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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가문3. 성장4. 정치 활동
4.1. 개요4.2. 주요 사건4.3. 역할 및 행적4.4. 말년
5. 관련 문헌, 저술 및 평가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2. 출생과 가문[편집]

권돈인(權敦仁)은 1783년(정조 7년)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 우랑(又閬)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노론 명사였던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으로 학문적 전통이 깊었다. 부친 권중집(權中緝)은 군수 벼슬을 지낸 인물로, 권돈인은 이러한 양반 가문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다.

3. 성장[편집]

어려서부터 가학(家學)과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권돈인은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13년(순조 13) 증광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선의 관료가 될 자격을 얻었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역량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특별히 한 스승에게 사사했다는 기록은 뚜렷하지 않으나, 집안 선조인 권상하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권돈인은 당대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적 견문을 함께 넓혔다. 김정희는 권돈인의 뜻과 식견이 비범하다고 평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두 사람은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며 안목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유를 통해 권돈인은 서예와 회화에도 조예가 깊어졌고,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4. 정치 활동[편집]

4.1. 개요[편집]

과거 급제 후 권돈인은 홍문관 부설인 정자, 사간원의 헌납 등 낮은 관직부터 경력을 시작했다. 순조 연간에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전라도와 호남 지역을 순행하며 탐관오리들을 적발하는 등 민생을 바로잡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곧 승진을 거듭하여 예문관 부교리, 예모관 겸 사서 등을 지냈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도 임명되어 국가의 인재 교육을 책임지기도 했다.

헌종 연간에는 여러 핵심 관직을 역임하며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835년(헌종 1)에는 진하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북경에 다녀왔고,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주요 행정·군사·인사 직위를 두루 거쳤다[출처1]. 특히 1845년(헌종 11)에는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는데, 이는 문신으로서 경력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었다. 영의정으로 재직하며 그는 국가의 인사 행정과 정책 결정에 중심 역할을 수행했고, 부패 척결과 민생 안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경상도 관찰사 시절인 1838년에는 양산 통도사에 과도한 부역으로 부과되던 종이 제조 등 잡역을 대폭 감면·폐지하여 지역 사회의 고충을 덜어주었고, 이에 감사한 지방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불망비를 세우기도 했다.[출처1]

4.2. 주요 사건[편집]

권돈인은 당적으로는 노론(老論)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19세기 조선 정치를 주도한 세도가문들과는 다소 결을 달리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 왕실 인척 세력이 권력을 잡는 세도정치 하에서 특정 문중의 이익에 휘둘리기보다는 학자 관료로서의 소신을 중시했다. 헌종 치세 중반 권돈인은 안동 김씨 세력의 전횡(專橫)을 비판하며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고, 실제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할 당시 안동 김씨 인사를 탄핵하는 등 반(反) 세도가문 성향을 드러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그는 한때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중앙에서 밀려나 평안도 영변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하여 다시 세도가들을 공격하였다.

19세기 중엽 조정의 권력 구도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외척 가문이 교대로 섭정하며 다투는 양상이었다. 권돈인은 이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풍양 조씨계와 가까운 입장에서 행동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철종 즉위 전후 잠시 집권했던 풍양 조씨 세력 기간에는 형조판서 등 요직에 기용되었고, 반면 안동 김씨 세력이 재집권하면 밀려나는 부침을 겪었다. 그는 당색으로 보면 노론이었으나 특정 세도가문에 속하지 않은 채 조정 내 최초의 무계파 영의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곧 그의 정치 노선이 당파적 이익보다도 사림(士林) 출신의 청렴과 언론(言論)의 전통을 이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권돈인은 사림정치(士林政治)를 이상적 정치 형태로 인식하여 군주의 전제적 권한을 견제하고자 했으며, 세도가문의 전횡(專橫)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출처2]

4.3. 역할 및 행적[편집]

권돈인은 관료 생활 중 여러 역사적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그 중 하나는 천주교 탄압과 관련된 일로, 1846년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안드레아)[4]의 처형 때 보여준 행보다. 영의정이던 권돈인은 “김대건은 국법을 어기고 사교(邪敎)를 전파한 자이니 엄중 처단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고, 이는 김대건이 사형에 이르는 데 영향을 주었다.[출처1] 유학자 관료로서 그는 서학(천주교)에 대해 강한 배척 입장을 취하여, 당대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억천주 정책에 부응한 것이다. 한편 불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기록도 전해지는데, 앞서 언급한 통도사 부역 혁파 사례에서 보이듯 민생과 관련한 사안에서는 종파를 막론하고 현실적인 선처를 베풀기도 했다.[출처1]

