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번디 Ted Bundy | |
본명 | 시어도어 로버트 번디 Theodore Robert Bundy |
출생 | |
사망 | 1989년 1월 24일 (향년 42세) 플로리다 주 브래드퍼드 카운티 |
국적 | |
학력 | |
신체 | 178cm, O형, 왼손잡이 |
가족 | 배우자 캐롤 앤 분(1980년 결혼, 1986년 이혼) 딸 로즈 번디 |
이명 | 레이디 킬러 The Lady Killer 캠퍼스 킬러 The Campus Killer 귀공자 The Scion |
1. 개요2. 생애
2.1. 출생의 비밀, 누나로 알고 자란 어머니2.2. 폭력적인 외조부와 유년기 정서 형성2.3. 타코마 이주와 의붓아버지2.4. 청소년기의 일탈2.5. 워싱턴 대학교 시절2.6. 정치적 야망2.7. 유타 법대 진학과 이중생활2.8. 1974년 워싱턴주의 공포, 대학가 실종 사건의 시작2.9. 유타주로의 확장2.10. 캐롤 다론치 납치 미수 사건2.11. 콜로라도주의 비극2.12. 테일러산의 시신 발굴2.13. 첫 번째 체포와 유죄 판결2.14. 첫 번째 탈옥 2.15. 두 번째 탈옥2.16. 플로리다로의 긴 여정2.17. 치 오메가(Chi Omega) 기숙사 참극2.18. 마지막 피해자 킴벌리 리치2.19. 운명의 검문2.20. 마이애미 재판과 기행2.21. 사형수로서 보낸 10년의 세월2.22. 지연 전술2.23. 최후2.24. 사후 분석
3. 범죄 수법4. 인간관계5. 여담1. 개요[편집]
"우리는 연쇄살인범을 생각할 때, 뿔이 달리고 입에서 침을 흘리는 괴물을 상상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이웃일 수도 있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1]
미국의 범죄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끔찍한 족적을 남긴 연쇄살인범. 1970년대 미국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확인된 피해자만 30명, 실제 희생자는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대의 악마이다. 흔히 '연쇄살인의 귀공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그의 수려한 외모와 지적인 언변이 대중에게 준 충격을 반영한 용어일 뿐, 그 실체는 강간, 살인, 시신 훼손, 네크로필리아(시신 성도착증)를 일삼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불과하다.
그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유인하기 위해 자신의 지성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사이코패스' 개념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잭 더 리퍼가 근대 연쇄살인의 시작이라면, 테드 번디는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살인마가 우리 곁에 숨어있는 평범한 이웃일 수 있다'는 공포를 실체화한 인물이라 평가받는다.
테드 번디가 활동했던 1970년대 초중반의 미국은 히피 문화의 황혼기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인해 사회적 불신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 덕분에 주(State)와 주 사이를 이동하는 범죄자에 대한 수사망은 매우 허술했다. 번디는 이 점을 완벽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워싱턴주, 유타, 콜로라도, 플로리다 등 미국 대륙을 종단하며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의 수사 기관들은 서로 공조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고, 컴퓨터 데이터베이스가 없던 시절이라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지역의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번디는 이러한 행정적 맹점을 비웃듯 자신의 폭스바겐 비틀을 몰고 미 전역을 누비며 사냥감을 물색했다.
번디 이전의 연쇄살인범들은 주로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외모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번디는 그 편견을 정면으로 부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공화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야망을 품기도 했다. 심지어는 시애틀의 자살 방지 센터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하며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선한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번듯한' 프로필은 피해자들에게 완벽한 방어 기제 해제를 유도했다. 그는 주로 대학 캠퍼스나 공공장소에서 팔에 깁스를 하거나 목발을 짚고 나타나, "짐을 차까지만 옮겨달라"며 여성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잘생긴 법대 지망생 청년이 도움을 요청할 때, 의심을 품을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 '도움의 손길'은 곧 죽음의 덫이 되었고, 번디는 이 위장술을 통해 수많은 여성을 자신의 차량인 폭스바겐 비틀로 유인해 무참히 살해했다.
대중에게 알려진 번디의 이미지는 세련된 살인마일지 모르나, 범죄 현장에서 드러난 그의 본모습은 짐승보다 못했다. 그는 피해자를 살해한 후에도 시신을 훼손하거나, 부패가 진행되는 시신을 다시 찾아가 성행위를 하는 네크로필리아적 성향을 보였다.
그는 시신의 머리를 잘라 자신의 집에 보관하거나, 화장을 해주는 기괴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살인은 단순히 생명을 뺏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완전히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뒤틀린 욕망의 분출구였다. 법의학 전문가들은 번디가 피해자의 시신을 일종의 '전유물'로 여겼으며, 그가 보여준 가학성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한다.
번디의 악명은 그가 체포된 이후에 더욱 치솟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재판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번디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법정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만들었다. 그는 판사에게 농담을 던지고, 증인들을 직접 신문하며, 심지어 재판 도중 자신의 연인에게 청혼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기이하게도 수많은 여성이 그에게 팬레터를 보내거나 법정에 면회를 오는 등 '하이브리스토필리아'[2]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언변과 쇼맨십도 과학적인 증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피해자의 신체에 남겨진 그의 치아 자국(Bite Mark)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전기의자형을 선고받게 된다.
2. 생애[편집]
2.1. 출생의 비밀, 누나로 알고 자란 어머니[편집]
"내 인생의 시작은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다."[3]
테드 번디의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지점은 바로 그의 '기형적인 가족 구조'와 그 시작점에 놓인 '출생의 비극'이다. 1946년 11월 24일, 버몬트주 벌링턴의 '엘리자베스 런드 미혼모 보호소'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테오도르 로버트 코웰(Theodore Robert Cowell). 훗날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할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의 본명이다.
그의 출생은 축복받지 못한 시작이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극도로 보수적이었으며, '미혼모'라는 낙인은 한 여성의 인생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했다. 번디의 생모인 엘리너 루이즈 코웰(Eleanor Louise Cowell, 이하 루이즈)은 이 가혹한 사회적 시선을 피하기 위해 평생을 관통할 거대한 기만극을 기획하게 된다.
테드 번디의 친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범죄 심리학자와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공식적인 기록과 루이즈의 주장에 따르면, 생부는 '잭 워딩턴(Jack Worthington)'이라는 이름의 공군 장교였다. 하지만 이 인물의 실체는 대단히 불분명하다. 수사 기관과 기자들이 훗날 워딩턴의 행적을 추적했으나, 루이즈가 설명한 프로필과 일치하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이 제기되었다.
- 가공의 인물설: 루이즈가 사생아를 출산했다는 수치심을 덮기 위해 급조해낸 가상의 인물이라는 견해다. 당시 미혼모들이 자녀에게 '부재중인 영웅 아버지' 상을 심어주기 위해 흔히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 참전 군인설: 2차 세계대전 직후였기에 잠시 스쳐 지나간 군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번디는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버려졌다는 근원적 상실감을 안게 된다.
- 친족 성폭행설(근친상간 의혹): 가장 충격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거론되는 가설 중 하나다. 번디의 외할아버지인 새뮤얼 코웰(Samuel Cowell)이 자신의 딸인 루이즈를 성폭행하여 번디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번디의 유년기 친구들과 일부 친척들은 새뮤얼의 광폭한 성격과 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근거로 이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번디의 유전적 결함과 반사회적 인격은 근친상간이라는 비극적 토양 위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번디가 태어난 후, 코웰 가문은 이 '부끄러운 비밀'을 감추기 위해 기괴한 연극을 시작했다. 외조부모인 새뮤얼과 엘리너 코웰은 테드를 자신들의 아들로 입양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테드에게 외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었고,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렇다면 친어머니인 루이즈는 무엇이 되었는가? 그녀는 테드의 '누나'로 포지셔닝되었다. 어린 시절의 테드 번디는 루이즈를 다정한 큰누나로 알고 자랐다. 훗날 심리학자들은 이 지점이 번디의 인격 형성에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아이가 세상과 맺는 첫 번째 신뢰 관계인 '모성'이 시작부터 기만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테드가 성장할 때까지 완벽하게 유지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이의 본능은 날카로웠다. 번디는 훗날 회고하기를,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위화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집안의 어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거리감,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는 루이즈가 자신을 바라보는 애틋하면서도 슬픈 시선은 어린 테드에게 정서적 혼란을 야기했다.
테드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정확히 언제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먼저 집안의 서류함을 뒤지다가 자신의 출생 증명서를 발견하고 '누나'가 실제로는 '생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설이다.
아니면 친척의 폭로로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촌이나 이웃 아이가 "너는 주워온 자식이다" 혹은 "네 누나가 네 엄마다"라고 놀리면서 진실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하지만 번디 본인은 재판 과정에서 성인이 되어 워싱턴주로 이주한 뒤에야 진실을 알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경로든 진실을 마주한 순간, 테드 번디의 세계관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자신이 믿어왔던 '부모'는 거짓된 존재였고, 자신은 축복받지 못한 '사생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극심한 열등감과 배신감을 안겼다. 특히 여성(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과 증오가 이 시기에 싹텄다는 것이 프로파일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는 자신을 속인 루이즈를 평생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여성에 대한 뒤틀린 공격성은 훗날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향한 잔혹한 살인으로 표출되었다.
코웰 가문은 중산층을 지향했으나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번디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부유한 아이들을 보며 강한 계급적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의 출생이 '천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외적인 완벽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깔끔한 옷차림, 고상한 말투, 지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신이 마치 귀족적인 혈통을 타고난 것처럼 꾸몄다. 이는 훗날 그가 범죄를 저지를 때 사용한 '가면'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들을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파괴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키워나갔다.
번디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이모인 줄리아(Julia)는 낮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의 공포를 생생히 기억했다. 당시 겨우 세 살이었던 테드가 부엌에서 가져온 식칼들을 침대 주변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자고 있는 이모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4]
이 소름 끼치는 행동은 그가 겪고 있던 정서적 불안과 뒤틀린 내면의 투영이었다.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 찬 집안 분위기 속에서 테드 번디는 타인의 고통과 공포를 관찰하며 희열을 느끼는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에게 가족은 안식처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인 연극 무대였고 그 무대 위에서 그는 자신만의 어두운 환상을 쌓아 올렸다.
2.2. 폭력적인 외조부와 유년기 정서 형성[편집]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집안의 왕이었고, 그의 분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폭풍과 같았다."[5]
테드 번디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가장 강력한 페르소나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새뮤얼 코웰(Samuel Cowell)이었다. 훗날 번디가 저지른 잔혹한 범죄의 기원을 추적하던 프로파일러들과 심리학자들은, 번디가 태어나서 처음 4~5년을 보냈던 필라델피아의 코웰 저택이야말로 '악마의 인큐베이터'였다고 입을 모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근친상간의 의혹, 가학적 폭력, 그리고 뿌리 깊은 기만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새뮤얼 코웰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조경 사업을 하던 인물로, 지역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평판이 나쁘지 않은 중산층 가장이었다. 그러나 집안 대문을 닫는 순간, 그는 가족 구성원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는 폭군으로 돌변했다. 그는 극심한 분노 조절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사소한 실수에도 아내와 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새뮤얼은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면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발로 차거나 학대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어린 테드 번디는 할아버지가 동물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며 자랐으며, 이는 연쇄살인범들의 공통적인 전조 증상인 '동물 학대'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벌레 취급했다. 번디가 훗날 피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나 '물건'으로 간주했던 소시오패스적 성향은, 타인을 철저히 등급화하고 멸시했던 외할아버지의 가치관을 그대로 흡수한 결과였다.
번디의 친어머니인 루이즈는 아버지 새뮤얼의 폭력 아래 완전히 위축된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테드를 '동생'이라고 부르며 키워야 했던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아들에게 적절한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지 못했다. 외할머니인 엘리너 코웰 역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고, 가끔은 환각을 보거나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린 테드 번디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극도의 고립감을 느꼈다. 그는 가족들 사이의 대화보다는 혼자서 상상에 빠지거나, 집안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코웰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번디가 배운 가장 큰 기술은 바로 '기만'이었다. 온 가족이 테드의 출생 성분을 속이고 연극을 하고 있었기에, 번디에게 거짓말은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원하는 '착한 아이'의 모습을 연기하는 법을 익혔다.
외조부 새뮤얼은 테드가 영리하고 말을 잘 들을 때만 그를 예뻐했기에, 번디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둠과 공격성을 철저히 숨기는 법을 터득했다. 훗날 그가 수사관들과 대중을 완벽하게 속이며 '모범적인 청년'의 가면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필라델피아 저택에서의 조기 교육(?)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번디의 생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일각에서는 가장 충격적인 가설로 '외할아버지 새뮤얼 코웰이 테드의 생부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루이즈가 미혼모 보호소로 보내지기 전, 새뮤얼이 딸에게 성적인 가해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나, 번디가 평생 자신의 혈통에 대해 가졌던 극심한 콤플렉스와 가족 관계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은 이러한 어두운 가정사를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외할머니 엘리너가 겪었던 정신 질환이 유전적으로 번디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폭력적인 가해자(외조부)와 정신적으로 무너진 피해자(외할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번디는, 사랑과 신뢰 대신 지배와 굴복의 논리를 먼저 깨우치게 되었다.
그는 훗날 "나는 아주 좋은 가정에서 자랐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미화하려 애썼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그 시절의 상처를 얼마나 깊이 은폐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준다. 필라델피아를 떠나 타코마로 이주했을 때, 번디의 가슴 속에는 이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은 훗날 수많은 여성의 피로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거대해질 운명이었다.
2.3. 타코마 이주와 의붓아버지[편집]
1950년, 그가 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루이즈 코웰은 필라델피아에서의 어두운 기억과 가족 내의 복잡한 시선을 뒤로한 채, 연고가 거의 없는 워싱턴주 타코마로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이는 단순한 거주지의 이동이 아니라, 테드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기 위한 세탁 과정의 시작이었다.
타코마에 정착한 루이즈는 감리교회 미혼모 모임에서 만난 조니 컬페퍼 번디(Johnnie Culpepper Bundy)라는 사내와 1951년 결혼하게 된다. 조니 번디는 당시 군 병원의 요리사로 일하던 성실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루이즈의 과거를 묻지 않고 테드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으며, 테드는 이때부터 '코웰'이라는 성 대신 '번디'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조니 번디는 테드에게 낚시를 가르쳐주고, 캠핑을 데려가며,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지원하는 등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어린 테드 번디의 눈에 비친 조니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혹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테드 번디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강한 선민의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조니 번디가 블루칼라(노동자 계급) 출신의 요리사라는 점을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조니는 다정했지만 지적이지 않았고, 상류 사회의 매너나 세련된 언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테드는 점차 자라나며 조니를 '나의 수준에 맞지 않는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니가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것 자체를 불쾌해했으며, 훗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태도는 번디가 평생을 거쳐 집착했던 '상류층에 대한 갈망'과 '지적 허영심'의 뿌리가 되었다.
루이즈와 조니 사이에서 4명의 자녀가 새로 태어나면서 테드의 입지는 더욱 묘해졌다. 그는 5남매 중 장남이었으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고, 동생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쳤다. 그는 가족 내에서 항상 '관찰자'이자 '이방인'의 태도를 유지했다.
이 시기 테드는 극도의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환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서 탐정 소설이나 범죄 잡지를 읽는 데 시간을 보냈고, 특히 여성들이 고통받는 묘사가 담긴 포르노그래피에 깊이 경도되었다. 조니 번디가 거실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 테드는 자신의 방에서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가학적인 환상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타코마는 산업 도시 특유의 회색빛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번디는 밤마다 동네를 배회하며 남의 집 창문을 훔쳐보는 관음증(Voyeurism)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나 옷을 벗는 여성을 몰래 지켜보며 기묘한 권력감을 느꼈다.
심리학자들은 이 시기의 번디가 느꼈던 '관찰자로서의 우위'가 훗날 그가 범죄를 저지를 때 나타난 '통제 욕구'의 원형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행복한 가정과 상류층의 삶을 훔쳐보며, 그들을 파괴하거나 소유하고 싶다는 뒤틀린 욕망을 품게 된 것이다.
테드는 죽는 순간까지 조니 번디를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 집행 전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언급할 때 조니를 철저히 배제하거나 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생 '테드 번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조니가 제공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울타리 뒤에 숨어 악마적 범행을 이어갔다. 조니 번디라는 선량한 인물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테드 번디 내부의 악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촉매제가 되었다.
타코마에 정착한 루이즈는 감리교회 미혼모 모임에서 만난 조니 컬페퍼 번디(Johnnie Culpepper Bundy)라는 사내와 1951년 결혼하게 된다. 조니 번디는 당시 군 병원의 요리사로 일하던 성실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루이즈의 과거를 묻지 않고 테드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으며, 테드는 이때부터 '코웰'이라는 성 대신 '번디'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 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조니 번디는 테드에게 낚시를 가르쳐주고, 캠핑을 데려가며,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지원하는 등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어린 테드 번디의 눈에 비친 조니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혹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테드 번디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강한 선민의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조니 번디가 블루칼라(노동자 계급) 출신의 요리사라는 점을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조니는 다정했지만 지적이지 않았고, 상류 사회의 매너나 세련된 언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테드는 점차 자라나며 조니를 '나의 수준에 맞지 않는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니가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것 자체를 불쾌해했으며, 훗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태도는 번디가 평생을 거쳐 집착했던 '상류층에 대한 갈망'과 '지적 허영심'의 뿌리가 되었다.
루이즈와 조니 사이에서 4명의 자녀가 새로 태어나면서 테드의 입지는 더욱 묘해졌다. 그는 5남매 중 장남이었으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고, 동생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쳤다. 그는 가족 내에서 항상 '관찰자'이자 '이방인'의 태도를 유지했다.
이 시기 테드는 극도의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환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서 탐정 소설이나 범죄 잡지를 읽는 데 시간을 보냈고, 특히 여성들이 고통받는 묘사가 담긴 포르노그래피에 깊이 경도되었다. 조니 번디가 거실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 테드는 자신의 방에서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가학적인 환상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타코마는 산업 도시 특유의 회색빛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번디는 밤마다 동네를 배회하며 남의 집 창문을 훔쳐보는 관음증(Voyeurism)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나 옷을 벗는 여성을 몰래 지켜보며 기묘한 권력감을 느꼈다.
심리학자들은 이 시기의 번디가 느꼈던 '관찰자로서의 우위'가 훗날 그가 범죄를 저지를 때 나타난 '통제 욕구'의 원형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행복한 가정과 상류층의 삶을 훔쳐보며, 그들을 파괴하거나 소유하고 싶다는 뒤틀린 욕망을 품게 된 것이다.
테드는 죽는 순간까지 조니 번디를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 집행 전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언급할 때 조니를 철저히 배제하거나 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생 '테드 번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조니가 제공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울타리 뒤에 숨어 악마적 범행을 이어갔다. 조니 번디라는 선량한 인물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테드 번디 내부의 악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촉매제가 되었다.
2.4. 청소년기의 일탈[편집]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창밖의 풍경을 볼 때, 테드는 창 안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었다."[6]
테드 번디의 청소년기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성실한 소년이라는 '가면'과, 그 이면에서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괴물'의 자아가 공존하던 시기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 워싱턴주 타코마에서의 생활은 번디에게 있어 사회적 신분 상승에 대한 강박과 자신의 뒤틀린 성적 욕망을 확인하는 실험장과도 같았다. 이 시기 그가 보여준 행동들은 훗날 그가 저지를 끔찍한 연쇄살인의 완벽한 '전조 현상(Red Flags)'으로 분석된다.
