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狐 | 死 | 首 | 丘 |
여우 호 | 죽을 사 | 머리 수 | 언덕 구 |
「여우는 죽을 때 고개를 언덕으로 향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음을 가리킨다.
2. 유래[편집]
2.1. 예기[편집]
大公封於營丘比及五世皆反葬於周君子曰樂樂其所自生禮不忘其本古之人有言曰狐死正丘首仁也
태공이 영구에 봉해지고 5세에 이르기까지 주나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다. 군자가 이르기를
"음악은 스스로 생기는 바를 즐기고 예는 그 근본을 잊지 않으니, 옛 사람의 말에 「여우가 죽을 때가 되면 고개를 언덕으로 향한다」했으니, 어진 마음이라."
원나라元 학자 진호陳澔는 태공망은 제후가 되어 제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지만, 주 문왕文王에게 등용됨으로서 뜻을 펼칠 수 있었음을 잊지 않고 주군의 나라인 주나라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자손들은 친족의 대수代數가 다하는 5대까지 이를 계승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며, 여우처럼 하찮은 짐승이 죽음에 이르러서 머리를 바르게 하고 자기가 은신하던 굴이 있는 언덕을 향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라 해설했다. 또한 근본을 배반하고 처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아니기에 태공망의 결정은 어진 마음이라 보았다.[1]
본래 영구營丘는 사상보師尚父에게 하사된 땅이었다. 그는 상나라商의 주왕紂王을 토벌할 당시 세운 공으로 제후에 봉해졌지만, 봉지로 가는 여정을 지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태공망太公望은 밤낮으로 이동하여 스스로 영구를 봉지로 삼고 제나라齊를 세웠다.[2][3] 당시는 주나라周가 상나라를 멸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먼 나라들과 관계가 불안정했다. 봉지에 도착한 태공망은 내나라萊의 침공을 격퇴하고 영구를 지켜냈다.[4] 주나라 무왕武王이 사망하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면서 그의 숙부 주공 단周公旦이 섭정을 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준동하자 태공망은 주공과 손을 잡고 근왕勤王 세력을 구축하였고, 반대 세력이 군사를 일으키자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받아 반란을 진압했다.[5][6]
본래 영구營丘는 사상보師尚父에게 하사된 땅이었다. 그는 상나라商의 주왕紂王을 토벌할 당시 세운 공으로 제후에 봉해졌지만, 봉지로 가는 여정을 지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태공망太公望은 밤낮으로 이동하여 스스로 영구를 봉지로 삼고 제나라齊를 세웠다.[2][3] 당시는 주나라周가 상나라를 멸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먼 나라들과 관계가 불안정했다. 봉지에 도착한 태공망은 내나라萊의 침공을 격퇴하고 영구를 지켜냈다.[4] 주나라 무왕武王이 사망하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면서 그의 숙부 주공 단周公旦이 섭정을 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준동하자 태공망은 주공과 손을 잡고 근왕勤王 세력을 구축하였고, 반대 세력이 군사를 일으키자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받아 반란을 진압했다.[5][6]
2.2. 문자[편집]
飛鳥反鄉兔走歸窟狐死首丘寒螿洋木各依其所生也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토끼는 달려서 굴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고개를 언덕으로 향하고, 매미는 나무에 만족하니 각기 그 태어난 곳을 의지하는 것이다.
노자老子의 제자였던 문자는 살아있는 대상은 자신이 태어난 근본에 의지함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서 새, 토끼, 여우, 매미를 예로 들면서 각각 사자성어 형태로 다듬었다.
3. 여담[편집]
- 주공 단은 임종하기 전 자신을 성주成周에 묻어주기를 희망하면서 죽어서도 왕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태공망이 주나라에 묻힌 것은 주공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추정한다.[7]
- 진호는 태공망 이후 5대까지 주나라에 묻힌 것을 친족의 대수를 채운 것이라 해석했지만, 사기史記에 따르면 태공망의 고손자高孫子 애공哀公은 기나라紀 제후의 참소로 인해 수도로 소환되어 주나라 이왕夷王의 명으로 팽형에 처해져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애공의 죽음 이후 제나라는 도읍을 영구에서 박고薄姑로 옮겼다.[8]
- 전한前漢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주도로 편찬된 회남자淮南子는 문자의 글귀를 인용하여 만물의 자연스런 이치를 설명했다.[9]
[1] 禮記集說大全 2 檀弓 上 第3 「太公雖封於齊 而留周爲太師 故死而遂葬於周 子孫不敢忘其本 故亦自齊而反葬於周 以從先人之兆 五世親盡而後止也樂生而敦本 禮樂之道也 生而樂於此 豈可死而倍於此哉狐雖微獸 丘其所窟藏之地 是亦生而樂於此矣 故及死而猶正其首以向丘 不忘其本也倍本忘初 非仁者之用心 故以仁目之」[2] 史記 卷三十二 齊太公世家 第二 「文王崩武王即位... 師行師尚父左杖黃鉞...」, 「十一年正月甲子誓於牧野伐商紂... 師尚父牽牲...」[3] 앞의 출전 「於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師尚父於齊營丘東就國道宿行遲逆旅之人曰吾聞時難得而易失客寢甚安殆非就國者也太公聞之夜衣而行犁明至國」[4] 앞의 출전 「萊侯來伐與之爭營丘營丘邊萊萊人夷也會紂之亂而周初定未能集遠方是以與太公爭國」[5] 史記 魯周公世家 第三 「其後武王既崩成王少在彊葆之中周公恐天下聞武王崩而畔周公乃踐阼代成王攝行政當國管叔及其群弟流言於國曰周公將不利於成王周公乃告太公望召公奭曰我之所以弗辟而攝行政者恐天下畔周無以告我先王太王王季文王三王之憂勞天下久矣於今而后成武王蚤終成王少將以成周我所以爲之若此於是卒相成王」[6] 史記 卷三十二 齊太公世家 第二 「...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齊由此得征伐為大國」[7] 史記 魯周公世家 第三 「周公在豐病將沒曰必葬我成周以明吾不敢離成王周公既卒成王亦讓葬周公於畢從文王以明予小子不敢臣周公也」[8] 史記 卷三十二 齊太公世家 第二 「哀公時紀侯譖之周周烹哀公而立其弟靜是為胡公胡公徙都薄姑而當周夷王之時」[9] 淮南子 卷十七 說林訓 「鳥飛反鄉兔走歸窟狐死首丘寒將翔水各哀其所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