死越兵威者吳也兄死者我也由是觀之禍與福相及也今衛世子甚不肖好兵吾男弟三人能無憂乎詩曰大夫跋渉我心則憂是非類與乎高子問于孟子曰夫嫁娶者非已所自親也衛女何以得編於詩也孟子曰有衛女之志則可無衛女之志則怠若伊尹於太甲有伊尹之志則可無伊尹之志則簒夫道二常之謂經變之謂權懐其常道而挾其變權乃得為賢夫衛女行中孝慮中聖權如之何詩曰既不我嘉不能旋反視爾不臧我思不逺

노나라 성문지기의 딸인 영이 동료들과 길쌈을 하다가 밤중에 울음을 터트리니 동료가 물었다.
"어찌 우는가?"

영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위나라 세자가 어질지 못하다 하니, 그 때문에 우는 것이오."

그 동료가 말했다.
"위나라 세자가 어질지 못한 것은 제후의 걱정인데, 어찌 그대가 우는가?"

영이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그대가 말하는 것과 다르오. 예전에 송나라 환사마桓司馬가 그 임금한테 죄를 짓고 노나라로 도망쳐 왔는데, 그 말이 달아나 우리 채마밭에서 뒹굴면서 아욱을 먹어치웠소. 그 해 채마밭을 가꾸던 사람들은 소득의 절반을 잃었다고 들었소. 월나라의 왕 구천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할 때, 제후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했고 노나라는 여인을 바쳤소. 그들 중에 우리 언니도 있었다오. 오라버니가 언니를 보러 가다 길에서 두려움에 떨며 죽었소. 월나라 군사가 위협한 것은 오나라였지만, 오라비를 잃은 이는 나요. 이를 두고 보면 화와 복은 서로 따라다니는 것이오. 지금 위나라 세자가 매우 어질지 못하여 전쟁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남동생이 셋이나 되니 어찌 걱정이 없을 수 있겠소?"

시경에서 말하였다. 「대부大夫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알려오니, 내 마음 우울하구나.」 이 구절이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고자高子가 맹자孟子에게 물었다. "혼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아닌데, 왜 위나라 여인이 시경에 실릴 수 있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위나라 여인에게 그러한 뜻이 있었기에 시경에 실린 것이다. 만약 그러한 뜻이 없었다면 시경에 실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한 것과 같다. 무릇 도는 둘이어서, 변하지 않는 것을 경이라 하고 변통할 수 있는 것을 권이라 한다. 상도(常道)를 간직하면서 변통의 권도 잘 운용해야 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나라 여인은 행동이 효에 맞고 사려는 성인聖人과 맞았으니, 권을 쓴다 한들 어떻겠느냐?"

시경에 이르기를 "나를 옳게 여기지 않는지라 곧장 돌아가지 못했노라, 그대는 옳게 여기지 않으나 내 그리움은 잊을 수 없노라." 하였다.


시경 재치편은 위나라 대공衛戴公의 오누이이자, 허나라 목공許穆公과 혼인한 허목부인이 동기同氣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간 사연을 그리고 있다.[1] 위나라 의공衛懿公이 적인狄人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위대공이 즉위했다.[2] 이 소식을 들은 허목부인이 수레를 몰아 위나라로 가려 했지만, 허나라의 대부는 그녀가 돌아올 마음이 없음을 알고 뒤를 쫓아 길을 막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허목부인은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했다.[3] 한영韓嬰은 노나라 여인 영의 눈물이 허목부인의 슬픔과 같다고 여겨 이를 인용하면서 맹자와 그의 제자로 추정되는 고자의 문답을 통해 허목부인에 대한 고찰을 덧붙혔다.

후대에는 영과 그녀의 가족이 노나라에 거주했지만 송나라의 변란으로 경제적 피해가 발생했고,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를 입은 점을 주목하여, 세상의 사건들은 결국 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스스로 살피고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용되었다.[4]

3. 기타[편집]

  • 출전出典에 환사마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퇴桓魋를 가리키며 상퇴向魋로도 불리운다.[5][6] 송나라 경공宋景公의 총애를 받아 병권을 관장했지만, 군신이 서로 적대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7][8]
  • 출전과 달리 환퇴는 위나라로 도주했다. 노나라로 도피한 이는 그의 형 상소向巢이다.[9] 상소는 송경공과 맹약을 맺고 환퇴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 경공이 만류했지만 끝내 따르지 않았다.[10]
  • 출전에서 맹자가 예로 든 이윤伊尹은 상나라의 재상으로서 탕왕湯王을 도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폐하였다. 태갑太甲은 탕왕의 아들로서 즉위한 후 국정을 돌보지 않아 이윤에 의해 폐위되어 3년 동안 동궁에 머무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복위했다고 알려졌다.[11]

[1] 모시정의, 장유자 「宣公卒 惠公幼 其庶兄頑 烝於惠公之母 生子五人 齊子戴公文公宋桓夫人許穆夫人」[2] 춘추좌전, 노민공 2년 「及狄人戰于熒澤 衛師敗績 遂滅衛... 立戴公 以廬于曹」[3] 시경집전, 국풍 용; 재치[4] 한국일보 2022.02.14[5] 논어주소, 술이 「包曰 桓魋 宋司馬」[6] 논어주소, 안연 「鄭曰 牛兄桓魋行惡 死亡無日 我爲無兄弟... 桓氏卽向魋也 又謂之桓司馬, 卽此桓魋也」[7] 춘추좌전, 노정공 10년 「公子地有白馬四 公嬖向魋 魋欲之注 公取而朱其尾鬣以與之」[8] 춘추좌전, 노애공 14년 「宋桓魋之寵害於公 公使夫人驟請享焉 而將討之... 向魋遂入于曹以叛」[9] 앞의 책, 「向魋奔衛 向巢來奔」[10] 앞의 책, 「公曰 所難子者 上有天 下有先君 對曰 魋之不共 宋之禍也 敢不唯命是聽... 宋公使止之曰 寡人與子有言矣 不可以絶向氏之祀 辭曰 臣之罪大 盡滅桓氏可也 若以先臣之故 而使有後 君之惠也 若臣則不可以入矣」[11] 상서정의 태갑 상 제5 「太甲旣立不明伊尹放諸桐三年復歸於亳思庸伊尹作太甲三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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