번디의 본격적인 일탈은 '관음증(Voyeurism)'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밤마다 타코마의 주택가를 배회하며 불이 켜진 창문을 통해 여성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에 중독되었다. 이는 단순히 사춘기 소년의 호기심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번디는 훗날 프로파일러들과의 면담에서 "밤공기를 마시며 타인의 가장 사적인 순간을 지배한다는 느낌에 전율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여성들이 옷을 벗거나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을 자신의 환상 속에서 통제하는 연습을 했다. 이러한 관음증적 행위는 그에게 두 가지 심리적 보상을 제공했다. 첫째는 타인을 몰래 지켜봄으로써 얻는 '정보의 우위'였고, 둘째는 대상이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는 '안전한 지배감'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의 관음증이 훗날 그가 피해자들을 미행하고 사냥감을 고르는 '스토킹'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번디는 지독한 '도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이웃집의 차고를 뒤지는 일을 반복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훔친 물건들이 반드시 생계에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높여 줄 수 있는 의류, 스키 장비, 혹은 세련된 소품들을 훔쳤다.
이는 양아버지 조니 번디가 제공하는 노동자 계급의 삶에 대한 강한 거부감에서 기인했다. 번디는 자신이 귀족적이고 지적인 상류층에 속해야 한다고 믿었으나, 현실의 그는 가난한 요리사의 의붓아들이었을 뿐이다. 그는 훔친 물건들로 자신을 치장하며 '가짜 자아'를 구축했다. 그는 학교에서 세련된 옷을 입고 다니며 부유한 집안 자제들과 어울리려 애썼는데, 그 옷들은 대부분 도둑질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신분 위장'에 대한 집착은 훗날 그가 법대생이나 권위 있는 전문가를 사칭하여 여성들을 유인하는 범죄 수법으로 이어진다.
타코마의 우드로 윌슨 고등학교(Woodrow Wilson High School) 시절, 번디는 교사들과 급우들 사이에서 "예의 바르고 공부 잘하는 청년"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토론 대회에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이며 전형적인 우등생의 길을 걷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
실제 번디는 또래 집단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친구들의 행동과 말투를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사회성을 '학습'했다. 그는 유머 감각을 익히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연구했지만, 내면에는 항상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소외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훗날 "나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마치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지 그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라고 회상했다.
청소년기 후반으로 갈수록 번디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가학적인 환상을 제어하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는 극도로 절제된 모습을 보였으나, 술을 마시면 억눌려 있던 공격성이 조금씩 드러나곤 했다. 술은 그에게 현실의 열등감을 잊게 해주는 동시에,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촉매제였다.
그는 술에 취한 채 밤거리를 배회하며 더 대담한 관음증과 절도를 저질렀다. 이 시기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여성을 납치하여 완전히 소유하는 시나리오'를 수천 번도 더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현실의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평판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 억제력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훗날 대학 시절 겪게 될 '실연'이었다.
번디는 청소년 시절 스키에 열광했다. 그는 훔친 스키 장비를 메고 워싱턴주의 설산을 누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그가 익힌 지형지물에 대한 지식과 야외 활동 능력은 훗날 그가 시신을 유기할 장소를 고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산악 지형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내는 데 탁월했다. 그는 자연의 고요함 속에서 시신과 단둘이 있는 환상을 즐겼으며, 이는 훗날 그가 피해자들을 숲속 깊은 곳으로 끌고 가 살해하고 다시 찾아가는 네크로필리아적 행위의 배경이 된다.
2.5. 워싱턴 대학교 시절[편집]
196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번디는 퓨젯 사운드 대학교(University of Puget Sound)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이하 UW)로 편입한다. 이곳에서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며 자신의 반사회적 본능을 은폐하고 타인을 조종하는 기술을 학문적으로 다듬기 시작했다.
번디는 UW에서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특히 인간의 행동 동기와 정신 병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 '자신이 왜 남들과 다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타인의 심리적 약점을 파악하여 통제하기 위한 학습 과정이었다.
실제로 그는 1972년 심리학 학사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했으며, 교수들로부터 "매우 명석하고 분석력이 뛰어나며 법대에 진학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는 극찬이 담긴 추천서를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심리학을 공부하며 익힌 '공감하는 척하는 기술'과 '상대방의 안심을 유도하는 화법'은 훗날 그가 수많은 여성을 유인하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번디는 UW에서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특히 인간의 행동 동기와 정신 병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 '자신이 왜 남들과 다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타인의 심리적 약점을 파악하여 통제하기 위한 학습 과정이었다.
실제로 그는 1972년 심리학 학사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했으며, 교수들로부터 "매우 명석하고 분석력이 뛰어나며 법대에 진학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는 극찬이 담긴 추천서를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심리학을 공부하며 익힌 '공감하는 척하는 기술'과 '상대방의 안심을 유도하는 화법'은 훗날 그가 수많은 여성을 유인하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마치 거울을 보듯 타인의 감정을 모방했다. 그는 슬퍼해야 할 때 슬픈 표정을 지었고, 정의로워야 할 때 분노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당시 그를 지도했던 교수 중 한 명의 회고[7]
이 시기 번디의 행보 중 가장 기괴하고도 유명한 일화는 그가 시애틀의 '자살 방지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로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야간 상담원으로서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전화를 받아 그들을 위로하고 극단적 선택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그는 훗날 연쇄살인범 수사 기법의 선구자가 되는 앤 룰(Ann Rule)[8]과 함께 일하게 된다. 앤 룰은 당시의 번디를 "매우 친절하고, 믿음직하며,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청년"으로 기억했다.
밤에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천사'의 가면을 쓰고, 낮에는 잠재적 범죄를 구상하거나 관음증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두운 골목을 배회하는 그의 이중생활은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성인 '정상성의 가면(The Mask of Sanity)'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상담 전화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전능감을 느꼈을 것으로 분석된다.
번디는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정치계에도 발을 들였다. 미국 공화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1968년 넬슨 록펠러의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으며, 워싱턴주 공화당 의장인 대니얼 J. 에반스의 주지사 선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정장을 빼입고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상류층 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는 매우 매너가 좋고 유능한 청년 정치망주로 통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언젠가 주지사나 상원의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활동은 그에게 강력한 '사회적 방부제' 역할을 해주었다. 훗날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도, 많은 지인이 "그렇게 앞날이 창창하고 바른 청년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며 그를 옹호하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이 시기에 구축된 이미지였다.
그는 자신이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에서 오는 열등감과, 양아버지 조니 번디의 노동자 계급적 배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완벽한 인간상을 연기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편에서는 점점 더 위험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여성들의 다리를 훔쳐보거나, 밤늦게 여대생 기숙사 주변을 서성이는 관음증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매력이 여성들을 통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실험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이어 벌어질 피의 축제를 위한 최종 리허설과도 같았다.
심리학 학위, 자살 방지 센터의 경력, 공화당의 촉망받는 청년이라는 프로필은 그가 저지를 범죄의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가 되었으며, 동시에 수사관들이 그를 범인 후보군에서 배제하게 만든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번디는 스스로를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 침투한 가장 완벽한 바이러스"로 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6. 정치적 야망[편집]
"그는 우리가 만난 젊은이들 중 가장 유망한 인재 중 하나였다. 예의 바르고, 지적이며, 당의 미래를 짊어질 재목으로 보였다."[9]
테드 번디의 생애에서 1970년대 초반은 가장 기묘한 시기로 기록된다. 한편으로는 워싱턴주 곳곳에서 여성들이 실종되는 참혹한 연쇄 살인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번디는 양복을 차려입고 주지사 후보의 곁을 지키며 전도유망한 정치인 지망생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번디는 사회적 신분 상승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보였으며, 자신의 살인 본능을 은폐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로 '권력의 언저리'를 선택했다.
1972년경,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한 번디는 본격적으로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미국 공화당에 입당한다. 당시 그는 단순히 당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유의 사교성과 훤칠한 외모, 그리고 심리학 전공자다운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는 대화 기법을 활용해 지역 당 간부들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주 공화당 의장인 로스 데이비스(Ross Davis)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데이비스는 번디를 "매우 성실하고 예리한 분석력을 가진 청년"으로 평가하며 그에게 당의 주요 업무를 맡겼다. 번디는 이를 통해 지역 정계의 핵심 인물들과 안면을 텄으며, 이는 훗날 그가 수사망에 올랐을 때 유력 인사들이 "설마 그 청년이 그럴 리가 없다"며 그를 감싸게 만드는 강력한 인적 방패가 되었다.
번디의 정치적 행보 중 가장 화려한 지점은 197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넬슨 록펠러 캠프에서 활동한 것과, 워싱턴주 주지사였던 댄 에반스(Dan Evans)의 재선 캠프에 합류한 사건이다.
번디는 에반스 주지사의 캠프에서 활동하며 상대 진영인 민주당 후보 알버트 로셀리니(Albert Rosellini)의 유세 현장에 잠입해 정보를 캐오는 일종의 '정치적 스파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셀리니의 연설 내용을 녹음하고 분석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질이 워낙 뛰어나 에반스 지사로부터 직접 찬사를 받기도 했다.
번디는 주지사와 함께 전용 헬기를 타고 이동하거나, 최고급 호텔에서 열리는 정재계 파티에 참석하며 자신이 꿈꾸던 '상류층의 삶'을 간접 체험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과거(미혼모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를 완전히 지우고, 자신이 마치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인 양 행동했다.
그는 낮에는 사회 정의와 보수주의 가치를 논하는 정당인으로 살았지만, 밤에는 자신의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어두운 골목을 누비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심리학자들은 이 시기의 번디를 '완벽한 이중생활의 전형'이라 분석한다. 정치적 성공은 그에게 우월감을 제공했고, 그 우월감은 "나는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는 오만을 강화시켰다. 그는 자신이 사회적 지위를 얻을수록 경찰이 자신을 의심할 확률이 제로(0)에 수렴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추천서를 들고 유타 대학교 법대에 진학하게 되는데, 연쇄살인마가 현직 주지사의 추천서를 활용해 법대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번디가 이토록 정치적 성공에 집착했던 이면에는 그의 첫사랑인 다이앤 에드워즈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1973년, 번디는 성공한 정치 지망생의 모습으로 다이앤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세련된 매너와 지적인 대화로 그녀를 다시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다이앤은 과거의 찌질했던 테드가 아닌, 당당한 엘리트가 된 그의 모습에 반해 결혼까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번디의 목적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게 만든 직후, 번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를 처절하게 차버림으로써 과거의 열등감을 해소했다.
"그녀는 나를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 내가 그녀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훗날 번디가 자신의 행동을 회고하며 남긴 말.
이 '정신적 살인' 혹은 '심리적 복수'는 번디에게 엄청난 쾌감을 주었으며, 이 사건 직후부터 그의 범행은 단순한 충동을 넘어 조직적이고 잔인한 연쇄 살인의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번디의 정치적 야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법대 공부에 적응하지 못했고, 정치 활동에서 얻는 성취감보다 살인에서 얻는 가학적 쾌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정당 회의에 결석하는 날이 많아졌고, 그의 깔끔했던 외모는 밤샘 범행과 스트레스로 인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화당 내의 그의 동료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번디는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활용해 수사 기관의 내부 정보를 흘낏 엿보기도 했으며, 이는 그가 초기에 수사망을 따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7. 유타 법대 진학과 이중생활[편집]
"나는 법을 공부하며 법망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유희였고, 체스 게임과도 같았다."[10]
1973년 가을, 테드 번디는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타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에 합격한다. 외견상으로 그는 완벽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었다. 준수한 외모, 심리학 학사 학위, 공화당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 그리고 이제는 촉망받는 예비 법조인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프로필 이면에는 억눌린 파괴적 본능과 신분 상승에 대한 병적인 강박, 그리고 피에 굶주린 포식자의 자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번디는 1974년 9월, 자신의 낡은 폭스바겐 비틀에 짐을 싣고 솔트레이크시티에 입성했다. 유타 대학교 법대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이자, 자신의 과거(특히 첫사랑 다이앤 에드워즈에게 당한 거절의 상처)를 세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 동쪽의 더글러스가(Douglas Street) 565번지에 위치한 하숙집에 둥지를 틀었다.
표면적으로 번디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동기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기도 했고, 교수들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그는 이미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워싱턴주에서 저질렀던 초기 범죄들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 그는, 유타주라는 새로운 사냥터에서 자신의 수법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법학 수업에서 배우는 형사소송법과 증거법 원칙들은 그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수사관들을 따돌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가이드북과 같았다.
번디가 법대에 진학한 이유는 단순히 성공하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법'이라는 체계 안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실제로 초기 수사 단계에서 번디의 이름이 용의 선상에 올랐을 때, 수사관들은 "법대생이 이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를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그는 법학 지식을 이용해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법을 연구했다. 수업 시간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치밀하게 동선을 짰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법전들 사이사이에 피해자들의 사진이나 기사를 끼워 넣으며 기괴한 쾌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있어 법대는 지성을 연마하는 곳이 아니라, 범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연구소였다.
이 시기 번디의 생활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띠었다. 낮에는 헌법과 민법을 논하는 지적인 청년이었으나, 밤이 되면 어두운 옷으로 갈아입고 '사냥'을 나갔다. 그는 유타주와 인접한 워싱턴주, 오리건주를 오가며 범행을 이어갔다. 장거리 운전은 그에게 일종의 명상 시간이었으며, 법대 수업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탈출구였다.
이러한 이중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시애틀에 두고 온 연인 엘리자베스 클로퍼에게는 "공부가 너무 바빠서 자주 연락하지 못한다"며 안심시켰고, 유타에서 만난 새로운 지인들에게는 자신의 고귀한 가문 출신인 양 행세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계급적 열등감과 우월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무시했던 상류층 여성들을 사냥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동시에 법학도라는 신분을 통해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유타주의 지역적 특색인 몰몬교(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문화 역시 번디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유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몰몬교에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침례를 받기까지 했다. 술과 담배를 금하고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는 몰몬교 커뮤니티 내에서, 번디는 '뒤늦게 신앙을 찾은 유망한 청년'으로 대접받았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관심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지역 공동체의 신뢰를 얻으면 범죄 의심에서 벗어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교회 내 활동적인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모임에 참석해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타겟을 물색했다. 이 시기의 번디는 사실상 '완벽한 시민'의 껍데기를 쓴 포식자 그 자체였다.
유타 시절, 번디의 범행 수법은 한층 악랄해졌다. 그는 법대생 특유의 논리적인 말투와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를 적극 활용했다.
그는 경찰 배지를 위조하거나 경찰관임을 암시하는 복장을 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팔에 가짜 깁스를 하거나 휠체어를 이용해 여성들의 모성애와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는 피해자가 방심하는 0.1초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차 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면, 그는 더 이상 친절한 법대생이 아니었다. 그는 미리 개조한 폭스바겐 비틀의 조수석 문 손잡이를 제거해 피해자가 안에서 문을 열 수 없게 만들었고, 이는 움직이는 감옥이 되었다. 유타 법대 진학 후 약 1년 동안, 그는 자신의 범죄 메커니즘을 완성 단계로 끌어올렸다.
법학 지식으로 무장하고 사회적 신분을 세탁한 그는 자신이 결코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에 빠졌고, 이 오만함은 더욱 대담하고 무모한 범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1974년 말부터 시작될 유타와 콜로라도의 연쇄 실종 사건은 바로 이 '법학도라는 완벽한 가면' 뒤에서 치밀하게 설계된 비극이었다.
2.8. 1974년 워싱턴주의 공포, 대학가 실종 사건의 시작[편집]
"그것은 마치 안개처럼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안개가 걷혔을 때 우리 곁의 소녀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11]
1974년 상반기, 워싱턴주 시애틀의 대학가는 전례 없는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훗날 '테드 번디'라는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수사 당국과 언론은 이 정체불명의 실종 사건들을 '실종된 여대생들(The Missing Co-eds)' 사건이라 명명했다. 이 챕터에서는 평온했던 대학 캠퍼스가 어떻게 악마의 사냥터로 변모했는지, 그리고 번디가 구사한 초기 범죄 패턴의 정수를 심층적으로 추적한다.
1974년 1월 31일 목요일 밤, 워싱턴 대학교의 학생이자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기상 예보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21세의 린다 앤 힐리가 자신의 침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사건은 번디의 전형적인 '침입형 납치'의 서막이었다.
린다는 평소 성실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방송국에 출근하지 않자 룸메이트들이 그녀의 방을 확인했다.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침대 시트 아래에서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겉옷과 가방은 그대로였지만, 오직 린다 본인과 그녀가 입고 있던 잠옷만이 증발한 상태였다.
수사 결과, 번디는 룸메이트들이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 열린 창문을 통해 침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린다를 둔기로 가격해 기절시킨 뒤, 그녀를 담요에 싸서 유유히 집을 빠져나갔다. 이는 번디가 단순히 길거리에서 유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장 안전한 공간인 '집'까지 침투할 수 있는 대담한 포식자였음을 시사한다.
린다의 실종 이후, 시애틀 인근 대학가에서는 약 한 달 간격으로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공기 중으로 사라지듯 실종되기 시작했다.
- 도나 게일 맨슨 (1974년 3월 12일): 에버그린 주립대 학생. 재즈 콘서트에 가기 위해 기숙사를 나선 뒤 실종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며, 번디는 사형 집행 직전 그녀를 살해해 시신을 태웠다고 자백했다.
- 수전 일레인 코트렐 (1974년 4월 17일): 센트럴 워싱턴대 학생.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중 사라졌다.
- 로버타 캐슬린 파크스 (1974년 5월 6일): 오리건 주립대 학생.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가 실종.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긴 생머리의 가르마를 탄 전형적인 백인 미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번디의 첫사랑이었던 다이앤 에드워즈의 외모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으며, 범죄 심리학자들은 이를 번디의 뒤틀린 복수심이 투영된 '피해자 선택 기제'라고 분석한다.
1974년 여름이 다가오면서 번디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졌다. 그는 더 이상 밤의 어둠 속에만 숨지 않았다. 대낮의 밝은 태양 아래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약자'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번디는 한쪽 다리에 가짜 깁스를 하거나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때로는 팔에 슬링(Sling)을 감고 무거운 책이나 테니스 라켓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현대 사회의 '친절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악용했다. 젊고 잘생긴 청년이 다친 몸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 여대생들은 경계심을 풀고 그의 폭스바겐 비틀 차량 근처까지 접근했다. 번디는 피해자가 차 안으로 몸을 들이미는 순간, 숨겨두었던 쇠지렛대(Crowbar)를 꺼내 휘둘렀다.
1974년 7월 14일, 번디의 대담함은 극치에 달했다. 시애틀 근교의 휴양지인 레이크 새매미시 주립공원에서 단 하루 만에 두 명의 여성을 납치한 것이다.
이날 공원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번디는 자신을 '테드(Ted)'라고 소개하며 여러 여성에게 접근했다. 그중 재니스 오트(Janice Ott)와 데니스 나슬런드(Denise Naslund)가 그의 유혹에 걸려들었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디는 태연하게 피해자들을 자신의 차로 유인해 사라졌다.
이날의 대담한 행각 덕분에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를 얻게 된다. 목격자들은 범인이 "테드"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구형 갈색 혹은 베이지색 폭스바겐 비틀을 몰았다는 공통된 진술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 시애틀 지역에 등록된 '테드'라는 이름의 폭스바겐 소유주는 수천 명에 달했고,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당시 워싱턴주 경찰은 이 사건들을 연쇄 살인으로 규정하는 데 주저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단순 가출'이나 '행방불명'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각 대학 캠퍼스 경찰과 지역 경찰 간의 정보 공유는 전무했다. 번디는 주 경계와 시 경계를 넘나들며 범행을 저질렀고, 이는 수사망을 교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사관이었던 로버트 케플(Robert Keppel)은 나중에 "우리는 거대한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고 있었지만, 그 바늘이 자석처럼 우리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회고했다. [12]
1974년 가을이 되자, 워싱턴주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여대생들은 더 이상 혼자 밤길을 걷지 않았고, 기숙사와 자취방의 창문에는 쇠창살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언론은 매일같이 사라진 소녀들의 사진을 보도하며 공포를 재생산했다.
