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권돈인(비교)

r2 vs r3
......
44
권돈인(權敦仁)은 1783년(정조 7년)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 우랑(又閬)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집안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노론 명사였던 권상하(權尙夏)의 5대손으로 학문적 전통이 깊었다. 부친 권중집(權中緝)은 군수 벼슬을 지낸 인물로, 권돈인은 이러한 양반 가문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다.
55
66
== 성장 ==
7
어려서부터 가학(家學)과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권돈인은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13년(순조 13) 증광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선의 관료가 될 자격을 얻었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역량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특별히 한 스승에게 사사했다는 기록은 뚜렷하지 않으나, 집안 선조인 권상하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권돈인은 당대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적 견문을 함께 넓혔다. 김정희는 권돈인의 뜻과 식견이 비범하다고 평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두 사람은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며 안목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유를 통해 권돈인은 서예와 회화에도 조예가 깊어졌고,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7
어려서부터 가학(家學)과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권돈인은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13년(순조 13) 증광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선의 관료가 될 자격을 얻었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역량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특별히 한 스승에게 사사했다는 기록은 뚜렷하지 않으나, 집안 선조인 권상하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권돈인은 당대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적 견문을 함께 넓혔다. 김정희는 권돈인의 뜻과 식견이 비범하다고 평했을 정도로 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두 사람은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며 안목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유를 통해 권돈인은 서예와 회화에도 조예가 깊어졌고,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88
99
== 정치 활동 ==
1010
......
2424
권돈인의 정치 인생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851년의 '''진종(眞宗) 조천 예송 논쟁'''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급서하고 먼 왕족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실 족보와 종묘 제례에 여러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철종의 증조부로 추존된 진종(효장세자)의 신위를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옮기는 문제를 두고 조정이 둘로 갈라졌다. 이 예송에서 안동 김씨 세력은 '''조천(祧遷)'''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면 풍양 조씨 측 인사들과 일부 유림들은 '''불천(不遷)''' 입장을 내세워 충돌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권돈인은 가까운 벗 김정희와 함께 후자의 입장에서 논리를 펼쳤는데, '''왕실의 예라 하더라도 사대부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게 예우해야 한다'''는 사림파의 예론을 강조하였다.[*출처2] 이는 왕실의 예를 일반 예절보다 한 단계 높게 보아 왕권을 강조하려던 안동 김씨 측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결국 1851년(철종 2) 6월 조천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안동 김씨의 승리로 예송이 마무리되었다. 권돈인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곧 파직과 함께 순흥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진종 조천례 예송은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은 결정적 사건이었고, 동시에 왕실 외척 세력이 정국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2525
2626
=== 말년 ===
27
권돈인의 관직 생활은 조정의 권력 판도 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헌종 시기에는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이 일시 쇠하면서 권돈인이 최고위직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으나, 1849년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득세하자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철종 즉위 직후 권돈인은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판부사로 좌천되었는데, 이는 안동 김씨 가문이 새 왕조에서 정권을 장악하며 그를 견제한 결과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에 복귀했고, 이어 영의정 자리에도 재차 올랐다. 이러한 복귀에는 철종 초반 정국에서 안동 김씨 세력과 타협 혹은 균형을 위해 노련한 원로인 그의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1851년 예송 논쟁으로 권돈인은 결정적으로 실각하였고, 이후로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27
권돈인의 관직 생활은 조정의 권력 판도 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헌종 시기에는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이 일시 쇠하면서 권돈인이 최고위직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으나, 1849년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득세하자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철종 즉위 직후 권돈인은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판부사로 좌천'''되었는데, 이는 안동 김씨 가문이 새 왕조에서 정권을 장악하며 그를 견제한 결과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에 복귀'''했고, 이어 '''영의정''' 자리에도 재차 올랐다. 이러한 복귀에는 철종 초반 정국에서 안동 김씨 세력과 타협 혹은 균형을 위해 노련한 원로인 그의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1851년 예송 논쟁으로 권돈인은 결정적으로 실각하였고, 이후로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2828
29
순흥에 유배된 권돈인은 약 8년간 유배지에서 학문과 예술로 소일하며 지냈다. 1859년(철종 10) 유배지를 충청도 연산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향년 7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론 출신의 직언정신을 지닌 청백리 관료의 한 사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철종 말기와 고종 즉위 후 정치 지형이 다시 바뀌면서, 조정에서는 그의 억울한 처지를 풀어주기 위한 신원(伸冤)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권돈인은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관직 추탈 등의 불명예가 사후에 말소되었다.
