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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연보4. 생애
4.1. 초기4.2. 공직 생활4.3. 작가 활동4.4. 정치적 입장과 수난4.5. 사망
5. 작품 세계6. 주요 작품
6.1. 카이로 삼부작6.2. 게벨라위의 아이들(우리 동네 아이들)6.3. 나일 강변 한담6.4. 미다크 골목6.5. 기타 작품
7. 수상8. 영향9. 여담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나기브 마흐푸즈(아랍어: نجيب محفوظ, Naguib Mahfouz, 1911년 12월 11일 ~ 2006년 8월 30일)

이집트의 소설가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아랍어권 작가로서는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2. 상세[편집]

'나기브'라는 이름은 출산을 도왔던 의사 나깁 바퍄 마흐푸즈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표준 아랍어에서는 '나지브'라고 해야 하지만 이집트 아랍어에서는 j 발음을 g로 읽어 '나기브'라고 발음한다.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아랍 문학을 세계에 알린 인물로, '이집트의 발자크'로도 불린다. 소설 34편과 단편 350편 이상을 발표했으며, 작가생활 70년 동안 영화 시나리오 수십 편과 희곡 다섯 편을 남겼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아랍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3. 연보[편집]

  • 1911년 12월 11일 - 이집트 카이로 올드 카이로의 알가말리야에서 출생(3남 4녀 중 막내)
  • 1934년 - 카이로 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 진학, 이슬람 철학에서의 미의 개념 논제로 석사학위 취득
  • 1936년~1938년 - 대학 행정부서 서기로 근무
  • 1938년 - 단편소설집 《광기의 속삭임》 발표로 문학계에 정식 데뷔
  • 1939년 - 종교부 대출과 직원으로 공무원 생활 시작
  • 1953년 - 문화부 산하 예술위원회 영화위원
  • 1954년 - 아티야 알라와 결혼, 두 딸(움무 쿨숨과 파티마)을 둠
  • 1959년 - 상징적 철학 소설인 《우리 동네 아이들》 알아흐람에 연재
  • 1960년~1968년 - 영화 분과위원장, 영화-TV-예술 검열위원장, 문화부 고문 등 역임
  • 1961년 - 《도적과 개들》 발표
  • 1964년 - 《길》 발표
  • 1966년 - 《나일 강가의 잡담》 발표
  • 1967년 - 《미라마르》 발표
  • 1971년 11월 - 공직을 떠나 알아흐람 비상근 편집위원 역임하며 작품활동에 전념
  • 1972년 - 《거울들》 발표
  • 1973년 - 《빗속의 사랑》 발표
  • 1977년 - 《알하라피시의 학살》 발표
  • 1981년 - 《성자 무덤 가의 결혼》 발표
  • 1982년 - 《남은 건 한 시간 뿐》 발표
  • 198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 1994년 - 이슬람 근본주의자 암살 공격으로 오른손에 영구적인 신경 손상
  • 2002년 12월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평화 호소
  • 2006년 8월 30일 - 카이로 시내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 2006년 8월 31일 - 국장으로 장례식 거행

4. 생애[편집]

4.1. 초기[편집]

1911년 카이로의 올드 카이로 알가말리야 지역에서 태어났다. 1934년 카이로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슬람 철학에서의 미의 개념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4.2. 공직 생활[편집]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대학 행정부서 서기로 근무했으며, 1939년부터 종교부 대출과 직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부동산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뒤 예술 관련부처 검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훗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종교적 '검열' 때문에 오랜 세월 고통받았던 마흐푸즈가 원래 검열관 출신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1953년 문화부 산하 예술위원회 영화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 1968년까지 영화 분과위원장, 영화-TV-예술 검열위원장, 문화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이집트는 중동 전체에 영화를 수출하는 영화수출국이기 때문에 그의 업무는 중요한 위치였다. 1971년 11월 공직을 떠나 알아흐람 비상근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4.3. 작가 활동[편집]

1938년 단편소설집 《광기의 속삭임》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정식 데뷔했다. 17세의 나이에 이미 책을 출판한 바 있으며, 90세의 나이에도 저작활동을 계속했다.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역사 소설이었으나 이후 그의 관심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옮겨갔다. 카이로의 거리를 배경으로 평범한 이집트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썼다.

1954년 아티야 알라와 결혼하여 두 딸 움무 쿨숨과 파티마를 두었다.

4.4. 정치적 입장과 수난[편집]

1920년대 이집트의 민족주의 운동에 고무되었으나, 1950년대 찾아온 군부의 쿠데타와 권력 장악에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드러내놓고 지지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레바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1989년 소설가 살만 루시디가 이슬람 모독죄로 곤경에 빠져 있을 때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1989년 이란의 라흐바르인 호메이니가 《악마의 시》의 작가 살만 루시디를 살해하라는 파트와를 내린 뒤, 이집트 맹인 신학자 오마르 압둘 라흐만은 한 기자에게 "마흐푸즈가 《게벨라위의 아이들》로 진작 벌을 받았더라면 루시디가 감히 그따위 책을 낼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94년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암살 시도로 오른손에 영구적인 신경 손상을 입어 하루 30분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경호원들의 보호 속에 살아야 했으나 작품 활동은 계속했다.

2002년 12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군사력이 아닌 정의의 힘으로 세계를 이끌라고 호소했으며, 2006년 2월 서구 언론의 마호메트 풍자만평과 관련해 모든 무슬림들의 뺨을 때린 것과 같다고 앞장서서 비난했다.