번디는 이 공포를 즐겼다. 그는 자신이 신문 1면에 나오는 것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돌연 활동지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였다. 법학도라는 신분 세탁과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떠난 그의 이동은, 워싱턴주에는 '해결되지 않은 비극'을, 유타주에는 '새로운 재앙'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2.9. 유타주로의 확장[편집]
"솔트레이크시티는 내게 완벽한 은신처였다. 누구도 성실하게 법전을 뒤적이는 동부 출신의 세련된 청년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1974년 가을, 테드 번디는 워싱턴주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범행 흔적을 뒤로하고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거처를 옮긴다. 겉으로 표명한 명분은 유타 대학교(University of Utah)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 입학이었다. 워싱턴 대학교 시절의 준수한 성적과 공화당 활동 경력,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추천서는 그를 '장래가 촉망되는 예비 법조인'으로 둔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가 낡은 폭스바겐 비틀에 싣고 온 것은 법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살인 충동과 더욱 정교해진 사냥 기술이었다.
유타주로 이주한 번디는 철저하게 두 가지 얼굴을 유지했다. 낮에는 유타 대학교 법대 도서관에서 판례를 분석하고 동료 학생들과 법리를 논하는 지적인 학생이었으며, 밤에는 새로운 사냥터를 물색하는 포식자였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지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주말마다 '드라이브'를 즐겼는데, 이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시신을 유기하기 적합한 산악 지형과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하는 '사전 답사'였다. 유타주의 거칠고 광활한 자연환경은 번디에게 워싱턴주보다 훨씬 대담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당시 그가 거주하던 하이랜드 드라이브(Highland Drive)의 하숙집 방은 지극히 평범했다. 벽에는 법학 서적들이 꽂혀 있었고, 책상 위에는 정갈하게 정리된 강의 노트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침대 밑과 벽장 깊숙한 곳에는 피해자들로부터 강탈한 기념품(Trophies)과 범행 도구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이 극단적인 대조에서 기묘한 우월감을 느꼈다고 훗날 고백했다.
유타주는 주류 사회가 모르몬교(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지역이다. 번디는 이 보수적이고 신뢰 중심적인 지역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기꺼이 모르몬교로 개종했다. 1974년 9월, 그는 침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진정으로 신앙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번디에게 종교는 '사회적 알리바이'의 연장선이었다. 독실한 모르몬교 신자라는 타이틀은 그가 늦은 밤에 돌아다녀도, 혹은 낯선 여성에게 접근해도 사람들이 경계심을 늦추게 만드는 완벽한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교회 모임에 성실히 참석하며 "법학 공부를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싶다"는 감언이설로 지역 공동체의 신망을 얻었다.
이러한 그의 철저한 위장술은 수사 당국이 그를 용의 선상에서 배제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법대생이자 독실한 신자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리 없다"는 편견은 번디가 유타주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 최적의 양분이 되었다.
워싱턴주에서의 연쇄 실종 사건으로 인해 '테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디는 유타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본명을 당당히 사용하며 수사기관의 허점을 비웃었다.
1974년 10월 18일, 솔트레이크시티 경찰청장의 딸이었던 멜리사 스미스(Melissa Smith)가 실종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9일 후 인근 산악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명은 전형적인 번디의 수법인 둔기에 의한 타격과 목 졸림이었다. 더욱 끔찍한 점은 그녀가 살해당한 후에도 수일간 성적으로 유린당했다는 법의학적 증거였다.
불과 사흘 뒤인 10월 31일 할로윈 밤, 17세 소녀 로라 에이머(Laura Aime)가 실종되었다. 그녀 역시 수주 후 차가운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번디는 유타주로 넘어온 지 단 몇 달 만에 지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그의 범행은 워싱턴 시절보다 훨씬 과감하고 잔혹해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초보' 연쇄살인마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법의 틈새를 파고드는 법을 완벽히 익힌 '완성형 괴물'이 되어 있었다.
번디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범죄 수사 기법과 증거 채택의 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수사관들이 어떤 식으로 증거를 수집하는지 알았기에, 현장에서 자신의 지문이나 혈흔을 남기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했다.
그는 자신의 폭스바겐 비틀 조수석을 떼어내 피해자를 눕히기 쉽게 개조했고, 차 안에는 항상 밧줄, 수갑, 쇠지렛대 등을 구비해 두었다. 하지만 누군가 검문을 하더라도 그는 "법대생이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히러 나왔다"거나 "이사 중이라 짐이 좀 많다"는 식의 유창한 변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당시 유타주 경찰은 서로 다른 카운티 간의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았고, 워싱턴주 수사팀이 넘겨준 '테드'와 '폭스바겐 비틀'이라는 단서가 유타주까지 도달하는 데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번디는 이 정보의 비대칭성을 즐기며, 낮에는 법전을 읽고 밤에는 인간을 사냥하는 기괴한 삶을 이어갔다.
유타주에서의 범행은 번디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는 자신이 법과 도덕의 통제를 벗어난 초월적 존재라고 믿기 시작했다. 법대에서 배우는 정의와 형법은 그에게 있어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잡히지 않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전술 교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함은 서서히 빈틈을 만들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대담해졌고, 대담함은 곧 부주의함으로 이어졌다. 1974년 말, 번디는 유타를 넘어 인접한 콜로라도주까지 사냥 범위를 넓히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는 훗날 그가 몰락하게 되는 서막이자, 더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나는 법이 정의를 수호한다고 믿지 않는다. 법은 단지 똑똑한 자들이 멍청한 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다." > — 번디가 법대 동료와 나눈 대화 중 일부[13]
2.10. 캐롤 다론치 납치 미수 사건[편집]
"그는 경찰관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순간, 나는 그가 나를 죽이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14]
그날 저녁, 18세의 평범한 전화국 직원이었던 캐롤 다론치는 솔트레이크시티 인근 머레이(Murray)에 위치한 패션 플레이스 몰(Fashion Place Mall)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이었고, 몰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때 한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 남자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세련된 양복 차림에 신뢰감을 주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로슬랜드 경관(Officer Roseland)'이라고 소개하며, 다론치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방금 당신의 차에 누군가 침입하려다 도주했습니다. 도난당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해야 하니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다론치는 처음에는 의심했다. 하지만 번디는 미리 준비한 가짜 경찰 배지를 슬쩍 보여주며 전문적인 용어를 섞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번디는 심지어 다른 행인에게 다가가 "이 여성의 차가 털렸으니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달라"는 연기까지 선보였다. 이러한 대담한 연극에 속아 넘어간 다론치는 결국 그의 폭스바겐 비틀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탄 다론치는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남자가 운전하는 방향이 경찰서가 있는 방향이 아니었을 뿐더러, 차 안쪽 문손잡이가 제거되어 있었다.[15]
다론치가 "경찰서로 가는 게 맞나요?"라고 묻자, 번디는 갑자기 돌변했다. 그는 차를 길가에 세우더니 품속에서 수갑을 꺼내 다론치의 한쪽 손목을 채웠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다론치의 격렬한 저항 때문인지 수갑은 양쪽 모두 채워지지 않았고 한쪽만 다론치의 손목에 걸린 채 덜렁거렸다.
번디는 단단한 쇠지레(Crowbar)를 꺼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고, "소리를 지르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 다론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문을 발로 차고 번디의 얼굴을 할퀴며 저항했다. 번디가 그녀를 다시 차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다론치는 문을 열고 달리는 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운 좋게도 근처를 지나던 차량이 길가에 쓰러진 다론치를 발견했고, 그녀는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번디는 분노에 가득 차 현장을 떠났지만, 그가 흘린 결정적인 단서—캐롤 다론치의 옷에 묻은 혈흔과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의 얼굴—는 훗날 그를 파멸로 이끄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되었다.
다론치를 놓친 번디는 극도의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자신의 범행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고,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당일 밤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는 다론치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몇 시간 뒤, 인근 뷰몬트 고등학교(Viewmont High School)의 연극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부모님과 공연을 관람하던 17세 소녀 데브라 켄트(Debra Kent)가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번디는 그녀를 유괴했다.
데브라 켄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현장 인근에서는 다론치에게 사용하려 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수갑 열쇠가 발견되었다. 번디는 훗날 사형 집행 직전 자백에서 데브라 켄트를 살해했음을 시인했으나, 그녀의 유해는 오랜 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아 유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16]
캐롤 다론치는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번디의 인상착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그녀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몽타주는 이전까지 워싱턴주 수사팀이 확보하고 있던 '테드'의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유타주 경찰은 다론치의 진술을 통해 범인이 1960년대 후반 모델의 유색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특정했다. 또한 다론치의 옷에서 발견된 혈흔은 번디의 혈액형인 O형과 일치했다. 비록 당시에는 DNA 수사 기법이 없었으나, 이 모든 정황 증거들은 번디를 향한 수사망을 좁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번디의 범죄 행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번디가 무적의 살인마가 아니며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둘째, 피해자의 적극적인 저항이 연쇄살인마의 연쇄 고리를 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법정에서 번디의 얼굴을 직접 지목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을 남겼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번디는 다론치 사건 이후에도 자신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타 법대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며 '모범적인 학생' 코스프레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지능이 경찰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다론치라는 '목격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동성과 위장술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이 놓아준(정확히는 놓친) 그 평범한 여대생이 훗날 법정에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저 남자가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자신의 모든 화려한 변명들이 무너져 내릴 것임을. 다론치 사건은 번디에게는 '운 나쁜 실패'였을지 모르나, 사법 시스템에게는 '악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2.11. 콜로라도주의 비극[편집]
"그는 눈부신 설원 위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17]
1974년 하반기, 워싱턴주와 유타주를 피로 물들인 테드 번디의 폭주가 멈추지 않고 인접한 콜로라도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번디가 콜로라도를 타깃으로 삼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폭스바겐 비틀을 이용해 주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당시의 허술한 주간 공조 수사 체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콜로라도는 수많은 스키 리조트와 관광지가 밀집해 있어 외지인의 출입이 잦았고, 이는 번디가 군중 속에 섞여 피해자를 물색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콜로라도의 아스펜(Aspen)이나 베일(Vail)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번디에게 이 장거리 운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범행을 위한 '사냥의 시간'이자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의 일부였다.
1975년 1월 12일, 아스펜 인근의 스노우매스 빌리지(Snowmass Village)에 위치한 '와일드우드 인(Wildwood Inn)' 호텔에서 끔찍한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미시간주 출신의 간호사였던 카린 캠벨은 약혼자와 함께 휴가를 즐기러 왔다가,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중 단 몇 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번디는 호텔 내부라는 폐쇄적이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공간에서도 대담하게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정전기를 이용해 불을 끄거나, 어두운 복도에서 피해자를 제압한 뒤 비상구로 끌고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실종 36일 만인 2월 18일, 눈이 녹기 시작한 인근 도로변에서 캠벨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둔기에 의한 치명적인 타격 흔적이 있었으며, 번디 특유의 가학적인 성폭행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캠벨 사건 이후 콜로라도 전역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번디는 멈추지 않았다.
1975년 3월 15일, 베일(Vail)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던 줄리 커닝햄이 저녁 식사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번디는 훗날 자백에서 그녀에게 다가가 목발을 짚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법을 썼다고 밝혔다. 그는 그녀를 차에 태운 뒤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4월 6일에는 그랜드 정크션(Grand Junction)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데니스 올리버슨이 실종되었다. 그녀의 자전거와 신발만이 인근 다리 아래에서 발견되었을 뿐,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18]
콜로라도 경찰은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실종 사건들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번디는 이 시기 유타 법대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며 '모범적인 학생' 코스프레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수사관들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낌새를 채자, 오히려 수사 자료를 열람하려 시도하거나 법적 절차를 따지며 수사팀을 조롱했다. 그는 자신이 법을 공부하는 지성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경찰이 자신을 괴롭히는 무능한 집단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오만함은 결국 그가 남긴 미세한 흔적들을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번디가 왜 굳이 '스키 리조트'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놓는다.
스키 리조트에 오는 여성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갖췄으며,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매력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번디가 가진 첫사랑 다이앤 에드워즈에 대한 뒤틀린 열등감과 정복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형 특성상 시신을 유기하면 봄이 올 때까지 발견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번디는 자연환경을 자신의 범행 도구로 이용한 셈이다.
그는 지리적 경계를 무너뜨렸고, 사회적 지위를 방패 삼아 수사망을 비웃었다. 하지만 아스펜에서의 대담한 범행은 역설적으로 그를 향한 수사망을 좁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그가 두 번이나 탈옥하게 되는 비극적인 배경이 되기도 한다.
"눈은 모든 것을 덮어주지만, 진실까지 영원히 가릴 수는 없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콜로라도주 형사의 증언
2.12. 테일러산의 시신 발굴[편집]
"그곳은 나의 성소(Sanctuary)였다. 내가 온전히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지."[19]
1974년 한 해 동안 워싱턴주와 오리건주 일대에서 실종된 수많은 여대생들의 행방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경찰은 '테드'라는 이름을 가진 용의자를 쫓고 있었으나, 물증은 전무했고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1975년 3월, 워싱턴주 시애틀 동쪽에 위치한 테일러산(Taylor Mountain)에서 등산객과 사냥꾼들에 의해 유골이 발견되면서, 미국 범죄사상 가장 참혹한 '킬링 필드'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테일러산은 울창한 침엽수림으로 덮인 험준한 지형으로, 평소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1975년 3월 1일, 두 명의 임학도가 숲을 조사하던 중 낙엽 더미 사이에서 기이하게 솟아오른 인간의 두개골을 발견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킹 카운티(King County) 보안관 사무소는 즉각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착수했다.
초기 수색에서 발견된 것은 단 한 구의 유골이 아니었다. 수색팀이 낙엽을 걷어내고 흙을 파헤칠수록, 그곳이 단순한 유기 장소가 아닌 '연쇄살인마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견된 두개골과 치아 조각들은 이미 심하게 부패하거나 산짐승에 의해 훼손된 상태였으나, 법치의학적 분석을 통해 이들이 누구인지가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테일러산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1974년 워싱턴 대학교 근처에서 실종되었던 여대생들이었다.
- 린다 앤 힐리(Lynda Ann Healy): 1974년 2월 1일 자신의 침실에서 피 묻은 시트만 남긴 채 사라졌던 첫 번째 공식 피해자. 그녀의 두개골 일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 수잔 일레인 랜콧(Susan Elaine Rancourt): 센트럴 워싱턴 대학교에서 실종되었던 그녀 역시 테일러산의 차가운 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 로버타 캐슬린 파크스(Roberta Kathleen Parks): 오리건주에서 실종되어 워싱턴주까지 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유골도 함께 확인되었다.
- 브렌다 캐럴 볼(Brenda Carol Ball): 술집에서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녀의 흔적 역시 이곳에 남겨져 있었다.
이들의 발견은 워싱턴주 경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실종 사건들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의 살인마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연쇄 살인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들의 두개골에는 공통적으로 둔기에 의한 강력한 타격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번디가 피해자를 제압할 때 사용했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번디는 왜 굳이 험준한 테일러산까지 시신을 옮겼는가? 프로파일러들은 이를 번디의 '통제욕'과 '사후 점유' 본능으로 해석한다. 번디는 단순히 시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여성들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비밀 장소에 '수집'해 두었던 것이다.
실제로 번디는 체포 후 진술에서 시신을 유기한 뒤에도 수차례 테일러산을 다시 찾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부패해가는 시신 옆에서 식사를 하거나, 시신에 화장을 해주고, 심지어는 시신과 성관계를 맺는 등 극도의 네크로필리아적 행태를 보였다. 그에게 테일러산은 범죄의 흔적을 지우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환상을 완성하는 '전시관'이었던 셈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들이 대부분 머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번디는 시신의 머리를 따로 잘라 보관하거나 이동시키는 것에 집착했는데, 이는 피해자의 인격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적 집착의 발현이었다.
유골 발견 당시 수사팀은 처참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수색에 참여했던 한 형사는 훗날 "숲 전체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찼으며, 낙엽 하나를 들출 때마다 어린 여성들의 꿈이 조각난 채 발견되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유골만으로는 범인을 특정하기에 부족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DNA 감정이 불가능했고, 오로지 치아 기록과 골격 구조만으로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번디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지문은커녕 옷가지조차 남기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소지품은 모두 다른 곳에 폐기하거나 소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산의 발굴은 수사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켰다. 이제 경찰은 '실종 사건'이 아닌 '살인 사건' 수사팀으로 재편되었으며, '테드'라는 인물에 대한 수사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특히 번디의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 클로퍼가 제보했던 내용 "내 남자친구의 차에 깁스가 있고, 이름이 테드이며, 폭스바겐을 탄다"이 단순한 의심이 아닌 실체적인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
테일러산에서 발견된 4구의 유골 외에도, 그 근처에는 더 많은 희생자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았다. 번디는 사형 집행 직전까지 자신의 범행 장소를 '할부'로 공개하며 수사관들과 밀당을 벌였는데, 그는 테일러산 외에도 '아이사쿠아(Issaquah)' 등 인근 지역에 더 많은 시신을 유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낮에는 법대 진학을 꿈꾸며 사회복지 활동을 하던 청년이, 밤에는 시신들이 썩어가는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기괴한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2.13. 첫 번째 체포와 유죄 판결[편집]
"그는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선 주인공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이 수많은 여성을 도륙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국가 권력에 탄압받는 지식인 코스프레를 즐기고 있었죠."
테드 번디의 범죄 행각이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결정적인 변곡점은 바로 1974년 11월 8일, 유타주 머레이(Murray)의 패션 플레이스 몰에서 발생한 '캐럴 다론치(Carol DaRonch) 유괴 미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번디가 저지른 수많은 범행 중 드물게 피해자가 생존하여 증언을 남긴 사례였으며, '완벽한 범죄'를 꿈꾸던 번디의 오만함이 무너지는 첫 번째 균열이었다.
1975년 8월 16일 새벽, 유타주 고속도로 순찰대원 로버트 헤이워드(Robert Hayward)는 솔트레이크시티 인근 그레인저(Granger) 지역을 순찰하던 중 수상한 폭스바겐 비틀 한 대를 발견한다. 운전자는 헤이워드의 순찰차를 보자마자 전조등을 끄고 골목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끈질긴 추격 끝에 정차하게 된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단정한 외모의 28세 청년, 바로 테드 번디였다.
당시 헤이워드 경관은 단순히 음주운전이나 단순 절도범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차 안을 수색하며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차량 내부에서는 스키 마스크, 구멍 뚫린 스타킹, 쇠지게(Crowbar), 수갑, 로프, 그리고 갈아 끼울 수 있는 여분의 옷 등이 쏟아져 나왔다. 번디는 "낚시 도구일 뿐"이라며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현직 법대생이 새벽에 이런 물건들을 싣고 도주하려 했다는 점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이것이 훗날 전 미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의 공식적인 첫 번째 체포 기록이다.
경찰은 번디의 차에서 발견된 수갑과 도구들이 1년 전 발생했던 캐럴 다론치 납치 미수 사건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다론치는 경찰관을 사칭한 남자에게 속아 차에 탔다가, 남자가 수갑을 채우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해 탈출에 성공한 바 있었다.
라인업(범인 식별 절차) 현장에서 다론치는 수많은 남성 중 주저 없이 테드 번디를 지목했다. "저 눈이에요. 저 차가운 눈을 잊을 수 없어요." 번디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이용해 다론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려 들었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녀의 기억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증언은 번디를 법정 구속시키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이 되었다.
1976년 2월 23일, 유타주 법정에서 열린 납치 및 가중 처벌 폭행 혐의 재판은 이후 벌어질 '번디 쇼'의 전초전이었다. 번디는 변호인단을 불신하며 자신이 직접 변호에 관여하려 들었다. 그는 법정에서 깔끔한 정장을 입고 시종일관 미소를 띠었으며, 자신은 유망한 법대생이자 정치인 지망생으로서 경찰의 표적 수사에 희생된 가련한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그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을 향해 "법률적 근거가 부족한 억지"라며 비웃었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대중의 관심을 즐기는 듯한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판사 스튜어트 핸슨(Stewart Hanson)은 그의 연기에 속지 않았다. 핸슨 판사는 번디의 차량에서 발견된 물건들이 범죄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며, 생존자 다론치의 증언이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76년 3월 1일, 법원은 테드 번디에게 납치 및 가중 처벌 폭행 혐의로 1년에서 15년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비록 이때까지는 그가 수십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라는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부족했기에 살인죄로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이 판결로 인해 번디는 처음으로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힌 채 유타주 교도소에 수감된다.