29
순흥에 유배된 권돈인은 약 8년간 유배지에서 학문과 예술로 소일하며 지냈다. 1859년(철종 10) 유배지를 충청도 연산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향년 7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론 출신의 직언정신을 지닌 청백리 관료의 한 사람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철종 말기와 고종 즉위 후 정치 지형이 다시 바뀌면서, 조정에서는 그의 억울한 처지를 풀어주기 위한 신원(伸冤)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권돈인은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관직 추탈 등의 불명예가 사후에 말소'''되었다.
3030
3131
== 관련 문헌, 저술 및 평가 ==
3232
권돈인은 학자로서 글과 그림에도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특별히 저술한 개인 문집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만, 친구 김정희와 주고받은 한문 편지들이 '''『이원척사(彛阮尺辭)』'''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당시 두 거인의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3 설경희, <『詩品』의 풍격미로 조명해 본 彛齋 權敦仁의 書畵美學>] 또한 뛰어난 서화가로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동명 작품과 쌍을 이루는 문인화'''로서, 추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의 매서움으로 쓸쓸한 겨울의 한기를 나타낸 데 비해 권돈인의 세한도는 부드럽고 온화한 필치로 겨울 풍경을 담아내어 서로 대조를 이룬다. 두 작품 모두 친구 간의 우정과 절개를 상징하는 명화로 평가받는다.
3333
34
서예 방면에서 권돈인은 예서체 비문에 특히 능하여 '''“동국에 전례 없던 신합(神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필적 몇 점이 전하며, 통도사 등에 그가 직접 남긴 현판 글씨도 남아 있어 당대 명필로서 이름을 남겼다. 한편 그의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으로 내려졌는데, 이는 학문과 공적이 뛰어남을 기리는 의미이다. 실제로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권돈인을 가리켜 “사림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왕권의 일방적 전행을 견제하려 했던” '''대표적 청류(淸流) 관료'''로 평가한다.[*출처2] 외척 세력이 좌우하던 세도정치기에 처음으로 가문 세력에 기대지 않고 최고 권직에 올랐던 그의 경력은 특출한 사례로 여겨지며, 충직하고 강직한 언관(言官) 출신 재상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공식 역사서와 연구서에서도 권돈인의 삶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서, 학문과 예술 면에서도 김정희와 더불어 당대를 풍미한 문화주도층의 일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4
서예 방면에서 권돈인은 예서체 비문에 특히 능하여 '''“동국에 전례 없던 신합(神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필적 몇 점이 전하며, 통도사 등에 그가 직접 남긴 현판 글씨도 남아 있어 당대 명필로서 이름을 남겼다. 한편 그의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으로 내려졌는데, 이는 학문과 공적이 뛰어남을 기리는 의미이다. 실제로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권돈인을 가리켜 “사림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왕권의 일방적 전행을 견제하려 했던” '''대표적 청류(淸流) 관료'''로 평가한다.[*출처2] 외척 세력이 좌우하던 세도정치기에 처음으로 가문 세력에 기대지 않고 최고 권직에 올랐던 그의 경력은 특출한 사례로 여겨지며, 충직하고 강직한 언관(言官) 출신 재상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공식 역사서와 연구서에서도 권돈인의 삶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서, 학문과 예술 면에서도 김정희와 더불어 당대를 풍미한 문화주도층의 일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535
3636
== 참고 자료 ==
3737
출처1: 이병길, <통도사 종이 부역을 혁파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들(2)>, ≪울산저널≫, 2018. 11. 21.,
38
[[https://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4247467698]]
38
[[https://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4247467698]]
3939
4040
출처2: 김명숙, <彛齋 權敦仁(1783-1859)의 정치활동과 정치론>, ≪한국사상과 문화 제38호≫, 한국사상과문화학회, 2007. 1.,
4141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88049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