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破 | 釜 | 沈 | 舟 |
깨뜨릴 파 | 가마 부 | 잠길 침 | 배 주 |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에 임하는 각오를 의미한다.
2. 유래[편집]
項羽已殺卿子冠軍威震楚國名聞諸侯乃遣當陽君蒲將軍將卒二萬渡河救鉅鹿戰少利陳餘復請兵項羽乃悉引兵渡河皆沈船破釜甑燒廬舍持三日糧以示士卒必死無一還心於是至則圍王離與秦軍遇九戰絕其甬道大破之殺蘇角虜王離涉閒不降楚自燒殺當是時楚兵冠諸侯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莫敢縱兵及楚擊秦諸將皆從壁上觀楚戰士無不一以當十楚兵呼聲動天諸侯軍無不人人惴恐於是已破秦軍項羽召見諸侯將入轅門無不膝行而前莫敢仰視項羽由是始為諸侯上將軍諸侯皆屬焉
항우가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죽인 후, 그의 위엄이 초나라를 진동시키고 명성은 제후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에 당양군當陽君과 포장군蒲將軍으로 하여금 병사 2만을 이끌고 장하漳河를 건너서 거록鉅鹿을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자 진여陳餘가 다시 구원병을 청하였다.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장하를 건너서는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사른 뒤 3일분의 군량만을 휴대함으로써 사졸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며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거록에 도착하자마자 왕리王離를 포위하고 진나라秦 군과 수차례 접전하여 그들의 용도甬道를 크게 깨뜨렸으며 소각蘇角을 죽이고 왕리를 포로로 잡았다. 섭간涉閒은 초나라 군에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이때 초나라 군은 제후군諸侯軍 가운데 으뜸이었다. 거록을 구하고자 온 제후군이 10여 진영이었으나 감히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초나라 군이 진나라 군을 공격할 때에도 여러 장수들은 자싱의 진영에서 관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나라 군사는 한 명이 열 명을 대적했고, 초나라 군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니 제후군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나라 군을 무찌르고 난 후, 항우가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들게 하자 모두 무릎으로 걸으면서 감히 머리를 들어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항우는 비로소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니 제후들이 모두 그의 휘하에 소속되었다.
진나라秦 이세황제二世皇帝 원년 7월, 진승陳勝 등이 일으킨 민란을 계기로 전국시대 제후국의 후손들이 각자의 나라를 재건하거나 군사를 일으켰다.[2] 이듬해 겨울, 진나라는 장함章邯의 지휘 아래 진승의 난을 진압한 후, 초나라楚 군을 격파하여 지휘관인 항량項梁을 참살하고서 위나라魏를 멸망시킨 다음 조나라趙를 치기 위해 거록으로 진격했다.[3] 이세황제 3년, 거록을 포위한 장함은 왕리와 섭간에게 주공을 맡기고 자신은 남쪽에 주둔하고서 용도를 건설하여 주력 부대의 보급을 지원했다.[4][5] 초나라는 송의宋義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6] 그러나 송의가 안양安陽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않자, 신속한 결전을 주장하는 차장次將 항우와 갈등이 격화되었다.[7] 결국 항우는 송의를 참살하고서 지휘권을 장악하였고, 초나라 회왕懷王으로부터 사후재가를 받아냈다.[8] 항우는 선봉을 먼저 도하시켜 먼저 교전을 시작했고 이어 본대와 함께 도하한 다음 퇴로와 치중 수단을 모두 파괴하고는 단독으로 진나라 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가 종료된 후 거록에 출병했던 다른 제후국의 장수들은 항우의 기세에 눌려 스스로 초나라 군에 복속함으로서 거록전투 이후 항우는 제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군세軍勢를 확보했다.
3. 여담[편집]
- 항우의 계책은 《손자병법》에서 서술한 적지에 깊숙히 들어갈 때의 용병에 근거했다. 손무孫武는 적지에 들어간 병사들이 결사의 의지를 갖도록 여러 방책을 논하면서 퇴각 수단(배)과 보급 지점(솥)을 스스로 파기하고 기동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帥與之深入諸侯之地而發其機焚舟破釜若驅群羊驅而往驅而來莫知所之聚三軍之衆投之於險此謂將軍之事也
장수가 제후의 땅에 깊숙히 들어가면, 병사들을 활을 떠난 화살처럼 하고, 배를 불사르고 솥을 깨트리며, 양때를 몰듯이 한다. 가고 오기를 몰아치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삼군을 거느리고 위태로움에 임하는 것은 장수의 일이다.
- 장함은 거록의 패전 이후 진나라 조정으로부터 신임을 잃자 숙청을 두려워 하여 항우에게 투항했다.[14]
- 항우가 죽인 '경자관군'은 초나라의 상장군이 되었던 송의에 대한 경칭이다.[15]
- 항우는 거록전투 이후 자신의 군영에서 종군한 제후국의 장수들에게 제후에 봉분하는 혜택을 베풀었다.[16] 그러나 여기서 소외된 장수들과 기존의 제후국의 불만을 사게 되면서 다시금 전란이 발발했다.
[1] 번역 사기본기 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 까치글방, 2014[2]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七月戍卒陳勝等反故荊地為張楚... 武臣自立為趙王魏咎為魏王田儋為齊王沛公起沛項梁舉兵會稽郡」[3] 앞의 출전 「二世乃大赦天下使章邯將擊破周章軍而走遂殺章曹陽二世益遣長史司馬欣董翳佐章邯擊盜殺陳勝城父破項梁定陶滅魏咎臨濟楚地盜名將已死章邯乃北渡河擊趙王歇等於鉅鹿」[4] 앞의 출전 「三年章邯等將其卒圍鉅鹿...」[5] 史記 卷七 項羽本紀 「章邯令王離涉閒圍鉅鹿章邯軍其南筑甬道而輸之粟」[6] 앞의 출전 「王召宋義與計事而大說之因置以為上將軍項羽為魯公為次將范增為末將救趙」[7] 앞의 출전 「行至安陽留四十六日不進... 今不恤士卒而徇其私非社稷之臣」[8] 앞의 출전 「項羽晨朝上將軍宋義即其帳中斬宋義頭... 懷王因使項羽為上將軍當陽君蒲將軍皆屬項羽」[9] 史記 巻八十九 張耳陳餘列傳 「陳餘北收常山兵得數萬人軍鉅鹿北... 陳餘自度兵少不敵秦不敢前」[10] 앞의 출전 「當是時燕齊楚聞趙急皆來救張敖亦北收代兵得萬餘人來皆壁餘旁未敢撃秦」[11] 앞의 출전 「章邯引兵解諸侯軍乃敢撃圍鉅鹿秦軍遂虜王離渉閒自殺卒存鉅鹿者楚力也」[12] 史記 卷九十一 黥布列傳 「陳勝之起也布乃見番君與其眾叛秦聚兵數千人」, 「陳嬰以項氏世為楚將乃以兵屬項梁渡淮南英布蒲將軍亦以兵屬項梁」[13] 앞의 출전 「黥布者六人也姓英氏秦時為布衣少年有客相之曰當刑而王及壯坐法黥」, 「迺立楚懷王項梁號為武信君英布為當陽君」[14] 史記 卷七 項羽本紀 「秦軍數卻二世使人讓章邯章邯恐使長史欣請事... 已盟章邯見項羽而流涕為言趙高項羽乃立章邯為雍王置楚軍中」[15] 앞의 출전 「諸別將皆屬宋義號為卿子冠軍」[16] 앞의 출전 「乃分天下立諸將為侯王... 項王自立為西楚霸王王九郡都彭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