재판 결과가 발표되자 번디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항소 의사를 밝혔다. 그는 수감 생활 중에도 다른 죄수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도서관에서 법전을 파고들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전략을 짜는 데 몰두했다. 특히 이 시기 그는 유타주뿐만 아니라 콜로라도주에서 발생한 카린 캠벨(Caryn Campbell)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반적인 범죄자들보다 똑똑하다고 믿었기에, 경찰의 검문에서도 도망칠 수 있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탈출 본능과 도주 행위가 오히려 경찰의 의구심을 샀고, 이는 그를 법정에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 번디의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 클로퍼는 경찰에 제보를 반복하며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번디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히자, 그를 둘러싼 '법대생 미남'이라는 환상은 서서히 걷히고 그 뒤에 숨겨진 추악한 본성이 만천하에 드러날 준비를 마치게 된다.
2.14. 첫 번째 탈옥 [편집]
"그는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철저한 보안과 감시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이 공부하던 법률 서적 사이에서 자유를 향한 길을 찾아냈다."[20]
테드 번디의 범죄 행각에서 가장 영화 같으면서도 수사 당국을 경악케 했던 지점은 바로 그의 '탈옥'이다. 특히 1977년 6월 7일, 콜로라도주 애스펜에서 벌어진 첫 번째 탈옥은 번디라는 인물이 가진 지능적인 면모와 대담함, 그리고 공권력의 안일함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희대의 촌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번디는 단순한 연쇄살인마를 넘어, 국가 시스템 전체를 조롱하는 '불사조'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 그에게 열광하는 기괴한 팬덤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테드 번디는 유타주에서 저지른 캐롤 다론치 납치 사건으로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었으나, 콜로라도주에서 발생한 카린 캠벨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이송된 상태였다. 번디는 여기서 특유의 쇼맨십과 지적 허영심을 발휘한다. 그는 국선 변호인을 거부하고 '자기 변호(Pro Se)' 권리를 주장했다.
법원은 그의 학력을 인정하여 이 이례적인 요청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피고인이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법률 연구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법원은 번디에게 수갑을 차지 않은 채로 피트킨 카운티 법원 2층에 있는 법률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번디에게 도서관은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외부 세계로 통하는 '탈출구'였다.
번디는 탈옥을 결심한 순간부터 자신의 신체를 도구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감옥 배급 식사를 거부하거나 최소한만 섭취하며 급격하게 살을 뺐다. 이는 좁은 틈을 통과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수사관들에게 '재판 스트레스로 인해 쇠약해진 피고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 경계심을 늦추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탈옥 당일인 6월 7일, 번디는 평소와 다름없이 법률 도서관으로 향했다. 간수들은 그가 몇 시간 동안 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잠시 혼자 공부하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주었다. 번디는 간수들이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는 틈을 타, 미리 봐두었던 도서관 2층의 대형 창문으로 향했다.
번디가 노린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거나, 혹은 그가 미리 느슨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창문을 열고 약 25피트(약 7.6미터) 아래의 지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이는 자칫하면 다리가 부러져 현장에서 검거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번디는 가볍게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착지 직후 그는 미리 준비해둔 평상복(등산객 복장)으로 갈아입어 죄수복의 흔적을 지웠다. 애스펜은 당시에도 유명한 휴양지였기에, 배낭을 메고 등산복을 입은 젊은 남성은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법원 바로 뒤편에는 험준한 산악 지형인 '애스펜 마운틴'이 펼쳐져 있었고, 번디는 그 숲속으로 순식간에 몸을 숨겼다.
번디가 사라진 사실을 간수들이 알아차린 것은 그가 창문을 넘고 15분이 지난 뒤였다. 즉시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애스펜 전역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지만, 번디는 이미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번디의 계획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지적으로는 뛰어났으나 야생에서의 생존 기술은 전무했다. 6월의 산속은 밤이 되면 영하에 가까운 기온으로 떨어졌고, 급격한 체중 감량으로 체력이 고갈된 번디에게 추위와 허기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는 버려진 산장들을 돌며 음식을 훔쳐 먹고 옷가지를 보충하며 연명했으나, 점점 판단력이 흐려졌다.
탈옥 6일째 되던 날, 번디는 결국 산에서 내려와 차를 훔쳐 도주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극도의 피로와 수면 부족 상태에서 운전하던 그는 비틀거리는 주행 패턴 때문에 순찰 중이던 경찰관의 눈에 띄었고, 짧은 추격전 끝에 다시 수갑을 차게 된다. 검거 당시 번디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며, 경찰에게 "어차피 다시 나갈 것이다"라는 오만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첫 번째 탈옥 사건은 미국 사법 시스템에 엄청난 망신을 안겨주었다. '희대의 살인마'를 도서관 창문 하나 단속하지 못해 놓쳤다는 사실에 대중은 분노했고, 동시에 번디의 '탈출 능력'에 대해 기묘한 경외감을 갖는 이들도 생겨났다.
번디 본인에게 이 사건은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스템을 탈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선민의식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그는 다시 수감된 직후부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한 '두 번째 탈옥'[21]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2.15. 두 번째 탈옥[편집]
"그는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그가 감옥 안에 있다고 믿었지만, 그는 이미 수백 마일 밖에서 새로운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22]
1977년 6월, 콜로라도주 아스펜 법원에서 대담하게 뛰어내려 첫 번째 탈출을 감행했던 테드 번디는 불과 6일 만에 검거되었다. 하지만 이 실패는 그에게 좌절이 아닌 '학습'의 기회가 되었다. 다시 수감된 글렌우드 스프링스(Glenwood Springs) 감옥에서 번디는 더욱 치밀하고, 더욱 비현실적인 두 번째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 챕터에서는 미국 범죄사상 가장 황당하면서도 완벽했던 탈옥 사건의 전말을 다룬다.
첫 번째 탈출 실패 이후 번디는 엄격한 감시 속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 안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급격한 체중 감량을 시도했다. 겉으로는 재판에 대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비춰졌으나, 실상은 감옥 천장의 좁은 틈을 통과하기 위해 몸의 부피를 줄이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는 몇 달 만에 약 10kg 이상의 체중을 감량하여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교도관들은 그가 기력을 잃고 포기한 줄 알았으나, 번디는 매일 밤 감방 천장에 위치한 조명 시설 주위를 관찰하며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입수한 쇠톱 날을 이용해 천장의 철판을 조금씩 갉아내기 시작했다.
탈출의 디데이(D-Day)는 1977년 12월 30일 밤으로 정해졌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교도소의 경계가 느슨해질 것을 노린 것이다. 번디는 자신의 침대에 베개와 옷가지, 그리고 책들을 쌓아두어 마치 사람이 누워 자고 있는 것 같은 '더미(Dummy)'를 만들었다.
밤 9시경, 번디는 미리 작업해둔 천장 조명 구멍을 통해 위층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구멍은 가로세로 약 30cm에 불과했으나, 극한의 다이어트로 마른 그의 몸은 간신히 그 틈을 통과할 수 있었다. 천장 위쪽은 교도소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좁은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고, 번디는 먼지 구덩이 속을 기어 교도소장의 관사로 이어지는 천장까지 도달했다.
번디가 내려온 곳은 다름 아닌 교도소장의 집이었다. 당시 소장 부부는 외출 중이었고, 번디는 소장의 옷장에서 평상복을 꺼내 입으며 완벽하게 위장했다. 그는 정문을 당당히 걸어 나와 미리 파악해둔 경로를 통해 감옥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탈출 직후 그는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를 훔쳐 콜로라도를 벗어나기 위해 질주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차량이 고장 나자, 그는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버스를 타는 등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놀라운 점은 그가 탈옥한 사실을 교도소 측이 무려 17시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이다. 교도관들은 다음 날 오후 점호 때까지 침대 위의 더미를 번디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번디의 탈옥이 확인되었을 때, 그는 이미 콜로라도주 경계를 넘어 시카고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미시간주로 이동했고, 다시 비행기를 이용해 남부인 플로리다주 탤러해시(Tallahassee)로 향했다.
당시 FBI와 주 경찰은 번디가 연고가 있는 서부나 북부로 향했을 것이라 예상하고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벌였으나, 번디는 정반대 방향인 플로리다를 선택하는 역발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명을 사용하며 평범한 대학생인 척 연기했고, 탤러해시의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FSU)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선택은 훗날 미국 연쇄살인사 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 중 하나인 '치 오메가 기숙사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두 번째 탈옥은 단순한 보안 사고를 넘어, 당시 미국의 낙후된 수사 시스템과 교도소 관리 체계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번디는 인간의 심리적 맹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설마 저 좁은 구멍으로 나갔겠어?', '설마 자고 있는 게 아니겠어?'라는 교도관들의 안일함이 괴물을 세상 밖으로 다시 풀어준 꼴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번디는 극도의 흥분 상태(High)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느꼈던 전능감과 두 번의 탈옥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법과 운명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오만함은 플로리다에서 그가 저지른 범죄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무모하고 잔인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천재가 아니다. 다만 우리 시스템이 너무나 게을렀을 뿐이다." 당시 탈옥 사건을 조사했던 수사관의 회고
당시 번디가 탈출한 구멍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사건 직후 수사관들이 "어떻게 성인 남성이 저기로 통과할 수 있느냐"며 직접 시연해보려 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번디는 탈출 전 감방 동료들에게 "나는 곧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고 암시를 주었으나, 동료들은 그가 단순히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시했다고 한다.
이 탈옥으로 인해 미국 전역의 교도소 보안 규정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특히 수감자들의 '더미' 제작을 방지하기 위한 야간 점호 방식이 변경되는 계기가 되었다. [23]
2.16. 플로리다로의 긴 여정[편집]
1977년 12월 30일 밤, 콜로라도주 글렌우드 스프링스의 가필드 카운티 교도소 천장을 뚫고 탈출한 테드 번디는 단순히 인근 산악 지대로 숨어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첫 번째 탈옥 실패를 통해 '지역 수사망'의 무서움을 체감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아예 수사권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의 '대륙 횡단 도주'를 계획했다. 이 챕터에서는 그가 어떻게 삼엄한 경계를 뚫고 플로리다까지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소름 끼치는 대담함과 치밀함을 다룬다.
탈옥 직후 번디가 가장 먼저 직면한 적은 공권력이 아니라 '날씨'였다. 한겨울 콜로라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그는 미리 훔쳐둔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교도소 인근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바로 인근 주택가에서 차량을 절취했는데, 이는 수사팀이 교도소 주변 수색에 집중하는 동안 최대한 멀리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시카고행 기차를 타기 위해 인근 도시로 이동했다. 이때 번디는 자신의 외모를 가리기 위해 안경을 쓰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으며, 법대생 특유의 지적인 말투를 버리고 평범한 여행객의 모습을 연기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 승객과 태연하게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까지 보였다고 한다.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면'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시카고에 도착한 번디는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행선지를 물색했다. 그는 자신이 콜로라도에서 멀어질수록 안전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미시간주 안아버로 향했다. 이곳은 미시간 대학교가 위치한 대학가였기에, 젊은 남성인 번디가 군중 속에 섞여들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번디는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며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새로운 차량을 물색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지도를 살피며 경찰의 검문소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치밀하게 계산했다.[24] 하지만 미시간의 추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고, 그는 본능적으로 따뜻한 남부, 즉 플로리다를 최종 목적지로 정하게 된다.
플로리다에 도착하기 전, 그는 자신을 완전히 세탁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크리스 헤이건(Chris Hage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으로 그는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FSU) 근처의 저렴한 하숙집에 방을 구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장학생 출신으로 잠시 쉬러 온 학생" 혹은 "법대 진학을 준비 중인 청년"으로 소개했다.
놀랍게도 플로리다의 이웃들은 그를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기억했다. 그는 지역 도서관을 자주 방문했고, 근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이 평온한 일상은 그의 내면에 도사린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한 일시적인 정지 상태일 뿐이었다. 그는 매일 밤 대학교 기숙사 주변을 배회하며 새로운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가 특유의 분위기, 즉 젊은 여성들이 방심하고 다니는 환경에서 자신의 범행 능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의 기숙사 지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며, 경찰의 순찰 시간과 학생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번디가 플로리다에 머무는 동안, 콜로라도와 유타의 경찰들은 여전히 그가 서부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믿고 산악 지대를 뒤지고 있었다. 주(State) 경계를 넘는 순간 수사 정보가 단절되는 당시 시스템의 한계 때문이었다. 번디는 신문을 보며 자신에 대한 수사 기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플로리다에서 다시 한번 폭스바겐 비틀을 훔쳤다. 이는 그의 범죄 시그니처와도 같은 차량이었으나, 플로리다 경찰은 이 차량이 서부의 연쇄살인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는 완벽하게 무대 세팅을 마쳤고, 1978년 1월의 차가운 밤, 미국 범죄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 중 하나인 '치 오메가 기숙사 사건'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 긴 여정 동안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일부는 그가 도주 중 끊임없이 빈집털이와 절도를 저질렀다고 추측하며, 다른 이들은 그를 추종하던 여인들이 몰래 건네준 돈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번디의 플로리다 도달은 미국 주 경찰 시스템의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내에서는 주 간 범죄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탈옥 직후 번디가 가장 먼저 직면한 적은 공권력이 아니라 '날씨'였다. 한겨울 콜로라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그는 미리 훔쳐둔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교도소 인근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바로 인근 주택가에서 차량을 절취했는데, 이는 수사팀이 교도소 주변 수색에 집중하는 동안 최대한 멀리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시카고행 기차를 타기 위해 인근 도시로 이동했다. 이때 번디는 자신의 외모를 가리기 위해 안경을 쓰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으며, 법대생 특유의 지적인 말투를 버리고 평범한 여행객의 모습을 연기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 승객과 태연하게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까지 보였다고 한다.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면'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시카고에 도착한 번디는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행선지를 물색했다. 그는 자신이 콜로라도에서 멀어질수록 안전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미시간주 안아버로 향했다. 이곳은 미시간 대학교가 위치한 대학가였기에, 젊은 남성인 번디가 군중 속에 섞여들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번디는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며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새로운 차량을 물색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지도를 살피며 경찰의 검문소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치밀하게 계산했다.[24] 하지만 미시간의 추위는 그에게 콜로라도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고, 그는 본능적으로 따뜻한 남부, 즉 플로리다를 최종 목적지로 정하게 된다.
플로리다에 도착하기 전, 그는 자신을 완전히 세탁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크리스 헤이건(Chris Hage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으로 그는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FSU) 근처의 저렴한 하숙집에 방을 구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장학생 출신으로 잠시 쉬러 온 학생" 혹은 "법대 진학을 준비 중인 청년"으로 소개했다.
놀랍게도 플로리다의 이웃들은 그를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기억했다. 그는 지역 도서관을 자주 방문했고, 근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이 평온한 일상은 그의 내면에 도사린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한 일시적인 정지 상태일 뿐이었다. 그는 매일 밤 대학교 기숙사 주변을 배회하며 새로운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가 특유의 분위기, 즉 젊은 여성들이 방심하고 다니는 환경에서 자신의 범행 능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의 기숙사 지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며, 경찰의 순찰 시간과 학생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번디가 플로리다에 머무는 동안, 콜로라도와 유타의 경찰들은 여전히 그가 서부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믿고 산악 지대를 뒤지고 있었다. 주(State) 경계를 넘는 순간 수사 정보가 단절되는 당시 시스템의 한계 때문이었다. 번디는 신문을 보며 자신에 대한 수사 기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플로리다에서 다시 한번 폭스바겐 비틀을 훔쳤다. 이는 그의 범죄 시그니처와도 같은 차량이었으나, 플로리다 경찰은 이 차량이 서부의 연쇄살인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는 완벽하게 무대 세팅을 마쳤고, 1978년 1월의 차가운 밤, 미국 범죄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 중 하나인 '치 오메가 기숙사 사건'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 긴 여정 동안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일부는 그가 도주 중 끊임없이 빈집털이와 절도를 저질렀다고 추측하며, 다른 이들은 그를 추종하던 여인들이 몰래 건네준 돈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번디의 플로리다 도달은 미국 주 경찰 시스템의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내에서는 주 간 범죄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2.17. 치 오메가(Chi Omega) 기숙사 참극[편집]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맹수가 우리에 갇힌 양들을 찢어발긴 것과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의 축제였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탤러해시 경찰국 수사관의 회고. 현장은 그야말로 피바다였으며, 베테랑 수사관들조차 구토를 참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고 전해진다.
1978년 1월 15일 새벽, 플로리다 주립대학교(FSU)의 여대생 기숙사인 '치 오메가(Chi Omega)' 하우스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테드 번디의 범죄 행각 중 가장 잔혹하고 파괴적이었다.
사건 당일 새벽 2시 45분경, 번디는 치 오메가 기숙사의 뒷문을 통해 안으로 침입했다. 당시 기숙사의 뒷문 도어락은 고장 난 상태였고, 이는 번디에게 너무나도 쉬운 '사냥터'를 제공했다. 그는 손에 참나무 땔감 뭉치를 둔기 삼아 들고 있었으며, 어둠 속에서 숨소리조차 죽인 채 복도를 지나 2층으로 향했다.
그는 마치 익숙한 장소를 걷듯 망설임 없이 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당시 기숙사에는 수십 명의 여학생이 잠들어 있었으나, 번디가 선택한 방은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조용한 방들이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잠들어 있던 마거릿 보먼(Margaret Bowman)이었다.
번디는 마거릿 보먼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머리를 땔감 뭉치로 내리쳤다.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다. 그는 기절한 보먼의 목을 나일론 스타킹으로 조르며 가학적인 행위를 이어갔고, 결국 그녀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번디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옆방의 리사 레비(Lisa Levy)가 두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번디는 레비를 무참히 폭행한 뒤 성고문을 자행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레비의 왼쪽 둔부에 남긴 깊은 치아 자국(Bite Mark)은 훗날 그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25] 번디는 그녀를 무참히 살해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빠져나와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광기에 휩싸인 번디는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캐시 클라이너(Kathy Kleiner)와 카렌 챈들러(Karen Chandler)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번디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둔기로 가격했다. 클라이너는 턱뼈가 부서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으며, 챈들러 역시 두개골 골절과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천만다행으로, 이때 기숙사 근처를 지나던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창문을 비추었고, 번디는 누군가 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 불빛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 역시 앞선 희생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극적으로 생존하여 훗날 재판에서 번디의 악마성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
치 오메가 기숙사를 빠져나온 번디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셰릴 토머스(Cheryl Thomas)의 자취방에 무단 침입했다. 그는 잠들어 있던 토머스를 둔기로 무차별 폭행했다. 토머스는 청각을 상실하고 평형 감각에 장애를 입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얻었으나 목숨은 건졌다.
현장에는 번디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매듭진 스타킹 마스크가 남겨져 있었으나, 당시 플로리다 경찰은 이것이 서부 지역에서 수배 중인 '테드 번디'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지역 내의 미친 괴한이 벌인 소동 정도로 치부하는 우를 범했다.
범죄 심리학자들은 치 오메가 학살을 번디의 범죄 생애에서 '통제력의 완전한 상실' 단계로 분석한다. 이전까지의 번디는 피해자를 유인하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등 치밀한 계획 하에 움직였으나, 탈옥 후의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처럼 극도로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을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선혈이 낭자한 기숙사 내부가 공개되자 플로리다 주립대학교는 물론 미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다. 여대생들은 외출을 삼갔고, 기숙사마다 무장 경비원이 배치되는 등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하지만 번디는 이미 탤러해시를 떠나 플로리다 서부로 도주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번디에게 '사악함의 화신'이라는 낙인을 찍었으며, 대중이 그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동정심이나 호기심(잘생긴 법대생이라는 이미지)을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매력적인 청년이 아닌, 밤거리를 배회하며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짐승일 뿐이었다.