4.5. 사망[편집]

2006년 8월 30일 카이로 시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워낙 고령이었던 데다가 심장 질환과 신장병을 앓고 있던 차였다.

마흐푸즈의 장례식은 다음날 국장으로 치러졌다. 카이로 교외 나스르시티에 있는 알라슈단 모스크에서 열린 장례식은 군 의장대가 도열한 가운데 엄숙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생전의 마흐푸즈 자신은 '카이로 빈민을 비롯해 이집트의 모든 이들이 애도해주는 것'을 바랐다고 한다.

2005년 내내 이집트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저항하는 반독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었다. 그 해 9월 극히 비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5선 연임에 성공한 무바라크 정권은 마흐푸즈가 가진 영향력을 의식했는지, 그의 장례식에 극소수 각료들만 참석토록 제한했다.

독재 정부의 통제 속에서 치러진 장례식 날, 카이로 시내의 거의 모든 상점은 항의의 표시로 문을 닫았고 수십만 명의 시민은 '마흐푸즈는 우리들 사람'이라는 피켓을 들고 장례행렬에 참여했다. 수천 명의 무장경찰들은 길거리의 시민들을 물리적으로 통제했고, 장례식에는 누구도 참석할 수 없게 만들었다.

5. 작품 세계[편집]

마흐푸즈는 항상 거칠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명료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작가였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동성애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지만 언제나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집트는 물론이고 다른 아랍국들에서도 신, 알라에 대해 감히 논하는 것은 금기시됐으나 마흐푸즈는 예외였다.

대부분의 작품은 카이로 거리를 배경으로 평범한 카이로 시민의 사실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일상 속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내는 특유의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이로 나일 강변의 '카스르 알닐 카페'와 600년 역사의 피샤위 커피하우스를 자주 찾았으며, 그를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가 가는 카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2006년 7월 병석에 눕기 전까지 카이로 나일 강변의 카페에서 젊은 작가, 사상가, 예술가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왕성한 지적 편력을 보였다.

6. 주요 작품[편집]

6.1. 카이로 삼부작[편집]

52년도의 7월 혁명 이전에 쓰인 '카이로 트릴로지'(카이로 삼부작)가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카이로 삼부작은 제목을 카이로의 거리이름에서 따왔다. '궁전길, 욕망의 궁전, 설탕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삼부작은 한 가족의 삼대 역사를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

배경은 1차대전부터 이집트의 왕 파룩1세 시대까지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고통당하는 이집트인들의 삶을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서 조명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인간들의 심리적 변화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나기브 마흐푸즈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6.2. 게벨라위의 아이들(우리 동네 아이들)[편집]

1959년 상징적 철학 소설인 《우리 동네 아이들》을 알아흐람에 연재했다. 1959년작 《게벨라위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마흐푸즈 문학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종교 세력으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고 사실상 출판·판매가 금지됐던 이 작품은 '아브라함계 종교'라고 불리는 세 유일신교, 즉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게벨라위의 아이들》은 2006년 초에야 비로소 공식 출간될 수 있었다. 잡지에 연재됐던 것 외에 이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이집트에서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민음사에서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6.3. 나일 강변 한담[편집]

마흐푸즈의 또다른 대표작 《나일 강변 한담》(1966)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시절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 시절 이집트 사회의 데카당스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덕택에 사다트 정권으로부터 바로 금지처분을 당했고 1990년대 말이 될 때까지 이 작품은 이집트에서 출판될 수 없었다. 영화도 상영금지된 것은 물론이다.

출간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된 《나일강을 떠다니며》(1966)는 이집트 사회에서 금기시된 사회주의, 동성애, 종교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며, 1971년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누린 바 있다.

6.4. 미다크 골목[편집]

훗날 영화로 만들어졌던 《미다크 골목》은 셀마 헤이엑이 주연한 멕시코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영화 제목은 El callejon de los milagros).

6.5. 기타 작품[편집]

《도적과 개들》(1961), 《길》(1964), 《나일 강가의 잡담》(1966), 《미라마르》(1967), 《거울들》(1972), 《빗속의 사랑》(1973), 《알하라피시의 학살》(1977), 《성자 무덤 가의 결혼》(1981), 《남은 건 한 시간 뿐》(1982) 등을 발표했다.

《미라마르》(1967)는 네 남자의 시점과 그들 각자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두 차례의 혁명 이후 이집트 상황을 그려냈다. 작은 펜션 '미라마르'에 모인 다섯 남자의 회한과 상처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급 조라를 둘러싼 긴장과 다툼을 매개로 전개되어 살인 사건으로 치닫는다.

7. 수상[편집]

8. 영향[편집]

이집트 뿐 아니라 아랍권에서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1960년대 들어 활동을 시작한 아랍권 작가들은 모두 '마흐푸즈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작품 중 40여 편이 영화화되어 아랍어를 말하는 전 세계에서 수없이 방영되며 사랑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그의 작품이 새로 출판될 때마다 주요한 문화적인 사건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지브롤터와 걸프지역의 문학계에서 대화할 경우 마흐푸즈를 언급하지 않고는 논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세계적인 작가였다.

'이집트의 발자크'로 명성을 떨쳤으며, 압박을 받아온 아랍권 작가답게 제3세계와 평범한 개인의 삶에 대해 애정을 갖고 글과 대화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호소했다.

9. 여담[편집]

  • 평생을 카이로의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아온 문학가였다. 그를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가 가는 피샤위 카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 35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한 뒤 정년퇴직을 했으며, 공무원 일을 하면서도 신문에 기고하고 책을 출판했다.

10.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