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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4 | 서예 방면에서 권돈인은 예서체 비문에 특히 능하여 '''“동국에 전례 없던 신합(神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필적 몇 점이 전하며, 통도사 등에 그가 직접 남긴 현판 글씨도 남아 있어 당대 명필로서 이름을 남겼다. 한편 그의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으로 내려졌는데, 이는 학문과 공적이 뛰어남을 기리는 의미이다. 실제로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권돈인을 가리켜 “사림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왕권의 일방적 전행을 견제하려 했던” '''대표적 청류(淸流) 관료'''로 평가한다.[*출처2] 외척 세력이 좌우하던 세도정치기에 처음으로 가문 세력에 기대지 않고 최고 권직에 올랐던 그의 경력은 특출한 사례로 여겨지며, 충직하고 강직한 언관(言官) 출신 재상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공식 역사서와 연구서에서도 권돈인의 삶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서, 학문과 예술 면에서도 김정희와 더불어 당대를 풍미한 문화주도층의 일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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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36 | == 참고 자료 == |
| 37 | 출처1: 이병길,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울산저널≫, | |
| 37 | 출처1: 이병길,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울산저널≫, 2018. 11. 21., | |
| 38 | 38 | [[https://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4247467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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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40 | 출처2: 김명숙, <彛齋 權敦仁(1783-1859)의 정치활동과 정치론>, ≪한국사상과 문화 제38호≫, 한국사상과문화학회, 200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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