2.18. 마지막 피해자 킴벌리 리치[편집]
"그는 더 이상 치밀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굶주림에 미쳐버린 짐승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연약한 제물을 낚아챘다."
치 오메가 기숙사에서의 참혹한 학살극을 저지른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74년 2월 9일, 테드 번디는 플로리다주 레이크 시티(Lake City)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의 범행들이 주로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을 타깃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그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것은 불과 12세의 어린 소녀, 킴벌리 다이앤 리치(Kimberly Diane Leach)였다. 이는 번디의 범죄 행각 중 가장 비극적이며, 동시에 그의 '인간성'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1978년 2월 9일 오전, 레이크 시티 중학교(Lake City Junior High School)는 평소와 다름없는 활기찬 분위기였다. 킴벌리 리치는 학교 행사 준비를 위해 교실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친구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것이 친구들이 본 킴벌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킴벌리가 수업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학교 측은 즉시 부모에게 연락했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학교 근처에서 흰색 밴 근처를 서성이는 '젊고 잘생긴 남성'이 한 소녀의 손을 잡고 차로 인도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당시 목격자들은 그 남성이 소녀의 오빠나 친척인 줄로만 알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탈옥 후 위조 신분증을 사용하며 수사망을 피해 다니던 테드 번디였다.
심리학자들과 프로파일러들은 킴벌리 리치 사건을 번디의 '추락'으로 분석한다. 이전의 번디는 피해자를 유인하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깁스 위장, 도움 요청 등)을 펼쳤으나, 플로리다에서의 그는 마치 마약 중독자가 금단 현상을 겪듯 살인 충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는 대낮에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유괴를 저질렀다. 킴벌리는 번디에게 저항할 힘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번디는 그녀를 인근 주립공원인 수와니 리버(Suwannee River) 근처의 외딴 폐가로 끌고 가 끔찍한 성고문을 가한 뒤 살해했다. 이후 밝혀진 부검 결과에 따르면, 킴벌리는 질식사하기 직전까지 극심한 신체적 학대를 당했으며, 번디는 그녀의 시신을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나뭇가지로 대충 덮어두는 무책임함을 보였다. 이는 시신을 돌보던 과거의 네크로필리아적 세심함조차 사라진, 광기에 찌든 살인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킴벌리가 사라진 후, 레이크 시티 전체는 거대한 슬픔과 공포에 잠겼다.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와 경찰, FBI가 동원되어 인근 숲과 강을 샅샅이 뒤졌지만, 번디가 남긴 흔적은 교묘했다. 킴벌리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동안, 번디는 이미 펜사콜라로 도주하여 또 다른 범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8주 뒤인 4월 7일, 수와니 리버 주립공원 인근의 한 헛간 뒤편에서 싸늘하게 식은 킴벌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이미 심하게 부패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나, 그녀가 입고 있던 학교 체육복과 소지품이 킴벌리임을 증명해주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플로리다 주민들은 분노했고, 범인을 반드시 잡아 사형대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번디는 킴벌리 리치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많은 증거를 남겼다. 그는 훔친 흰색 밴을 이용해 이동했는데, 이 차량의 타이어 자국이 사체 발견 현장 근처의 흙과 일치했다. 또한, 번디가 체포되었을 당시 입고 있던 옷에서 킴벌리의 옷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희귀한 주황색 섬유가 발견되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목격자 클래런스 앤더슨의 증언이었다. 그는 학교 근처에서 번디가 킴벌리를 차에 태우는 것을 목격했으며, 법정에서 번디의 얼굴을 정확히 지목했다. 번디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나는 그 아이를 본 적도 없다"며 발뺌했으나, 과학적 증거와 목격자의 눈은 그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 '아동 유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20대 여성을 노리던 연쇄살인마가 타깃을 어린아이로 바꿨다는 사실은 학부모들을 경악케 했다. 이후 미국 학교 내 보안 시스템이 강화되었고,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육이 정규 과정처럼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이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또한, 킴벌리 리치 사건은 훗날 번디에 대한 재판에서 그에게 두 번째 사형 선고를 안겨주는 결정타가 된다. 치 오메가 기숙사 사건이 '성인 여성에 대한 증오'였다면, 킴벌리 사건은 '방어 능력이 없는 아동에 대한 잔혹 행위'로 규정되어 배심원들이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19. 운명의 검문[편집]
"그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차분했지만, 동시에 굶주린 짐승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당시 번디를 체포했던 데이비드 리 경관의 회고.
1978년 2월 15일 새벽, 플로리다주 펜사콜라(Pensacola)의 조용한 거리는 현대 범죄사에서 가장 극적인 검거 작전의 무대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담한 탈옥, 그리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FSU) 치 오메가 기숙사에서의 참혹한 학살과 12세 소녀 킴벌리 리치 유괴 살해 사건으로 이어지던 테드 번디의 광란의 질주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 챕터에서는 번디가 어떻게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지, 그리고 평범한 교통 검문이 어떻게 세기의 살인마를 굴복시켰는지 상세히 기술한다.
탈옥 후 플로리다로 도주한 번디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과거 워싱턴이나 유타에서 보여주었던 치밀하고 계획적인 범행 수법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로지 살인 충동과 생존 본능만이 남은 짐승과 같았다. 그는 펜사콜라 인근에서 식당 뒷문을 서성이며 남은 음식을 훔쳐 먹거나, 길가에 세워진 차량을 상습적으로 절도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훔친 차량은 오렌지색 폭스바겐 비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전성기(?) 시절 범행의 상징처럼 타고 다녔던 모델과 같은 기종이었다. 번디는 이 차를 몰고 펜사콜라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미 미국 전역에 그의 몽타주가 뿌려졌고, 특히 플로리다 경국(FDLE)은 수사력을 총동원해 '대학가 학살자'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1시 30분경, 펜사콜라 경찰국의 신참급 경관이었던 데이비드 리(David Lee)는 순찰 도중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오렌지색 비틀을 발견했다. 차량은 헤드라이트를 끄고 서행하고 있었으며, 번호판 조회를 해본 결과 도난 차량으로 판명되었다. 리 경관은 즉시 경광등을 켜고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때 번디는 순순히 차를 세우는 듯했으나, 경관이 차 문 근처로 다가오자 갑자기 가속 페달을 밟으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과 주택가를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번디는 필사적이었지만, 지형지물에 익숙한 지역 경찰을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차량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번디는 차에서 내려 육로 도주를 시도했다.
데이비드 리 경관은 차에서 내려 번디를 뒤쫓았다. 번디는 도망치던 중 갑자기 몸을 돌려 리 경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경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권총 벨트에 손을 뻗었다. 이는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경관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하려는 명백한 살인 미수 행위였다.
훗날 리 경관은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고, 힘이 비정상적으로 셌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은 진흙바닥을 구르며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리 경관은 번디의 머리를 팔로 감싸 안고 가슴을 압박하며 제압을 시도했고, 번디는 경관의 손을 깨물며 저항했다. 간신히 권총을 사수한 리 경관이 번디의 복부에 총구를 겨누며 "움직이면 쏜다!"라고 소리친 뒤에야 이 육탄전은 끝이 났다.
당시 번디는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나를 그냥 죽여버려(Kill me)"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범행이 끝났음을 직감한 자의 자포자기이자, 다시는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공포의 표현이었다.
체포 직후 번디는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 헤이건(Chris Hagen)'이라고 속였다. 그는 위조된 신분증 여러 개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취조실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형사들을 농락하려 들었다. 그러나 펜사콜라 수사팀은 그의 침착함이 오히려 수상하다고 판단했다. 일반적인 차량 절도범치고는 지나치게 세련된 말투와 법률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FBI와의 공조 수사를 통해 지문 감식이 이루어졌고, 이 '세련된 절도범'의 정체가 FBI 10대 지명수배자 중 한 명인 테드 번디임이 밝혀졌다. 수사관이 그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수갑을 채울 때, 번디는 잠시 침묵하더니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가 누구든 상관없다. 너희는 증거가 없을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펜사콜라로 오기 전, 치 오메가 기숙사에 남긴 '치아 자국'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그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번디의 검거 소식은 즉시 화이트하우스까지 보고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1974년부터 시작된 4년간의 연쇄 살인 행각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데이비드 리 경관이 그날 밤 그를 놓쳤다면, 플로리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여대생이나 어린 소녀들이 희생되었을 것임이 자명했다.
이 검거는 단순히 한 명의 범죄자를 잡은 것을 넘어, 미국 수사 시스템에 큰 교훈을 남겼다. 주 경계를 넘나드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는 지역 경찰 간의 정보 공유가 필수적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고, 이후 '범죄자 프로파일링'과 '법의학적 증거 수집'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2.20. 마이애미 재판과 기행[편집]
"나는 나 자신의 변호인이다. 그리고 이 재판은 나를 위한 무대다."[26]
1979년 6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테드 번디의 재판은 미국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형사 재판을 넘어, '미디어 서커스'라 불릴 만큼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재판 전 과정이 TV로 생중계된 사건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연쇄살인범의 '얼굴'과 '목소리'가 안방극장으로 실시간 송출되면서, 대중은 공포와 동시에 기묘한 매혹을 느끼는 집단적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재판의 주된 혐의는 1978년 1월 15일 새벽,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FSU) 내 '치 오메가' 여대생 기숙사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상 행위였다. 번디는 불과 15분 만에 기숙사에 침입하여 마거릿 보우먼(Margaret Bowman)과 리사 레비(Lisa Levy)를 살해하고, 다른 두 명의 여대생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다.
검찰은 번디가 이전에 저질렀던 수많은 살인 사건들(워싱턴, 유타, 콜로라도 등)을 직접적으로 기소하기보다는, 가장 명확한 물적 증거와 목격자가 확보된 플로리다 사건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특히 피해자 리사 레비의 신체에 남겨진 '치아 자국(Bite Mark)'은 이번 재판의 승패를 가를 핵심 열쇠였다.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번디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배정된 국선 변호인단이 무능하다고 비난하며, 스스로를 '공동 변호인(Co-counsel)'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판사 에드워드 코워트(Edward Cowart)는 이를 허락했고, 이때부터 법정은 번디의 독무대가 되었다.
번디는 법정 안에서 갈색 정장을 빼입고, 안경을 쓴 채 서류 뭉치를 뒤적이며 지적인 법조인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는 증인들을 직접 신문했으며, 때로는 검찰의 논리를 조롱하거나 판사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TV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살인마라는 낙인 뒤에 숨겨진 '매력적인 청년'의 이미지는 대중의 인지 부조리를 극대화했다.
"그는 마치 로스쿨 졸업 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보였다. 그가 사람을 죽인 괴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당시 재판을 취재했던 현지 기자의 회고
마이애미 법정 밖은 매일 아침 수백 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놀라운 점은 젊은 여성들이 대거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번디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고, 그가 법정에 들어설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는 현대 범죄학에서 말하는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 즉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대상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현상이 대규모로 관찰된 첫 번째 사례였다.
언론들은 시청률을 위해 번디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그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재판 중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작 피해자들의 고통과 유가족의 눈물은 미디어의 화려한 조명 뒤로 가려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번디는 이러한 상황을 즐기듯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하거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2.20.1. 법정 프러포즈[편집]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 이 법정에서요."[27]
테드 번디의 재판은 현대 사법 역사상 가장 기괴한 '쇼'로 기억된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그의 오랜 연인이자 조력자였던 캐럴 앤 분(Carole Ann Boone)과의 법정 결혼식이다. 이 사건은 번디가 가진 소시오패스적 치밀함과 미디어를 이용하는 쇼맨십, 그리고 그에 동조한 한 여성이 보여준 뒤틀린 헌신이 결합된 결정체였다.
캐럴 앤 분은 번디가 1974년 워싱턴주 긴급서비스국(DES)에서 근무할 때 처음 만난 직장 동료였다. 당시 그녀는 이혼 후 아들 제임스를 홀로 키우던 여성이었으며, 번디와는 연인보다는 깊은 유대감을 공유하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번디가 워싱턴주에서 유타주로 이주하고, 이후 연쇄살인 혐의로 쫓기는 와중에도 분은 번디의 결백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번디가 플로리다에서 체포되자 직장까지 그만두고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그의 옥바라지를 전담했다. 번디에게 돈을 전달하고, 변호인단과의 소통을 돕는 등 사실상 번디의 '외부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심리학자는 분이 번디의 수려한 외모와 지적인 이미지에 매료된 '하이브리스토필리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분석한다.
1980년 초, 킴벌리 리치 살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번디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도박을 감행한다. 당시 그는 이미 치 오메가 기숙사 살인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킴벌리 리치 재판에서도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2월 9일, 번디는 캐럴 앤 분을 증인석으로 불러냈다. 겉으로는 그녀의 성품과 자신의 관계를 증언하게 하려는 의도처럼 보였으나, 번디의 진의는 따로 있었다. 번디는 신문 도중 갑자기 화제를 돌려 그녀에게 청혼했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법정 안은 술렁였으나, 이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당시 플로리다주의 주법(State Law)에는 "공판 중 판사 앞에서 양측이 결혼 의사를 밝히고 선언할 경우, 별도의 절차 없이도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된다"는 아주 오래된 조항이 남아 있었다. 번디는 법학도 출신답게 이 해괴한 조항을 찾아내어 판사와 검찰이 손쓸 틈도 없이 법정에서 혼인 신고를 마쳐버린 것이다.
사형수와 그를 믿는 아내의 결합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엄격하게 면회가 통제되는 사형수 감옥 안에서 이들이 임신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플로리다주 교도소는 사형수에게 부부 면회(Conjugal visit)[28]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캐럴 앤 분은 훗날 인터뷰에서 교도관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면회실 구석에서 교도관들이 눈을 감아주는 사이 성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했다. 심지어 면회실 테이블 아래에서 몰래 행위를 가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결국 1982년 10월, 번디의 딸 로즈 번디(Rose Bundy)가 태어났다. 번디는 감옥 안에서 아기 지문이 찍힌 출생 신고서를 받으며 마치 평범한 가장인 양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저지른 소녀 살해 사건들과 대비되어 대중의 극심한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캐럴 앤 분의 맹목적인 믿음은 1980년대 후반, 번디가 사형 집행을 늦추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하나둘씩 자백하기 시작하면서 무너졌다. 분은 번디가 무고하다고 굳게 믿었기에 그를 도왔으나, 번디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수십 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시인하는 것을 듣고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번디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배심원들에게 '가정적인 남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어 형량을 줄이려 하거나,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도구'로 자신을 이용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사형 집행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86년, 번디와 이혼하고 딸 로즈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번디의 마지막 면회 요청도 거절했으며, 이후 평생을 가명으로 숨어 살았다.
전문가들은 번디의 법정 결혼을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사형 선고를 내리려는 배심원들에게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다"라는 인간적인 면모를 호소하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모든 주도권이 사법부에 넘어간 상황에서, 법의 허점을 이용해 판사를 당황시킴으로써 "여전히 이 게임의 지배자는 나다"라는 오월한 우월감을 느끼려 한 것이다.
결국 이 결혼은 번디의 법정 재판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였으나, 동시에 그가 타인의 감정을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2.20.2. 결정적인 물적 증거와 법치의 승리[편집]
"이 자국은 테드 번디의 치아와 100% 일치합니다. 이것은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서명입니다."[29]
테드 번디의 수많은 재판 과정 중에서도 가장 극적이었고, 현대 법의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이정표로 남은 순간이 바로 '치아 자국(Bite Mark) 증거'의 채택이다. 1979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치 오메가(Chi Omega) 기숙사 살인 사건 재판에서, 번디는 자신의 모든 지성과 언변을 동원해 무죄를 주장했으나, 희생자의 신체에 남겨진 기괴하고도 선명한 흔적 하나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특히 수사관들의 눈길을 끈 것은 리사 레비의 왼쪽 둔부에 남겨진 선명한 교흔(咬痕)이었다. 범인은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가학성을 드러내며 그녀의 살점을 강하게 깨물었고, 이 자국은 시간이 지나 사후 강직이 시작되면서 마치 도장을 찍은 듯 선명하게 피부 위에 고착되었다. 당시 플로리다주 검찰청의 래리 심슨 검사는 직감했다. 이것이 번디를 전기의자로 보낼 유일한 '스모킹 건'이 될 것임을.
당시만 해도 치아 자국을 이용한 개인 식별은 법정에서 흔히 쓰이는 기술이 아니었다. DNA 감정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1970년대 후반, 인적 증거(목격자 진술)에 의존하던 수사 기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검찰은 법의학 치과의사인 리처드 수베론 박사를 영입했다.
수베론 박사는 번디가 체포된 후 법원의 명령을 받아 그의 치아 모형을 채득했다. 번디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으나, 결국 강제로 입을 벌려 석고본을 떠야 했다. 조사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번디의 앞니는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특히 윗니 중 하나가 부러지듯 마모되어 독특한 톱니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불규칙한 치열은 리사 레비의 둔부에 남은 상처의 간격, 깊이, 각도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히 일치했다.
1979년 재판장에는 대형 프로젝터가 설치되었다. 수베론 박사는 피해자의 상처 부위를 확대한 사진 위에 번디의 치아 구조를 투명 필름(Overlay)으로 겹쳐 보이는 시연을 했다.
검사: "박사님, 이 상처를 낸 치아의 주인과 피고인의 치아가 일치합니까?"
수베론: "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고유한 마모 패턴은 테드 번디의 것과 동일합니다."
이 순간, 방청객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평소 법정에서 세련된 양복을 입고 미소를 지으며 판사와 농담을 주고받던 번디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이러한 증거는 주관적이며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고 항변했으나, 시각적으로 명확히 드러난 일치 사례 앞에서 그의 논리는 힘을 잃었다.
번디는 자신의 치아가 '평범한 인간의 것'이라고 주장하려 애썼지만, 법의학자들은 번디의 치열이 가진 특수한 비대칭성이 수백만 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나는 고유한 특성임을 입증해냈다. 이는 지문만큼이나 확실한 '생체 인식 증거'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결국 배심원단은 단 7시간 만에 유죄 평결을 내렸다. 판사 에드워드 카워트는 사형을 선고하며 이 치아 자국 증거가 결정적이었음을 명시했다. 만약 이 물증이 없었더라면, 번디는 특유의 조작 능력과 목격자 진술의 허점을 파고들어 또다시 법망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사법 체계에서 '법의학 치과학(Forensic Odontology)'은 정식 수사 기법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교흔 분석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30]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번디 사건에서의 치아 자국은 살인마의 위장된 가면을 벗겨낸 가장 강력한 '진실의 입'이었다.
번디는 사형 집행 전까지도 이 치아 자국 증거를 증오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내 이빨이 나를 배신했다"고 투덜거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두뇌와 언변으로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저지른 물리적 흔적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피해자를 물어뜯으며 느꼈던 그 가학적인 쾌락의 흔적이, 결국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은 범죄학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2.20.3. 사형 선고[편집]
"이 법정은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당신의 행위는 극도로 사악하고(Extremely Wicked), 충격적이며(Shockingly Evil), 비열했습니다(Vile)."[31]
1979년 7월 23일, 6시간이 넘는 장고 끝에 배심원단은 평결을 내렸다. 결과는 모든 혐의에 대한 유죄. '치 오메가' 기숙사에서 발생한 살인 및 살인 미수 사건에 대해 배심원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번디의 죄를 인정했다.
평결이 낭독되는 순간, 법정 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번디는 잠시 턱을 괴고 무표정한 얼굴로 배심원들을 응시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듯 입가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나, 끝까지 '억울하게 희생되는 천재'의 가면을 벗지 않았다.
다음 날인 7월 24일, 양형 선고를 위해 다시 열린 법정에서 에드워드 카워트 판사는 역사에 남을 판결문을 낭독했다. 카워트 판사는 평소 피고인들에게도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번디에게만큼은 단호하고 서늘한 비판을 가했다.