권돈인의 정치 인생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851년의 진종(眞宗) 조천 예송 논쟁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급서하고 먼 왕족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실 족보와 종묘 제례에 여러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철종의 증조부로 추존된 진종(효장세자)의 신위를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옮기는 문제를 두고 조정이 둘로 갈라졌다. 이 예송에서 안동 김씨 세력은 조천(祧遷)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면 풍양 조씨 측 인사들과 일부 유림들은 불천(不遷) 입장을 내세워 충돌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권돈인은 가까운 벗 김정희와 함께 후자의 입장에서 논리를 펼쳤는데, 왕실의 예라 하더라도 사대부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게 예우해야 한다는 사림파의 예론을 강조하였다.[출처2] 이는 왕실의 예를 일반 예절보다 한 단계 높게 보아 왕권을 강조하려던 안동 김씨 측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결국 1851년(철종 2) 6월 조천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안동 김씨의 승리로 예송이 마무리되었다. 권돈인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곧 파직과 함께 순흥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진종 조천례 예송은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은 결정적 사건이었고, 동시에 왕실 외척 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4.4. 말년[편집]

권돈인의 관직 생활은 조정의 권력 판도 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헌종 시기에는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이 일시 쇠하면서 권돈인이 최고위직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으나, 1849년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득세하자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철종 즉위 직후 권돈인은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판부사로 좌천되었는데, 이는 안동 김씨 가문이 새 왕조에서 정권을 장악하며 그를 견제한 결과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에 복귀했고, 이어 영의정 자리에도 재차 올랐다. 이러한 복귀에는 철종 초반 정국에서 안동 김씨 세력과 타협 혹은 균형을 위해 노련한 원로인 그의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1851년 예송 논쟁으로 권돈인은 결정적으로 실각하였고, 이후로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순흥에 유배된 권돈인은 약 8년간 유배지에서 학문과 예술로 소일하며 지냈다. 1859년(철종 10) 유배지를 충청도 연산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향년 7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론 출신의 직언정신을 지닌 청백리 관료의 한 사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철종 말기와 고종 즉위 후 정치 지형이 다시 바뀌면서, 조정에서는 그의 억울한 처지를 풀어주기 위한 신원(伸冤)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권돈인은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관직 추탈 등의 불명예가 사후에 말소되었다.

5. 관련 문헌, 저술 및 평가[편집]

권돈인은 학자로서 글과 그림에도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특별히 저술한 개인 문집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만, 친구 김정희와 주고받은 한문 편지들이 『이원척사(彛阮尺辭)』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당시 두 거인의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3] 또한 뛰어난 서화가로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동명 작품과 쌍을 이루는 문인화로서, 추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의 매서움으로 쓸쓸한 겨울의 한기를 나타낸 데 비해 권돈인의 세한도는 부드럽고 온화한 필치로 겨울 풍경을 담아내어 서로 대조를 이룬다. 두 작품 모두 친구 간의 우정과 절개를 상징하는 명화로 평가받는다.

서예 방면에서 권돈인은 예서체 비문에 특히 능하여 “동국에 전례 없던 신합(神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필적 몇 점이 전하며, 통도사 등에 그가 직접 남긴 현판 글씨도 남아 있어 당대 명필로서 이름을 남겼다. 한편 그의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으로 내려졌는데, 이는 학문과 공적이 뛰어남을 기리는 의미이다. 실제로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권돈인을 가리켜 “사림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왕권의 일방적 전행을 견제하려 했던” 대표적 청류(淸流) 관료로 평가한다.[출처2] 외척 세력이 좌우하던 세도정치기에 처음으로 가문 세력에 기대지 않고 최고 권직에 올랐던 그의 경력은 특출한 사례로 여겨지며, 충직하고 강직한 언관(言官) 출신 재상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공식 역사서와 연구서에서도 권돈인의 삶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서, 학문과 예술 면에서도 김정희와 더불어 당대를 풍미한 문화주도층의 일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6. 참고 자료[편집]

출처1: 이병길,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울산저널≫, 2018. 11. 21.,
https://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4247467698

출처2: 김명숙, <彛齋 權敦仁(1783-1859)의 정치활동과 정치론>, ≪한국사상과 문화 제38호≫, 한국사상과문화학회, 2007. 1.,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8804950

출처3: 설경희, <『詩品』의 풍격미로 조명해 본 彛齋 權敦仁의 書畵美學>, ≪동양예술 제33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16. 11.,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72012
[출처1] 1.1 1.2 1.3 1.4 이병길,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울산저널≫[출처2] 3.1 3.2 3.3 김명숙, <彛齋 權敦仁(1783-1859)의 정치활동과 정치론>[4]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출처3] 설경희, <『詩品』의 풍격미로 조명해 본 彛齋 權敦仁의 書畵美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