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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메이지 시대]]
2[include(틀:관련 문서, top1=메이지 시대)]
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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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요 ==
6{{{+1 明治維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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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68년 메이지(明治) 연호 개원 이후 [[일본 제국|일본]]이 중앙정부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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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본어]]로는 '''메이지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 발음하며,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경우에는 '''명치유신'''이라 한다.
11== 전개 과정 ==
12=== [[바쿠마츠|유신 이전의 정세]] ===
13[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막말(일본))]
14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흑선내항(쿠로후네 사건)'''을 통한 개항[*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본격적인 막부 타도(토막) 운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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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초기 토막파는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 정치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막부에 의한 개항을 무효화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른바 '''존황양이'''를 내세웠으나, [[대영제국|영국]],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충돌했다가 격차를 실감한 이후 노선을 변경하여 막부를 타도한 후 막부보다도 적극적인 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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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그리고 양대 토막파 세력인 사츠마번과 조슈번이 1866년에 삿초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단일대오를 결성하기에 이르자, 1867년에 취임 1년차를 맞이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새로 즉위한 무츠히토 덴노[* 당시에는 아직 메이지 연호가 아닌 전임 고메이 덴노의 '게이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에게 쇼군직과 정권을 반납하고 막부를 해산했는데 이를 '''대정봉환'''이라 한다.
19그러나 대정봉환은 어디까지나 토막파의 막부 타도 명분을 무마하는 대신 쇼군 시절에 보유하던 실권은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꼼수였기에, 명목상으로만 대정이 천황에게 반환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막부가 유지되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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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따라서 명목상 막부가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조정 및 삿초 동맹과 구막부 세력 간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는데, 실제로 메이지 유신은 보신 전쟁(무진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발한 후 요시노부가 에도성을 바치고 항복한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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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메이지 시대]]와 유신의 시작 ===
231868년 무츠히토 덴노가 5개조의 어서문을 통해 '''메이지(明治)''' 연호로의 개원을 선언하면서 메이지 시대와 유신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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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보신 전쟁(무진 전쟁) ===
251868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직접 막부군을 이끌고 [[천황]]의 조정이 있는 [[수도(도시)|수도]] [[교토]]로 진격하여 반막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려 했는데, 이로써 보신 전쟁(무진 전쟁)이라 불리는 내전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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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당시 동원된 병력만 따지면 막부군이 조정과 삿초 동맹의 신정부군보다 우세했기에 메이지 신정부는 여차 하면 메이지 덴노를 교토에서 탈출시키는 것까지 고려했으나, 교토 인근에서 벌어진 토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신정부군은 후퇴하는 막부군을 추격하여 막부의 심장인 [[에도]]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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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이때 막부 가신들은 장기전으로 가서 재역전을 노리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요시노부는 일부 영지를 보존받는 대가로 신정부에 항복하는 것을 택했고, 이로써 신정부군이 피를 흘리지 않고 에도에 입성하는 에도성 무혈개성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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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이러한 요시노부의 항복에 불만을 품은 [[도호쿠]] 일대의 친막부 세력은 오우에츠 열번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지속했으나 모두 신정부군에 진압되었고, 이후 [[홋카이도]]까지 밀려난 구막부군 잔당이 에조 공화국을 세우고 정권을 지속했으나 1869년에 항복하며 보신 전쟁은 신정부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