"이 사건의 범행은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한 행위였습니다. 당신은 타인의 고통을 즐겼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자비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법은 당신과 같은 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하고, 그 생명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판결의 핵심은 '전기의자형(Death by Electrocution)'이었다. 플로리다주의 엄격한 법 집행 의지가 투영된 결과였다. 흥미로운 점은 선고 직후 카워트 판사가 덧붙인 말이다. 그는 번디에게 "자네는 아주 영리한 젊은이였네. 좋은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겠지. 나는 자네가 우리 법정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네만, 자네는 다른 길을 택했군."이라며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가 가진 재능을 범죄에 사용한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동시에 드러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법정 밖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번디의 반응은 여전히 기이했다. 그는 선고 직후 자신의 '법적 아내'가 된 캐럴 앤 분[32]과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비극적인 순간마저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엔딩 장면'으로 활용하려 애썼다.
이 선고는 미국 사법 체계가 연쇄살인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악마주의에 던진 엄중한 경고였다. 번디는 즉시 항소할 뜻을 밝혔고, 이때부터 사형 집행을 10년 뒤로 미루게 될 지루하고 치열한 법정 공방의 막이 올랐다. 그는 감옥으로 이송되면서도 취재진을 향해 "나는 무죄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2.21. 사형수로서 보낸 10년의 세월[편집]
"이곳의 시간은 밖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벽은 차갑고, 공기는 무겁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테드 번디다."[33]
1979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친 플로리다 재판에서 연이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드 번디는 레이퍼드(Raiford)에 위치한 플로리다 주립 교도소의 사형수 특별 구역, 즉 '데스 로(Death Row)'로 이송되었다. 그가 1989년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곳에서 보낸 약 10년의 세월은, 단순한 수감 생활을 넘어 미국 사법 체계와의 지루한 수싸움이자, 한 인간이 자신의 파멸을 늦추기 위해 벌인 처절하고도 비열한 연극의 연장선이었다.
번디가 배정받은 독방은 가로 약 1.8미터, 세로 약 2.7미터의 좁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마치 자신의 법률 사무소인 양 행세했다. 그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자신의 재판 기록과 법률 서적을 쌓아두고 밤낮없이 탐독했다. 전직 법대생이었던 그는 교도관들이나 다른 사형수들에게 자신의 법적 지식을 과시하며, 스스로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사형수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대부분의 사형수가 거친 환경에서 자란 강력범이었던 반면, 번디는 깔끔한 외모와 정돈된 말투를 유지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법률적 조언을 해주며 교도소 내의 '비공식 변호사' 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타인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그의 사이코패스적 본능이 극한의 환경에서도 발현된 결과였다.
이 시기 번디의 가장 기괴한 특징 중 하나는 외부와의 끊임없는 소통이었다. 재판이 전국에 중계된 이후, 그는 전 세계에서 날아오는 수천 통의 편지에 파묻혀 살았다. 놀랍게도 그 편지들의 상당수는 그에게 연정을 품은 여성들이 보낸 것이었다. 소위 '하이브리스토필리아'라 불리는 이 현상 덕분에 번디는 감옥 안에서도 외롭지 않았다.
그는 여성 팬들에게 답장을 보내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감성적인 호소를 이어갔다. 그는 감옥 밖의 지지자들을 통해 영양제나 책, 심지어 현금을 공수받기도 했다. 특히 29번 챕터에서 언급된 캐럴 앤 분(Carole Ann Boone)과의 관계는 이 시기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번디가 무고하다고 굳게 믿었으며, 면회 시간을 이용해 감시의 눈을 피해 성관계를 가졌고, 결국 사형수의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하기까지 했다.[34]
표면적으로는 의연한 척했으나, 10년이라는 세월은 번디의 정신과 육체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그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때때로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벽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동료 수감자들은 증언했다. 수려했던 외모는 사라지고, 머리카락은 빠졌으며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죽인 피해자들의 환영을 본다는 소문을 극구 부인했지만, 그가 남긴 일기장이나 편지 곳곳에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묻어났다. 그는 특히 '전기의자'라는 사형 방식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변호인들에게 "인간의 몸에 고압 전류를 흘려보내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며 인권론자 같은 발언을 쏟아냈는데, 정작 자신이 피해자들에게 가한 둔기 폭행과 목 조름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데스 로에서의 10년은 사실상 '사형 집행 정지(Stay of Execution)'를 얻어내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었다. 번디는 유능한 변호사들을 선임하는 동시에 스스로 법률 문건을 작성하며 집행일을 미루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항소에 항소를 거듭하고, 새로운 증거(주로 자신의 정신 이상이나 수사 과정의 절차적 결함)를 제시하며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갔다. 실제로 그는 세 차례나 구체적인 사형 집행 날짜가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집행 몇 시간 혹은 며칠 전에 극적으로 정지 명령을 받아내는 '기적'을 선보였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10년 동안 매번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가 다시 실망하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수감 후반기에 접어들며 모든 법적 수단이 소진되자, 번디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자백'을 거래 카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사관들에게 "내가 죽으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십 명의 시신 위치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될 것"이라며 협박 섞인 제안을 했다.
이 시기 번디는 FBI의 프로파일러 빌 해그마이어(Bill Hagmaier)와 기묘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해그마이어를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부르며,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범죄의 세부 사항들을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한 사이코패스 특유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2.22. 지연 전술[편집]
"사법 시스템은 나를 죽이려 하지만, 나는 그 시스템을 이용해 살아남을 것이다."[35]
번디는 자신의 유죄를 입증한 결정적인 증거들, 특히 치아 자국(Bite Mark)의 증거 능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법정에서 채택된 법의학적 증거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재심을 청구했다.
당시 번디의 국선 변호인단은 그가 스스로 변호를 맡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으나, 항소 단계에 접어들자 번디는 전략을 바꿨다. 그는 실력 있는 변호사들을 대거 영입하거나 그들의 조력을 받아 '절차적 정당성'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술은 실제로 효과를 거두어, 1982년과 1986년에 예정되었던 사형 집행이 집행 불과 몇 시간 혹은 며칠 전에 연기되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번디가 항소 과정에서 가장 주력했던 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를 변호한 것은 실수였으며, 국선 변호인들이 나를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재판 당시 자신이 법정에서 보였던 기행(판사에게 농담을 하거나 증인을 조롱한 행위 등)을 오히려 증거로 채택했다. 즉, "이렇게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을 법정이 그대로 방치하고 스스로 변호하게 둔 것 자체가 헌법 위반"이라는 논리였다.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논쟁은 법조계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피고인이 스스로 변호할 권리(Self-representation)와 국가가 피고인에게 공정한 재판을 보장할 의무 사이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번디는 이 철학적이고 법리적인 간극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수년의 시간을 벌어들였다. 유족들은 번디가 텔레비전에 나와 웃으며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며 "법이 악마를 비호하고 있다"며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항소 기간 중 번디가 보여준 또 다른 기만술은 이른바 '정보 할부 판매'였다. 그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올 때마다 수사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며 넌지시 힌트를 던졌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집행 정지를 끌어냈다.
특히 1986년, 세 번째 사형 집행 영장이 발부되었을 때 그는 전설적인 프로파일러 로버트 레슬러를 불러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나만큼 좋은 표본이 어디 있겠느냐, 나를 죽이는 것은 살아있는 도서관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며 자신의 가치를 흥정의 도구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진심 어린 참회가 아니라, 오로지 전기의자 '올드 스파키'에 앉는 날을 하루라도 미루기 위한 사이코패스 특유의 생존 본능이었다.
번디의 지루한 법정 싸움이 10년 가까이 이어지자, 미국 사회 내에서는 사형 제도와 상소 절차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이 대두되었다. 1970년대 후반만 해도 "범죄자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여론이 일부 있었으나, 번디가 사법 시스템을 조롱하며 살아남는 모습이 생중계되자 민심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플로리다주 정부는 번디 한 명을 감옥에 가둬두고 재판을 유지하는 데 매년 수십만 달러의 세금이 들어간다는 점을 강조하며 연방 법원을 압박했다. "테드 번디는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시민들이 법원 앞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미국 사법부가 흉악범에 대한 항소 절차를 보다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말, 연방 대법원은 번디의 마지막 상고를 최종 기각했다. 더 이상 내놓을 법리적 카드도, 흥정할 정보도 바닥난 상태였다. 번디는 이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지연 전술로 벌어들인 9년의 세월 동안 그는 늙었고, 그를 지지하던 극소수의 추종자들도 떠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은 "포르노그래피가 나를 살인마로 만들었다"는 사회적 책임 전가였으나, 이 역시 대중의 냉소만을 자아냈다.
2.23. 최후[편집]
"짐(Jim),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 사랑을 전해주게."[36]
1989년 1월 24일 화요일 오전 7시 6분(미 동부 표준시), 플로리다주 스타크에 위치한 플로리다 주립 교도소(Florida State Prison)의 사형 집행실. 한때 '연쇄살인의 귀공자'라 불리며 미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고, 수많은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유린했던 테드 번디의 생애가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 챕터에서는 번디의 마지막 24시간과 집행 과정, 그리고 그가 남긴 기괴한 여운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사형 집행 전날인 1월 23일, 번디는 자신이 더 이상 법적인 구제 수단이 없음을 직감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항소와 재심 청구, 집행 정지 신청을 통해 시간을 끌어왔던 그였으나, 연방 대법원까지 그의 마지막 요청을 거부하면서 탈출구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는 마지막 날을 대부분 빌 해그마이어(Bill Hagmaier) FBI 요원과 함께 보냈다. 번디는 해그마이어를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한 유일한 인물'로 여겼으며, 이 마지막 면담에서 그는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끔찍한 범죄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워싱턴주와 유타주에서 저지른 미제 사건들의 시신 유기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자신의 악행을 전시했다. 이는 참회라기보다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업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기를 바라는 사이코패스 특유의 자기과시욕에 가까웠다.
미국의 사형수들은 집행 전날 저녁, 자신이 원하는 메뉴로 '최후의 만찬'을 즐길 권리가 있다. 하지만 번디는 이 권리를 거부했다. 그는 특별한 메뉴를 주문하지 않았고, 교도소 측이 제공한 표준 식단인 스테이크, 달걀 프라이, 해시브라운, 토스트를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밖을 응시하거나, 목사와 함께 기도를 올리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종교에 의지한 것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보다는, 마지막까지 대중에게 '회개한 죄인'의 프라이머시(Primacy)를 심어주려는 고도의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오전 6시 30분, 번디는 머리와 오른쪽 다리의 털을 깎였다. 이는 전기가 몸을 통해 원활하게 흐르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플로리다주 사형수의 상징인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고, 수갑과 발목 고랑을 찬 채 집행실로 향했다.
집행실 안에는 42명의 참관인이 유리창 너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번디를 추적했던 수사관들, 피해자 유족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섞여 있었다. 번디는 의자에 앉혀지기 전 참관석을 훑어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초점이 흐릿했으나 여전히 기묘한 오만함을 품고 있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그는 '올드 스파키(Old Sparky)'[37]라고 불리는 육중한 참나무 의자에 결박되었다. 가죽 끈이 그의 가슴, 팔, 다리를 조였고, 머리 위에는 전도체 역할을 할 구리 전극과 소금물에 적신 스펀지가 담긴 금속 캡이 씌워졌다.
오전 7시 정각, 교도소장 톰 버튼(Tom Barton)이 번디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번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짐(변호사)과 프레드(목사)에게 내 사랑을 전해주십시오"라는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죽음 앞에 직면한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만이 서려 있었다.
검은색 안대가 그의 얼굴을 가렸고, 집행관은 스위치를 올렸다.
첫 번째 충격은 약 2,000볼트의 고압 전류가 번디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몸은 가죽 끈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튀어 올랐으며, 주먹은 꽉 쥐어졌다. 시신에서는 미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 번째 충격은 전압이 낮아지며 그의 몸이 축 처졌고, 다시 한번 전류가 흘러 확인 사살 절차를 밟았다.
오전 7시 16분, 교도소 측 의사가 진찰을 마친 뒤 공식적으로 사망을 선언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괴물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기 위한 길로 들어섰다.
번디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교도소 밖에서는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괴한 풍경이 펼쳐졌다.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Burn Bundy Burn!(번디를 태워라!)"이라는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일부 시민들은 프라이팬을 들고 와서 전기가 흐르는 소리를 흉내 내며 춤을 췄다.
번디의 사망 소식이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폭죽을 터뜨렸다.
이는 연쇄살인마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임과 동시에, '범죄의 오락화'라는 사회적 비판을 낳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 중 한 명은 이 광경을 보며 "내 딸은 돌아오지 않지만, 적어도 이제 세상은 조금 더 안전해졌다"며 눈물을 흘렸다.
번디는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워싱턴주의 타코마 산맥(Mount Rainier)에 뿌려달라고 요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그가 수많은 피해자의 시신을 유기했던 장소 중 하나였다. 죽어서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현장에 머물고 싶어 했던 그의 집착은 마지막까지 소름 끼치는 대목이었다.
법적으로 그의 유언은 수용되었고, 그의 유해는 아무런 표식 없이 산속에 뿌려졌다. 이는 그가 숭배받거나 추모받을 수 있는 어떤 물리적 공간도 남기지 않겠다는 당국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공허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내가 남긴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번디가 수감 초기 일기장에 적었던 문구.
번디의 죽음으로 법적인 심판은 끝이 났지만, 그가 남긴 트라우마와 범죄 수사 기법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그는 죽었으나, 그가 남긴 '평범한 이웃의 가면'이라는 공포는 현대 사회의 심장부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2.24. 사후 분석[편집]
테드 번디가 1989년 1월 24일, 플로리다 주립 교도소의 전기의자 '올드 스파키'에서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심리학계와 범죄학계의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대 범죄 프로파일링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연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번디는 단순히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마를 넘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는 형이상학적 정의를 과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 챕터에서는 사후 진행된 그의 심리 측정 결과와 생전의 행동 패턴을 바탕으로 한 뇌 과학적 추론을 상세히 분석한다.
세계적인 범죄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 박사가 고안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PCL-R)는 테드 번디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사후, 많은 전문가가 번디의 생전 기록, 재판 과정, 인터뷰 영상을 토대로 이 점수를 산출했다.
번디는 이 영역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한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사교적이고 매력적(Glibness/Superficial Charm)이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Grandiose Sense of Self-worth)했다. 재판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며 판사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피해자나 그 가족에 대한 죄책감(Lack of Remorse or Guilt)이 전무했다. 자백 과정에서도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3인칭 시점으로 범행을 묘사하며,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충동성(Impulsivity)과 자극 추구(Need for Stimulation)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위험한 범죄를 통해 아드레날린 분출을 꾀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인 병적 도벽과 관음증은 그가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결과적으로 번디의 PCL-R 추정 점수는 39점(40점 만점) 내외로 평가받는다.[38]
번디의 뇌에 대한 직접적인 부검 결과는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육안상으로 그의 뇌는 지극히 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뇌 기능에는 분명한 결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주목받는 부위는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이다. 이 부위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충동 조절,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담당한다. 번디는 지적인 작업(법학 공부, 정치 활동)을 수행하는 고위 인지 기능은 정상이었으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미러 뉴런' 체계가 사실상 마비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피해자를 인간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물(Object)'로 인식했다. 이는 전전두엽과 감정 중추인 해마/편도체 사이의 연결망이 손상되었거나 선천적으로 빈약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번디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하게 '정상인'의 가면을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격리(Compartmentalization)' 기제가 언급된다. 그는 자신의 살인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완전히 분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낮에는 공화당의 유망주로 활동하고, 밤에는 여성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치는 극단적인 이중성은 그의 뇌가 상황에 따라 감정을 완전히 차단(Shut down)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인지 부조화'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 특유의 신경학적 구조 덕분이었다.
번디의 범죄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과 시신 훼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완벽한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저항하거나 변심할 수 있지만, 시신은 오로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으며 결코 자신을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라고 믿었던 누나)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유기 공포가 '여성을 죽여서라도 내 곁에 묶어두겠다'는 뒤틀린 소유욕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시신의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해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마치 신(God)이라도 된 양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전능감을 맛보았다.
번디 사후에도 '본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유전설은 그의 외조부 새뮤얼 코웰의 폭력성과 기괴한 성격이 유전적 결함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사이코패스 성향은 유전율이 50% 이상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환경설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충격,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가학적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중독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시각이다.
결국 현대 범죄학의 결론은 '장전된 총(유전)의 방아쇠를 환경이 당겼다'는 쪽으로 모인다. 번디는 선천적인 사이코패스 기질을 타고났으며, 그가 처했던 기만적인 가정 환경과 70년대의 사회적 허점이 그를 전무후무한 연쇄살인마로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 직후, 번디의 뇌는 정밀 검사를 위해 적출되었다. 과학자들은 그가 그토록 사악했던 이유를 물리적인 뇌 구조에서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뇌종양도, 눈에 띄는 손상도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인간'의 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대중에게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괴물은 특별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뇌를 가지고도 가장 끔찍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범죄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 박사가 고안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PCL-R)는 테드 번디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사후, 많은 전문가가 번디의 생전 기록, 재판 과정, 인터뷰 영상을 토대로 이 점수를 산출했다.
번디는 이 영역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한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사교적이고 매력적(Glibness/Superficial Charm)이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Grandiose Sense of Self-worth)했다. 재판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며 판사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피해자나 그 가족에 대한 죄책감(Lack of Remorse or Guilt)이 전무했다. 자백 과정에서도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3인칭 시점으로 범행을 묘사하며,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충동성(Impulsivity)과 자극 추구(Need for Stimulation)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위험한 범죄를 통해 아드레날린 분출을 꾀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인 병적 도벽과 관음증은 그가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결과적으로 번디의 PCL-R 추정 점수는 39점(40점 만점) 내외로 평가받는다.[38]
번디의 뇌에 대한 직접적인 부검 결과는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육안상으로 그의 뇌는 지극히 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뇌 기능에는 분명한 결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주목받는 부위는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이다. 이 부위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충동 조절,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담당한다. 번디는 지적인 작업(법학 공부, 정치 활동)을 수행하는 고위 인지 기능은 정상이었으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미러 뉴런' 체계가 사실상 마비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피해자를 인간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물(Object)'로 인식했다. 이는 전전두엽과 감정 중추인 해마/편도체 사이의 연결망이 손상되었거나 선천적으로 빈약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번디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하게 '정상인'의 가면을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격리(Compartmentalization)' 기제가 언급된다. 그는 자신의 살인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완전히 분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낮에는 공화당의 유망주로 활동하고, 밤에는 여성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치는 극단적인 이중성은 그의 뇌가 상황에 따라 감정을 완전히 차단(Shut down)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인지 부조화'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 특유의 신경학적 구조 덕분이었다.
번디의 범죄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과 시신 훼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완벽한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저항하거나 변심할 수 있지만, 시신은 오로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으며 결코 자신을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라고 믿었던 누나)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유기 공포가 '여성을 죽여서라도 내 곁에 묶어두겠다'는 뒤틀린 소유욕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시신의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해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마치 신(God)이라도 된 양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전능감을 맛보았다.
번디 사후에도 '본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유전설은 그의 외조부 새뮤얼 코웰의 폭력성과 기괴한 성격이 유전적 결함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사이코패스 성향은 유전율이 50% 이상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환경설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충격,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가학적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중독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시각이다.
