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마스코트 선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유래3. 여담

1. 개요[편집]

토할
먹일
터럭

「씹던 음식을 뱉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다」는 뜻으로, 인재를 얻기 위해 성의를 다함을 가리킨다.

2. 유래[편집]

周公戒伯禽曰我文王之子武王之弟成王之叔父我於天下亦不賤矣然我一沐三捉髮一飯三吐哺起以待士猶恐失天下之賢人子之魯慎無以國驕人

주공이 백금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이니, 천하에서 또한 신분이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목욕하는 데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었고, 한 번 식사하는데 세 번을 뱉어내면서 나아가 선비를 맞이하면서도, 오히려 천하의 현인들을 잃을까 걱정하였다. 너는 노 땅으로 가거든 삼가 나라를 가졌다고 남에게 교만하지 말아라."

주나라 무왕武王의 동생이었던 주공 단周公旦은 곡부曲阜 땅을 하사받고 노공魯公에 봉해졌지만 왕을 보좌하기 위해 봉지로 내려가지 못했다.[2] 무왕이 사망하고 성왕成王이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린 까닭에 주공은 섭정이 되어 계속 왕의 곁에서 국정을 다루었다.[3] 봉지를 비울 수 없던 주공은 아들 백금伯禽을 대신 보내면서 다스림의 자세에 대하여 간곡하게 당부했다.[4]

3. 여담[편집]

  • 주공이 백금을 자신의 대행으로 노나라에 보낼 당시, 주나라 조정은 주공의 친형 관숙管叔을 비롯한 형제들이 그의 섭정에 반발하여 주공을 중상하는 여론을 획책하자, 주공은 태공망太公望,소공 석召公奭 등과 손을 잡고 관숙의 세력과 대치하고 있었다.[5][6] 주공이 아들에게 한 당부는 통상적인 통치자의 덕목이 아니라 변란에 대비하여 도움이 될 인적 자원을 확보하라는 명령에 가깝다.
  • 주공은 조정에서 제후국들이 올리는 현황 보고를 받으면서 백금이 부임한 노나라는 3년이 걸린 반면, 태공망이 부임한 제나라는 5개월만에 상신한 것을 비교하면서 장차 자신의 봉국이 제나라를 섬기게 될 것을 우려했다.[7] 당시 제후 중에서 근왕勤王세력에게는 상당한 재량권이 인정되었다. 제나라는 본래 사상보師尚父가 무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었지만 나태한 모습을 보이자, 태공망이 임의로 제나라에 먼저 들어가 봉국을 차지했다. 주공은 아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태공망이 근왕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나라를 접수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8]
  • 백금은 관숙의 세력이 서융徐戎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비 땅에서 토벌하고서 반란에 연계했던 서융을 정토하려는 의지를 담은 《비서(肸誓)》를 포고했다. 이후 서융을 정벌하고 노나라를 안정시켰다.[9]
  • '선비가 찾아오면 목욕하다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식사하다가도 밥을 뱉어내면서 맞이한다'는 주공의 말을 "토포악발"로 축약한 표현은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의 《상재상서(上宰相書)》에 등장한다.[10] 그러나 글의 목적이 재상에게 벼슬을 청탁하기 위해 씌여진 까닭에 널리 인용되지 않는다.[11]
  • 출전으로 인용되는 《한시외전(韓詩外傳)》은 사기의 표현을 일부 첨삭했지만 축약하지 않고 기술했다.[12]
  • 후한後漢의 정치가 조조曹操가 지은 악부樂府 《단가행(短歌行)》의 종련終聯에는 "주공토포(周公吐哺)"로 축약하여 인용했다.[13]
[1] 번역: 사기본기 사마천 저, 정범진 외 역, 까치글방, 2014[2] 史記 魯周公世家 第三 「周公旦者周武王弟也」, 「封周公旦於少昊之虛曲阜是爲魯公周公不就封留佐武王」[3] 앞의 출전 「其後武王既崩成王少在彊葆之中周公恐天下聞武王崩而畔周公乃踐阼代成王攝行政當國」[4] 앞의 출전 「...而使其子伯禽代就封於魯」[5] 史記 卷三十五 管蔡世家 第五 「管叔鮮蔡叔度者周文王子而武王弟也武王同母兄弟十人母曰太姒文王正妃也其長子曰伯邑考次曰武王發次曰管叔鮮次曰周公旦次曰蔡叔度次曰曹叔振鐸次曰成叔武次曰霍叔處次曰康叔封次曰冉季載冉季載最少」[6] 史記 魯周公世家 第三 「管叔及其群弟流言於國曰周公將不利於成王...」, 「周公乃告太公望召公奭曰我之所以弗辟而攝行政者恐天下畔周無以告我先王太王王季文王三王之憂勞天下久矣於今而后成武王蚤終成王少將以成周我所以爲之若此於是卒相成王」[7] 앞의 출전 「魯公伯禽之初受封之魯三年而後報政周公周公曰何遲也伯禽曰變其俗革其禮喪三年然後除之故遲太公亦封於齊五月而報政周公周公曰何疾也曰吾簡其君臣禮從其俗爲也及後聞伯禽報政遲乃嘆曰嗚呼魯後世其北面事齊矣夫政不簡不易民不有近平易近民民必歸之」[8] 史記 卷三十二 齊太公世家 第二 「於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師尚父於齊營丘東就國道宿行遲逆旅之人曰吾聞時難得而易失客寢甚安殆非就國者也太公聞之夜衣而行犁明至國萊侯來伐與之爭營丘營丘邊萊萊人夷也會紂之亂而周初定未能集遠方是以與太公爭國太公至國修政因其俗簡其禮通商工之業便魚鹽之利而人民多歸齊齊為大國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齊由此得征伐為大國」[9] 史記 魯周公世家 第三 「伯禽即位之後有管蔡等反也淮夷徐戎亦并興反於是伯禽率師伐之於肸作肸誓曰陳爾甲胄無敢不善無敢傷牿馬牛其風臣妾逋逃勿敢越逐敬復之無敢寇攘踰墻垣魯人三郊三隧峙爾芻茭糗糧楨榦無敢不逮我甲戌筑而征徐戎無敢不及有大刑作此肸誓遂平徐戎定魯」[10] 後廿九日復上宰相書 「如周公之心設使其時輔理承化之功未盡章章如是而非聖人之才而無叔父之親則將不暇食與沐矣豈特吐哺握髮為勤而止哉維其如是故於今頌成王之德而稱周公之功不衰」, 「今雖不能如周公吐哺握髮亦宜引而進之察其所以而去就之不宜默默而已也」[11] 앞의 출전 「愈之待命四十餘日矣書再上而志不得通足三及門而閽人辭焉」, 「書亟上足數及門而不知止焉寧獨如此而已惴惴焉惟不得出大賢之門下是懼亦惟少垂察焉瀆冒威尊惶恐無已愈再拜」[12] 韓詩外傳 卷第三 「然一沭沐三握髮一飯三吐哺猶恐失天下之士」[13] 短歌行其一 「...山不厭高海不厭深周公吐哺天下歸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