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興 | 盡 | 悲 | 來 |
일 흥 | 다할 진 | 슬플 비 | 올 래 |
「흥겨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는 뜻으로 세상일은 좋고 나쁜 것이 순환한다는 의미이다.
2. 유래[편집]
遙襟甫暢逸興遄飛爽籟發而清風生纖歌凝而白雲遏睢園綠竹氣凌彭澤之樽鄴水朱華光照臨川之筆四美具二難并窮睇眄於中天極娛遊於暇日天高地迥覺宇宙之無窮興盡悲來識盈虛之有數望長安於日下目吳會於雲間地勢極而南溟深天柱高而北辰遠關山難越誰悲失路之人萍水相逢盡是他鄉之客懷帝閽而不見奉宣室以何年
아득한 마음 비로소 펴니 격한 흥이 일어 빠르게 날아오른다. 상쾌한 퉁소 소리에 일어난 부드럽고 맑은 바람은 고운 노랫소리와 엉겨 구름에 닿는다. 수원의 푸른 대나무는 기상이 도연명을 술잔을 능가하고 업수의 붉은 꽃은 빛으로 사령운의 붓을 비춘다. 네 가지 아름다움이 함께 하고 두 가지 어려움도 나란히 서 있구나. 희끗거리기가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니 한가한 날에 즐기고 놂이 지극하다. 하늘은 높고 땅은 까마득하니 우주가 끝이 없음을 깨닫고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니 차고 기욺에도 정해진 운수가 있음을 깨닫는다. 태양 아래 장안을 바라보고 구름 사이로 오회 땅을 가리킨다. 땅 끝에 다다르니 남쪽 큰 바다는 깊고 하늘을 괴는 기둥은 높은데 북극성은 멀기만 하다. 관산은 넘기 어렵다는데 누가 길 잃은 이를 슬퍼해주리오? 부평초와 물이 서로 만나니 모두 타향의 길손이로다. 하늘 문을 가슴에 품어도 볼 수가 없으니 어느 해라야 미앙궁을 받들 수 있을까?秋日登洪府滕王閣餞別序 중 발췌
당나라唐 문인 왕발王勃이 14세 때 종릉鐘陵을 지날 무렵 홍주도독洪州都督 염백서閻伯嶼가 등왕각滕王閣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1][2][3] 염백서가 사위에게 연회의 서문을 짓게하고서 하례객들에게도 글을 권했지만, 하객들은 염백서가 사위의 재주를 자랑하려는 내심을 읽고 글짓기를 사양했다. 그런데 왕발은 이를 겸양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 화가 난 염백서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나와서는 사람을 시켜 왕발이 어떤 글을 쓰는지 알아보게 했다. 첫 구절 『豫章故郡洪都新府(옛 예장군이 새로이 홍도부가 되었다.)』을 듣고는 "그것은 나이를 먹은 이라면 늘 쓰는 말이다."라고 반응했다. 다음 구절 『星分翼軫地接衡廬(별자리는 익성과 진성이요 땅은 형산와 여산을 잇는다)』를 듣고서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落霞與孤鶩齊飛秋水共長天一色(저녁놀은 외로운 오리와 더불어 나란히 날고 가을녘 맑은 물은 높고 먼 하늘과 함께 같은 빛이다.)』를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는 진정한 천재다, 마땅히 영원토록 전해지리라!"하면서 왕발을 극진히 대우하며 서문을 완성시켜 주기를 청했다.[4][5]
3. 여담[편집]
- 왕발은 글을 쓸 때 정성스레 생각하지 않고 먹만 끊임없이 갈다가 곧장 술을 듬뿍 마시고 이불에 파묻혀 잠을 자고는 깨어나서 글을 썼는데,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완성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그를 일컫어 "초고草稿없이 마음 속으로 글을 지어 기억한다(腹稿)"고 말했다.[6]
- 왕발은 6세 때부터 글을 지어, 형 왕면勔, 왕거勮와 함께 '왕씨 집안의 진주나무珠樹 세 그루'로 불리었으며 성인이 되기 전에 과거에 급제했다.[7]
- 왕발은 패왕沛王 이현李賢의 신임을 받아 수찬修撰으로 임용되었다.[8]
- 왕발은 당시 황족들 사이에 유행하던 투계鬪鷄놀이를 주제로 글을 지어 영왕英王 이현李顯에게 바쳤는데, 황제唐高宗가 글의 내용이 '음란하다交構'며 크게 노하여 왕발을 궁에서 쫓아내고 입궁이 불허했다.[9]
- 왕발은 촉蜀 지역을 유랑하다가 괵주虢州의 참군參軍에 임용되었다.[10]
- 왕발은 범죄를 저지른 관노官奴 조달曹達을 숨겨주다 자신의 행위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조달을 살해했다. 당대 기준으로도 심각한 범죄였지만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쳤다.[11]
- 왕발의 아버지 왕복시父福畤는 아들의 죄에 연좌되어 옹주雍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에서 교지령交址令으로 좌천되었다. 왕발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교지로 가던 중 바다에 빠져 사망했다.[12]
[1] 唐摭言 卷五 以其人不稱才試而後驚 「王勃著滕王閣序時年十四...」[2] 新唐書 卷二百一 列傳 第一百二十六 文藝上 王勃 「初道出鐘陵九月九日都督大宴滕王閣...」[3] 古文觀止 卷七 六朝 唐文 滕王閣序 「時閻伯嶼爲洪州牧卽都督也」[4] 唐摭言 卷五 以其人不稱才試而後驚 「都督閻公不之信勃雖在座而閻公意屬子婿孟學士者為之已宿構矣及以紙筆巡讓賓客勃不辭讓公大怒拂衣而起專令人伺其下筆第一報云南昌故郡洪都新府公曰亦是老先生常談又報云星分翼軫地接衡廬公聞之沈吟不言又云落霞與孤鶩齊飛秋水共長天一色公矍然而起曰此真天才當垂不朽矣遂亟請宴所極歡而罷」[5] 新唐書 卷二百一 列傳 第一百二十六 文藝上 王勃 「宿命其婿作序以誇客因出紙筆遍請客莫敢當至勃沆然不辭都督怒起更衣遣吏伺其文輒報一再報語益奇乃矍然曰天才也請遂成文極歡罷」[6] 앞의 출전 「勃屬文初不精思先磨墨數升則酣飲引被覆面臥及寤援筆成篇不易一字時人謂勃為腹稿尤喜著書」[7] 舊唐書 卷一百九十上 列傳 第一百四十上 文苑上 王勃 「勃六歲解屬文構思無滯詞情英邁與兄勔勮才藻相類父友杜易簡常稱之曰此王氏三珠樹也勃年未及冠應幽素舉及第」[8] 앞의 출전 「沛王賢聞其名召為沛府修撰甚愛重之」[9] 앞의 출전 「諸王鬥雞互有勝負勃戲為檄英王雞文高宗覽之怒曰據此是交構之漸即日斥勃不令入府」[10] 新唐書 卷二百一 列傳 第一百二十六 文藝上 王勃 「勃既廢客劍南嘗登葛憒山曠望慨然思諸葛亮之功賦詩見情聞虢州多藥草求補參軍」[11] 앞의 출전 「官奴曹達抵罪匿勃所懼事泄輒殺之事覺當誅會赦除名」[12] 앞의 출전 「父福畤繇雍州司功參軍坐勃故左遷交址令勃往省度海溺水痵而卒年二十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