결국 현대 범죄학의 결론은 '장전된 총(유전)의 방아쇠를 환경이 당겼다'는 쪽으로 모인다. 번디는 선천적인 사이코패스 기질을 타고났으며, 그가 처했던 기만적인 가정 환경과 70년대의 사회적 허점이 그를 전무후무한 연쇄살인마로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 직후, 번디의 뇌는 정밀 검사를 위해 적출되었다. 과학자들은 그가 그토록 사악했던 이유를 물리적인 뇌 구조에서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뇌종양도, 눈에 띄는 손상도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인간'의 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대중에게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괴물은 특별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뇌를 가지고도 가장 끔찍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테드 번디는 사이코패스의 정의 그 자체다. 그는 우리가 인간성에 대해 믿고 싶어 하는 모든 선한 가설을 비웃는 존재였다." 넬스 넬슨(Nels Nelson), 번디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심리학자
3. 범죄 수법[편집]
3.1. '위장'과 '심리전'의 잔혹한 변주[편집]
"그는 먹잇감을 쫓는 늑대였지만, 양의 가죽을 쓰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39]
테드 번디의 범죄가 현대 프로파일링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폭력적인 살인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 '위장술'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외모, 학벌, 그리고 사회적 지능을 살인의 도구로 철저히 최적화했다.
번디의 가장 상징적인 수법은 바로 '부상자 위장'이다. 그는 주로 대학 캠퍼스, 도서관, 공원 등 젊은 여성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팔에 가짜 기깁스를 하거나,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그는 서류 가방이나 무거운 책들을 든 채 낑낑거리며 자신의 차량인 폭스바겐 비틀로 향했다. 그리고 주변에 혼자 있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 아주 정중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팔을 다쳐서 이 짐들을 차까지만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이 요청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거칠거나 위협적인 태도가 아닌, 교양 있는 대학생의 모습으로 접근해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부상당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을 '위협적인 남성'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도덕적이고 선의를 가진 여성일수록 잘생긴 청년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심리를 이용했다.
일단 피해자가 차량 근처까지 오면, 번디는 미리 조작해둔 조수석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짐을 싣는 척하며 피해자가 차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유도했다. 그 순간, 그는 숨겨두었던 쇠지렛대(Crowbar)나 둔기로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번디는 동정심뿐만 아니라 '공권력에 대한 복종심'도 이용했다. 그는 가짜 경찰 배지를 소지하거나, 때로는 소방관 혹은 권위 있는 기관의 관계자를 사칭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캐롤 다론치 납치 미수 사건이다. 그는 쇼핑몰에서 다론치에게 접근해 "당신의 차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으니, 확인을 위해 경찰서로 동행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번디는 세련된 정장 차림에 신뢰감을 주는 외모를 하고 있었기에, 피해자는 그가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권위를 사칭할 때 매우 고압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해자를 보호해주는 척하며 안심시키는 '선의의 권위자'를 연기했다. 이는 피해자가 위기 상황임을 인지했을 때 이미 번디의 통제권 아래 놓이게 만드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번디의 1968년식 탄색(Tan) 폭스바겐 비틀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움직이는 살인 공장'이었다. 그는 이 차를 범행에 최적화하기 위해 몇 가지 기괴한 개조를 거쳤다.
그는 조수석 시트를 아예 떼어버렸다. 이는 납치한 피해자를 차 바닥에 눕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피해자가 저항하거나 도망치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수석 쪽의 문 손잡이를 제거하여, 안에서는 절대로 문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일단 차에 타거나 강제로 태워지면 피해자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흔한 차종 중 하나였던 비틀은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 차를 몰고 주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사망을 교란했다.
번디는 피해자를 기절시킨 후, 자신이 미리 점찍어둔 외딴 산악 지대나 숲으로 이동했다. 그는 워싱턴주의 '테일러 산'이나 유타주의 황무지 등을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번디가 수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범행 직후 바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는 법대 수업을 듣고, 공화당 선거 운동을 도우며,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 클로퍼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를 때도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장갑을 착용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피해자의 소지품 중 자신과 연결될 만한 것은 모두 불태우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렸다. 또한, 범행 장소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주거지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을 선택하여 지리적 프로파일링을 어렵게 만들었다.
테드 번디의 범죄가 현대 프로파일링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폭력적인 살인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 '위장술'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외모, 학벌, 그리고 사회적 지능을 살인의 도구로 철저히 최적화했다.
번디의 가장 상징적인 수법은 바로 '부상자 위장'이다. 그는 주로 대학 캠퍼스, 도서관, 공원 등 젊은 여성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팔에 가짜 기깁스를 하거나,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그는 서류 가방이나 무거운 책들을 든 채 낑낑거리며 자신의 차량인 폭스바겐 비틀로 향했다. 그리고 주변에 혼자 있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 아주 정중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팔을 다쳐서 이 짐들을 차까지만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이 요청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는 거칠거나 위협적인 태도가 아닌, 교양 있는 대학생의 모습으로 접근해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부상당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을 '위협적인 남성'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도덕적이고 선의를 가진 여성일수록 잘생긴 청년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심리를 이용했다.
일단 피해자가 차량 근처까지 오면, 번디는 미리 조작해둔 조수석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짐을 싣는 척하며 피해자가 차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유도했다. 그 순간, 그는 숨겨두었던 쇠지렛대(Crowbar)나 둔기로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번디는 동정심뿐만 아니라 '공권력에 대한 복종심'도 이용했다. 그는 가짜 경찰 배지를 소지하거나, 때로는 소방관 혹은 권위 있는 기관의 관계자를 사칭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캐롤 다론치 납치 미수 사건이다. 그는 쇼핑몰에서 다론치에게 접근해 "당신의 차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으니, 확인을 위해 경찰서로 동행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번디는 세련된 정장 차림에 신뢰감을 주는 외모를 하고 있었기에, 피해자는 그가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권위를 사칭할 때 매우 고압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해자를 보호해주는 척하며 안심시키는 '선의의 권위자'를 연기했다. 이는 피해자가 위기 상황임을 인지했을 때 이미 번디의 통제권 아래 놓이게 만드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번디의 1968년식 탄색(Tan) 폭스바겐 비틀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움직이는 살인 공장'이었다. 그는 이 차를 범행에 최적화하기 위해 몇 가지 기괴한 개조를 거쳤다.
그는 조수석 시트를 아예 떼어버렸다. 이는 납치한 피해자를 차 바닥에 눕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피해자가 저항하거나 도망치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수석 쪽의 문 손잡이를 제거하여, 안에서는 절대로 문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일단 차에 타거나 강제로 태워지면 피해자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흔한 차종 중 하나였던 비틀은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 차를 몰고 주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사망을 교란했다.
번디는 피해자를 기절시킨 후, 자신이 미리 점찍어둔 외딴 산악 지대나 숲으로 이동했다. 그는 워싱턴주의 '테일러 산'이나 유타주의 황무지 등을 자신의 '사냥터'로 삼았다.
번디가 수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범행 직후 바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는 법대 수업을 듣고, 공화당 선거 운동을 도우며,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 클로퍼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를 때도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장갑을 착용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피해자의 소지품 중 자신과 연결될 만한 것은 모두 불태우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렸다. 또한, 범행 장소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주거지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을 선택하여 지리적 프로파일링을 어렵게 만들었다.
3.2. 네크로필리아[편집]
"그것은 궁극적인 소유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되었다."
테드 번디의 범죄가 단순한 연쇄살인을 넘어 인륜을 저버린 최악의 악행으로 기록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의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신 성도착증)적 행태에 있다. 일반적인 살인마들이 범행 후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유기하거나 은닉하는 데 급급했다면, 번디에게 살해 행위는 뒤이어 올 '진정한 축제'를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여성들의 시신을 물건처럼 다루었으며,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사후 세계의 '파트너'로서 활용하는 기괴함을 보였다.
워싱턴주 수사팀(Task Force)이 번디의 행적을 추적하며 가장 경악했던 지점은 바로 테일러산 인근의 숲이었다. 번디는 이곳을 단순한 시신 유기 장소가 아닌, 자신만의 '비밀 안치소'로 삼았다. 그는 피해자들을 살해한 후 시신을 숲 깊은 곳, 등산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경사면에 배치했다.
그는 범행 후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난 뒤에도 수시로 이 장소들을 다시 찾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번디는 시신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거나, 화장을 해주고, 새 옷을 입히는 등의 기괴한 의식을 치렀다. 이는 피해자를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완벽한 통제하에 있는 '인형'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시신이 부패하여 백골화가 진행될 때까지 수차례 성관계를 가졌으며, 이는 그가 생명의 온기보다 죽음의 차가움과 정지된 상태에서 더 큰 성적 희열을 느꼈음을 방증한다.
번디는 피해자들의 신체 일부나 유독 아꼈던 소지품을 '전유물'로서 수집하는 고전적인 연쇄살인마의 특성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수집은 훨씬 더 가학적이었다. 그는 최소 4명 이상의 피해자 머리를 절단하여 자신의 아파트로 가져갔다.
당시 그와 동거 중이던 엘리자베스 클로퍼는 집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거나, 번디가 욕실에서 무언가를 지나치게 오래 씻는 모습에 의구심을 품었으나, 설마 그것이 사람의 머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번디는 훗날 자백 과정에서 "시신의 머리를 곁에 두는 것은 그 여성의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정복감을 주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행위는 그가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모품으로만 인식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심리학자와 범죄 프로파일러들은 번디의 네크로필리아적 성향을 그의 극심한 '유기 공포'와 연결 짓는다. 어린 시절 누나로 알았던 사람이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겪은 정체성의 혼란과 배신감은 그로 하여금 '떠나지 않는 존재'에 집착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살아있는 여성은 저항하거나, 자신을 거부하거나,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시신은 절대 거부하지 않으며 살인자의 의도대로만 움직인다.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것을 넘어, 죽음 이후의 존엄성까지 파괴함으로써 번디는 자신이 신(God)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현실의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시신과의 관계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는 와중에도 그는 밖에서는 전형적인 '상류층 지망생'의 모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낮에는 법대 수업을 듣고 정치인들과 악수하며 사회 정의를 논하던 청년이, 밤에는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부패하는 시신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 사회에 거대한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번디의 이러한 습성은 수사팀을 미궁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시신을 한곳에 오래 두지 않고 옮기거나, 야생동물에 의해 훼손되기 쉬운 장소에 유기함으로써 사인을 규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실제로 테일러산에서 발견된 두개골들은 극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번디가 시신을 다시 방문해 '정리'하는 과정에서 현장의 증거들이 오염되거나 소실되었다. 수사관들은 훗날 "우리가 찾은 것은 인간의 흔적이 아니라, 악마가 놀다 버린 잔해들이었다"며 당시의 참혹함을 회상했다.
4. 인간관계[편집]
4.1. 다이앤 에드워즈[편집]
번디의 범죄 심리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전문가가 입을 모아 강조하는 '터닝 포인트'가 바로 이 지점이다. 1967년 봄, 워싱턴 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난 한 여성과의 만남과 이별은 평범한 대학생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번디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열등감과 파괴적인 정복욕을 완전히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앤 에드워즈(Stephanie Brooks/Diane Edwards)[40]였다. 그녀는 번디가 평생을 꿈꿔왔던 '상류층의 우아함' 그 자체였다.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 구김살 없는 성격, 금발에 눈부신 외모, 그리고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그녀는 타코마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인 번디에게 있어서는 감히 쳐다보기 힘든 보석과도 같았다.
번디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그녀가 상징하는 '사회적 지위'에 매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다이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보잘것없는 배경을 철저히 숨겼다. 그는 자신이 훨씬 더 부유한 집안 출신인 것처럼 행동했으며, 지적인 대화를 주도하며 그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었고, 번디는 그녀의 차를 타고 스키 여행을 가거나 상류층 파티에 참석하며 자신이 드디어 꿈꾸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다이앤은 번디를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번디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다이앤의 부모님은 교양 있고 부유했으며, 그들이 누리는 삶의 방식은 번디가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번디는 그들 곁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다이앤은 시간이 지날수록 번디의 내면에 숨겨진 미성숙함과 야망 부족, 그리고 정서적 불안정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번디가 겉으로는 번드르르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당신은 내가 원하는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앤 에드워즈(Stephanie Brooks/Diane Edwards)[40]였다. 그녀는 번디가 평생을 꿈꿔왔던 '상류층의 우아함' 그 자체였다.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 구김살 없는 성격, 금발에 눈부신 외모, 그리고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그녀는 타코마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인 번디에게 있어서는 감히 쳐다보기 힘든 보석과도 같았다.
번디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그녀가 상징하는 '사회적 지위'에 매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다이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보잘것없는 배경을 철저히 숨겼다. 그는 자신이 훨씬 더 부유한 집안 출신인 것처럼 행동했으며, 지적인 대화를 주도하며 그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었고, 번디는 그녀의 차를 타고 스키 여행을 가거나 상류층 파티에 참석하며 자신이 드디어 꿈꾸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다이앤은 번디를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번디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다이앤의 부모님은 교양 있고 부유했으며, 그들이 누리는 삶의 방식은 번디가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번디는 그들 곁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다이앤은 시간이 지날수록 번디의 내면에 숨겨진 미성숙함과 야망 부족, 그리고 정서적 불안정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번디가 겉으로는 번드르르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당신은 내가 원하는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나를 마치 헌신짝처럼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훗날 번디가 회상한 이별의 순간.
이 실연은 번디에게 단순한 슬픔이 아닌, 극심한 '자존감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는 자신이 가난하고 배경이 없어서 버림받았다고 믿었으며, 이때부터 세상을 향한 증오와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가치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별 후 번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잠시 방황하는 듯했으나, 다시 복학하여 심리학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따냈다. 또한 공화당 캠프에 투신하여 정치적 연줄을 만들고, 법대 진학을 준비하며 사회적 지위를 쌓아 올렸다.
이 시기의 번디는 마치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버린 여인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리모델링'했다. 그는 더 이상 타코마의 소심한 청년이 아니었다. 비싼 정장을 입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며, 유력 정치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완벽한 남성'으로 거듭난 것이다.
1973년, 번디는 드디어 다이앤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공한 남자가 되어 돌아온 번디를 보고 다이앤은 다시금 매력을 느꼈다. 두 사람은 재결합했고, 번디는 그녀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결혼까지 약속했다. 다이앤은 번디가 변했다고 믿었고, 그와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이것은 번디가 설계한 가장 정교하고 잔인한 '복수'였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며 다이앤이 번디에게 완전히 헌신하게 된 순간, 번디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의 연락을 피하고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다이앤이 이유를 묻자, 번디는 마치 벌레를 보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다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렸다.
번디는 그녀를 다시 사랑해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느꼈던 그 비참한 거절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 그녀를 자신에게 완전히 중독시킨 뒤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번디의 내면에서 '여성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쾌감'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되기 시작한다.
범죄 프로파일러들은 번디의 초기 피해자들 대부분이 다이앤 에드워즈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 외모: 중앙 가르마를 탄 긴 생머리.
- 신분: 중상류층 가문의 대학생 여성.
- 특징: 지적이고 자립적인 성격.
번디는 다이앤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대신, 그녀와 닮은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응어리진 복수심을 해소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그에게 있어 모든 살인은 '다이앤 에드워즈를 반복해서 죽이는 행위'였던 셈이다.
4.2. 엘리자베스 클로퍼[편집]
테드 번디의 일생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자, 그의 '가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여성이 바로 엘리자베스 클로퍼(Elizabeth Kloepfer)[41]이다. 1969년 10월, 시애틀의 한 바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번디가 사형당하기 직전까지 약 10년간 이어졌으며, 그녀는 번디가 저지른 끔찍한 연쇄살인의 전조와 그 이면의 불안감을 온몸으로 받아낸 산증인이었다.
1969년 가을, 유타주에서 시애틀로 이주한 이혼녀이자 비서로 일하던 엘리자베스(이하 리즈)는 세 살배기 딸을 홀로 키우는 외로운 처지였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찾은 바에서 우연히 테드 번디를 만났다. 당시 번디는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청년이었으나, 리즈의 눈에 비친 그는 "너무나 완벽한 신사"였다.
번디는 리즈의 딸에게 헌신적이었고, 리즈가 겪고 있던 알코올 의존증과 정서적 불안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보호자 역할을 자행했다. 리즈는 훗날 "그와 함께라면 마침내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번디는 리즈의 집에서 사실혼 관계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주변 이웃들은 그들을 잉꼬부부로 생각할 정도로 번디의 연기는 완벽했다.
리즈와 함께하는 동안 번디는 '사랑꾼'의 면모를 보이면서도, 문득문득 섬뜩한 본성을 드러내곤 했다. 리즈가 기록한 번디의 이상 행동들은 훗날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전조 증상'으로 해석되었다.
번디는 종종 밤늦게 집을 나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리즈가 이유를 물으면 그는 산책을 했다거나 공부를 했다고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이웃집 여성들을 훔쳐보거나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시간이었다.
리즈는 번디의 집이나 차 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발견하곤 했다. 여성의 속옷, 깁스용 석고 가루, 목발,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랍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들이었다. 번디는 이에 대해 "연극 소품이다"라거나 "낚시용이다"라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겼다.
리즈는 번디와의 성관계 도중 그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자신을 결박하려 했던 경험을 고백했다. 이는 번디가 가진 성도착증적 성향이 친밀한 관계에서도 조금씩 표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74년 초, 워싱턴주 전역에서 여대생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언론은 범인이 '테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팔에 깁스를 하고 폭스바겐 비틀을 탄다는 몽타주를 배포했다. 리즈는 이 기사를 접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의 연인인 테드 번디, 그가 타는 갈색 폭스바겐, 그리고 가끔 집에서 보이던 석고 가루와 목발까지. 모든 정황이 번디를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실종 사건이 발생한 날 밤마다 번디가 외박을 하거나 늦게 귀가했다는 점은 리즈의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리즈는 결국 1974년 8월, 킹 카운티 경찰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남자친구가 용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제보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리즈의 제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9년 가을, 유타주에서 시애틀로 이주한 이혼녀이자 비서로 일하던 엘리자베스(이하 리즈)는 세 살배기 딸을 홀로 키우는 외로운 처지였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찾은 바에서 우연히 테드 번디를 만났다. 당시 번디는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청년이었으나, 리즈의 눈에 비친 그는 "너무나 완벽한 신사"였다.
번디는 리즈의 딸에게 헌신적이었고, 리즈가 겪고 있던 알코올 의존증과 정서적 불안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보호자 역할을 자행했다. 리즈는 훗날 "그와 함께라면 마침내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번디는 리즈의 집에서 사실혼 관계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주변 이웃들은 그들을 잉꼬부부로 생각할 정도로 번디의 연기는 완벽했다.
리즈와 함께하는 동안 번디는 '사랑꾼'의 면모를 보이면서도, 문득문득 섬뜩한 본성을 드러내곤 했다. 리즈가 기록한 번디의 이상 행동들은 훗날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전조 증상'으로 해석되었다.
번디는 종종 밤늦게 집을 나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리즈가 이유를 물으면 그는 산책을 했다거나 공부를 했다고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이웃집 여성들을 훔쳐보거나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시간이었다.
리즈는 번디의 집이나 차 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발견하곤 했다. 여성의 속옷, 깁스용 석고 가루, 목발,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랍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들이었다. 번디는 이에 대해 "연극 소품이다"라거나 "낚시용이다"라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겼다.
리즈는 번디와의 성관계 도중 그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자신을 결박하려 했던 경험을 고백했다. 이는 번디가 가진 성도착증적 성향이 친밀한 관계에서도 조금씩 표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74년 초, 워싱턴주 전역에서 여대생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언론은 범인이 '테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팔에 깁스를 하고 폭스바겐 비틀을 탄다는 몽타주를 배포했다. 리즈는 이 기사를 접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의 연인인 테드 번디, 그가 타는 갈색 폭스바겐, 그리고 가끔 집에서 보이던 석고 가루와 목발까지. 모든 정황이 번디를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실종 사건이 발생한 날 밤마다 번디가 외박을 하거나 늦게 귀가했다는 점은 리즈의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리즈는 결국 1974년 8월, 킹 카운티 경찰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남자친구가 용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제보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리즈의 제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남자친구 이름은 테드 번디이고, 폭스바겐을 타요. 몽타주와 너무 닮았어요."
"부인, 지금 우리에게 접수된 '테드'라는 이름의 제보만 수천 건입니다. 번디 씨는 법대생에 정당 활동까지 하는 전도유망한 청년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경찰은 번디의 깨끗한 배경에 속아 리즈의 제보를 우선순위에서 제외했다. 리즈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경찰과 FBI에 연락하여 번디의 수상한 행적을 알렸지만, 시스템의 무능은 번디가 유타주로 이동하여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었다.
번디가 유타주에서 실제로 체포된 이후에도, 리즈는 번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번디는 감옥에서도 리즈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당신만이 내 진실을 알아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가스라이팅을 지속했다. 리즈는 그를 신고했다는 죄책감과,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는 착각, 그리고 그가 살인마일 것이라는 공포 사이에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결국 번디가 최종적으로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사형이 확정된 뒤에야 리즈는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알코올 중독 치료와 심리 상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으며, 번디라는 거대한 악의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고통받은 생존자 중 한 명이 되었다.
5. 여담[편집]
- 당시 그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테드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다.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이는 사이코패스가 사회적 카멜레온으로서 얼마나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 15세 무렵, 그는 이웃집 소녀의 실종 사건과 관련하여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42]
- 그는 고교 시절 만난 부유한 친구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초라한 가정 형편에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 수치심은 훗날 금발의 부유한 여대생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는 뒤틀린 동기가 되었다.
5.1. 대중매체[편집]
- 《The Deliberate Stranger》(1986): 번디가 아직 사형 대기 중일 때 방영된 TV 미니시리즈. 마크 하몬이 번디 역을 맡았는데, 번디 본인이 감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외모를 잘 재현했다며 만족해했다는 소름 끼치는 일화가 전해진다.
- 《번디: 연쇄살인마의 초상》(2002): 좀 더 고어하고 날 것의 느낌으로 번디의 범죄 행각에 집중한 영화.
-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 2019): 넷플릭스 제작. 잭 에프론이 주연을 맡아 번디의 '매력적인 가면' 뒤에 숨겨진 악을 묘사했다. 피해자의 시점이 아닌, 그를 믿었던 연인 리즈 클로퍼의 시선에서 서술되어 화제가 되었다.
- 《테드 번디: 연쇄살인마의 고백》(2019): 실제 번디의 육성 인터뷰 테이프를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그가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2. 번디와 폭스바겐 비틀[편집]
"그 차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었다. 번디에게 그것은 완벽한 위장이었으며, 피해자를 가두는 감옥이었고, 증거를 인멸하는 은신처였다."[43]
테드 번디의 범행을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상징물이 바로 1968년형 폭스바겐 비틀(Volkswagen Beetle)이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 차는 '비틀(딱정벌레)'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합리적인 가격과 귀여운 디자인 덕분에 대학생이나 중산층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중적인 차량이었다. 번디는 이 '평범함의 상징'을 자신의 잔혹한 범죄를 완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했다.
번디가 폭스바겐 비틀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한 인물답게 대중이 특정 사물에 대해 갖는 인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당시 폭스바겐 비틀은 '히피'나 '모범적인 대학생'의 전유물과 같았다. 근육질의 머슬카나 어두운 색상의 대형 세단이 주는 위압감이 전혀 없었기에, 여대생들은 비틀을 타고 다가오는 번디에게 경계심을 쉽게 풀었다.
당시 워싱턴주와 유타주 도로에는 수만 대의 비틀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목격자들이 "밝은색 폭스바겐을 봤다"라고 증언해도, 수사 기관이 수천 명의 소유주를 일일이 대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State) 경계를 넘나들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범행을 저질렀던 번디에게, 잔고장이 적고 연비가 좋은 비틀은 최적의 '장거리 이동 수단'이었다.
번디의 비틀은 겉보기엔 평범했지만, 그 내부는 '움직이는 고문실'로 철저히 개조되어 있었다. 그는 범행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수석 좌석을 떼어내는 기행을 저질렀다.
조수석 의자를 아예 탈거하여 바닥에 눕혀놓음으로써, 납치한 피해자를 차량 바닥에 눕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숨길 수 있었다. 또한, 피해자가 정신을 차리고 저항하더라도 손잡이나 문을 잡고 도망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장치였다.
조수석 쪽의 문 손잡이를 안에서 열 수 없도록 개조하거나 제거했다는 증언이 있다. 일단 차에 타는 순간, 피해자는 번디의 허락 없이는 결코 내릴 수 없는 폐쇄된 공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좌석 아래나 트렁크 매트 밑에는 항상 쇠지렛대(Crowbar), 수갑, 로프, 마스크, 그리고 시신 훼손을 위한 칼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는 이를 '낚시 도구'나 '비상용 수리 키트'라고 주장하며 검문을 피했다.
1974년 워싱턴주 호수 근처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 당시, 목격자들은 "테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밝은색 폭스바겐 비틀 근처에서 여성들과 대화하고 있었다"라는 결정적인 진보를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 수사망에 걸려든 '테드'라는 이름을 가진 폭스바겐 소유주만 수백 명이었고, 번디는 법대생이라는 신분과 깔끔한 외모 덕분에 용의 선상에서 번번이 제외되었다.
특히 유타주로 이주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차를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범죄 수단인 차를 바꾸지 않는 오만함을 보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능이 수사관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뒤틀린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캐롤 다론치(Carol DaRonch) 납치 미수 사건 당시, 그녀는 번디의 차 내부에서 조수석이 없는 것을 보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다.
번디의 비틀이 수사관들의 손에 들어온 것은 1975년 8월 16일, 유타주 순찰대원 밥 헤이워드에 의한 우연한 검문 덕분이었다. 번디는 심야에 라이트를 끄고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검거되었는데, 수사관들은 차 안에서 여러 물건들을 발견했다.
- 눈 구멍이 뚫린 스키 마스크와 스타킹
- 가정용으로 보기 힘든 강력한 쇠지렛대와 수갑
-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추정되는 얼음 송곳
- 피해 여성들의 옷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미세한 섬유 조각들
이후 과학 수사팀은 차량의 카펫과 시트 틈새에서 실종된 여성들의 머리카락과 혈흔을 찾아냈다. 번디는 차를 팔아치우며 증거 인멸을 시도했으나, 차량 곳곳에 스며든 죽음의 흔적까지는 완벽히 지울 수 없었다. 이 비틀은 훗날 재판 과정에서 번디의 유죄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물적 증거가 되었다.
현재 테드 번디가 몰았던 1968년형 폭스바겐 비틀은 미국의 한 범죄 박물관(Alcatraz East Crim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살인마의 유품을 전시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이 차는 역설적으로 '악의 평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로 남았다.
사람들은 이 귀엽고 작은 차를 보며, 그 안에서 벌어졌을 처참한 비명과 공포를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번디에게 비틀은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가학적 환상을 현실로 구현해 준 파트너이자, 결국 자신의 목을 죄게 된 결정적 증거물이 된 셈이다
5.3. 프로파일러와의 두뇌 게임[편집]
테드 번디가 플로리다주 라이퍼드 교도소의 사형수 대기 명단(Death Row)에 이름을 올리고 집행일을 기다리던 1980년대 중반, 수사 기관 내부에서는 전례 없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바로 신설된 FBI 산하 행동과학부(BSU)[44]의 요원들이 번디를 '살아있는 교과서'로 간주하고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챕터에서는 현대 프로파일링의 전설인 로버트 레슬러(Robert Ressler)와 빌 해그마이어(Bill Hagmaier)가 번디라는 거대한 심연과 마주하며 벌인 치열한 심리전을 다룬다.
당시 FBI는 연쇄살인범들의 심리적 공통점을 찾기 위해 전국 교도소를 돌며 수감자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드 번디는 다른 살인범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범죄학적 지식을 뽐내며 수사관들을 훈계하려 드는 오만함을 보였다.
로버트 레슬러가 처음 번디를 대면했을 때, 번디는 특유의 지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나는 당신들이 찾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레슬러는 노련했다. 그는 번디를 범죄자가 아닌 '전문가'로 대우하며 접근했다. "테드, 당신의 통찰력이 필요하오.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이 전략은 번디의 나르시시즘을 정확히 관통했다. 번디는 본인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제3자' 혹은 '일반적인 살인마'의 심리를 설명하는 척하며, 사실상 자신의 내면세계를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레슬러의 뒤를 이어 번디와 가장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 인물은 빌 해그마이어였다. 해그마이어는 번디가 사형 집행 직전까지 유일하게 신뢰했던 수사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번디를 압박하는 대신, 수백 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그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해그마이어와의 면담에서 번디는 점차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 느꼈던 '완벽한 통제감'과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묘사했다. 해그마이어는 훗날 "번디는 마치 체스 판을 앞에 둔 기사처럼 대화를 주도하려 했다. 그는 상대방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잠시라도 방심하면 내가 심문을 하는 건지 그에게 설득당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번디는 면담 중 결코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사람(The Entity)은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 겁니다"라는 기괴한 화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살인 충동을 '독립된 개체' 혹은 '압력솥의 증기'처럼 묘사했다.
번디의 설명에 따르면, 평소에는 사회적으로 완벽한 생활을 영위하지만 내부에서 '압력'이 차오르면 어느 순간 제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사냥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다시 찾는 행위에 대해 "그것은 단지 성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작품'을 감상하고 그 순간의 통제력을 재확인하는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프로파일러들에게 '냉각기(Cooling-off period)'와 '기념품(Trophy)'의 심리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시기 번디가 보여준 가장 이색적인 행보는 당시 워싱턴주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게리 리지웨이(그린 리버 킬러) 사건에 대해 조언을 건넨 것이다. 번디는 신문을 통해 사건 접하고는 수사팀에 먼저 연락해 "범인을 잡고 싶다면 내 조언을 들어라"고 제안했다.
번디는 리지웨이가 시신 유기 장소를 반복해서 방문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곳에 잠복할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이는 훗날 리지웨이의 범행 패턴과 정확히 일치함이 드러났다. 살인마가 다른 살인마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이 소름 끼치는 공조는, FBI가 범죄자의 심리 분석이 실제 수사에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확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45]
사형 집행일이 다가올수록 번디의 태도는 초조함과 대담함 사이를 오갔다. 그는 해그마이어에게 "빌, 만약 내가 죽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진실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며 자신의 범죄 목록을 '협상 카드'로 쓰려는 비열함을 보였다.
해그마이어는 이 과정에서 번디가 지닌 극도의 고독감을 포착했다. 번디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진심으로 참회하기보다는, 자신의 '위대함(악명이긴 하지만)'이 잊히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프로파일러들과의 대화는 그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동시에 죽음을 늦추기 위한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당시 FBI는 연쇄살인범들의 심리적 공통점을 찾기 위해 전국 교도소를 돌며 수감자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드 번디는 다른 살인범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범행을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범죄학적 지식을 뽐내며 수사관들을 훈계하려 드는 오만함을 보였다.
로버트 레슬러가 처음 번디를 대면했을 때, 번디는 특유의 지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나는 당신들이 찾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레슬러는 노련했다. 그는 번디를 범죄자가 아닌 '전문가'로 대우하며 접근했다. "테드, 당신의 통찰력이 필요하오.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이 전략은 번디의 나르시시즘을 정확히 관통했다. 번디는 본인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제3자' 혹은 '일반적인 살인마'의 심리를 설명하는 척하며, 사실상 자신의 내면세계를 조금씩 흘리기 시작했다.
레슬러의 뒤를 이어 번디와 가장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 인물은 빌 해그마이어였다. 해그마이어는 번디가 사형 집행 직전까지 유일하게 신뢰했던 수사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번디를 압박하는 대신, 수백 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그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해그마이어와의 면담에서 번디는 점차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 느꼈던 '완벽한 통제감'과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묘사했다. 해그마이어는 훗날 "번디는 마치 체스 판을 앞에 둔 기사처럼 대화를 주도하려 했다. 그는 상대방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잠시라도 방심하면 내가 심문을 하는 건지 그에게 설득당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번디는 면담 중 결코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사람(The Entity)은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 겁니다"라는 기괴한 화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살인 충동을 '독립된 개체' 혹은 '압력솥의 증기'처럼 묘사했다.
번디의 설명에 따르면, 평소에는 사회적으로 완벽한 생활을 영위하지만 내부에서 '압력'이 차오르면 어느 순간 제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사냥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다시 찾는 행위에 대해 "그것은 단지 성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작품'을 감상하고 그 순간의 통제력을 재확인하는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프로파일러들에게 '냉각기(Cooling-off period)'와 '기념품(Trophy)'의 심리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시기 번디가 보여준 가장 이색적인 행보는 당시 워싱턴주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게리 리지웨이(그린 리버 킬러) 사건에 대해 조언을 건넨 것이다. 번디는 신문을 통해 사건 접하고는 수사팀에 먼저 연락해 "범인을 잡고 싶다면 내 조언을 들어라"고 제안했다.
번디는 리지웨이가 시신 유기 장소를 반복해서 방문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곳에 잠복할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이는 훗날 리지웨이의 범행 패턴과 정확히 일치함이 드러났다. 살인마가 다른 살인마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이 소름 끼치는 공조는, FBI가 범죄자의 심리 분석이 실제 수사에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확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45]
사형 집행일이 다가올수록 번디의 태도는 초조함과 대담함 사이를 오갔다. 그는 해그마이어에게 "빌, 만약 내가 죽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진실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며 자신의 범죄 목록을 '협상 카드'로 쓰려는 비열함을 보였다.
해그마이어는 이 과정에서 번디가 지닌 극도의 고독감을 포착했다. 번디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진심으로 참회하기보다는, 자신의 '위대함(악명이긴 하지만)'이 잊히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프로파일러들과의 대화는 그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동시에 죽음을 늦추기 위한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1] 테드 번디가 사형 집행 직전 인터뷰에서 남긴 말 중 하나. 자신의 평범함과 지적인 외양 뒤에 숨겨진 악마성을 강조하며 대중을 조롱한 것으로 해석된다.[2] 흉악범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현상.[3] 테드 번디가 사후에 공개된 녹취록에서 자신의 출생 성분에 대해 언급하며 남긴 말. 그는 평생 자신의 뿌리에 대한 결핍과 분노를 범죄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분석이 많다.[4] 이 일화는 번디의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세 살 아이가 칼의 용도와 그것이 주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 소름 끼치는 부분이다.[5] 번디가 훗날 감옥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남긴 진술 중 일부. 그는 외조부의 폭력성을 자신의 내면적 공격성의 원천 중 하나로 꼽았다.[6] 번디의 학창 시절 지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회상한 내용. 당시에는 단순히 내성적인 소년의 기행으로 치부되었으나, 이는 명백한 범죄의 전조 증상이었다.[7] 훗날 번디가 체포된 후,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은 그가 보여준 지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이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연기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8] 당시 번디와 함께 야간 근무를 했던 동료이자 전직 경찰관. 훗날 번디의 일대기를 다룬 명저 《내 곁의 타인(The Stranger Beside Me)》을 집필한다.[9] 당시 워싱턴주 공화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 번디는 살인마의 본능을 숨기고 철저히 '엘리트 정치 지망생'의 가면을 썼다.[10] 훗날 번디가 자신의 유타 시절을 회고하며 남긴 오만한 발언. 그는 자신이 법학 지식을 갖췄기에 경찰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11] 당시 워싱턴 대학교(UW) 근처 거주민의 인터뷰 중 발췌.[12] 훗날 로버트 케플은 번디 수사의 일등 공신이 되며, 감옥에 갇힌 번디를 면담하여 다른 연쇄살인마(그린 리버 킬러)를 잡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한다.[13] 이 대화는 훗날 번디의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입증하는 증언으로 채택되기도 했다.[14] 1974년 11월 8일, 유타주 머레이에서 테드 번디로부터 극적으로 탈출한 캐롤 다론치의 법정 증언 중 일부.[15] 이는 번디가 피해자의 탈출을 막기 위해 개조한 것으로, 그의 범죄가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16] 2015년이 되어서야 과거 발견되었던 작은 뼈 조각이 DNA 분석을 통해 데브라 켄트의 것으로 확인되었다.[17] 당시 콜로라도 수사관이 번디의 범행 궤적을 추적하며 남긴 회고록의 일절.[18] 번디는 사형 집행 직전 이 사건을 자백하며 시신을 콜로라도 강에 던졌다고 주장했다.[19] 수사관들과의 면담에서 번디가 자신의 사체 유기 장소를 회상하며 남긴 소름 끼치는 진술 중 일부.[20] 당시 콜로라도주 피트킨 카운티 감옥의 보안 허술함을 비판하며 지역 언론이 보도한 기사의 일절.[21] 훗날 천장을 뚫고 나가는 전설적인 탈옥 사건으로 이어진다.[22] 당시 글렌우드 스프링스 감옥의 보안 허점을 지적한 현지 언론의 보도 내용 중 일부.[23] 이 사건 이후 미국 교도소에서는 야간 점호 시 반드시 수감자의 피부(살결)를 확인하거나 대답을 듣는 절차가 강화되었다.[24] 번디는 훗날 자백에서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장되면서도 짜릿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법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25] 이 치아 자국은 번디의 고유한 치열 구조와 완벽히 일치했으며, 당시 초기 단계였던 법의학적 치아 감정 기술이 재판에서 승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6] 실제 테드 번디가 플로리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단을 해임하고 스스로 변론권을 행사하며 보였던 태도를 요약한 문장.[27] 테드 번디가 1980년 2월 9일, 플로리다주 올랜도 법정에서 증인석에 앉은 캐럴 앤 분에게 던진 말.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플로리다주의 고대 법률 조항을 이용한 고도의 법적 장치였다.[28] 배우자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면회 제도.[29] 당시 법의학 치과의사였던 리처드 수베론(Richard Souviron) 박사가 법정에서 증언하며 남긴 말.[30] 피부는 신축성이 있어 치아 자국이 왜곡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31] 1979년 7월 24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법정에서 에드워드 카워트(Edward Cowart) 판사가 번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남긴 판결문의 일부분. 이 문구는 훗날 번디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32] 재판 도중 번디가 법적 허점을 이용해 증인석에 앉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즉석에서 결혼을 성립시키는 기행을 저질렀다.[33] 수감 초기 그가 변호인단에게 건넨 오만한 농담 중 하나. 그는 자신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34] 당시 플로리다 주법상 사형수의 부부 면회(Conjugal visit)는 금지되어 있었으나, 번디는 교도관들을 매수하거나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를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35] 실제 번디가 변호인단과의 면담 중 사법 체계의 허점을 비웃으며 내뱉은 오만한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36] 번디가 처형 직전, 자신의 변호사였던 제임스 콜먼(James Coleman)과 감리교 목사 프레드 로렌스(Fred Lawrence)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37] 플로리다주 교도소에서 사용하던 전기 의자의 별명. 수많은 흉악범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38] 참고로 일반적인 연쇄살인범들이 30점 초반대를 기록하는 것에 비하면, 번디는 '순수 배양된 사이코패스'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북미 지역에서는 30점 이상을 사이코패스로 분류한다.[39]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들이 번디의 범행 방식을 회상하며 남긴 공통적인 평가.[40] 테드 번디의 초기 전기에 서술된 '스테파니 브룩스'는 가명이며, 실제 이름은 다이앤 에드워즈로 밝혀졌다.[41] 필명인 '엘리자베스 켄달(Elizabeth Kendall)'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81년 그녀가 출간한 회고록 《The Phantom Prince: My Life with Ted Bundy》는 번디의 사생활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사료로 평가받는다.[42] 1961년 발생한 8세 소녀 앤 마리 버 실종 사건. 번디는 죽기 직전까지 이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많은 범죄 학자들은 그가 이 시기에 이미 첫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43]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들의 공통된 회고. 실제로 번디의 차량 내부에서는 피해자들의 혈흔과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범행에 사용된 도구들이 정교하게 숨겨진 채 발견되었다.[44] Behavioral Science Unit. 현대 범죄 프로파일링의 산실이자 '마인드헌터'들의 본거지.[45] 이 에피소드는 훗날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가 수사관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조언하는 설정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